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the History of Science the History Of?
- Peter Dear, “What Is the History of Science the History Of?: Early Modern Roots of the Ideology of Modern Science,” Isis 96 (2006): 390-406.
- 과학의 범주 모호해지면서, 과학사의 integrity 모호해지고 있음.
- “과학사”의 대상은 무엇인가? 현대 과학사와 근대 초 과학사는 다른 분야?
- 근대 초 자연철학은 철저히 사색적인 분야. 자연에 대한 이해, 설명 추구. 사물의 본성과 원인 탐구.
- 단, 자연철학은 다른 지식에 비해 인식적 특권 있었음(의학은 예외)
- 17세기 초, 베이컨은 자연철학을 사색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지식과 관계된 것으로 재정식화. 그는 cause/effect 사이의 추론 관계라는 스콜라 전통의 틀을 빌려옴. 물론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는 오직 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관련되어 있을 뿐, 자연현상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실천과는 무관한 것이었음. 그런데 베이컨은 effect(phenomena)를 살짝 비틀어 자연철학(의 설명적 원리)의 실천적 사용과 등치시킴으로써, 자연철학을 (인간의) 실천과 관계된 분야로 둔갑시킴. 한편, 물질에 mechanical 차원을 덧붙이고자 했음.
- 그러나 17세기 자연철학은 과거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 기계적 철학은 여전히 현상을 (기계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사색적인 분야. 감각 보완하는 도구 찬양했던 후크도 철학적, 사색적 지식의 자리 강조. 그럼에도 자연철학과 효용 사이의 논리적 공약불가능성은 자연철학을 기계적 도구의 용어만으로 말하게 됨으로써 합선되게 됨. 여러 속성과 효과의 보이지 않는 원인은 인간 세계에서 조작적 기계적 효과들을 산출하는 인공물의 축소 버전인 작은 기계들로 귀착됨. “왕립학회는 이론만을 위한 실험을 완전히 거부하진 않지만, 실험들은 주로 그것을 적용하여 현재 방식의 육체 노동을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후크도 자연철학과 효용을 같은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음.
- 자연철학/도구성 사이의 구분은 자연철학/수학 사이의 구분의 외양을 띠곤 했음. 왜냐하면 수학은 보통 실천적 활동과 연결되었고 또한 자연의 질적 본성보다는 표면적 양만을 다루었기 때문.
- 자연철학/수학 사이의 이분법의 감수성은 18세기에도 여전히 존재. 뷰퐁에게 수학이나 분류체계는 “과학적 기예”로서 과학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 자연 자체가 아님. 따라서 수학과 분류체계는 자연철학이 아니라 주장. 그럼에도 뷰퐁은 자연사에서 동물들의 외양을 자세히 묘사하고, 행동, 습성을 관찰한다. 그리고 동물을 인간이 사용하는 법까지도 상술한다. 그에게 자연사는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연결되었고, 이러한 형태의 도구적 지식은 자연철학과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17, 18세기에 자연철학과 도구성을 결합시키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였음. 두 가지 사이에 정착된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음.
- 헉슬리의 “순수” 과학 테제. 사턴의 “새로운 인문주의” 테제. 과학의 본성을 순전히 인식론적인 것으로 보는 과학철학자들. 이들에게 과학은 여전히 “자연철학”임.
- 과학혁명기에 자연철학과 도구성 사이에 이상하고도 불편한 결합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합은 이후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비되고 이론화되었다. 특정한 과학 이론이 그 이론이 작동하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믿음은 상식이 되었다. 과학적 아이디어의 실용적 유효성에 대한 베이컨주의적 믿음은 그 유효성을 다시 자연철학의 타당성에 대한 증거로 이용하도록 만든다.
- 그러나 과학사학자들은 그러한 추론이 실제로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르츠는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기초해 전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헤르츠는 맥스웰의 이론에서 가정된 에테르의 존재도 수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헤르츠의 전파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맥스웰의 에테르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새로운 전자기 이론이 맥스웰 이론의 설명력을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즉 과학적 아이디어의 실용적 유효성은 그것의 자연철학적 타당성에 대한 증거가 되기 힘들다. 그럼에도 과학 이론의 실용적 유효성은 (과학자들에게서조차) 그 이론의 자연철학적 내용을 믿는 근거로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
- 역으로, 자연철학적 논증도 특정 기술의 도구성 성공을 설명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양자역학의 자연철학적 요소인 전자의 파동성은 어떻게 그리고 왜 전자 현미경이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DNA typing은 효과적인 기술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대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의 자연철학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정당화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연철학이 어떤 면에서 세계에 대한 진리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술은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 과학에서 육체/지적 노동 사이의 정언적 구분은 점점 과학 현장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데 설득력이 떨어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분은 여전히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과학의 도구성 파트가 과학의 자연철학 파트로부터 제공된 지식의 단순한 “적용” 문제라고 하는 오랫동안 널리 퍼진 가정은 여전히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과학의 권위는 상당부분 그것이 효과적(powerful)이라는 점, 즉 그것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점에 기대고 있다. 인공위성이나 핵폭탄은 과학의 상징으로 역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인공물들이 과학이 진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정당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다. 이 경우 과학의 도구성은 과학의 전부를 대표한다. 역으로, 과학을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기 위한 권위(자연철학)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앞서 가정되었던 그것의 도구적 효과성으로부터 다시 진리성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 과학에 대한 이러한 양면적 개념화의 총체적인 효과로, 과학의 적법성은 실제적으로 난공불락이 된다. 어떻게 과학의 도구적 능력이 획득되는가? 그것은 과학의 자연철학의 참 때문이다. 어떻게 과학의 자연철학이 애초부터 참인 것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과학의 도구적 능력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도구성의 출처가 되는) 자연철학의 외양으로 표상될 수도 있고, (자연철학 수용의 토대가 되는) 도구성의 외양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과학은 전자 또는 후자로 표상될 수 있지만, 동시에 둘로 표상될 수는 없다. 선택에 따라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게 된다.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리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표상 방식은 서로에게 bootstrapping or alternating 상호 도움을 준다.(하나가 심문 받으면 다른 하나가 도와주고, 다른 하나가 심문 받으면 다시 전자가 도와주는) 그러나 그 둘이 한꺼번에 심문받으면, 전체 그림은 더 이상 말이 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이상한 상황이 바로 현대 과학의 기본 이데올로기(체계적인 오해)를 보여준다.
- 결론: 자연철학은 원래 도구성과 무관했다. 근대 초 시작된 둘 사이의 융합은 스스로 작동하지 못했고, 그것을 문제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수사적 작업이 필요했다. 즉 현대 과학의 도구적 측면은 당연히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우연적인 요소임. 이러한 관점에서는 중세나 중국의 자연철학에서 도구적 측면이 없다는 점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된다. 자연철학은 엄격히 말해 도구성과의 필연적인 연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 만약 “과학”이 명백히 서구 유럽의 문화적 산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자연철학과 도구성 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검토될 수 있다. 여기에 역사서술론적 의의를 부여하자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음. (i) 과학사는 자연철학과 도구성이라는 두 개의 다른 idiom을 반복적으로 사용 (ii) 그 둘이 역사적 행위자들에 의해 규정되고 상황적으로 관계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과학사를 그릴 수 있음. 현대 과학이 현대사와 함께 그 이전의 역사를 가지기 위해 본질적으로 영원한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음. 현대 과학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본래부터 불안정하기 때문에, 과학으로 간주되는 그것은 지속적인 재확립과 재건설을 필요로 한다. 과학사라는 분과는 이제 “과학”이라 불리는 문화적 마법의 특정한 설정을 만들어내고 못 만들어내는 항상적인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 한편으로 과학이 하나의 자연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 “과학”이라는 상징이 문화적으로 정말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우리의 분과를 hyperhistoricizatiion과 essentialist universalism의 쌍둥이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다. 어쩌면 개별 지식 분야들의 집합으로서 복수형의 “과학들”이란 용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수형의 “과학”이란 용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을 지칭할 때만 쓰면서 말이다.
- 이러한 해명은 “과학들의 역사”로 이름을 붙이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국소적 문화적 산물에 대한 연구에 지적 통합성을 복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세계의 이것저것으로부터 현대 과학의 이데올로기에 그것을 관련시키지 않고도 동일한 역사로 통합시켜 준다. 그 이데올로기는 단지 과학의 “도구적”이고 “자연철학적”인 측면의 단순합이 아니다. 그것은 그 둘이 역사적으로 우연적이면서 논리적으로는 긴장을 지닌 방식으로 밀접하게 관계맺는 것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 바로 특히 “서구”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
서론
“과학”에 대한 통상적인 표상과 과학사가들에 의해 연구되는 잡다한 대상들 사이의 불일치는 유럽의 근대 초의 체계적인 모호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 자연철학은 (특히 베이컨에 의해) 관조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지식과 관계된 것으로 재정식화된다. 그로 인한 긴장과 모호함은 18세기 뷰퐁(Buffon)에게서도 나타난다. 19세기 새로이 등장한 “과학”이라는 분야는 자연지식에 대한 불안정한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보여주는데, 그 이데올로기는 사실 근대 초의 발전에 빚진 바가 크다. 현대 과학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상보적이면서 경쟁적인 요소는 “자연철학”과 “도구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과학사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 사이의 shift, 상호 부정, 상호작용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학”의 역사적 우연성
“과학사란 무엇에 대한 역사인가?” 대체 무엇이 과학사에 학문적 독자성을 갖춘 적법한 영역이란 자격을 줄 수 있을까? 최근 과학사 분야가 분명 여러 면에서 성숙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점점 “과학사”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러 영역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 과학사는 점점 사회문화사를 닮아가고 있으며, “과학”이라 부를 실체가 있다는 것도 의심받고 있다. 사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영원한 것도 초월적인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우연적인 역사적 과정에 의해 정립된 것일 뿐이다. 이렇게 “과학”은 역사적 범주가 되었고, 이제 “과학사”는 단일한 대상에 대한 역사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과학 활동이란 확실히 의심의 여지없이 축적적으로 진보하는 유일한 활동”으로, 과학은 일련의 “발견들”에 의해 특징 지워질 수 있다는 조지 사턴의 말은 우리에게 너무 소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사턴의 “새로운 인문주의”와 같은 것은 이제 던져 버려야 하는가? 연속적인 단일한 역사로 탐구될 수 있는 그런 “과학” 활동은 없다고 인정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특히 근대 초 과학을 다루는 역사가에게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역사가들은 용어에 신중을 기한다. 우선 과학 대신 자연철학이란 용어를 쓰며, 오늘날 과학이란 분야에 포함되지만 당시 자연철학에는 포함되지 않는 수학이나 자연사와 같은 것도 분리해서 쓴다.
실제로 따져보면, 근대 초 과학사는 보통 둘 중 하나(또는 둘의 혼합)로 귀착된다. 첫째는 현대 과학과 독립적으로 그 당시의 문화적 활동 자체를 온전한 모습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인류학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현대 과학의 선조의 역사를 추구하는 작업으로, 몹시 까다로운 작업이다. 그러나 과학사가들은 “휘그주의 역사”로 불릴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이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과학사의 integrity는 아마도 후자 쪽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몰역사주의에 빠져 과거와 현재의 피상적인 유사성에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우선 현대 과학의 정확히 어떤 점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지 모호하지 않은 관념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현대 과학의 선조 그 자체에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근대 초 유럽의 이론과 실천
theorica와 practica의 쌍은 수학, 의학 등 여러 지식 분야들에게 적용되던 말이었으나, 자연철학에는 적용되지 않았었다. 당시 표준적 용례에서, theorica는 천문학에서 행성 궤도를 계산하는 방법과 같은 technical apparatus와 관련되어 있었고, practica는 천문학에서 점을 치거나 문제가 되는 날짜를 계산하는 것과 같이 technical apparatus를 사용하여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분야의 일부였다.
17세기 이전까지 “자연철학”은 보통 중세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의미했고, 철저히 관조적인 작업을 지칭했다. 17세기 베이컨이 불만을 제기했던 자연철학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 이해만을 추구할 뿐 기술적 생산이나 물리적 효과의 창조(당시 용례에서 이는 art 또는 techne에 해당)와 같은 실용적 목적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연철학에는 실용적 파트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반대쌍인 “이론적” 파트도 없었다. 즉 자연철학은 theorica/practica로 기술될 수 있는 지식 분야가 아니었다.
과학혁명기의 자연철학이 갖고 있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지식(수학, 천문학 등)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theorica/practica로 개념화될 수 있는 실용적 분과였던 의학은 제도적으로 자연철학보다 상위에 있었다. 즉 실용적인 차원을 가진 분야라고 꼭 자연철학보다 아래의 장인과 같은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은 과학혁명의 의미심장한 전개 양상 중 한 가지를 보여준다. 즉 자연철학이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의 관조적인 자연철학은 작동이 철학적 참의 검증 역할을 담당할 수 있고 작동의 산출이 자연철학의 주요한 정당화 근거로 권장되는 자연철학으로 재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포착하는 말이 바로 “실험철학”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관념은 베이컨의 Advancement of Learning (1605)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는 자연철학을 효용과 연결시켰는데, 그는 자연철학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원인의 탐구/효과의 산출. 사색/조작. 자연의 지식(natural science)/자연의 절약(natural prudence). 그는 자연철학을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대별되는 실용적 차원을 가지는 것으로 제시했는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을 섞어 버린다. 우선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던 분석/종합의 관념 또는 원인/효과 사이의 추론 관계를 끌어들인다. 표준적 관점에서 그것은 오직 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관련되어 있을 뿐, 자연 현상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실천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효과” 또는 현상 개념을 살짝 비틀어 자연철학(의 설명적 원리)의 실천적 사용과 등치시킴으로써, 자연철학을 (인간의) 실천과 관계된 분야로 둔갑시켰다. 이로써 자연철학은 세계에 대한 설명적 성공 여부가 아닌 원하는 효과의 산출 여부에 의해 평가받는 분야로의 새 진로를 획득하게 된다. 베이컨에게 자연철학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원인의 탐구, 다른 하나는 효과의 산출이다. 이 중 전자는 질료인과 작용인을 다루는 물리학과 형상인과 목적인을 다루는 형이상학으로 나뉜다. 베이컨은 “형이상학”을 자연철학의 하위분과로 간주하면서, 목적인의 적절성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형상인은 베이컨 특유의 “형상” 개념(특정한 형식을 산출하기 위한 조작적 규칙들)의 용어로 새로이 이해되었다. 즉 이렇게 변형시킨 형상인을 질료인 및 작용인과 함께 취함으로써, 베이컨은 기존의 자연철학 개념을 부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조작적 사용”을 포함시킨 형태로 자연철학을 재정식화할 수 있었다.
즉 베이컨은 조작적 지식에 남부끄럽지 않은 지적 혈통을 제공하기 위해 자연철학이라 불리는 지식 분야를 새롭게 개념화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작적 지식에 자연철학의 지위와 적법성을 부여하기 위한 그의 이같은 노력은 그의 자연철학이 통상적인 자연철학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말해준다. 베이컨은 (기계공에 의해 수행되는 조작을 뜻하는) “기계적” 방식으로 원하는 속성을 물질 위에 덧붙이는 것을 상상했는데, 그러한 ‘덧붙여진 속성’을 인정하는 일은 사실상 순수 자연철학적 존재자를 축출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후 17세기 성장한 실험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를 완전히 포기하기를 주저했다. 여전히 “자연철학”이란 말은 자연 세계에 대한 관조적인 이해를 주된 목적으로 삼는 활동을 가리키는 데 쓰였고, 그 당시 (물질과 운동 및 기계적인 어법을 썼던) “기계적 철학” 역시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즉 효용, 도구성은 자연철학에 부착되긴 했지만 자연철학의 자리를 찬탈하진 않았다.
17세기 후반, 후크는 Micrographia 서문에서 감각에 대한 도구의 도움을 극찬하긴 했지만, 여전히 철학적, 관조적 지식의 자리를 여러번 강조했다. 특히 자신의 베이컨 프로그램을 “실험철학”으로 기술한 부분에서, 그는 “자연 마술”이나 “자연 기계학(mechanics)”과 같은 다른 이름을 피하면서 사색적이고 관조적이며 높은 지위의 지적인 작업인 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후크는 감각을 (보완하는 도구를) 통해 실제적 목적과 자연철학의 관조적 목적이 융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방법으로, 과거에 통상 Qualities로 여겨졌지만 occult로 드러난 물체의 효과들을 자연의 작은 기계들에 의해 수행된 결과(운동, 모양, 크기의 결과물로 보이는)라고 여길만한 약간의 이유를 가지게 된다. ... 그리고 원래 이러한 탐구는 마음의 관조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자연철학과 효용 사이의 논리적 공약불가능성은 자연철학을 기계적 도구의 용어만으로 말하게 됨으로써 합선되게 된다. 여러 속성과 효과의 보이지 않는 원인은 인간 세계에서 조작적 기계적 효과들을 산출하는 인공물의 축소 버전인 작은 기계들로 귀착된다. “왕립학회는 이론만을 위한 실험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지만, 실험들은 주로 그것을 적용하여 현재 방식의 육체 노동을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후크도 자연철학과 효용을 같은 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수학적 과학의 어려움: 뷰퐁(Buffon)과 “과학적 기예”
17, 18세기 상호 도움을 주지만 분석적으로 구별되는 두 분야 모두 발전했다. 그 중 하나는 자연철학적 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구적이었다. 사실, 이 시기 새로운 분야의 확립을 목도하게 되는데, 그것은 낡은 “자연철학”을 취해서 도구성이란 새로운 용어로 재규정한 분야이다. 19세기 만들어진 현대 과학은 이 분석적으로 동떨어진 노력 사이의 discursive hybrid로 태어난 것이다.
근대 초 유럽의 이분법은 수학과 자연철학이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보통 원인을 다루는 여부에 의존했다. 천문학, 광학, 역학 등의 수학적 과학은 대상의 양만을 다룰 뿐 그 원인을 탐구하지 않았다. 반면 자연철학은 대상의 본성 또는 변화의 원인을 탐구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케플러 때부터 점점 혼동되기 시작하여, 17세기 “physicomathematics” 또는 17세기말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그 혼동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수학적 과학과 (세계에 대한 진정한 물리적 이해를 제공하는) 진정한 자연철학 사이의 기본적 차이를 고수하고 있었다. 예컨대 호이겐스에게 뉴턴의 책은 자연철학 책이라기보다 수학책에 가까웠는데, 왜냐하면 그 책은 중력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호이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불평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기초한 수학과 자연철학 사이의 범주 구분을 따르고 있었다.
18세기 수학적 분야는 17세기에도 그랬듯이 실용적 사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천문학은 항해를, 역학은 엔지니어링에, 기하학은 측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축성학, 건축학, 포격술도 18세기까지 수학적 과학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베이컨 등이 없애고자 했던 자연철학과 도구성 사이의 차이는 흔히 자연철학과 수학 사이의 차이의 외양을 띠곤 했다.
이러한 이분법에 의해 형성된 감수성은 18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했는데, 이는 뷰퐁이란 학자에게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뉴턴의 충실한 후계자로 내세웠는데, 그는 역제곱 법칙의 지위를 두고 다른 수학자 클레로와 논쟁한 바 있다. 클레로가 달의 궤도와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중력 공식에 항을 하나 추가하려고 했던 반면, 뷰퐁은 역제곱 법칙이 개념적으로 근본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응수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자연에 수학적 추론을 적용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입장이 깔려 있었다.
법칙의 수식이 단일한 항으로 표현되지 않을 때마다, 수식의 단순성과 통일성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물리적 법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측정의 문제와 연결시켜보면, 기본적인 물리적 현상을 지배하는 수식의 한 항은 세계의 측정될 수 있는 특정한 어떤 것과 대응되어야 한다. 뉴턴 본인도 달의 운동을 결정짓는 데 역제곱의 중력 외에 다른 힘이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바 있다. 수학에 대한 뷰퐁의 관점은 명확히 구성주의적이며 한 세기 전 토마스 홉스의 논증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 관점은 뉴턴 본인에 의해 놀라울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수학적 대상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재 자체에 대한 얘기를 대체할 수 없다. 즉 수학적 대상은 명백히 인공물이다.
수학적 대상을 자연의 대상과 범주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린네 분류학에 대한 공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위계적으로 조직된 종, 속, 과 등의 범주는 관찰과 명료한 사고에서 적법한 기초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범주를 사용하는 어떠한 분류 체계도 철학적으로 수용될 수 없다. 그의 목적은 자연사를 자연철학의 한 분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사실 뷰퐁은 자연사적 분류를 철학적 이해의 형태로는 의미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수학 역시 진정한 철학의 내용이 결여된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수학이나 분류 체계 자체를 철학이라 착각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기예(art) 또는 방법(method)일 뿐이다. 그 과학적 기예 또는 방법은 과학지식(science) 자체가 아니라 과학지식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뷰퐁에 따르면, “과학적 기예”는 계산이나 분류를 위한 이러저러한 기법일 뿐 진정한 자연철학에 대한 통찰, 즉 사물의 원인이나 본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뷰퐁의 실용적 자연사가 동물들을 상세히 묘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뷰퐁은 분류 범주를 무시하고서 형태, 행동과 습성을 묘사했으며, 특히 인간에 의한 사용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용과 animal products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획득이 제공해주는 동물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뷰퐁의 접근은 자연사를 자연에 대한 일종의 지배로 파악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특정한 형태의 도구적 지식을 자연철학과 함께 붙들어 맸다. 즉 그는 “과학적 기예”를 적절한 자연철학을 산출하는 데 실패한다는 이유로 비판했지만, 그는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도구성, 특정한 임무를 달성하는 실제적 유용성은 자연철학을 찬탈하지 않은 채 자연철학과 밀접하게 결합된다. 이는 17, 18세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전형적인 결합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다양한 과학에서의 자신들의 작업을 때로는 자연철학의 용어로 때로는 도구성의 용어로 얘기할 것이다. 두 가지 표현방식 사이에 정착된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 과학의 이데올로기
19세기 이후 현대 과학의 특징 중 하나는 과학을 근본적으로 자연철학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실용적 기술은 그것의 부산물 이상이 아니다. 최근에도 가끔씩 등장하는 “정화(purification) 논변”의 주창자들은 기술과 너무 밀착되어 가는 과학의 현실을 비판하며, 자연의 이해라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한다. 이들에 따르면 “순수”/“응용” 과학의 구분도 문제가 있다. 1880년 헉슬리의 말에 따르면, 과학은 오로지 “순수” 과학만을 지칭할 뿐이며, “응용 과학”이라 불리는 것은 (순수) 과학의 실제적 적용일 뿐이다. “순수” 과학이라고 하는 헉슬리의 생각은 현대에 과학이 높은 문화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는 과학이 “새로운 인문주의”의 기초라는 사턴의 주장 이면에도 깔려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진정한” 과학은 진리의 발견, 진리에 대한 관조이며, 과학자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 과학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전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다루어왔던 대부분의 과학철학도 이러한 생각에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과학은 여전히 “자연철학”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사학자가 보기에 사태는 그렇지 않다.
과학혁명기에 자연철학과 도구성 사이에 이상하고도 불편한 결합이 이루어졌지만, 그 결합은 이후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비되고 이론화되었다. 특정한 과학 이론이 그 이론이 작동하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믿음은 상식이 되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성공”을 그 이론의 참이나 확률, 근사의 용어로 설명되는 무언가로 간주한다. 과학적 아이디어의 실용적 유효성에 대한 이러한 베이컨주의적 믿음은 그 유효성을 다시 자연철학의 타당성에 대한 증거로 이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과학사학자들은 그러한 추론이 실제로는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헤르츠는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기초해 전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헤르츠는 맥스웰의 이론에서 가정된 에테르의 존재도 수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헤르츠의 전파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맥스웰의 에테르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 새로운 전자기 이론이 맥스웰 이론의 설명력을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즉 과학적 아이디어의 실용적 유효성은 그것의 자연철학적 타당성에 대한 증거가 되기 힘들다. 그럼에도 과학 이론의 실용적 유효성은 (과학자들에게서조차) 그 이론의 자연철학적 내용을 믿는 근거로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다.
역으로, 자연철학적 논증도 특정 기술의 도구성 성공을 설명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양자역학의 자연철학적 요소인 전자의 파동성은 어떻게 그리고 왜 전자 현미경이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DNA typing은 효과적인 기술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대 유전학과 분자 생물학의 자연철학이 그것을 설명해주고 정당화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연철학이 어떤 면에서 세계에 대한 진리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술은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즉, “과학”이라는 무정형의 범주는 다양한 방식으로 효과적인 도구적 기술과 관련된 설명 자원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헉슬리와 같은 방식으로 도구적 유효성을 과학의 자연철학적 내용에 귀속시키는 것은 모든 공학적 성취와 그 지적 내용에 폐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한 성취들은 사실 상호 연관되어 있는 여러 이론적 경험적 기술과 숙련과 연관된 복잡한 노력의 결과물이며, 그중 자연철학적 요소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명백히 “기초 연구”나 “순수 과학”의 직접적인 “적용”의 사례로 보이는 경우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어떤 복잡한 것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작업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작업조차 “순수 과학”/“응용 과학” 관계로 짐작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임을 알게 된다. 사회학자 Michael Mulkay가 이러한 입장을 1979년 논문에서 밝힌 바 있고, 같은 시기 기술사학자 레이튼도 과학에 종속되어 있던 기술과 그 역사를 되찾기 위해 비슷한 입장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이는 과학사와 기술사의 수많은 경험 연구에 기초해 있다. 앤드류 피커링도 “mangle of practice”란 개념으로 실험 과학 자체에 대해 비슷한 지적을 한 바 있다. 과학에서 육체/지적 노동 사이의 정언적 구분은 점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데 설득력이 떨어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구분은 여전히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과학의 도구성 파트가 과학의 자연철학 파트로부터 제공된 지식의 단순한 “적용” 문제라고 하는 오랫동안 널리 퍼진 가정은 여전히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과학의 권위는 상당부분 그것이 효과적(powerful)이라는 점, 즉 그것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점에 기대고 있다. 인공위성이나 핵폭탄은 과학의 상징으로 역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인공물들이 과학이 진짜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정당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정 때문이다. 이 경우 과학의 도구성은 과학의 전부를 대표한다. 역으로, 과학을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기 위한 권위(자연철학)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앞서 가정되었던 그것의 도구적 효과성으로부터 다시 진리성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양면적 개념화의 총체적인 효과로, 과학의 적법성은 실제적으로 난공불락이 된다. 어떻게 과학의 도구적 능력이 획득되는가? 그것은 과학의 자연철학의 참 때문이다. 어떻게 과학의 자연철학이 애초부터 참인 것으로 보이는가? 그것은 과학의 도구적 능력 때문이다. 현대 “과학”은 (도구성의 출처가 되는) 자연철학의 외양으로 표상될 수도 있고, (자연철학 수용의 토대가 되는) 도구성의 외양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 과학은 전자 또는 후자로 표상될 수 있지만, 동시에 둘로 표상될 수는 없다. 선택에 따라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게 된다.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리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표상 방식은 서로에게 bootstrapping or alternating 상호 도움을 준다.(하나가 심문 받으면 다른 하나가 도와주고, 다른 하나가 심문 받으면 다시 전자가 도와주는) 그러나 그 둘이 함께 심문받으면, 전체 그림은 더 이상 말이 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이상한 상황이 바로 현대 과학의 기본 이데올로기(체계적인 오해)를 보여준다.
결론
자연철학은 원래 도구성과 무관했다. 근대 초 둘 사이의 융합은, 세계의 본성에 대한 주장과 그것을 exploit하기 위한 도구적 기술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명시적이고 이론화된 방식의 실험적 실천의 지위 상승에 의해 촉진된 듯하다. 그러나 그 융합은 스스로 작동하지 못했고, 그것을 문제없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수사적 작업이 필요했다.
일단, 이러한 이해는 현대 과학의 도구적 측면을 원래부터 자연스러웠던 것이 아닌 문화적으로 우연적인 요소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중세나 중국의 자연철학에서 도구적 측면이 없다는 점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된다. 자연철학은 엄격히 말해 도구성과의 필연적인 연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고전적인 맑스주의 관점은 관념론적 철학자의 편향된 “자연철학” 관점의 반대쪽 편향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은 기술적 산업적 분야라는 맑시스트 관점에서 조지프 니덤은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에서 약간의 우주론을 다루긴 했지만, 대부분은 기술적 작업을 다루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책에서 자연철학적 차원은 완전히 무시되진 않았지만 대부분 부수현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과학”이 명백히 서구 유럽의 문화적 산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자연철학과 도구성 사이의 일종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서술론적 작업에서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밟아가는 이야기와 우리가 때때로 그리고 싶어하는 “큰 그림”이, 반복되는 특징으로서 이 두 개의 다른 idiom이 사용되고 역사적 행위자들에 의해 규정되고 상황적으로 관계맺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이 현대사와 함께 그 이전의 역사를 가지기 위해 본질적으로 영원한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대신, 그것은 temporal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는 주제로 보여져야 한다. 현대 과학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본래부터 불안정하기 때문에, 과학으로 간주되는 그것은 지속적인 재확립과 재건설을 필요로 한다. 과학사라는 분과는 이제 “과학”이라 불리는 문화적 마법의 특정한 설정을 만들어내고 못 만들어내는 항상적인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과학이 하나의 자연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 “과학”이라는 상징이 문화적으로 정말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우리의 분과를 hyperhistoricizatiion과 essentialist universalism의 쌍둥이 위험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다. 어쩌면 개별 지식 분야들의 집합으로서 복수형의 “과학들”이란 용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단수형의 “과학”이란 용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을 지칭할 때만 쓰면서 말이다.
이러한 해명은 “과학들의 역사”로 이름을 붙이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국소적 문화적 산물에 대한 연구에 지적 통합성을 복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과학을 세계의 이것저것으로부터 현대 과학의 이데올로기에 그것을 관련시키지 않고도 동일한 역사로 통합시켜 준다. 그 이데올로기는 단지 과학의 “도구적”이고 “자연철학적”인 측면의 단순합이 아니다. 그것은 그 둘이 역사적으로 우연적이면서 논리적으로는 긴장을 지닌 방식으로 밀접하게 관계맺는 것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 바로 특히 “서구”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