The Social Cause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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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국 산업혁명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있다. 당시 영국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과 어떤 점에서 독특했고, 그것이 어떻게 산업혁명을 낳았을까? Perkin은 기술적, 경제적 요인, 정치적 요인, 철학적, 지적 요인, 종교적, 정신적 요인을 나열하면서, 이러한 나열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면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W.H.B. Court의 얘기했던 ‘점증하는 부의 제1의 필요조건은 그것을 산출하는 데 필요한 어떠한 종류의 사회라는 기본적이지만 쉽게 잊혀지는 사실’에 주목한다. 쉽게 말해, 영국만이 산업혁명을 산출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종류의 사회적 조건 - 경제적 자원, 정치적 정신적 태도 등 - 을 유일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적절한 종류의 사회적 조건이란 무엇인가? Perkin은 재산(peoperty)과 후원(patronage)에 기반을 둔 ‘열린 귀족정’(open aristocracy)에 주목한다.

첫째로 영국의 귀족은 대륙의 다른 귀족과 달리 ‘봉건 영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땅에 대한 자유로운 권한을 지닌 ‘실질적인 지주’(real owner of the land)였다. 둘째로, 영국의 낮은 위계를 차지하는 것은 ‘봉건적 농노’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땅이나 다른 분야에서의 일을 통해 임금을 받아야 하는 ‘땅없는 일꾼’이었다. 바로 이 두 그룹은 영국만의 유일한 특징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중간 계층의 연속성’이다.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계급(층)간의 간격이 뚜렷했지만, 영국의 계층들은 이웃한 계층 간에 (부의 측면에서) 겹치는 특징(overlap)을 보이면서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형성했다. 대상인, 성직자, 판사들은 그 위의 지주적 귀족(landed gentry)과 재산상 거의 차이가 없었으며, 영세장인, 농부, 상인은 그 아래의 노동빈민(labouring poor)과 재산상 거의 차이가 없었다. 즉, 영국은 엄밀히 말해 계급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호 적대적 의미의) 계급(class) 개념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1]

중간계급은 부의 불평등과 그들의 지위를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당시 사회의 중요한 연결(link)은 계급 내 수평적인 결속보다는 의존(dependency) 또는 후원(patronage)에 의한 수직적 관계였다. 이러한 위계적(수직적)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재산과 후원이다.

첫째, 재산의 경우, 과거 또는 다른 나라와 달리 재산이 지위(status)를 결정했다. 귀족(gentry)은 별 특권이 없었으며, ‘토지의 소유’만이 그들의 지위를 말해줄 뿐이었다. 그들의 계급은 승계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승계하기 위해서는 교육 등이 필요했고, 각각에 대해 비용이 들었다. 한편, 재산이 권력(power)의 분배를 결정했다. 정적권력 또한 재산 순이었다. 즉, ‘형식적으로’ 구성된 정부기관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한 것은 비형식적인(실질적인) 부의 의한 통제였다.

둘째, 후원(patronage)을 살펴보자. 재산 다음에 지위과 권력을 결정한 쌍둥이 요인은 후원이었다. 후원은 18세기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이는 (현대 정당과 같은) 정치적 장치, (능력을 기르고 그에 보상하는) 직업 연결을 위한 장치 그 이상이었다. 후원 또는 ‘수직적 친구’는 봉건적 관계(보다는 덜 형식적인)와 자본주의적 관계(보다는 더 개인적인) 사이에 있는 일종의 옛 충성관계의 그물망이었다. 주인없는 사람(materless man)은 사회에서 소외됐으며, ‘힘있는 친구에 대한 의존’은 모든 계층에서 필수적이었다.

후원은 재산의 또다른 측면이었다. ‘재산의 보호를 위해 정부와 시민사회가 형성됐다’는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바로 당시 영국 사회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여기서 로크의 ‘재산’은 매우 영국적인 개념이다. 봉건사회에서 ‘재산’은 신, 교회, 왕, 영지 내의 사람들에 의해 조건지워지는 상대적인 통치권(lordship) 개념이었던 데 반해, 당시 영국 내에서는 그러한 통치권 개념의 재산 개념이 절대적 소유권(absolute ownership) 개념으로 변한 것이다. (인클로져 운동과 Civil War(1642-46, 1648-52)을 통해 영국 내 지주적 귀족이 농노, 교회, 왕권의 요구를 물리친 결과임)

이 점이 바로 영국사에서의 결정적인 변화였다. 지주는 농노들을 땅없는 노동자로 변모시켰으며, 지주들은 자신의 땅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절대적 소유권은 더 중요한 간접적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바로 계층간의 장벽을 소멸시킨 것이다. 계층간 장벽의 소멸과 함께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을 열정적으로 따라했는데, 이는 바로 열려진 신분상승의 가능성(또는 하락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회적 (신분 및 부) 상승의 희망 또는 하락의 두려움 없이는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생길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영국의 분위기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설명은 처음 나열했던 기술적, 경제적 요인, 정치적 요인, 철학적, 지적 요인, 종교적, 정신적 요인을 모두 설명해주는 한편, 설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요’의 측면까지도 잘 설명해준다. 지속적인 수요 없이는 산업혁명은 유지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임금사용이다. 그들은 채찍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산업혁명의 새로운 상품(옷, 맥주 등)을 구입하기 위해 일을 했다. 즉, 그들은 바로 윗계층을 흉내(‘keeping up with the Joneses')내고자 했으며, 바로 이들이 산업혁명의 수요를 창출해냈다. 이러한 ‘따라하기 붐’은 유럽에서는 부르주아에서 멈췄지만, 영국의 열린 귀족정 하에서는 가장 하위계층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산업혁명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산업혁명 사이의 100년 정도의 간극은 어떻게 설명가능한가? 모든 변화는 원래 시간이 걸린다. 특정한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성장은 느릴 수밖에 없지만, 그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100도에서 물이 갑자기 끓듯)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게 된다. 그 시점이 바로 18세기의 마지막 20년 사이가 될 것이다. 한편, 그 시기까지 구질서의 세대가 남아 저항했다는 점, 인구 등의 조건이 그 시기가 되어서야 적절한 수준을 만족하게 되었다는 점이 보충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각주

  1. 전통적인 소규모 사회에서는 오히려 계급간 적대의 여지가 적었다. 초기의 현존질서에 반하는 행동들은 ‘반항’ 정도로 여겨졌으며,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paternalism)에서의 사회적 규율은 이를 (도덕적으로) 억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