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철학적 이해 2016년 1학기 기말고사 학생 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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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rted>525hm님의 2017년 3월 9일 (목) 10: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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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Q1. 장하석의 ‘다원주의’ 옹호 논변을 요약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교재의 2부에 수록된 사례 연구들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15점)

A의 답안

다원주의에 관해서는 여러 우려들이 있다. 첫 번째 우려로는, 다원주의의 지나친 자율성으로 자칫 상대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장하석은 이에 대해 아무리 다원주의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유지 가능한 체계들만 성립될 수 있으며, 다원주의란 판단의 유보가 아니라 일원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판단하되 복수의 체계를 선택하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는 한정된 자원에 대한 우려가 있다. 단일 패러다임을 유지할 때도 항상 연구자들은 자원의 부족함을 호소했는데, 복수의 실천체계를 유지할 여력은 어디서 오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장하석은 복수의 실천체계를 유지하는데 자원이 분산되는 것보다 특정 분야에만 자원이 집중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그렇게 낭비되는 자원을 대안 이론들에 투자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우려는 다원주의적으로 과학을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장하석은 이에 대해 각각의 실천체계를 따르는 개인들이 모여 다원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 개인이 복수의 실천체계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개인이 다국어를 하듯이 복수의 실천체계를 익힐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옹호논변에 관해, 다원주의 속에서 반드시 현실적으로 유지 가능한 체계들만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하석은 플로지스톤 이론과 산소 이론을 들며, 플로지스톤 이론도 바로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전자이론이나 활성화에너지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마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관찰자에 따라 운동은 상대적인 것이니 지동설도 맞고 천동설도 맞는데, 지동설을 폐기하지 않고 발전하게 두었다면 결국 상대성 이론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과 유사하다.(good)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플로지스톤 이론과 산소이론이 ‘양립 가능’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는 쿤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인데, 동일한 현상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설명을 하고 있는데,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는 둘 중 하나는 거짓. 그러나 장하석의 관점에서는 어차피 둘다 진리는 아닐 것입니다.) 같은 현상에 대해 설명하는 만큼, 어느 정도의 유사성, 적어도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유사성은 존재해야 양립가능한 것이다.(다원주의는 양립가능한 체계들만의 공존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는 양립불가능한 체계들도 함께 유지시키자는 것이 다원주의의 주장. 둘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 둘다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 나아가 플로지스톤 이론이 설사 전자나 활성화 에너지로 까지 발전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여전히 ‘플로지스톤 실천체계’라고 부를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양자역학이 뉴턴역학의 현상도 설명해 낼 수 있듯이, ‘플로지스톤 실천체계’를 포괄할 수 있는 더 넓은 개념의 실천체계가 새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좋은 문제제기)

하지만, 지금 당장 특정 실천체계의 우수성을 판별할 수 없으니 복수의 실천체계를 유지하자는 의견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실제로 쿤의 의견과 같이 패러다임의 선택에 있어 발전 가능성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당장 현재의 문제해결력만 가지고 특정 실천체계의 폐기를 결정하는 것은 조급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 쿤과 같이 이렇게 복수의 실천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정상과학’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서로 다른 연구 분화로 분화되거나 하나의 가장 타당한 실천체계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한 분야는 하나의 체계만 남는 것이 정상 상태이다?)

장하석의 논변의 맹점은 ‘복수의 실천체계 유지’와 ‘연구분야의 분화’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다.(좋은 문제제기) 하나의 연구분야를 ‘실천체계’라고 보는 것이라면, 물리학 또는 화학 이런 식으로 나뉜 학문들도 그저 서로 다른 ‘실천체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에 비슷한 학문 분야들을 다원주의적 실천체계들로 본다면 유사성의 논리에 따라 a는 b와 유사하니 한 분야의 다른 실천 체계, b는 c와 유사하니 한 분야의 다른 실천 체계.. 이런 식으로 이어가다 보면 결국 유사성이 없는 a와 z가 한 분야의 서로 다른 실천체계가 되는 것인가?

두 번째로, 한정된 자원을 대안 이론에 투자하자는 것은 결국 자원의 분배를 고르게 하자는 의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존의 자원 부족을 호소하는 연구분야들에 할당량을 늘려주는 대신 굳이 대안이론들에 새로 할당해주어야 하는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주류 실천체계가 대부분의 연구 자원을 가져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이 부족한 연구 분야자체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주장은 다원주의에 대한 적절한 옹호 논변이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개인이 복수의 실천체계를 익힐 수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플로지스톤 이론을 가르쳐도 학생들이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은 이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플로지스톤 이론은 폐기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으로 서로 대립중인 두 실천체계를 동시에 가르쳤을 때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논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에 한 개인이 두 실천체계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중 어떤 특정한 하나를 선택해 연구를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두 실천체계가 동등하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본인이 받아들인 실천체계 외의 실천체계에 대해서는 ‘용인’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A 목적으로는 a 체계를, B 목적으로는 b 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용인’에 머무르고 다른 실천체계의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두 실천체계는 영원히 평행선상을 달릴 수 밖에 없다. 두 실천체계의 유기적인 연결을 하나라도 발견을 할 수 있어야 결국 같은 현상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장님이 알 수 없으니 각자 조사한다고 쳐도, 그것을 하나로 합칠 수 있어야 ‘코끼리의 모습’에 대해 이해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결국은 복수의 패러다임들이 하나고 합쳐져야 그 현상에 대한 통찰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수학과 과학은 책에서 장하석이 언급한 것처럼 다르다. 따라서 수학에서 한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풀이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해서 과학에서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하석이 책에서 예시로 든 물리에서의 해밀턴법, 라그랑주법 이런 것들은 수학을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지, ‘실천체계’자체가 다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B의 답안

장하석이 주장하는 다원주의는 그의 ‘능동적 실재주의’에 이론적 근거를 둔다. ‘능동적 실재주의’란 과학은 실재에 대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라면 서로 상충하는 이론체계들도 동시에 허용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석은 자신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상대주의’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강조한다. 상대주의에서는 모든 체계를 허용하는데 있어서 무수히 많은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경우에는 각 체계에 대한 판단이 유기되어 오히려 몇몇 권위자들에 의한 전체주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특정 기준에 부합하는 체계들만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크게 두 가지 이득을 들어 다원주의를 옹호한다. 첫 번째는 ‘관용의 이득’이다. 라우단의 ‘비관적 귀납’ 또는 쿤의 이론을 보면 현존하는 패러다임(또는 실천체계)은 충분히 언젠가 폐기될 여지를 갖는다. 따라서 여러 가지 상충하는 체계들을 유지하여 같이 발전시킴으로써 하나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두 번째는 ‘상호작용의 이득’이다. 이는 각 패러다임 내부에서만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것이 아니라 다른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과학자들과의 소통을 통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패러다임의 문제를 해결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장하석은 이러한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기본적으로 공유해야 하는 ‘공통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수량화를 위한 측정 기구 및 단위’를 하나의 예시로 든다.

앞서 요약한 장하석의 다원주의 옹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먼저, 장하석은 과학자들이 여러 방식의 사고를 동시에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일원론적 사고를 지양하고 다원주의적 사고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에 대한 예시로 어떤 사람이 다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례가 흔히 존재한다는 것을 든다. 하지만 나는 일원론적 사고를 버리고 다원주의적 체계를 수용하는 것이 외국어 학습처럼 단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스티브 와인버그를 비롯해 노벨상을 수상한 많은 과학자들은 강력한 실재론적(곧 일원론적) 믿음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여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루어냈다. 자연에 대한 근본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거나 여러 개 존재할 수도 있다는 약화된 믿음을 가지고 이들 과학자들이 같은 발견들을 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특히, 현대 물리의 토대를 이루는 ‘표준 모형’과 같은 이론들은 이론 자체에 실재론적인 형이상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원주의적 사고를 견지하면서 이러한 물리학적 이론들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로, 장하석은 쿤이 논의한 과학혁명에서와 같이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이기고 소멸시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그가 화학혁명을 통해 결국 소멸하게 된 플로지스톤 패러다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그는 플로지스톤 패러다임을 유지시켜 라부아지에의 산소 패러다임과 공존하며 발전시켰으면 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 패러다임이 소멸당할 위기에서 다원주의를 위하여 하나의 패러다임을 살려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장하석이 상호작용의 이득을 논의하면서 든 하나의 예시가 실천체계 간의 ‘경쟁’인데 위기에 놓인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과학자들이 자생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정책적 차원에서 이들을 유지시킨다면 이는 오히려 비주류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안일한 태도를 갖게 하여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흥미로운 논변!)

장하석의 다원주의 옹호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는 다원주의를 정책적으로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강요’가 아니라 다원주의의 ‘지향’이 필요하다고 본다.(very good!) 장하석은 일원론에서 다원주의로의 교체를 주장하지만 나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과학을 연구하는 집단과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과학을 연구하는 집단이 공존하는 것이 과학의 발전에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첫 번째 비판 참조). 이처럼 ‘일원론적 세계관’ 까지도 허용하는 ‘다원주의’가 과학에 필요한 진정한 다원주의라고 생각한다.

쿤에 대한 비판과 대응

Q2. 쿤의 공약불가능성 논제에 따르면, 패러다임이 바뀌면 판단 기준까지 바뀌면서 경쟁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은 각자의 패러다임에 심각하게 의존하게 된다. 이를 검토한 많은 비판가들은 쿤이 과학의 패러다임(혹은 이론) 선택을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쿤의 대응을 요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15점)

A의 답안

쿤은 패러다임의 선택이 결국 설득의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일한 것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용어의 정의나 사고방식에 다른 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보았고, (공약불가능성) 그로 인해 누가 절대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때문에 쿤은 결국 패러다임의 선택은 어느 한쪽이 이제껏 사실이라고 주장해왔던 점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고 상대의 의견에 합류하는 방식이라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설득’이라는 과정이 지나치게 개인의 주관성에 의지하기에, 쿤이 패러다임의 선택을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하였다.

쿤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 패러다임의 선택에 관여하는 ‘가치’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기 보다는 다수 사이에 공유되는 범패러다임적으로 적용되는 가치들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다른 이론 체계들과의 정합성, 내적 일관성, 단순성 등이 그런 것이다. 과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가치들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개개인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이나 변칙사례들에 의한 판단은 서로 다르다. 또한, 이 가치들에 대한 기준은 애매하기 때문에 절대적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개개인의 서로 다른 판단은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쿤은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개개인이 모인 전문가 공동체라고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개개인과,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어떻게 서로 토론 끝에 특정 논증이 다른 것들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쿤은 주장한다.

쿤의 이런 주장은 실제 과학연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매우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결과론적인 입장이다. 쿤이 말한 바와 같이, 패러다임이 선택되는 순간에는, 특정 패러다임의 문제 해결력이 꼭 다른 패러다임보다 우수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 약속 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지지자들이 패러다임을 발전 시킨 후에 비로소 그 패러다임의 우수한 문제해결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의 통찰이 결국 다수를 설득할 수 있을 만큼 타당한 패러다임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쿤은 개개인의 선택은 비합리적일지라도 개개인이 모여서 하는 공동체의 선택은 합리적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선택이 무턱대고 비합리적인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토론’을 비합리적인 의사 처리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가 이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토론에 의해 합리적인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 선택 결과가 옳은가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이 항상 더 진리에 다가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내리는 판단은 합리적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옳은 판단은 아니다.(합리성과 진리의 분리!) 토론의 결과가 언제나 옳고 선한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옳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판단이 비합리적이라고 우리가 은연 중에 생각하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선택 과정을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합리성만 놓고 따져보면, 한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이 다른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을 설득함에 따라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분명히 합리적인 과정이다. 물론 인간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선택만 내리는 존재는 아니고, 자신의 이권이나 신념, 다른 사람들의 선동에 따라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을 하는 것이고,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이 비록 완벽하게 합리적인 과정이 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B의 답안

첫째로, 쿤은 패러다임 선택에 둘러싼 논쟁이 논리적, 수학적 증명과 같이 검토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논리적인 추론에서는 전제에 근거하여 연역적으로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에 만약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집단 간에 결론의 불일치가 일어난다면 결론으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론 방식의 검토를 통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상대 집단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논리적인 오류에 대한 지적에도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는 비합리적인 아집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쿤이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논의에서 밝혔듯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은 규정된 규칙들의 의미나 적용, 즉 ‘전제’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 쪽 집단은 다른 쪽 집단으로 하여금 전제를 바꾸도록 ‘설득’하는 방식으로만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쿤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 간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 판단에 의한 패러다임의 선택보다는 그 집단에서 공유된 가치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특정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고려되는 여러 가치들(단순성, 일관성, 정확성...) 등에 있어서 개인들이 상대적으로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집단에 속한 각 개인을 동일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체계적인 논증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효과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있어서 전문가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일련의 공유된 가치들이 전문가 공동체가 공유하는 특정한 경험들과 상호작용하여 어떻게 그 집단의 구성원 대부분이 결국에는 한 벌의 논증들을 다른 것들보다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쿤의 첫 번째 반론은 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쿤은 자신에 대한 비판이 결국에는 각각의 패러다임이 논리적으로 검증(또는 반증)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공약불가능성 이론을 언급하면서 실제로는 패러다임이란 것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검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은 적절치 못하다고 논하는데, 이는 적절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흔히 합리적인 과정은 확실하게 연역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과정이 논리적 오류를 지니지 않았다는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만약 연역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과정이 논리적 오류를 갖추었는데도 이를 고집한다면 이는 ‘비합리적’인 행위가 되겠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에 근거하여 과학의 패러다임들은 ‘합리성’ 또는 ‘비합리성’을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좋은 논변!)

하지만, 쿤의 두 번째 반론은 오히려 학자들 간의 논란을 증식시킬 여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가치의 선호에 근거한다는 가치론자들이 할 법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입장의 철학자나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특정 가치의 선호가 패러다임의 선택을 유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을 포함한 실재론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납득시키는데 있어서 패러다임의 선택이 가치론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 많은 논란거리를 불러 올 수 있다. 이는 실재론자들의 기본 입장은 과학의 궁극적 목표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쿤의 앞선 반론의 경우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패러다임을 찾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 정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실재론자들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반론이다. 하지만 쿤 자신이 상대주의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상대주의의 핵심적인 요소인 ‘가치의 선호’를 패러다임 선택의 근거로써 제시하는 것은 실재론자들에 대한 더 큰 도발거리가 될지언정 적절한 대응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쿤은 왜 가치의 선호와 개인차를 이론 선택 문제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넣고자 했는지, 그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해야 좀더 심도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과학 교육에 대한 장하석의 비판과 대안

Q3. 장하석은 (한국의) 과학 교육에 대해 어떤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요약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10점)

A의 답안

장하석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과학 교육이 전반적으로 주입식 교육이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장하석은 과학 교육의 의의는 사람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배움으로써 비판정신을 기르고 탐구력을 기르는데 있다고 본다. 현재의 교육은 과학적 지식이 확립된 과정에는 관심이 없고 결론만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과학교육의 취지와 매우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결론만 외우는 것은 맹신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하석은 오히려 이런 과학 상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한다. 그는 가르치는 대신 진정한 탐구를 통해 깨치게 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안한다.

우리는 흔히 비과학적인 것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하곤 한다. 과학 교육이 이성적인 사고를 훈련하는데 효과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확실히 장하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과학교육은 이성적인 사고를 기른다는 목적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학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탐구정신을 기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밝혀진 지식들을 습득하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과,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과학은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학생 때는 그저 암기를 잘 하고 원리를 응용해 문제를 잘 풀면 과학을 잘 하는 것이지만, 연구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 얼마나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가 일 것이다. 또한, 일반인이 과학을 배우는 근본적인 이유도 그러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배운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장하석에 의견에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하는 바이다. 단순 지식 암기 만으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떤 지식이 어떻게 정립된 것인지를 배우면 그 속에 숨은 논리를 배울 수 있고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과학교육이 전적으로 그런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지금처럼 주입식 교육과 직접적인 탐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주입식 교육이 주가 되는 지금에 약간의 탐구를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대신, 과학교육이 질문에 조금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학을 배우는 목적이 단순히 과학적인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되기 위해 과학을 배울 때는 물론 과학적 방법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식 자체를 쌓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문법이 가장 중요하고 언어사용의 기초가 되긴 하지만, 어휘력이 부족하면 문장을 만들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모든 지식을 직접 탐구로 배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탐구하는 법과 지식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연구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까닭은, 과거의 연구자들이 연구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더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을 탐구를 통해 하나하나 깨쳐나가는 것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과학 지식의 암기는 선조들이 했던 시행착오를 줄이고 우리가 빠르게 지식을 습득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면도 있다. 암기 위주의 과학 교육이 맹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살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의 사전적인 정의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언제나 바르지 못한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번째로는, 교육 방법을 바꾼다고 학생들이 갑자기 창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비판적인 사고력을 길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을 던지는 힘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근본적으로 스스로 질문하는 힘을 기르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탐구로 지식을 습득하도록 한다고 해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방법론마저도 암기하는 꼴만 될 뿐이다. 또, 모든 사람들이 과학적 지식이 정립되는 과정을 궁금해 할 정도로 과학에 대한 흥미가 대단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이다.

마지막으로는, 장하석의 주장처럼 보통 학생들에게는 과학적 방법론만 가르치고, 연구자나 스스로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 더 최신 지식을 익힌다면, 그것은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지식적 격차만 심화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일반 사람들도 최신 연구 분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 할 수 있는데, 교양이나 상식 수준으로 알기 위해서는 좁은 지식을 깊이 있게 아는 것보다는 얕고 넓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B의 답안

첫째로, 장하석은 ‘정답’의 습득을 전제로 하는 주입식 과학 교육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물이 H2O이다’와 같은 과학적 과정의 결과론적 지식을 상식으로써 습득해야 하는 과학 교육이 아닌 실제로 과학자들의 연구 과정이나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는 ‘과학사적인 탐구의 역사’, ‘탐구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학생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하여 정답을 깨우치고자 하길 원하는 욕구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에는 한계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과학의 내용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명확한 정답이 없는 문제가 많기 때문에 결국에는 정답을 전제로 하는 주입식 교육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고 말한다.

둘째로, 장하석은 과학 교육에 있어서 창의성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쿤은 정상과학의 퍼즐 풀기를 진행하다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과학자들에게 혁명적 창의성이 저절로 발휘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장하석 또한 창의성은 특정한 방법으로 주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창의성을 갖추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주장한다. 쿤이 말했듯이 창의성은 인간이 어떤 위기에 닥쳤을 때 발휘되는 능력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능동적으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훈련을 통하여 창의성을 갖추는 연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특정 분야나 패러다임 안에서 훈련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풍토가 조성될 때 창의적인 사고가 더 많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장하석은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다원주의에 근거한 창의성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good!)

나는 장하석이 주장하는 ‘다원주의적’ 창의성 교육은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으며 과학적 사고력을 기르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STEAM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교육의 일부로써 수행되고 있으며 학생들의 재미를 유발하고 과학의 다양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입시를 위한 정형화된 교육이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사회에서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하석 본인이 생각하는 모습의 교육이 정착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다원주의적’ 창의성 교육을 실시한다면 쿤이 이야기한 혁명적 패러다임을 창조하는 창의성을 발현하는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지식(또는 정답)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에서 벗어나 과학사의 비중을 높이는 과학 교육은 현실적으로도 실현되기 어려우며 만약 추진될 경우 과학자 집단과의 철학적인 충돌이 있을 것이라 예상된다. 현재의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의 원리를 정확히 규명하고 엄밀하게 검증된 과학적 결과물이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이며 일반 대중들이 알 가치(또는 의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신념이 바로 이들 과학자들이 연구를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이상 과학자 집단의 학술적 결과물인 ‘과학 지식’이 교과서에 적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오히려 그러한 지식들이 신뢰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과학사적’ 또는 ‘과학철학적’ 내용들이 교과서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면 ‘실재론적’ 과학자들의 반발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과학자로써의 진로를 정하는데 있어서 자연을 정확히 규명하겠다는 ‘실재론적’ 믿음 또는 포부도 학생들에게 상당한 동기로써 작용하기 때문에 과학사에 비중을 둔 교육은 오히려 과학자를 희망하는 학생들의 비율을 감소시키는 역효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일원론(실재론)만을 굳게 고집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교육은 견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입장은 ‘과학사’나 ‘과학철학’의 내용들은 별도의 과목에서 다루고(현재에 실행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창의성’이나 ‘탐구 방법’의 비중을 과학 과목에서 좀 더 높이는 것이 과학계와의 마찰도 피하면서 학생들이 다양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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