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reless: From Marconi's Black-Box to the Audion
- Sungook Hong, Wireless: From Marconi's Black-Box to the Audion (Cambridge, Mass: MIT Press, 2001)
무선전신의 탄생
헤르츠의 전자기파와 물리학자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실험실에서 조작가능한 전자기파(Hertzian wave)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헤르츠의 장치는 발진기(전파 발생기)와 수신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진기는 전지, 유도코일, 전류단속기, 그리고 스파크가 발생하도록 설치된 두 개의 컨덴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발진기에서 축전된 고전압이 방전될 때 발생하는 전자기파가 공명기(resonator)라 불렸던 수신기에 도달하면, 그 에너지가 고주파의 교류전류로 변환되어 스파크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이 성공은 영국의 맥스웰주의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왜냐하면 이 실험이 26년 전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의 이론적 예측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이 실험 이후 많은 물리학자들은 전자기파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들이 수행하였고 실험을 위한 실험장치도 개선되어 갔다. 한편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는 이 실험으로부터 "전자기파를 이용한 통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으며, 실제로 그의 무선장치는 헤르츠 장치의 기본 작동원리가 그대로 채용되었다.
물론 당시에 마르코니만 전자기파를 이용한 통신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은 아니지만(e.g., 크룩스, 잭슨),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1] 우선 당시 전자기파의 전송거리가 불과 수십 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당시 헤르츠 장치를 사용해 실험을 수행했던 물리학자들은 전자기파가 실제 통신에 이용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물리학자들은 전자기파의 전송거리를 늘리는 작업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헤르츠의 장치는 기본적으로 연구실에서 전자기파 연구를 위해서 사용되는 물리학의 실험도구였기 때문에, 송신기와 수신기를 실험실 외부로 가져가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물었다. 즉, 이들은 전자기파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고, 때로 코히러(coherer)와 같은 민감한 수신기를 개발해내기도 했지만, 전파의 수신거리를 늘리는 작업 자체가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헤르츠의 전자기파 발견 이후, 물리학의 주된 연구 프로그램은 "빛과 전자기파의 유사성"을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 맥스웰의 이론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주파수가 다른 빛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대의 많은 실험가들은 전자기파의 파장을 되도록 짧게 하고 그것의 편광, 굴절, 산란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전자기파와 빛 사이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빛과 전자기파의 유비"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더 나아가 헤르츠 장치의 원리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되고 이해되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실험 물리학자 올리버 로지(Oliver Lodge, 1851-1940)는 헤르츠의 장치를 편광기나 회절격자와 같은 광학 장치로 간주했고, '발진기'와 '수신기(코히러)'를 각각 '광원 램프'과 '인간의 눈'에 비유하면서, 눈의 시각 인지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자신의 연구에 헤르츠 장치를 이용하려 했다.
즉 "빛과 전자기파"의 유비는 당시 물리학의 풍부한 연구 주제들을 양산하는 데 기여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유비는 그들이 자신의 실험장치를 전신장치로 보는 데 방해요소가 되었다. 그들은 전자기파를 '보이지 않는 빛'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실험장치에 대한 [전파생성기(광원)-전자기파(빛)-검파기(눈)]의 유비는 [송전기-모스기호-수신기]의 전선을 떠올리는 데 방해요소가 되었다. 실제 무선전신의 개발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미 문제를 접근한 마르코니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르코니는 빛에 대한 유비가 아니라 '(유선)전신에 대한 유비'에 의거해 헤르츠의 장치를 이해하고 파악했는데, 이러한 독특한 접근방식은 마르코니에게 전자기파의 전송거리 연장을 가장 큰 연구과제로 상정하게 만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반대로 당대의 물리학자들에게, 헤르츠의 실험장치는 기다란 전선과 '대지 귀로' 현상을 이용해 신호를 전달하는 기존의 유선 전신과 전혀 유사성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실용적인 이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부분은 광학에 대한 유비로 "등대"를 대신할 통신기구를 염두에 두곤 했다.(예외: 잭슨)[2]
무선전신의 발명: '물리학의 실험도구'에서 '실용적인 무선전신'으로
이탈리아의 엔지니어 마르코니는 레그혼 기술학교(Technical Institute in Leghorn)에서 유선 전신을 전공했고, 볼로냐 대학(University of Bologna)의 리기(Augusto Righi) 교수로부터 전자기파에 관한 실험들을 배웠다. 헤르츠 실험에 대한 얘기를 접한 마르코니는 이를 통신, 즉 무선전신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실용화하려면 전파의 짧은 송수신 거리를 극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1894년-96년 그의 다락방에서 진행된 연구는 "어떤 방법으로 전파의 송수신 거리를 늘릴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확실한 목표 아래, 스파크-갭 오실레이터, 컨덴서, 공명기, 코히러, 유도 코일로 이루어진 헤르츠의 장치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르코니는 전자기파의 송수신 거리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우선 마르코니는 발진기 유도코일의 크기를 늘리고 그 절연을 완벽히 하여 좀더 강력한 스파크를 얻어냈으며, 그것에 작은 송신 안테나를 부착하여 전파의 전송 거리를 상당히 늘릴 수 있었다. 송신기와 달리 수신기를 개량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는데, 수신기의 민감도를 충분히 높여야 할 뿐 아니라 전파에 안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3] 이를 위해 마르코니는 새로운 코히러를 사용해 수신기의 '민감도'를 높였고, 전기 태퍼(electric tapper)를 개발 및 부착하여 수신기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종종 코히러에 흐르는 전류의 세기가 충분치 않아 전기 태퍼를 작동시키지 못하곤 했는데, 마르코니는 이 문제를 유선전신에서 널리 사용되던 계전기(relay: 미세한 전류를 증폭시켜 강한 전류를 전달해주는 장치)를 연결하여 해결했다. 또한 마르코니는 수신기의 검류계를 모스 프린터로 대체하고, 높은 저항을 달아 국지적 유도 전류에 의한 오작동을 줄였으며, (안테나 역할을 하는) 날개 모양의 컨덴서를 코히러에 부착시켜 좀더 쉽게 전파에 반응할 수 있도록 개량하였다.
마르코니는 일련의 개량 작업에 더하여, 발진기 안테나를 높이고 날개 모양의 컨데서 크기를 키워나가면서, 전파의 송수신 거리를 더 늘려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르코니는 송신기와 수신기 각각에 부착되어 있던 컨덴서의 한쪽 끝을 땅에 접지시켰다. 이 접지 개량 덕분에 전파의 송수신 거리는 비약적으로 늘어나 2마일 거리의 송수신에 성공하게 되었다(1895). 당시 유선전신에서 지면 접지는 필수적이었는데(접지를 하면 "대지 귀로(earth return)" 원리에 의해 한 개의 전선만으로도 통신을 할 수 있었기 때문), 유선전신과 무선전신을 대칭적으로 파악했던 마르코니에게 안테나의 접지 시도는 너무나 자연스로운 시도였다. 반대로 이러한 시도는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는 상상 불가능한 시도이기도 했다.
흔히 마르코니의 업적은 당시 다방면으로 진행되던 무선전신 구성요소들의 개량을 한 데 모아놓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사실 마르코니의 전신장치 속에 들어있던 것은 맥스웰주의 물리학자들의 실험장치였고, 그렇기에 마르코니가 자신의 "블랙박스"를 열었을 때 이는 물리학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물리학자들이 못한 것을 마르코니가 해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헤르츠의 전자기파를 이용해 '전신'을 발명한다"는 뚜렷한 목표와 '유선전신'과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당대의 실험 물리학자들은 빛과 전자기파의 유사성 연구에 몰두했으며, 전송거리 연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당시 전신기사들은 물리학자들의 소유물이자 전송거리도 짧았던 전자기파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통신기술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유선전신 네트워크를 보다 완전히 하고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과 달리 마르코니는 애초부터 "헤르츠의 전자기파를 이용해 '전신'을 발명한다"는 목표를 가졌고, 그 덕분에 그 목표 성취의 문제인 "신호 전달의 강도", "신호 수신의 민감도와 안정성" 문제를 부각시켜 볼 수 있었으며, 시행착오를 통해 그 문제를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또 무선전신을 유선전신에 유비하고 그것의 구성요소들을 대칭적으로 바라봤던 마르코니는 물리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독창적인 시도(e.g., 계전기 부착, 안테나의 접지)를 통해 실용적인 무선전신 발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마르코니와 로지의 우선권 논쟁
로지의 기구들은 전신장치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며, 전자기파에 대한 실험도구였을 뿐이었다. 그의 신화는 이후에 꾸며진 것이며, 이는 당시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마르코니의 충격적인 성공과 그의 강력한 특허권 요구 및 그의 독점욕은 영국의 이익을 침해할 것으로 여겨졌다. 즉 로지의 우선권 주장은 영국 내에서 커져만 가는 마르코니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반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대서양 횡단 전신의 성공과 플레밍
1901년 12월 12일과 13일, 마르코니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전신의 송수신에 성공한다. 영국의 Poldhu에서 미국의 Newfoundland까지는 2000mile이 넘는 거리로, 소형의 표준 마르코니 장치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의 성공은 물리학자이자, 전력공학자인 플레밍의 도움을 받은 powerful system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1899년 마르코니 회사에 고용된 플레밍은 첫째, 자신의 명성과 신뢰도를 이용하여 영국 과학자 공동체와 마르코니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고, 둘째, 수신기의 릴레이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셋째, 특허권 분쟁에서 법적 도움을 주었다.
괄목할 만한 성과(200mile 송신)와 경험적 자신감(송신거리는 안테나의 높이의 제곱에 비례, 지표면을 통한 송신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마르코니는 "대서양 횡단"을 기획한다. 이 기획에는 결정적으로 소형 표준 마르코니 장치의 200배에 해당하는 전력이 필요했고(신호의 강도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 이에 플레밍은 발전공학과의 접목을 제안했다. 위원회에서는 높은 전력을 이용한 송신이 주변의 전신을 간섭할 것이라는 우려와 재정적 우려를 보였지만, 마르코니는 첫째, 동조(syntonic) 시스템이 이를 해결할 것이라며 설득했고, 둘째, 회사의 재정 문제 탈출을 위해서라도 대서양 횡단의 성공이 필수적이라며 기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플레밍은 발전기에 이중 변압장치를 달아 고전압, 고주파수를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정 상에서 발생한 문제들(특히, Key on/off 시에 발생하는 유도기전력을 방지하는 어려움, tuning의 어려움)을 완벽히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마르코니는 대서양 횡당 성공 몇 개월을 앞두고 플레밍을 일선에서 내보내고, 직접 작업을 수행했고, 결과적으로 대서양 횡단에 이용된 송신기(단일 변압장치 이용, jigger를 이용한 tuning 등)는 플레밍의 애초 설계와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대서양 횡단의 성공 이후, 플레밍은 마르코니에게 서운함(마르코니가 대서양 횡단의 성공에 기여한 인물에 플레밍을 끼워주지 않았음)을 가지게 되고 대서양 횡단 전신에 대한 기여분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플레밍으로서는 대서양 횡단에서 결정적인 것은 발전기의 접목이며, 그것을 제안한 자신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과학자로서, 과학을 현장에 성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전기공학 및 과학자 공동체에서 전문가로서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했으며, 이번 대서양 횡단 성공에서도 그러한 명예가 돌아오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용적 공학자인 마르코니가 보기에 플레밍의 발전기 접목은 알고보니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으며, 결국 jigger를 통해 회로 tuning에 성공한 것도 자신이기 때문에 플레밍의 몫은 그리 커보이지 않았다. 한편 기업가로서 그는 기업의 생명이 달린 일을 책임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조직가로서 그는 대서양 횡단 성공에 필요한 각종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조직, 관리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에게 플레밍의 발전기술은 대서양 횡단에 필요한 여러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해 보였다.
"Maskerlyne affiar"와 공학(자)에 대한 신뢰성
초창기, 무선전신 장치는 동조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마르코니의 첫 장치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군통신의 비밀유지 문제와 혼선(간섭)의 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동조의 문제가 심각하게 고려되기 시작했다.
Lodge의 미세 동조 송신/수신기는 특허권 문제와 짧은 송신거리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마르코니는 원거리 송신이 가능하면서 정밀한 동조가 가능한 장치를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jigger, 가변코일, 접지된 수직 안테나를 이용한 그의 장치는 7777번 특허를 획득한다.
마르코니와 플레밍은 그들의 장치의 신뢰성을 증명하기 위해, 1903년 3월, 쇼를 준비하고 성공을 거둔다. 그 성공은 플레밍의 영국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의 신뢰성 덕분이었다. 즉 플레밍은 그동안 주욱 마르코니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달 후, 마르코니의 메시지를 받기로 기획된 플레밍의 강연 도중 의도치 않은 Maskerlyne의 악의적인 메시지가 전송되면서, 무선전신의 간섭문제가 마르코니 전신기에서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애초에 마르코니 전신기는 광대역 전파(dirty wave)의 공격에 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숨긴 마르코니와 플레밍의 신뢰도는 악화되었으며, 특히 과학자 겸 (마르코니 실험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플레밍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은 dirty wave 발생장치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주파수 대역 사용에 대한 국제적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한편, 이 사건을 종결지은 것은 몇 달 후 있었던 쇼에서의 '불완전한 메시지 수신' 사건이었는데, 사실 이전의 쇼에서도 플레밍과 마르코니는 의도적으로 메시지 수신의 불완전함을 의도적으로 숨겨왔고, 그들의 쇼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신화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이미 회사에서의 입지마저 좁아졌었던 플레밍은 재계약에 실패하였다. 1년 뒤 플레밍은 파장-측정 장치(cymometer)와 고주파수 교류 정류기를 발명하였고, 그는 1905년 마르코니 회사에 새 기술적 자본과 새로운 신뢰도를 가져다 주면서 마르코니와의 관계를 다시 맺게 된다.
각주
- ↑ 1892년, 크룩스(Crookes)는 무선 전신을 예측하는 글을 발표했다. 언뜻 보기에, 그의 글은 근거가 있는 놀라운 예측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해 얘기한 것이 아니었으며, 과학자 사회에서 당시 그의 글은 무시되었다. 사실, 그의 글은 마르코니의 발명 이후에 재발견된 것으로 봐야지, 그가 과학자 사회나 마르코니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 ↑ 러더퍼드는 예외적으로 원거리 송신에 성공했는데, 그는 장파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역시 광학에 대한 유비로서 등대로의 실용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뿐, 모스 프린터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편 해군 기술자 잭슨은 수신기로 모스 사운더를 이용했는데, 원거리 송신에는 실패했다.
- ↑ 안정하지 못한 채 민감하기만 한 장치는 수신된 신호 외의 신호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