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주의의 사회적 의미: 뉴턴(클라크)-라이프니츠 논쟁
라이프니츠-클라크 논쟁의 정치적 의미
미적분 발견에 대한 우선권 논쟁에서 시작된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은 자연철학,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그들 논쟁의 주요한 쟁점은 세 가지 ― 신이 자연세계의 질서에 개입하는 방법, 진공의 가능성, 공간과 물질의 속성 ― 로 볼 수 있고, 그중 신학적 공리에 대한 견해차 ― 뉴턴의 신은 자율적 의지(will)가 강조된 신인 반면 라이프니츠의 신은 완벽한 지혜(wisdom)가 강조된 신이다 ― 가 근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 사이의 형이상학, 신학, 자연철학 논쟁의 중요성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정치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1680년에서 1720년 사이의 영국의 특수한 사회정치적 대립구도 하에서 특정 정치그룹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이 존재했고,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그 논쟁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1680년대에서 1720년대까지 영국내 정치적 담화는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떤 권리로 제임스 2세, 윌리엄과 메리, 앤, 조지 1세가 왕위를 가졌는가? 어떤 범위로 그들은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 권력은 "인민"과 의회의 권리와 자유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군주에 대한 인민의 의무는 무엇이며, 인민에 대한 군주의 의무는 무엇인가? 국가와 책임에 대한 추상적인 정치적 이론은 항상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 및 그 진행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의 정치 사상은 권력 분배 문제와 왕권의 적법성과 권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정치적 물음들은 정치뿐 아니라 신학과 자연철학을 자원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자연 세계"와 "정치 세계"는 종교적 의미의 그물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신과 자연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정치적 질서의 관념과 중요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특히 군주의 의지의 범위에 대한 논쟁은 당대의 자연철학적 논쟁에 중요한 빛을 던져 주었다. 왕정복고기에서 하노버 왕가의 계승기까지 영국의 정치적 정서는 왕권의 역할과 범위에 대한 생각에 따라 몇몇 정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대표적인 대립쌍은 "토리"와 "휘그" 이데올로기이다. 전통적으로 토리는 왕권을 절대적으로 보았다. 왕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신의 권한으로 통치한다. 세습 계승은 신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토리의 입장에서 절대왕정에 대한 제한은 결국 혼돈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많은 토리는 양심적 판단력의 위기를 겪는다. 윌리엄과 메리는 적법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른 대안은 그들에게 더 위험했다. 내전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토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지주계급의 권리를 위협했다. 토리에게 하나의 해법은 윌리엄과 메리에 대해 제임스 2,3세가 가진 '적법한' 왕위 권한은 없지만 '사실상의' 통치자인 것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다른 대안적 해법은 실제로 벌어진 일을 정당화해주는 신의 섭리와 특별한 의지 관념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688년에서 1714년 사이 여전히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긴 했지만 토리는 점점 사태를 인정하고 대부분은 절대왕정의 절대권력에서 왕과 의회의 권력으로의 이양을 인정했고, 자신들의 정치철학을 굽히고 대세를 따랐다. 혁명 이후의 안정과 위계질서가 딱 토리의 입맛에 맞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근거가 되는 상당한 토지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는 그 사회의 안정과 위계질서 하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전통적인 휘그 이데올로기이다. 절대왕정은 원리적으로 거부된다. 왕의 의지는 법에 의해 적절히 제한된다. 계승은 세습 권한이 아닌 일종의 계약에 의존한다. 신과 특정 군주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고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 가장 중요하게, 인민(과 그 의회의 대표자)는 군주의 적법한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과도한 권력 행사에 저항할 수 있다. 휘그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를 막아낸 명예혁명을 뒷받침하고 그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보호해야 했다. 이것이 기본적인 휘그의 입장이다. 휘그는 제한된 버전의 왕정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혁명 이후의 특정한 군주의 권리를 변호해야 했다. 휘그는 토리만큼이나 군주가 폭도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내는 보루로 서 있기를 기대했다. 휘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부자들이었고 위계질서와 그 서열에 따른 의무 복종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보일 강좌와 뉴턴주의의 사회적 의미
- Margaret C. Jacob, “The Boyle Lectures and the Social Meaning of Newtonianism”, in The Newtonians and the English Revolution, ch. 5
보일강좌의 배경 - 뉴턴주의를 옹호한 성직자들의 공통된 관념
- 신의 의지에 조화롭게 작용하는 우주는 사회적․정치적 안정과 유사하다는 관념 공유
- 한편으로는 무신론, 이신론, 반종교론 등의 위협에 대항해야 한하는 관념 공유
- 명예혁명 이후 사회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회철학 필요성 공유
보일강좌에 참여한 성직자들이 사용한 뉴턴주의의 구체적 내용
- 우주의 질서는 신의 의지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안정적으로 그 위계질서가 유지된다
- 뉴턴의 물리 이론과 운동법칙은 자연에 대한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Clarke)
- 운동법칙에 의해 통제되는 자연세계 속에서 정치적 세계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 자연의 질서가 신의 의지에 의하여 통합적이고 조화로운 것과 같이, 사회의 질서도 조화롭게 유지되어야 한다
- 인간은 (신의 의지에 의하여) 사소하고 하찮은 물질을 지배한다
- 신에 대한 인간의 복종,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같이, 상층에 대한 복종과 위계질서가 잡힌 사회형태를 조화로운 사회이다
보일강좌의 사회적 역할
- 교회의 도덕적 권위 회복과 정치적 영향력 유지
- 뉴턴의 자연철학을 (온건)휘그주의 이데올로기와 통합하여 정치적 사회적 안정 도모
뉴턴주의와 근대적 세계관
- Toulmin, Cosmopolos (Chapter 3, The Modern World View)
“국민국가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체제의 형성
1600년까지만 해도 봉건적 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던 유럽의 주요국가는, 종교전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1650년 경 국민국가의 체제를 정립하게 된다. 그 시기 국민국가가 역점을 두었던 과업은 첫째 안정, 둘째 종교적 통일과 관용이었다. 이때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적’ 발전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국은 잠시 동안의 공화정을 거쳐 입헌군주제의 길을 걸었고,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길을 걸었다.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립에 조응하여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관계 ― 계급사회 ― 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수직적으로 구획된 중세(당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의 사람인가?)와 달리 ‘주인없는 사람들’의 수평적인 사회계급 형성은 사회적 안정과 충성에 대한 위협으로 뚜렷하게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다운 국민에 대한 관념 형성되기 시작하며, 왕권은 상송적 봉건 영지의 법적 계승권이 아닌 국민이나 민족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새롭게 형성된 국민국가 내에서 개인들 및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할 ‘새로운 원리’의 정립이 필요했다.
1660-1720: 보편교회 Ecumenism을 구상한 라이프니츠
17세기 사회 재건 사업의 두가지 과제는 첫째,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과 종교로 인해 반목해온 국민들 사이에서 대화의 통로를 회복하는 문제, 둘째, 봉건적 관계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안정적이고 통합적인 사회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과제에 대해, 데카르트가 이성적 방법이 종교적 대립을 피해 확실성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던 것과 유사하게, 라이프니츠는 보편언어 이론이 정치적 신학적 마찰을 일고에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수학적 상징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그는 모든 경쟁적인 교리가 공유하고 있는 ‘충족이유의 원리’에 의존하여 유럽의 신앙체계를 통합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1660-1720 : 뉴턴과 새로운 코스모폴리스
여러 국가, 다양한 종파에 소속된 ‘석학들’에게 확신을 심어줄만한 지식체계 정립하여 공통의 세계관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라이프니츠보다는 뉴턴이 더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는 일련의 공통된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상당히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근대적 믿음들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략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자연에 해당하는 관념으로는 ① 자연은 창조시부터 작동된 불변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② 자연의 근본 구조는 불과 몇천년 전에 정립되었다 ③ 물리적 자연의 대상들은 비활동적은 물질로 구성된다 ④ 창조 시에 하느님은 자연물들을 안정된 위계로 묶었는데, 이 위계서열 내에서 ‘보다 높은 것들’의 체계는 ‘보다 낮은 것들’의 체계와 결합한다 ⑤ 사회에서의 ‘행동’이 그러하듯이 자연에서의 ‘운동'은 아랫쪽으로, 말하자면 ‘보다 높은’ 피조물로부터 ‘보다 낮은’ 피조물들에게로 진행한다. 한편 인간에 해당하는 관념으로는 ① 인간에게 ‘인간다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 사고나 행동의 능력이다 ② 합리성과 인과성은 서로 다른 규칙에 따른다 ③ 사고와 행동은 인과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인과적 심리과학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④ 인간은 자연의 물리체계처럼 안정적인 체계를 사회 안에도 정립할 수 있다 ⑤ 따라서 인간은 두가지 생명이 혼합된 생을 영위하는 바, 일부는 이성적이며 일부는 인과적이다. 이성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지적 혹은 영적이지만, 감정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육체적 혹은 육욕적이다 ⑥ 감정은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며 왜곡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이 신뢰받고 고양되어야 마땅하다면, 감정은 불신되고 제한되어야 마땅하다.
이러한 믿음들은 ‘타당성’을 충실하게 검증받은 적이 없었다. 이들은 ‘공리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적 비계들(intellectual scaffoldings)’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과학자들이 근대 물리학을 구성한 ‘골격’이었다. 사실상 근대의 비계는 일련의 잠정적이자 사변적인 절반진리들로 구성된 것이었으며, 이성주의 철학자들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비계는 논리적 증명뿐만 아니라 사실적 근거마저도 결여한 것이었다.
1720-1780 : 근대성의 외전들
1700년대 이래로 새로운(뉴턴식) 자연관의 폭발적 수용은 ‘원전 외부’의 다른 요인들에 의존한다. 실제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여기서 ‘폭발적 수용’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과장이긴 하다. 새로운(뉴턴식) 자연관(세계상)은 17세기 말 급성장한 진보성향의 소수 엘리트층에게만 유포되고 지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포된 관념은 바로 「(국제관계에 있어서의) 안정과 (사회 계급들 간의) 위계의 원리를 하나님의 계획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자연관은 인간관이자, 과학적 장치일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장치였으며, 이를 빌어 주권 국민국가의 정치질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1700년 경에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 또한 그 덕택에 ‘실질적으로 정립되는’ -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 과학적 세계관은 행성운동이나 조류의 간만을 훌륭하게 설명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의 정치체계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성주의로부터의 이단계 후퇴
근대의 과학과 철학은 탈역사적인 추상화 작업이 아닌,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다. 160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종교적 정치적 분쟁은 베이컨식 경험주의의 자신감을 쇠퇴시키고 ‘수학적 확실성’에 대한 모색에 무게를 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턴이 제시한 완전한 (수학적) 자연질서는 안정과 위계를 갈구하는 그 시대의 엘리트들에게 사회 질서를 정당화해주는 ‘코스모폴리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즉, 과학의 성공은 이 설명의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고려에도 의존했다. 지난 세기의 과학적 활동은 오늘날과 전혀 다르게 수행되었다. 예컨대 뉴턴 시기의 과학적 관념은 16세기 인문주의자(베이컨)들의 권고를 무시한 채, 실천적 결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유리된 채 성장했다. 과학자들은 베이컨의 정신을 거부하였으며, 기술의 편에서가 아니라 신학의 편에서 과학을 추구했다. 일반독자들 또한 새로운 과학이념의 코스모폴리스적 함축이 주목거리였다. 즉, 정치적 의무며 사회구조 등과 관련된 코스모폴리스적 주제들이 독자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이제 과학사 연구에 꼭 추가해야 할 질문이 있다. 첫째, 특정한 시대의 과학자들, 그리고 과학의 독자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현안’이었던가? 둘째, 무엇이 새로운 과학이념을 ‘상식’으로 통용될 만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