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없는 혁명: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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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욱, 정원호, 「위기 없는 혁명: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중심으로」, 『과학철학』 23권 2호 (2020), 1-51쪽. (pdf 버전)

본문

위기 없는 혁명: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중심으로

Revolutions without Crisis: Focused on the Copernican Revolution


정동욱, 정원호


[초록] 우리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앞서 어떠한 위기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 없는 혁명을 설명하는 모형을 제안하는데, 이 모형에 따르면, 양립불가능한 패러다임들은 그들 사이의 충돌을 무시함으로써 공존하며 각자의 정상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문제 풀이의 자원을 축적한다. 충분한 자원이 축적되면 그들 사이의 알려진 충돌들 중 오랫동안 방치됐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혁명을 출발시킨다. 이 모형은 코페르니쿠스 혁명뿐 아니라 다른 과학혁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주요어] 과학혁명, 위기, 토머스 쿤, 태양중심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패러다임


머리말

토머스 쿤에 따르면, 위기는 과학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과학혁명은 과학의 탐구를 주도했던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보통은 과학자 공동체의 좁은 하위 분야에 내에서) 점차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발전이든 과학적 발전이든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Kuhn 1999, 92쪽/쿤 2013, 185쪽) 과학혁명은 “대규모의 패러다임 파괴와 정상과학의 문제 및 테크닉상의 주요 변동을 요구하는 까닭에,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은 대체로 전문 분야의 불안정함이 현저해지는 선행 시기를 거치게 된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그런 불안정함은 정상과학의 퍼즐들이 좀처럼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기존 규칙의 실패는 새로운 규칙의 탐사를 향한 전조가 된다.”(Kuhn 1999, 67-68쪽/쿤 2013, 150쪽)[1]

그러나 위기가 혁명의 선행 조건이라는 쿤의 주장은 철학자들로부터 여러 방향의 비판을 받았다. 파이어아벤트(1997)는 19세기 물리학을 사례로 제시하며 20세기 물리학 혁명들이 전문화된 분야 내에서의 연구, 즉 정상과학에 의해 비롯된 위기의 귀결이라기보다 19세기 존재했던 다양한 분야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던 비-정규적인 연구에 의해 일어났음을 보임으로써, 혁명의 동력이 정상과학에 의한 위기와 무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대체로 혁명을 억압할 뿐이며, 혁명을 위해서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얽매이지 않은 비-정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반대로 니클스(Nickles 2003b)와 홍성욱(1999b)은 혁명이 위기 의식과 무관하게 시도된 정상적 문제 풀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정상적 문제 풀이는 언제나 패러다임, 즉 범례에 기반해서 이루어지긴 하지만 문제에 따라 그 적용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일부 정상적 문제 풀이는 후에 기존 패러다임과 양립불가능하다는 함축이 명백해짐으로써 혁명을 야기할 수 있다. 즉 그들에 따르면, 혁명은 정상과학으로부터 기인하긴 하지만 위기라는 중간 과정을 필요로 하진 않는다. 이 두 가지 비판은 위기가 혁명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전자는 정상과학의 존재와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반면 후자는 쿤보다는 완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정상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주장에 손을 들어야 할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역사적 연구들의 성과를 가져오려고 한다. 쿤 자신은 위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천문학 혁명 직전의 상황을 제시한 바 있다(쿤 2013, 150-153쪽). 그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할 당시 천문학자들의 일부는 천문학의 복잡성이 그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증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곳에서 이루어진 보정이 다른 곳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패러다임 탐색과 정당화의 선행 조건이라고 말했다. 또한 쿤은 달력 개혁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나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사회적 요소도 위기에 일조했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붕괴(technical breakdown)가 여전히 위기의 핵심”(쿤 2013, 153쪽)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천문학 혁명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는 쿤의 주장은 역사학자들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았다. 깅거리치(Gingerich 1993b)는 쿤이 언급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쿤은 천문학의 복잡성이 그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증대되고 있다는 점을 위기의 징표로 해석했지만, 깅거리치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는 정확성의 증가도 복잡성의 증가도 없었다. 한편 하이델버거(Heidelberger 1976)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동기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내부의 위기라기보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통합 노력에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존 헨리(2003, 64-66쪽)와 같은 일부 역사학자들은 두 분야의 통합 노력 과정에서 출현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위기의 결과라기보다 이후 발생한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워들로우(Swerdlow 1973)와 클러턴-브록(Clutton-Brock 2005) 등 코페르니쿠스의 연구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 학자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매우 전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태양 중심의 체계에 도달하긴 했으나, 그가 해결하고자 한 문제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부정확성이나 복잡성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러한 세밀한 역사적 연구들은 쿤의 역사적 서술이 실제와 잘 맞지 않음을 조목조목 보여줄 수 있었지만, 그러한 불일치가 쿤의 방법론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는 분명하게 다루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과학의 변화 과정에 어떠한 보편적인 변화의 논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비관적인 견해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천문학 혁명에 대한 역사적 연구들에서 지금까지 합의된 부분을 모아 그것으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는 방법론적 함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볼 것이다.

위기의 방법론적 역할

위기가 과학혁명의 선행 조건이라는 쿤의 주장은 결코 사소한 주장이 아니다. 첫째로, 쿤(2013, 160-163쪽)에 따르면 위기는 혁명에서 대안의 발견과 정당화 모두에 기여한다. 대안적 패러다임의 창안, 즉 연구의 도구를 새로 만드는 일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위험한 일이기에 웬만해서는 그러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위기는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고서 도구를 바꾸는 값비싼 일을 해야 할 때를 과학자들에게 알려주는 지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위기는 대안 이론에 호의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예컨대 기원전 3세기 당시 지구중심설에 아무런 위기가 없었던 상황에서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은 철저히 무시되었지만, 16세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천문학의 문제들을 푸는 데에 실패했다는 위기 의식이 생기자 당시의 천문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호의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시기가 무르익자 경쟁 이론에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둘째로, 위기의 가능성은 정상과학이 정체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를 완화한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 시기에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이론을 잘 받아들이지도 못한다.”(쿤 2013, 92쪽) 심지어 정상과학자들은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문제를 푸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패러다임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으며 자신의 실력 부족 때문인 것으로 간주한다(쿤 1987). 당연히 이러한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교조화하여 영구적인 정체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러한 비판을 예상했던 쿤은 “정상과학에는 … 패러다임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연구를 구속하던 제약들을 느슨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내장되어 있다.”(쿤 2013, 92쪽)라고 비판자들을 안심시켜야 했고, 심지어 그는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연구[정상과학]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 특히 효과적인 방법”(쿤 2013, 129쪽)이라고까지 말했다.

어떻게 정상과학이 패러다임의 전복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가? 쿤에 따르면, 변칙현상은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공되는 배경 위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정상과학은 관측과 이론 사이의 엄청난 일치를 추구하게 되고, 패러다임이 강력하고 그 예측이 구체적일 경우에만 사소한 작은 불일치를 변칙으로 인식할 수 있는 예민한 지각을 얻기 때문이다(쿤 2013, 146-147쪽). 그리고 만약 여러 이유들로 인해 “하나의 변칙현상이 정상과학의 또다른 퍼즐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될 때에”(쿤 2013, 172쪽) 위기가 시작되며, 많은 연구자들이 그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동시에 패러다임의 제약들이 완화되고 모호해짐으로써 보다 다양한 해법을 탐색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쿤은 최대한 하나의 패러다임에 구속된 정상과학을 수행할 것을 안심하고 권장할 수 있었다.

요컨대 쿤에게 위기는 혁명이 정상과학의 자연스러운 귀결로서 산출되기 위한 매개물로 기능하며, 위기가 이러한 기능을 하기 위해 위기는 패러다임 내적인 원인에 기인해야 한다. 만약 패러다임의 위기가 사회적 요인과 같은 패러다임 외적인 요인에만 기인한다면 그것은 정상과학과 혁명을 매개하는 방법론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역사적 설명으로만 기능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발단에 대한 쿤의 설명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2013, 149쪽)은 위기가 과학혁명의 선행 조건이라는 주장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재론의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 첫 번째 증거로서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명백한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인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발단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내부의 위기

우선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내부의 위기가 혁명의 출발점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상황은 코페르니쿠스의 선언 이전에 하나의 스캔들”(쿤 2013, 149쪽)이었으며, “만일 누군가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천문학자들의 이러한 정상연구의 노력이 낳은 결과를 종합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천문학의 복잡성이 그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과 한 곳에서 보정된 모순이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 일쑤였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쿤 2013, 150-152쪽)

이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묘사는 그의 『코페르니쿠스 혁명』 2장에서 찾을 수 있다.[2] 첫째,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관측과 이론의 일치를 위한 정상과학이 코페르니쿠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의 많은 계승자들—처음에는 이슬람에 있었고 나중엔 중세 유럽에 있었던—은 그가 남겨 둔 곳에서 문제를 착수했고 그가 해 보지 않았던 해법을 헛되이 추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쿤 2016, 135-136쪽) 둘째, 쿤은 그러한 추구를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점차 정확해졌으나 “이 체계의 어떤 버전도 정밀해진 후속 관찰에 의한 시험을 제대로 견대 낸 적이 없었고”, “새로운 미세 주전원이나 그와 동등한 장치의 추가”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으며, 이로 인한 개념적 경제성의 완전한 소멸이 천문학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자신이 『알마게스트』에서 구현했던 것 말고도 수많은 버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는 데 상당한 정확성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은 예외 없이 복잡성—새로운 미세 주전원이나 그와 동등한 장치의 추가—을 대가로 내주고서 얻은 것이었고, 증가한 복잡성은 행성 운동에 대한 최종 결과가 아닌 고작 더 나은 근사치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이 체계의 어떤 버전도 정밀해진 후속 관찰에 의한 시험을 제대로 견뎌 낸 적이 없었고, 이러한 실패는, 더 투박한 버전의 2구체 우주[지구와 항성 천구로 이루어진 우주]를 그토록 신빙성 있어 보이게 해 주었던 개념적 경제성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과 결합해, 종국에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이어졌다.(쿤 2016, 136쪽)

우리는 그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이러한 위기의 구체적인 모습이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와 함께 상술되길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에서 위기를 암시하는 언급은 위의 인용문에서 멈춘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정확성 증가와 경제성 소멸은 혁명의 전조를 조성하는 그럴듯한 시나리오로만 제시되었을 뿐, 결코 역사적 증거와 함께 서술되지 못했다.

천문학 외부의 변화된 환경

오히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천문학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천문학 외부의 변화된 환경에 설명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천문학 외부의 환경에 대한 고려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쿤에 따르면 과혁혁명은 이론과 관찰과의 불일치만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관찰은 개념 체계와 완전히 양립 불가능했던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기구와 관찰을 사용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선배들은 똑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평가”할 수 있었다. 즉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왜곡과 땜질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적응과 확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는데, 이는 지구와 별들에 맞게 처음 설계된 [아리스토텔레스의] 2구체 우주에 태양의 운동을 통합하기 위해 필요했던 예전의 [성공적인] 과정과 거의 마찬가지로 보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선배들은 그 체계가 결국에는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쿤 2016, 140쪽) 그래서 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일시적인 불일치로 보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충돌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세대에서는 섬세하고, 유연하고, 복잡한 것으로 감탄하며 얘기되던 개념 체계가 어떻게 이후 세대에게는 단지 불분명하고, 모호하고, 번거로운 것이 될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왜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고수하며, 그들은 왜 그동안 고수해 왔던 이론을 포기하는가? (쿤 2016, 140쪽)

위기가 혁명의 선행 조건임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발전 과정이 위기를 만들어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이 질문의 답으로 의도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답할 뿐이다.

한 과학에서의 혁신이 꼭 그 과학 내에서 나타난 새로움에 대한 대응이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코페르니쿠스에게 고대 천문학의 부적합성이나 변화의 필요성을 납득시킨 것은 어떠한 근본적인 천문학적 발견도, 어떠한 새로운 종류의 천문학적 관찰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고서 반세기가 지날 때까지 천문학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 내에서는 혁명의 소지가 있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와 그 혁명을 일으킨 요인들에 대한 가능한 이해 방식을 찾는다면, 어쨌든 그것은 주로 천문학 바깥의 환경, 즉 천문학의 실행가들이 살았던 더 큰 지적 환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장의 도입부에서 제안했듯이,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우주론적·천문학적 연구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멈췄던 곳 바로 근처에서 시작했다. 그 점에서 그는 고대 과학 전통의 직계 상속자다. 그러나 그가 받은 유산은 그에게 도달하는 데 거의 2천 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있었던 재발견 과정 자체,[3] 중세시대의 과학과 신학의 통합, 스콜라적 비판의 세기들, 르네상스 삶과 사상의 새로운 흐름들, 이 모든 것이 결합해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쿤 2016, 253-254쪽)

이를 상술하기 위해 그는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스콜라적 비판들에 의해 초보적인 관성 개념, 운동의 상대성 개념, 지상계-천상계 이분법 완화 가능성 등 태양 중심 체계의 옹호에 사용될 수 있는 다양한 물리학적, 우주론적 자원들이 창안됐음을 보였고[4]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종교 개혁, 지리적 발견,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 특히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천문학 외부의 영향들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천문학”이라는 소절에서 코페르니쿠스 당시 천문학의 복잡성이나 정확성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과학혁명의 구조』의 도식과 완전히 위배된다. 그에 따르면, 위기는 혁명의 선행 조건이며, 정상과학 내부의 “전문적인 실패(technical breakdown)”가 위기의 핵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기가 혁명에 앞선다는 첫째 조건은 만족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천문학 내부에 기인하든 외부에 기인하든 천문학에 대한 의심을 증가시키는 요인들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대안이 추구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가 주로 천문학 외부의 환경적 변화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천문학의 혁명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라는 정상과학적 탐구의 축적이 기여하는 바가 없어진다. 이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정상과학이 결국 위기를 만들어내고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쿤의 주장을 의심하게 만든다.[5]

코페르니쿠스의 전문성과 개성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발단에 대한 쿤의 서술은 코페르니쿠스 개인에 대한 묘사를 통해 완성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적 예측의 작은 정도의 불일치에도” 심란했던 천문학의 전문가인 동시에 “하늘의 기하학적 조화”에 집착하는 개성을 갖춘 “수리 천문학자”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에게는 수리 천문학의 세부 사항이 먼저였고, 하늘의 수학적 조화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 눈가리개를 쓰고 있었다. … 그 눈가리개는 천문학적 예측의 작은 정도의 불일치에도 그를 너무나 심란하게 만들었기에,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그는 우주론적 이단인 지구의 운동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 눈가리개는 그가 기하학적 조화에 너무나 집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지구의 운동을 떠오르게 해 준 문제들을 그것이 해결하는 데 실패했을 때조차 그것의 조화만을 위해 자신의 이단적 생각을 고집할 수 있었다.(쿤 2016, 359-360쪽)

그렇다면 쿤이 생각하기에, 코페르니쿠스가 풀고 싶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운동을 떠오르게 해 준 문제들을 그것이 해결하는 데 실패했을 때조차 그것의 조화만을 위해 자신의 이단적 생각을 고집할 수 있었다.”라는 구절을 고려할 때,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전문적인 문제를 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코페르니쿠스는 그 전문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지구의 운동을 도입하게 되었으나, 전보다 개선된 해답을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쿤의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정확히 어떤 문제를 풀다가 지구의 운동을 도입하게 되었는지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다. 즉 그의 주장은 순수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이론적 구조를 비교할 때, 전자에서 후자로의 전환은 행성들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예측하는 문제와 상관이 없다. 지구 중심의 1주원(deferent)-1주전원(epicycle) 체계와 태양 중심의 체계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관한 한 완벽하게 경험적으로 동등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부록 1을 참고할 것).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괴물 같음을 발견한 것은 수리 천문학이었지 우주론이나 철학이 아니었으며, 그가 지구를 움직이게 된 것은 순전히 수리 천문학의 개혁 때문이었다.”는 쿤(2016, 276쪽)의 말은 우리를 오도한다. 즉 지구의 운동은 정량적인 문제보다는 정성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6]

쿤의 해석에 대한 역사적 비판들

역사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제안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는 토머스 쿤의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공격했다. 첫째는 코페르니쿠스가 활동할 당시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이고, 둘째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체계를 제안한 직접적인 동기에 관한 문제이다. 이 장에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전개

깅거리치(Gingerich 1993b)는 쿤이 언급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쿤은 정확성을 대가로 내준 복잡성의 증가를 위기의 징표로 해석했지만, 깅거리치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는 정확성의 증가도 복잡성의 증가도 없었다. 깅거리치가 직접 수행한 계산에 따르면, 13세기 발간된 천문력 『알폰소 표(Alfonsine Tables)』와 15-16세기에 발간된 천문력들[7]은 부수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원래의 순수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즉 이심(eccentric), 대심(equant), 1주원-1주전원 체계에 기반해 있으며, 사용된 매개변수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값과 거의 동일했다(197-198쪽). 이는 이슬람과 중세 유럽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들이 정확성 향상을 위해 복잡성을 증가시켰다는 쿤의 얘기가 신화에 불과함을 폭로한다.[8]

그렇다고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아무런 발전도 변화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표준적인 천문학사 문헌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적용 및 그에 대한 연구는 유럽보다는 이슬람 천문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9] 그들은 종교적 목적에서 정확한 천문학을 요구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바로 그에 부합하는 천문학이었다.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적용하는 데 필요한 매개변수를 구하기 위해 거대한 천문대를 건립하거나 휴대용 관측도구 ‘아스트롤라베’를 제작해 행성의 위치를 관측했다.

이슬람의 천문학자들이 실용적인 목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철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비판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그 주석가’로 알려진 12세기 이슬람 철학자 이븐 루시드(Muhammad ibn Rushd, 또는 Averroes, 1126-98)는 “우리 시대의 천문학[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에서 유도되는 것은 하나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발전해온 모형들은 계산과는 일치하지만 실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라며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관측과는 일치하더라도 참된 우주를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제자 알 비트루지(Abu Ishaq al-Bitruji, 또는 Alpetragius)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원-주전원 모형 대신 에우독소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 천구 모형을 진지하게 추구했다.[10] 알 비트루지의 시도는 정량적으로 불만족스러웠으며 천문학자들로부터 무시되었지만, 중세 라틴어권 유럽의 철학자들에 많은 공감을 받아 13세기초에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시대까지도 대학에서 널리 논의되었다.

이슬람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을 개선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주된 관심 역시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사이의 충돌에 있었다. 카이로의 천문학자 이븐 알하이탐(Ibn al-Haythan, Alhazen, 965-1040c)은 프톨레마이오스 모형에 딱딱한 천구를 도입하였고(이는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천문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각각의 천구는 단일한 운동만 할 수 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서 부등속 운동을 야기하는 ‘대심(equant)’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3세기 마라가(Maragha, 오늘날의 이란 북부) 지역의 천문학자 알 투시(Nasir al-Din al-Tusi, 1201-1274)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대심’을 2개의 미세 주전원(투시 커플)으로 교체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이븐 알 샤티르(Ibn al-Shatir)는 이를 더 개량했다(대심과 투시 커플에 대해서는 부록 2를 참고할 것). 이러한 문제의식과 해법은 모두 코페르니쿠스가 대심을 등속 원운동으로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사용한 방법과 매우 유사한데, 스워들로우(Swerdlow 2004)를 비롯한 일부 역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어떤 경로로든 그 방법을 입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림 1] 3개의 외행성과 금성의 운동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이론. 행성의 주전원은 딱딱한 천구(검은색) 속의 빈 공간(흰색)에서 굴러다니는 것처럼 묘사된다. Peurbach (1473)에서 가져옴.

반면 중세 라틴어권 유럽의 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12세기에야 접했으며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만 대략 300년이 걸렸다. 라틴어권 유럽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수용 과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11] 첫째,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완벽하게 소화한 인물은 극히 소수였으며,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부정확성이나 복잡성을 개선하기보다는 일단 그것을 이해하여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스워들로우(Swerdlow 2004, 85쪽)는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보급, 해설이나 천문력 제작에 힘쓴 인물은 있을지언정,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개선을 위해 노력한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12] 예컨대 천문학 연구자에 가장 근접한 게오르그 포이어바흐(Georg Peurbach, 1423-1461)와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1436-1476)의 저서 『행성들의 새 이론(New Theories of the Planets)』과 『알마게스트의 요약서(Epitome of the Almagest)』조차도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연구’보다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알마게스트』에 담긴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중세 유럽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재구성하여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마게스트』에는 (너무나 당연하여) 짧게만 다루어졌던 정리들이 그들의 저서에서는 비중 있게 다루어지기도 했는데, 예컨대 레기오몬타누스의 『요약서』에서는 “주원-주전원 모형”이 “움직이는 이심 모형”과 동등하다는 정리가 원래보다 비중있게 다루어졌다(그림 2와 3 참고). 스워들로우(Swerdlow 1973, 471-480쪽)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체계를 유도할 때 바로 이 정리에 의존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중세 라틴어권 유럽 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를 쓸 당시에 비해 물리학과 천문학 사이의 부조화에 훨씬 큰 관심을 쏟았다.[13]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동심 천구 모형)과 잘 어울리지 않으며 물리적으로 구현되기 어렵다는 점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마게스트』를 쓸 당시부터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실용적인 천문학은 직업적 천문학자들과 점성술사들에게 널리 수용되는 대신, 그 체계가 물리적으로 그리고 우주론적으로 부적합하다는 문제는 묵인되었었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고대 그리스의 저작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새로이 번역되고 그에 대해 탐구하는 대학이 만들어지자, 중세 유럽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 모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14]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대한 이븐 루시드의 비판적 논평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주전원의 타당성이나 행성 모형에 확실성이 원리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대학의 어린 학부생들에게 제공되는 표준적인 토론거리였다.[15] 이러한 태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정밀하게 소화하려는 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포이어바흐의 『행성들의 새 이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행성 운동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적인 모형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천구 모형을 함께 그려 넣었다(그림 1).[16]

물리학과 천문학 사이의 충돌에 대한 유럽인들의 높은 관심의 흔적은 동심 천구 모형의 부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동심 천구 모형은 그 부정확성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프라카스타로(Fracastaro)와 아미치(Amici)는 동심 천구를 79개나 활용한 천문학적 모형을 부활시켰다[17] 물론 그 모형은 정확성 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므로, 그 모형을 부활시킨 동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부정확성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들의 동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사이의 충돌에 있었고, 그들은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 천구 모형을 보완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만큼의 정확성을 얻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의 반대 방향에서 출발했다. 그는 관측과 일치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보완하여 그것의 정확성은 보존한 채 그것의 물리적 실현가능성을 높이고 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행성 운동의 물리적 원인에 대한 관심은 태양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포이어바흐는 『행성들의 새 이론』에서 “여섯 행성의 운동은 태양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태양의 운동은 다른 행성들의 운동의 공통된 거울이자 척도와 같은 것임이 분명하다.”[18]라고 말함으로써, 태양과 다른 행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물론 태양과 다른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성분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러한 사실을 재현하기 위해 행성마다 그것의 원운동 중 하나를 태양의 운동과 동기화시키는 기하학적 해결책을 제시한 채 마무리한 반면(부록 1), 포이어바흐의 언급은 그러한 동기화된 운동의 물리적 원인을 탐색하며 태양을 그 후보로 제시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언급은 코페르니쿠스가 다른 행성 운동의 중심을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Aiton 1987, 9쪽).

태양 중심 체계의 제안 동기

깅거리치(Gingerich 1993b)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복잡성과 정확성은 대동소이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원래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태양(지구), 달, 행성들의 경도 메커니즘에 필요한 원의 수는 각각 18개와 15개이다(197쪽).[19] 이 비교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보다 더 복잡한 체계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에 기반한 천문력과 코페르니쿠스에 기반한 천문력은 그 정확성의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194-196쪽). 이러한 사항들은 코페르니쿠스의 동기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부정확성이나 복잡성 때문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20] 그렇다면 무엇이 동기였을까?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으로 태양 중심 체계를 발표했던 원고 『코멘타리올루스(Commentariolus)』의 서두에는 그가 태양 중심 체계를 고안하게 된 동기가 꽤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를 비롯해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널리 수용된 행성 이론은 수치적으로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과] 일치함에도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였다. 왜냐하면 이 이론은 모종의 속도 조절용 원(equalizing cirlcles, 대심원)—이를 통해 행성은 주천구 내에서도 그것의 중심에 대해서도 균일한 속도로 움직이지 않게 된다—을 가정하지 않으면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이론은 충분히 완벽하지도 충분히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원들로 구성된 보다 합리적인 모형—모든 원들이 그 자체로는, 완벽한 운동의 원리가 요구하는 대로, 균일하게 운동하면서도 모든 겉보기 불규칙성이 나올 수 있는—을 찾을 수 있을지 차분히 생각하곤 했다. 이 엄청나게 어렵고 거의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공략하다가, 마침내 나는 다음의 몇몇 가정들을 전제할 경우 어떻게 그것이 이전에 제시되었던 것보다 더 적으면서도 더 적합한 장치들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21]

이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만족하는 반면 그것이 등속 원운동의 원리를 위반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불만족스러워 했으며,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형을 찾고자 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코페르니쿠스는 ‘대심’을 제거하여 등속 원운동의 합성만으로 이루어진 모형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해법은 ‘대심’을 ‘투시 커플(Tusi-couple)’이라 불리는 2개의 미세 주전원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부록 2를 참고할 것).[22] 그러나 태양 중심 체계의 제안 동기는 이것만으로 해명되기 어려운데, 애초의 연구 동기였던 부등속 원운동의 문제는 태양 ‘투시 커플’의 도입만으로도 해결되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투시 커플’의 도입이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원-주전원 모형’보다 그와 동등한 ‘움직이는 이심 모형’을 선호하도록 이끌었다고 추측한다.[23] 예컨대, 스워들로우(Swerdlow 1973, 471쪽)는 1차 불규칙성(first anomaly)[24]의 해법으로 투시 커플을 주원-주전원 모형(그림 2a)의 C1에 덧붙이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이심 모형(그림 3)의 P에 덧붙이는 것이 더 간편하게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그는 움직이는 이심 모형의 도입이 1차 불규칙성과 2차 불규칙성(second anomaly)[25]을 서로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클러턴-브록(Clutton-Brock 2005)은 주원에 투시 커플을 추가했을 때 딱딱한 천구들이 서로 교차하지 않으려면 ‘움직이는 이심 모형’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스워들로우와 클러턴-브록의 견해는 미세하게 다르긴 하지만 다음의 결론은 동일하다. 즉 주원-주전원 모형과 움직이는 이심 모형이 기하학적으로는 동등하지만, 투시 커플을 추가할 경우 물리적 구현 가능성이나 분석의 용이성 면에서 움직이는 이심 모형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움직이는 이심 모형(그림 3)을 그리고 나면, 각 외행성의 이심(C2)은 태양과 동일시되기 쉽다.[26] 그림 3에서 외행성의 이심 C2는 항상 지구와 태양을 잇는 직선 ES 위에 있기 때문에, 모형의 비율은 유지한 채 크기만 조절하면 이심 C2의 위치를 태양 S와 일치시킬 수 있다. 내행성에 대해서는 주원-주전원 모형을 이용해 유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원-주전원 모형(그림 2b)에서 내행성의 주전원의 중심 C1은 언제나 지구와 태양을 잇는 직선 ES 위에 있기 때문에, 모형의 비율은 유지한 채 크기만 조절하면 주전원의 중심 C1의 위치를 태양 S와 일치시킬 수 있다. 이러한 크기 조절 작업은 결국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태양이 나머지 행성 궤도의 중심이 되는 체계를 만들어내며, 이 체계에서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나머지 행성의 궤도 크기를 측정하기 위한 공통된 척도로 이용될 수 있다.

[표 1] 주전원/주원의 비율(r/R)과 지구-태양의 거리를 공통된 척도로 사용했을 때의 궤도 크기(R’). 이때 지구-태양의 거리는 25로 설정되었다. 각 행성에 대한 r/R의 수치들은 코페르니쿠스의 노트에서 가져온 것이지만(Swerdlow 1973, 428쪽), 수성의 수치는 Goddu (2006), 49쪽의 추정치를 가져왔다.
행성 r/R R'
화성 0.6583 38.25
목성 0.1917 130.3
토성 0.1083 230.8
금성 0.7200 18
수성 0.3760 9.4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행성들의 순서에 대해 간략히만 언급할 뿐, 각 행성 천구의 실제 크기에 대해 함구했었다.[27]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원-주전원 모형(그림 2)은 각 행성의 주원의 반지름 R(EC1) 대 주전원의 반지름 r(C1P)의 비율 r/R만을 제공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부터 거의 고정되어 있던 이 값들은 표 1의 왼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모형의 크기 조절을 이용하면 지구-태양의 거리 r′(ES)을 기준으로 태양을 도는 행성들의 궤도 크기 R′를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으며, r′=25로 가정했을 때의 계산 결과는 표 1의 우측 열에 기록된 값들과 같다.

외행성 :
내행성 :

이렇게 완성된 모형은 하나의 행성에 대한 모형이 아니라 모든 행성을 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모형으로, 각 행성 천구의 크기는 태양 천구라는 공통 척도를 이용해 결정되어 있다. 또한 이 모형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을 둘고 나머지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티코 체계로 간주될 수 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여기서 태양을 정지시키는 대신 지구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태양 중심 체계를 발견하게 되었다(Swerdlow 1973; Clutton-Brock 2005; 부록 1을 참고할 것).

당연히 이러한 발견 시나리오는 상당 부분 추측에 근거하고 있으며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태양 중심 체계의 발견 동기에 대해 두 역사학자의 공유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부등속 운동에 대한 불만은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를 착수시킨 분명한 원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태양 중심 체계의 도입을 설명할 수 없다. 둘째, 딱딱한 천구에 대한 믿음이 새로운 모형의 사용과 선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주원-주전원 모형 대신 움직이는 이심 모형을 선택하거나, 티코 체계 대신 태양 중심 체계를 선택할 때, 천구들이 딱딱하기 때문에 서로 교차할 수 없다는 생각이 특정한 선택을 이끌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태양 중심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경험적으로 거의 동등한 대안적 체계를 찾는 기하학적, 물리적 탐색 과정에서 도출되었다. 따라서 다양한 기하학적 모형들 사이의 수학적 동등성에 대한 알려진, 혹은 선배 천문학자에 의해 강조된, 증명들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태양 중심 체계의 채택 근거

물론 이러한 과정에 의한 결과물이 코페르니쿠스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태양 중심 체계는 코페르니쿠스의 노트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행히도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발견한 태양 중심 체계에 매우 만족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얘기될 수 있다.[28]

첫째, 태양 중심 체계는 지구의 운동이라는 공통 원인을 이용해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 통합된 설명을 제공한다. 행성들의 운동이 태양과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외행성의 경우 그 주전원이 태양과 동일한 각속도로 돌게 했고, 내행성의 경우 그 주원이 태양과 동일한 각속도로 돌게 설정해 두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그 모든 현상과 함께 행성의 여러 특이한 특징들이 태양에 대한 지구의 공전이라는 하나의 공통 원인에 의해 쉽게 설명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29]

둘째, 태양 중심 체계는 행성 천구의 순서와 크기를 확정하며, 행성의 순서가 속도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잘 만족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각 행성에 대해 별도의 모형을 제공할 뿐 통합적인 모형을 제공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행성들의 순서를 확정할 수 없었으며, 확정한다 하더라도 수성, 금성, 태양처럼 주기가 1년으로 같지만 천구의 크기가 다른 행성들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체계는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공통된 척도로 삼아 모든 행성 천구의 크기를 확정지을 뿐 아니라, 그에 기초한 공전 주기는 행성 천구의 크기가 커질수록 자연스럽게 증가했다.[30]

즉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체계가 두 가지 문제, 즉 (1) 행성 운동이 태양과 동기화되어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2) 행성들은 어떤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좋은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이론을 채택한 것이다.

소결

논의의 편의를 위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이라는 오래된 구분을 이용해보자. 우선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체계를 발견한 동기에 주목해보자.

첫째, 코페르니쿠스의 불만 대상인 대심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탄생과 함께 있었던 장치로서, 만약 그것 자체가 위기를 초래한 것이라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AD 150년 경부터 위기였던 것이 된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의 해결책 ‘투시 커플’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대심 자체가 만들어낸 위기에 의한 대응으로 보기 어렵다. 만약 위기가 있었다면 대심 자체가 아니라, 대심을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무언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천문학자들과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환경에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의 충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정상과학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쿤에게 정상과학의 위기는 한 전문 분야 내부의 기술적인 붕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두 전문 분야 사이의 충돌에 가깝다.[31]

둘째, 쿤이 위기의 전형으로 삼은 것들은 대부분 관찰과의 불일치에 의존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중시한 문제들은 관찰과의 불일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가졌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대한 불만은 등속 원운동이나 딱딱한 천구와 같은 물리적 믿음과의 충돌에 의존했다. 즉 이는 순수히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내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천문학 외적인 믿음과의 충돌에 의존한다. 또한 이 문제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초창기부터 존재한 문제였다. 다만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이에 주목할 때, 코페르니쿠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는 천문학 내적인 것으로 보기 어려워진다.

셋째, 투시 커플의 도입이나 움직이는 이심 모형의 도입은 이론의 대체보다 이론의 재정식화로도 해석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대심을 대신할 수 있도록 그와 수학적으로 거의 동등한 투시 커플을 도입하였고, 주원-주전원 모형 대신 그와 수학적으로 동등한 움직이는 이심 모형을 도입했다. 쿤은 정상과학적 연구의 한 가지 유형으로 이론의 재정식화를 든 적이 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는 정상과학을 한 것인가?

넷째,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그 직전에 이루어진 전문적 활동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는 포이어바흐나 레기오몬타누스에 의해 재구성된 알마게스트를 이용했으며, 아마도 최근에 입수된 이슬람권의 결과물들을 차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직전까지 이루어진 성과가 없었더라도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즉 과학혁명에서 누적에 의한 효과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번에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중심 체계를 채택한 이유에 대해 주목해보자.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체계가 두 가지 문제, 즉 (1) 행성 운동이 태양과 동기화되어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2) 행성들은 어떤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이론을 채택했다. 이 두 가지 문제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문제였다. 따라서 만약 이것이 위기를 초래한 것이라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AD 150년경부터 위기였던 셈이 된다. 코페르니쿠스가 ‘괴물’이라고 비난한 천문학의 상태는 천문학적 연구의 누적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 만들어낼 때부터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만약 위기가 있었다면 그 문제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외부의 무언가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쩌면, 그 전까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를 해결하고 나자,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심각한 결함을 가진 것으로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위기 없는 혁명의 모형들

위와 같은 역사적 검토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쿤의 주장과는 달리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로부터 촉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에 이르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전체를 고려한다면, 모종의 위기가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위기에 의해 태양중심설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거꾸로 태양중심설의 출현이 위기를 낳고 그 위기가 나머지 변화를 낳았다는 식의 설명이 가능하다. 실제로 쿤(2016, 7장) 본인도 태양중심설의 출현이 어떻게 우주론과 역학의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기’라 부르고 그것이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라는 정상과학의 누적적 성과에 의존하는 쿤식의 위기와는 거리가 멀며,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출발점이 되는 태양중심설의 출현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위기를 과학혁명의 선행조건으로 삼지 않는 과학혁명의 대안적인 모형이 필요하다. 즉 과학혁명은 적어도 때로는 위기 없이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위기 없이 어떻게 혁명이 시작될 수 있을까?

퍼즐 풀이의 예기치 않은 결과

니클즈(Nickles 2003b)와 홍성욱(1999b)에 따르면, 혁명은 때로 위기의식과 무관하게 정상과학 하에서 수행되는 퍼즐 풀이의 예기치 않은 결과로 발생한다. 그들은 흑체 복사 문제와 양자 개념의 등장을 다룬 쿤 본인의 사례 연구(Kuhn 1978)를 바탕으로 이러한 주장을 한다. 쿤의 연구에 따르면 플랑크는 흑체 복사 문제를 풀기 위해 볼츠만이 개발한 방법을 이용하였다. 볼츠만은 분자들의 속도 분포를 확인하기 위해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 총합 E를 상정했다. 그리고 확률 이론을 도입하기 위해 0에서 E사이를 매우 작은 구간으로 가상적으로 나누고 분자들을 무작위로 구간들에 분배한 후, 확률 이론을 사용하여 개연성이 높은 분포를 알아내고자 했다. 플랑크는 볼츠만이 분자들의 분포를 결정하는 데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흑체 복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었다(쿤 1997, 206-207쪽). 플랑크의 문제 풀이가 마무리되었을 때 그의 답은 기존의 전통에서 급격하게 벗어난 혁명적 함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쿤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니클즈(Nickels 2003b)와 홍성욱은 정상과학 전통 내에서의 퍼즐 풀이로부터 혁명적인 함축을 가진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성욱(1999b)은 흑체 복사 문제가 당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관심을 끈, 즉 위기를 초래할만한 변칙 현상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당대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이 없었으며, 심지어 플랑크 또한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성을 알지 못했다. 즉 플랑크가 해결하고자 했던 흑체 복사 문제 자체는 당시에 심각한 변칙으로 인식되지 않은 평범한 퍼즐이었다는 것이다. 플랑크의 퍼즐 풀이로부터 혁명적인 의미를 알아본 것은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였다. 따라서 홍성욱은 양자 혁명의 시초가 1900년이 아니라 1906년이라고 주장한다(홍성욱 1999b, 158-159쪽; Nickels 2003b, 154-155쪽)

나아가 홍성욱(1999b, 155쪽)은 코페르니쿠스 혁명 또한 지극히 정상과학 내에서의 퍼즐 풀이에서 나온 것이며, 혁명을 당기는 문제들과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해결되는 퍼즐과의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워들로우의 연구(Swerdlow 1973)를 인용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체계가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니클즈와 홍성욱의 해석에 따르면, 그동안 혁명적인 인물로 간주된 플랑크와 코페르니쿠스는 충실하게도 정상과학의 기술적인 퍼즐을 정상과학 전통 내에서 풀고자 노력했을 뿐이며, 그 과정에서 혁명적 함축을 가진 이론이 출현했을 뿐이다.

이러한 니클즈와 홍성욱의 해석은 혁명적 제안이 전문적인 문제 풀이의 축적만으로도 등장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제안이 전문적인 문제 풀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4.2절의 역사적 연구들을 잘 포용한다. 그러나 과연 코페르니쿠스가 해결하고자 노력한 문제들을 정상과학의 퍼즐로 간주할 수 있을까? 4.4절에서 정리했듯이,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하여 많은 천문학자들이 풀고자 했던 문제들은 정확성과 같은 프톨레마이오스 내적인 문제들이라기보다는 등속 원운동이나 딱딱한 천구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적 가정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충돌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매우 전문적인 문제를 풀다가 태양중심설에 도달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가 푼 문제를 단순히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내의 평범한 퍼즐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32]

물론 정상과학을 보다 넓게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지적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을 묶어 하나의 정상과학으로 넓게 규정한다면, 둘 사이의 충돌에 기인하는 문제들을 정상과학의 퍼즐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양립하지 않는 두 이론에 기반한 연구를 정상과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이는 쿤 본인의 판정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쿤은 그 둘을 준-독립적인 전문성을 지닌 별개의 패러다임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Kuhn 1963, 388쪽).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제안이 퍼즐 풀이에 기인한다는 해석은 그가 푼 문제의 성격을 오도하거나 함구함으로써, 혁명의 중요한 원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창의적 해법

한편 알렉산더 버드(Bird 2000)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 없는 혁명을 지지한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창안을 예로 든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경우 특수 상대성 이론과 달리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창안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버드에 따르면 이러한 이유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창안될 당시 어떠한 변칙현상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로 인해 여러 학자들이 새 이론을 창안하고자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Bird 2000, 58쪽).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이 혁명을 일으킨 연유는 무엇인가? 버드는 아인슈타인이 E=mc2과 같이 남들이 보지 못한 연관관계를 보았다는 점에서 그의 특유의 천재성, 창조성 때문에 위기 없는 혁명이 일어났다고 답한다(Bird 2000, 58쪽). 이러한 버드의 모델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적용한다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재성과 창조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버드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10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태양중심설이 제안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등속 원운동의 원리를 위반하는 대심을 제거하고자 했으며, 또한 그는 결과적으로 태양과 행성 사이의 동기화된 운동 문제와 행성들의 순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프톨레마이오스의 시절부터 알려져 있던 매우 오래되고 익숙한 문제였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천재성과 창조성에만 의존하여 혁명을 설명하려면 긴 시간 동안 코페르니쿠스만한 천재성과 창조성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는 좋은 답이 될 수 없다.

둘째, 버드의 모델은 코페르니쿠스의 선배들이 쌓아 올린 ‘축적된 자원’을 경시한다. 4.4절에서 정리했듯이,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그 직전까지 축적된 전문적 활동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는 포이어바흐나 레기오몬타누스에 의해 재구성된 알마게스트를 이용했으며, 아마도 당시에 입수된 이슬람권의 결과물들을 차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직전까지 이루어진 성과가 없었더라도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들이 축적한 자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결코 맨땅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그의 천재성, 창조성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패러다임 충돌의 결과

우리의 역사 연구를 포괄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각각을 별개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두 패러다임의 충돌 또는 상호작용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다고 보는 관점이다. 역사학자로는 하이델버거(Heidelberger 1976)가 이러한 입장을 처음 제안한 이래 호스킨 등의 역사학자들(Hoskin 1997, 2003; 헨리 2003)도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설명하는 데 이러한 관점을 중요하게 채택하고 있으며, 철학자로는 파이어아벤트(1997)가 이러한 입장을 모든 과학혁명에 대해 적용하고 있다.

파이어아벤트(1997, 182-183쪽)에 따르면 혁명을 위해서는 증식의 원리에 따라 양립불가능한 패러다임들이 존재해야 하며, 이러한 패러다임들 사이에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고전 물리학을 몰락시킨 특수 상대성 이론은 별개의 패러다임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맥스웰 이론과 뉴턴 역학 사이의 긴장과 상호작용 때문에 출현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용 양자(quantum of action)의 발견은 역학, 열역학, 파동광학 같은 양립 불가능한 분야들의 상호작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이 분야들의 준-독립성을 존중했다면 그러한 탐구들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혁명적 진보를 산출한 것은 패러다임 하의 퍼즐을 푸는 데 주의를 기울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아니라 이론 증식과 양립불가능한 이론들 사이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들이다. 퍼즐 풀이에 집중하여 다른 패러다임을 산출하는 데 노력하지 않거나, 다른 패러다임과의 상호작용에 무관심하다면 결코 혁명은 산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이어아벤트의 패러다임 충돌 모형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사이의 충돌에 기인한 문제들이 태양중심설의 창안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연구들을 잘 만족시킨다.[33]

그러나 패러다임 충돌 모형은 양립불가능한 패러다임의 오랜 공존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만약 대다수의 학자들이 두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을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어떻게 두 패러다임이 공존할 수 있겠는가?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심지어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에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우주론이 양립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정을 하고 오랜 기간 공존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행성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우주론은 자연 현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방식으로 무시될 수 있는데, 대표적인 방식은 학문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34] 실제로 중세 유럽의 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자연 현상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얘기하는 반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단지 현상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유용한 도구로만 간주되었다. 이러한 방식에서 두 패러다임의 충돌은 무시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둘 중 하나인 천문학은 진리를 추구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도구로서 맡은 일만 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을 심각하게 고려하여 해결하는 노력만큼이나 충돌을 무시하는 전략 역시 중요하다. 왜냐하면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은 좋은 해법이 등장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를 제거하려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며, 이는 패러다임 사이의 상호작용의 전제인 공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존을 위해서는 충돌을 무시하는 관용의 전략도 필요하며, 실제로 그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은 오랜 기간 공존하며 상호작용의 이점을 누릴 시점을 기다릴 수 있었다.[35]

그렇다면 상호작용의 이점은 언제 누릴 수 있는가? 애초에 상호작용을 통해 곧장 해법이 도출되었다면 혁명이 일어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축적이 필요한데, 패러다임 충돌 모형은 각자의 패러다임 내에서 수행되는 전문적인 연구의 축적이 담당하는 역할을 경시하는 단점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충돌 때문에 나타나는 동일한 문제들을 풀더라도 어떤 연구 전통에서 문제를 접근하는지에 따라 문제 풀이 방식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이 가정하는 행성의 부등속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우주론에서 가정하는 천구의 등속 원운동과 충돌한다는 문제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전통에 속한 학자는 동심 천구 모형에 천구의 개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대신 관찰과의 일치는 조금 포기하려 할 것이다. 동심 천구를 79개나 활용한 프라카스타로(Fracastaro)와 아미치(Amici)의 모형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전통에 속한 학자는 관찰과의 일치는 포기할 수 없기에 주원-주전원과 이심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주전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다. 바로 알 투시의 ‘투시 커플’ 해법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그들은 주원-주전원 및 이심을 사용한 기하학적 모형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천구 모형과 화해시키기 위해, 기하학적 원들에 딱딱한 천구를 배정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고민했다. 동일한 전통에 속해 있던 코페르니쿠스는 그 전통의 직계 선배들이 이룬 성취들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즉 각 패러다임이 푸는 문제들은 다른 패러다임과의 충돌에 기인할 수 있더라도, 그 문제의 풀이 방식은 분명히 개별 패러다임에 따라 구분될 수 있으며 축적되는 성격을 가진다. 또한 개별 패러다임 내에서 축적된 성취 없이는 상호작용의 이점을 누리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에게는 보다 절충적인 모형이 필요하다.

대안적 모형 : 자원의 축적과 오래된 문제의 해결

쿤의 정상과학만으로는 혁명이 일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패러다임 사이의 상호작용이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경우 천문학자들이 천문학과 물리학의 충돌을 무시한 채 일식을 예측하고 달력을 계산하는 데만 몰두했다면 태양중심설 창안은 더욱 더 요원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이어아벤트의 이론 증식만으로도 혁명이 일어나기 힘들다. 패러다임 내의 전문적인 연구 성과가 축적되지 않은 경우 문제 풀이에 활용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창안한 것은 선배들이 창안한 기술적인 도구들을 착실히 학습하고 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쿤의 정상과학 개념과 파이어아벤트의 이론 증식을 합한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선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패러다임은 관용에 의해 공존한다. 공존 중인 각 패러다임은 관찰 또는 인접 패러다임과의 충돌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퍼즐 삼아 풀어간다. 각 패러다임의 종사자들은 그 문제를 자신의 패러다임 고유의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고 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 풀이를 ‘퍼즐 풀이’라고 부른다면, 각 패러다임은 그러한 퍼즐 풀이의 과정을 통해 향후 문제 풀이의 자원을 축적한다. 만약 충분한 자원이 축적되고 나면, 이를 학습한 후속 학자들은 인접 패러다임과의 충돌에 의한 문제들 중에서 오랫동안 방치됐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해결이 결국 혁명적 결과를 산출하게 된다.

이러한 방법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사례에 적용해 보자. 코페르니쿠스의 직계 선배라 할 수 있는 이슬람과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종사자로서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의 충돌에 의해서 발생하는 물리적 메커니즘의 부재나 부등속 원운동의 문제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고유한 방법, 즉 원운동의 조합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천구 모형이나 투시 커플과 같은 해법들이 천문학적 문제 풀이의 자원으로 축적됐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렇게 축적된 자원인 천구 모형과 투시 커플을 활용해 천문학의 오랜 난제였던 행성 천구들의 크기와 순서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난제였던 태양과 동기화된 행성 운동의 원인까지 답할 수 있는 태양 중심 체계를 얻게 되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과 물리학과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 오래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시작시키는 단단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체계를 도입하고 정당화하는 데 천문학 외의 분야에서 축적된 자원도 활용했다.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 사이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제안했었고, 그 과정에서 지구의 자전 가능성이나 우주의 중심이 유일하지 않을 가능성들이 철학적 논변의 형태로 제안되고 대학의 철학 교육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렇게 축적된 철학의 자원은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태양 중심의 우주에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상상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즉 문제를 풀기 위해 어느 패러다임의 축적된 성과이든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니클즈(Nickles 2003b)와 홍성욱(1999b)이 분석했던 흑체 복사와 양자 혁명의 사례를 살펴보자. 19세기에 빛은 에테르의 파동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흑체 복사 문제는 파동론의 고유한 방법으로 풀려야 ‘정상적인 퍼즐 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플랑크는 열 현상을 다루기 위해 볼츠만이 개발한 기체 분자 운동론의 방법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었고, 이것이 혁명적 귀결을 낳았다. 따라서 플랑크가 풀던 흑체 복사 문제를 평범한 퍼즐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볼츠만의 방법을 차용한 플랑크의 문제 풀이까지 평범한 퍼즐 풀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 사례는 정상과학 내에서 이루어진 퍼즐 풀이의 예기치 않는 결과라기보다 별개의 패러다임 내에서 축적된 자원이 패러다임의 경계를 넘어 이동함으로써 나타난 예견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사례도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뉴턴 역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버드의 주장은 옳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해결하고자 한 문제들 중 하나는 원거리 작용인 중력의 원인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관성과 절대공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두 문제 모두 뉴턴 역학 패러다임과 형이상학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 문제로, 뉴턴 역학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인식된 매우 오래된 문제였다.[36] 그렇다면 왜 하필 한참 뒤에야 아인슈타인에 의해 해결되었는가? 이에 대해서 답하려면 새로운 논문 한 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필요에 의해 개략적인 답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뉴턴 역학의 경험적 위기와 무관하게, 형이상학적인 고찰은 꾸준히 축적되었고, 특히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에 의해 정식화된 질문과 원리가 아인슈타인에게 질문과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둘째, 19세기 전자기학 분야에서 장이론이 완성되어, 중력을 인접 작용의 방식으로 풀 수 있는 잠재적 자원이 축적되었거나 중력 역시 인접 작용으로 풀 수 있어야 한다는 압력을 제공했다. 셋째, 역학적 관심과는 무관한 동기로 발전한 새로운 수학 이론이 유용한 자원으로 제공되었다. 수학, 역학, 전자기학, 형이상학 등 인접 분야들마다의 축적된 성과가 오래된 문제의 풀이를 위한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한 축적된 성과가 없었다면 일반상대성 이론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앞서 어떠한 위기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였으며, 이 위기 없는 혁명의 발단을 이해하기 위해 양립불가능한 두 패러다임인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공존과 상호작용을 함께 고려해야 함을 보였다. 첫째, 각 패러다임은 둘 사이의 충돌을 어느 정도 무시함으로써 각자의 정상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문제 풀이의 자원을 축적할 수 있었다. 둘째, 충분한 자원이 축적되자 두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에 의한 문제들 중에서 오랫동안 방치됐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태양중심설을 낳았으며, 그것이 긴 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는 모든 과학혁명이 위기 없는 혁명임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석한 태양중심설의 탄생 방식은 단지 역사적 우연으로 보이진 않는다. 만약 양립불가능한 두 패러다임이 둘 사이의 충돌을 완전히 해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이는 둘 중 하나를 제거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나중에 필요할 자원의 축적을 방해하기 쉽다. 반대로 패러다임 간 충돌을 무시하고 자신의 패러다임에 속한 문제 풀이에만 집중했다면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에 의한 문제들은 영원히 방치되기 쉽다. 따라서 이 모형은 위기 없는 혁명이 시작되는 상당히 일반적인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이 모형을 코페르니쿠스 혁명뿐만 아니라 양자 혁명과 일반 상대성 혁명에도 간단히 적용해 보았으며, 상당한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모형에 대해 두 가지 사항만 상술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의 모형에서 ‘자원’ 개념은 쿤의 변칙현상(anomaly)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쿤에 따르면 변칙현상은 패러다임으로 해결이 잘 안 되는 문제인 반면, 자원은 패러다임으로 해결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변칙현상이 쌓이는 것은 과학자 공동체에게 문제를 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제공하지만, 자원이 쌓이는 것은 과학자 공동체에게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제공한다. 결국 우리는 과학혁명이 불안감의 결과이기보다는 자신감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자들은 불안감에 빠져 새로움을 모색하기보다, 넘치는 자신감에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거나 방치됐던 오래된 문제를 해결한다.

둘째, 우리의 위기 없는 모형은 아주 약한 규범적 지침만을 제공한다. 우리의 모형에 따르면 자원을 활용하여 패러다임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행동은 적절하며, 그뿐만 아니라 패러다임 간의 충돌을 무시한 채 자원을 계속 축적하고 있는 행동 또한 적절하다. 계속된 자원 축적은 언젠가 새로운 문제를 푸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형은 특정 시점에 특정한 과학자가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모형은 과학자 공동체의 수준에서는 아주 약간의 규범적 지침을 제공한다. 여러 패러다임이 양립 불가능하더라도 공존을 허용하는 것이 좋지만, 대신 각각의 패러다임은 자신의 패러다임에 완전히 매몰되기보다는 인접 패러다임과의 충돌에 의한 큰 문제에도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1] 쿤(2013)은 『과학혁명의 구조』 4판의 한국어 번역본이며, Kuhn(1999)는 영문판 3판이다. 이 연구를 위해 영문판과 한국어 번역본을 모두 참고했으나, 앞으로의 인용에서는 한국어 번역본의 쪽수만을 적도록 하겠다.

[2] 쿤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원래 1957년에 출판되어, 1962년에 처음 출판된 『과학혁명의 구조』보다 앞선다. Westman(1994)과 Swerdlow(2004)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과 논평을 제공한다.

[3] “상충하는 권위들을 비교하고 화해시키는 일은 스콜라 사상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 복원된 학문 전통은 고대의 학문 전통에 비해 덜 경험적인 반면, 더 언어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 전통에 포함된 비일관성들 중 하나는 천문학의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천구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주전원과 주원 사이의 명백한 갈등이 그것이다. …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그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5세기 동안 일어난 지식의 자연스러운 진화로 보였던 변화들이 스콜라 학자들에게는 자주 모순들로 보였으며, 그 모순들은 화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이 화해가 힘들 뿐 아니라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 뚜렷한 모순들은 중세 사상의 다른 갈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 그 전통 전체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쿤(2016), 193-197쪽.

[4] 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것은 니콜 오렘의 ‘지구의 운동 가능성’ 논증으로, 그는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믿으면서도, 운동의 상대성 개념과 초보적인 관성 개념을 창안하여 지구가 자전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으며, 따라서 지구의 운동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는 지구의 정지를 증명할 수 없다고 논증했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권에서 지구의 운동을 옹호하는 데 거의 그대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논의는 쿤(2016), 216-221쪽과 그랜트(1992), 110-111쪽을 참고.

[5] 한 익명의 심사자는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붕괴’가 없었더라도 과학자들의 변화된 태도, 명료화 작업, 불만의 토로, 근본적인 것에 대한 논쟁, 대안에 대한 모색이 있었다면 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코페르니쿠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그러한 종류의 위기감이나 고대의 지식 일반에 대한 의심이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여러 문헌(대표적으로는 그래프턴 2000; Eisenstein 1983)에서 찾을 수 있으며, 바로 위에서 인용했듯이 쿤(2016) 역시도 그러한 사실을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천문학 외부의 환경적 변화에 기인한 위기감이 천문학 혁명을 일으켰다면 천문학 내부의 정상과학적 연구는 위기와 혁명을 산출하는 방법론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쿤 식 위기’는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붕괴”로 한정되어야 하며, 그렇게 ‘위기’의 의미를 한정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위기는 없었다.

[6] 코페르니쿠스의 창의성을 쿤의 ‘수렴적 사고’ 개념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있는 이상욱(2019) 역시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상욱은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최고 전문가였기에 그것의 근본적 한계에 인식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지만(69-70쪽), 그의 전문성이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어떠한 근본적 한계를 인식하는데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수렴적 사고를 강조하는 쿤의 견해는 Kuhn(1977b)과 이상욱(2004)을 참고할 것.

[7] 1474년에 뉘렘베르크에서 레기오몬타누스(Johannes Muller von Konigsberg 또는 Regiomontanus, 1436-1476)는 기간 1475~1506년에 대한 천문력 Amlanach nova plurimis annis venturis inservientia를 출판했고, 1499년에 울름(Ulm)에서 스토플러(Johannes Stoeffler, 1452-1530)는 플럼(Pflaum)과 함께 기간 1499~1531년에 대한 천문력을 발간했으며, 1531년 튀빙겐에서 출판된 스토플러의 천문력 Ephemeridum opus는 스토플러가 죽은 뒤 튀빙겐 수학 교수 자리를 물려받은 필립 임서(Phillip Imsser)에 의해 편집되었다. 깅거리치(Gingerich 1993b), 201쪽 주3을 참고할 것.

[8] 깅거리치는 이러한 신화의 극단적인 예로 1969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들고 있는데, 이 사전의 천문학 항목에서는 13세기 천문학에서 각 행성마다 40~60개의 주전원이 필요했다고 적혀있다. 그리피스(Robert I. Griffiths 1988)는 쿤이 말하는 복잡성이 원의 증가가 아닐 수도 있다고 깅거리치를 반박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쿤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코페르니쿠스]는 점점 더 많은 원을 추가하고 있는 그의 선배들이 단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관찰과 억지로 일치시키기 위해 때우고 늘이고 있을 뿐이라고 느꼈으며, 그러한 땜질과 왜곡이 필요하다는 바로 그 점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믿었다.”(쿤 2016, 139-140쪽)

[9] 아래의 서술은 표준적인 천문학사 개설서인 호스킨(Hoskin 1997), 50-63쪽과 호스킨(Hoskin 2003), 23-29쪽의 서술을 요약한 것이다.

[10] 동심 천구 모형에 대해서는 쿤(2016), 103-110쪽을 참고하라.

[11]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세한 수용 과정은 Hoskin (1997), 68-97쪽과 Hoskin (2003), 31-35쪽을 참고하라.

[12] 이는 중세 라틴어권 유럽의 천문학이 쿤의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쿤(1987)은 천문학은 이론과 관측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자신의 수학적 도구를 통해 개선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정상)과학이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스워들로우(Swerdlow 2004)에 따르면 중세 라틴어권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그러한 방식의 천문학을 수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3] 물리학과 천문학의 충돌과 화해의 관점에서 천문학 혁명을 기술한 초기 연구로는 하이델버거(Heidelberger 1976)를 들 수 있다. 하이델버거는 천문학 혁명을 위기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묘사하기보다 두 패러다임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14] 이는 쿤에 의해서도 강조된 바 있다. “앞선 세기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 역사 감각이 짧아졌기 때문에, 스콜라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거의 동시대인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단일 전통인 ‘고대 학문’의 대가들로 보였고, 그들 체계 사이의 차이는 단일 학설 내부의 비일관성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그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5세기 동안 일어난 지식의 자연스러운 진화로 보였던 변화들이 스콜라 학자들에게는 자주 모순들로 보였으며, 그 모순들은 화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이 화해가 힘들 뿐 아니라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 뚜렷한 모순들은 중세 사상의 다른 갈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 그 전통 전체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쿤 2016, 196-197쪽)

[15] Hoskin (2003), 29-30쪽 참고.

[16] Hoskin (2003), 35쪽.

[17] 그리피스(Griffiths 1988)는 코페르니쿠스가 활동할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위기가 있었음을 보이기 위한 증거로서 여러 버전의 천문학이 난립했음을 보이기 위해 이 사례를 사용하고 있으나, ‘위기’의 의미를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붕괴”로 한정할 때 이는 위기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이 사례가 물리학과 천문학 사이의 충돌에 대한 당시 학자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18] Aiton (1987), 23쪽에서 재인용.

[19] 경도뿐 아니라 위도, 그리고 항성 천구까지 고려한다면 더 많은 원이 필요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코멘타리올루스』에서 “우주 전체 구조와 행성들의 전체 운동을 설명하는 데 총 34개의 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바 있다.

[20] 그리피스(Griffiths 1988)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의 부정확성과 복잡성의 개선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더라도 그것들을 개선하려는 동기를 가질 수는 있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그는 당시의 여러 천문력 제작자들의 노력과 프라카스타로(Fracastaro)와 아미치(Amici)에 의한 동심 천구 모형의 부활 노력을 제시한다. 즉 당시 코페르니쿠스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부정확성 또는 복잡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위기의 징후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변에는 많은 빈틈이 있다. 첫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부정확성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태양 중심 체계 자체는 그것의 해법이 될 수 없었다(부록 1 참고). 둘째,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에 불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있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21] 코페르니쿠스의 『코멘타리올루스』의 도입부. 그 로젠의 영문 번역(Rosen 1937, 125쪽)과 스워들로우의 영문 번역(Swerdlow 1973, 434-436쪽)을 참고하여 번역했다.

[22] 스워들로우(Swerdlow 1973)는 이 새로운 장치가 이슬람 천문학자 알 투시(al-Tusi)에 의해 개발된 것임을 밝혀냈는데, 우리는 이를 그 첫 개발자의 이름을 따서 ‘투시 커플(Tusi couple)’이라고 부를 것이다.

[23] 이러한 변환의 수학적 동등성은 『알마게스트』 12권에도 등장하며, 레기오몬타누스의 『요약서』 12권에서 보다 강조된 바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마도 『요약서』에서 그 힌트를 얻은 듯하다.

[24] 행성 운동의 1차 불규칙성이란 태양과 무관한 불규칙성을 의미하며, 쉽게 말해 등속 원운동을 하는 주원-주전원 체계를 도입하고서도 여전히 남는 오차를 의미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1차 불규칙성의 해법으로 ‘대심’을 도입한 것이다. 부록 2를 참고할 것.

[25] 행성 운동의 2차 불규칙성이란 태양과 관련된 불규칙성을 의미하며, 흔히 행성의 ‘역행 운동’으로 대표되는 행성 운동의 불규칙성을 의미한다. 역행 운동이 태양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내행성의 역행 운동은 태양 전후를 일정한 주기로 셔틀처럼 왕복하는 운동이며, 외행성의 역행 운동은 항상 그 행성이 태양의 정반대편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2차 불규칙성의 해법으로 주원-주전원 체계를 도입한 것이다. 부록 1을 참고할 것.

[26] 스워들로우(Swerdlow 1973)는 코페르니쿠스가 정말로 움직이는 이심 모형을 경유하여 태양 중심 체계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웁살라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노트에 수록된 단어 ‘Eccentricitas’를 들고 있다. 그 노트에는 표 1과 동일한 값들이 주원 대 주전원의 비율이 아닌 Eccentricitas로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 그 노트에 수성에 대한 값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27] 프톨레마이오스의 다른 저작 『행성들의 가설(Hypotheses of Planets)』은 이에 대한 그의 주장과 계산 결과를 담고 있으나,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시대까지는 전래되지 않았었다.

[28]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코페르니쿠스의 논변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서문과 1권, 그중에서도 특히 10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드워드 로젠(Edward Rosen)의 영문 번역판(Copernicus 1992)이 가장 신뢰할만한 번역본이며, 이의 한국어 번역은 (이 사이트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참고할 수 있다.

[29]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권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Copernicus 1992). “이 덕분에 우리는 왜 목성의 순행과 역행은 토성보다는 크고 화성보다는 작게 보이는지, 어째서 금성의 순행과 역행이 수성보다 크게 보이는지, 어째서 이런 방향 전환이 목성보다 토성에서 더 자주 일어나지만 수성에 비해 화성과 금성에서는 덜 자주 일어나는지, 또한 어째서 토성, 목성, 화성이 태양에 가려지거나 낮에 뜰 때보다 태양 반대편에 있을 때 지구에 더 가까운지, 또 특히나 화성이 밤새 빛날 때[즉 태양 반대편에 있을 때]는 그 크기가 목성과 비슷해서 목성과 화성을 단지 화성의 붉은색으로만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때에는 어째서 이등성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주의 깊게 그 운동 궤적을 쫓아야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현상은 동일한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들로, 그 원인은 바로 지구의 운동이다.”

[30]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권 10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Copernicus 1992). “그들[프톨레마이오스 등]은 행성들의 상대 속도에 따라 그 순서가 결정된다는 원리를 위반하지 않고서는 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대안은 두 가지뿐이다. 우리는 지구가 행성들의 정렬 기준이 되는 중심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그 행성들의 정렬 순서도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왜 가장 높은 곳에 목성이나 다른 어떤 행성이 아닌 토성이 배치되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이러한 천체들의 배열[태양 중심 체계] 아래 놓여 있는 우주의 놀라운 대칭성과 다른 방식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천구의 운동과 크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31] 이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의 위기가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레이(Wray 2007)의 논변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 그는 다음의 2가지에 주목한다. 첫째, 그는 당시 천문학의 상태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불만을 드러내는 구절들에 주목한다. 코페르니쿠스의 불만이 위기의 존재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둘째,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등장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불만이 증가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 체계 등장 전부터 위기였던 것은 아니더라도,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등장으로 인해 위기 상태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않다. 첫째, 코페르니쿠스가 당시 천문학의 상태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불만 또는 위기감이 천문학 내부의 전문적인 붕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천문학 외부에 기인한다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의도한 방법론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즉 그러한 위기는 보다 넓은 의미의 ‘지적 위기’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도, ‘쿤 식의 위기’가 될 수는 없다. 둘째,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등장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불만을 낳았다면, 이는 “정상과학이 위기를 낳고”, “위기 때문에 대안이 모색되고 정당화”되는 쿤의 도식보다 “대안의 존재 때문에 기존 이론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는 파이어아벤트의 도식에 더 부합한다(정원호 2017, 30-31쪽). 따라서 쿤의 위기를 보존하려는 레이의 노력은 오히려 정상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쿤식 방법론의 의의를 무너뜨린다.

[32] 니클즈(Nickles 2003b)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게 이해될 필요도 있다. 그는 정상과학을 규칙-기반 추론이 아닌 사례-기반 추론으로 이해하면서, 성공적인 문제 풀이로서의 범례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 퍼즐 사이에서 과학자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경로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쿤의 방식대로 범례에 맞게 문제를 끼워 맞추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제에 맞게 범례를 수정하는 경우이다(169쪽). 그중 두 번째 경로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씨름하는 문제는 기존의 범례를 변형시킬 수 있고, 범례의 미묘한 변화는 예기치 않은 혁명적 함축을 가질 수 있다. 다만, 니클즈는 정상과학에서 다루는 문제의 범위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만약 정상과학에서 다루는 문제의 범위를 넓혀도 된다면, 니클즈의 논의는 우리의 사례를 어느 정도 포용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이슬람 및 유럽의 선배 천문학자들이 씨름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물리적 문제”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범례에 미묘한 변화를 주었고,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수정된 범례를 통해 혁명적 결과를 함축한 문제 풀이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3] 파이어아벤트(Feyerabend 1993)는 『방법에 반대한다(Against method)』 3판을 출판하면서 초판에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발단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14장에 추가했다. 그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창안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관찰 자료들을 무능하게 처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140쪽). 코페르니쿠스의 천문 관찰은 본질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이었으며,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145쪽). 이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위기는 없었다(14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태양중심설을 창안한 것은 대심 때문이었다. 대심을 통해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또다시 겉보기 운동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대심을 제거하고 지구의 운동을 가정함으로서 천문학 영역에서 행성 체계의 모든 부분들을 우아하게 연결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가정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물리학 및 우주론과 충돌하였다(140-141쪽) 이러한 역사적 연구를 토대로 파이어아벤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합리적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논쟁에 기여한 모든 학문 영역들을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44쪽). 그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천문학, 천문표 계산 작업, 광학, 신학 같은 다양한 분야들에서의 발전으로 구성되어 있다(136쪽). 이러한 입장은 정확히 상호작용론적인 견해에 해당한다. 동일한 내용은 정병훈의 번역으로 최근 출간된 『방법에 반대한다(Against method)』 4판, 14장에도 수록되어 있다(파이어아벤트 2019).

[34] 유럽의 중세와 근대 초기 물리학[철학]과 천문학[수학]의 학문적 위계에 대한 연구로는 Westman(1980)과 Dear(1987)가 있으며, 비애지올리(2007)는 이러한 학문적 위계에 기초하여 17세기 초 수학자였던 갈릴레오가 철학자로 변모한 과정을 태양중심설의 인식론적 지위와 연결지어 흥미롭게 서술한 바 있다. 헨리(2003)는 55-59쪽에서 중세 대학 내에 존재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학문적 위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5] 장하석(2014)은 12장 “다원주의적 과학”에서 양립 불가능한 여러 패러다임이 공존할 때 관용의 이득과 상호작용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위해 관용과 상호작용이 절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6] 자세한 논의는 Huggett and Hoefer (201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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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 사이의 변환
  2. 대심(equant)과 투시 커플(Tusi-couple)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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