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기 과학과 기술

상당수의 연구들에 따르면, 과학 지식의 내용이 직접 기술로 응용된 사례가 없거나, 극히 주변적인 분야에서 이루어짐. 그러나 역사가들의 세밀한 연구에 따르면 재미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음을 알 수 있음.

길리스피

18세기말, 19세기 초 프랑스 연구. 산업에 응용된 것은 과학 지식이 아님. 오히려 과학적 방법과 태도, 과학자의 착취였음. 당시 과학은 산업 발전에 도움 안 되었음. 오히려 당시 산업을 체계적으로 분류했을 뿐. 따라서 그것은 산업의 자연사에 다름 아니었음. -> 길리스피의 과학은 추상적 이론적 지식.

스코필드

버밍엄의 루나 학회. 산업적/기술적/과학적 문제를 가지고 부르주아들 토론 활발했음. 그러나 길리스피 같은 논자가 보기에 그들의 토론 중에 기술적으로 응용된 문제는 사실 단지 기술적 문제일 뿐이었고, 순수 과학적인 문제는 단지 과학적인 문제였을 뿐이었음. 즉 둘은 여전히 그 안에서 따로 놀았음. 그럼에도 스코필드가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그가 과학을 기술적 활동으로 생각했기 때문.

레이놀즈

스미턴의 가장 유명한 ‘과학적’ 연구이자 그에게 코플리 메달을 안겨주기도 한 ‘수력과 풍력에 관한 연구’조차 당시의 과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 스미턴은 실용적인 정신을 가진 엔지니어로서 “기계에 대한 직관력, 물리적인 유비, 모형 실험”처럼 기술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연구방법을 통해 그러한 결실은 얻어냈다는 것이 그 이유. 또한 스미턴의 연구가 실험결과의 경험적 일반화를 넘어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므로 기술이 과학에 공헌한 사례도 아니라 평가. 스미턴의 목표는 다분히 수차와 풍차의 효율을 높이고 그것의 설계를 개선하겠다는 실용적 기술 전통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평가. 레이놀즈 역시 “과학은 개념적, 이론적 지식체계”라 생각. “체계적인 실험방법의 적용 자체를 ‘과학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

머사이어스

의도, 희망, 노력의 측면과 결과의 측면으로 분리해서 살펴보면, 과학과 기술의 관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18세기 영국에서 과학과 기술을 연결하려는 과학자, 엔지니어, 장인들의 의도, 희망, 노력은 상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시도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와 함께, 과학과 기술 사이에서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찾으려는 태도를 비판. 둘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경제적 유인이나 전체적인 사회관계에서 발현되는 연결 효과의 문제를 강조.

머슨과 로빈스 + 제이콥

18세기 영국에서는 소위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활동’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밀접하게 얽혀 있었고 그 결과 통합적인 실용적 ‘과학기술 문화’가 형성되어 많은 수의 “실용적 과학자”, “과학적 엔지니어”, “과학적 기업가”들이 배출되었다고 봄. 이들은 18세기의 자연철학과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용어가 동등하지 않다고 지적. 분명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연철학 혹은 과학을 수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음 지적. 이들이 보기에 역사학자들은 역사 속 행위자들의 “과학”을 맘대로 우리의 잣대로 아니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길리스피와 레이놀즈는 과학에 대한 자신들의 보편적 관념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임. 머슨과 로빈슨의 지적에 따라,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규정 역시 당대 행위자들의 맥락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인식 생겨남. 당시 과학기술 문화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뉴턴주의가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 체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맥락에서 재생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뉴턴주의를 ‘실험과 이론의 종합’이라는 형이상학적 구도로 간단히 정리해선 안 됨. 이들에 따르면 기존의 과학사학자들은 18세기 영국의 ‘과학 교양인(man of science)’ 혹은 자연철학자들이 실천한 뉴턴주의의 실상에 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이 밝혀낸 18세기 영국 사회는 대중강연과 공개시연을 통해 과학과 대중이 만나는 가운데 각종 시연 장치들과 그에 관한 담론들이 ‘버밍엄 루나 협회’, ‘맨체스터 문학 철학 협회’를 비롯한 여러 지방 단체들뿐 아니라 각종 사교 모임, 커피점, 살롱에서 넘쳐 흐르던 사회였다. 자연철학자들과 순회 대중 강연가들은 대중강연이나 공개시연을 통해 중간계급과 엘리트계층은 물론이고 엔지니어나 기계공들, 그리고 장인들에게까지도 뉴턴의 이름을 내결고 자연철학을 전파했다. 그와 동시에 각종 장치와 실험기구, 모형들이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 쓰일 것이라는 전망 역시 뉴턴주의의 기치 아래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제이콥

적어도 18세기 중엽 이후의 영국 사회는 이론과 응용이 사실상 구분되지 않고, 자연철학자들과 엔지니어, 기업가들이 자연철학적 문제와 그것의 산업적 응용 가능성을 격의 없이 논의하는 장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와트의 증기기관, 아크라이트의 방적기 등의 발명품들 하나하나가 18세기 영국 과학의 직접적인 응용 산물이었는지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임.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이전부터 “엔지니어들과 기업가들은 동일한 역학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고, “물리적 세계를 객관화하고 그 작용을 역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며 공통의 이해와 가치를 직조함으로써 제휴할 수 있었다.” 즉, 이것이 당대인들의 뉴턴주의임.

서민우 (물질문화로서의 과학)

머사이어스식의 논의도 그렇고, 제이콥의 논의도 ‘희망’이나 ‘의도’만을 부각. 실제 관계 보는 데 물질문화로서의 과학이라는 통찰 중요. 과학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사변적 행위가 아니라 국지적인 맥락에서 다양한 도구, 기구, 모형을 통해 자연에 개입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실천이다. 그런 까닭에 스미턴의 효율성 연구 따위가 과학적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물리적인 유비’나 ‘모형’ 실험처럼 기술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연구방법을 따른 것이었다는 것은 물질문화로서의의 과학이 가진 실천적 측면을 간과한 판단임. 즉, 과학 역시 기술만큼이나 다양항 물리적 유비와 모형 원용하고 있었음. 특히 이런 면에서 “기계”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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