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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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포퍼 지음, 박우석 옮김,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1994), 1장, 29-38쪽. (위키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 문장과 용어 수정함 1.224.226.50 2011년 4월 4일 (월) 18:51 (KST))

과학자는 이론가, 실험가를 막론하고 진술들 또는 진술들의 체계를 제시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검사한다. 특히 경험과학의 분야에서 그는 가설들 또는 이론들의 체계를 구성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그것들을 경험에 비춰 검사한다.

필자는 이러한 절차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 즉 경험과학의 방법을 분석하는 것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또는 지식의 논리의 과제라고 제창한다.

그러나 이 ‘경험과학들의 방법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가리켜 ‘경험과학’이라 하는가?

귀납의 문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 이 책에서는 반대될 -- 견해에 따르면, 경험과학들은 소위 ‘귀납적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귀납논리와, 즉 이들 귀납적 방법들의 논리적 분석과 동일하게 된다.

통상적으로 어떤 추론(inference)이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에 대한 보고와 같은 단칭적 진술들(때로는 또한 ‘특칭적’ 진술들이라 불림)로부터 가설들이나 이론들과 같은 보편 진술들로 나아갈 경우 그것을 ‘귀납적’이라 한다.

그런데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제아무리 그 수가 많더라도 단칭 진술들로부터 보편 진술들을 추론해 해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전혀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끌어낸 어떤 결론도 언제나 허위로 판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흰 고니의 사례들을 우리가 많이 보아 왔다 하더라도 이것이 모든 고니는 하얗다라는 결론을 정당화해 주지 못한다.

귀납적 추론들이 정당화되는가, 또는 어떤 조건 아래서 정당화되는가 하는 물음이 귀납의 문제로 알려져 있다.

귀납의 문제는 또한 경험과학의 가설들과 이론체계들 같은, 경험에 근거한 보편 진술들의 참됨을 어떻게 확립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정식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이들 보편 진술들의 참됨이 ‘경험에 의해 알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험의 -- 관찰 또는 실험 결과의 -- 보고가 일단은 단칭 진술에 불과할 뿐 보편 진술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보편 진술에 관해 우리가 그 참됨을 경험으로부터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 보편 진술의 참됨이 어떻게든 단칭 진술들의 참됨으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단칭 진술들은 경험에 의해 참으로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보편 진술이 귀납적 추론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따라서 참이라고 알려진 자연 법칙들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귀납적 추론들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되는가를 묻는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귀납적 추론들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귀납원리의 확립을 시도해야 한다. 귀납원리란 우리가 그것에 도움을 받아 귀납적 추론들을 논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을 형식으로 제시하는 그런 진술일 터이다. 귀납논리의 옹호자들의 관점에서 귀납원리야말로 과학적 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다 : “... 이 원리는 과학적 이론들의 참됨을 결정짓는다. 그것을 과학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과학에게서 그것의 이론들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힘을 박탈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것 없이는, 분명 과학은 그것의 이론들의 시인의 마음이 지어 낸 공상적이고 자의적인 것들로부터 구별지을 권리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1]

그런데 이 귀납원리는 토톨로지[동어반복적 진술]나 분석적 진술처럼 순수하게 논리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실로 순수하게 논리적인 귀납원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귀납의 문제라는 것이 없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모든 귀납적 추론들은 연역논리에서의 추론들과 매한가지로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 동어반복적인 변형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납원리는 종합적 진술임에 틀림없다. 즉, 그것의 부정이 자기모순적이지 않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진술이다. 그래서 왜 그런 원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의 수용을 어떻게 합리적 근거로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귀납논리를 신봉하는 어떤 이들은 라이헨바하처럼 “귀납원리는 과학 전체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누구도 일상생활에서 이 원리를 심각하게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애써 지적하고자 한다.[2]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 왜냐하면 결국 ‘과학 전체’가 잘못을 범할 수도 있으니까 -- 필자는 여전히 귀납원리는 불필요한 것이요, 논리적 모순으로 인도되고 말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자 한다.

귀납원리와의 연관하에 모순들이 쉽게 생긴다는 것, 그리고 행여 모순을 피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숱한 난관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흄의 저작을 통해 분명해졌어야 마땅하다.[3] 왜냐하면 귀납원리 또한 보편 진술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의 참됨이 경험으로부터 알려지는 것이라고 보게 되면, 애당초 그것을 도입하게 된 까닭과 똑같은 문제들이 다시금 제기될 것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귀납적 추론들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높은 위계의 귀납원리를 당연한 것으로 쳐야 하며, 이와 같은 과정이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따라서 무한 퇴행(infinite regress)에 빠질 것이 틀림없으르모 귀납원리를 경험에 근거지우려는 시도는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칸트는 (그가 ‘보편적 인과의 원리’로 정식화한) 귀납원리를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난점으로부터 빠져 나갈 혈로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종합적 진술들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그의 교묘한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 자신은 여기서 스케치된 귀납논리의 여러 가지 난점들이 극복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귀납적 추론이 비록 ‘엄격히 타당’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의 ‘신빙성’ 또는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오늘날 매우 널리 나돌고 있는 학설에 내재된 난점들 또한 극복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학설에 따르면, 귀납적 추론들은 ‘개연적 추론들’이다.[4] 라이헨바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귀납원리를 그에 의해 과학이 진리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수단으로 기술해 왔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확률에 근거하여 결정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와 허위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과학에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적 진술들은 단지 연속적인 확률도를 얻을 수 있을 뿐이고 진리와 허위는 성취불가능한 상하의 극한인 것이다.”[5]

이 단계에서 필자는 귀납논리의 신봉자들이 필자가 나중에 그들 자신의 목적에 아주 부적합하다고 거절할 확률의 관념을 환대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 필자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언급된 난점들을 확률에 호소해서는 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귀납적 추론에 근거한 진술들에 특정 확률도가 주어진다면, 이것은 적당히 수정된 새로운 귀납원리를 불러냄으로써 정당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원리는 그것대로 또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나아가서, 만일 귀납원리 역시 ‘참인’ 것으로가 아니라 단지 ‘개연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면, 얻어지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다른 어떤 형태의 귀납원리와도 마찬가지로, 개연적 추론의 논리 또는 ‘확률 논리’는 무한 퇴행으로 빠지거나 선험주의 학설로 나아가게 된다.[6]


아래에서 전개될 이론은 귀납논리의 관념들을 가지고 무언가 이루어 보려는 온갖 시도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연역적 검사방법의 이론, 또는 가설은 오직 전개된 이후 경험적으로 검사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견해로 얘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귀납주의’에 대조되게 ‘연역주의’라 불림 직한[7]) 이 견해를 자세히 설명하기에 앞서, 필자는 먼저 경험적 사실들을 다루는 지식의 심리학과 오직 논리적 관계들에만 관심을 갖는 지식의 논리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귀납논리에 대한 믿음은 주로 심리적 문제들과 인식론적 문제들을 혼동하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고, 이 혼돈이 지식의 논리뿐만 아니라 지식의 심리학에 대해서도 말썽을 초래한다는 것을 주목해 둘 만하다.

심리주의의 배제

필자는 위에서 과학자가 하는 일은 이론들을 제시하고 검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단계, 즉 이론을 착상하거나 창안하는 행위는 필자에게는 논리적 분석을 요구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분석되지도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떤 참신한 생각이 -- 그것이 음악의 테마든지, 극적 갈등이든지, 과학 이론이든지 간에 --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에게 떠오르느냐 하는 문제는 경험 심리학의 큰 관심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 분석과는 무관하다. 후자는 사실의 문제(칸트의 quid facti?)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당화 또는 타당성의 문제(칸트의 quid juris?)에 관한 것이다. 그것의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의 것들이다. 진술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검사가능한가? 그것은 다른 어떤 진술들에 논리적으로 의존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과 혹 모순되는가? 어떤 진술이 이렇게 해서 논리적으로 검사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 누군가가 그것을 정식화하고 논리적 검사에 회부한 것이 틀림없다.

이에 따라 필자는 새 관념을 착상하는 과정과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사하는 방법들과 귀결들을 예리하게 구별할 것이다. 지식의 심리학에 대조되는 지식의 논리의 과제에 관해, 필자는 그것이 전적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이든 진지하게 대접받으려면 거쳐야만 하는 체계적인 검사들에서 사용되는 방법들을 연구하는 데 있다는 가정하에 논의를 계속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과학자들을 발견으로 -- 즉,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는 데로 -- 인도한 단계들의 이른바 ‘합리적 재구성’을 수행하는 것을 인식론의 과업으로 보는 편이 그 목적에 더욱 부합되지 않느냐고 반론을 펼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정확히 무엇을 재구성하기를 원하는가? 만약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 어떤 영감을 자극하고 방출하는 데 얽힌 과정들이라면, 필자는 그것을 지식의 논리의 과제로 취급하기를 거부하고자 한다. 그런 과정들은 경험 심리학의 관심사이지 결코 논리학의 관심사라 할 수 없다. 영감이 그것들에 의해 [진짜] 발견임이 발견되는, 또는 지식으로 알려지게 되는 후속적 검사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과학자가 그 자신의 영감을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변개하고 물리치는 한, 우리는 원한다면 여기서 수행된 방법론적 분석을 그에 대응되는 사고과정들의 일종인 ‘합리적 재구성’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재구성은 이러한 과정들을 실제로 일어났던 그대로 기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만 검사과정의 논리적 골조만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손치더라도, 이것이 아마 우리가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들의 ‘합리적 재구성’을 논하는 이들이 의미하는 바의 전부일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 책에서의 필자의 논변들은 이 문제와 전연 독립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문제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새로운 생각을 갖는 논리적 방법이라든가 이 과정의 논리적 재구성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는 어떤 발견도 ‘비합리적 요소’나 베르그송적 의미로 ‘창조적 직관’을 포함한다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아인슈타인은 “그로부터 순수한 연역에 의해 세계상이 얻어질 수 있는 고도의 보편적 법칙들의 탐색”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법칙들로 인도해 주는 논리적 행로란 없다. 그것들은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지적 사랑 같은 것에 근거한 직관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8]

이론들의 연역적 검사

여기서 전개될 견해에 따르면,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방법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진행된다. 잠정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직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되지 않은 어떤 새로운 생각 -- 예견, 가설, 이론체계, 또는 어떻게 불러도 좋은데 -- 으로부터 논리적 연역의 수단에 의해 결론들이 도출된다. 그리고나서는 이 결론들이 상호간에, 또는 다른 관련 있는 진술들과 비교됨으로써 그것들 사이에 그 어떤 논리적 관계들(동치, 도출가능성, 양립가능성, 또는 양립불가능성 따위)이 존재하는지를 밝히게 된다.

원한다면 이론의 검사가 그에 따라 수행될 수 있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노선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결론들 자체를 서로 논리적으로 비교함으로써 그 체계의 내적 일관성을 검사한다. 둘째, 주어진 이론이 경험적 또는 과학적 이론의 성격을 갖는지 아니면, 예컨대 동어반복적인지를 결정할 목적으로 그 이론의 논리적 형식을 연구할 수 있다. 셋째, 주로 주어진 이론이 과학적 진보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할 목표에서, 그것이 우리의 다양한 검사들을 견뎌내느냐 하는 면에서 다른 이론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들을 경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그 이론을 검사하는 수가 있다.

이 마지막 유형의 검사를 행하는 목적은 그 이론의 새로운 귀결들이 -- 그것이 주장하는 바에서 무엇이 새롭건간에 -- 순수하게 과학적 실험들에서 제기되든 실제 기술적 응용에 의해 제기되든 실천상의 요구들을 얼마만큼 감당해 내는지 알아보려는 데 있다. 여기에서도 검사 과정은 역시 연역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기왕에 받아들여진 다른 진술들에 힘입어 어떤 단칭 진술들 -- ‘예측들’이라 부를 수 있을 것들 -- 이 이론으로부터 연역된다. 특히 쉽게 검사가 가능하거나 응용 가능한 예측들이 그러하다. 이 진술들 가운데서 당대의 통설인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것들, 그리고 특히 현행이론과 모순되는 것들이 선택된다. 다음에는 실제적 응용과 실험들의 결과와 비교함으로써 이 (그리고 다른) 도출된 진술들에 관한 결정을 모색한다. 만약 이 결정이 긍정적이라면, 즉 만약 단칭적 귀결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또는 검증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이론은 당분간 검사를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결정이 부정적이면, 달리 말해서 만약 그 결론들이 반증되었으면 그것들의 반증은 또한 그로부터 그것들이 논리적으로 연역된 이론을 반증한다.

한 차례의 긍정적 결정은 다만 일시적으로 그 이론을 지지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뒤이어 내려진 부정적인 결정들이 언제든지 그것을 뒤집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 상세하고도 가혹한 검사들을 견뎌 내고 과학적 진보의 과정에서 다른 이론에 의해 대치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이 “기개(mettle)를 증명했다” 또는 그것이 과거의 경험에 의해 “방증되었다(corroborated 용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9]

여기서 약술된 과정에는 귀납논리와 유사한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필자는 단 한번도 단칭적 진술들의 참됨으로부터 이론들의 참됨으로 추론해 갈 수 있다고 가정한 바 없다. 필자는 결단코 ‘검증된’ 결론들의 위력에 의해 이론들이 ‘참’으로 확립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 ‘개연적’인 것으로라도 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

각주

  1. H. Reichenbach, Erkenntnis 1, 1930, p. 186(p. 64이하 또한 참조할 것). 러셀의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6의 흄에 관한 제 12장, p. 699의 끝에서 둘째 단락도 참조할 것.
  2. 라이헨바하, 같은 책, p. 67.
  3. 흄으로부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용절들은 이 책의 82절, 각주 2 참조.
  4. J. M. Keynes, A Treatise on Probability, 1921;...
  5. Reichenbach, Erkenntnis 1, 1930, p. 186.
  6. 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제10장, 특히 81절의 각주 2, 그리고 후기의 *2장을 보면 이 비판이 훨씬 자세하게 진술되어 있다.
  7. 리비히가 아마도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귀납적 방법을 물리친 최초의 예일 것이다....
  8. 막스 플랑크 회갑 기념 연설.... A. Einstein, Mein Weltbild, 1934, p. 168에서 인용;....
  9. 이 용어에 관해서는 이 책의 79절 앞의 각주 *1과 필자의 후기 *29절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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