헴펠의 포섭 법칙 모형과 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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헴펠의 포섭 법칙 모형의 특징

설명에 대한 포섭 법칙 모형에 따르면, 어떤 개별 현상이나 법칙은 다른 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된다. 예컨대 특정한 굴절 현상은 스넬의 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되고, 스넬의 법칙은 전자기학의 법칙들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된다. 피설명항이 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설명된다고 해서 설명항이 법칙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완전한 설명에는 초기 조건에 관한 진술이 포함된다. 예컨대 특정한 굴절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스넬의 법칙뿐 아니라 초기 조건으로 입사각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포섭 법칙 모형에 따른 설명 중 대표적인 연역법칙(DN) 모형은 다음과 같은 논증 구조를 가진다.

L1, L2, ..., Lm (법칙들)
C1, C2, ..., Cn (초기 조건)
---------------------------------
E (피설명항)

피설명항은 법칙이 포함된 설명항을 전제로 하는 연역 논증의 결론이 된다. 그러나 포섭 법칙 모형에 연역법칙 모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확률적 진술 형태의 피설명항이 확률적 법칙에 의해 완전히 포섭된다면 그것은 연역통계(DS) 모형이 될 것이고, 만약 단칭 진술 형태의 피설명항이 확률적 법칙에 의해 대체로 포섭된다면 그것은 귀납통계(IS) 모형이 될 것이다. 즉 설명에 대한 포섭 법칙 모형은 논증의 종류와 법칙의 종류에 따라 법칙연역(DN:보편법칙+연역논증), 법칙통계(DS:통계법칙+연역논증), 귀납통계(IS:통계법칙+귀납논증) 모형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내부적인 구분은 있지만, 설명은 (i) ‘논증’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며 (ii) ‘법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포섭 법칙 모형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이는 포섭 법칙 모형에 의해 “설명이 어째서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두 가지 공통된 직관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 설명항은 피설명항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헴펠의 ‘설명적 유관성 조건’에 해당하며, 설명이 ‘논증’이라고 하는 헴펠의 관점의 토대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왜 그런 각도로 빛이 굴절했는가? 빛의 경로는 스넬의 법칙에 따르는데 특정한 입사각이 주어지면 그런 굴절각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스넬의 법칙과 입사각은 그러한 굴절각을 기대(예측)하게 해주며, 그러한 굴절각이 일어났다고 믿을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 둘째, 피설명항이 법칙에 의해 포섭된다면, 피설명항은 놀랍거나 이상한 일이 아닌 자연의 ‘규칙성의 일부’로서 기대가능한 일(혹은 이해할 만한 일)이 된다. 이는 설명이 왜 ‘법칙’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핵심 근거를 이룬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다른) 모든 사람의 죽음이라는 규칙성에 비추어 기대가능한 일(혹은 이해할 만한 일)이 된다. 요컨대, 설명이란 ‘법칙을 통한 논증’이며, 그 기초는 ‘법칙을 통한 기대가능성’에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iii) 설명과 예측의 대칭성 논제가 따라 나온다. 설명은 잠재적 예측이며, 예측은 잠재적 설명이 된다. 이에 따라, IS 모형을 통해 설명을 할 경우 높은 확률의 조건은 필수 조건이 된다. 만약 설명항이 피설명항을 높은 확률로 포섭하지 못한다면, 그 설명항은 피설명항이 일어났다고 믿을 좋은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며, 따라서 좋은 설명을 구성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법칙을 통한 포섭이 설명의 핵심이라면, (iv) 그 법칙은 참이거나 적어도 잘 입증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 그 설명은 논증의 기본 조건인 건전성을 위반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참이 아닌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건전한 논증이 아니며, 그리고 그러한 논증은 ‘기대가능성’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스크리븐의 비판과 헴펠의 대응

스크리븐은 위에서 언급된 포섭 법칙 모형의 (i) 논증 형식, (ii) 법칙의 필요성, (iii) 설명-예측 대칭성을 비판한다. 스크리븐에 따르면 (i) 설명은 논증이 아니다. 설명의 완전성은 맥락에 의존하지, 논증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컨대, “왜 창문이 깨졌는가?”라는 설명 요구에 “내가 아까 창문에 돌을 던졌기 때문에”라고 하는 답은 좋은, 그리고 완전한 설명이 된다. 따라서 (ii) 설명은 법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컨대 “창문에 돌을 던지면 창문이 깨진다”라는 법칙은 설명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설명항과 피설명항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있을 때 제시하는 “설명의 근거”에 해당할 뿐이다. (i' & ii') 게다가 법칙을 통한 논증의 형태를 만족함에도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왜 다리가 무너졌는가?”라는 설명 요구에 “이런 디자인에, 이런 위치의 다리는 이러한 강도를 받으면 무너지는데, 그런 조건들이 만족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면, 포섭 법칙에 의한 설명으로서는 하자가 없지만, 우리의 직관에 비추어서는 좋은 설명처럼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법칙을 통한 논증은 설명에서 필요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또 스크리븐에 따르면, (iii) 설명은 예측을 함축하지 않을 수 있고, 예측은 설명을 함축하지 않을 수 있다. 첫째, 치료받지 못한 매독은 부전마비에 대한 좋은 설명이지만, 낮은 확률 때문에 좋은 예측은 아니다. 또 다리가 붕괴할 만큼 누적된 금속 피로도는 다리 붕괴에 대한 좋은 설명이지만, 그 피로도 누적 정도는 다리가 붕괴했을 때에만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리 붕괴를 미리 예측할 수 없다. 둘째, 스크리븐의 예는 아니지만, 그림자의 길이는 깃대의 높이를 예측하지만, 깃대의 높이에 대한 좋은 설명은 아니다.

이러한 스크리븐의 모든 비판들은, 설명이란 주어진 맥락에서 질문자 또는 청자의 이해 산출을 목적으로 하는 화용론적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화용론적 활동으로서의 설명을 생각했을 때, 완전한 논증의 형식을 갖추거나 누구나 알고 있는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설명의 기준이 아니게 된다. 이 활동에서는 질문자가 원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며, 이 때 ‘창문에 던진 돌’이나 ‘치료받지 못한 매독’이나 ‘누적된 금속 피로도’는 특정한 맥락에서 질문자가 원하는 이해를 산출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설명이지만, ‘그림자의 길이’는 대부분의 맥락에서 화자가 원하는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좋은 설명이 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스크리븐이 든 모든 사례는 원인을 지적함으로써 설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헴펠은 설명의 화용론적 성격과 논리적 성격 사이의 교통정리를 시도한다. 헴펠은 논리적 요구 조건이 우선이며, 완전한 설명은 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고수하면서, 화용론적 요구 조건은 그 다음에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설명에서 법칙이 생략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용적 목적에 의한 설명의 변형일 뿐,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불완전한 설명, 즉 ‘생략적 설명’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예측을 함축하지 않는 설명에 대해서는 함량 미달의 설명, 즉 ‘부분적 설명’일 뿐 좋은 설명이 아니라고 답한다. 치료받지 못한 매독은 부전마비의 필요조건일 뿐이고, 이는 치료받지 못한 매독을 가진 사람 중에서 왜 어떤 사람은 부전마비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걸리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헴펠은 모든 예측이 잠재적 설명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 포섭 법칙 모형의 조건을 만족하면서도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셈인데, 헴펠은 자신의 설명 모형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건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추가적인 조건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포섭 법칙 모형은 지탱되기 어려울 것이다.

인과 조건의 추가를 통한 해법과 그 역설

헴펠의 포섭 법칙 모형을 구제하기 위한 유망한 추가 조건은 ‘인과 조건’이다. 이들은 포섭 법칙 모형의 조건을 만족함에도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례들 거의 모두가 원인을 제대로 지적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주목하여, 원인을 명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상세하게 검토한 루벤(David-Hillel Ruben)은 이 해결책이 결과적으로 포섭 법칙 모형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고 지적한다.

먼저 루벤은 원인항(c)만 명시해서는 문제를 완벽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보인 후, 결국 “c는 e의 원인이다”와 같은 인과적 진술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는데, 그러나 이 진술의 추가는 포섭 법칙 모형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 “c는 e의 원인이다”와 같은 인과적 진술을 추가하는 순간 설명항에 쓰였던 다른 법칙들은 많은 경우 불필요(redundant)해진다. 왜냐하면 그 인과적 진술로부터 피설명항 e가 바로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설명은 더 이상 논증이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c는 e의 원인이다”로부터 e가 따라나온다는 것은 논리적인 함축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진단할 수 있다. 포섭 법칙 모형은 결과와 원인 사이의 설명적 의존성을 그 의존성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 없이 (연역 혹은 귀납) 논리적 의존성만으로 포착해 내려 해왔으나, “일으키다”, “원인”, “때문에”, “이유” 등의 단어를 통해 결과와 원인 사이의 의존성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원하던 설명적 의존성은 그 명시적 진술에 의해 간단히 포착되게 된다. 설명적 의존성을 포착하는 문제가 해결된 이상 설명은 논리적 의존성을 요구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설명은 논증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인과 조건의 추가를 통해 포섭 법칙 모형을 보완하려고 했던 시도는 오히려 포섭 법칙 모형의 두 기둥인 (i) 설명은 논증이며 (ii) 법칙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면서, 스크리븐과 매우 비슷한 귀결을 만들어 냈다. 만약 이러한 귀결을 막을 대안을 제시한다면 포섭 법칙 모형은 구제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럴만한 대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리븐의 유산과 법칙의 역할에 대한 재고

이러한 상황에서, 스크리븐의 모든 견해와 근거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i) 설명은 논증이 아니며, (ii) 설명은 꼭 법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스크리븐의 견해는 거부하기 어려운 입장이 된 듯하다. 게다가 스크리븐의 견해를 지지하는 논변들도 몇 가지 보강되었다.

종종 설명의 거부가 일어난다는 것은 화용론에 의해서 가장 잘 해명된다. 예컨대 어떤 원자가 왜 특정시점에서 붕괴했는지에 대한 설명 요구는 고전역학적 맥락을 받아들이면 답은 잘 못하더라도 거부되지는 않겠지만, 양자역학적 맥락을 받아들일 경우 그 설명 요구는 거부된다. 이는 반 프라센이 매우 적절하게 지적한 지점이다. 또 설명의 비대칭성 문제, 예컨대 깃대의 높이로는 그림자의 길이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림자의 길이로부터는 깃대의 높이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사실 인과 조건의 추가로 가장 잘 해결된다. 그러나 화용론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해결된다.

인과 조건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든, 전면적인 화용론적 견해를 수용하든, 어느 길로 가더라도 ‘법칙을 통한 논증’으로서의 설명 개념은 지탱되기 어려워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명에서 법칙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법칙이 설명에서 중요하지 않다거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스크리븐도 법칙이 ‘설명의 근거’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일상적인 설명이 아닌 자연과학에서의 설명에서는 유난히도 법칙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과학적 설명에서 법칙이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예컨대 케플러의 법칙을 설명하고자 할 때 “중력”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화용론적 관점에서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과 행성 사이에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 뉴턴의 법칙을 통해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하는 과정은 설명에서 필수적인 과정처럼 보이며 이 때 사용되는 법칙은 단지 스크리븐이 말하는 ‘설명의 근거’만은 아니어 보인다.

루벤은 법칙이 설명적 논증의 전제로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설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법칙은 설명의 완전성을 평가하는 잣대 역할을 한다. 누군가 내 설명의 완전성이나 적절성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내 설명의 완전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칙을 참조할 수 있다. 이는 스크리븐이 법칙은 설명의 일부가 아니라 설명의 정당화 근거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과 거의 같은 얘기이다. 단 전면적인 화용론을 받아들인다면, 법칙은 설명의 정당화 근거로 사용되더라도 설명의 완전성의 잣대는 아닐 수 있다.

둘째, 법칙은 많은 유형의 과학적 퍼즐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형적인 과학적 설명에서 법칙은 논증의 전제로서는 아니더라도 명시적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적당한 규칙성, 즉 법칙에 대한 참조는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현상이 (알고 보면) 이상하거나 불규칙한 것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벤은 퍼즐의 해결이 설명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셋째, 법칙은 설명에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도록 도와준다. 예컨대 “웰링턴은 죽을 운명인데,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고 모든 사람은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은 진정한 설명이 아니거나 설명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얄팍한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물학이나 물리학의 이론에 있는 법칙들은 ‘생명 형식의 연약함(fragility)’과 같은 이론적 어휘를 사용하여 웰링턴의 죽을 운명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전형적으로 과학적 설명은 피설명항의 어휘집합과 다른 그리고 더 깊은 어휘집합을 이용한 법칙을 언급할 것이며, 그런 일반화(법칙)는 설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의 목적은 특정 피설명항을 기술하는 데 쓰인 어휘와 다른 어휘를 도입하기 위함이다.

설명이 기본적으로 화용론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반 프라센조차도 배경지식에 포함된 법칙이 설명에 필요한 어휘를 선택하도록 해주거나, 설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말함으로써 루벤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된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계적 설명을 주장하던 학자들도 세계의 균질적 분할을 밝혀내기 위해 (보편/통계) 법칙이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결국 논증으로서의 설명을 주장했던 헴펠의 설명 모형에서 법칙은 전면에 부각된 반면, 논증이 아닌 무언가로서의 설명을 주장하는 이들의 설명 모형에게 법칙은 배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법칙이 특정 현상을 포섭하고 있다거나, 원인이라 부르든 초기 조건이라 부르든 설명항을 결정한다거나, 설명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잣대로 기능한다는 점은 대부분의 논자들에게서 포기되지 않고 있다. 즉 헴펠에 대한 비판가들이 법칙에 부여하고 있는 역할은 헴펠이 애초에 부여했던 역할의 일부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이 점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카트라이트의 비판

카트라이트는 포섭 법칙 모형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 현상들을 포괄하는 법칙이 없기 때문이다. 카트라이트에 따르면, 많은 영역을 포섭하고자 하는 법칙들은 대체로 참이 아니며, 반대로 참인 법칙은 대체로 많은 영역을 포섭하지 못한다. 예컨대 모든 매질 하에서 입사각과 굴절각 사이의 관계를 주장하는 스넬의 법칙은 문자 그대로 볼 때 참이 아니다. 반면, 등방성 매질 하에서의 입사각과 굴절각 사이의 관계만을 주장하는 “수정된” 스넬의 법칙은 참일 수는 있지만, 이 수정된 스넬의 법칙으로는 포괄되는 현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매질은 이방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방성 매질에서 성립하는 굴절 법칙을 알지 못하며 앞으로 알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헴펠은 특정 굴절 현상이 스넬의 법칙에 포섭됨으로써 성공적으로 설명된다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스넬의 법칙을 통해 일상적인 굴절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헴펠은 설명에 쓰이는 법칙은 참이거나 적어도 잘 입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포기해야 한다. 반대로 “수정된” 스넬의 법칙을 통해 일상적인 굴절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헴펠은 법칙이 피설명항을 포섭해야만 설명이 이루어진다는 조건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카트라이트의 비판은 헴펠의 포섭 법칙 모형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포섭 법칙 모형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으로 나온 설명 모형에서조차 설명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요인들을 골라내는 데에는 오직 자연 법칙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트라이트의 비판은 법칙이 설명의 완전성을 결정해준다는 루벤의 입장, (통계적) 법칙이 세계에 대한 (인과적으로) 균질적 분할을 해줄 거라는 초기 샐먼의 입장, 법칙이 설명의 요인을 결정하거나 설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는 반 프라센의 입장 모두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카트라이트는 스넬의 법칙을 통해 굴절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스넬의 법칙은 굴절 현상을 설명하게 해 주는 중요한 자원이지만, 그 설명은 포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자연 법칙만으로는 어떤 설명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카트라이트가 보기에 스넬의 법칙과 같은 케테리스 파리부스 법칙이 하는 중요한 일은 우리의 설명적 관심(explanatory commitments)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성 매질에서의 굴절 현상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상적인 상황으로부터 유도된 설명 패턴이 이상적인 조건에 못 미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가정하거나, 순수히 등방성인 매질에서 광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리허설 해봄으로써, 거의 등방성인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경험적 지식의 한도를 넘어서는 가정이다. 단지 우리는 이방성 매질에서 두 개의 굴절 광선이 이루는 각에 대해 등방성 매질에서와 같은 식으로 설명할 것을 “결정”할 뿐이다. 그 결정에는 좋은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매질이 거의 등방성인 경우라면 두 광선은 서로 매우 근접해 있을 것이며 스넬의 법칙이 예측한 각도에도 근접해 있을 것이라거나, 또는 물리적 과정의 연속성을 믿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결정은 자연 법칙에 대한 우리 지식에 의거해 이끌어진 것이 아니다.

결론

헴펠의 “법칙을 통한 논증”이라는 포섭 법칙 모형은 스크리븐의 비판과 이후 추가된 설명의 거부 논변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워졌다. 설명은 논증이 아니며, 법칙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명에서 화용론적 측면은 단지 논리적 성격을 만족한 후 고려되는 사항이 아니라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설명에서 차지하는 법칙의 역할은 헴펠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카트라이트의 비판은 그 지점을 공략했는데, 법칙은 설명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많은 경우 그 법칙은 피설명항을 포섭하지 못한다. 카트라이트가 보기에, 우리는 설명을 할 때, 매우 이상적인 경우에 잘 작동하는 법칙을 통해 그 부분에 대해 이해를 한 후, 덜 이상적인 경우로 전이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 전이 과정은 형식 논리나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정당화되기보다는, 유비 또는 어떤 비형식적인 논리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이러한 결론은 앞서 정리했던 법칙의 역할을 조금씩 변경하게 만든다. 첫째, 법칙이 설명의 완전성 평가의 잣대로 사용되더라도, 그 때 사용되는 법칙은 피설명항을 포섭하는 법칙들이 아니라 피설명항의 이상적인 유사물을 포섭하는 법칙이 되어야 한다. 둘째, 피설명항이 세계의 특정 현상이라면 피설명항 자체는 법칙으로부터 완전한 규칙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예컨대 행성의 운동이라는 실제 현상은 뉴턴의 법칙들로부터 완전한 규칙성을 부여받지 못한다. 대신 행성의 운동의 유사물인 케플러의 법칙만이 뉴턴의 법칙들로부터 그러한 규칙성을 부여받는다. 그것도 행성간의 인력은 무시한 경우에만 그러하다.

카트라이트가 자신의 설명 견해를 정당화하거나 정교화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경우에서의 이해에서 덜 이상적인 실제 경우로의 전이 과정에 개입되는 유비 또는 비형식적인 논리가 무엇인지 해명해야 할 부담이 있다는 점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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