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짐의 무게

정동욱 옮김, "우리는 충분히 주의할 수 있을까?", 「윤리적 관광: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 (이음, 2009).

번역

윤리적 짐의 무게


짐 부처(Jim Butcher) 지음

정동욱 옮김



관광은 전통적으로 느긋한 휴식, 모험, 쾌락 등과 결합되어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휴가는 과중한 업무로부터의 탈출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족과 사회가 정한 도덕적 규제로부터의 탈출 기회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져가는 윤리적 관광의 압력에 의해 오늘날에는 휴가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때 주로 거론되는 것은 우리의 여행 욕구를 가로막는 자연적, 문화적 장벽들이다.

전통적인 패키지 관광 대신에,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몇 가지의 대안을 제안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태관광, 공동체 관광, 문화적 관광, 녹색 관광 등이 될 텐데, 이들 모두는 자연을 무척 권장하는 반면에 군중, 리조트, 경솔한 언행, 재미를 금지한다. 그들이 옹호하는 새로운 종류의 관광이 권장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현지 환경을 훼손하고 현지 문화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한때 결백했던 휴가는 이제 유죄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윤리적인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윤리적 관광이란 ‘비윤리적인’ 패키지 휴가객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것은 평균적인 관광객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과도한 윤리적 조언은 휴가를 휴가이게 하는 것들을 위축시킨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 의해, 재미는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되고 모험심은 통제받게 된다.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의 조언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 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차이를 벌리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윤리 vs. 대중

관광은 엄청나게 성장해서, 1950년대에 5천만 명이었던 국제 휴가 여행객은 오늘날 8억 명이 되었다(이 수치가 세계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관광이 성장함에 따라 순전히 여가만을 목적으로 햇볕 쨍쨍한 모래사장, 눈 덮인 산, 세계적인 도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졌다. 어쨌든 이는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패키지 관광 혁명은 환경 파괴와 문화 충돌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수백만 명에게 여가 여행의 기회를 안겨준 산업은 종종 암울한 색으로 칠해지거나 ‘콘크리트 정글’, ‘술꾼’, 문화적 평준화의 전조로 희화화된다. 위에서 언급한 수치는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라 관광이 너무 멀리 또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인용된다. 대중 관광의 성장에 따른 문제의 예상 규모는 묵시록적 제목이 달린 조나단 크롤(Jonathan Croall)의 책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1995]에 정리되어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대중 관광은 경치를 훼손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부족한 자원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문화를 평준화하고, 획일성을 양산하고, 우리 행성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윤리적 관광은 대중 관광에 대항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대중관광은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것으로 희화화되어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 대중 관광이란 관광객의 숫자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관광객의 유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중’이라는 말은 용법상 경멸적인 함의를 갖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지각없고 무지하며 단순히 군중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내 사전에서 찾아낸 정의, 즉 ‘대중: 개성이 없는 집단’은 이에 딱 들어맞는다. 이런 점에서 슈퍼마켓과 값싼 음식과 더불어 대중 관광은 현대 산업 대중 사회에서 나타나는 끔찍한 대중 소비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며, 윤리적 운동가들에게 이는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이자 관광 컨설턴트인 알루왈리아 푼(Ahluwalia Poon)은 논쟁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관광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 이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적 파괴를 불러온 대중 관광의 위기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뿌리째 바뀌어야 하는 것은 대중 관광이라는 행위이다.

이러한 과장된 주장에 힘입어, 윤리적 관광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대중 패키지 관광에 비해 높은 도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유럽연합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테네리페(Tenerife)섬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는 ‘위협받는 전통 공동체’를 지원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도 대중 관광 개발 집단은 ‘오래된 문화를 멸종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죄를 선고받았다.[1] 이러한 주장들은 패키지 관광과 관광 리조트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근본적으로 보호주의적인 견해 ― 윤리적 관광의 핵심에 있는 견해 ― 를 피력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들은 해변 가득한 리조트들을 경멸적인 (그러나 아마도 가끔씩은 부러워하는) 눈으로 깔보면서, 느긋한 목동(goat herders)의 신화 연구를 돕고 거기에 거름을 주고 있다.

윤리적 관광은 특정한 성격의 대중 관광과 대중 관광객에 대한 치사한 반대 운동이다. 일례로, 3S(sun, sea, sand: 태양, 바다, 모래)를 제공하는 여타의 여행사와는 달리 독자적인 길을 간다고 주장하는 ‘3T(travelling, trekking, trucking: 여행, 도보 여행, 트럭 여행)’ 회사들을 생각해보자. 그런 여행사들 중 하나인 익스플로어(Explore)는 자신들이 제공하는 휴가를 “휴가에서 싸구려 와인이나 선탠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광고한다. 공동체 관광 가이드(Community Tourist Guide)는 재빠르게도 자신의 휴가를 ‘개성 없는 외양의 주류 관광’이나 ‘피곤하고 따분한 관광’과 차별화시킨다. 몇몇 윤리적 운동가들은 휴가를 즐기는 대중이란 개성 없이 균질적이고 생각 없는 군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휴가를 개인적인 도덕적 미션의 일부로 보지 않고 뻔뻔하게 즐기려고만 드는 우리들은 너무나 천박하고 명랑한, 즉 버릇없고 단순한 인간으로 경멸당하게 된다.

반(反)재미와 반(反)인간

걱정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휴가의 전부이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재미는 우려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영국의 윤리적 관광 운동 단체 투어리즘컨선(Tourism Concern)의 앨리슨 스탠드클리프(Alison Standcliffe)에 따르면, 걱정을 잊는다는 것은 ‘당신이 평상시 주의하던 것들에 눈을 감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2] 환경운동가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주류 관광의 음침한 관점을 요약하면서, ‘관광이란 대체로 비윤리적인 활동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재미있게 놀도록 우리를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 이렇게 암울한, 흥을 깨는 견해는 오늘날의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쾌락지상주의 철학’을 윤리적, 지속가능한 관광과 대립되는 것으로 지목한다. 한때 휴가는 순결과 재미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윤리적 관광이란 것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려 하고 있다.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소설 『천국의 소식』(Paradise News)의 등장인물인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는 흥을 깨는 윤리적 옹호자들이 갖는 전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쉘드레이크는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프로이드가 가족에 했던 일을 나는 관광에 하고 있다. 즉 그것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쉘드레이크는 홀로 여행한다. 그의 예민한 약혼녀는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그녀는 내가 시종일관 휴가를 분석하느라고 그녀의 휴가를 망쳤다고 말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경험을 해체할 것을, 우리의 행동을 숙고할 것을, 우리의 문화적 환경적 영향을 의식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윤리적 관광이 재미를 좇는 사람들의 목을 옥죄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전체적인 경험을 향상시켜주는 ‘부가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예컨대, 최근에 발간된 윤리적 관광 잡지 『거기에 있기』(Being There)는 ‘휴가로 방문하는 여행지와 그곳 사회에 무엇인가를 보답하고자 하는 펑키하고 모험심 강하며 재미있고 호기심 많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윤리적 소비의 선구자이자 위 잡지의 공동 설립자인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은 당신이 방문하는 곳이 “휴가를 누리던 곳에서 당신이 나누고, 배우고, 성장하는 곳으로 말 그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덧붙인다.[4]

여기에는 순진한 패키지 관광객이 놓치고 있는 놀라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휴가에서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윤리적 여행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인가? 윤리적 브랜드는 관광객에게 더 즐겁고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휴가를 만드는지에 대한 판단은 왜 관광객에게 맡기지 않는가? 소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정당한가?[이 문장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되네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지향형 휴가와 달리,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브랜드는 ‘사람’에 대한 독특한 환멸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자연의 고상함을 찾아 경솔한 행동과 군중, 도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회를 멀리하자는 것이 아닌가? 생태관광은, 덜 현대적인 존재들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여타의 관광 형태들과 마찬가지로(대부분의 윤리적 관광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자기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듯하다. 흔히 이러한 관광은 자기 자신의 사회가 아닌 보다 자연에 가까워 보이는 문화에서의 고독한 명상을 통해 자아가 발견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객이 소중히 여기는 원시적인 환경과 다양한 문화는 사실 그들 자신의 탈근대적인 공포와 명백히 반근대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반면 대중 관광은 잔치와 군중을, 또 당연히 사람을 즐긴다. 그렇다면 관광의 두 가지 유형 중에서 정말로 ‘사람중심’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무엇일까?

주목할 만한 것은, 휴가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관한 관심이 클럽 18-30(club 18-30)[토머스 쿡의 여행사]류의 ‘술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패키지 관광객에까지 뻗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제기했던 논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바퀴를 돌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원래는 환경적 의식이 있던 관광객과 관광업자와 비정부단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중 관광 산업의 파괴 행위를 비판하고 생태관광, 대안적 관광, 녹색 관광, 공동체 관광 등 보다 진보적인 형태의 ‘새로운’ 관광을 제안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제안되었던 해법 중 일부가 지금은 스스로에게 재검토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주장은 대중 관광이 현지 환경과 전통 문화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흉측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는,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대안들 또한 관광 산업을 위한 트로이 목마일 뿐이라고 내부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즉 생태관광객이 밟은 곳은 곧이어 덜 모험적인 관광객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주장이지만, 관광객들을 ‘관리할’ 수 있고 ‘한 곳에 함께 모아둘’ 수 있는 장소에 머물게 함으로써, 관광객의 발자국이라는 위협으로부터 야생을 해방시키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블랙풀(Blackpool)과 베니도름(Benidorm)은 지속가능한, 윤리적 관광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이러한 주장에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객을 통제되어야 할 문제거리로 여기는 뿌리 깊은 냉소주의를 전제로 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관광객은 양떼처럼 해변의 감옥에서 살아가는 자발적 죄수가 된다.

모험의 금지

윤리적 관광은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비윤리적인지에 대해 분명한 목록을 갖고 있지 않다(물론 대체적으로 보아 어떤 유형의 휴가는 좋은 것이라고 혹은 나쁜 것이라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신 관광객의 지나친 자유라든가 여행지의 환경적 문화적 연약함이라는 개념에는 상당히 유동적인 도덕관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배낭여행객이나 소위 ‘대중 배낭여행객’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람들 역시 그 틀 안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의 젊은이들처럼 여행하는 것은 윤리적 여행 집단으로부터 노골적인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냉소를 받고 있다. 리비 퍼브스(Libby Purves)는 2001년 『더 타임즈』(The Times)에 쓴 글에서 젊은 여행객들에게 ‘분별없는 여행’을 삼가달라고 간청하면서, 영국의 외국 배낭여행객들을 “트라팔가 광장 분수대 주변의 수많은 쓰레기통처럼 널브러져 … 거대한 몸집으로 어슬렁거리는 쇠똥구리”라고 묘사한다. 배낭여행객은 엄청난 자유를 누리지만, 한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우리를 집어삼킬 위험’이 있는 자유이다. 점점 더 많은 장소와 문화가 자유분방한 여행객의 ‘목적지’가 되어감에 따라 더욱 그러해지고 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가 지구를 더럽히고 문화를 평준화하는 잠재적 공모자라는 비판적 자기인식을 통해 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여행자 윤리 수칙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집을 떠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평소대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을 하도록 충동질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휴가를 떠나 있더라도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 자제하며 행동할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으면서 즐기고 싶다. 통찰력 있는 관광(Tourism With Insight) ‘행동 수칙’

여행객과 관광객을 위한 행동 수칙은 많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조언이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돈이나 사탕을 주지 마라”(투어리즘컨선). “참고, 친절하고, 신중하라. 당신이 손님이라는 점을 명심하라”(투어리즘컨선). “관광은 세계에서 매우 큰 산업이다. 이 산업은 토착 문화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중한 외화 공급원이다. 조금만 배려한다면 당신은 미래 세대를 위해 이 진기한 지역을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보호의 벗 Friends of Conservation). “지구의 연약함에 유의하라. 모두가 이를 보존하기 위해 함께 힘쓰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가 즐기려할 때에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여기에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명심하라”(생태관광 십계 ― 미국여행사협회[American Society of Travel Agency]).

이러한 수칙들의 증가는 전통적으로 독립심과 실험정신과 결합하여 추구되어온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오늘날, 배낭여행객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에 가고 어디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 어디서 돈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 넘쳐나는 설교들로 둘러싸여 있다. 모험을 찾는 많은 젊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윤리적 관광은 ‘머릿속 부모’의 역할을 한다. 즉 다닌 곳은 청소하고, 정숙하게 지내며, 인도 위로만 걸어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러프 가이드』(Rough Guides)나 비행기 탑승 비디오나 현지 관광사에서까지도 듣게 되는) 윤리적 행동 수칙의 증가는 중요한 경향을 보여준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와의 협상은 갈수록 어려운 일로 묘사되는 추세이다. 관광객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현지 문화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동시에 그 문화로부터 경의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지에게 돈을 줄지 말지조차도 수칙에 포함된다. 인간의 기본 활동에서 윤리적 문제로의 이러한 전환은 때때로 충격적이어서, 우리는 우리가 휴가처럼 평범한 일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까먹기 쉽다.

윤리적 수칙의 제작자는 젊은 여행객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해결할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는 면에서 볼 때 이러한 가정은 여행의 긍정적 기능을 떨어뜨린다. 이는 문화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이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억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한다. 결국 윤리적 수칙은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기도 전에 무엇이 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여행은 우리를 다른 장소, 다른 문화로 데려가지만, 윤리적 관광은 우리에게서 위험을 꺼리고 조심스러워 하는 정신이 함께한다는 보장을 얻고 싶어한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멋대로 진짜 모험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1902년에 작품 『어둠의 심장』(The Heart of Darkness)에서 여행에 대한 갈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묘사했던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여행에 대해 무척이나 남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나는 지도에 열광했었다. 나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시간을 꿈꾸었고, 영광스러운 탐험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당시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많이 있었고, 지도상에서 유난히도 나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을 볼 때면(사실 모든 곳이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어른이 되면 여기에 갈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이 구절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켜왔고, 비록 현재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단지 모험과 호기심이라는 의미에서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과 관련된 윤리적 짐은 여행객의 모험 정신에 수갑을 채울 위험이 있다. 오늘날의 여행객들은 사람과 장소에 미칠 영향에 유의하고 조심할 것과 ‘무언가를 돌려줄 것’을 권고받는다. 그러나 만약 여행이 정말 삶을 확장해주는 활동이나 특별한 경험이기 위해서는, 무모하든 신중하든 충동적이든 준비성 있든 간에 그들을 믿고 맡겨야만 한다. 윤리 수칙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는 모험과 발견의 정신보다는 신중의 정신만을 키울 뿐이다.

사실, 휴가에서의 개인 행동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오도된 것이다. 제시된 조언은 보통 개발보다는 자연을 우선시하자는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서 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칙인 것처럼 제시된다. 개발도상국으로 가는 관광객이 호텔보다 현지 사회에서 휴가비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는 시골에 일정한 이익을 산출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써 도시 내 서비스 산업의 이익은 줄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산호 목걸이를 사지 않으면 산호 보호에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상인은 조금 더 가난해질 수도 있다. 골프장의 과도한 물 사용 때문에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물은 보호할 수 있지만 고액을 지불하는 골프 관광객으로부터 사람들이 수입을 얻어 인프라를 개선할 가능성은 부정하는 셈이 된다. 결국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나 수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칙들은 여행지 국가를 돕는 것보다는 관광객을 규제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개인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심사숙고하고 논쟁해야 할 문제이다. 윤리적 지침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결정을 규제하려는 노력은 바보짓이다. 그것은 대리 부모를 연상시킬 뿐이다. 젊은 여행객들이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사람들 말이다. 더욱더 바보스러운 것은 보호를 그 출발점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수칙이 빈번히 적용되는 개발도상국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보호라는 강요된 관념이 아니라 개발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야기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특정한 유형의 자유, 즉 관광객(혹은 적어도 나쁜 관광객)으로부터의 자유는 간절히 기원한다. 사회, 특히 시골 사회는 관광으로 인해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간주되며, 자칭 그 사회의 대변인들은 자신들이 전통 사회의 정수로 여기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프로옉토 앰비엔털 테레리페(Proyecto Ambiental Tenerife)[테네리페 환경 계획]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삶의 풍부한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프로젝트는 그 목적을 위해, 자원 활동가들에게 보호여행을 가서 전통기법의 농사와 수제품 판매를 돕고 오라고 독려한다. 대중 관광과 같은 외부 영향은 ‘획일성의 단조로운 바다’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윤리적 선봉대는 자신의 역할을 이러한 문화적 공습에 직면해 있는 시골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의 미션 진술에는 그 역할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현지 문화를 존중하라. … 이는 절대적이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은 현지인과 관광객이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이는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는 핵심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는 출발점으로 가정되는 반면에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소망과 욕구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문화적 접촉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심스러워 하는 접근법이 등장하게 된다.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의 방식처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의 접촉은 항구적인 문화적 딜레마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윤리적 수칙의 증가는, 관광객과 현지인은 너무 달라서 우리를 안내해줄 한 벌의 윤리적 규칙 없이는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관점을 드러내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보다 단순하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이 세인트루시아(St Lucia)에서 보낸 휴가 얘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그는 여종업원에게 어떻게 사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는데, 이는 당연히 윤리적 관광객이 해야 하는 종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여종업원은 손님의 기대에 맞추어 전통 의상을 입고서, 본토에서의 삶의 방식을 어설프게 읊어댔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 연기(role playing)의 맥락에서는 공감이나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의 지인은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 젊은 여성은 여행을 위해, 잘 되면 외국에서의 유학을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술을 좀 더 마시고 문화적 규범이 느슨해지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소망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장벽은 물질적 불평등이었지 물신화된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의 짜릿함은 장벽이 제거되고 서로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윤리적 관광은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관광객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른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과도한 조심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인간성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서로 배우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문화를 통해 현지인과 관광객을 보는 것은 관광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특징이다. 윤리적 관광은 현지인과 관광객을 문화적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 사는 것으로 그린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관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들은 관광을 일종의 문화 변용(acculuturation), 즉 “둘 또는 그 이상의 문화적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문화적 변화”라고 간주했다.[5] 분명,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적 시스템’에서 출발하게 된다면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간과되기 쉬울 것이다. 현지인의 문화에 위협을 가하는 관광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동정심(sympathy)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공감(empathy)에 대해서는 장벽을 만들 뿐이다.

예컨대, 지구감시연대(Earthwatch) 아마존 전통 문화 휴가의 자원 활동가들은 피라바스(Pirabas) 사람들의 풍부한 구전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통은 ‘현대 문화, 즉 텔레비전의 공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지구감시연대의 공공 유인물). 우리 문화로부터 현지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바람은 그들에게 텔레비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바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윤리적 관광객은 현지인들에게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현지의 규정된 문화를 도덕적으로 격상시키는 작업은 크리스핀 티켈 경(Sir Crispin Tickell)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는 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지역에서의 관광을 언급하면서, 인간본성은 “어떤 회색의 중도적 기준에 우리를 가두기보다는 우리의 차이를 찬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6] 이러한 주장들에서 평등에 대한 침해가 시작되는데, 윤리적 관광객은 관광지 국가가 가난하더라도 보존되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BBC의 『고아의 사람』(Our Man in Goa)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클리브 앤더슨(Clive Anderson)은 “[관광객은 고아와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갈 곳을 찾아야만 한다. 유로 디즈니처럼 … 별로 연약하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손상될 만한 가치도 거의 없는 그런 곳으로 말이다”(BBC TV, 1995)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고아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관광객의 문화보다 연약하면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지 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감수성이 낳는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장벽을 쌓을 뿐이다. 실제로, 많은 고아 사람들은 관광에 긍정적이다. 특히 관광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익과 더 나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윤리적 옹호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다. 문화에 주목하다보면 사람을, 즉 우리와 비슷한 욕망을 가진 사람을 놓치기 쉽다.

문화적 차이의 우선성에 대한 가정은 많은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의 쓸모없는 교의가 되었다. 현지인 문화 대 관광객 문화라는 틀에 박힌 문화적 대립 구도는,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공통점이라는 시각에서는 거의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의 요구, 바람, 열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크게 늘고는 있지만 아직은 여전히 극히 제한된 부류에만 허용되어 있는 국제 관광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도 그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오직 경제 성장과 문화적 변화의 맥락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감수성을 장려하던 중 어딘가에서, 이해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관광은 다른 지역과 문화에서 온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관련된다. 어떤 이들은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말에서 그 위험성을 느끼지만, 차이에 대한 통념은 무너질 수도 있다. 문화적 역충격 ― 엄청난 차이를 예상했지만, 매우 다른 상황에 있음에도 우리와 같은 것을 바라고 비슷한 질문과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 ― 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여행의 짜릿함에는 우리 사회나 문화 바깥의 사람과 만나서 관계를 맺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행지를 문화적 상징으로, 즉 현대적인 삶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사회의 대표로 보는 것은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서 관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의 잠재성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지나친 조심성은 공통의 인간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만다.

결론 - 집에 있는 게 더 낫다?

윤리적 비판에 얹혀 있는 불안의 논리에 따르면, 관광은 무엇인가,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이 아닌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 생태관광의 옹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관광은 수천 여행객의 수동적인 사치로 남아 있다. 이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사치의 장소에서, 윤리적 관광의 신조는 관광이란 특정한 도덕적 의제 ― 그 기초에 문화를 위치시키고 천한 관광객을 주요한 위협으로 지적하는 ― 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장소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의 관광(윤리적 관광)은 좋지만, 순전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해로운 것으로서 암묵적인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행 경험이 많은 녹색 옹호자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여행은 ‘여행으로 인해 마음이 넓어지는 극히 소수에게’만 유익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백만 명 중 십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소수의 계몽은 분명 관광이 그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7]고 이야기한다.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휴가 비판가들에게 있어, 관광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관점을 따르는 도덕적 의제의 일부일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윤리적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적인 기준으로서 제시된다.

만약 이 의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윤리적 관광객이며, 조지 몽비오의 판단에 따르면 자연 세계의 기형물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집에 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실, 이는 녹색당(Green Party)의 제니 존스(Jenny Jones)가 내렸던 결론과 완전히 동일하다. 존스는 뉴버리(Newbury) 우회로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얼마나 많은 뉴버리 사람들이 거기에 가보았겠는가.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잃게 될 것을 깨닫는다면, 우회로에 대한 지역적인 반대는 꺾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될 것이다. 과연 그들이 도로 건설을 허가하고, 결국 그 길을 이용해 유럽으로 드라이브를 가서는, 자기 집 현관 앞에 버려져 있는 장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을 시골 어딘가에서 휴가를 보내려 하겠는가? ‘관광은 친환경적일 수 있는가?’(Can Tourism Be Green), Green World, 1996년 3월

이러한 입장은 관광객을 순진하거나 부주의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러한 자제 요구에는 모종의 위선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스는 그녀의 글 말미에 그녀의 여행 목록을 나열했는데, 그녀는 세이셸(Seychelles)과 레소토 왕국(Lesotho)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터키, 크레타, 에티오피아, 키프로스, 이집트, 아부다비에서 일과 여행을 했다. 이것을 과연 지행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이제 관광은 도덕적 금지와 비판적 자기인식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여행은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니게 되었다. 관광에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고와 윤리적이 되라는 경고가 항상 따라다닌다. 환경단체 아크(Arc)의 소책자 ‘태양, 모래사장, 그리고 세계 구하기’에서부터 꼭 여행할 필요가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하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조언에 이르기까지, 관광은 이제 윤리 수칙의 영역이 되었고 꼬치꼬치 죄를 캐묻는 곳이 되었다. 유럽을 횡단하겠다거나 조금 더 먼 지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충동적이고 무모한 욕망은 이제 더 이상 그리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모험을 좇는 여행가는 제약을 받는다. 태양 숭배자는 눈총을 받는다. 재미 애호가는 ‘파괴적 산업’의 공범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휴가 여행이 윤리적 관광에 의해 그러한 도덕적 금지의 대상이 된 적은 없으므로 우리는 그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휴가를 더욱더 즐기면서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가고자 한다.

  1. Proyecto Ambiental promotional literature, 1997
  2.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 1995, p. 56
  3. 『가디언』(Guardian), 1999년 5월 15일
  4. Tourism Concern Press Release, 2001
  5. D. Nash, 『관광 인류학』(The Anthropology of Tourism) 1996, 나의 강조
  6. 『생태관광: 지속가능한 선택지』(Ecotourism: A Sustainable Option), 1994, 서문
  7. The Green Travel Guide,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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