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의 시험 : 예측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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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Lipton, “Testing Hypotheses: Prediction and Prejudice”, Science 307 (14 Jan 2005), 219-221.


가설의 시험 : 예측과 편견

피터 립턴(Peter Lipton) 지음, 정동욱 옮김


“사후 포섭(accommodation)”의 경우, 가설은 이미 이루어진 관찰에 부합하도록 구성된다. “예측(prediction)”의 경우, 가설은 (부분적으로는 기존의 자료에 기초해 있더라도) 문제의 경험적 주장이 관찰에 의해 도출되고 검증되기 전에 구성된다. 잘 뒷받침되는 가설은 보통 사후 포섭과 성공적인 예측을 모두 가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후 포섭에 비해 예측으로부터 더 큰 인상을 받는 것 같다. 에드먼드 핼리는 1531년, 1607년, 1682년에 관찰된 혜성들을 교란된 타원 궤도를 가진 하나의 천체로 설명할 수 있었다. 자연철학자들은 1705년 그가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을 때에도 약간의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전 유럽 학계가 핼리의 혜성을 수용한 것은 그 혜성이 1758년에 돌아올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 확인되었을 때였다. 그 예측 하나가 사후 포섭 세 개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

이러한 반응은 합리적이었을까? 예측의 우월성 논제를 확립하는 것, 즉 예측이 사후 포섭보다 강한 뒷받침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가설의 내용, 가설과 관찰 사이의 연결을 위해 필요한 진술들의 내용, 배경 믿음들의 내용, 관찰의 내용 자체는 그 관찰이 사후 포섭되었는지 아니면 예측되었는지의 질문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이러한 내용들은 가설이 증거로부터 뒷받침되는 정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들로 보인다. 사후 포섭과 예측 사이의 차이는 단지 시점의 문제로 보인다. 어떤 관찰은 다른 관찰에 비해 보다 신뢰할만하거나 보다 강력할 수 있지만, 그 관찰이 이루어진 시점은 무관해 보인다.[2][3][4][5][6]

우월성 논제에 대한 반론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 쌍둥이 과학자의 가상 사례를 생각해 보자. 이 쌍둥이는 공교롭게도 동일한 가설을 독립적으로 형성했다.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한 명은 다른 한 명이 예측한 관찰을 사후 포섭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예측이 우월하다면, 우리는 — 그들이 [동일한] 가설과 자료와 배경 믿음들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 예측가가 포섭가보다 그 가설을 믿을 이유를 더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반직관적이다. 그리고 사태는 더 악화된다. 두 쌍둥이가 만나 그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분명 그들은 그들의 만남 후 서로가 공유한 가설에 대해 동일한 합리적 신뢰도(degree of rational confidence)를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들 중 적어도 한 명은 수정된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수준에 정착해야 할까? 예측가의 높은 수준? 포섭가의 낮은 수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불가능해 보인다. 더구나, 예측과 사후 포섭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누이를 만난 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야 했던 쌍둥이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실 그녀는 자신의 쌍둥이와 같은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죽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단지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견해를 수정해야 했다면, 사후 포섭과 예측 사이의 차이는 사라질 것이다. 자료가 사후 포섭될 때마다, 우리는 그 가설을 먼저 만든 후 그 자료를 예측한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하는지의 문제가 그 가설에 대한 우리의 정당화된 신뢰도(justified confidence)에 차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예측과 사후 포섭 사이의 잠정적인 차이에 대한 적절한 논변은 어떻게 실제적인 만남이 가설적인 만남과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구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단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임시 방편적 가설, 진정한 시험, 최선의 설명

우월성 논제에 대한 세 가지 유명한 논변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논변은 사후 포섭은 가설이 자료와 부합하게 만들어지도록 하지만, 그러한 가설은 임시 방편적(ad hoc)일 것이기에 신통치 않은 뒷받침만 받을 뿐이다. 이 논변은 현재 상태로는 좋은 논변이 아니다. “임시 방편적”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이라는 의미이다. 사후 포섭이 이러한 의미에서 임시 방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사후 포섭이라고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그 가설이 잘 뒷받침되지 않는다거나 결함이 있다고 말하지도 보여주지도 않는다. 한편, “임시 방편적 가설”이라는 표현은 종종 그 가설이 잘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논변은 사후 포섭용 가설은 잘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잘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환 논증이 된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임시 방편 논변은 실패한다.

우월성 논제를 옹호하는 두 번째 논변은 시험 논변이다. 이 논변에 따르면, 가설은 그것의 예측을 통해서만 적절한 시험을 받을 수 있으며, 가설은 시험을 통과함으로써만 진정한 뒷받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예측은 사후 포섭보다 우월하다. 이 생각에 따르면, 시험이란 실패가 가능한 무언가이며, 가설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은 예측뿐이다. 여기서 가설은 먼저 만들어져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얘기하기에, 우리는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가설이 예측의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 가설은 일정한 인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칼 포퍼(Karl Popper)의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포퍼 자신은 긍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긴 했지만, 그는 위험을 감수하는 가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 반면, 사후 포섭에서는 가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 가설은 틀린 가설로 밝혀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가설은 자료가 알려진 후에 구성되었기에 둘 사이의 일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유비는 시험 논변의 직관적 힘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8] 내 큰 아들 제이콥이 신뢰할만한 활과 화살을 가지고 헛간 벽의 과녁을 향해 쏴서 중심점을 맞춘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당연히 감탄할 것이다. 이제 나의 작은 아들 조나가 다른 헛간에 다가가 자신의 활을 당겨 헛간을 향해 화살을 쏜다. 그 다음 그는 헛간 벽에 걸어가 화살 주위에 중심점을 그린다. 어쨌든 활쏘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에게 다소 적은 인정을 줄 것이다. 사후 포섭은 중심점을 나중에 그리는 것과 같은 반면, 예측의 경우는 과녁이 거기에 먼저 있는 것과 같다. 시험 논변은 왜 성공적인 예측이 사후 포섭보다 인정 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태로는, 이 논변 역시 좋지 않은 논변이다. 이 논변은 과학적 가설과 그것을 만드는 과학자를 혼동하고 있다. 예측의 경우에만 과학자가 틀린 예측을 했다고 인정할 수 있기에, 예측의 경우에만 과학자가 틀릴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은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가설에 초점을 맞출 경우, 예측과 사후 포섭의 차이는 사라진다. 만약 자료가 달랐다면, 예측은 틀렸을 것이고 가설은 반박되거나 반입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후 포섭된 자료의 경우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만약 그 자료가 달랐다면, 실제 자료에 맞추어 만들어졌던 그 가설 역시 반박되었을 것이다. 물론 사후 포섭된 자료가 달랐다면 과학자는 다른 가설을 만들었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특정한 가설 자체만을 고려하는 한, 상황은 대칭적이다. 즉 만약 예측이 시험이라면, 사후 포섭도 시험이다. 따라서 시험 논변은 실패한다.

우월성 논제를 옹호하는 세 번째 유명한 논변은 최선의 설명 논변이다.[9] 사후 포섭의 경우, 가설과 자료 사이의 일치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하나는 가설이 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설이 자료와 부합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후자, 즉 포섭에 의거한 설명이 이 경우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참에 의거한 설명으로의 추론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예측의 경우, 우리는 포섭에 의거한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는 참에 의거한 설명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전자의 경우 참에 의거한 설명은 최선의 설명이 될 수 없는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측이 사후 포섭보다 나은 이유를 제공한다.

최선의 설명 논변은 상당히 직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약점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포섭에 의거한 설명이 실제로 정말 참에 의거한 설명을 차단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분명 두 설명은 모두 옳을 수 있으며, 포섭에 의거한 설명을 수용하면 가설이 참일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가정하는 것은 또 다시 사후 포섭의 열등함을 단정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바로 자료와 일치하도록 가설이 설계되었다는 사실이 그 일치로부터 가설의 참을 추론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약화시키는지에 대한 것으로, 최선의 설명 논변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택과 날조

우월성 논제에 대한 더 좋은 논변이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논변을 제안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관찰이 가설에 제공하는 뒷받침의 정도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 중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10][11] 이는 크게 증거의 특징과 가설의 특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증거적 미덕에 해당하는 목록에 우리는 많은 증거가 보다 적은 증거보다 낫다는 것을 적어 넣을 수 있지만, 이것이 유일한 항목은 아니다. 자료의 다양성도 증거적 미덕에 해당한다. 단지 같은 실험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은 결국 수익이 감소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반면, 다양한 실험에 의해 뒷받침되는 가설은 당연히 더 큰 신뢰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정확하고 정밀한 자료는 또 다른 증거적 미덕이며, 통제된 실험 결과도 교란에 따른 영향이 없다는 자신감을 과학자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증거적 미덕이다. 똑같은 점이 소위 “결정적” 실험에도 해당되는데, 이 실험에서 증거는 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그 경쟁 가설들 중 일부를 약화시킨다. 또한 가설이 참이 아니었다면 거의 나타날 수 없는 증거도 이에 속한다.

우리는 이론적 미덕의 목록도 구성할 수 있다. 첫째는 가설의 사전적인(prior) 그럴듯함이다. 이는 가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가설이 이미 수용된 다른 주장들과 얼마나 잘 부합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단순성은 또 다른 이론적 미덕이다. 오컴의 칼날에 호소하여, 보다 단순한 가설은 보통 올바른 가설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이론적 미덕에는 가설로부터 시험 가능한 귀결을 이끌어내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보조 진술들의 그럴듯함이나 좋은 경쟁 가설의 부재가 포함된다.

내가 우월성 논제를 옹호하기 위해 제시하고자 하는 두 가지 논변은 예측과 사후 포섭 사이의 차이를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는 위의 증거적, 이론적 미덕들과 연결시킨다. 두 논변 중 보다 단순한 첫 번째 논변은 선택 논변이다. 과학자들이 예측을 선택하는 방식과 포섭할 자료를 선택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예측의 경우, 그들은 가설의 무슨 예측을 검사할지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수를 고를 수 있다. 반면 포섭될 자료는 이미 존재하고, 과학자들은 그것으로 어떻게든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로부터 예측이 사후 포섭보다 강력한 뒷받침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까? 칼 포퍼가 무슨 조언을 했든, 과학자들은 보통 자신의 가설을 위해 가능한 강력한 논거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그들은 만약 그것이 맞다면 자신의 가설에 최대의 뒷받침을 제공하게 될 — 단지 예측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종류의 증거적 미덕을 보이는 — 예측을 선택할 만한 동기를 가지게 된다. 즉, 과학자는 매우 정밀한 관측이 가능하거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다양성을 상당히 증가시키는 등의 예측을 선택할 것이다. 성공적인 예측은 사후 포섭보다 강력한 뒷받침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그것이 예측이라는 직접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과학자가 무슨 예측을 검사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통제는 사후 포섭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가설을 먼저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자료, 즉 더 강력한 뒷받침을 산출하는 자료의 수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선택 논변이다. 이 논변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진 못한다. 우선 첫째로, 과학자들이 항상 무슨 예측을 검사할지에 대해 그렇게 많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핼리는 그 사례이다. 그럼에도, 선택 논변은 성공적인 예측이 왜 사후 포섭보다 때로 강력한 경향을 띠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예측 때문에 강력해지는지 정말로 보여준다. 이는 약한 우월성 논제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예측의 경우 과학자가 때로 특별히 강한 뒷받침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를 얻는 지침으로 가설을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사후 포섭의 경우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설은 예측의 경우에만 먼저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선택 논변은 사후 포섭된 하나의 특정한 관찰이 만약 포섭 대신 예측되었더라면 문제의 가설에 더 큰 뒷받침을 제공했을 것이라는 보다 야심찬 주장 — 강한 우월성 논제 — 에 대해서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음의 유비는 약한 논제와 강한 논제 사이의 구분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음식점에서는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있는 반면,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을 때에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먹은 음식보다 음식점에서 먹은 음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지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이 음식점의 (예컨대) 라자냐가 가정집의 라자냐보다 맛있다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와 유사하게, 선택 논변은 예측이 사후 포섭보다 강력한 뒷받침을 제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어떤 자료가 예측되었다는 사실이 (똑같은 자료가 사후 포섭되었을 경우에 비해) 가설을 믿을 무언가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진 않는다. 이 강한 우월성 논제를 변호하기 위해, 우리에겐 또 다른 논변이 필요하다. 이는 “날조(fudging)” 논변이다.

날조 논변은 위의 두 가지 미덕 목록의 흥미로운 특징에 의존하는데, 즉 일부 증거적 미덕은 일부 이론적 미덕과 긴장 관계에 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증거적 측면에서, 과학자는 지지 증거가 광범위하고 다양하길 원한다. 이론적 측면에서, 그들은 가장 단순한 가설을 원한다. 두 가지 미덕을 따로 생각할 때, 둘중 하나만 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만약 많은 다양한 증거만을 원한다면, 그는 사실들의 백과사전을 엮으면 된다. 그러나 그 사실들은 매우 이질적이므로, 그 사실들의 연언으로 이루어진 가설은 엄청나게 복잡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고려할 사항이 오직 단순성뿐이라면, 즉 많은 증거를 포괄하는 일을 신경쓰지 않는 한, 이 역시 쉬운 일이다. 어려운 일은, 즉 과학자가 원하는 일은, 두 제약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하면서도 엄청나게 다양한 증거들을 다룰 수 있는 가설을 원한다.

이제 날조 논변으로 들어가보자. 과학자가 포섭할 자료를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만약 자료가 다양하다면, 단순성을 비롯한 이론적 미덕들은 희생되기 쉽다.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자들이 당시 알려져 있던 천문 자료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의 행성 모형에 삽입해야만 했던 주전원은 날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간주된다.[12] 실제 과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최근 역사에서 보다 미묘한 사례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연구자가,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더 많은 자료를 포섭하기 위해 몇몇 추가적인 주전원 같은 것들을 집어넣어 가설을 날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측의 경우 연구자는 미리 정답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변칙이 필요할 때조차 어떤 변칙을 도입해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가설에 부자연스러운 무언가를 도입할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경우, 과학자는 최선의 가설을 사용할 것이고, 만약 그 예측이 성공적이라면, 경험적 미덕과 이론적 미덕 모두를 보여준 셈이 될 것이다.

날조 논변이 말하는 예측의 장점은 이중맹검 의학 실험의 장점과 몇 가지 측면에서 유사하다. 이중맹검 의학 실험에서는 의사도 환자도 어느 환자가 위약을 받고 어느 환자가 시험 중인 약을 받는지 알지 못한다. 의사의 무지는 그가 내리는 판단의 신뢰성을 높여주는데, 이는 그 의사가 “정”답일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날조 논변은 비슷한 주장을 과학자들에 대해 일반화하고 있다. 정답을 사전에 알지 못함으로써 — 사후 포섭이 아닌 예측 상황에서 — 과학자는 신통치 않은 경험적 뒷받침만을 주는 방식으로 가설을 날조할 가능성이 적어진다.[13][14]

자료를 포섭해야 하는 필요가 날조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은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은 정말 과학자들이 자료가 사후 포섭되었는지 예측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한 반론에 따르면, 어떤 날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과학자들이 주어진 가설과 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과학자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가설이 자료로부터 뒷받침되는 정도를 결정하는 요소들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날조는 완전히 의도적이거나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증거가 사후 포섭되었는지 예측되었는지에 대한 정보와 같은 간접적인 증거도 유의미할 수 있다.

쌍둥이 문제의 재고

날조 논변의 시각에서, 우리는 이제 위에서 살펴본 우월성 논제의 세 가지 유명한 옹호 논변에서 일말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첫째로, 사후 포섭이 임시 방편적이기 때문에 예측보다 열등하다는 논변을 재고해 보자. 나의 반론은 이 논변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남겨두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가설을 임시 방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그 가설이 사후 포섭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사후 포섭용 가설은 강력한 경험적 뒷받침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날조 논변은 왜 사후 포섭을 위한 체계들이 두 번째 의미(그것이 포섭한 증거에 의해 약하게만 뒷받침된다는 의미)에서 임시 방편적인 경향이 있는지에 대한 독립적인 이유를 제공한다. 즉 그들은 지나친 복잡성이나 빈약한 동기만을 가진 가정들과 같은 이론적 결함들을 가지기 쉽다.

내가 앞서 거부했던 두 번째 논변은 시험 논변이었다. 이 논변에 따르면, 시험이란 실패할 수 있는 무언가이기에, 오직 예측만이 가설을 시험하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측은 우월하다. 나의 반론은 오직 예측만이 과학자를 시험한다는 것은 맞더라도, 사후 포섭용 가설 역시 예측용 가설과 마찬가지로 반증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만약 사후 포섭된 증거가 달랐더라면, 그 가설은 반입증되었을 것이다. 날조 논변은 우리가 결국 과학자를 시험해야 하고 과학자도 자신을 시험해야 한다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단지 과학자가 틀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는 다음의 진정한 요점과 관련되어 있다. 과학자는 정답을 미리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과학자는 날조할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날조 논변은 최선의 설명 논변의 개선된 버전을 제안한다. 원래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예측은 [사후 포섭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예측의 성공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참인 반면, 사후 포섭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가설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반론은 사후 포섭에 의거한 설명이 참에 의거한 설명을 차단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오직 사후 포섭의 경우에만 가설이 그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가설과 관찰 사이의 일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맞지만, 우리가 정말 알고자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가설이 참일 가능성이 정말 낮아지는가이다. 반면, 날조 논변은 참에 의거한 설명과 분명 대조된다. 사후 포섭의 경우 가설과 관찰 사이의 일치가 날조 때문이라는 설명을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한, 이는 [가설과 관찰 사이의] 일치로부터 참을 추론하는 우리의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따라서 사후 포섭과 예측 사이의 차이에 대한 최선의 설명 논변은 사후 포섭에 의거한 설명을 날조에 의거한 설명으로 교체함으로써 되살릴 수 있다. 사후 포섭의 경우, [가설과 관찰 사이의] 일치로부터 참으로의 추론은 그 일치로부터 이론 체계가 (경멸적인 의미에서) 임시 방편적이라는 결론으로의 추론에 의해 차단된다.

날조 논변은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예측과 사후 포섭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 듯한 쌍둥이 과학자의 퍼즐에도 답을 제공한다. 우리에겐 동일한 가설에 도달하게 된 두 명의 과학자가 있다. 그중 한 명은 증거를 사후 포섭한 반면, 다른 한 명은 예측했다. 그들이 정보를 교환한 후, 그들은 그들이 공유한 가설에 대해 동일한 수준의 신뢰를 가져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수준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측가와의 만남이 포섭가가 알고 있던 것 — 누군가 더 적은 증거를 가지고 동일한 가설을 산출했다면, 그 자료의 예측은 성공적이었을 것이라는 것 — 을 아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포섭가에게 제공하는지 말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퍼즐에 대한 답은 이제 명확하다. 포섭가는 자신이 무언가 날조하진 않았는지 걱정해야 하나, 그의 의심은 지워질 수 있다. 의심을 지울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는 — 과학사에서는 일반적이진 않지만 — 해당 예측가와의 만남이다. 만약 포섭가가 그가 포섭했을 뿐인 자료를 예측한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는 그 포섭가가 아마도 그 포섭을 위해 날조하지 않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자신이 예측한 자료를 몰랐던 예측가는 동일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설을 날조할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측가가 정확히 동일한 가설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포섭가 역시 날조하지 않았다는 독립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그들 모두가 날조를 하기보다는 예측가도 포섭가도 날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지 동일한 가설이 먼저 구성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성 역시 자의적이고 비동기화된 날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측가라면 그 대신 그와 다른 더 좋은 가설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두 쌍둥이는 예측가의 더 높은 자신감을 공유하면서 헤어져야 한다. 과학적 형제자매가 없는 우리에게, 날조 논변이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후 포섭보다 예측에 의해 더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은 때로 정당화된다.[15]

  1. M. Grosser, in Dictionary of Scientific Biography, C. C. Gillispie, Ed. (New York: Scribner's, 1970), vol. I, pp. 53-54.
  2. J. S. Mill, A System of Logic, ed. 8 (London: Longmans, 1904), III, xiv, 6.
  3. J. M. Keynes, Collected Writings of John Maynard Keynes Vol. VIII: A Treatise on Probability (London: Macmillan, 1973).
  4. P. Horwich, Probability and Evidenc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2), pp. 108-117.
  5. G. Schlesinger, Australas. J. Philos. 65, 33 (1987).
  6. S. J. Brush, Science 246, 1124 (1989).
  7. K.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한국어 번역 : 박우석 옮김,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1994). 이 책의 앞부분은 이 위키노트의 항목 귀납의 문제로 재번역 수록되어 있다.
  8. R. Nozick, in How Many Questions?, L. Cauman et al., Eds., (Indianapolis, IN: Hackett, 1983), pp. 105-119.
  9. P. Lipton,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ed. 2 (London: Routledge, 2004).
  10. C. Glymour, Theory and Eviden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 Press, 1980).
  11. C. Howson, P. Urbach, Scientific Reasoning: The Bayesian Approach (La Salle, IL: Open Court, 1989).
  12. T.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New York: Random House, 1957). 한국어 번역 :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13. J. Worrall, in The Uses of Experiment, D. Gooding, T. Pinch, S. Schaffer, Eds.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9), pp. 135-157
  14. C. Hitchcock, E. Sober, Br. J. Philos. Sci. 55, 1 (2004).
  15. 루벤(D. Ruben), 하우슨(C. Howson), 파피뉴(D. Papineau), 샤피로(M. Schapiro), 윌리엄슨(T. Williamson)과 심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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