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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V.O. Quine, "On What There is" | W.V.O. Quine, "On What There is" | ||
이름이 존재를 함축하는 듯한 인상이 있음. 다행히 러셀의 한정기술구 이론은 이름이 등장하는 문장을 그 이름이 명명하는 대상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하게 해줌으로써, 이름으로부터 존재를 추론하는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이는 검소한 존재론의 가능성을 보여줌. 콰인 역시 이러한 검소한 존재론을 선호함. 수학에서도 형식주의(유명론 계승) 존재론 선호. 그러나 러셀식의 문장 해석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수학에서의 형식주의가 실재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일 수는 없음. | |||
책상이니, 원자니 하는 물리장 존재자들은 우리의 복잡한 경험에 단순한 질서를 제공. 물리주의자들은 바로 그 이유에서 그런 물리적 대상들의 존재를 수용. 그러나 현상주의자들은 그러한 대상들을 신화로 취급. 수학적 대상들 역시 우리의 물리학을 단순하게 만들어줌. 물론 그것은 엄격한 물리주의자나 형식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신화. 그러나 이것이 신화인 것은 현상주의자들이 물리적 대상을 신화로 취급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일 뿐,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음. | |||
콰인은 개인적 선호로서 형식주의 존재론을 선호하지만, 나머지 존재론을 신화로 배제할 근거는 충분치 않음(물리적 대상에 대한 현상주의자와 물리주의자 사이의 대결에서 현상주의자가 물리주의자를 압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필요한 것은? 관용과 실험 정신. | |||
== 플라톤의 수염 == | == 플라톤의 수염 == | ||
철학자들 사이의 존재론에 대한 불일치를 정식화하고자 할 때, 어떤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불리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 있다. '플라톤의 수염'이란 사고방식에 따르면, 비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존재에 관한 진술들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반면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유리함을 보여주는 사고방식으로는 '오컴의 면도날'이 있음). [이는 아마도 의미와 지칭을 밀착시키는 견해에 기인] | 철학자들 사이의 존재론에 대한 불일치를 정식화하고자 할 때, 어떤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불리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고방식이 있다. '플라톤의 수염'이란 사고방식에 따르면, 비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존재에 관한 진술들은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반면 부정하는 편이 옹호하는 편보다 유리함을 보여주는 사고방식으로는 '오컴의 면도날'이 있음). [이는 아마도 의미와 지칭을 밀착시키는 견해에 기인] | ||
이런 사고방식을 따라, McX는 페가수스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페가수스가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런 사고방식을 따라, McX는 페가수스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페가수스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페가수스가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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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인은 문제의 책임이 존재 관련 용어의 애매성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콰인은 용어 '실존'에 대해서는 와이만에 양보하고, '있다'라는 용어만 사용하겠다고 한다. | 콰인은 문제의 책임이 존재 관련 용어의 애매성에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콰인은 용어 '실존'에 대해서는 와이만에 양보하고, '있다'라는 용어만 사용하겠다고 한다. | ||
와이만의 우주에 존재하는 가능자들의 슬럼은 여러 문제들을 야기한다. 가능자들에게는 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되기 어렵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다른 것과는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는 존재에 관해 말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양상 논리의 분석도 상당히 어려운 일로 보인다. | 와이만의 우주에 존재하는 가능자들의 슬럼은 여러 문제들을 야기한다. 가능자들에게는 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되기 어렵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다른 것과는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는 존재에 관해 말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한 양상 논리의 분석도 상당히 어려운 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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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자의 존재론적 문제 == | == 보편자의 존재론적 문제 == | ||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등과 같은 것이 있을까? McX는 다음과 같이 그런 것들이 있다고 답할 것이다. "(1) 저기 붉은 집들, 붉은 장미, 붉은 황혼이 있다. ... 그리고 (2) 이들 집, 꽃, 황혼 등은 공통의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그것이 곧 내가 속성 붉음으로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McX의 |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등과 같은 것이 있을까? McX는 다음과 같이 그런 것들이 있다고 답할 것이다. "(1) 저기 붉은 집들, 붉은 장미, 붉은 황혼이 있다. ... 그리고 (2) 이들 집, 꽃, 황혼 등은 공통의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그것이 곧 내가 속성 붉음으로 의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McX의 개념 체계에서는 속성들이 있다. 반면 다른 (아마도 콰인이 선호하는) 개념 체계를 가진 누군가는 (1)에는 동의하지만, (2)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집'이란 일반 명사와 '붉음'이란 속성이 적용될 수 있는 개별적 대상은 있지만, '붉음'에 의해 명명되는 것은 없으며, '집', '장미', '황혼' 등이 명명하는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의미는 명명과 구별되기 때문에, 이름들을 포함한 문장이 의미 있기 위해 그 이름들이 무언가를 명명해야 한다는 식의 논증은 먹히지 않는다. | ||
그런데 만약 McX가 의미와 명명 사이의 구분법을 수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면? 그래도 '~이 붉다(R)', '~이 페가수스이다(P)'와 같은 술어가 속성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이에 대한 콰인의 답변은 '~이 의미있다/없다'의 문제가 의미라는 어떤 추상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궁극적/환원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이다. | 그런데 만약 McX가 의미와 명명 사이의 구분법을 수용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면? 그래도 '~이 붉다(R)', '~이 페가수스이다(P)'와 같은 술어가 속성의 이름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거라고. 이에 대한 콰인의 답변은 '~이 의미있다/없다'의 문제가 의미라는 어떤 추상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궁극적/환원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이다. | ||
== 존재론적 구속의 유일한 기준과 수학의 존재론 == | == 존재론적 구속의 유일한 기준과 수학의 존재론 논쟁 == | ||
지금까지 보인 바에 따르면, 이름은 제거될 수 있기에 존재론적 구속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름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그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론적 구속에 중립적이다. 반면 "There is something which ..."와 같이 속박 변항의 사용은 존재론적 구속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고, 또한 유일하게 드러낸다. "있다는 것은, 결국, 변항의 값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Some dogs are white"라는 문장을 "There is something which is a white dog"로 변환할 수 있음을 보이는 순간, 이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white dog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뿐, whiteness나 doghood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일 수 있다. | 지금까지 보인 바에 따르면, 이름은 제거될 수 있기에 존재론적 구속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름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그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론적 구속에 중립적이다. 반면 "There is something which ..."와 같이 속박 변항의 사용은 존재론적 구속을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고, 또한 유일하게 드러낸다. "있다는 것은, 결국, 변항의 값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Some dogs are white"라는 문장을 "There is something which is a white dog"로 변환할 수 있음을 보이는 순간, 이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white dog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뿐, whiteness나 doghood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님을 보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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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자에 대한 중세의 세 관점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은 20세기 수학철학의 세 관점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로 재탄생했다. 보편자의 존재를 주장하던 실재론을 계승한 논리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을 지칭하도록 사용되는 속박 변항을 허용한다. 보편자가 마음의 구성물로서 존재함을 주장하는 개념론을 계승한 직관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이 미리 구체화된(specified) 구성요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런 존재들을 지칭하는 데 속박 변항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논리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견된 것인 반면, 직관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명된 것 / 논리주의자는 무한의 여러 등급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직관주의자는 무한의 최저 등급만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실수 법칙도 포기해야). 형식주의는 보편자 부정하지만, 추상적 존재를 마음의 구성물로서도 전혀 허용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고전 수학은 의미 없는 기호들(notations)을 이용한 놀이이다. 수학적 용어와 문장들은 유용할 수 있으나, 그 유용성은 어떠한 문자적 의미에서도 유의미함을 함축하지 않는다. 수학자들 사이의 합의는 의미 없이도 가능한데, 구문론적 규칙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보편자에 대한 중세의 세 관점 실재론, 개념론, 유명론은 20세기 수학철학의 세 관점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로 재탄생했다. 보편자의 존재를 주장하던 실재론을 계승한 논리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을 지칭하도록 사용되는 속박 변항을 허용한다. 보편자가 마음의 구성물로서 존재함을 주장하는 개념론을 계승한 직관주의는 추상적 존재들이 미리 구체화된(specified) 구성요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런 존재들을 지칭하는 데 속박 변항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다(논리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견된 것인 반면, 직관주의에 따르면 집합은 발명된 것 / 논리주의자는 무한의 여러 등급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직관주의자는 무한의 최저 등급만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실수 법칙도 포기해야). 형식주의는 보편자 부정하지만, 추상적 존재를 마음의 구성물로서도 전혀 허용하지 않으려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고전 수학은 의미 없는 기호들(notations)을 이용한 놀이이다. 수학적 용어와 문장들은 유용할 수 있으나, 그 유용성은 어떠한 문자적 의미에서도 유의미함을 함축하지 않는다. 수학자들 사이의 합의는 의미 없이도 가능한데, 구문론적 규칙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 ||
== 존재론 판정의 | == 존재론 판정의 과학적 기준으로서의 단순성 == | ||
경쟁하는 존재론 사이의 판정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의미론적 정식화는 각 이론이 채택한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그리고 불일치한 부분과 일치한 부분의 구분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반도 제공), 존재론 사이의 판정 근거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존재론적 논쟁이 단순히 언어적 논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 경쟁하는 존재론 사이의 판정은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 의미론적 정식화는 각 이론이 채택한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그리고 불일치한 부분과 일치한 부분의 구분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반도 제공), 존재론 사이의 판정 근거를 제공해주진 않는다. 존재론적 논쟁이 단순히 언어적 논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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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집합이나 속성은? (물리적 대상이 현상주의 체계에서는 신화인 것처럼) 이런 플라톤적 존재론은 엄격한 물리주의 개념 체계에서 신화에 불과하다. 집합과 속성 등의 고차원적 신화는 그것이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해주는 한 유용한 것이다. 수학은 고차원적 신화의 필수 성분이기에, 이 플라톤적 신화의 유용성은 명백하다. 이를 신화로 보는 관점은 형식주의적 태도와 같다. 그러나 플라톤적 신화에 대한 이런 형식주의적 태도가 정당하다면, 물리적 신화에 대한 현상주의적 태도도 정당하다. | 그렇다면 집합이나 속성은? (물리적 대상이 현상주의 체계에서는 신화인 것처럼) 이런 플라톤적 존재론은 엄격한 물리주의 개념 체계에서 신화에 불과하다. 집합과 속성 등의 고차원적 신화는 그것이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단순화해주는 한 유용한 것이다. 수학은 고차원적 신화의 필수 성분이기에, 이 플라톤적 신화의 유용성은 명백하다. 이를 신화로 보는 관점은 형식주의적 태도와 같다. 그러나 플라톤적 신화에 대한 이런 형식주의적 태도가 정당하다면, 물리적 신화에 대한 현상주의적 태도도 정당하다. | ||
콰인에 따르면, 현재 수학적 존재론의 판정은 여전히 열려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과 실험 정신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가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로 얼마나 환원될 수 있는지 온갖 방법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물리학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이 플라톤적 수학과 독립적으로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 살펴보는 동시에, 수학도 추구하면서 그 플라톤적 기초도 파헤치자.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 내에서 볼 때, 물리적 대상과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은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의 질은 특정한 관점에 의존적인데, 즉 여기서는 인식론적 관점에 | 콰인에 따르면, 현재 수학적 존재론의 판정은 여전히 열려 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과 실험 정신이다. 물리주의적 개념 체계가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로 얼마나 환원될 수 있는지 온갖 방법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물리학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이 플라톤적 수학과 독립적으로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 살펴보는 동시에, 수학도 추구하면서 그 플라톤적 기초도 파헤치자. "현상주의적 개념 체계 내에서 볼 때, 물리적 대상과 수학적 대상의 존재론은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의 질은 특정한 관점에 의존적인데, 즉 여기서는 인식론적 관점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우리의 다양한 관점 가운데 하나로서, 이는 다양한 관심과 목적 가운데 하나와만 대응될 뿐이다." | ||
== 관련 항목 == | |||
[[분류:러셀]] | [[분류:러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