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803 바이트 추가됨 ,  2021년 7월 26일 (월)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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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진술이 그 속성들 가운데 무엇을 가지든, 그것은 그 진술의 참에 대한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진술이 그와 분명히 양립가능한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그 진술이 참임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이러한 덕목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한 진술이 여럿이 아닌 한 종류의 사실들만 설명한다는 점은 그 진술이 거짓임을 믿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ㅇ르 설명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진술이 왜 그의 반대 진술들이 왜 그렇게 잘 작동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그것의 참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그들의 반대 진술들이 {{--}} 만약 성공적이었다면 {{--}} 왜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된 진술들이 그들의 반대 진술들의 일부가 그들의 극한적인 경우로 보여질 수 있을 거라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진술이 그 속성들 가운데 무엇을 가지든, 그것은 그 진술의 참에 대한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진술이 그와 분명히 양립가능한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그 진술이 참임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이러한 덕목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한 진술이 여럿이 아닌 한 종류의 사실들만 설명한다는 점은 그 진술이 거짓임을 믿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ㅇ르 설명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진술이 왜 그의 반대 진술들이 왜 그렇게 잘 작동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그것의 참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그들의 반대 진술들이 {{--}} 만약 성공적이었다면 {{--}} 왜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된 진술들이 그들의 반대 진술들의 일부가 그들의 극한적인 경우로 보여질 수 있을 거라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범위와 일반성에 관한 이러한 속성들이 좋은 덕목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 그것들은 인식적 덕목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론의 폭과 범위에 관한 질문들을 다룰 뿐, 그들의 참이나 확률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때로 범위에 관한 이러한 덕목들을 인식적 덕목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통섭-성취적 귀납이 참에 가깝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던 윌리엄 휴얼의 공을 들였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던 시도를 들 수 있다. 또한 보이드와 퍼트넘은 선행 이론을 현행 이론의 극한적 경우로 포착하는 것이 그 이론의 참의 증거임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 논증했듯이(Laudun 1981), 이 규칙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것이 거짓인 이론보다 참된 이론을 더 잘 선별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에 따르면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범위와 일반성에 관한 이러한 속성들이 좋은 덕목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 그것들은 인식적 덕목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론의 폭과 범위에 관한 질문들을 다룰 뿐, 그들의 참이나 확률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때로 범위에 관한 이러한 덕목들을 인식적 덕목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통섭-성취적 귀납이 참에 가깝다는 것을 보이려고 했던 윌리엄 휴얼의 공을 들였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던 시도를 들 수 있다. 또한 보이드와 퍼트넘은 선행 이론을 현행 이론의 극한적 경우로 포착하는 것이 그 이론의 참의 증거임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이미 논증했듯이(Laudun 1981), 이 규칙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것이 거짓인 이론보다 참된 이론을 더 잘 선별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 속성들이 인식적 지표(indicators)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증명을 짜맞출 수도 있다. 나 자신은 그러한 논증들을 그렇게 존중하지 않지만, 존중하는 이들에게는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인용|이론 ''T''가 범위의 덕목 중 하나인 ''v''를 보이는 이론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T''는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고, 그 귀결들 중 무한히 많은 것들은 ''v''를 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범위의 진술의 논리적 귀결들 중 다수는 그러한 범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들 중 하나를 ''c''<sub>1</sub>이라고 불러 보자. 이제 ''T''가 참이라면, ''c''<sub>1</sub> 역시 참이어야 한다. 만약 ''T''가 매우 개연적이거나 매우 그럴듯하다면, ''c''<sub>1</sub>은 더욱더 개연적이거나 더욱 그럴듯해야 한다. 요컨대, 함축의 진리-보존적 성격 덕분에, ''c''<sub>1</sub>은 필연적으로 ''T''의 모든 인식적 덕목을 가지면서도 ''v''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결국 ''v''는 인식적 덕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sub>1</sub>처럼) ''v''를 가지지 못한 진술들이 적어도 ''v''를 보이는 ''T''와 같은 진술만큼은 인식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인식론자들을 빼면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들이 과학의 동력을 제공한다거나 "단지 미적인" 잣대가 [과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좋은 과학 이론에 대해 이론의 참에 관한 고려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추후 완성 예정)
(추후 완성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