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작성자 : 서민우
역사를 되돌아볼 때 사람들은 흔히 사회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준 혁신적인 사건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가 급진적이고 그 파급력의 범위가 광범할 때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에 ‘혁명’이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 점에서 17세기 과학혁명과 그에 뒤이어 발생한 산업혁명은 서구 사회, 나아가 인간 사회 전체를 완전히 바꿔놓은 대표적 혁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과학혁명으로 인해 우리는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다. 뉴턴이 우주 전체에 작용하는 보편중력과 운동법칙을 발견하여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운동을 일관된 체계 내로 통합하여 설명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제기된 이래로 흐려지기 시작한 천상과 지상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 산업혁명을 통해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증기기관이 도입됐고, 그 결과 인간 사회는 ‘유기적 경제 체제’, 즉 동물, 바람, 물 등 제약이 큰 에너지원에 동력을 의존하던 경제 체제에서 석탄이나 석유 등 그 잠재력이 막대한 무기물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비유기적 경제 체제’로 전환되었다. 석유에 대한 높은 의존도로 인해 유가 폭등이 경제에 치명적 결과를 가지고 오는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산업혁명의 의의가 결코 적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혁신적인 사건들 자체는 때로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볼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새로운 무엇인가가 생겨났다는 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과학혁명 이전에도 뛰어난 과학적 발견은 존재했으며, 산업혁명 이전에도 놀라운 기술적 발명은 도처에서 이뤄졌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나 중세 이슬람 문명에도 수백여 년 간 지속된 뛰어난 자연 탐구의 전통이 있었고, 로마 제국이나 ‘암흑의 시대’로 알려진 중세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술적 발전이 진행됐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혁명’을 그 이전의 혁신적 사건들과 구별해주는 것일까? 더욱이 대략 50여년에서 100여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서구라는 같은 지역에서 발생하여 서구가 전 세계를 제패하게 만든 두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과학과 기술
이론적인 기초과학이 발전하면 그것이 응용되어 실용적인 기술이 진보하고 그 결과 생산성이 증대되어 경제가 성장한다는 단계적인 과학-기술-경제관에서 보면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두 세대 정도가 지나 산업혁명이 시작됐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이론을 창안하고 기술은 그것을 응용한다는 단순명료한 상식적 과학기술관은 과학과 기술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오늘날에도 현실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과학 활동 역시 특정한 기술적 기반 위에서 이뤄지며 기술 역시 독자적인 이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과대학에서도 상당한 이론적 공부를 해야 하고 자연과학대학에서도 실험기법과 실험기구 조작법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근본적으로는 자연대와 공대의 제도적 분리 자체가 이처럼 과학과 기술이 독자적인 이론과 기법, 그리고 동기와 목적을 지닌 구별되는 전통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해왔다는 말이 둘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돼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과학=이론 --> 기술=응용’이라는 단순한 관점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학과 기술은 어느 정도 각각의 독자성을 보장한 채 두 전통을 매개해준 각종 과학 실험기구, 실험실이나 연구소와 같은 융합적 공간, 제너럴일렉트릭사에서 일하며 노벨화학상까지 수상한 어빙 랭뮤어처럼 양 영역을 넘나든 잡종적 과학자-기술자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상호작용의 창구를 넓혀왔다.
과학혁명의 유산
여기서 우리는 과학혁명기를 거치며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중대한 한 가지 변화가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기를 거치며 인간이 처음으로 망원경, 현미경, 공기펌프와 같은 과학기구라는 인공물을 통해 자연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행위가 광범위하게 과학적 연구의 일환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선구적으로 주창한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의 본심이나 지적 능력, 그가 품고 있는 감정 등은 평상시보다 교란되었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비밀도 제 스스로 진행되도록 방임했을 때보다는 인간이 기술로 조작했을 때 그 정체가 훨씬 잘 드러난다. ... 자연의 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유추조자 불가능한 기상천외한 보물들이 인간에게 쓰일 날을 기다리며 수없이 묻혀 있다. ... 새로운 작업 방식을 통해 연구함으로써 혹은 이미 알려진 작업방식을 학문적 경험, 즉 실험이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이전, 비교, 응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발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요컨대, 자연이란 인위적으로 개입했을 때야말로 인간에게 유용한 엄청난 양의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기구를 사용하여 실험적으로 자연을 탐구해야 한다. 베이컨에 따르면, 그렇게 획득한 진리야말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요, 그러한 실질적 효과야말로 우리가 획득한 지식이 진리임을 보증해준다. 이로써 과학과 기술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물, 즉 과학기구가 과학혁명기를 거치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베이컨은 이러한 작업을 여러 사람이,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베이컨의 선구적 제언은 1660년, 최초의 과학자 협회 중 하나인 왕립학회의 창설로 이어졌다. 실로 “누구의 말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왕립학회의 모토는 베이컨의 정신을 이어받아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연구를 집합적으로 추구할 것을 천명한 학회의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용수철의 복원력은 그것이 줄어들거나 늘어난 길이에 비례한다는 ‘후크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왕립학회의 중요 구성원으로 활약하기도 한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후크 역시 1666년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바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고, 자연과 여러 현상의 원인에 관한 탐구에 즐거움을 느끼고 그러한 탐구로부터 그들 자신은 물론 인류 전체를 이롭게 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분투는 외따로 떨어져 있었을 뿐, 정교한 기술에 의해 서로 합쳐지고 덧붙여져 발전되거나 조직화되지 못했기에 별 볼일 없는 몇몇 소소한 결과를 산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 새롭게 발견된 자연 지식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비록 그 수는 소수라 할지라도 아주 잘 훈련되어 있고 조직되어 있는 군대, 즉 아즈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가 이끌던 것과 같은 군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후크의 언급에서 우리는 과학혁명이 그 이전의 과학적 혁신과 달랐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과학혁명의 독특함은 이 시기에 기라성 같은 천재들이 유달리 급증한 데 있지 않았다. 그 이전이라고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진 이들이 부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차이는 이들의 노력이 단발적인 혁신으로 파편화되지 않고 응집력 있게 융합됨으로써 지속적인 진보의 길로 나아갔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 진보는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으며 나아가 서구를 벗어나 전지구적 현상으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산업적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이처럼 혁신적 사건 자체보다 그러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점에 주목하면 산업혁명이 그 이전의 기술적 혁신과 다른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류는 자연의 주기적 구속, 즉 ‘맬서스의 덫’을 탈피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즉,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류는 인간 생활의 질적, 양적 팽창을 부양할 지속적 경제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다. 예컨대 인구 증가는 식량 생산의 한계로 인해 정점에 이른 뒤 결국 감소의 길로 후퇴하는 반복적 패턴을 보였고 그러한 전환은 흔히 기근이나 전염병처럼 자연적인 재해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이러한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산업혁명의 어떤 점이 그러한 악순환을 탈피하여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산업혁명이 극복한 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생물학적 한계였다면, 지속적 경제성장은 자연적 한계를 얼마나 잘 극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 이후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식 기반의 기술, 즉 경험적으로 유용한 종류의 지식이 체계적으로 축적되고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기술발전을 이룩한 데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대목은 기술이 지식 기반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식 기반이 없는 기술은 후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선, 개발되기 어렵고, 그 결과 일회적인 성취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증기기관을 생각해 보자. 기계 제작에 재능이 있는 이라면 제임스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을 분해하거나 그 설계도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트가 왜 ‘분리식 응축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라면 그처럼 증기기관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을 것이다.[1] 왜 열효율이 떨어지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여 일정한 형태의 지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어야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협업의 형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이 반드시 추상적이거나 수학적인 법칙적 이론일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공학적 이론과 적지 않은 과학적 이론이 그러하듯, 해당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읽고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식화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실로 산업혁명의 토대는 기술이 지식 기반을 갖추어야 하고 지식은 구체적인 기술로 실용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기술자, 기업가, 과학자들에 의해 놓여졌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산업혁명의 토대는 앞에서 언급한 과학혁명의 유산으로 이어진다.
뉴턴이 종합한 과학혁명의 성과를 베이컨의 실용적 철학을 바탕으로 전 사회로 확장하려한 일군의 뉴턴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았다. 특히 이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18세기 전반, 즉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사이의 시기는 베이컨식의 실용적 과학의 이념이 사회의 여러 계층으로 퍼져나가며 더욱 공고해지고, 그 결과 자연을 통제하고 그로부터 실용적인 효과를 얻어내겠다는 생각 역시 실험적 과학기술 활동의 확산과 더불어 확고한 지반을 다지기 시작한 때였다. 콜린 맥클로린과 같은 수학자들까지도 뉴턴의 과학과 철학을 설명하는 책에서 기계 엔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문제를 논의할 정도였다. 요컨대, 18세기를 거치며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기업가들은 동일한 과학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고, 공통의 이해와 가치를 형성함으로서 서로 제휴할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과 이성의 힘을 신뢰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계몽주의자들이었고, 그러한 지식과 이성의 산물이 공공의 산업적 이익의 형태로 결실을 맺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용적 기업가이자 산업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18세기의 산업적 계몽주의 문화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식 기반의 과학기술 문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이나 단체들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산업적 계몽주의의 영향을 뚜렷이 발견할 수 있다. 1771년에 설립된 ‘민간 엔지니어 협회’는 엔지니어들이 실용적 화학이나 역학을 비롯한 과학적 지식에 정통할 것을 주문했다. 제임스 와트 역시 증기기관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과학적 역학의 법칙들, 수력학과 유체정역학의 법칙들, 그리고 열기와 냉기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꼽은 바 있다. 무엇보다 제임스 와트가 소속돼 있던 루나협회는 그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산업적 계몽주의의 현현으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윈의 할아버지로서 진화론적 사상을 담은 저술을 쓴 이래즈머스 다윈, 2세기가 넘도록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를 설립한 기업가 조사이어 웨지우드, 증기기관을 개발하고 상업화한 제임스 와트와 매슈 볼턴, 그리고 18세기 말 최고의 화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조지프 프리스틀리 등이 루나협회를 구성하는 회원들이었고, 이들은 달빛이 밝은 보름밤에 만나(여기서 ‘루나협회(Lunar Society)’라는 협회의 명칭이 유래했다) 과학, 기술, 산업을 포괄하는 다양한 주제에 관해 대화와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처럼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큰 어려움 없이 전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산업혁명기 영국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지식, 과학자와 기술자를 나누는 제도적 장벽이 상당히 낮았을 뿐 아니라 두 전통의 상호교류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산업혁명기 영국은 과학과 기술 두 영역을 넘나드는 잡종적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이 폭증한 사회가 되었다.
결론
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과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진행된 산업혁명은 그로 인한 파급효과가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 즉 그 지속성에서 이전의 과학적, 기술적 혁신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그러한 지속성의 근원은 지식 기반의 기술에 놓여있었다. 유용한 지식을 축적하고 그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기술적 개발을 이루어내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지식의 축적이 이뤄지는 선순환의 고리에 지속적 성장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선순환의 고리를 산업적 계몽주의의 형태로 가장 먼저 형성한 나라가 영국이었고 그로 인해 영국은 산업혁명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왜 영국의 산업혁명이 과학혁명의 성과가 종합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됐는지, 왜 영국을 위시한 서구가 뛰어난 과학적, 기술적 혁신을 일군 역사가 있는 중국이나 이슬람, 인도보다 빨리 근대적 경제성장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주
- ↑ 와트는 이전의 뉴코멘 기관이 하나의 실린더 내에서 물을 끓이고 증기를 식히는 작업을 병행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그는 ‘분리식 응축기’를 고안했는데, 이는 물을 끓이는 실린더는 항상 뜨겁게 하는 반면, 수증기를 식히는 응축기는 항상 차갑게 유지하는 장치였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과학교양』 (과학중점고등학교 교과서). 한국과학창의재단, 2010.
-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 과학과 여성 (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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