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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W.V.O. Quine, "On What There is" 존재론적 검약 vs. 설명적 단순성? 이름이 존재를 함축하는 듯한 인상이 있음. 다행히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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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수염에 대한 러셀식 대응 == | == 플라톤의 수염에 대한 러셀식 대응 == | ||
러셀의 단칭 기술구 이론은 임의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을 그 이름을 가진 | 러셀의 단칭 기술구 이론은 임의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을 그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않고도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함으로써, 플라톤의 수염식 사고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따르면, "웨이벌리의 저자는 시인이었다"라는 문장은 "어떤 것이 웨이벌리를 썼고 시인이면서, 그 외의 어느 것도 웨이벌리를 쓰지 않았다"라는 동일한 뜻의 문장으로 바꿔 쓸 수 있으며, 변경된 문장에서는 그 문장이 웨이벌리의 저자가 존재한다는 함축을 가지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단칭 기술구 이론은 동일한 방식으로 "둥근 사각 지붕"이나 "페가수스"가 등장하는 문장들도(그 어떤 단칭 용어가 등장하든), 그 단칭 명사에 대응하는 대상의 존재나 무의미를 가정하지 않고도, 그 문장들을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페가수스는 없다."는 문장도 환원불가능한 속성 "페가수스임"(P)에 호소하여 "~(Ex)Px"식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때문에 이처럼 명사를 포함하는 진술의 유의미성에 기초하여 그 명사에 의해 명명된 것의 존재를 전제하는 망상에 빠질 필요가 없게 된다. | ||
이러한 해법은 의미와 명명(지칭)의 구별에 의존한다. 이 구별은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샛별'과 '저녁별'이란 두 이름이 같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또한 McX 등의 동기도 의미와 명명의 혼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속성의 의미에 관한 문제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이끌어내려는 시도에 대해 검토해보자. | |||
== 보편자의 존재론적 문제 == | |||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등과 같은 것이 있을까? McX는 다음과 같이 그런 것들이 있다고 답할 것이다. "(1) 저기 붉은 집들, 붉은 장미, 붉은 황혼이 있다. ... 그리고 (2) 이들 집, 꽃, 황혼 등은 공통의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그것이 곧 내가 속성 붉음으로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McX의 개념틀에서는 속성들이 있다. 반면 다른 (아마도 콰인이 선호하는) 개념틀을 가진 누군가는 (1)에는 동의하지만, (2)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집'이란 일반 명사와 '붉음'이란 속성이 적용될 수 있는 개별적 대상은 있지만, '붉음'에 의해 명명되는 것은 없으며, '집', '장미', '황혼' 등이 명명하는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의미는 명명과 구별되기 때문에, 이름들을 포함한 문장이 의미 있기 위해 그 이름들이 무언가를 명명해야 한다는 식의 논증은 먹히지 않는다. | |||
그런데 만약 McX가 의미와 명명 사이의 구분법을 수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면? 그래도 '~이 붉다(R)', '~이 페가수스이다(P)'와 같은 술어가 속성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이에 대한 콰인의 답변은 '~이 의미있다/없다'의 문제가 의미라는 어떤 추상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궁극적/환원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이다. | |||
== 존재론적 개입의 유일한 기준 == | |||
우리는 속박된 변항의 사용을 통해서만 존재론에 개입한다. 이름은 제거될 수 있기에 존재론적 개입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있다는 것은 한 대명사의 지칭 범위 안에 있다는 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