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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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불가능성 개념

공약불가능성이란 말은 원래는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과 다른 변을 정수배로 나타낼 수 있는 단위 길이, 즉 공통된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이를 상이한 이론 또는 패러다임을 한 데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공통된 잣대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모두 과학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부딪혔던 문제를 통해서 이 개념에 이르렀다. 쿤은 이 용어를 문제 영역, 해법의 표준 등을 포함해 폭넓게 사용하면서도 그 공약불가능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온건한 입장을 취한 반면, 파이어아벤트는 이 용어를 ‘의미의 변화’에만 좁게 사용하였지만, 그 강도는 쿤보다 훨씬 전면적인 입장을 취했다.

쿤은 패러다임이 변할 때 방법, 중요한 사실, 풀어야 할 문제의 목록, 만족스러운 해법의 표준, 용어의 의미, 세계가 함께 변한다고 주장했다. 상술하자면, 첫째,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는 풀어야 할 중요한 사실, 문제의 목록과 그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법의 표준이 달라진다. 예컨대 데카르트주의자에게 ‘중력’이란 설명되어야 할 현상이면서, 궁극적으로 불활성 입자들 사이의 충돌로 설명되어야 만족스러운 답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반면, 뉴턴주의자들에게 ‘중력’은 설명의 대상이 아닌, 단지 기본적 원리 또는 사실로 간주되었다. 또 고대의 철학자들에게 천체의 원운동은 거의 기본 원리에 가까웠지만, 직선 관성을 원리로 채택한 데카르트 이후의 자연철학자에게 천체의 원운동은 설명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둘째,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서는 같은 용어조차도 그 의미(외연과 내포)는 다를 수 있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행성은 태양을 포함하고 지구는 포함하지 않는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행성은 태양을 제외하고 지구는 포함시킨다. 또 다른 예로 고전 역학 체계에서 질량은 대상 자체의 내재적 성질인 반면, 상대론적 역학 체계에서 질량은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관계적 성질이다. 셋째, 상이한 패러다임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여 봄으로써, 같은 대상을 바라볼 때에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단지 별들로만 보였던 것들 중 일부가 코페르니쿠스 이후에는 하늘을 휘젓고 다니는 혜성으로 둔갑하게 되었고,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를 보았던 곳에서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보았다. 결국 “세계가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서 변화하지는 않지만, 그 이후의 과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현상] 세계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파이어아벤트는 쿤이 제시한 세 종류의 공약불가능성 중 두 번째, 즉 의미 변화의 문제에 특히 주목했으며, 공약불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이 두 번째에 한정되었다.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모두 과학적 용어의 의미가 그 용어들이 속한 이론과 함께 변화한다는 점을 보이려고 했으며, 일단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면 한 이론의 모든 용어들을 다른 이론의 어휘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공약불가능성 개념에 대한 비판들

공약불가능성 개념에 대한 비판은 크게 비교가능성에 대한 비판과 의사소통 가능성에 대한 비판으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쿤이나 파이어아벤트는 상이한 패러다임이나 이론이 공약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둘 사이의 비교나 경쟁을 말한다. 파이어아벤트도 공약불가능하지만 경쟁하는 두 이론에 대해 자주 언급한 바 있으며, 쿤도 패러다임 사이에는 일정정도 비교 평가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공약불가능한 두 이론을 어떻게 비교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둘째,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옛 이론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도, 역사가들은 이미 그런 활동을 지금까지 해왔으며, 공약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그들조차도 옛 이론을 현대어로 기술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역시 모순이 아닌가?

비판에 대한 대응

국소적 미결정성과 비교가능성

첫 번째 비판에 대해, 쿤은 자신의 공약불가능성이 국소적이라고 대응한다. 즉 두 이론의 공통된 용어들 중 대부분은 두 이론 내에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미는 보존된다. 오직 일부의 용어들과 문장들만이 번역에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이론 변화 과정에서 의미를 유지하는 용어들은 이론 선택과 관련된 논의나 이론 사이의 비교를 위한 토대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케플러의 이론은 여러 면에서 다른 이론들과 공약불가능했지만, 화성 관측 자료에 비추어 여타의 이론에 비해 월등히 좋은 이론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쿤이나 파이어아벤트가 원래 공약불가능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 가장 큰 근거는 이론 내 용어들은 서로 그물을 이루며, 따라서 용어의 의미는 이론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약 이론의 어떤 부분에 변화가 생긴다면, 특히 근본 원리 상에서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 이론 내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약불가능성이 초래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끌고 간 파이어아벤트의 경우엔 “뉴턴 역학과 상대론적 역학은 단 하나의 관찰 언명도 공유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했었다.

쿤은 공약불가능성의 국소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 어디까지 국한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18세기 화학 교본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원소”, “원리”, “플로지스톤”이라는 용어만 제외하면 그 발췌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는 점만 보여준다. 그리고 발췌문의 “원소”는 오늘날의 “원소”와 상당 부분 다르지만, 그 용어가 당시 가졌던 기능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원리”와 “플로지스톤”은 오늘날 번역할 용어가 아예 없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쿤의 국소적 공약불가능성은 두 가지 의미로 분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쿤이 원래 얘기했던 것으로, 두 이론의 공통된 용어들 중 대부분은 두 이론 내에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쿤이 암묵적으로 얘기했던 것으로, 용어가 가진 기능 모두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보존되고 일부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18세기 화학 교본 발췌문에 등장한 “원소”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할 때 쿤 본인이 암암리에 가진 생각이다. 용어가 가진 의미의 일부는 보존되고 일부는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섭할 수 있는 의미 이론은 아직 없지만, 쿤이 자신의 논의를 전개할 때 용어의 “의미”를 얘기하기보다 용어가 가진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모종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듯하다.

나는 너세시안 등의 개념 변화 연구가 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예컨대, 근대 역학 혁명에서 벌어지는 개념상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임페투스 이론, 갈릴레오 이론, 뉴턴 이론 내에 등장하는 개념(용어)들의 그물망을 다이어그램으로 보여준다. 세 개의 다이어그램을 비교해봄으로써, 우리는 여러 용어들 중에서 연결 관계에 많은 변화가 생긴 용어와 그렇지 않은 용어를 구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용어가 다른 용어들과 맺고 있는 연결 관계 중에서 사라지거나 새로 생긴 연결 관계와 지속되고 있는 연결 관계를 구분할 수 있다. 즉 의미 변화가 많이 일어난 용어와 별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용어가 구분되고, 한 용어의 의미 중 변화한 부분과 변화하지 않은 부분이 구분된다. 위에서 말한 두 종류의 국소적 의미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동일하게 뉴턴 역학과 상대론적 역학에서 등장하는 질량의 의미가 결코 같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그렇다고 측정 상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뉴턴의 질량과 아인슈타인의 질량이 이름도 같고 (상대속도가 느린 경우에) 동일한 값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다르다고 강조했었다. 파이어아벤트는 환원을 반대하는 많은 구절에서, “수치상으로는 유사하지만 개념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라는 주장을 무수히 반복했었다. 이 말은 비교가능성에서 의미심장한 귀결을 가진다. 즉 측정을 통해 두 이론이 비교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교가 가능한 이유는 두 이론에서 “질량”이라는 용어가 가진 기능 중 일부, 즉 측정기기와의 관계가 보존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을 이용해서도 뉴턴 역학과 상대론적 역학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두 이론에서의 질량은 의미도 다르고 측정 절차에서도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질량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정지상태에 있는 어떤 물체의 질량을 측정하여 m0를 얻을 수 있고, 그 물체가 특정한 속도로 움직일 때 가지게 되는 질량을 예측할 수 있다. 뉴턴 역학은 m0±α로 예측할 것이고, 상대론적 역학은 m±α로 예측할 것이다. 우리는 그 움직이는 물체의 질량을 각자의 이론과 측정 방식에 따라 측정하는 실험을 고안할 수 있다. 그렇게 뉴턴적으로 측정된 질량을 m1, 상대론적으로 측정된 질량을 m2라고 해보자. m1과 m2를 직접 비교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m1이 m0±α에 속하는지, m2가 m±α에 속하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만약 전자는 성립하고 후자는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 결과는 뉴턴 역학에 유리한 것이고, 전자는 성립하지 않고 후자만 성립한다면 그 결과는 상대론적 역학에 유리한 것이 된다. 둘 다 아니라면 무승부일 것이다.

번역과 해석의 구분과 의사소통가능성

쿤은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해석은 가능하기 때문에, 해석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번역이란 두 언어를 전제로 하고 한 언어의 낱말을 다른 언어의 낱말로 대치하는 작업을 말한다. 번역에 성공한다는 것은 번역 대상이 되는 텍스트와 번역된 텍스트 사이에는 의미상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상이한 언어 사이에서 이러한 번역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상이한 언어는 서로 다른 분류체계와 세계에 대한 (유사/비유사 관계) 주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해석이란 하나의 언어만을 전제로,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부호와 소음들로 구성되었던 텍스트를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때 해석자는 모국어를 배우는 아이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해석자는 언어를 배움과 동시에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세계를 구조화하는 방법을 함께 배우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예컨대 원주민의 ‘가바가이’를 이해하고 원주민처럼 그 말을 사용할 수 있지만, 영어나 한국어에 ‘가바가이’에 해당하는 말이 꼭 존재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가바가이’를 번역하지 않은 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때 우리는 원주민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쿤이 ‘공약불가능성’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상황이다.

키처는 ‘문맥언어적 번역’을 통해, 옛 이론의 용어와 표현들이 실재하는 것을 지시할 때에 한해서는 그것들이 지시하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 오늘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쿤의 공약불가능성, 즉 번역불가능성 주장을 비판하고자 했다. 우리는 지시 대상의 결정을 위해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를 문맥에 따라 ‘산소’ 또는 ‘산소가 풍부한 공기’로 번역하거나, ‘플로지스톤’을 문맥에 따라 ‘수소’로 번역할 수 있다. 키처는 이런 식으로 번역이 가능하므로 공약불가능성 문제는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쿤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첫째, ‘플로지스톤’이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문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되묻는다. 공백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면 결국 번역에 실패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원래 ‘플로지스톤’,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라는 용어로 채워져 있던 텍스트를 ‘산소’, ‘산소가 풍부한 공기’, ‘수소’ 등으로 갈기갈기 해체시켜버린다면, 원저자의 정합적인 믿음을 억제하여 원래의 텍스트를 비정합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버린다. 키처 식의 번역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왜 이 용어와 문장들이 단일한 텍스트 내에서 병치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난처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요컨대 18세기 화학 교본에 등장한 ‘플로지스톤’, ‘원리’, ‘원소’와 같은 용어들은, 원래 텍스트에 대한 번역으로 의도된 어떤 텍스트에서도 제거될 수 없다. “최소한 그들은 상호 연관된 용어들의 지시대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인지하는 데 쓰이는 성질들의 집합을 위한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 플로지스톤 이론을 담고 있는 텍스트가 정합적이기 위해서 ‘플로지스톤’은 화학적 원리로서 연소시에 방출되는 그 어떤 것이면서, 공기를 호흡에 부적합하도록 만드는 그리고 적당한 물질로부터 추출되었을 때 산성 잔류물을 남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표상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에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다. 따라서 플로지스톤은 번역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해석만으로도 우리는 각 텍스트에 등장하는 용어와 표현의 지시 대상을 분간해낼 수 있다. 키처가 보여준 ‘문맥언어적 번역’은 바로 우리가 해석을 통해 지시 대상을 확인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뿐이다. 이러한 방법은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주며, 결국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비교를 가능케 해준다.

이러한 해법은 공약불가능성을 사소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공약불가능성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과거의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의사소통은 그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성공하여 2개국어에 능통하게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18세기 말 화학혁명 당시 과학자들은 서로 상당히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상대 패러다임의 텍스트 중 번역 불가능한 몇몇 용어와 표현을 해석해내는 것은 심하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가 18세기 문헌을 볼 때는 그들보다 상당히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2세기에 걸쳐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학자 본인이 아닌 역사가로서의 경험을 한 쿤이나 파이어아벤트가 공약불가능성을 깨달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공약불가능성, 특히 의미상의 번역불가능성에 대한 비판과 대응을 살펴보았다. 요컨대 번역불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 번역불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비교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따라 나오진 않는다. 공약불가능성은 (두 가지 의미에서) 국소적이기 때문에 전체 용어들 중에서 의미가 변하지 않은 용어들과 용어의 의미 중에서 변하지 않은 부분은 두 패러다임의 비교의 토대를 이룰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번역불가능한 일부 용어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그 패러다임을 모국어를 배우듯이 학습함으로써 그 용어들을 번역을 거치지 않고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한다면 번역되지 않는 용어의 지시체를 우리의 용어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렇게 확보된 지시의 연속성은 두 패러다임 사이의 비교를 또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서 승리한 쪽이 모든 면에서 상대 패러다임을 능가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는 방법, 풀어야 할 문제의 목록, 만족스러운 해법, 가치의 가중치까지 변화한다는 의미에서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을 주장했던 쿤에게 이러한 비교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를 모두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 일부 영역에서 정확성을 발휘하는 한 패러다임은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패러다임에 비해 덜 정확할 수 있으며, 다른 문제는 문제 영역에서 제외시켜버리거나, 너무 다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 이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다.

예컨대 케플러의 이론은 화성 관측 자료에 비추어 완전히 성공적이었지만, 설명적 측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다. 또한 라부아지에의 정밀 질량 측정 실험은 정밀성에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압도했지만, 화학에서 질량 측정과 같은 물리학적 방법을 쓴다거나 혹은 아마추어들이 사용할 수 없는 어렵고 비싼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한 반발을 샀다 이 상황에서 라부아지에는 정밀성이 그 자체로 논증(demonstration)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했고, 이러한 설득 작업은 논리와 경험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게다가 두 이론 사이의 경험적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비교는 패러다임이 일단 선택된 이후에나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태양중심설과 지구중심설의 경험적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연주시차 측정이나 푸코의 진자 실험은 태양중심설이 채택되고서도 한참 뒤에나 수행된 일이었다.

결국 상이한 이론 또는 패러다임 사이의 비교는 가능하지만, 그 비교 또한 국소적이다. 비교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패러다임 A가 우세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패러다임 B가 우세하다는 것뿐이다. 또 경험적 비교가 가능하다고 해서 패러다임 선택의 시점에서 그 비교가 당장 가능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 시기에는 일정한 몇몇 비교가 이루어지며, 그러한 비교는 패러다임 선택을 위한 (당장은) 불충분하지만 좋은 근거들을 제공한다. 그 근거들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패러다임 선택이 일의적으로 결정되진 않더라도, 그러한 종류의 패러다임 선택은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