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58 바이트 제거됨 ,  2021년 8월 2일 (월)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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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인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인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인식적 가치들이 설명적으로 빈곤하다는 것과 따라서 범주상 단지 인식적인 것을 확실히 넘어서는 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주저 없이 주장할 수 있는 2가지는 순수한 인식적 가치들의 설명적 빈곤과 범주상 인식적인 것을 넘어서는 과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필요성이다.  


=== 주 ===
===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