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선택과 가치

정동욱, "이론 선택과 가치", 『과학철학』 25권 3호 (2022), 33-60쪽.

초록 : 쿤은 이론 선택이 범패러다임적으로 ‘공유된 가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정확성, 정합성, 단순성 따위의 동일한 목록의 가치들을 공유하며, 각자 이론에 매긴 가치들의 가중치 합을 통해 이론을 선택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공유된 가치 접근이 쿤의 초기 견해가 가진 두 가지 문제, 즉 불일치의 어려움과 합의의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한다는 점을 보인다. 또한 나는 쿤이 강조하는 이론 선택이 추구로서의 선택에 가깝다는 점에 착안하여, 추구 행위로서의 이론 선택을 의사결정 이론에 기초하여 분석하였고, 그 결과 이론 선택을 위한 가치들 중 적어도 일부는 인식적이기보다 실용적인 가치로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과학에 대한 쿤의 급진적인 이해 방식을 확률, 가치, 의사결정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 방식과 화해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키워드 : 토머스 쿤, 공유된 가치들, 이론 선택, 확률, 의사결정 이론,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

Theory Choice and Values

Abstract: Thomas S. Kuhn suggested that scientists choose theories by widely shared values. In his shared values approach, scientists share the same list of values such as precision, coherence, broad scope, simplicity and fruitfulness, and each scientist chooses theories by the weighted-sum of the values of theories. Firstly, I show that the shared values approach provides a solution of the two problems of Kuhn’s early view: difficulty of disagreements and difficulty of agreements. Secondly, I interpret Kuhn’s theory choice as an action of pursuit, and analyse theory choice by decision theory. As a result I discover that some values for choosing theories are practical rather than epistemic. This discovery has a significance in that Kuhn’s radical view of science can be reconciled with the classical view of probability, value and decision.

Key words: Thomas S. Kuhn, shared values, theory choice, probability, decision theory, methodological incommensurability

본문

이론 선택과 가치

정동욱 (경상국립대 철학과)

1. 도입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토머스 쿤(Thomas S. Kuhn 1996, 특히 9-10장)은 경쟁하는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선택이 공약불가능성으로 인해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합의를 이루기 어렵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철학자들은 쿤이 과학을 ‘비합리적’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쿤은 『구조』의 후기(Kuhn 1996, 184-186쪽, 198-200쪽)와 「객관성, 가치 판단, 그리고 이론 선택」(쿤 1997a)을 통해 이론 선택이 범패러다임적으로 ‘공유된 가치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쿤(1997a)의 공유된 가치 접근에 따르면, 과학자 공동체는 동일한 목록의 가치들을 공유하는 가치 공동체로, 이러한 공유된 가치의 표준적인 목록에는 ‘단순성’, ‘정확성’, ‘일관성’, ‘넓은 적용범위’, ‘다산성(fruitfulness)’과 같은 세부 가치들이 포함되며, 각 과학자는 각 가치에 이론마다의 세부 가치들을 평가하고 그 가중치 합이 높은 이론을 선택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공유된 가치 접근이 패러다임과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에 의존한 쿤의 초기 견해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는지 분석하고, 이 접근이 어떤 의미에서 비판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는지를 해명할 것이다.

공유된 가치 접근은 그 자체의 어려움도 가지고 있다. 쿤 본인도 고민했듯이, 공유된 가치 접근은 과학자들이 왜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간편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쿤은 과학의 목표를 진리로 규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과학의 목표가 진리라 하더라도 그 세부 가치들의 추구가 진리를 유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1997b)은 과학이란 활동 자체가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정의된다는 식으로 사소한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여러 학자들은 끊임없이 확률에 호소한 정당화를 시도했는데, 이는 이론의 단순성, 통합성, 정확성 등이 높을수록 이론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다양한 베이즈주의적 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공유된 가치들을 확률에 호소하여 정당화하려는 노력이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론 선택이란 더 참일 것 같은 이론을 선택하는 행위로 환원될 수 없고, 따라서 이론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확률이 구체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낮은 확률값을 가진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이론 선택을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확률과 가치에 의거한 고전적인 의사결정 이론에 기초하여 분석함으로써 이를 정당화할 것이며, 이러한 분석 결과는 이론 선택과 관련된 가치들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 재고하게 해줄 것이다.

2. 공유된 가치 접근과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

쿤(1997a)의 공유된 가치 접근에 따르면, 과학자 공동체에 속한 과학자들은 모두 정확성, 단순성, 넓은 적용범위, 정합성, 다산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개별 과학자가 각각의 가치에 부여하는 가중치는 다른 과학자들과 다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가중치 합에 근거한 이론 선택 결과는 과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1] 이러한 결과는 표 1과 같은 이론 선택 상황을 통해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표 1. 이론의 정확성과 단순성 평가와 두 가지 가중치 합
이론 A B C
정확성 80 50 75
단순성 80 90 75
가중치 함수 1
(0.5:0.5)
80 70 75
가중치 함수 2
(0.2:0.8)
80 82 75

표 1에서 세 개의 이론 A, B, C는 정확성 면에서 각각 80, 50, 75의 평가를, 단순성 면에서는 각각 80, 90, 75의 평가를 받았다. 이때 모든 평가자는 각 이론의 단순성과 정확성에 대해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오직 두 가지 가치만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론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이론 평가 상황에서, 모든 평가자는 이론 A가 C보다 뛰어나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 A와 B 사이의 우열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정확성과 단순성을 합산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어떤 평가자는 이론 A가 B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가중치 함수 1의 경우), 어떤 평가자는 이론 B가 A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할 가능성이 있다(가중치 함수 2의 경우).

이러한 불일치가 일어날 경우, 우리는 어느 평가자의 선택을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해야 할까? 쿤에 따르면 두 선택은 모두 올바른 선택에 포함된다. 개별 과학자들은 저마다 과학의 규범을 충실히 따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이 허용되며, 다른 선택을 한 과학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쿤 1997a, 305-306쪽). 이와 같은 결론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판단 기준도 함께 바뀌기 때문에 패러다임에 대한 합의가 어렵다는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 논제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쿤은 단지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 논제를 가치 충돌의 문제로 다시 표현한 것뿐일까? 그렇다면 그는 왜 수많은 비판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공유된 가치들에 호소한 이론 선택을 제안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쿤의 공유된 가치 접근은 쿤의 초기 견해 속 패러다임의 지나친 구속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제안된 것이 분명하다. 공유된 가치 접근은 하나의 패러다임에 구속된 정상과학의 지나친 독단성을 완화하기 위한 해법일 뿐 아니라,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에 따른 경쟁 패러다임간 상호 설득 불가능성에 대한 해법으로, 그 핵심적인 전략은 평가되어야 할 이론과 판단 기준을 분리시킨 것에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은 이론과 판단 기준이 함께 얽힌 총체로서 묘사되곤 했는데,[2]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론과 판단 기준을 한꺼번에 바꾸는 개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유된 가치 접근에서는, 판단 기준이 평가되어야 할 이론이 아닌 평가자에 해당하는 개별 과학자에게 부착된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첫째, 과학자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치 체계, 즉 조금씩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다른 이론을 선택할 수 있고, 이는 기존 이론이 다수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일부는 대안 이론을 선택하여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둘째, 두 이론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개별 과학자는 자신의 판단 기준을 변경하지 않고도 자신이 선택하는 이론을 변경할 수 있으며, 이는 개종이 아닌 이론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가능성은 표 2와 같은 가상의 이론 선택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표 2. 두 시점의 경쟁 이론에 대한 가치 평가 변화
시점 1 시점 2
이론 이론 A 이론 B 이론 A 이론 B
단순성 80 90 80 90
정확성 80 80 80 98
정합성 80 40 80 70
그룹 X

(⅓:⅓:⅓)

80 70 80 86
그룹 Y

(0.8:0.1:0.1)

80 84 80 88.8

표 2에서 이론 A는 기존 이론을, 이론 B는 신생 이론을 가리킨다. 시점 1에 과학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확성 면에서 두 이론이 동등하지만, 단순성 면에서는 B가 A보다 우월하고, 정합성 면에서는 A가 B보다 우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만약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룹 X처럼 세 가지 가치를 ⅓:⅓:⅓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평범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이론 A를 선택할 것이고, 이론 B의 잠재력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묻혀 버릴 것이다. 반면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세 가치를 0.8:0.1:0.1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독특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Y)이 소수라도 속해 있다면, 그 소수의 과학자는 이론 B를 선택할 것이다.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평범한 가치 체계(가중치 함수 1)를 가진 과학자[그룹 X] 90%, 독특한 가치 체계(가중치 함수 2)를 가진 과학자[그룹 Y] 10%로 구성되어 있다면, 90%의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 A를 선호하고, 독특한 가치 체계를 가진 10%만이 새로운 이론 B를 선택한다. 즉 가치 체계 차이에 따른 이론 선택의 불일치 덕분에, 과학자 공동체는 한 이론의 독단을 피하고 대안 이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며, 바로 이것이 공유된 가치 접근을 통해 쿤이 얻고자 한 첫 번째 이득인 위험의 분산 투자이다(쿤 1997a, 317쪽).

그러나 이 상황은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A만 선택하여 B의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황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그룹 X와 Y 사이의 논쟁이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논쟁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상대의 가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표 2의 그룹 Y에 속한 과학자들이 X에 속한 과학자들에게 단순성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득은 쉽지 않으며, 설득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설득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분명치 않다. 쿤은 이론 선택을 가치 선택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방법을 거부했다(쿤 1997a, 321-322쪽).

다행히도 상대의 가치 체계를 변화시키지 않고도 논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있으며, 쿤은 이러한 방법을 지지했다. 그것은 바로 상대의 가치 체계에 비추어 보더라도 경쟁 이론보다 우월하도록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과학혁명에 기여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이 이론을 선택한 개인적인 이유만으로는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상대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친다. 쿤이 염두에 둔 전형적인 사례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었다. 이에 따르면,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단순성, 혹은 미적 조화 때문에 그 이론을 선택했지만, 그가 다른 천문학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의 노력을 통해 개량된 태양 중심의 체계가 지구 중심의 체계보다 훨씬 더 정확한 위치 예측을 산출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갈릴레오가 대중을 상대로 태양중심설을 설득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은 태양중심설과 정합적인 물리학 체계의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일찍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받아들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개인적 특이성에 호소해야 할지라도, 그 체계를 완벽하게 하려는 그들의 노력에 의해 메워진 빈틈들은 오로지 그들이 공유한 가치들에 의해서만 지정된 것이었다.”(쿤 1997a, 316쪽)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설득에 의해 입장을 바꾼 사람들은 그들과 동일한 가치 체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들과 다른 평범한 가치 체계를 가졌음에도 그들이 발전시킨 이론이 자신의 평범한 가치 체계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설득된 것이었다.[3]

표 2의 이론 선택 상황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시점 1에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 다수는 이론 A를 선택하지만, 이론 B를 선택한 그룹 Y의 과학자들은 이론 B의 정확성이나 정합성을 높임으로써 이론 B를 개선할 수 있다. 그 결과 시점 2와 같은 상황이 되면, 평범한 가치 체계를 가진 그룹 X의 대다수 과학자들에게도 이렇게 개선된 이론 B는 개선되지 않은 이론 A보다 우수한 이론이 된다. 시점 2의 이론 B가 이론 A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론 B의 정합성은 이론 A의 정합성보다 떨어지며,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이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는 이론 A보다 B를 선택한다. 이는 대다수(그룹 X)의 평범한 가치 체계(가중치 함수 1)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론 B가 가진 다른 장점들이 그 단점에 비해 무시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유된 가치 접근에서는, 이론 A를 선택했던 과학자가 이론 B로 자신의 선택을 바꾸기 위해 반드시 자신의 판단 기준, 즉 자신의 가치 체계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바로 쿤이 공유된 가치 접근을 통해 기대한 두 번째 이득인 개종 없는 이론 선택 변화의 가능성이다.[4]  

3. 공유된 가치 접근과 이론 선택의 합리성

결국 쿤은 공유된 가치 접근을 통해 자신의 초기 견해의 두 가지 문제, 즉 불일치의 어려움과 합의의 어려움 모두 완화하고자 했으며, 그 문제는 분명히 완화되었다. 그렇다면 공유된 가치에 의한 이론 선택 과정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쿤이 제시하는 이론 선택의 합리성은 상당히 허용적이며, 약한 의미만을 가진다. 쿤은 개별 과학자가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에 동의하는 한, 그가 아무리 다른 과학자와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합리적이다. 그래서 표 2의 과학자 그룹 X와 Y는 모두 합리적일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동시에 합리적일 수 있는가? 시점 1에 그룹 Y에 속한 과학자가 정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이론 B를 선택했더라도, 그가 일부러 낮은 정합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합리적일 수 있다. 즉 합리적 행위자로서 그는 이론 B가 이론 A보다 단순하다는 이유로 선택한 것이지 이론 B의 정합성이 이론 A보다 낮기 때문에 이론 B를 선택한 것이 아니며, 그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론 B의 정합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그룹 X에 속한 과학자가 이론 A를 선택한 이유가 이론 A의 낮은 단순성 때문이 아니라면, 그 역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개인적 차원에서 이론 선택의 합리성은 최소한의 금지 규범만을 가진 약한 의미의 합리성이다.

둘째, 집단적 차원에서 쿤이 제시하는 이론 선택의 합리성은 장기적 성공 전략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쿤에게 이론 선택은 미래의 연구 결실이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추구’ 또는 ‘투자’ 행위로서, 공유된 가치들에 의한 이론 선택은 과학자 공동체가 미래에 얻을 결실을 최대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 체계의 차이로 인해 상이한 선택이 가능하고, 이것이 공동체 전체로서는 분산 투자의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즉 공유된 가치에 의한 이론 선택은 발전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이론을 선택하여 발전시킬 소수를 허용하며, 이러한 소수의 선택 없이는 과학의 진보는 멈출 위험이 있다. 물론 가치의 목록은 공유되어 있기 때문에 발전시킬 가치가 아예 없는 이론의 선택은 배제되며, 새로운 이론을 선택한 소수가 이를 발전시켜 기존의 이론을 고수하던 다수를 설득하여 높은 수준의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분석만으로는 공유된 가치들에 의한 이론 선택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인 전략인지, 과연 “최적의” 전략인지 또는 “유일한” 전략인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과학의 장기적인 성공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전략인 것은 분명하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합리적’이다.[5]

셋째, 공유된 가치에 의한 이론 선택의 합리성은 가치 체계의 상대적 안정성에 의존한다.[6] 쿤에 대한 한 가지 우려는 패러다임 사이의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에 기인했는데, 패러다임이 바뀔 때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기준도 함께 바뀐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약불가능성 논제에 따르면, A라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진영은 a라는 기준을, B라는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진영은 b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진영은 공통의 기준에 호소하여 합의에 이를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만약 상대를 설득하려면 자신의 기준이 좋은 기준임을 설득해야 하지만, 이러한 기준의 설득은 쉽지 않기 때문에 혁명기에 상대 진영을 설득하려는 과학자들의 논증은 때로 순환 논증에 빠지게 된다(Kuhn 1996, 109-110쪽).

공유된 가치에 의한 이론 선택은 이러한 문제에 심각하게 노출되지 않는다. 우선 공유된 가치의 목록은 범패러다임적이기에, 과학자들은 상대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과학자를 설득하기 위한 건전한 국소적인 논증들을 제시할 수 있다. 표 2에서 시점 1의 과학자 그룹 X는 Y에게 정합성 면에서는 이론 A가 B보다 낫다는 논증을 제시할 있고, 반대로 과학자 그룹 Y는 X에게 단순성 면에서는 이론 B가 A보다는 낫다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고, 이러한 논증은 종합적인 판단에 비해 동의도 쉽게 구할 수 있다.[7] 물론 개별 과학자마다 가치별 가중치를 다르게 두기 때문에, 종합 판단에서는 불일치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룹 Y의 노력으로 이론 B가 개선될 경우(표 2의 시점 2), 그는 “단순성이 중요하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상대에게 B를 선택하도록 설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설득 과정은 공동체 내에서 허용되는 것으로 합의된 가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물론 쿤(1997a, 320-322쪽)은 가치 체계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 변화가 이론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쿤은 가치 체계의 변화가 이론 변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공동체 내에서 허용되는 것으로 합의된 가치 체계들은 해당 시기에 이론 선택을 정당화하는 토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택된 이론이 다시 가치 체계에 영향을 주는 피드백 루프가 존재할 수 있지만, 이는 악순환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공유된 가치들에 의한 이론 선택 및 변화는 전체론적이기보다는 점진적이며, 이러한 결론은 라우든(Laudan 1984, 특히 4장)이 쿤을 비판하며 제시했던 점진적 그물 모형과 거의 흡사하다.

4. 의사결정 행위로서의 이론 선택

공유된 가치 접근이 불일치의 어려움과 합의의 어려움 모두를 완화하고 과학의 장기적인 성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접근법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첫째, 공유된 가치 접근은 과학자들이 왜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손쉬운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답하는 가장 간편한 전략은 과학의 목표에 비추어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쿤은 과학의 목표를 진리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과학의 목표가 진리라 하더라도 그는 공유된 가치들의 추구가 진리를 유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쿤(1997b)은 과학이란 활동 자체가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정의된다는 식의 ‘사소한 정당화’를 시도한 바 있는데, 이는 ‘과학의 장기적인 성공’에 기초하여 자신의 접근을 정당화하는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둘째, 공유된 가치 접근은 이론 선택이 증거에 기초해 이루어진다는 고전적인 생각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공유된 가치 접근은 ‘증거’라는 개념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이론 선택을 해명한다. 물론 쿤은 ‘논증’이나 ‘이유’라는 개념을 자주 언급했는데, 이는 “단순성이 높다”, “적용범위가 넓다”처럼 개별 가치에 의거한 평가들이 이론 선택을 위해 충분하진 않지만 적절한 이유나 증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그러한 가치 판단들이 어떻게 이론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가장 손쉬운 답은 이론에 대한 과학자의 가치 판단의 가중치 합이 이론에 대한 그 과학자의 합리적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다는 생각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론 선택에 가치가 개입한다는 쿤의 통찰들을 포용하고자 한 일부 베이즈주의자들은 과학의 목표를 진리 또는 확률로 설정하고서, 각각의 가치들에 대한 높은 평가가 높은 확률 또는 확률의 증가를 보장함을 보이고자 했고, 이러한 증명은 그 가치들을 정당화하는 셈이 될 것이다.[8]

쿤의 공유된 가치들을 확률 내에서 포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엄청나게 많은 논의를 낳았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시도는 쿤이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선택에 가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문제 또는 인식적 평가의 문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를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선택 문제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러다임 사이의 논쟁이 대체로 문제 풀이 능력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 논쟁은 사실 상대적인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논의의 핵심은 어떤 경쟁 패러다임도 완전히 풀었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다수의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에 있다. 과학을 수행하는 대안적 방식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결정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Kuhn 1996, 157-158쪽)

여기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성격을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정도나 주관적 확률을 둘러싼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며, 이후 라우든 등의 학자들이 언급한 ‘추구로서의 선택’과 유사하다.[9] 어쩌면 쿤은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에 추구의 맥락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선구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쿤은 과학자들 사이에 공유된 가치들 중 ‘다산성’을 소개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 기준인 다산성은 지금까지보다 더 강조될 만한 것이다. 두 이론 중에서 선택하는 과학자는 보통 자신의 결정이 이후의 연구 경력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는 대개 보상을 동반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성공들을 기약하는 이론에 특히 끌리게 된다.(쿤 1997a, 302쪽)

쿤의 언급 속에서 ‘다산성’이라는 가치는 이론의 참/거짓을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구자라는 사회적, 직업적 정체성에 특화된 가치이며, 동시에 개인적 보상이라는 실용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라우든(Laudan 2004)은 ‘다산성’뿐 아니라 ‘설명력’, ‘적용 범위’ 등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 역시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야릇한 문제를 야기했다. 인식적 가치(epistemic value)는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은 참/거짓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가치들은 인식적 가치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가치들을 단지 비인식적 가치 또는 사회적 가치라고 부르면 과학은 비합리적 활동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라우든이 택한 해법은 과학의 공유된 가치들을 ‘인지적 가치(cognitive value)’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우리가 이론 선택을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고전적인 의사결정 이론에 따르면, 의사결정은 선택지, 세계의 상태, 결과로 이루어진 행렬을 필요로 하며, 이 행렬은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된 가치에 의해 완성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상태에 대한 확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 가치를 최대화하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전략을 이용할 수 있다.[10]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특정한 이론을 선택했을 때 나타날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하는 우리의 가치가 이론에 대한 믿음의 정도 또는 인식적 평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는 이론 선택을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이론 선택은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 결과를 그대로 따르지 않게 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한 과학자가 경쟁하는 두 이론 A와 B에 대해 각각 0.6과 0.3의 주관적 확률을 부여하고 있다고 해보자. 즉 그는 A가 B보다 더 참일 것 같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더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 A는 이미 그 이론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파헤칠 대로 파헤쳤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구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인 반면, 상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이론 B는 미성숙한 이론으로 여러 가능성이 아직 검토되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이론 A가 참이고 B가 거짓이라면 B를 선택하여 연구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론 B가 참이라면 B를 채택하여 연구한 재능 있는 과학자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며 성공을 거두고 그에 따르는 보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주된 가치는 쿤이 이야기한 연구의 다산성과 그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

표 3. 이론 선택을 위한 가상의 의사결정 행렬
세계의 상태

선택지

A가 참이다

Pr=0.6

B가 참이다

Pr=0.3

둘다 거짓

Pr=0.1

기대 가치
A를 선택하여 연구한다 +30 -10 0 +15
B를 선택하여 연구한다 -10 +100 0 +24

이러한 직관에 기초하여 우리는 표 3과 같은 가상의 의사 결정 행렬을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표 3과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가졌다면, 그는 이론 A가 B보다 참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가치가 높은 선택지인 “B를 선택하여 연구하기”를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이론 선택의 순위는 인식적 평가의 순위를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11] 이는 단지 가상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는 위와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이론 선택 상황이 실제로 존재했다.

4.1. 아보가드로 가설의 다산성과 수용

아보가드로와 돌턴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은 각 원자의 원자량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돌턴은 단순성에 의존하여 탄소(C):수소(H):질소(N):산소(O)의 원자량을 6:1:7:8로 설정한 반면, 아보가드로는 이원자분자 가설과 “기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동일한 부피 속에는 동일한 수의 분자가 존재한다”는 EVEN(Equal Volume, Equal Number) 가설을 통해 그들의 원자량을 12:1:14:16으로 설정했다. 모든 화학 반응과 화합물은 양쪽 어느 방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었으며, 화학 결합이 전기력에 의존한다는 당시의 표준적인 견해는 아보가드로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같은 종류의 원자가 2개씩 결합하여 이원자분자를 이룬다는 것은 전기적으로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장하석 2014, 8장).

두 견해 사이의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화학자들이 증가했다. 그들은 아예 화학에서 원자 개념을 지우고 원소들 사이의 고정된 결합 비율을 의미하는 ‘화학 당량(chemical equivalent)’ 개념만을 이용해 물질의 구성과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화학 체계를 새로 세우려고 했다. 당시 프랑스의 화학자 뒤마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원자’라는 단어를 과학에서 지워버리겠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학에서는 우리가 경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1830년대 프랑스의 화학 교과서에서는 원자 개념이 삭제됐다(장하석 2014, 269쪽).

표 4. 아보가드로식 분자량 및 분자식 결정 방법
밀도(g/L) 분자량 C H O 분자식
수소 2/22.4 2 1/1 H2
수증기 18/22.4 18 1/9 8/9 H2O
메테인 16/22.4 16 3/4 1/4 CH4
에틸렌 28/22.4 28 6/7 1/7 C2H4
에테르 74/22.4 74 24/37 5/37 8/37 C4H10O
벤젠 78/22.4 78 12/13 1/13 C6H6
첫째, 수소 기체가 1의 원자량을 가진 수소 원자가 2개 결합된 이원자분자라는 가정과 기체의 분자량이 그 밀도에 비례한다는 가정을 활용하면, 각 기체 분자의 분자량이 계산된다. 둘째, 기체 분자에 대한 화학 분석을 통해 얻은 각 원소의 질량비를 아보가드로식 원자량(C:H:O=12:1:16)으로 나누면, 각 기체 분자의 분자식이 기계적으로 도출된다.

그런데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보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질의 원자량과 분자량을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EVEN 가설은 기체 분자의 분자량이 기체의 밀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기체 M과 N의 밀도가 2:18로 측정되면, M의 분자량과 N의 분자량 역시 2:18로 확정되며, 여기에 화학 분석을 통해 얻은 각 원소의 질량비를 아보가드로식 원자량(C:H:O=12:1:16)으로 나누면 표 4처럼 분자식이 기계적으로 도출된다. 반면 돌턴의 가설은 물질의 분자량을 계산하는 데 그와 같은 기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돌턴의 가설에서 기체의 부피와 밀도는 기체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에 의해 계산된 분자량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정당화되지 않은 가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돌턴의 제안보다 훨씬 구체적인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포퍼식 논리적 평가(포퍼 1994, 6-7장)를 도입할 경우 (모든 증거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턴의 제안보다 낮은 확률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화학자들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분자량이라도 일단 그 값을 정하고 나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19세기 중반의 여러 화학자들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아보가드로의 제안대로 다양한 물질의 분자량을 구한 후, 그에 기초해 분자를 구성하는 분자식을 만들고 분자 모형을 제작했다(장하석 2014, 269쪽).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정당화된 지식을 수용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식을 계속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

분자 모형 제작자들의 시도는 결국 결실을 맺는데, 아보가드로의 제안에 기초한 분자 모형들은 물질을 분류하고 몇 가지 화학반응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또한 그 분자 모형들에서는 예상치 못한 특성이 발견되었는데,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원소의 종류에 따라 결합할 수 있는 원자의 수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장하석 2014, 270-279쪽). 마치 각 원자는 다리의 수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수소는 1개, 탄소는 4개, 질소는 3개, 산소는 2개의 다리를 가진 것처럼 서로 결합했다. 이는 오늘날 ‘원자가’라고 부르는 규칙성으로, 이러한 규칙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당시 완벽히 설명될 수 없었지만 그러한 규칙성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해 보였을 것이다. 반면 돌턴의 방식으로 분자 모형을 제작한다면, 이러한 ‘원자가’에 비견될만한 규칙성은 전혀 발견될 수 없다.

결국 초창기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낮은 인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산적이라는 실용적 이유 때문에 우선 채택되어 널리 연구에 적용되었다. 실제로 원자가 규칙을 발견한 과학자 중 하나인 케쿨레는 “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원자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논의는 형이상학에서 할 일이다”라고 말했었다(장하석 2014, 278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케쿨레 등의 연구들이 산출한 다양한 장점들이 인정받자 아보가드로의 가설은 단지 유용한 것만은 아닌 가설로서 서서히 인정받게 되었다.

4.2.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와 수용

16세기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수용 과정에서도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는 오랫동안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여러 논자들은 태양 중심 체계의 조화 또는 단순성에 의존하는 코페르니쿠스의 논변이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합리적 이유를 제공했다고 주장했으나,[12] 이는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부적절한 해명이다.[13]

태양 중심 체계를 옹호하는 코페르니쿠스의 논변은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둘 경우 행성 천구의 크기와 천구의 회전 속도 사이에 단조 관계가 성립하는 조화로운 우주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 의존하지만, 당시에는 애초에 우주가 그러한 방식으로 조화로워야 한다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을 이유를 제공하지 않았고, 실제로 16세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했다.

우선 16세기 비텐베르크 지역의 많은 천문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모형을 높이 평가하고, 가르치며, 천문표 계산에도 사용함으로써 태양 중심 체계를 확산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으면서도 도구로서는 수용한 것이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대심을 제거하고 등속 원운동을 복원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반면, 태양 중심 체계의 ‘조화’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체계와 충돌한다는 점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거짓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되긴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크게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문학을 행성 위치 예측을 위한 도구로서만 수용했고, 물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천문학 이론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6세기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대한 신뢰에도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한다. 티코 브라헤는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혜성을 관측함으로써, 행성이 박혀 있는 딱딱한 천구들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예측 도구로서의 천문학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지만, 물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천문학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의미심장했다. 왜냐하면 행성 운동의 물리적 원인이 천구가 아닐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행성 운동의 새로운 물리적 원인을 탐색하고자 할 경우,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는 희망을 제공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태양을 중심으로 큰 원을 도는 행성일수록 회전 속도가 줄어드는 조화로운 관계가 성립하는데,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그러한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주는 물리적 원인도 찾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그러한 가능성을 제공하지 못했다). 실제로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를 단서로 태양이 행성 운동의 원인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태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태양이 미치는 힘이 줄어들기 때문에 행성의 속도가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그 조화가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탐구는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과 타원 궤도의 법칙의 발견을 이끌었다.

요컨대, 16세기 당시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 자체는 그 체계를 믿을 이유를 제공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천문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수용했다. 도구로서의 천문학을 추구한 천문학자들은 계산적 편이성 때문에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행성 위치 계산에 활용했다. 한편 천구의 존재가 의심받기 시작한 이후, 물리적 이해 가능성을 추구한 일부 천문학자들은 조화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미적 가치를 행성 운동의 새로운 물리적 원인을 찾을 수 있는 희망과 단서, 즉 다산성의 지표로 이해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기초한 탐구를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을 이유들은 이러한 탐구들이 성공한 후에나 제공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14]

4.3. 소결

위의 두 사례는 실제 과학의 이론 선택에서 미래의 가능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 이론이 상당히 구체적인 연구 거리와 연구 방법을 제공하거나 새로운 발견의 구체적인 희망을 제공할 경우, 그 이론의 잠재력은 대다수 또는 일부 연구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인식적인 차원의 논쟁은 계속되더라도, 보다 구체적인 잠재력을 가진 이론은 연구자들의 세계에 침투하기 쉽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세계에 침투한 이론을 적용한 연구들이 결실을 맺을 경우, 그 이론은 서서히 인식적으로도 정당화된다.

나는 여기서 증거 판단 또는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의 무용성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 선택에서 인식적 평가가 담당하는 역할을 바로 잡고 있는 것이다. 증거 판단은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를 담당하며, 각 과학자는 그 평가 결과를 이론 선택을 위한 의사결정 행렬의 한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여타의 의사결정 상황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에는 인식적 평가 외의 가치가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특히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산성과 같은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달리 말해, 과학자들의 이론 선택은 그 이론이 얼마나 인식적으로 정당화되었는지에 대한 고려뿐만 아니라 그 이론에 대한 추구가 과학자 개인에게 새로운 성취와 보상을 얼마나 가져다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따라서 과학의 공유된 가치들 중 적어도 일부는 의사결정을 위한 비인식적 가치에 속하며, 과학의 공유된 가치들을 모두 인식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이론을 믿을 이유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을 탐구의 도구로 활용하는 과학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5. 다양한 의미의 이론적 선택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를 이론에 대한 믿음의 정도와 관련된 평가로 한정하고, 이론 선택을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 간주해보자. 그러면 이론의 인식적 평가는 이론 선택에 필요한 하나의 요소로만 기능하며, 이론 선택에는 다양한 비인식적 가치들이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치를 고려하여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이러한 이해 방식에서, 이론 선택이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그 이론을 “참이라 믿기로 선택하기”, “참이라 믿는다고 말하기로 선택하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로 선택하기”, “예측에 활용하기로 선택하기”, “연구에 활용하기로 선택하기” 등 다양한 의미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때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론을 “참이라 믿기로 선택하기”이다. 어쩌면 그것은 선택조차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이론을 참이라고 믿을 수는 있지만, 참이라고 믿기로 선택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참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다만 “믿는다고 말하거나”, “학생들에게 가르치거나”, “예측에 활용하거나”,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이론은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론 선택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이론의 선택과 예측에 활용할 이론의 선택과 향후 연구에 활용하기 위한 이론의 선택이 똑같을 필요도 없다. 한 명의 과학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경쟁하는 이론 A, B, C가 있을 때, 한 과학자는 학생들에게 이론 A를 가르치고, 예측을 위해 B를 활용하면서, C를 다른 연구에 활용할 수도 있으며, 각각의 선택은 모두 합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열거된 이론 선택 중에서 가장 “표준적인” 의미의 이론 선택은 그중 무엇일까? 그런 표준적인 의미의 이론 선택이란 정의될 수 없다. 다만 과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선택은 있는 것 같다. 바로 “연구에 활용하기로 선택하기”이다. 보다 구체적인 연구 거리를 제공하는 이론은 과학자들에게 “연구에 활용하기로 선택됨”으로써 그들의 세계에 서서히 침투한다. 그리고 연구자들의 세계에 침투한 이론을 적용한 연구들이 결실을 맺을 경우, 그 이론은 인식적으로도 서서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연구 성과’를 가장 중요한 직업적 가치로 여기는 현대 과학자 사회의 제도적 평가 메커니즘은 이러한 종류의 선택을 부추김으로써 과학의 진보에 기여한다. 즉 다산성이라는 가치는 일차적으로는 실용적 가치이지만, 이러한 피드백을 고려할 경우 간접적으로 인식적이다.

6. 결론

이 글에서 나는 공유된 가치 접근이 쿤의 초기 견해가 가진 두 가지 문제, 즉 불일치의 어려움과 합의의 어려움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제안되었으며, 실제로 두 가지 어려움을 모두 완화한다는 점을 보였다. 쿤의 초기 견해와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는 이론에 부착되어 있던 판단 기준이 이론에서 떨어져 나와 과학자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이고, 이를 통해 해결된 것은 과학자들이 개종 없이도 자신의 이론 선택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나는 쿤이 강조하는 이론 선택이 ‘추구로서의 선택’에 가깝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론 선택이라는 실천적 행위를 고전적인 의사결정 이론에 기초하여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과학자들이 공유한 가치들을 모두 이론에 대한 믿음이나 확률을 결정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즉 과학자들이 가진 가치들 중 적어도 일부는 인식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다. 과학자들이 이론 선택에 활용하는 공유된 가치들을 모두 인식적인 것으로 볼 경우, 이론에 대한 낮은 정도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탐구에 활용하는 과학자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그러한 가치들에 의존한 의사결정이 다시 믿음에 미치는 피드백을 고려할 때 그 실용적 가치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인식적인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과학에 대한 쿤의 급진적인 이해 방식을 확률, 가치, 의사결정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 방식과 화해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며, 단순성 등의 가치를 확률로 정당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베이즈주의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주의할 점은 의사결정 이론에 기초한 분석을 통해 과학자들의 공유된 가치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데, 의사결정 이론은 개인이 가진 확률과 가치에 기초하여 그의 의사결정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들의 공유된 가치들에 대한 정당화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나는 과학자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크게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제시할 수 있다. 첫째, 그 가치들은 과학이라는 제도가 사회에서 담당하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둘째, 그 가치들은 과학이라는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그 제도에 속한 과학자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는다.

각주

  1. 쿤(1997a)은 불일치의 원인으로 가치의 적용이 애매하다는 점, 즉 가치에 대한 해석적 차이도 지적한다. 예컨대 ‘정확성’이라는 가치가 의미하는 바가 ‘정성적 정확성’인지 ‘정량적 정확성’인지 과학자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적 차이 역시 가중치 차이로 분석될 가능성이 있다. 즉 과학자마다 정확성이라는 가치를 구성하는 두 가지 세부 가치인 ‘정성적 정확성’과 ‘정량적 정확성’에 부여하는 가중치가 다르다고 하면, 해석적 차이는 가중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2.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 방법, 기준을,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모두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Kuhn 1996, 109쪽)
  3. 조인래(2017; 2018, 5장)는 쿤의 방법이 이론 선택의 불일치만 설명할 수 있을 뿐, 합의 형성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만하다고 우려하는 반면, 허원기(2021)는 그러한 우려가 지나치다고 반박하고 있다. 나는 둘의 논쟁에서 허원기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이 글의 논점은 쿤의 방법이 합의를 도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에 있지는 않다. 이 글의 논점은 공유된 가치 접근이 판단 기준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이론 선택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4.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부연을 하자면, 나의 주장은 “공유된 가치 접근이 판단 기준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이론 선택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일 뿐, 공유된 가치 접근이 언제나 완전한 합의를 도출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첫째, 공유된 가치 접근에 따른 이론 선택은 대체적인 합의만 도출할 뿐 만장일치는 도출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표 2의 공동체 내에 그룹 X와 그룹 Y 외에 단순성, 정확성, 정합성을 0.1:0.1:0.8의 비율로 합산하는 독특한 가치 체계를 가진 소수의 그룹 Z가 있다면, 그들은 시점 2에도 계속 A를 고집할 수 있다. 즉, 이는 공유된 가치 접근이 만장일치의 형태가 아닌 현실의 이론 변화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공유된 가치 접근은 대체적인 합의조차 오랫동안 도출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표 2에서 이론 B가 시점 2처럼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룹 X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론 B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그룹 X와 그룹 Y간의 불일치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즉 공유된 가치 접근에서 합의 형성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존하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혹자는 공유된 가치 접근이 너무 방만하다고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가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인지는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예컨대 장하석(Chang 2012)은 복수의 실천체계(패러다임)를 공존시키는 것이 나을 때가 있음을 화학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논증한 바 있다.
  5. 최적의 분배 비율에 대한 연구는 키처(Kitcher 1990; 1993)를 참고하라. 키처의 논의는 연구 성과를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보상에 근거한 과학자의 선택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큰 틀에서는 실용적 가치에 근거한 이론 선택에 해당한다. 또한 키처의 논의는 개인마다 연구를 통해 기대하는 보상 또는 가치가 다양하다는 점과 그에 따른 선택의 불일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쿤식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키처에 따르면, 개인이 이론에 기대하는 가치는 이론의 정확성이나 유망성과 같은 내적 평가뿐 아니라, 각 이론의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의 분포에도 의존한다.
  6. 조인래(2018, 202-204쪽)는 쿤의 합의 형성 메커니즘이 가치 체계의 안정성에 의존한다는 해석이 지나치게 전통적이어서 쿤 본인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인래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불일치 단계에서는 가치가 주도하고, 합의 형성 단계에서는 증거가 주도하는 이원론적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쿤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미 명시적으로 답변한 바 있다. “가치 변화가 그것과 관계 있는 이론 변화만큼 빠르게 일어났거나 혹은 그만큼 완전했다면, 이론 선택은 가치 선택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 둘 중의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위한 정당화를 제공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가치 변화는 이론 선택보다 뒤늦게 그리고 거의 의식되지 않은 채로 일어나는 일이 보통이며, 그 변화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후자의 그것보다 작다. 내가 여기서 가치에 부과한 역할을 위해, 그러한 상대적 안정성은 충분한 토대를 제공해 준다.”(쿤 1997a, 321-322쪽)
  7. 공유된 가치에 근거한 국소적 논증 가능성은 『과학혁명의 구조』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과학혁명의 구조』 12장에서 쿤은 “패러다임 변화를 둘러싼 싸움에서 특히 효과적이라고 입증된 논증”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논한 바 있는데(Kuhn 1996, 153-159쪽),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공유된 가치에 근거한 국소적 논증들로 재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쿤의 공유된 가치 접근은 쿤의 초기 견해를 대체하는 견해라기보다는, 쿤이 초기에 가졌던 여러 충돌하는 견해들 중 일부를 명료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 그중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가치는 ‘단순성’으로, 단순한 이론일수록 더 높은 사전 확률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제프리즈(Jeffreys 1961, 46-50쪽)의 시도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러나 단순성을 반증가능성의 정도로 정의한 포퍼(1994, 160쪽)는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단순한 이론일수록 참일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포퍼의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할 경우, 단순한 (통합적인) 이론이 더 높은 비율로 확률이 증가한다는 마이어볼트(Myrvold 2003), 소버(Sober 2015, 102-128쪽) 등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이론이 복잡한 이론에 비해 증거에 의해 더 높은 사후 확률을 얻는다는 것은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거에 의해 단순한 이론이 더 높은 비율로 확률이 증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단순한 이론은 애초에 더 낮은 사전 확률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정동욱 2018, 5장; 2021).
  9. 라우든(Laudan 1977, 108-114쪽)은 ‘수용으로서의 선택’과 ‘추구로서의 선택’을 구분하면서, 그 선택 기준 역시 각각 “적절성”과 “진보성”으로 구분된다고 주장했으며, 커드(Curd 1980)는 이론 추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 “탐구의 경제성” 아래 묶일 수 있으며, “추구의 논리 안에 있는 평가의 범주는 실용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말했다.
  10. 의사결정 이론에 대한 이러한 요약은 기어리, 비클, 몰딘(2008), 9장에 소개된 방식을 따랐다.
  11. 한 심사자는 다산성이나 단순성 등의 가치가 인식적 가치이기보다 실용적 가치임을 주장하는 나의 주장이 낮은 확률값을 가진 이론을 그것의 높은 다산성이나 단순성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 존재한다는 근거에 의존하는 것으로 본 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안적인 해명이 가능함을 주장했다. “문제의 가치들이 이론의 확률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하에서일지라도, 예컨대 일관성과 관련해서는 어느 이론의 확률이 낮아도 단순성과 관련해서는 그 이론의 확률이 높아 해당 이론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하나의 이론에 대해 일관성과 관련된 확률, 단순성과 관련된 확률, 정확성과 관련된 확률 따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둘째, 나는 단순한 이론일수록 이론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베이즈주의적 분석과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수용 사례를 통해 논한 바 있는데(정동욱 2018; 2021),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이 논문에서는 이를 4.2절에서 다룰 것이다.
  12. 글리모어(Glymour 1980, 5장), 마이어볼트(Myrvold 2003), 마르텐스(Martens 2009), 워럴(Worrall 2010), 소버(Sober 2015, 1장) 등은 코페르니쿠스의 조화 논변을 태양중심설의 더 높은 단순성이나 통합성 또는 더 높은 시험가능성에 의존하는 논변으로 해석하여, 태양중심설이 지구중심설보다 증거로부터 더 많은 뒷받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평은 정동욱(2021)을 참고하라.
  13. 아래의 논의는 정동욱(2021)을 이 논문의 목적에 맞게 재구성한 것으로, 일부 동일한 문장도 존재한다.
  14. 이러한 분석은 가중치 평균에 기초한 2절의 분석이 실제 코페르니쿠스 체계 수용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동시에, 다양한 행위자들의 선택에 내포된 의미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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