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과 무선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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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욱, "타이타닉과 무선전신," 잡종, 새로운 문화읽기: 홍성욱 통신 에세이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8), 112-117쪽.

아래의 글은 원문을 거의 그대로 옮겼음.

대형 참사는 항상 영웅을 만들어낸다. ... 타이타닉호 참사(1912)의 영웅은 누구였을까. ... 가장 주목을 받은 영웅은 다섯 명의 '무선전신기사'였다.

해롤드 코탬(Harold Cottam)

해롤드 코탬은 '카페이티아'라는 중급 여객선의 유일한 무선전신기사였다. 그는 낮에 12-16시간 일하고 저녁에는 수면을 취해야 했다. 1912년 4월 12일에도 그는 일을 끝내고 자리에 들었다가, '카페이티아'의 시계를 인접 배의 시계와 비교하는 시간 정기점검을 위해 자신의 전신실에 들러 헤드폰을 귀에 꽂았다가 CQD...CQD...의 긴급 메시지를 들었다. 카페이티아가 참사 현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세시간 반이 경과한 뒤였고, 보트에 승선한 7백여명의 승객 대부분을 구조할 수 있었지만, 얼음같이 찬 바다에 빠져서 나무판자를 붙잡고 떠 있던 사람들은 (영화에서 보듯이) 대부분 익사하거나 동사했다.

타이타닉이 빙산을 들이받고 가라앉는 순간 불과 20마일 떨어진 곳에 '캘리포니아'라는 여객선이 있었고, 30마일 떨어진 곳에 '레나'라는 화물선이 있었지만, 캘리포니아의 무선전신기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레나는 무선전신을 장착하고 있지 않았다.

잭 필립스(Jack Phillips)

코탬이 우연히 듣게 된 긴급구조 메시지 CQD(당시 영국 배는 비상신호로 CQD를 SOS보다 더 많이 사용했다)는 타이타닉의 무선전신기사 잭 필립스가 보낸 것이었다. 타이타닉은 초호화 여객선답게 가장 우수한 무선전신기에 두 명의 전신기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배가 빙산을 들이받자 필립스는 "타이타닉이 빙산과 충돌했다 급속히 가라앉고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타전했다. 이 메시지는 캐나다에 있는 마르코니 전신소에도, 반나절 거리에 있는 두 여객선에서도 수신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립스는 배가 가라앉는 그 순간까지 CQD를 두드렸다. 구명선을 타라는 선장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전신기를 두드리다 타이타닉과 운명을 함께 했다. '카페이티아'에서 코탬이 우연히 듣게 된 비상신호는 바로 필립스가 목숨을 바치면서 보낸 것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그의 활약이 잠깐 나온다. 그의 용감한 행동은 대서양을 마주보고 있는 영국과 미국에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기려졌다.

해롤드 브라이드(Harold Bride)

브라이드는 타이타닉의 무선전신기사로 필립스의 파트너였다. 그도 마지막까지 전신기에 붙어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구명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카페이티아'에 구조된 후에도 생존자들의 명단을 뉴욕에 보내느라고 자신의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들것에 실려나올 정도였다. 마르코니는 친히 그가 요양하는 곳을 방문해서 그를 격려하고 그의 직업정신을 칭찬했다.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타이타닉의 무선전신기사 필립스와 브라이드는 마르코니 회사의 직원이었다. 당시 영국의 체신부는 모든 종류의 유료통신을 독점하고 있었고, 따라서 마르코니 무선전신기기를 장착하고 싶은 배는 통신장비를 마르코니 회사로부터 대여(리스)하는 편법을 써야만 했다. 통신장비를 대여하면 마르코니 회사는 이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명목으로 무선전신기사를 배에 승선시켰다.

마르코니는 21세에 무선전신을 발명했고,23세에 영국으로 건너가 무선전신에 대한 특허를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전자기파는 직진하기 때문에 대서양 무선전신은 불가능하다는 조롱을 비롯해서 온갖 낮관을 극복하고 대서양에 무선전신으로 다리를 놨을 때 그는 불과 28세였다. 타이타닉 참사 후 보트에 승선했던 사람들이 구조된 것은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때문이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언론은 "타이타닉의 생존자들은 과학자로서의 마르코니의 지식과 발명가로서의 천재성이 목숨을 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타이타닉 참사는 마르코니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만약에 캘리포니아에 두 명의 무선전신기사가 있었으면...' '만약에 레나에 무선전신 설비가 있었다면...' 이런 아쉬움은 미국정부로 하여금 모든 배는 무선전신기기를 의무적으로 장착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키게 했고, 이는 물론 마르코니 회사의 주식이 폭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

그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가난한 유태인이었다. 뉴욕의 빈민가에서 공부와 일을 계속하면서 중학교 2년까지 다니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가진 첫 직업은 작은 전신회사의 조수였고, 그는 여기서 무선전신 키를 두드리는 법을 마스터했다. 이후 그는 뉴욕에 있는 마르코니 회사에 일주일에 5불씩 받고 잔심부름과 마루 청소를 담당하는 보이로 취직하면서 마르코니 회사와 인연을 맺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전기공학을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지위는 조금씩 높아졌다. 1912년에는 매달 60불의 월급을 받으며 뉴욕주에 있는 와나메이커(Wanamaker) 마르코니 전신소에서 대서양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수신하는 전신기사로 있었다. 4월 14일 그는 타이타닉 참사에 대한 메시지와 이어서 '카페이티아'에 의해 구조된 생존자 명단을 수신했다. 그가 수신한 생존자 명단은 <뉴욕타임스>, <뉴욕헤럴드>를 통해 대서특필되었고, 그와 그의 전신소는 이후 4월 17일 '카페이티아'가 뉴욕항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승진행보는 빨라졌다. 그는 곧 미국 마르코니 회사의 검사관으로 승진했고, 검사본부장, 그리고 1917년엔 1천명의 직원과 500여개의 무선전신소를 총괄하는 재정 매니저로 승진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 일주일에 5불씩 받고 마루를 청소하는 일에서 시작한 빈민가 출신 유태인 소년이 십년 사이에 연봉 1만불을 받는 마르코니 회사의 3인자가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이후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미국 라디오와 TV라는 새 미디어 왕국의 황제로 군림한 사노프였다.

희생양(scapegoat)

사람들이 생존자 명단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즈음에 영국과 미국의 신문들은 "타이타닉의 승객은 무사하다, 지금 핼리팍스로 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수신했다. 이는 타이타닉에 가족이 있던 사람들에겐 더 없는 낭보였다. 그렇지만 곧 이 메시지는 엉터리임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이것이 소위 아마추어 라디오 '햄'(ham)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햄들은 (마치 요즘 해커가 그러하듯) 자신들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 미 해군의 무선전신을 방해하고 장난 메시지를 송신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마르코니 회사는 이 사건이 대륙에서 송신한 "타이타닉 승객은 무사한가?"라는 메시지가 "오일탱크를 핼리팍스로 보내라"는 또다른 메시지와 교란되면서 생긴 실수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반인과 언론이 햄에 가지고 있던 분노와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라디오 법(Radio Act of 1912)이 제정되고 이 법에 의해 햄은 질이 별로 좋지 않은 200m 파장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약을 받게 되었다. 장난 긴급 메시지를 보내거나 다른 사람의 통신을 교란하는 자는 엄청난 벌금을 물리게 했다. 라디오라는 방송 미디어가 언론과는 달리 정부의 규제 대상이 된 것도 이렇게 타이타닉 참사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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