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와 19세기의 전기와 자기
과학사통론 II 5주차 요약문 : 18세기와 19세기의 전기와 자기
벤저민 프랭클린의 전기에 대한 실험과 관찰
Benjamin Franklin,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 (Letters I - X ) (1747-1752)
Letter II
첫 번째 실험은, 뾰족한 물체가 전기적 불(electrical fire)을 끌어오고 내보내는 현상에 관한 실험이다.
- 첫째, 대전시킨 라이덴병의 쇠구슬에 뾰족한 바늘을 근접시키다 보면 6-8인치 거리에서 갑자기 라이덴병의 전기를 끌어온다.
- 둘째, 뭉툭한 바늘을 근접시키다 보면 1인치 거리에서 스파크와 함께 병의 전기를 끌어온다.
- 셋째, 바늘을 절연체 손잡이에 꽂아 병에 근접시키면 위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 넷째, 그러나 손을 바늘에 대는 순간, 병의 전기를 끌어온다.
- 라이덴병의 전기성 유무에 대한 확인은 병 위쪽에 매단 코르크공과의 반발력의 유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한편, 어둠 속에서 실험을 하면 불빛을 확인할 수 있다. 바늘이 뾰족할 수록 그 불빛을 작아진다.
- 뽀족한 젖은 나무로도 가능하다. 마른 나무는 밀랍처럼 전도성이 없어 불가능하다.
- 다섯째, 바늘을 (라이덴병의) 쇠구슬에 올려놓으면 코르크공을 반발할 정도로 대전시킬 수 없다.
- 여섯째, 바늘을 쇠봉에 총검처럼 고정시키면, 그 쇠봉에 대전된 유리관을 대도 스파크를 낼 정도로는 대전될 수 없다. 전기적 불(fire)이 뾰족한 부분을 통해 조용히 계속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 전기적 불(electrical fire)은 마찰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퍼져있는 것들을 모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의 유입과 유출을 바람개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실험
- 밀랍 위에 유리관을 문지르는 사람(A)과 그 근처(유리관 근처)에서 전기적 불(electrical fire)을 끌어오는 사람(B)은, 땅에 서있는 사람(C)에게 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그(C)는 두 사람 각각의 근처에 가면 스파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두 사람 A, B가 손을 잡을 채로 유리관을 문지르면, 아무도 대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위(1번)에서 설명한 대로 한 후 A와 B가 손을 잡으면 C와의 스파크보다 강한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 강한 스파크 이후에는, 아무에게도 전기성을 발견할 수 없다.
위 실험에 대한 프랭클린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첫째, 문지르는 동안, 유리관은 A로부터 전기적 불을 뺏어오고 B는 유리관으로부터 전기적 불을 뺏어온다.
- 둘째, 중간양의 전기적 불을 가지고 있는 C는, 과도한 양의 전기를 가진 B에 가까이 가면 스파크를 받고, 적은 양의 전기를 가진 A에 가까이 가면 스파크를 준다.
- 셋째, A와 B 사이의 스파크가 큰 이유는 양의 차이가 더 크기 때문이다.
- 넷째, 그 후 C가 가까이 가도 스파크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A와 B가 원래의 양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 다섯째, 손을 잡은 채 문지르면 전기양의 동등함은 파괴되지 않고 순환할 뿐이다.
- 여섯째, B를 양으로 대전되었다고 하고, A를 음으로 대전되었다고 하자.
기타
- 라이덴 병으로 불도 붙일 수 있다.
- 왁스위에 서서 한손으로는 병을 잡고 한 손으로는 병의 (윗부분에 연결되어있는) 금속선을 대면 몇번이고 스파크가 일어난다.
- 왁스위에서 A는 병을 잡고 B는 금속선을 잡은 후 키스를 하면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Letter III
- 병이 대전될 때, 안과 밖의 비-전기성 물질(non-electric 도체)은 다르게 작동하며, 유리는 그들의 이동을 막는다.
- 병의 금속선과 위쪽이 양으로 대전될 때, 병의 아래쪽은 정확한 비율로 음으로 대전된다. 초기상태를 20,20이라 했을 때, 위쪽이 24가 되면 아래쪽은 16이 된다. 위쪽이 40이 되면 아래쪽은 0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아래쪽의 양이 더이상 줄어들 수 없으므로 위쪽 또한 전기를 더 받을 수 없다. 만약 전기를 더 넣으려 하면, 전기적 불은 되돌아가거나 옆면으로 날아가게 된다.
- 평형의 회복은 비-전기성 물질(non-electric 도체)을 통한 접촉으로만 가능하다. 양쪽을 모두 접촉하면 엄청 폭력적이고 강하게 회복되며, 한쪽한 접촉하면 어느정도만 회복된다.
- 바닥의 양이 더이상 줄어들 수 없을 때 위쪽 또한 전기를 더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바닥에서 아무것도 나갈 수 없을 경우 위쪽 또한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즉, 전기성 물질(electric 절연체) 위에 올려놓은 채로는 병을 대전(충전)시킬 수도 (방전)시킬 수도 없다. 비전기성 물질(non-electric 도체) 위에 올려놓아야만 위쪽으로 (방전)시킬 수 있다. 전기성의 두 상태는 라이덴 병에서 놀랍게 균형을 맞춘다. 이에 대해서는 왜 그러한지 잘 모르겠다.
- 전기쇼크는 몸을 통애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전기가 순간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실험이 비전기성 물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며, 왁스 같은 전기성 물질 위에서도 가능하다. 왁스 위의 사람이 한 손으로 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위쪽 금속선을 만져도 전기쇼크는 똑같이 일어난다. 그런데 전기적 불은 예상과 달리 병의 위쪽 → 손 → 몸 → 다른쪽 손 → 병의 바닥 으로 흘렀다.
Letter IV
- 위쪽 고리를 먼저 쥐고 다른 손으로 병의 주석코팅을 만져도 전기쇼크가 일어난다.
- 충전된(charged) 병을 그 힘을 없애지 않으면서 고리쪽으로 들려면, 우선 병이 절연체 위에 놓여져 있었어야 한다.
- 코팅쪽으로도 충전시킬 수 있다.
- 그 방향은 반대이므로, 폭발의 방향도 반대이다. 고리쪽으로 충전되었으면 고리쪽으로 방전되고, 코팅쪽으로 충전되었으면 코팅쪽으로 방전된다.
- 이를 증명하기 위해, 똑같은 방향으로 충전시킨 두 병의 고리를 양손으로 잡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한병의 고리와 다른 한병의 코팅을 만지면 전기쇼크가 발생하고, 두 병은 방전된다.
- 반대방향으로 충전시킨 두 병의 고리를 양손으로 잡으면 전기쇼크가 발생하지만, 고리와 코팅을 만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고 싶음과 받고 싶음은 평형이 유지된다. 완전히 충전된 병과 하나도 충전되지 않은 병의 고리를 양손으로 쥐면 반정도의 쇼크가 일어나고, 두 병은 모두 반만큼 충전된 상태로 남는다. 한쪽은 반만큼 방전된 것이고, 다른 한 쪽은 반만큼 충전된 것이다.
- 같은 방향으로 충전시킨 두 병 사이에 코르크공을 매달면, 한쪽에 끌렸다가 (살짝 붙거나) 밀려난다. 그 경우 다른 한쪽으로부터도 밀려난다. 다른 방향으로 충전시킨 두 병 사이에 코르크공을 매달면, 한쪽에 끌렸다가 밀려나고, 다시 다른쪾에 끌렸다가 밀려나고, 두 병이 거의 방전될 때까지 이를 반복한다.
- 충전, 방전된다고 해서 전체 전기적 불의 양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총량은 변함이 없다. 약간의 예외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도 계를 더 크게 보면 총량은 변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왁스위에 충전된 병을 놓고 왁스 위의 사람에 후크에 손을 대면 최대폭발의 500분의 1도 안되는 약한 스파크가 일어나는데, 이 경우 병의 총량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지만 줄어든 양은 사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 외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 병에서 전기적 불이 나갈 길이 없으면 충전되지 않는다. 절연체 위에 놓거나 공중에 매달면 충전되지 않는다.
- 라이덴병을 꼬리에 꼬리에 물듯 연결하고(직렬연결), 마지막 병을 접지시킨 후 충전시키면, 모든 병은 같은 양만큼 충전되며 각 양은 원래 한 병에 충전시켰을 때의 양과 같다.
- 병이 충전되면, 병의 안쪽과 바깥쪽은 준비상태가 된다. 안쪽은 나갈 준비를 하고, 바깥쪽은 받을 준비를 한다. 하지만 둘 중 한쪽이라도 개시를 못하면 다른 쪽도 개시할 수 없다. 양쪽 모두 개시상황이 되는 순간, 무척 빠르고 폭력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이뤄진다.
- 생략
- 유리는 항상 같은 양의 전기적 불을 가지며, 그 양은 질량에 비해 엄청난 양이다.
- 유리에 할당된 이 양은 그것을 강하게 유지하려 한다.
- 유리에 있던 전기적 불의 양이 변하게 되면 원래 상태를 회복할 때까지, 불안정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 회복은 전도체를 통한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라이덴 병의 전체 힘은 유리 그 자체에 있다. 비전기적 물질(non-electric)은 단지 유리의 각 부분에서 부분으로 (전기를) 전달만 할 뿐이다.
17-20. 위의 증명 실험. 병을 충전시키고, 유리위에 놓은 후, 금속선(wire)을 제거한 후, 물을 채워본다. 그래도 병은 전기를 띠고 있다. 따라서 금속선은 별 역할이 없다. 이번엔 그 물을 다른 병에 채워보면 그 병은 전기를 띠지 않는다. 한편 새 물을 원래의 병에 부어보면, 그 병은 여전히 전기를 띠고 있다. 따라서 금속이나 물은 별 역할이 없다. 따라서 병의 힘의 원천은 유리이다. 한편, 납판자와 유리판을 겹겹이 붙여서도 라이덴병과 같은 충전지를 만들 수 있다. 이 충전지는 매우 강력해서 치명적이다.
21. 위의 7번의 원리를 이용하면 전기모터도 만들 수 있다.
계몽된 자연철학자로서의 벤저민 프랭클린
J.L. Heilbron, "Franklin as an Enlightened Natural Philosopher"
이 글의 저자는 프랭클린이 통상적인 과학자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계몽된’ 자연철학자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프랭클린을 비롯한 18세기 ‘과학자로 여겨질 만한’ 인물들(특히 놀레 Nollet)의 실제 활동을 그려내고 그것으로부터 그들 활동의 세가지 특징 ― 적용, 유비, (지식)보급 ― 을 추출함으로써, 그들은 통상적인 의미의 과학자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자연철학자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논하고 있다.
사전적인 논의로, ‘scientist’라는 단어는 1830년 영국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에 능통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프랑스어 동의어 ‘scientifique'라는 단어는 합리적 지식에 대한 명명으로 18세기 사용되었지만, 사람들에게 통용되진 않았다. 한편 ’scientist'란 단어는 20세기까지도 그다지 유쾌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통상적인 의미의 과학자를 오늘날의 훈련된 전문가 ― 오랜기간 훈련을 받고, 자연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키고 적용하는 데에만 전문적으로 전념하는 사람 ― 으로 간주했을 때, 프랭클린은 어떤 과학 분과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적이 없다. 그는 그의 공부를 통해 돈을 벌지 않았으며 그에 돈을 지불했다. 그가 남긴 여러 영역의 지식에 대한 공헌은 기술과 과학 사이의 광범위한 유비를 통해서였다. 그는 명료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또한 그는 지식의 축적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의 실용적 기술과 섭리 이해에 적용하려 했다.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특성들 ― 우발적인 실험과 설명, 광범위한 유비와 표현기법에의 의존, 과학집단에서의 활발한 멤버쉽, 대중화와 신앙에 대한 관심, 실용에 대한 희망 ― 은 바로 그 시대 자연철학자들을 정의한다. 이는 당시 그의 정반대편에 서있던 놀레 또한 비슷하게 가지고 있던 특성이다. 그들은 자연철학자이다.
적용
다니엘 제니쉬는 사고의 실험과 관찰, 다방면에 걸친 사고와 행동에 기반한 사고의 실용적 방법을 그 세기의 최고가치로 간주했다. 프랭클린은 그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완전한 자연철학자는 단지 사색가가 아니었다. 모은 지식을 적용했다. 18세기 말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들은 실용적인 산물이 자연철학의 선물이라 생각했고 실용적인 적용을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프랭클린은 (재미와 교육을 위한) 실험결과를 실용적인 적용을 할 줄 하는 실험철학자임과 동시에 이미 알려진 (물리)지식을 적용할 줄 아는 실용적인 절약가(economist)였다. 전자에 의해 피뢰침을 발명하였고, 후자에 의해서는 펜실베이아형 난로를 발명하였다. 피뢰침은 접지된 뾰족한 바늘을 통한 방전실험의 외삽 결과였고, 펜실베니아형 난로는 (그대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공기순환에 대한 물리이론을 적용하여 과거난로의 문제를 설명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다.
반면, 놀레는 피뢰침같은 발명을 하진 않았지만, 온도계, 검전기, 에나멜 코팅법 등 자신의 지식을 여러분야에 적용했다.
한편, 지식을 신의 섭리 이해에 적용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프랭클린의 경우,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의 적음은 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는 논지를 펼쳤고, 놀레의 경우, ‘자연에 대한 공부를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잇점은 창조주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는 논지를 펼쳤다.
유비
마찰을 통한 대전과 방전에 대한 설명은 펌프원리에 대한 유비에서 왔고, 충전상태에서의 양으로의 대전과 음으로의 대전 등의 기술은 장부계원의 용어에서 따왔다. 균형과 비균형 수지, 자연용량, 자유순환, 종국적인 회복 등의 개념은 프랭클린이 전기현상에 적용하기 20년 전에 그가 썼던 글에 이미 등장했었다. 기쁨과 고통의 상호관계에서(도덕), 가난 문제에서(복지), 수표발행의 문제에서(경제) 그는 반복해서 +/- 및 종국적인 평형의 개념을 사용했다. 한편 용량의 개념은 인구문제에 대한 고찰에서도 등장했었다.
또한 난로 문제에 대한 유비로 기상학과 해양학에 대해 이해하려 했고, ‘기화열’ 현상에 대해 ‘왜 그러한가’에 대한 설명은 못해도 그것의 유비로 여러가지 설명과 예측 및 적용을 하려 했다.
1771년 브리테니커는 “우리의 철학의 중요한 부분은 유비 외에 다른 어떤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아”고까지 하였다. 보통 유비는 ‘일상적인 관찰’과 ‘다룰 수 있는 물체에 대한 역학’ 사이에서 흔히 이루어졌다.
한편, 놀레는 그의 전기이론을 수력학적 유사성에 기반해 세웠다. 그의 유비추리 유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보급
그들은 매우 사회적이었다. 놀레와 프랭클린 모두 다양한 그룹에 속해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교훈적이거나 품위있는 글쓰기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퍼뜨렸으며, 지식을 알아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했다. 한편, 둘 모두 여자도 자연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들은 여자가 수학에 약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복잡한 수학을 뺀 채 가르치는데 노력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미신과 편견을 척결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들은 다방면에 많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과학자는 아니었다.
18세기의 실험물리학
Thomas L. Hankins, Science and the Enlightment, pp. 46-80
이 글은 실험물리학이 정립해가는 과정을 서술한 글이다. 실험물리학은 각기 계승되어온 실험전통과 수학전통이 정량적 이론에 의해 통합됨으로써 비로소 정립될 수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편 미세유체와 같은 것의 가정은 정량적 이론의 형성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계몽말기, 실험물리학은 비유기물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위한 정량적, 실험적 방법의 사용을 의미하게 된다.
애초에 물리학이 다루는 범위는 매우 모호했고 실험도 정량적인 방식도 없었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동물을 설명하는 데에 더욱 성공적이었다. 실험전통은 르네상스 시기 ‘자연 마법’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수학전용의 전통은 ‘혼합 수학’이라 불리며 시작되었다. 사색적 철학에서 수학의 지위가 점점 상승해감에 따라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으며 점차 실험과 수학(추론)은 균형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실험전통은 영국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계승되었고, “실험”과 “설명장치(demonstration apparatus)”가 무척 강조되었다. 한편, 수학전통은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에도 일정정도 영향을 미치며 계승되었으며,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나의 합리적 체계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계속 시도되었다. 그러나 실험이 곧 물리학을 정량화하지는 못했다. 실험기구는 현상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측정이란 행위는 정량적 이론들이 나오고서야 행해졌으며, 이는 수많은 정성적 관측 후에야 가능했다.
18세기말, 정확한 측정은 실험물리학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으며, 그러자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미세한 유체”는 정량적 법칙에 의해 대체되었는데, 이 새로운 정량적 법칙은 물리현상을 더욱 잘 예측했지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미세한 유체
전기 또는 열의 전달을 설명하는데 그것을 ‘성질은 있으나 무게는 없는 유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며, ‘미세한 유체’는 몇몇 알기 쉬운 개념으로 구성된 이론적 틀을 제공해주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한창이던 17세기 중엽, 뉴턴의 에테르가 ‘있다’는 식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미세한 유체는 서로 반발하며, 팽창적인 성질을 보편적으로 띠고 있어서, 밀도가 낮은 곳으로 퍼지게 된다는 것이 기본 설명틀이다. 이러한 미세한 유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불’과 유사한 본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열, 빛, 전기는 불의 여러 형식들로 간주하고 실제로 그들에 ‘불’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다.
미세유체 이론은 물리학자들에게 새로운 물리적 개념들을 만들고 일정정도 그들을 정량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종국에, 뉴턴 이론이 에테르의 가정없이 중력현상을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듯이, 18세기 말 물리학자들도 미세유체의 가정없이 온도, 열, 전하, 용량과 같은 물리적 개념들을 정량화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물리학은 점점 현상론적이고 정량적인 이론이 되었다. 미세유체 이론은 그것이 이론 형성과 정량화의 초기단계에 본질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잃게 되었다.
전기
18세기 많은 인기를 누린 전기실험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으로 단일유체 이론과 두가지유체 이론이 경쟁하였다. 한편, 이론이 형성되기 전부터 전기에 관련된 개념들과 실험장치들은 1600년 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electric과 non-electric을 마찰전기의 생성유무로 구분하였고, 진공에서의 발광현상들에 대해 그 현상의 필요조건들을 찾다가 전기발생장치를 만들게 되었다. 한편 전도현상과 인력/척력 개념을 알아냈고, 두 종류의 전기를 구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찰에 의해 두종류의 전기적 유체를 가정하곤 했다. 이러한 시기에 프랭클린은 단일유체 이론을 제안하는데, 그의 이론은 (왜 그런가에 대한) 설명에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현상의 규칙성을 기술하는 데에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실험기구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라이덴병은 일종의 충전기이다. 프랭클린은 이 기구를 통한 많은 실험으로 그 원리를 설명하려 했는데, 전도체는 전기적 불을 운반만 할 뿐이고 전기는 불침투성인 유리표면에 있다는 결론을 낸다. 또한 실험가들은 유리 뿐만 아니라 공기에도 전기유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인력과 척력은 전기적 공기의 직접작용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러한 많은 착각들은 전도와 전기성 사이의 많은 혼란 때문이었는데, 전도체는 전기현상을 띠지 않고 반대로 부도체는 전기현상을 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때문이다.
한편, 라이덴병을 시작으로 한 충전기의 발명들, 특히 볼타의 고갈되지 않는 전기를 공급하는 일렉트로포어(electrophore)의 발명은 전기적 공기 개념의 불충분함을 증명하게 되었고, 공기의 제거와 함께 전기학자들은 현상에 대한 메커니즘 설명을 포기하게 되었고 대신 정량적인 규칙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측정 이전에 ‘무엇을’ 측정할지가 결정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다시 이론이 필요했다. 대략적인 측정을 가능케 했던 검전기는 비선형적이었기에 수학적인 비례분석이 불가능했고, 이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전기력의 제안은 성공적이었고 실험적으로도 증명되었고, 이를 세밀하게 증명한 쿨롱의 비틀림 저울은 실험물리학의 새로운 모범이 되었다. 카벤디쉬는 전기력 측정 뿐만 아니라 오차분석을 처음 시도했으며, 상대용량과 상대저항을 무척 작은 오차로 측정해냈다.
흐르는 전기는 갈바니의 개구리 해부실험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갈바니는 이를 생체전기 식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볼타는 개구리다리는 단지 전기 탐지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흐르는 전기의 필요조건이 두종류의 금속과 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볼타전지 즉 흐르는 전기를 발명했다.
열
열이 정량화되기 시작한 것은 온도계의 발명부터이다. 그러나 온도계의 눈금이 자의적이라는 문제와 도대체 측정한 게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상당한 골치거리였다. 일단 일정한 열을 가하는 실험을 통해, 수은팽창이 열에 선형비례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후 물체의 양에 따라 또는 물체의 종류에 따라 수은팽창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온도는 열의 밀도와 같은 개념으로 열과 구분되었다. 이 과정에서 열용량이라는 개념과 비열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재밌는 것은 예상과 달리 밀도는 열용량과 완전히 무관하다는 사실이었다.
액화열과 기화열 등의 잠열의 발견은 열의 총량이 보존된다는 직관을 흔들었고, 온도계로 탐지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한편, 잠열의 발견으로 측정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열소의 질량은 측정되지 않았다. 재밌는 것은 열소이론을 반증하는 사례(포탄 뚫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가 제시되었음에도, 열소이론은 반박되지 않았다. 열소이론은 정량과학을 가능케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용이했기 때문이다. 열현상에 대해 역학적 이론을 주장하는 과학자일지라도 편의상 열소(열유체)의 용어로 생각을 하게 된다.
열에 관한 유체이론은 복사현상을 설명하지 못함으로 인해 복사열을 다루는 이론을 찾는 과정에서 끝나게 되었고, 이후 기체운동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유체이론은 실험의 정량화를 가능케 했고, 역학적 철학에 추상적 차원을 더해주었으며, 매우 유용했다. 이들 유체 이론들은 강력한 반박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는데, 그 이유는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고, ― 매우 단순하고 좋은 모델이었음 ― 역학이론엔 이를 대체해 설명할 다른 모델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물 전기를 둘러싼 갈바니-볼타 논쟁
M. Pera, The Ambigous Frog : The Galvani-Volta Controversy on Animal Electricity, pp. 117-175
이 글은 갈바니-볼타 논쟁의 촉발에서부터 볼타의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두 진영의 입장차이는 결정적 실험 제시를 비롯한 논쟁의 진행과정에서 좁혀지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벌어져갔으며, 이에 대해 저자는 두 이론 사이의 공약불가능을 주장하는 한편, 볼타의 승리는 파일(pile)에 의해 우위를 점해서이기도 하지만 여타 사회적인 이유 또한 작용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구리 다리 실험을 계기로, 갈바니, 알디니, 발리 등은 동물 전기이론 진영을 형성하는 한편, 볼타, 레일, 폰타나 등은 접촉 전기 이론 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정적 실험은 실질적인 증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같은 실험을 놓고도 다른 설명가설과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 갈바니의 결정적 실험 ― 몇가지 종류의 금속 없이도 근육 수축이 발생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실험 ― 에 대해서, 볼타는 그 실질적인 증거는 인정하고 자기 이론과 모순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갈바니 이론에 대한 동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볼타는 새로운 가설을 통해 설명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볼타가 결정적 실험 ― 상이한 도체 사이에서 접촉에 의해 생긴 불균형으로부터 전류가 발생시키는 실험, 근육수축의 원인이 신경과 근육 사이의 불균형이 아니라 그 외부의 힘에 있음을 보이고자 했음 ― 을 수행하여, 자신의 지위를 회복했다.
두 진영의 결정적 실험 이후, 적절한 절충안으로 타협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두 진영의 절충안은 두 진영의 입장을 공평하게 ― 두 공간에 걸쳐서(coextensive) 동등하게(equivalent) ―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진영은 각각 다른 길을 걷다가 19세기 초 볼타의 파일(Volta's pile)가 등장하고서야 논쟁이 종결될 수 있었다. 파일은 지금까지와 비슷한 기전력과 갈바닉 유체를 거의 똑같이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볼타는 이를 접촉 이론의 뚜렷한 증거라고 생각했고, 곧 대부분 나라의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점차 동물 전기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볼타의 승리로 두 진영의 논쟁은 종결되었다.
저자는 갈바니와 볼타가 서로 다른 개념틀을 이용하게 현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같은 현상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상대방의 게슈탈트(gestalt)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참된 결정적 실험이란 존재할 수 없고, 결정적 반박도 존재할 수 없다.
볼타전지의 기전력 논쟁
S. Hong, "Once Upon a Time in Physics When Both Mathematics and Experiment were Helpless: A strange Life of Voltaic Contact Potential"
이 논문은 왜 볼타접합효과에 대한 논쟁이 19세기동안 합의 없이 지속되는가에 대한 답변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실험과 수학 모두 둘 중 누가 옳은지를 결정해주는데 도움이 안되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톰슨과 톰슨 진영을 한편으로, 멕스웰과 멕스웰 진영을 다른편으로 놓고, 그들 사이의 논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진영의 이론이 공약불가능했으나, 이는 주로 톰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기에 비대칭적이었다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핵심논쟁은 볼타전지의 기전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것이었으며, 톰슨과 멕스웰 논쟁은 이전의 논쟁을 각기 계승한 것이었다. 볼타의 경우 기전력을 금속접합에 의한 것으로 본 반면, 갈바니와 패러데이는 화학이론에 따른 금속-전해물 결합에 의한 것으로 여겼다. 이후 톰슨은 정밀한 전위계를 이용하여 두 금속을 서로 떼지 않고서도 전위차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지지자들은 톰슨의 이론을 더 발전시켜 금속과 전해액, 액체과 액체 사이의 전위차도 이론에 포함시키는 성과를 냈다. 이로써 전지의 기전력은 몇몇 분리된 접합 전위차의 합 ― 두 금속 사이의 전위차 + 금속과 전해질 사이의 전위차 ― 으로 설명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톰슨의 새 접합이론은 볼타접합현상과 그 기전력까지 설명하며 금속 외 물질 사이의 접합까지도 포함하는 정통이론이 되었으나, 멕스웰의 비판이 제기되면서부터 톰슨과 멕스웰 진영의 논쟁은 1900년에도 계속되었다.
전위 측정에서의 합의, 이론에서의 불일치
전도 전위계, 유도 전위계를 만들어내면서, 볼타전지의 기전력을 0.75V로 정확히 측정해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한 표현은 와 같이 할 수 있다. 그러나 볼타는 공기와 금속 사이의 전위차를 0으로 해석했고, 멕스웰은 반대로 두 금속 사이의 전위차를 거의 0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볼타는 전지의 기전력을 금속 접합의 결과로 해석한 것이며, 멕스웰은 금속과 공기 접합의 결과로 해석했다. 이러한 결론의 차이는 각기 미세하게 다른 전위의 정의 ― 단위전하를 무한히 먼 지점에서 도체(Maxwell) vs 도체 근처(Thomson)까지 옮기는 데 필요한 일의 양 ― 를 사용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험장치(전위계)가 측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일치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될 수 없었는데, 실험으로는 개별 전위차를 따로 측정할 수 없었고 오직 총전위차만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전기 측정과 수학적 분석에서의 불일치
열전기 현상이 발견되어 JTI라는 양이 측정되었다. 톰슨은 열현상과 전기현상이 무관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 작은 값에 대해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나, 멕스웰은 열현상과 전기현상의 상호작용을 생각하며 그 작은 값을 두 금속 사이의 전위차로 해석하였다.
결정적 실험에 대한 불일치
멕스웰 진영의 결정적 실험으로는 브라운의 실험이 있다. 그는 공기를 황화수소로 대체했을 때 기전력이 반대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전력이 매질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멕스웰은 이를 자기이론을 입증하는 결정적 실험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볼타진영은 여러 이유로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멕스웰 진영의 로지(Lodge)조차도 사용된 금속이 녹슨 것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톰슨 진영의 결정적 실험으로는 진공 실험이다. 진공상태에서도 기전력 측정값이 같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전력이 공기와 상관없으며 단지 금속사이의 전위차임을 보이는 결정적 실험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멕스웰 진영은 진공상태에 대한 불신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결론
두 이론간의 불일치는 너무 근본적이어서, 양 진영은 종종 합리적인 소통이 불가능했다. 쿤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이론은 공약불가능했다. 톰슨은 멕스웰의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기와 열에 대한 비연관성에 대해 확신했고, 멕스웰의 볼타전지에 대한 견해를 멕스웰의 전체 이론틀(전자기 이론) 내에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슨의 제자들은 멕스웰의 전자기 이론 분만 아니라 멕스웰의 볼타전지에 대한 견해까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각 이론의 장점과 단점도 인정했다.
반면, 멕스웰과 그 지지자들은 비유적으로 말해, 2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멕스웰은 초창기 전위에 대한 관념을 톰슨으로부터 빌려왔기 때문이다. 이후 그것을 버리긴 했지만, 그는 톰슨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두 이론은 공약불가능했지만, 대칭적이지는 않았다. 공약불가능은 주로 톰슨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