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적 민주사회와 타협적 과학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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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철학연구 기말보고서


논증적 민주사회와 타협적 과학자사회

하버마스의 이상사회에 하버마스 이론 적용하기


정동욱 | 제출일 : 2006년 6월 20일


들어가며

하버마스의 민주주의 사회는 논증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 사회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는 본인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 과학자 사회에서의 논증적 의사소통 행위를 확장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버마스 2000, p. 41). 그로부터 확장된 그의 담론이론적 민주주의는 논증을 통해 규범적으로 타당한 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핵심에 놓여있다. 즉, 하버마스는 과학자사회에서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보았다.

그러나, 하버마스와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구성주의로 대표되는 이들은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 이들에 따르면, 과학지식은 합리적 논증이 아닌 정당화되기 어려운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었다. 즉, 이들은 과학자사회에서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의 축소판을 보았다 (홍성욱 1999, p. 73-78).

최근 더욱 흥미로운 일은, 전문가들의 독단적인 과학을 시민참여를 통해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자들은 과학자 사회를 대표적인 비민주 사회로 규정하면서, 시민 참여를 통해 민주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거와 방법으로서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적 기제가 항상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하버마스의 이론에 어떠한 함의를 가질까? 이를 밝히기 위해, 나는 먼저 하버마스의 이론이 과학자 사회로부터 빌려온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이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과학자 사회 신화 깨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 운동가들이 하버마스를 빌려오는 문제의 대부분이 규범의 문제보다 진리의 문제에 상당히 가까이 있는 것들임을 보이면서, 하버마스의 이론이 여전히 규범적 타당성 문제보다는 진리 타당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훨씬 잘 적용됨을 보일 것이다.

과학자 사회의 논증적 의사소통과 그 확장

하버마스는 진리 타당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퍼스(C. S. Pierce, 1839-1914)를 인용한다. 퍼스는 이 문제에 대해 칸트와 헤겔의 정신을 계승했다. 퍼스는 "칸트가 진리는 외적 실재와의 어떤 대응에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줬던 점"과 "진보가 인간 지식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생각한 헤겔을 받아들였다 (해킹 2005, p. 126).

형식적 의미론자들은 진리 타당성을 다루기 위해, 언어와 세계, 문장과 실태 사이의 존재론적 2자 관계에 호소한 반면, 퍼스는 2자 관계에 해석자 공동체를 추가하여 3자관계를 제시한다. 즉, 가능한 실태로서의 세계는 하나의 해석자 공동체에 대해서만 구성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 의하면, 우리와는 독립적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그 무엇(실재)에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이는 실재성의 정의를 '우리에게 입증된 참된 진술 속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들의 총합' 식으로 변형시킨다고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버마스 2000, pp. 35-39).

퍼스가 보기에, 해석자 공동체의 특수한 맥락을 초월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은 '무제약적 청자를 향한 진리 주장'이었다. 즉 퍼스의 구상에서, 참된 진술 속에서 서술된 내용은 세계 그 자체라기보다는 해석자 공동체에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생활세계에 비추어 '현실적인 것'이고, '참이다'라는 말은 세계 자체를 참조하여 설명되기보다는 한 논자가 단언적 명제를 제시할 때 함께 제시하게 되는 타자를 향한 타당성 주장을 참조하여 설명된다 (하버마스 2000, p. 39).

여기서 한 논자의 '타당성 주장'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해석 공동체를 넘어 무제약적인 의사소통 공동체를 향해야 한다. 이러한 개방적 해석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 타당성은 사회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의 한계를 내부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퍼스는 '최종의견' 즉 이상적 조건 속에서 도달된 합의라는 반사실적 개념을 사용하여 내재적 초월성과 같은 것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실재적인 것은 정보와 추리가 조만간 최종적으로 귀착될 곳이며, 따라서 나와 너의 변덕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다 (C. S. Pierce ; 하버마스 2000, p. 40에서 재인용)." 퍼스에게, 진리는 사회적 공간과 역사적 시간의 측면에서 이상적으로 확장된, 판단능력을 갖춘 해석자 청중의 의사소통 조건에서 비판가능한 타당성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계기만이 진리주장을 지향하는 논증적 실천을 단순히 사회적 인습에 의해 규제되는 여타의 실천들로부터 구별시켜준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퍼스는 진리를 실재와의 대응에서 탐구자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끝나지 않는 논증적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대치시켰다.

이러한 퍼스의 모형은 과학자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논증 과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적절한 변형이 가해진다면, 이 모형이 일상적 의사소통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에서도 참여자들은 세계 속의 그 무엇에 관한 자신의 발화가 타당함을 주장함으로써 그것에 관한 상호이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퍼스의 진리 타당성을 다루는 논증적 의사소통 과정 모형을 확장하여 규범적 정당성까지도 다룰 수 있는 일반적 의사소통 과정 모형을 구성한다 (하버마스 2000, pp. 41-42).

논증적 민주주의

하버마스에게 법이 정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법이 우리의 논증적 의사소통 과정에 의해 합의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언제든지 새로운 논증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법의 정당성 개념이 법의 안정성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는 퍼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퍼스에게 과학이론이 타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론이 우리의 논증적 의사소통 과정에 의해 합의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언제든지 새로운 논증에 의해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퍼스는 이러한 끊임없는 진리 추구활동이 일종의 '최종의견'으로 수렴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버마스와 퍼스는 자유로운 논증에 의한 합의, 그리고 끝없는 비판가능성이 타당성의 근거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의 안정적인 귀착에 낙관적이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동안 자유주의적인 선호취합 방식의 민주주의 개념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지만, 모두의 토론과 모두의 합의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사회나 퍼스의 과학자 공동체는 민주주의적이다. 또한, 과거의 해석학적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과거의 결과물을 얼마든지 재구성, 재해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에서도 민주주의적이다.

하버마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증적 태도는 법의 적용, 즉 판결을 다루는 부분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버마스는 판결의 합리성은 논증과 그 절차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판결은 논증의 내적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절차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논증 과정에서 강제없는 의사소통을 가능케 해주기 위해서이며, 둘째로, 평결의 공개나 재심요구와 같은 절차는 이전의 논증이 가질 수 있는 오류를 수정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다. 결국, 법의 적용의 핵심은 논증이다.

하버마스가 민주주의와 법이론에서 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항상 좋은 논증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논증이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는 합당한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하버마스가 법의 정당성을 검토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 제정과정이 합당한 절차를 밟았는가인데, 그 이유는 법적 논증의 결과를 평가하는 기준은 그 외에 달리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실재와의 대응일 수 없다는 퍼스의 관점을 수용한 하버마스에게 진리 타당성은 그 논증 과정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과정을 검토하는 이유는 진리를 위해서이지 그 과정 자체에 있지 않다. 즉, 이러한 이유에서 하버마스의 민주주의 사회는 논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 공동체와 너무나 닮아있다.

타협적 과학자사회: 지식의 사회적 구성

객관적, 논증적 과학에 대한 공격의 실마리는 먼저 철학에서 왔다. 콰인(W. V. O. Quine)은 과학의 이론이 실험 데이터에 의해 충분히 결정되지 않는다는 '이론의 미결정성' 논제를 설득력 있게 밝혔으며, 핸슨(N. R. Hanson)은 과학자의 관찰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에 선행하는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관찰의 이론의존성' 논제를 주장했다. 이어, 1962년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한 시대의 과학적 가설·이론·믿음·실험의 총체를 패러다임이라고 명명했는데, 그에 의하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전이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종교적 개종과 흡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이었다 (홍성욱 1999, pp. 72-73).

1970년대와 80년에 들어, 데이빗 블루어, 배리 반즈, 도널드 매켄지, 스티븐 섀핀 등 에딘버러 대학의 과학학 프로그램 멤버와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 등은 콰인, 핸슨, 쿤 등의 철학적, 역사적 주장을 흡수하여 과학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제를 제시했다. 이들에 의하면, 첫째, 실험 데이터에 의해 미결정되는 이론은 결국에 사회적 이해관계와 결합해서만 결정된다. 둘째, 과학적 진리는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과학자들의 협상과 타협 또는 합의의 산물이다 (홍성욱 1999, pp. 73-74).

이들의 대부분은 반실재론 또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는데, 그들에게 과학적 실재라고 하는 것이 자연에 존재하는 무엇을 마치 동전을 줍듯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는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브루노 라투어와 스티브 울가가 함께 저술한 『실험실 생활』은 인류학적 방법을 원용하여 미국의 소크 연구소라는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실천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라투어는 소크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노벨 상의 영예를 안겨준 TRF라는 호르몬의 발견이 서로 다른 두 연구팀 사이의 협상과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 동전 줍듯 발견한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에 근거하여 라투어는 구성주의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활동중인 과학(Science in Action)』에서 과학이 정치나 법률처럼 인간의 서로 다른 이해의 타협의 산물임을 설파했다 (홍성욱 1999, pp. 75-76).

이들의 반실재론적 취향은 차치하더라도, 과학이 "정치나 법률처럼 인간의 서로 다른 이해의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관점은 주목해볼 만 하다. 왜냐하면, 이는 정치나 법률이 "과학처럼 논증적 의사소통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관점과 완전히 정반대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이 보기에, 과학자는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기에 그것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과학의 진리는 과학의 내적 논증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른 협상과 타협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국소적 맥락에서 형성되는 것은 잘 설명하지만, 과학의 탈맥락화 과정은 설명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과학이론은 그 당시의 맥락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나며, 과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학이론은 수용과정을 거치면서 탈맥락화되는 경향이 있다. 17세기 영국의 맥락에서 태어난 뉴턴 역학은 '태엽을 항상 감아주는 신'을 필요로 했지만, 현재에도 뉴턴 역학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윈의 진화론이 19세기 영국의 매우 치열한 경쟁과 성장이 작동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맥락에서 상호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글이 있지만,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그 시대의 맥락과 무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주장에는 과학 이론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을만한 측면들을 드러내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더라도, 현재의 과학이론이 여전히 당시의 함축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해석되어선 안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맥락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논증적 의사소통의 힘 때문일 것이다. 진리를 주장하는 논증을 할 때, 우리는 과거로 투사하기보다는 현재와 미래로 투사한다. 논증과정에서는 먼저 나를 설득하고, 현재 해석공동체의 타자와 미래의 타자까지 설득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한번 탄생한 과학이론은 개방적 해석과정 속에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얼마든지 재해석, 재구성될 수 있으며, 현재의 과학이론은 과거의 맥락을 점차 벗겨갈 수 있다. 이는 하버마스가 법치국가의 원리를 논증함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관점을 벗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법치국가는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원리지어졌지만, 하버마스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신과 타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자는 종종 과학자들의 논증을 수사 또는 사후적 과정으로 가치절하하곤 한다. 하나의 결론은 이미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논증을 통한 설득과정은 수사 또는 선전(propaganda)에 가깝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의 논증이 의도상 수사나 선정이었다 하더라도, 현재와 미래의 타자를 설득하기 위해 펼치는 논증은 의도치 않은 귀결을 내곤 한다. 설득을 위한 논증을 위해 논자는 자신과 현재와 미래의 타자의 관점에서 서보게 되면서 논증은 합리적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 논증을 잇는 끊임없는 논증을 통해 문제대상과 무관한 다른 맥락들은 점차 벗겨져가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끊임없는 논증적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처음 탄생한 맥락을 벗겨내는 과정이 바로 하버마스가 말했던 "주체없는 의사소통"의 본뜻이 아닐까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 운동과 하버마스

최근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떤 논자들은 독단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과학을 시민참여를 통해 민주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말하는 과학자 사회의 비민주성은 과학적 내용의 결정을 누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상식적으로 과학정책에 대한 시민의 참여를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도느냐 지구가 태양을 도느냐의 문제는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즉, 이에 대한 결정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지식이 완벽하지 않으며, 시민들의 지식도 중요하며, 또한 과학기술의 재원과 그 효과 면에서 매우 공적인 사안이라는 근거로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이러한 상황은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대립으로 묘사된다 (이영희 2006).

언뜻 보기에, 이러한 묘사는 하버마스가 과학자 사회를 이상적인 민주사회로 그린 것과 매우 상반되는 그림처럼 보인다. 이러한 비민주성은 하버마스의 일차적인 기준인 '논증적 의사소통'과는 무관하다. 다만,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자의 범위의 문제에서는 상관이 있다. 즉, 위에서 묘사하는 과학자 사회의 비민주성의 핵심은 '배타성'이다. 그렇기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데, 논증의 필요성은 항상 강조된다. 즉, 여전히 태양/지구의 회전 문제는 국민투표보다는 논증의 문제이다. 그러나, 논증의 진리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제약적 의사공동체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과학적 문제에 일반인이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며 강하게 말하면 필수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나 논란이 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과학의 내적 문제들보다는 과학의 사회적 문제들이다. 예컨대, "원자력 폐기장은 주변지역에 유해한가 아닌가?" "새로 만든 제초제가 농부들의 건강에 유해한가 아닌가?" 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원자력 폐기장의 설치 유무 및 보상금의 액수, 또 제초제의 사용 허가 및 농부들에 대한 보상문제와 연관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시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당사자의 관점에서 매우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은 "규제협상, 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 시민자문위원회, 포커스 그룹, 시나리오 워크샵, 공론조사 등"의 참여모형을 제안한다 (이영희 2006, p. 8).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참여모형이 "국민투표, 공청회, 여론조사 등과 같은 전통적인 시민참여 방식에 비해 과학기술이나 환경 분야와 같이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시민참여가 숙의적 과정(deleberative process)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고안되었다"고 말한다 (이영희 2006, p. 8). 이들은 '전문적인 문제'일수록 선호취합적인 방식보다는 숙의(토의)적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모형이 하버마스의 토의 민주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시민참여 모형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이 참여 모형들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숙의(토의) 과정을 통해 사실(폐기장의 유해성)에 대한 합의가 생겨나면, 사안(폐기장의 건설 유무)에 대한 선호도도 바뀔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론가와 활동가가 인정하듯이, 숙의(토의) 과정은 전자의 측면에 강점이 있다. 그럼에도, 선호도의 합의는 전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공통된 견해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버마스의 민주주의 이론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즉, 하버마스의 이론이 전문적이고 인지적인 문제에 강점이 있는 반면에,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여전히 선호취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사실의 합의가 선호도의 변화를 주긴 하지만, 선호의 합의를 함축하진 않기 때문이다. 즉, 타협은 시간적 제약에 따른 불충분한 합의만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타협은 필수적인 요소로 들어와야 할 것처럼 보인다.

결론: 논증의 힘과 한계

하버마스의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는 논증을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 사회와 흡사하다. 이에 대해, 과학자 사회조차 그렇지 않다는 사회구성주의의 비판이 가능하다. 과학적 지식조차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논증의 힘을 무시한 분석이다. 한번 구성된 지식은 끊임없는 논증을 통해 탈맥화되어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주체없는 의사소통'이란 바로 이러한 과정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하버마스가 자신의 논리를 과학자 사회에서 빌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과학자 사회에 대한 묘사가 아니며, 퍼스의 이론도 아니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그것을 재구성하고 확장한 하버마스의 이론이다. 그렇기에 하버마스의 이론은 과학자 사회의 모습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상당부분 이해가능하다.

그럼에도, 하버마스의 이론은 자신의 기원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가진다. 하버마스가 제안한 논증에 기반한 민주주의 모형이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전문적이고 인지적인 문제에서만 특별한 강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그 이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과학자 사회의 논증적 의사소통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합의'에 너무 많은 주목을 한 탓으로 보인다. 분명, 과학은 다른 어떤 분야에 비해 합의가 잘 일어난다. 그러나 과학에서도 불일치의 문제는 매우 곤란한 문제로 남아있다. 퍼스의 '최종의견'은 너무나 낙관적인 태도였다. 더구나, 사회의 불일치는 과학에서 일어나는 불일치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하버마스는 이에 대해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참고문헌

  • 위르겐 하버마스, 한상진·박영도 옮김, 『사실성과 타당성: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주의적 법치국가 이론』, 나남출판, 2000.
  • 이언 해킹, 이상원 옮김, 『표상하기와 개임하기: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 한울 아카데미, 2005.
  • 홍성욱,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 문학과 지성사, 1999.
  • 이영희,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시민참여를 중심으로", 99회 과사철 협동과정 콜로키움 원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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