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선택과 가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657 바이트 추가됨 ,  2024년 6월 1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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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쿤의 공유된 가치 접근은 쿤의 초기 견해 속 패러다임의 지나친 구속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제안된 것이 분명하다. 공유된 가치 접근은 하나의 패러다임에 구속된 정상과학의 지나친 독단성을 완화하기 위한 해법일 뿐 아니라,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에 따른 경쟁 패러다임간 상호 설득 불가능성에 대한 해법으로, 그 핵심적인 전략은 평가되어야 할 이론과 판단 기준을 분리시킨 것에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은 이론과 판단 기준이 함께 얽힌 총체로서 묘사되곤 했는데,<ref>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 방법, 기준을,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모두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Kuhn 1996, 109쪽)</ref>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론과 판단 기준을 한꺼번에 바꾸는 개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유된 가치 접근에서는, 판단 기준이 평가되어야 할 이론이 아닌 평가자에 해당하는 개별 과학자에게 부착된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첫째, 과학자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치 체계, 즉 조금씩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다른 이론을 선택할 수 있고, 이는 기존 이론이 다수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일부는 대안 이론을 선택하여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둘째, 두 이론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개별 과학자는 자신의 판단 기준을 변경하지 않고도 자신이 선택하는 이론을 변경할 수 있으며, 이는 개종이 아닌 이론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가능성은 표 2와 같은 가상의 이론 선택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보기에, 쿤의 공유된 가치 접근은 쿤의 초기 견해 속 패러다임의 지나친 구속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제안된 것이 분명하다. 공유된 가치 접근은 하나의 패러다임에 구속된 정상과학의 지나친 독단성을 완화하기 위한 해법일 뿐 아니라, 방법론적 공약불가능성에 따른 경쟁 패러다임간 상호 설득 불가능성에 대한 해법으로, 그 핵심적인 전략은 평가되어야 할 이론과 판단 기준을 분리시킨 것에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은 이론과 판단 기준이 함께 얽힌 총체로서 묘사되곤 했는데,<ref>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 방법, 기준을,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모두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정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서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Kuhn 1996, 109쪽)</ref>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론과 판단 기준을 한꺼번에 바꾸는 개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유된 가치 접근에서는, 판단 기준이 평가되어야 할 이론이 아닌 평가자에 해당하는 개별 과학자에게 부착된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장점을 가진다. 첫째, 과학자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치 체계, 즉 조금씩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다른 이론을 선택할 수 있고, 이는 기존 이론이 다수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도 일부는 대안 이론을 선택하여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해 준다. 둘째, 두 이론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개별 과학자는 자신의 판단 기준을 변경하지 않고도 자신이 선택하는 이론을 변경할 수 있으며, 이는 개종이 아닌 이론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가능성은 표 2와 같은 가상의 이론 선택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 class="wikitable"
|+표 2. 두 시점의 경쟁 이론에 대한 가치 평가 변화
!
! colspan="2" |시점 1
! colspan="2" |시점 2
|-
!이론
!이론 A
!이론 B
!이론 A
!이론 B
|-
|단순성
|80
|90
|80
|90
|-
|정확성
|80
|80
|80
|98
|-
|정합성
|80
|40
|80
|70
|-
|그룹 X
(⅓:⅓:⅓)
|80
|70
|80
|86
|-
|그룹 Y
(0.8:0.1:0.1)
|80
|84
|80
|88.8
|}
표 2에서 이론 A는 기존 이론을, 이론 B는 신생 이론을 가리킨다. 시점 1에 과학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확성 면에서 두 이론이 동등하지만, 단순성 면에서는 B가 A보다 우월하고, 정합성 면에서는 A가 B보다 우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만약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룹 X처럼 세 가지 가치를 ⅓:⅓:⅓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평범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이론 A를 선택할 것이고, 이론 B의 잠재력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묻혀 버릴 것이다. 반면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세 가치를 0.8:0.1:0.1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독특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Y)이 소수라도 속해 있다면, 그 소수의 과학자는 이론 B를 선택할 것이다.
표 2에서 이론 A는 기존 이론을, 이론 B는 신생 이론을 가리킨다. 시점 1에 과학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확성 면에서 두 이론이 동등하지만, 단순성 면에서는 B가 A보다 우월하고, 정합성 면에서는 A가 B보다 우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만약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룹 X처럼 세 가지 가치를 ⅓:⅓:⅓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평범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이론 A를 선택할 것이고, 이론 B의 잠재력은 실현되지 못한 채 묻혀 버릴 것이다. 반면 과학자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세 가치를 0.8:0.1:0.1의 비중으로 합산하는 독특한 가치 체계를 가진 과학자들(Y)이 소수라도 속해 있다면, 그 소수의 과학자는 이론 B를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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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공유된 가치들을 확률 내에서 포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엄청나게 많은 논의를 낳았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시도는 쿤이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선택에 가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문제 또는 인식적 평가의 문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쿤의 공유된 가치들을 확률 내에서 포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엄청나게 많은 논의를 낳았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시도는 쿤이 이론 또는 패러다임의 선택에 가치를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문제 또는 인식적 평가의 문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를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선택 문제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를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선택 문제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blockquote>패러다임 사이의 논쟁이 대체로 문제 풀이 능력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 논쟁은 사실 상대적인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논의의 핵심은 어떤 경쟁 패러다임도 완전히 풀었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다수의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에 있다. 과학을 수행하는 대안적 방식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결정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Kuhn 1996, 157-158쪽)</blockquote>여기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성격을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정도나 주관적 확률을 둘러싼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며, 이후 라우든 등의 학자들이 언급한 ‘추구로서의 선택’과 유사하다. 어쩌면 쿤은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에 추구의 맥락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선구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패러다임 사이의 논쟁이 대체로 문제 풀이 능력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이 논쟁은 사실 상대적인 문제 해결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논의의 핵심은 어떤 경쟁 패러다임도 완전히 풀었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다수의 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에 있다. 과학을 수행하는 대안적 방식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상황에서의 결정은 과거의 업적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Kuhn 1996, 157-158쪽)
 
여기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성격을 “어느 패러다임이 장차 연구의 지침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선택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패러다임에 대한 믿음의 정도나 주관적 확률을 둘러싼 선택과는 성격이 다르며, 이후 라우든 등의 학자들이 언급한 ‘추구로서의 선택’과 유사하다. 어쩌면 쿤은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에 추구의 맥락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선구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쿤은 과학자들 사이에 공유된 가치들 중 ‘다산성’의 설명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또한 쿤은 과학자들 사이에 공유된 가치들 중 ‘다산성’의 설명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blockquote>마지막 기준인 다산성은 지금까지보다 더 강조될 만한 것이다. 두 이론 중에서 선택하는 과학자는 보통 자신의 결정이 이후의 연구 경력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는 대개 보상을 동반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성공들을 기약하는 이론에 특히 끌리게 된다.(쿤 1997a, 302쪽)</blockquote>쿤의 언급 속에서 ‘다산성’이라는 가치는 이론의 참/거짓을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구자라는 사회적, 직업적 정체성에 특화된 가치이며, 동시에 개인적 보상이라는 실용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라우든(Laudan 2004)은 ‘다산성’뿐 아니라 ‘설명력’, ‘적용 범위’ 등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 역시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야릇한 문제를 야기했다. 인식적 가치(epistemic value)는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은 참/거짓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가치들은 인식적 가치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가치들을 단지 비인식적 가치 또는 사회적 가치라고 부르면 과학은 비합리적 활동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라우든이 택한 해법은 과학의 공유된 가치들을 ‘인지적 가치(cognitive value)’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해 보인다.  
 
마지막 기준인 다산성은 지금까지보다 더 강조될 만한 것이다. 두 이론 중에서 선택하는 과학자는 보통 자신의 결정이 이후의 연구 경력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는 대개 보상을 동반하는 그러한 구체적인 성공들을 기약하는 이론에 특히 끌리게 된다.(쿤 1997a, 302쪽)
 
쿤의 언급 속에서 ‘다산성’이라는 가치는 이론의 참/거짓을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연구자라는 사회적, 직업적 정체성에 특화된 가치이며, 동시에 개인적 보상이라는 실용적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라우든(Laudan 2004)은 ‘다산성’뿐 아니라 ‘설명력’, ‘적용 범위’ 등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 역시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야릇한 문제를 야기했다. 인식적 가치(epistemic value)는 참/거짓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나, 과학의 표준적인 가치들은 참/거짓과의 관련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 가치들은 인식적 가치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가치들을 단지 비인식적 가치 또는 사회적 가치라고 부르면 과학은 비합리적 활동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라우든이 택한 해법은 과학의 공유된 가치들을 ‘인지적 가치(cognitive value)’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저 말을 바꾼 것에 불과해 보인다.  


만약 우리가 이론 선택을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고전적인 의사결정 이론에 따르면, 의사결정은 선택지, 세계의 상태, 결과로 이루어진 행렬을 필요로 하며, 이 행렬은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된 가치에 의해 완성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상태에 대한 확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 가치를 최대화하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전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특정한 이론을 선택했을 때 나타날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하는 우리의 가치가 이론에 대한 믿음의 정도 또는 인식적 평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는 이론 선택을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이론 선택은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 결과를 그대로 따르지 않게 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만약 우리가 이론 선택을 일종의 실천적 행위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고전적인 의사결정 이론에 따르면, 의사결정은 선택지, 세계의 상태, 결과로 이루어진 행렬을 필요로 하며, 이 행렬은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된 가치에 의해 완성된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상태에 대한 확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 가치를 최대화하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전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특정한 이론을 선택했을 때 나타날 각각의 가능한 결과에 부여하는 우리의 가치가 이론에 대한 믿음의 정도 또는 인식적 평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는 이론 선택을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이며, 따라서 이론 선택은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 결과를 그대로 따르지 않게 된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한 과학자가 경쟁하는 두 이론 A와 B에 대해 각각 0.6과 0.3의 주관적 확률을 부여하고 있다고 해보자. 즉 그는 A가 B보다 더 참일 것 같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더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 A는 이미 그 이론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파헤칠 대로 파헤쳤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구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인 반면, 상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이론 B는 미성숙한 이론으로 여러 가능성이 아직 검토되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이론 A가 참이고 B가 거짓이라면 B를 선택하여 연구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론 B가 참이라면 B를 채택하여 연구한 재능 있는 과학자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며 성공을 거두고 그에 따르는 보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주된 가치는 쿤이 이야기한 연구의 다산성과 그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  
한 과학자가 경쟁하는 두 이론 A와 B에 대해 각각 0.6과 0.3의 주관적 확률을 부여하고 있다고 해보자. 즉 그는 A가 B보다 더 참일 것 같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더 그럴듯해 보이는 이론 A는 이미 그 이론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파헤칠 대로 파헤쳤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구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인 반면, 상대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이론 B는 미성숙한 이론으로 여러 가능성이 아직 검토되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이론 A가 참이고 B가 거짓이라면 B를 선택하여 연구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론 B가 참이라면 B를 채택하여 연구한 재능 있는 과학자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며 성공을 거두고 그에 따르는 보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주된 가치는 쿤이 이야기한 연구의 다산성과 그에 따른 보상을 의미한다.  
 
{| class="wikitable"
|+표 3. 이론 선택을 위한 가상의 의사결정 행렬
!세계의 상태
선택지
!A가 참이다
Pr=0.6
!B가 참이다
Pr=0.3
!둘다 거짓
Pr=0.1
!기대 가치
|-
|A를 선택하여 연구한다
| +30
| -10
|0
| +15
|-
|B를 선택하여 연구한다
| -10
| +100
|0
| +24
|}
이러한 직관에 기초하여 우리는 표 3과 같은 가상의 의사 결정 행렬을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표 3과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가졌다면, 그는 이론 A가 B보다 참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가치가 높은 선택지인 “B를 선택하여 연구하기”를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이론 선택의 순위는 인식적 평가의 순위를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단지 가상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는 위와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이론 선택 상황이 실제로 존재했다.  
이러한 직관에 기초하여 우리는 표 3과 같은 가상의 의사 결정 행렬을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표 3과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가졌다면, 그는 이론 A가 B보다 참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가치가 높은 선택지인 “B를 선택하여 연구하기”를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즉 이론 선택의 순위는 인식적 평가의 순위를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단지 가상의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는 위와 같은 의사결정 행렬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이론 선택 상황이 실제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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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견해 사이의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화학자들이 증가했다. 그들은 아예 화학에서 원자 개념을 지우고 원소들 사이의 고정된 결합 비율을 의미하는 ‘화학 당량(chemical equivalent)’ 개념만을 이용해 물질의 구성과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화학 체계를 새로 세우려고 했다. 당시 프랑스의 화학자 뒤마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원자’라는 단어를 과학에서 지워버리겠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학에서는 우리가 경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1830년대 프랑스의 화학 교과서에서는 원자 개념이 삭제됐다(장하석 2014, 269쪽).
두 견해 사이의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화학자들이 증가했다. 그들은 아예 화학에서 원자 개념을 지우고 원소들 사이의 고정된 결합 비율을 의미하는 ‘화학 당량(chemical equivalent)’ 개념만을 이용해 물질의 구성과 화학 반응을 설명하는 화학 체계를 새로 세우려고 했다. 당시 프랑스의 화학자 뒤마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원자’라는 단어를 과학에서 지워버리겠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학에서는 우리가 경험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1830년대 프랑스의 화학 교과서에서는 원자 개념이 삭제됐다(장하석 2014, 269쪽).
 
{| class="wikitable"
그런데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보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질의 원자량과 분자량을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EVEN 가설은 기체 분자의 분자량이 기체의 밀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기체 M과 N의 밀도가 2:18로 측정되면, M의 분자량과 N의 분자량 역시 2:18로 확정되며, 여기에 화학 분석을 통해 얻은 각 원소의 질량비를 아보가드로식 원자량(C:H:O=12:1:16)으로 나누면 표 4처럼 분자식이 기계적으로 도출된다. 반면 돌턴의 가설은 물질의 분자량을 계산하는 데 그와 같은 기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돌턴의 가설에서 기체의 부피와 밀도는 기체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표 4. 아보가드로식 분자량 및 분자식 결정 방법
!
!밀도(g/22.4L)
!분자량
!C
!H
!O
!분자식
|-
|수소
|2
|2
|
|1/1
|
|H<sub>2</sub>
|-
|수증기
|18
|18
|
|1/9
|8/9
|H<sub>2</sub>O
|-
|메테인
|16
|16
|3/4
|1/4
|
|CH<sub>4</sub>
|-
|에틸렌
|28
|28
|6/7
|1/7
|
|C<sub>2</sub>H<sub>4</sub>
|-
|에테르
|74
|74
|24/37
|5/37
|8/37
|C<sub>4</sub>H<sub>10</sub>O
|-
|벤젠
|
|78
|12/13
|1/13
|
|C<sub>6</sub>H<sub>6</sub>
|}
<!-- 첫째, 수소 기체가 1의 원자량을 가진 수소 원자가 2개 결합된 이원자분자라는 가정과 기체의 분자량이 그 밀도에 비례한다는 가정을 활용하면, 각 기체 분자의 분자량이 계산된다. 둘째, 기체 분자에 대한 화학 분석을 통해 얻은 각 원소의 질량비를 아보가드로식 원자량(C:H:O=12:1:16)으로 나누면, 각 기체 분자의 분자식이 기계적으로 도출된다. -->그런데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보다 기계적인 방식으로 물질의 원자량과 분자량을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EVEN 가설은 기체 분자의 분자량이 기체의 밀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기체 M과 N의 밀도가 2:18로 측정되면, M의 분자량과 N의 분자량 역시 2:18로 확정되며, 여기에 화학 분석을 통해 얻은 각 원소의 질량비를 아보가드로식 원자량(C:H:O=12:1:16)으로 나누면 표 4처럼 분자식이 기계적으로 도출된다. 반면 돌턴의 가설은 물질의 분자량을 계산하는 데 그와 같은 기계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돌턴의 가설에서 기체의 부피와 밀도는 기체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에 의해 계산된 분자량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정당화되지 않은 가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돌턴의 제안보다 훨씬 구체적인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포퍼식 논리적 평가(포퍼 1994, 6-7장)를 도입할 경우 (모든 증거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턴의 제안보다 낮은 확률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화학자들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분자량이라도 일단 그 값을 정하고 나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인식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에 의해 계산된 분자량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정당화되지 않은 가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돌턴의 제안보다 훨씬 구체적인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포퍼식 논리적 평가(포퍼 1994, 6-7장)를 도입할 경우 (모든 증거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턴의 제안보다 낮은 확률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적으로 평가할 때, 아보가드로의 제안은 화학자들에게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정당화되지 않은 분자량이라도 일단 그 값을 정하고 나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