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의 문제

ZoLAist's WikiNote
이동: 둘러보기, 검색

칼 포퍼 지음, 박우석 옮김, 『과학적 발견의 논리』 (고려원, 1994), 1장, 29-38쪽. 원문 : Karl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New York: Basic Books, 1959), pp. 27-34; reprinted in Martin Curd and J. A. Cover, eds., Philosophy of Science: The Central Issues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 Company, Inc., 1998), pp. 426-432.

칼 포퍼는 「귀납의 문제」에서 귀납적 추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며, 오로지 연역 추론만을 사용하는 경험 과학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바로 ‘반증주의’로, 이 방법에 따르면 과학자에 의해 창안된 이론은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 경험적 귀결이 관측과 일치할 경우 승인되고, 일치하지 않을 경우 반증되어 버려진다. 이때 포퍼는 이론의 예측이 관측과 일치하더라도 이론이 참이라거나 개연적이라는 추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WikiNote에 수록된 번역본은 박우석의 번역본을 토대로 일부 용어와 문장을 수정했는데, “falsification”을 “허위화” 대신 “반증”으로, “test”를 “검사” 대신 “시험”으로 번역했다.

본문

귀납의 문제


칼 포퍼(Karl Popper)

박우석 옮김, 정동욱 수정


과학자는 이론가, 실험가를 막론하고 진술들 또는 진술들의 체계를 제시하고 그것을 단계적으로 시험한다. 특히 경험 과학의 분야에서 그는 가설들 또는 이론들의 체계를 구성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그것들을 경험에 비춰 시험한다. 나는 이러한 절차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 즉 경험 과학의 방법을 분석하는 것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또는 지식의 논리의 과제라고 제창한다. 그러나 이 ‘경험 과학의 방법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가리켜 ‘경험 과학’이라 하는가?

귀납의 문제

널리 수용된 — 이 책에서는 반대할 — 견해에 따르면, 경험 과학들은 소위 ‘귀납적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과학적 발견의 논리란 귀납 논리, 즉 그 귀납적 방법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동일해질 것이다.

통상적으로 어떤 추론이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에 대한 보고와 같은 단칭 진술들(때로는 ‘특칭’ 진술들이라고도 불림)로부터 가설들이나 이론들과 같은 보편 진술들로 나아갈 경우 그것을 ‘귀납적’이라 한다.

그런데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단칭 진술들로부터 보편 진술들을 추론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끌어낸 어떤 결론도 언제나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얀 백조의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보았더라도, 그것은 모든 백조가 하얗다라는 결론을 정당화해 주지 못한다.

귀납적 추론들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그것이 어떤 조건들 하에서 정당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귀납의 문제로 알려져 있다.

귀납의 문제는 경험 과학의 가설들과 이론 체계들과 같은 경험에 근거한 보편 진술들의 참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도 정식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은 이러한 보편 진술들의 참이 ‘경험에 의해 알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도 어떤 경험 — 관찰 또는 실험 결과 — 에 대한 보고는 일단 단칭 진술에 불과할 뿐 보편 진술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어떤 보편 진술에 대해 누군가 그것의 참을 경험으로부터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보통 보편 진술의 참이 어떻게든 단칭 진술들의 참으로 환원될 수 있고 단칭 진술들은 경험에 의해 참으로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보편 진술이 귀납적 추론에 근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참이라 알려진 자연 법칙들이 있는지 묻는 것은 귀납적 추론들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묻는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귀납적 추론들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귀납 원리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귀납 원리란 귀납적 추론들을 논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술일 것이다. 귀납 논리의 옹호자들의 관점에서 귀납 원리는 과학적 방법에 있어서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다. 라이헨바하(Hans Reichenbach, 1891-1953)에 따르면, “... 이 원리는 과학 이론들의 참을 결정짓는다. 그것을 과학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은 과학으로부터 자신의 이론들의 진위를 판정할 능력을 빼앗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분명, 그것 없이는 과학은 더 이상 자신의 이론들을 시인의 마음이 지어 낸 공상적이고 자의적인 이론으로부터 구별지을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1]

그런데 이 귀납 원리는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적 진술)나 분석적 진술처럼 순수하게 논리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사실, 순수하게 논리적인 귀납 원리와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귀납의 문제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모든 귀납적 추론들은 연역 논리에서의 추론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 동어반복적인 변환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납 원리는 종합적 진술, 즉 그것의 부정이 자기모순적이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가능한 진술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원리를 대체 왜 수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수용이 어떠한 합리적 근거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라이헨바하처럼 귀납 논리를 신봉하는 어떤 이들은 “귀납 원리는 과학 전체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누구도 일상생활에서 이 원리를 심각하게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공을 들인다.[2]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가정하더라도 — 왜냐하면 결국 ‘과학 전체’가 잘못을 범할 수도 있으니까 — 나는 여전히 귀납 원리는 불필요하며, 그것이 논리적 모순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귀납 원리를 도입할 경우 모순이 쉽게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순을 피하려면 상당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은 흄(David Hume)의 저작을 통해 분명해졌어야 했다. 왜냐하면 귀납 원리는 결국 보편 진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의 참이 경험으로부터 알려지는 것으로 간주하려면, 애당초 그것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정확히 똑같은 문제들이 다시금 제기될 것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귀납적 추론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상위 수준의 귀납 원리를 가정해야 하며, 이와 같은 과정이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결국 귀납 원리를 경험에 근거지우려는 시도는 무한 퇴행(infinite regress)에 빠져 붕괴하고 만다.

칸트는 (그가 ‘보편적 인과의 원리’로 정식화한) 귀납 원리를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나는 종합적 진술들에 대한 선험적 정당화를 제공하려는 그의 영리한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은 여기서 스케치된 귀납 논리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극복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귀납적 추론이 비록 ‘엄격히 타당’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의 ‘신빙성(reliability)’ 또는 ‘개연성(probability)’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오늘날 매우 널리 유행하고 있는 학설에 내재된 어려움들 또한 극복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학설에 따르면, 귀납적 추론들은 ‘개연적 추론들’이다.[3] 라이헨바하에 따르면, “우리는 귀납 원리를 과학이 참을 판정할 때 사용하는 수단으로 기술해 왔다. 더 정확하게, 우리는 그것이 개연성을 판정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 또는 거짓에 도달하기 위해 과학에 제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과학적 진술들은 단지 연속적인 개연성의 정도(degree of probability)만을 얻을 수 있을 뿐, 참과 거짓은 그것의 도달 불가능한 상한과 하한이다.”[4]

귀납 논리의 신봉자들이 ... 개연성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지금으로서는 무시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어려움들은 개연성에 호소해서는 건드릴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귀납적 추론에 근거한 진술들에 어떤 개연성의 정도가 부여되려면, 이는 적절히 수정된 새로운 귀납 원리를 불러냄으로써 정당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새 원리는 다시 그것대로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더구나, 만일 귀납 원리가 결국에 ‘참’이 아니라 단지 ‘개연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다른 어떤 형식의 귀납 원리와도 마찬가지로, 개연적 추론의 논리 또는 ‘확률 논리’는 무한 퇴행에 빠지거나 선험주의 학설로 귀착된다.


아래에서 전개될 이론은 귀납 논리의 관념들을 이용한 모든 시도들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것은 연역적 시험 방법의 이론, 또는 가설은 — 오직 제시된 이후에 — 경험적으로 시험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견해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귀납주의’와 대조적으로 ‘연역주의’라 불릴 만한[5]) 이 견해를 상술하기 앞서, 나는 우선 경험적 사실들을 다루는 지식의 심리학과 오직 논리적 관계들만을 다루는 지식의 논리학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귀납 논리에 대한 믿음은 주로 심리적 문제들을 인식론적 문제들과 혼동하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혼동이 지식의 논리학뿐 아니라 지식의 심리학에도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심리주의의 배제

나는 위에서 과학자가 하는 일은 이론들을 제시하고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단계, 즉 이론을 착상하거나 창안하는 행위는 나에게는 논리적 분석을 요구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분석되지도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떤 참신한 생각이 — 그것이 음악의 테마든지, 극적 갈등이든지, 과학 이론이든지 간에 —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에게 떠오르느냐 하는 문제는 경험 심리학의 큰 관심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 분석과는 무관하다. 후자는 사실의 문제(칸트의 quid facti?)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당화 또는 타당성의 문제(칸트의 quid juris?)에 관한 것이다. 그것의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유형의 것들이다. 진술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시험 가능한가? 그것은 다른 어떤 진술들에 논리적으로 의존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다른 진술들에 모순되는가? 어떤 진술이 이러한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시험되려면, 그 진술은 이미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누군가 그것을 정식화하고 논리적 시험에 회부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는 새로운 생각의 착상 과정과 그것의 논리적 검사 방법 및 결과들을 날카롭게 구별할 것이다. 나의 가정에 따르면, (지식의 심리학과 대조적으로) 지식의 논리학의 임무는 새로운 모든 생각이 진지하게 다루어지기 위해 회부되어야만 하는 체계적인 시험들에서 사용되는 방법들을 탐구하는 데 있다.

어떤 이들은 과학자들의 (어떤 새로운 진리에 대한) 발견 과정에 대한 이른바 ‘합리적 재구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인식론의 과업으로 보는 편이 그 목적에 더욱 부합할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다. 정확히 무엇을 재구성하고자 하는가? 만약 재구성하려는 것이 어떤 영감의 자극과 발산과 관련된 과정들이라면, 나는 그것을 지식의 논리학의 과제로 취급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런 과정들은 경험 심리학의 관심사일 뿐 결코 논리학의 관심사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영감이 [진정한] 발견임이 발견되는, 또는 지식으로 알려지게 되는 이후의 시험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과학자가 자신의 영감을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수정하고, 거부하는 한, 우리는 여기서 수행된 방법론적 분석을 그에 대응되는 사고과정들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 재구성’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구성은 이러한 과정들을 실제로 일어났던 그대로 기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만 시험 과정의 논리적 뼈대만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아마 우리가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을 얘기하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의미하는 바의 전부일 것이다.

... 어쨌든 그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는 새로운 생각을 갖는 논리적 방법이나 이러한 과정의 논리적 재구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견해는 어떤 발견도 ‘비합리적 요소’나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식의 ‘창조적 직관’을 포함한다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아인슈타인은 “그것으로부터의 순수한 연역을 통해 세계의 그림을 얻을 수 있는 ... 그러한 고도로 보편적인 법칙들에 대한 탐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 법칙들에 이르는 논리적 경로는 없다. 그 법칙들에는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지적 사랑(‘Einfühlung’) 같은 것에 기초한 직관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6]

이론들의 연역적 시험

여기서 전개될 견해에 따르면,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시험하고 시험 결과에 따라 그것들을 선택하는 방법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잠정적으로 제시되었을 뿐 아직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되지 않은 어떤 새로운 생각 — 예견, 가설, 이론 체계, 또는 어떻게 불러도 좋은데 — 으로부터 논리적 연역의 방법을 통해 결론들이 도출된다. 그 다음 이 결론들은 상호간에 또는 관련된 다른 진술들과 비교됨으로써, 그들 사이에 어떤 논리적 관계들(동치, 도출가능성, 양립가능성, 또는 양립불가능성 등)이 존재하는지 밝히게 된다.

원한다면 우리는 이론에 대한 시험이 수행되는 네 가지 방식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결론들 사이의 논리적 비교로, 이를 통해 그 체계의 내적 일관성이 시험된다. 둘째는 이론의 논리적 형식에 대한 조사로, 이를 통해서는 주어진 이론이 경험적 또는 과학적 이론의 성격을 갖는지 아니면 (예컨대) 동어반복적인지 판정할 수 있다. 셋째는 다른 이론들과의 비교로, 그 주된 목적은 주어진 이론이 (다양한 시험을 통과할 경우) 과학적 진보를 이룰 수 있을지를 판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들의 경험적 적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론의 시험이다.

이 마지막 유형의 시험의 목적은 그 이론의 새로운 귀결들이 — 그것이 어떠한 새로운 주장을 하든 — 실천상의 요구들을 (그것이 순수하게 과학적 실험들에서 제기되든, 실제 기술적 응용에 의해 제기되든) 얼마만큼 감당해 내는지 알아보려는 데 있다. 여기에서도 시험 과정은 역시 연역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과거에 수용된 다른 진술들의 도움을 받아 — ‘예측’이라 부를 만한 — 특정한 단칭 진술들이 이론으로부터 연역된다. 시험이나 응용이 수월한 예측들일수록 특히 좋다. 이러한 진술들 중에서, 현행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것, 그리고 특히 현행 이론과 모순되는 것들이 선택된다. 다음에는 실제적 응용과 실험 결과들과 비교함으로써 이 (그리고 다른) 도출된 진술들에 관한 판정을 모색한다. 만약 이 판정이 긍정적이라면, 즉 만약 단칭적 귀결들이 수용될 만한 것으로 또는 검증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이론은 당분간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판정이 부정적이면, 달리 말해서 만약 그 결론들이 반증되었으면, 그 반증은 그 결론들을 논리적으로 연역해 낸 이론까지 반증한다.

한 차례의 긍정적 판정은 다만 일시적으로 그 이론을 지지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뒤이어 내려진 부정적인 판정들이 언제든지 그것을 뒤집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 상세하고도 가혹한 시험들을 견뎌 내고 과학적 진보의 과정에서 다른 이론에 의해 대치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기개를 증명했다” 또는 그것이 “승인되었다(corroborated)”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약술된 과정에는 귀납 논리와 유사한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단 한번도 단칭 진술들의 참으로부터 이론들의 참을 논증할 수 있다고 가정한 적이 없다. 나는 결단코 ‘검증된’ 결론들에 의해 이론들이 ‘참’인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거나, 심지어 ‘개연적’인 것으로도 확립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 않았다. ...

  1. H. Reichenbach, Erkenntnis 1, 1930, p. 186(p. 64부터 이어지는 한 두 페이지도 참조할 것).
  2. Reichenbach, ibid., p. 67.
  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의들과 비교할 것. J. M. Keynes, A Treatise on Probability (1921); O. Külpe, Vorlesungen über Logic (ed. by Selz, 1923); Reichenbach(‘확률 함축(probability implication)’이란 용어를 사용했음), Axiomatik der Wahrscheinlichkeitechnung, Mathem. Zeitschr. 34 (1932); 등등.
  4. Reichenbach, Erkenntnis 1, 1930, p. 186.
  5. 리비히(Liebig, Induktion und Deduktion, 1865)는 아마도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귀납적 방법을 물리친 최초의 예일 것이다); 그는 베이컨을 향해 공격하고 있다. 뒤엠(Duhem, La théorie physique, son objet et sa structure, 1906; trans. by P. P. Wiener, 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Princeton, 1954)은 연역적 견해를 주장했다. (그러나 뒤엠의 저서에서는 귀납적 견해들도 발견된다. 예컨대 제1부 제3장에서는 오직 실험, 귀납, 일반화가 데카르트의 굴절 법칙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영역본, p. 34) 또한 다음도 참고할 것. V. Kraft, Die Grundformen der Wissenschaftlichen Methoden, 1925; Carnap, Erkenntnis 2, 1932, p. 440.
  6. 막스 플랑크 회갑 기념 연설. 인용된 구절은 “물리학자의 지상 과제는 고도로 보편적인 법칙들의 탐색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A. Einstein, Mein Weltbild, 1934, p. 168; trans by A. Harris, The World as I see It, 1935, p. 125에서 인용). 비슷한 생각들은 리비히(Liebig)의 앞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다음의 글들도 참고할 것. Mach, Principien der Wärmelehre (1896), p. 443ff. 독일어 ‘Einfühlung’는 번역하기가 어렵다. 해리스(Harris)는 이를 ‘경험에 대한 공감 어린 이해’라고 번역한다.

옮긴이 주

  • 귀납 원리 : 이 글에서 ‘귀납 원리’란 귀납적 추론이 정당화되는 조건을 정식화한 진술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00개 이상의 관찰 사례가 있다면 그 관찰 진술들의 귀납적 일반화는 참이 된다”와 같은 원리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 귀납 원리는 잘못된 원리이긴 하지만, 귀납 원리가 어떤 형태의 진술인지를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 토톨로지(tautology) : 동어반복적 진술로, 예를 들어, “p 또는 p가 아니다([math]p \lor \neg p[/math])” 또는 “p이면 p이다([math]p \supset p[/math])”와 같은 진술이 이에 해당한다.
  • 분석적 진술 : 진술 속에 포함된 용어의 의미만 분석하면 진술의 참이 밝혀지는 진술을 말한다. 예를 들어,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와 같은 진술은 “총각”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 분석됨에 따라 토톨로지로 변환되기 때문에, 경험적 조사를 하지 않고도 그 진술의 참이 밝혀진다.
  • Corroboration : 원래의 의미는 ‘입증’이나 ‘뒷받침’과 같은 귀납주의적 용어와 구분되지 않는 용어였으나, 포퍼는 이를 '경험적 시험의 통과를 통해 이론이 (참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폐기되지 않고 버텨낸 일'을 의미하는 말로 새롭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원래는 귀납주의적 뒷받침의 뉘앙스를 가지면서도 그렇지 않은 뉘앙스도 가질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거나 고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위키노트에서는 포퍼식 ‘corroboration’을 ‘승인’ 또는 ‘버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용인'이라는 번역어도 사용되고 있으나 '용인'은 포퍼가 의도한 의미보다는 너무 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개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힐러리 퍼트넘의 이론의 '승인'을 참고할 것.

관련 항목

blog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