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과학
로마의 멸망과 함께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던 학문 전통이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그로부터 몇 세기 후 유럽에서는 고대의 지식을 담은 원고들이 다량 유입되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고, 이를 소화하기 위해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친 고대의 지식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다양한 자연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그 지배력을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우주는 유한한 구체로, 지상계와 천상계로 구분된다. 달 아래의 세계인 지상계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네 원소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본성에 따라 고유의 장소를 구성하는데, 무거운 본성을 가진 흙과 물은 아래쪽, 즉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고, 가벼운 본성을 가진 공기와 불은 위쪽, 즉 바깥쪽을 차지한다. 만약 어떤 물체가 고유의 장소에서 벗어나 있다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 고유의 장소로 돌아가는 운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흙으로 이루어진 돌멩이를 위로 던지면 다시 아래로 떨어지게 되고, 불은 위로 올라가게 된다. 반면 천상계는 행성과 별들을 운반하는 천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천구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인 ‘에테르’의 본성에 의해 우주의 중심을 기준으로 영원한 원운동을 한다. 가장 안쪽의 천구는 달을 운반하고, 가장 바깥의 항성 천구는 별들을 운반하며, 항성 천구 너머에는 물질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물체의 운동은 자연 운동과 강제 운동으로 구분된다. 자연 운동은 물체의 본성이라는 내부의 힘에 의해 일어나지만, 강제 운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일어난다. 예를 들어, 돌의 수직 낙하는 자연 운동으로서 저절로 일어나는 반면, 돌의 수평 운동은 강제 운동으로서 누군가가 밀어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때 물체의 속력은 힘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하는데, 만약 진공이 존재한다면 저항이 사라져 물체의 속력이 무한대로 증가할 수 있다. 그런데 물체의 속력이 무한대가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과 갈등의 소지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따르면, 우주에는 여러 개의 땅이 존재할 수 없고 진공도 존재할 수 없다. 필연성이 강조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들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의 전능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로 인해 13세기에 유럽 곳곳의 기독교 당국은 아리스토텔레스 금지령을 선포하여, 신이 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금지령들은 대부분 실패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융합이 시도되었다. 기독교와 융합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에서 지구의 중심에는 지옥이 배치되었고, 원래는 물질도 공간도 없었던 항성 천구 너머에는 신의 옥좌가 배치되었다. 인간은 물질적인 흙과 정신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이중적 본성을 가졌다. 또한 인간은 지옥에 가까운 지표면에 거주하지만 천상계 아래에 놓인 채 신의 감시를 받는다는 점에서,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 본성과 중간적 위치는 기독교적 선택을 강요한다. 즉 인간은 물질적 흙의 본성을 따라 고유의 장소인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정신의 본성을 따라 천국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렇게 기독교와의 융합에 성공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의 후원을 등에 업고서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둘째, 일부 철학자들은 신의 전능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필연적 성격을 제거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계의 작동 방식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전능한 신이 창안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세계의 대안적 작동 방식을 상상했다. 예컨대, 14세기 철학자 오렘은 우주에 흙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땅이 존재할 가능성을 논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흙으로 이루어진 땅은 복수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우주에 두 개의 땅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우주의 중심으로 떨어져 합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렘에 따르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은 증명되지 않은 운동 이론을 전제하고 있었다. 어쩌면 흙은 우주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까이 있는 다른 흙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땅들이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면 합쳐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렘의 대안적인 이론에서 물체의 무거운 본성은 우주에서의 절대적 위치가 아닌 다른 물체에 대한 상대적 위치에 의존한다. 그러나 오렘은 자신의 대안적 이론을 이용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진지하게 수정하려고 시도하진 않았으며, 우주에 실제로 여러 개의 땅덩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의 전능성을 회복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우리의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4세기 이후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에게 기독교와 융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완전히 표준적인 견해로 확립됨과 동시에 끊임없는 비판적 고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오렘이 시도한 것과 같은 비판적 사고실험들은 훗날 ‘만유인력’과 같은 근대적 개념이 탄생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최종적인 타도에 기여했다.
퀴즈
A.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 방식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원소마다 고유한 장소가 있다.
② ‘아래’란 우주의 중심 방향을 가리킨다.
③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속력은 무한대가 된다.
④ 돌이 떨어지는 것은 외부의 힘에 의한 강제 운동이다.
⑤ 물 속의 공기 방울이 위로 올라오는 것은 자연 운동이다.
B. 기독교와 융합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에 대해 이해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13세기 유럽의 금지령들로 인해 결국 지배력이 약화되었군.
② 흙의 고유한 장소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게 되었군.
③ 지옥과 천국은 정신적 장소로서 물리적 장소를 차지하진 않는군.
④ 항성 천구 너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그대로 유지되었군.
⑤ 물체의 운동이 그것의 본성을 통해 설명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군.
C. 오렘의 견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우주에 지구와 같은 땅이 유일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② 우주에 지구와 같은 땅이 유일할 수밖에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③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이 여러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 불만을 가졌다.
④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이 참이라면 우주에 지구와 같은 땅이 여럿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⑤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 금지령들과 같은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D.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이해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을 가정함으로써 신의 전능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② 코페르니쿠스는 흙의 고유한 장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
③코페르니쿠스는 지상계와 천상계의 작동 방식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④ 코페르니쿠스는 물체의 무거움이 다른 물체에 대한 상대적 위치에 의존한다는 오렘의 아이디어를 따르고 있다.
⑤ 코페르니쿠스는 물체의 자연 운동이 그 구성 원소의 본성에 의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관련 항목
- Edward Grant, 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
- Edward Grant, The Foundations of Modern Science in the Middle Ages
- 코페르니쿠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 토머스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
- 분류:과학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