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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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erick Suppe, “HANSON”, i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Theories, 2nd edi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77), pp. 151-166.

프레데릭 수피(Frederick Suppe)의 이 글은 『과학적 발견의 패턴』에서 제시된 핸슨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는데, 수피는 핸슨의 “관찰의 이론 적재성 논제는 중립적인 관찰 언어를 거부하는 쿤의 입장을 보강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귀추적 추론에 대한 그의 분석은 비통상적 과학 연구의 논리를 더 심도 깊게 분석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위키노트에 수록된 아래의 번역은 2007년 8월 김한나가 번역한 후 정동욱이 교정을 보았다.

본문

핸슨


프레데릭 수피

김한나 옮김



노우드 러셀 핸슨(영어: Norwood Russell Hanson)에 따르면, 이론에 대한 수용된 견해의 주된 결함은 관심을 과학이론화의 결과물에만 가둔 채 법칙, 가설, 이론이 시범적인 첫 제안을 받아들이는 추론 과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서 한 과학자가 어떻게 이러한 법칙, 이론, 가설을 제안하거나 발견하는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가 수용된 견해에서 말하는, 그의 자료를 도출가능한 귀결로 산출하는 물리적으로 해석된 연역 체계와 같은 어떤 것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그의 첫 탐색은 자료에 대한 설명―“그의 자료가 더 잘 알려진 자료와 이해할 수 있게(intelligibly) 들어맞도록 하는 개념적 패턴”―을 찾는 데에서 시작한다. 『과학적 발견의 패턴』(Patterns of Discovery; #Hanson 1958a)에서 핸슨은 이러한 발견의 절차를 탐구한다. 동시에 그는 이론에 대한 정식화된 분석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물리학의 이론들은 자료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해주는 패턴들을 제공”함으로써 그 패턴에 맞아떨어지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이론은 자료로부터 귀납적인 일반화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적으로 조직된 자료로부터 개연적인 가설로의 귀추적 추론에 의해 발견된다. 이러한 분석을 전개하면서 핸슨은 우선 관찰과 사실에 개념적 조직화가 상당히 주입되어 있다는 점―“이론 적재성”―과 인과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특정한 형태의 개념적 조직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다음으로 그는 이러한 결론에 기대어 발견의 논리를 일정 정도 발전시켜 법칙이 제안되는 과정의 “참된 논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이론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고 과학 이론화에 대해 보다 개별적인 관찰을 수행한다. 어떤 면에서 핸슨의 분석은 과학 이론화에 대한 쿤의 분석을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관찰의 이론 적재성 논제는 중립적인 관찰 언어를 거부하는 쿤의 입장을 보강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귀추적 추론에 대한 그의 분석은 비통상적 과학 연구의 논리를 더 심도 깊게 분석한 것으로 말이다.

핸슨은 수용된 견해의 중립적 관찰 언어 논제를 깎아내리고 관찰이 “이론적재적”이라는 점을 정립시키겠다는, 한 쌍의 목표를 가지고 관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수용된 견해는 관찰 언어가 사용된 이론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직접 의미론적인 해석이 주어질 수 있는 상호주관적인 관찰 언어의 존재를 가정하다. 그러한 관찰 언어는 이론 중립적이다. 관찰 언어란 그것에 의해 쓰여진 주장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그런 언어이기 때문에, 그것의 상호주관적인 본성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동일한 대상을 바라볼 때 동일한 것을 볼 것을 요청한다. 핸슨의 첫 질문은 동일한 대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론을 고수하는 두 사람이 정말로 동일한 것을 본다는 게 실제로 참인지의 여부이다. 그는 우리에게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와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동틀 녘을 보는 것을 생각하도록 주문한다. 케플러는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움직이고 있다고 여긴 반면, 티코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고 봤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핸슨은 케플러와 티코가 새벽에 동쪽에서 정말로 동일한 것을 보았는지 묻는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공통의 시각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동일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둘 다 시각적으로 해를 인지하였다. 만일 이를 통해 그들의 눈이 비슷한 자극 혹은 망막의 인상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이 동일한 것을 본다는 것을 따라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망막의 인상을 받는 것은 물리적 상태에 있는 것인 반면에, 보는 것은 시각적 경험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흔한 답변은, 그들이 정말로 공통의 시각적 경험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면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같은 것을 본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둘 다 녹색과 푸른색의 얼룩 가운데에서 환하게 빛나는 황백색 원반을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일한 감각 자료를 본다. 티코는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케플러는 해가 시야에 들어오도록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이에 어떤 불일치가 생기든 그 불일치는 동일한 감각 자료에 대한 서로 다른 사후적 해석에 기인한 것이 된다.

핸슨이 물리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나는 이를 감각 중심 이론이라 부른다)과 그것의 귀결인 중립적인 관찰 언어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이 관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고찰에서 시작하는데, 오리 토끼, 투명 입방체 등등과 같이 동일한 관찰자에게 때로는 이렇게 보였다가 때로는 저렇게 보이는 다양한 그림들을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다음의 그림은 때로는 영양으로, 때로는 펠리컨으로 보일 수 있다. 감각 중심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은 동일한 감각 자료(위의 그림에 대한 그 형태 등의 갖는 시각적 상)를 보고, 그것을 영양 혹은 펠리컨으로 해석한다. 만일 그것을 보는 동안 내가 보는 것이 영양에서 펠리컨으로 변한다면, 그것에 대한 나의 해석은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동일한 것을 보고 있다. 핸슨은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으로 몇 가지 논변을 제시한다. (1) 그 그림을 처음에는 영양으로 보고 다음에는 펠리컨으로 보는 것이 “각 경우마다 선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 그림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갖는 것은 단지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한 것을 보고 다음에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핸슨이 여기서 수립하려고 하는 요점은, 해석이 우리가 보는 것에 정말로 영향을 끼친다고 인정한다면 펠리컨 해석 하에서 그 그림을 보는 것과 영양 해석 하에서 그 그림을 보는 것이 결국 두 개의 다른 것을 보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점을 시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감각 자료의 입장에서도 그 그림을 보는 동안 두 개의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우리가 보는 공통의 어떤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다. (2) 그 그림을 영양과 펠리컨으로 볼 때 우리가 정말로 서로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을 확립한 후, 그는 해석은 일종의 생각, 즉 행위인 데 반해 봄은 경험적인 상태라며, 보이는 것의 차이가 해석의 문제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영양이 펠리컨으로 바뀔 때,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일어날 변화에 대해 특별한 무언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영양을 보고, 또 이제 펠리컨을 볼 뿐이다. 그리고 가끔 우리는 한 그림이 어떤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들었을 때,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관없이 그것을 그러한 종류의 것으로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즉 위의 그림을 볼 때 아무런 생각도 펠리컨이나 영양을 보는 것에 수반되지 않는다. [또한] 해석은 일종의 생각이므로 아무런 해석도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영양-펠리컨과 같이 반전 그림들(reversible perspective figures)은 동일한 형상에서 서로 다른 대상들이 보이는 예시이므로, 그리고 아무런 해석도 우리가 보는 것에 수반되지 않으므로, 핸슨은 보이는 것에서의 차이가 다른 시각 이미지나 그 감각 위에 얹혀진 어떤 해석 때문일 수도 없다고 결론 내린다. (3) 그리고나서 핸슨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보이는 것에서의 차이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의 답은 반전 그림의 관점이 변할 때 시각적이거나 감각적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으므로, 오직 가능한 변화는 보는 것의 조직화에 있다는 것인데, 단 그 조직화는 보이는 그림 속의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따라서 그 조직화는 시각 영역의 요소도 아니고, 망막에 기록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각 영역의 요소가 식별되는 방식이다. (4) 다음으로 그는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는 지가 맥락과 지각자의 지식, 경험, 이론에 의존하는 수많은 예시들을 고찰하고, 우리가 x를 볼 때 x를 다른 것으로 봄은 x에 대한 다른 지식과 이론을 갖고 있음을 수반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므로 티코와 케플러가 해를 보았을 때, 그들은 시각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지각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을 보지만, 그들은 그들의 경험에 대한 개념적 조직화가 크게 달랐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이렇게 “봄은 ‘이론적재적’ 작업이다. x의 관찰은 x에 대한 사전 지식에 의해 형성된다.”라고 하는 것은 일리 있다. (5) 봄는 지식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것은 인식적인 성취이다. 그러나 인식적 성취의 본성은 무엇인가? 핸슨이 답하길, 그것은 무엇을 봄(seeing that)에 있다. 다른 어떤 것이 포함되든 탁자, 의자, 오실로스코프(역전류 검출관), 왈라비, 전화 등등을 보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눈앞의 대상에 특정한 일이 수행되면 그 결과로 다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무엇을 봄이 봄의 심리학적 구성요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봄의 개념 내에서, 봄-말하기(seeing-talk)의 논리적으로 구별 가능한 요소이다: 우리가 대상 x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x의 행동에 대해 알고 있는 방식대로 행동한다고 보고, 만일 그것이 우리가 x에 대해 기대한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간단히 x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핸슨은 무엇을 봄, 즉 대상의 행동에 대한 지식이 봄에 수반되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지금까지, 핸슨은 감각 중심 이론은 틀렸으며, 봄은 흔히 무엇을 보기 위해 필요한 지식에 의해 제공되는 개념적 조직화를 수반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논증을 제시했다. 그는 더 강한 무언가, 즉 이러한 개념적 조직화가 “봄 개념의 논리적 특징으로, 물리학 연구의 관찰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inextricable) 필수 불가결한(indispensable) 것”임을 확립시키고 싶어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마지막 논변을 제시한다. (6) 무언가를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어떤 종류의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유리 플라스크를 보는 경우이면 x가 떨어진다면 깨진다거나 속이 비어 있다는 등등의 정보를 말이다. 즉 플라스크를 보는 것은 특정한 사물이 그런 경우라고 보는 것이다. 어그러나 ‘무엇을 봄’에는 언제나 문장 형태의 구절이 뒤따르고, 그래서 보는 것에는 언어적이거나 명제적인 구성 요소가 있다. 즉 “비록 눈이나 마음의 눈에 형성되는 것에는 언어적인 어떤 것도 없지만, 봄에는 ‘언어적인’ 요소가 있다.” 이러한 언어적인 요소 없이 우리가 관찰했던 어떤 것도 우리의 지식과 관련이 있었을 리 없다. 핸슨은 그 다음으로 그리기와 언어적 표현(assertion)을 대조하면서, 그림은 원대상의 일정한 특징을 공유함으로써 대상을 대표하는 반면에 문장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장은 어떤 것도 전혀 대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이 그런 경우인지 또는 그러한 경우일 수 있는지 진술하고, 무언가를 주장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등등을 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러한 용례 중 어떤 것도 기술되고, 진술되고, 주장된 것과 동일한 속성을 갖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즉 “표상과 지시 사이의 차이, 배열하기와 특성화하기 사이의 차이, 이러한 차이들이 그리기와 언어 사용 사이의 차이이다.” 이는 감각 자료 입장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감각 자료주의자들에 따르면 티코와 케플러는 동일한 것, 즉 동일한 감각 자료를 본다. 그러나 감각 자료는 일종의 그림이고, 그래서 지시하기보다 표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언어적이다. 그런데 봄은 필수적으로 언어적 구성 요소를 가진다고 보였으므로, 그 감각 자료의 견해는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결국 봄은 언어적 구성 요소를 가지므로, 만일 두 사람이 ‘내가 x를 본다’라고 진실로 주장하는데 ‘x’의 의미가 [둘에게] 서로 다르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봄과 관찰이 이론적재적이라는 논제가 핸슨의 이후 논의 전개에 핵심적이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에 대해 약간의 평가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위의 요약으로부터 핸슨의 논변들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하겠다. 사실 나는 그 논변들이 그렇게 의도된 것이란 점을 의심한다. 오히려 그것들은 감각 중심설의 감각 자료 견해가 틀렸으며 관찰은 이론적재적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계획된 일련의 설득력있는 고찰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의 논의가 아무리 설득력있다 하더라도, 그의 결론의 타당성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상당히 많다. 예컨대 과학적 관찰에 상응하는 종류의 봄이 무엇을 봄이라는 그의 수장을 수용하고, 감각 자료 견해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그와 정합적으로 다음을 주장할 수 있다. 케플러와 티코가 무언가를 서로 다른 것으로서 보았더라도 그들이 정말 동일한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봄이 있다고 말이다. 최근 드레스케(#Dretske 1969)는 이러한 노선의 분석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드레스케의 분석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의 분석은 주어진 감각이 있다는 논제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논제에 대해 셀라스(#Sellars 1956)와 윌(#Will1973)은 일부 매우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그래서 드레스케가 제기하는 종류의 고찰이 정말 핸슨의 결론이 틀렸다고 보여주는 데 성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드레스케가 모든 봄이 무엇을 봄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는 데에 정말 성공한다 할지라도, 모든 관찰이 무엇을 봄이라는 핸슨의 진짜 요점은 나에게 건전해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즉 나는 핸슨이 모든 관찰이 봄을 수반한다는 주장에 대해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아래의 V-B-2-a에서 제기한 고찰은 그 주장에 꽤 결정적인 사례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봄(혹은 관찰)이 봄을 수반한다는 기본적인 결론을 논증한 다음, 핸슨은 사실과 인과에 대해 유사한 결론을 얻고자 시도한다. 사실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면서 그는 먼저 사실들이 그려질 수 있거나 관찰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로 진술된다는 것을 확립시킨다. 그의 논변은 스트로슨(#Strawson 1950)의 잘 알려진 논변과 같은 선상에 있다. 사실들이 진술될 수 있다고 논증한 후, 그는 사실이 언어-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는 어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다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이 있는지 질문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우리에게 색 용어가 동사로 되어있는 언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고 한 다음, 그러한 언어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색을 활동으로 생각하고 사물을 색칠하는 행위자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는 적어도 그러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과 영어로 말하는 사람이 동일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유사하게 봄은 언어적이기 때문에, 두 명의 화자는 동일한 것을 관찰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이제 이는 동일한 세계가 주어진 두 명의 화자는 세계를 다르게 파악하고, 다르게 말하고 생각하며, 다르게 지각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언어의 논리적 형식이 사실을 형성한다는 제안으로 이어진다. 핸슨은 이를 적어도 “x를 표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풍부하지 않은 언어에서는 (혹은 x에 대한 표현을 명백히 배제하는 언어에서) 개념 x의 형성이 언제나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코이레(#Koyré 1939)로부터 기인한 논변 도움을 받아, 핸슨은 베에크만과 데카르트가 물체의 낙하 거리를 시간의 함수로 결정하는 문제의 해답을 보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고찰한다. 이로부터 그는 적어도 이 경우에, 그 둘이 주요 용어들을 놓고 서로 다른 개념을 떠올렸으며, 베에크만이 데카르트와 다른 그의 언어를 가졌기에 데카르트로부터 벗어나는 특정한 사실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확립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언어 간의 차이는 주요 용어와 결부된 개념 간의 차이가 된다. 이로부터 핸슨은 사실이란 언어로 진술되며 따라서 언어에 묶여 있는 것으로, 적어도 물리학에서 그 언어에 사용되는 용어의 개념적 차이 또는 의미 차이가 특정한 사실들을 결정하거나 파악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방해한다고 결론 내린다. 특히 물리학에서 사실들을 보는 능력은 한 사람의 언어로 구체화된 개념에 흔히 좌우된다. “개념과 언어의 이러한 ‘맞물림(locking)’은 모든 물리학에서 근본적이다.” 그리하여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티코와 케플러가 동틀 녘에 서로 다른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종류”로, 이는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언어의 사용이 서로 다른 것을 보도록 만들고, 또한 어떤 사실들이 쉽게 파악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준다는 것이다.

이제 인과로 넘어가서, 핸슨은 만일 누군가 임의의 한 시점의 우주의 상태를 알고 모든 인과 법칙의 목록을 가진다면, 세계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예측하고 귀추할 수 있을 거라는 라플라스식 관점을 격하시키고자 노력한다. 이 관점은 원인-결과를 계통수나 연쇄사슬과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을 함축적으로 포함한다. 핸슨은 그러한 “인과 연쇄” 관점의 타당성이 우연한 일이나 극적인 사고에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경우에는 조금 다른 관점이 요구된다. 인과 연쇄 분석이 일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는 인과 연쇄 관점에 가정과 이론적 전제가 적재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가정과 전제 없이 추려진 원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과 연쇄 관점은 인과 개념을 왜곡한다. 오히려 인과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다음과 같다. “x의 원인을 지적하려는 일차적인 이유는 x를 설명하는 데” 있고, 우리는 x가 “다른 y와 z에 대한 개념들이 얽혀있는 패턴 속에” 자리 잡을 때에만 x의 설명을 얻는다. 즉 다양한 가정과 이론적 전제들의 맥락에서 무언가를 결과 y에 대한 원인 x로 분리해내면서, 우리는 x와 y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x에서 y로의 추론으로 보증해주는 이론의 개념적 패턴 속에 x와 y를 짜 넣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확실히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이론이 그것들을 연결시키기 때문이지, 세계가 우주적 접착제로 함께 붙여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과적 설명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가정과 이론적 전제들은 우리가 원인과 결과를 명기하는 데에 사용한 용어들을 구성하거나 그 의미의 일부이다. 진단, 분석, 예측은 그 [원인과 결과에 해당하는] 용어들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달에 분화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기원에 관한 무언가, 즉 빠르고, 격렬하고, 폭발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세히 말해, 원인 용어는 개념적 패턴을 지니고 다니며, 결과 용어는 말하자면 그 패턴의 일부이다. 사실 ‘압력’, ‘온도’, ‘부피’, ‘도체’와 같은 설명적 용어들은 “이들 개념 중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 등장하는 분야의 개념적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되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은어-놀이와 같은 것으로 “그 놀이의 전체적인 개념적 패턴은 각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개념들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그 개념들 중 하나만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맥락에서, ‘원인’ 용어는 서로 다른 개념적 패턴에 편입되고, “그 용어는 자신이 사용되는 상황에 깔려있는 개념적 패턴으로부터 설명적 힘을 끌어낸다.”

이로부터 핸슨은 용어의 의미가 그 용어가 편입되는 개념적 패턴의 작용이라고 하는 의미 의존성 논제를 주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그가 분명 우리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이 의미 의존성 논제가 정말 무엇인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우선 핸슨은 의미 의존성 논제가 인과적 설명을 할 때 사용하는 용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핸슨에 따르면 이론의 기능은 자료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해주는 개념적 패턴을 제공함으로써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과적 이론은 그 조직화의 패턴이 인과적 추론을 산출하는 이론으로, 이론의 한 종류일 따름이다. 모든 이론이 인과적 이론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론은 설명을 제공하고, 그래서 개념적 조직화의 패턴을 제공한다. 핸슨은 분명 인과적 이론에서의 의미 의존성 논의를 모든 이론에 대한 원형으로 의도하고 있다. 우리는 핸슨이 고전적이면서 기초적인 입자역학에 대해 말한 다양한 언급들을 통해 그의 의미 의존성 논제에 대해 나름 보다 명확한 관념을 얻을 수 있다. 이론을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자료를 개념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연결된 개념들의 체계를 갖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호연결이 모두 의미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러한 상호연결 관계는 때로 선험적이거나 분석적이지만, 때로 그것들은 경험적인 명제, 규칙, 권고, 규정, 규약이기도 하다. 그것들의 지위나 사용방식이 어떠하든 이론을 공유한다는 것은 이러한 상호연결을 상술한 법칙 문장들의 집합에 합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러한 명제들의 인식적 지위에 합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고전입자역학에서 하나의 과학자 집단은 ‘’이 그 이론의 개념적 패턴의 일부라고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의인지, 한 무리의 자료에 대한 경험적인 요약인지, 추론의 규칙인지, 측정 기법인지, 현상 해석을 위한 규약인지, 또는 거시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을 구별하는 기준인지에 대해서는 불일치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과학자들은 법칙 문장에 서로 다른 지위를 할당할 뿐 아니라, 어떤 과학자라도 그 문장을 다른 맥락에서 다른 지위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일단 한 이론에 장착된 법칙은, 원래는 경험적이었더라도 그와 동일한 법칙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다른 주장들의 집합에 결합하게 된다.” 이 주장이 모든 경험과 대면하여 지속될 수 있는 명제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될 때, 그것은 선험적인 명제를 표현한다. 그러한 주장들은 의미 관계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상황은 이러하다. 법칙 문장들의 집합에 합의한 두 사람은 비록 그 문장들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적 지위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같은 이론을 공유하고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현상을 개념적으로 조직화한다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인식적 지위를 가짐에 따라, 패턴 내의 연결 관계가 다르게 보인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고 패턴은 다르다. “그 차이는 그 사실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사실들이 어떻게 함께 매달려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비록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해 동일한 해답을 얻는다 하더라도, 개념적 조직화의 차이는 미래의 연구에서 그들이 동일한 문제에 계속 매달리고 있지 않을 것임을 장담해준다.” 지금까지 핸슨은 우리에게 이론의 조직화된 패턴에서의 연결의 일부만이 의미의 연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의미 관계로서의 기준은 그 연결들이 선험적으로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즉 주어진 맥락(그리고 아마도 약간 있거나 혹은 전혀 없는 맥락)에서 그 연결들을 어떤 경험의 결과로서 포기하길 꺼린다면, 그 연결들이 그 맥락에서의 의미 관계이다.

비록 핸슨은 어떤 설명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용어 모두를 이론적재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모든 용어들이 그러하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순수한 감각 자료 언어의 용어와 같은 비이론적재적 명사와 동사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러한 용어들이 이론 안에서 설명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한다. 더 나아가서 용어가 이론적재적인지의 여부는 맥락의 문제이다. 일부 맥락에서 그것은 자료 용어로 기능하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것이 이론 용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

용어의 의미 의존성과 이론 적재성에 대한 핸슨의 논제는 요약될 수 있다. 즉 용어의 의미는 맥락 의존적이다. 한 용어가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설명적 책임을 질 수 있는 한에서, 그 용어는 그 맥락에서 개념적 조직화의 패턴에 들어가야 한다. 일부 다른 맥락에서 그것은 다른 패턴에 들어가거나 혹은 아마도 아예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것들이 경험적 관계, 규정적인(prescriptive) 관계 등등이 되는 반면에, 패턴에서의 상호연결의 일부는 의미의 관계가 될 것이다. 맥락에 적용해서 그 용어를 보는 것은, 비록 관계에 따른 지위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서, 이 모든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결론은 관찰과 사실에 관한 핸슨의 결론에 대하여 우리에게 더 풍부한 구체화를 줄 수 있다. 과학에서의 모든 관찰이 언어에 의해 이론적재적이므로, 주어진 맥락에서 x를 보는 것은 용어 ‘x’가 그 맥락에 들어간 개념적 패턴에 의해 결정된 모든 관계에 들어감으로서 ‘x’의 관계항을 보는 것이다. 이 연결 중 어떤 것은 정의의 문제일 것이고, 다른 것들은 경험적 사실의 문제이며, 여전히 다른 것들은 방법론적 규정이나 규약 등등의 문제 등등이다. 유사하게 관찰에 의해 산출된 x에 대한 사실과 자료도 이러한 연결을 포함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x라는 x의 관계항에 관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x가 개념적 조직화로 들어가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 모든 (참된) 관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설명의 맥락에서 관찰, 사실, 자료는 관찰된 것을 통한 개념적 패턴에 의해 결정된 조직화를 그것들 안에 지닌다. 이 조직화의 어떤 측면들은 정의의 문제일 것이고, 다른 측면들은 경험적인 법칙 같은 상관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맥락의 문제일 수 있다.

비록 물려받은(in their own right) 관심에도 불구하고, 관찰, 사실, 이론, 의미 의존성에 대한 결론을 확립하려는 핸슨의 목적은 그의 핵심 명제에 대한 근본을 세우는 것이다. 실증주의자들과 수용된 견해를 지지하는 다른 이들은 과학철학의 영역이 정당화의 맥락에 한정되어야 하고 발견의 맥락은 심리학과 역사학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더 실증적으로, 핸슨은 관찰, 사실, 이론의 이론적재적 본성에서 발견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특정한 가설이 주어진 맥락에서의 주어진 대상에 관하여 합리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논리가 있으며, 맥락에서 합리적인 것은 자료를 넣는 개념적 패턴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즉, 핸슨은 다음을 확립하기를 원한다.

물리학 이론은 자료가 이해할 수 있도록(intelligible) 나타나도록 패턴을 제공한다. 그것은 ‘개념적 게슈탈트(conceptual Gestalt)’를 구성한다. 이론은 관찰된 현상들로부터 종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상들을 특정한 종류로서, 그리고 다른 현상들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관찰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론은 현상을 체계적으로 한다. 이론은 ‘역으로’―귀추적으로 형성된다. 한 이론은 전제를 찾기 위한 결론들의 집합이다. 현상에 대한 관찰된 속성으로부터 물리학자들은 그 속성이 당연한 결과로 설명되도록 근본적인 관념을 향한 쪽으로 추론한다.

핸슨은 발견의 논리나 귀추적 추론을 다음을 따라 발전시킨다. 퍼스를 따라 그는 (1)로부터 (2)를 구분한다.

  • (1) 가설 H를 수용하는 이유
  • (2) H를 첫째로 제시하는 이유

전자는 H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인 반면에, 후자는 H를 추측의 그럴듯한(plausible) 유형으로 만드는 이유이다. 그 질문을 하는 방식은 두 종류의 이유 간의 차이가 논리적 유형, 정도인지, 심리학인지, 사회학인지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 핸슨은 그것이 논리적 구별이라고 확립하길 원하므로, 그는 (1′)과 (2′) 간의 구별로서 그것을 재공식화한다.

  • (1′) 특정하고 매우 구체화된 가설 H를 수용할 이유
  • (2′) 성공적인 H가 어떤 구체적인 주장을 하게 되든,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한 종류의 가설이라고 제안하는 이유

핸슨은 전자의 부류의 이유로서 기능할 수 없는 후자의 부류의 이유가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두 종류의 이유가 논리적으로 구별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그는 케플러가 목성의 궤도는 원이 아니라고 제안할 이유를 고찰함으로서 그렇게 한다. 『새로운 천문학: 화성의 운동에 대하여(Astronomia Nova: De Motibus Stellae Martis)』에서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타원이고, 타원인 경향이 있고, 태양을 그 초점들 중 하나로 가진다는 것을 확립하였다. 나중에 『우주의 조화(Harmonices Mundi)』에서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용하여 목성과 다른 행성들에 일반화시킨다.

  • H′: 목성의 궤도는 원이 아닌 형태이다.

H′를 공식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화성이 전통적으로 전형적인 행성으로 간주되어왔다는 것이고, 그래서 만일 그것의 궤도가 타원이라면 다른 궤도(예를 들어 목성)의 정확한 형태가 무엇이든지 원이 아닌 형태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이것을 논평하면서 핸슨은 관찰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H′를 확립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H′가 특정한 형태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은 문자와(in charater) 유비적이다.… 논리적으로, H′가 특정한 형태라는 것을 제안하는 케플러의 유비적 이유는 좋은 이유였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그것은 H′를 위한 구체화한 가치의 진리를 주장하기에 좋은 이유는 아니다.” 특정 종류의 가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위한 또 다른 이유는 방정식이나 논의의 집합에서 형식적인 대칭성의 발견이 될 것이다. 주어진 유형 (2′)의 이유에서, 논의의 형태는 A를 B로 보는 관찰부터 “모든 A가 B이다.”라는 제안으로 가는 추론과 다르며, C가 D라는 사실로부터 “A와 B에 연결된 가설이 C와 D에 연결된 것과 같은 유형일 것이다.”라는 제안으로 가는 유비적 추론과도 다르다. 이 추론들이 논리적으로 다른 종류라는 것은 다음의 요소에 의해 나타난다. 첫째, 전자의 추론은 귀납적 추론이므로, 여기에서 “모든 A와 B”에 대한 문제(challenge)은 귀납을 정당화하거나 개별자가 정확히 기술되도록 보여주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그 논의가 형식적 체계에 대한 유비나 인식 위에 있을 때에는 예상되지 않는다. 둘째, 전자의 추론 유형에서 제공되는 그러한 종류의 귀납적 추론은 특정한 H를 확립할 수 있는 반면, 후자의 종류에 대한 유비적 이유는 H가 특정한 유형이 될 것이라는 제안을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는 것뿐이다. (1′)과 (2′)의 이유가 논리적으로 다른 종류라고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주어진 유형 (1′)의 이유에 관련된 추론의 유형은 귀납적 추론인 반면에, 주어진 유형 (2′)의 이유에 관련된 추론의 유형은 귀추적 추론이라면, 귀추적 추론의 본성은 무엇인가? 핸슨은 그것이 다음과 같이 도식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말한다.

  • (1) 어떤 놀라운 현상 P1, P2, P3,…와 마주친다.
  • (2) 그러나 P1, P2, P3,…는 획득된 H의 유형에 대한 가설이 있다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H와 같은 것으로부터 당연한 일로 따라나올 것이고 그것에 의해 설명될 것이다.
  • (3) 따라서 H의 유형에 대한 가설을 발전시킬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그것을 가능한 가설로서 제안함으로써 가정 P1, P2, P3,…가 설명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귀추적 추론을 참으로 전제, 즉 관찰과 사실의 이론적재적 본성에 대한 핸슨의 설명에 연결하는지를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주어진 맥락에서 한 사람은 개념적 패턴 안으로부터 나온 현상의 특정 범위를 보고, 그래서 그것을 특정 방식으로 조직화되도록 본다. 그때에 일부 현상은 그 패턴에 꽤 들어맞지 않게 관찰된다. 한편으로, 현상과 그것의 관찰은 그 개념적 조직화에 의해 만들어진다. 또 다른 한편, 개념적 조직화는 그 현상을 완전히 조직하지 않아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intelligible)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 조직화에 더 완전히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개념적 패턴은 증가되거나 변경되어야 한다. 가능한 대안들 중의 선택은 존재하는 패턴에 의해 한정되는데, 추가물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든지 존재하는 패턴과 경쟁되어야만 한다. 만일 개념적 패턴이 대칭성의 특정 전제 포함한다면, 허락할 수 있는 추가의 범위는 더 제한될 것이다. 추가적인 가설의 가능한 형태는 엄격하게 제한된다.―놀라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이러한 한계에 해당하는(falling within) 가설의 가능한 형태. 대안적으로, 그 현상을 그것을 변경하지 않고 존재하는 패턴에 편입시킬 수 있는 그럴듯한 종류의 가설은 없을 수도 있다. 패턴에서의 어떤 관계가 변경을 위한 후보인지는 그것들의 인식적 지위에 달려있을 것이고, 그래서 추가적인 가설의 그럴듯한 형태는 맥락에서의 특정한 개념적 조직화에 의해 더 강요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핸슨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과학적 관점은 이론적재적이어서, 개념적 패턴을 통해 보이게 한다. 이 관점의 일부는 맥락 안에서 용어들과 결부된 의미의 작용이다. 이 관점의 [또 다른] 일부는 맥락에서 아는(hold) 법칙 같은 일반화, 가설, 방법론적 전제의 작용이다. 이론은 현상을 이해가능하게 함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적 조직화의 패턴이다. 설명되지 않은 현상을 다루도록 발전시킨 이론은 개념적 조직화의 패턴에 의해 한정되고, 이론의 합리적인 확장은 귀추적 추론에 의해 진행된다.

핸슨의 과학 이론화의 분석은 얼마나 충분한가? 첫째, 귀추적 추론에 대한 핸슨의 분석은 이론적재적 관찰의 논제와 의미 의존성에 달려 있는 것이 명백하고, 이 논제보다 더 충분한 것은 없다. 그것이 얼마나 충분한가는 아래의 V-B-2에서 고찰될 것이다. 둘째, 핸슨이 과학 이론화나 관찰의 구체적인 분석 같은 것을 정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한 분석은 우리에게 개념적 조직화의 패턴, 의미의 기준 등등에 대한 더 많은 상을 준다. 그리고 귀추적 추론에 대한 그의 설명은 확실히 “논리”로서의 위치에서 발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핸슨은 과학 이론화의 제안된 분석에 대한 실용적인 개요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장 잘 보인다. 그 프로그램이 만족스러운지 아닌지는 그것의 이후의 발전에 달려있고, [아직은] 그러한 발전이 없어서 접근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이것은 매우 명확하다. 그 계획의 실행가능성은 이론적재적 관찰과 사실의 근본적인 관념에 대한 것에 달려있다. 이에 대한 그의 근본 입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아래의 V-B-2에서 고찰될 것이다.

참고문헌

  • Hanson, N. R. (1958a), Patterns of Discovery: An Inquiry into the Conceptual Foundations of Science. [국역 : 노우드 러셀 핸슨 지음, 송진웅, 조숙경 옮김, 『과학적 발견의 패턴』 (사이언스북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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