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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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 C. van Fraassen (1980), “Arguments Concerning Scientific Realism”, The Scientific Ima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Ch. 2, pp. 6-40.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논증들

바스 C. 반 프라센(Bas C. van Fraassen)

천현득 옮김


과학의 엄격함은 자연 자체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 마음대로 자연에게 입힌 화려한 의상과 잘 구별해야함을 요구한다.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1895년 2월 28일 『네이처(Nature)』에 보낸 편지에서 인용.

20세기에 최초의 지배적인 과학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일부로서 전개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론에 대한 수용된 견해(the received view of theories)’와 같은 표현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발전시킨 견해를 가리킨다. 그들의 전성기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장에서 나는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 제안된 주요 논증들을 검토하고 비판할 것이다. 이 논증들은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의 일부로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그것들[과학적 실재론과 논리실증주의 비판]을 분리하여 논의하는 것이 분명히 공정하다. 과학적 실재론이 실증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가장 쉽게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홀로 설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주창하는 대안적 견해(전통적인 이름이 없어서 나는 그것을 구성적 경험론으로 부를 것인데) 역시실증주의 학설과 상충된다.

과학적 실재론과 구성적 경험론

과학철학에서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용어는 과학 이론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과학활동이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나타낸다. 나는 이 입장을 정의하고, 그것의 가능한 대안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 다음 내가 다음 장에서 옹호하고 발전시킬 특정한 대안을 개략적이고 간결하게 제시하겠다.

과학적 실재론의 정식화(statement)

과학적 실재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 입장에 대한 소박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세계상(or 세계에 대한 그림)은 참되고, 세부사항에 있어서 믿을 만하며, 과학에서 가정된 존재자(entity)는 실제로 존재한다. 과학의 진보는 발견이지 발명이 아니다. 물론 이 진술은 너무 소박하다. 그것은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오늘날의 이론을 옳은(correct)것으로 믿는 것처럼 말한다. 이는[그 진술이 소박하다는 것은] 퍼스(C. S. Peirce)와 같은 초기 과학적 실재론자의 철학적 입장이 경험적 발견들에 의해 반박되어 왔음을 뜻한다. 나는 때가 되면 과학이 모든 측면에서 참인 이론에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동의할 것으로 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의 성장이 끝없는 자기수정일 수도 있고, 더 나쁜 경우 아마겟돈이 훨씬 빨리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진술도 나름의 특색(right flavour)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주된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그것은 (i) 과학이론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ii) 과학활동은 발명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특징짓는다. 어떤 과학철학이라도 과학이론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의 두 가지 물음에 답변해야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과제는 소박한 진술과 이러한 특징들[두 물음에 대한 답변]을 공유하는 과학적 실재론의 진술을 찾아내는 것이지, 실재론자에게 수용하기 힘들 정도의 강한 귀결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론하고자 할 때 풍차로 돌진하지 않으려면[허수아비를 공격하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약한 진술을 고려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나는 단서로서 몇몇 구절들을 인용할 것인데, 아래에서는 저자들이 논증한 문맥에 비추어 그것들을 검토할 것이다.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한 이론을 수용(hold)할 좋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 이론에서 가정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할 좋은 이유가 된다.(#7)

이것은 인식론의 물음에 관한 것이지만, 셀라스의 입장에서 한 이론을 수용(hold)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접적인 빛을 던져주기도 한다. 엘리스(Brian Ellis)는 자신을 과학적 실재론자가 아니라 과학적 존재자 실재론자로 부르는데, 그 역시 셀라스의 진술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한 견해를 정식화했다.

내가 이해하기에 과학적 실재론이란 과학의 이론적 진술들은 실재에 대한 참되고 일반화된 기술이거나 그렇게 의도된 것이라는 견해이다.(#1)

이 정식화는 두 가지 장점을 지닌다. [첫째] 그것은 믿을 이유를 언급하지 않고 이론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둘째] 실재론자가 되기 위해 현재 과학이론이 참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제안을 피한다. 그러나 후자의 이득은 ‘의도(purport)’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얻은 것으로, 그것 자체가 수수께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퍼트넘(Hilary Putnam)은 자신이 더밋(Michael Dummett)에게 배웠다고 말하는 한 가지 정식화를 제안한다. (이 구절은 7절에서 다시 인용할 것이다.)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에 대하여) 실재론자는 (1) 그 이론의 문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2) 그것을 참/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외적인 것이란 (일반적으로는)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우리의 감각자료도 아니고, 우리 마음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 등도 아니다.(#29)

곧 이어 그는 보이드(Richard Boyd) 덕분이라고 말했던 추가적 정식화를 제시한다.

성숙한 과학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시한다는 것(이 정식화는 보이드에서 유래했다),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라는 것,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진술들은, 과학 및 과학이 대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적합한 과학적 기술이라면 포함해야할 부분들로서, 과학적 실재론자들이 수용하는 견해이다.(##33)

이것들이 정의로서 의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들은 참(진리)이 기본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정식화하는 데 틀림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그 정식화가 답변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제 나는 한 가지 정식화를 제안할 것인데, 그것은 내가 볼 때 앞서 언급한 것들을 이치에 닿게 해주고 앞으로 검토하려고 하는 실재론자들의 추론을 이해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이[비판적 검토]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말이다.

과학은 이론을 통해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에 대해 문자 그대로 참인(literally true)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과학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뜻한다(involve). 이것이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옳은 진술이다.

나는 이 정식화가 극히 최소한의 것이고 과학적 실재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임을 보임으로써, 이 정식화를 옹호하겠다. 소박한 진술에 따르면, 과학은 참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 옳은 진술은 그렇게 하는 것[참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과학의 목표라는 것만을 말한다. 물론 과학의 목표는 개별 과학자들의 동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체스 게임의 목표는 적에게 장군(checkmat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동기는 명성이나 금전 혹은 영예일 수 있다. 그와 같은 작업에서는 목표(what the aim is)가 성공의 기준(what counts as success)을 결정하고, 그 목표는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추구될 수 있다. 또한 어떤 것을 최상위 목표(the aim)로 부른다고 해서, 그 목표에 대한 수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다른 부수적 목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성, 정보제공(informativeness), 예측력, 설명 (역시도) 미덕이라는 데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과학의 목표는 단지 참된 이론의 발견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일지라도 아마 내 정식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학설 중에서 가장 약한 정식화를 제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문자 그대로(literally)’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적절히 이해되는’ 경우에는 과학이론이 참이지만 [실은] 문자적으로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실재론에서 배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규약주의, 논리실증주의, 그리고 도구주의와도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나는 이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고, 더밋의 견해를 추가적으로 고려할 7절에서도 이야기할 것이다.

옳은 진술의 두 번째 부분은 인식론을 건드린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론의 수용과 참이라는 믿음을 동일시한다.(#2)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이가 [참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어떻게든(even) 합리적으로 보증된다는 것은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날 상당한 논란의 주제가 된, 합리적인 사람은 항진명제 외의 어떤 명제에 대해서도 개인적 확률 1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인식론적 입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make room for). 내 생각에, 이런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적 실재론자는 드물 것 같지만 이는 확실히 가능한 생각이다.(#3)

조건부(qualified) 수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건 없는(tout court) 수용을 이해해야한다. 만일 한 이론의 수용이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뜻한다면, 잠정적인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의 잠정적 채택을 뜻한다. 만일 믿음이 정도를 갖는 것이라면, 수용도 그렇다. 그러면 수용의 정도란 그 이론이 참이라는 믿는 어떤 정도를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이 근사적으로 참이라는 믿음과는 구별해야 한다. 근사적 참의 믿음은 언급된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들의] 집합에서 몇몇 이론들은 (정확히) 참이라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제안한 실재론의 정식화는 개개인의 인식론적 신념과는 무관하게 사용될 수 있다.

실재론의 대안들

과학이론의 구성은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에 대한 문자 그대로 참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하고, 한 과학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뜻한다는 입장이 과학적 실재론이다. 따라서 반실재론은 문자 그대로 참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고서도 과학의 목표가 마련될 수 있고, 이론의 수용은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보다는 약한(혹은 그 믿음과는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이한 입장들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론자에 따르면, 어떤 이가 이론을 제안할 때 그는 그것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실재론자에 따르면, 제안자는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보여주고(display) 그것이 어떤 미덕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미덕들이 참에는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적합성, 포괄성(comprehensiveness), 다양한 목적으로 인한 수용가능성일 수 있다. [물론] 실재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세부사항들이 채워지지는 않기 때문에, 이 대목은 조목조목 설명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일반적인 분류(generic division)를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 개념에 집중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 참된 이야기라는 생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째] 언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하고, [둘째] 그렇게 해석되었을 때 그런 이야기는 참이다. 이것은 반실재론을 두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의 반실재론]는 과학이 (문자 그대로가 아닌 방식으로) 적절히 해석되면 참이거나 참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부류는 과학의 언어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옹호할 반실재론은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

문자적 해석이 무슨 뜻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생각은 아마도 신학에서 나온 것일 텐데,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를 축자적으로(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다양한 알레고리, 은유, 유비를 활용하여 해석함으로써 [성서를] ‘탈신화화(demythologize)’한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해명하는 문제는 언어철학에 속한다. 아래의 7절에서 나는 더밋의 견해 중 일부를 간략히 검토하면서 ‘문자적(literal)’이라는 말이 ‘진리치를 가짐(truth-valued)’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할 것이다. ‘문자적’이라는 용어는 일반 철학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잘 이해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해명하려 하면 자연언어에 대한 적합한 설명을 제공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과학에 대한 탐구를 그[언어철학] 문제에 대한 특정한 해답에의 동의(commitment)와 연결시키는 것은 나쁜 전략일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언급들과 7절의 이야기들은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충분한 정도로 ‘문자적’의 용법을 고정시키면 된다.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 외에 어떤 것도 배제하기로 한 결정은 실증주의와 도구주의로 알려진 반실재론의 형태들을 배제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 하에서 분명한(apparent) 과학적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capable) 진술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을 다듬을(elaborate) 수는 있지만 논리적 관계를 바꿀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용어들이 지시하는 바를 동일시(identify)함으로써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 현상론적인 열역학의 언어를 통계역학의 언어로 ‘환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기체는 분자들의 집합체로, 온도는 평균 운동 에너지와 동일시될 수 있다.) [한편] 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이론적 용어는 관찰할 수 있는 것(the observable)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두 이론이 형식적으로는(in form)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상 동일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어떤 이는 모든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는 그 대신 우주적인 연속 매질을 가정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이 관찰가능한 귀결들에 대해 동의하는 한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 모순되는 두 이론이 ‘실제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만 성립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한 이론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교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존재한다는 함축은 제거할 수 없다.

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해석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있어 왔고, [여기서] 그것들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다음 장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비판을 덧붙일 것이다.

구성적 경험론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은 이론을 은유나 직유로 해석하는 것이나 이론은 ‘탈신화화’되거나 논리적 형식을 보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번역’을 거친 이후에야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다. 만일 그 이론의 진술이 ‘전자는 존재한다’를 포함하면, 그 이론은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 이론이 ‘전자는 행성이 아니다’라는 진술을 추가로 포함하고 있다면, 그 이론은 (부분적으로) 행성 아닌 다른 존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해주는 것을 많지 않다. 대개 한 이론적 용어가 구체적인 대상(concrete entity)을 지시하는지 아니면 수학적 대상을 지시하는지 전혀 분명치 않다. 고전 물리학에 대한 변호하기 쉬운(tenable) 해석은 아마도 힘에 해당하는 구체적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 과 같은 힘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언제나 어떤 함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수학적 진술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debatable).

과학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적 입장이 모두 실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인식적 태도나 우리가 이론을 구성할 때 추구하는 목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한 이론이 말하는 바(what a theory says)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근본주의 신학자,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는 유일신이나 신들 혹은 천사가 존재한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데에는 서로 동의할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지만.) 과학의 언어는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이후라도, 여전히 우리는 좋은 이론이 참이라고 믿을 필요도 없고 사실상(ipso facto) 그 이론이 가정한 존재자가 실재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적합한(empirically adequate) 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한 이론의 수용은 오직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만을 뜻한다. 이것이 내가 옹호하는 반실재론적 입장의 진술이다. 나는 그것을 구성적 경험론(constructive empiricism)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정식화는 내가 1.1절에서 다루었던 과학적 실재론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명료하게 만들기 위한 언급들을 덧붙여야 한다.(is subject to qualifying remarks) 게다가, ‘경험적 적합성’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분간은 예비적인 해명만 제시할 것인데, 한 이론이 이 세계 속에서 관찰가능한 사물과 사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참일 때(즉, 그것이 ‘현상을 구제’할 때), 바로 그때 그 이론은 경험적으로 적합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은 모든 실제적(actual) 현상이 꼭 들어맞는(fit inside) 적어도 하나의 모형을 갖는다. 나는 이것이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강조해야겠다. 이는 실제로 관찰된 현상이나,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관찰된 현상으로는 포괄되지(exhaustive) 않는다. 이 용어를 해명하는데 다음 장 전체를 바칠 것인데, 이는 과학이론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론의] 수용과 관련하여 내가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에 그어놓은 구분은 얼마만큼의 믿음이 거기에 연루(involve)되는지에만 관련된다. 이론의 수용(완전한 수용이든지, 잠정적이든지, 정도를 갖는 것이든지 간에)은 과학활동의 한 현상으로 믿음 이상의 것을 분명히 포함(involve)한다. 주된 이유는 우리가 결코 완전한 이론을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과학자가 한 이론을 수용한다면, 그로 인해 그는 어떤 종류의 연구 프로그램에 관여하게 된다. 두 개의 (불완전한) 이론이 (지금까지는 in so far as they go) 관찰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서 서로 동등할지라도, [그 과학자가 관여하는] 프로그램은 다른 이론을 수용한 과학자가 관여하는 프로그램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수용은 믿음뿐 아니라 어떠한 commitment(다짐?공약?관여?)을 포함한다. 현장 과학자가 아닌 우리의 경우에도, [이론의] 수용은 그 이론의 개념적 밑천들을 통해 미래의 현상들과 대면하겠다는 commitment를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가 설명을 추구할 [때 활용하게 될] 용어들을 결정한다. 만일 그 수용이 어떤 면에서든(at all) 강하다면, 그것은 설명자의 역할에 대한 가정에서, 즉 그가 기꺼이 권위있게(ex cathedra) 물음에 답하려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당신이 한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그 이론이 안내하는(guide) 언어 사용의 맥락에서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그러나 수용은 그러한 맥락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이념적 헌신(ideological commitment)과 유사하다. 당연히 헌신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다. 정당화될(vindicated) 것이라는 확신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 수용의 화용론적(pragmatic) 차원에 대한 예비적인 밑그림이다. 그것은 인식적 차원과는 달리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공공연하게 관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실재론에 따르면 수용과 관련된 믿음의 양이 전형적으로 적기 때문에, 반실재론자는 화용론적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 점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낸다. 한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이나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은 그 이론의 전적인 수용이 정당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함축하지도 않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 확인하려면,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나, 혹은 과학 공동체 및 그것의 영향 그리고 우리가 가진 실제적 제한들에 대해서 꽤 뚜렷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고려해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이 사실상 우리가 [지금껏] 받아들여 온 다른 이론들과 쉽게 묶여지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성공하기 전에 아마겟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이나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이 [과연] 이상적인 연구 조건 하에서 결국은(in the long run) 그 이론의 수용이 정당화될 것이라는 믿음과 같아질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내가 볼 때 이 문제는 과학철학과 무관한데, [그 물음에]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해도 우리가 앞에서 이미 세워놓은 구분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반사실적 진술들이 객관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가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실재론자와 반실재론자가 이론 수용의 화용론적 측면에서 불일치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내가 여기서 그것을 언급한 것은 내 생각에 그들이 전형적으로 그렇게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재론자는 전형적으로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하지만 반실재론자는 인정할 수 없는 설명의 요구(request for explanation)와 같은 문제를 되풀이해서(time and again) 만나게 될 것이다.

이론과 관찰의 ‘이분법’

논리실증주의가 30여년 동안이나 과학철학을 지배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60년에 처음 출간된 『미네소타 과학철학 연구(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1권에는 카르납(Rudolf Carnap)의 논문 "이론적 개념의 방법론적 지위(The Method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Concepts)"가 실렸는데, 이 논문은 여러 면에서 실증주의 프로그램의 정점이다. 그는 과학을 관찰언어에 연결하여 해석한다. (여기서 관찰언어란 이론적 용어를 포함하지 않는 자연언어의 일부로서 가정된 것이다.) 2년 후 미네소타 시리즈에는 맥스웰(Grover Maxwell)의 논문 “이론적 존재자의 존재론적 지위(The Ont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Entities)”가 실렸는데, 이 논문은 제목과 주제에서 카르납의 논문과 정반대였다. 그것은 이론과 관찰이 구분될 수 없다는 새로운 실재론자들의 주장에서 표준적인 어구(locus classicus)가 되었다.

나는 맥스웰의 요점 중 일부를 직접 검토할 것이지만, 먼저 쟁점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을 해야겠다. ‘이론적 존재자’나 ‘이론적-관찰적 이분법’과 같은 표현들은 외관상(on the face of it) 범주 착오(category mistake)의 예로 보인다. 용어나 개념은 (이론을 구성할 목적으로 도입되고 채택되었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존재자는 관찰가능하거나 관찰불가능하다. 이것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분법] 논의를 두 가지 문제로 나눈다. [첫째로] 우리의 언어를 이론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가? [둘째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을 관찰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맥스웰은 두 물음 모두에서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지만, 둘을 주의깊게 구분하지 못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해 그는 셀라스와 파이어아벤트가 쓴 유명한 글들에 의존할 수 있는데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속속들이 언어에 감염되어 있다(thoroughly theory- infected). 만일 우리가 ‘VHF 수신기’와 같이 최근에 도입된 용어를 제거하기 시작하여 ‘질량’, ‘충격량’, ‘원소’와 같은 이론적재적 용어들을 제거해버리고 [더 나아가] 언어 형성의 이전단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별 소득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과학자들이 말하는 방식은 [모두] 이전에 받아들여진 이론들이 제공하는 그림에 의해 안내된다. 이미 뒤앙(Duhem)이 강조한 것처럼, 이는 실험 보고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위생적인(hygienic) 언어의 재구성은 매우 부적절하다(are simply not on). 나는 다음 장에서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언어의 이론-감염]이 우리가 과학적 실재론자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우리는 확실히 모호성에 대해 그보다는 더 잘 참아낸다(have more tolerance of ambiguity). 우리의 언어가 어떤 시점에서 주어진 그림에 의해 안내되도록 (우리가) 허용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 그림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믿고 있는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침에 태양이 뜨고 저녁에 진다고 말할 때, 지금은 명백히 거부된 그림이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밀턴이 『실낙원』을 썼을 때, 그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다양한 언급들은 그가 당시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들과 사색들에 관심이 있었음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그는 고의로(deliberately 신중하게?) 구시대의 지구중심 천문학이 자신의 시를 안내하도록 허용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우리의 언어가 이론적재적이라는 데서 어떤 즉각적인 결론도 이끌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맥스웰의 주된 논변이 겨냥하는 것은 관찰가능-관찰불가능 구분을 반대하는 것이다. 먼저 그 구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자. ‘관찰가능(observable)’은 잠정적인 존재자(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자)를 분류하는 용어이다. 날아다니는 말(flying horse)은 관찰가능하고(이는 우리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숫자 17은 관찰불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인간 행동의 분류가 있어야 하는데, 예컨대 [도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지각 행위가 [곧] 관찰이다. 알려진 힘 마당(force field)에서 입자 궤적이 휘어진다는 것을 통해 입자의 질량을 계산한다고 해서 질량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물, 사건 혹은 과정과 같은 존재자를) 관찰함(observing)과 (무엇이 이러저러하다고 something or other is the case) 무엇임을 관찰함(observing that)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어 고민: 대상관찰과 의미관찰?) 최근 필리핀에서 발견된 석시시대 사람에게 테니스공이나 자동차 충돌을 보여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의 행동을 보고 그가 그것들을 알아차렸음(notice)을 안다. 예를 들어, 그는 공을 집어 던진다. 그러나 그가 그것이 테니스공이라고 본 것도 아니고 어떤 사건이 자동차 충돌이라고 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을 갖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지각을 통해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그는 무엇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보기(seeing)와 무엇임을 보기(seeing that) 사이의 애매성을 악용한 말장난일 뿐이다. (“x가 A임을 관찰했다‘는 진술에 대한 진리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일 x가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이 말하는 언어와 관련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 개념은 어떻게든 올바른 진리조건 속에 한 변수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x가 테니스공을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은 x가 그것이 테니스공이라고 관찰했다는 것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후자는 테니스 경기에 대한 어떤 개념적 의식을 필요로 한다.)

맥스웰은 관찰가능성(observability)에 대해 두 종류의 논변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런 구분의 가능성을 반대하고, 다른 것은 구분이 가능한 경우에도 그 구분의 중요성을 반대한다.

첫 번째 논변은 직접 관찰과 추론 사이에 놓인 상황의 연속성(continuum of cases)으로부터 나온다.

진공을 통해 보기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구성원으로 포함하는 연속적인 계열(continuous series)이 원리적으로 존재한다. 창유리를 통해 보기, 안경을 통해 보기, 쌍안경을 통해 보기, 저해상도의 현미경을 통해 보기, 고해상도의 현미경을 통해 보기 등등 주어진 순서대로. 이것의 중요한 귀결은,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관찰’과 ‘이론’ 사이에 임의적이지 않은 선을 그릴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4)

[그러나] 관찰로 추정된 행위의 연속적 계열이 관찰가능한 것으로 추정된 것들의 연속성에 직접 대응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것이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창문을 열고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목성의 위성은 망원경으로 볼 수 있지만, 목성과 충분히 가까운 곳에 있다면 망원경 없이도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관찰가능하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것을 관찰하기에 조건이 좋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관찰가능성에 대한] 원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X가 [적절한] 상황 하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면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게 되는, 그러한 상황들이 만일 존재한다면, X는 관찰가능하다.

이는 정의로서 의도된 것이기 아니라, 단지 오류를 피하기 위해 대략적인 지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탐지가능한(detectable) 것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연속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어떤 것들은 적어도 광학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야만 탐지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들은 아마도 전자 현미경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and so on. 맥스웰의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관찰가능한 것과 보다 간접적인(roundabout) 방식으로 탐지될 수만 있는 것 사이의 어디쯤에서 선을 그을 것인가?

임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what follow)? ‘관찰가능’은 모호한 술어이다. 모호한 술어들에는 많은 난점(puzzle)들이 있는데, 많은 궤변들은 모호함이 있으면 어떤 구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 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는 근친상간이 비도덕적이지 않음을 논증하는데, 당신의 새끼손가락으로 당신 어머니의 엄지발가락을 건드린다고 해서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듯 다른 부분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언어에서의 술어는 거의 대부분 모호하고, [그렇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 술어들을 지배하는 논리를 정식화할 때에만 문제가 생긴다.(#5) 모호한 술어라도 명백한(clear) 사례와 명백한 반례(counter-case)가 존재하면 사용할 수 있다(usable). 육안으로 보는 것은 관찰의 명백한 사례이다. 그러면 (아마도) 맥스웰은 명백한 반례를 제시해서 도전하는 것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비논리적) 용어라도 관찰용어의 가능한 후보라는 논제를 뒷받침하려고 시도해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보는 것은 내가 보기에 관찰의 명백한 사례이다. 우주비행사가 [목성에] 근접하면 그는 위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상자(cloud chamber) 속의 미시입자들에 대한 관찰이라고 알려진 것은 내가 볼 때 명백히 다른 사례이다(만일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론이 옳다면). 그 이론이 말해주는 바는, 만일 하전 입자가 포화 증기로 가득한 상자를 가로질러 가면, [그 입자의] 경로 주변에 있는 약간의 원자들이 이온화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증기의 압력이 감소되어 과포화되면, 이온들 위에 작은 방울들이 응결되고 이것이 입자의 경로에 흔적을 남긴다(mark). 결과적으로 나온 은회색 선은 제트기가 지나갈 때 하늘에 남겨지는 비행운(vapor trail)과 (외양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유사하다. 내가 그런 흔적(trail)을 가리키면서 “저기 봐, 제트기가 있어!”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당신은 “나도 비행운은 봤지만, 제트기는 어딨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저기 흔적의 앞쪽을 조금만 봐... 저기! 보이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안개상자의 경우에는 이런 대응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하전] 입자는 안개상자에 의해 탐지될 수 있고 그 탐지는 관찰에 기초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입자가 관찰된 사례가 아니다.

맥스웰의 두 번째 논변은 “관찰가능한 것은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what is observable is what can be observed)”에서 ‘~수 있다(can)’에 주목한다. 물론 한 대상은 일시적으로 관찰불가능할 수도 있다. 여기서 ‘관찰불가능’은 다소 다른 뜻이다. 그 대상은 그 순간에 실제로 놓여진 상황에서는 관찰될 수 없지만, 보다 호의적인 상황에 놓인다면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일시적으로 상처입지 않을(invulnerable) 수 있거나 보지 못할 수(invisible)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 없는(수식어 없는) ‘관찰가능’이나, (그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하면) ‘원리적 관찰불가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맥스웰의 설명에 의하면, 원리적 관찰불가능성이란 그 존재자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관찰될 수 없다는 것을 유관한 과학이론이 함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감각기관(예, 전자현미경 눈)을 갖는 상이한 환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이것은 논의의 주제를 바꾸려는 속임수(trick)이다. 나는 구리로 된 절구와 공이를 가지고 있는데 무게는 대략 1kg 정도 나간다. 어떤 거인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깨지기 쉽다(breakable)고 말해야 하는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휴대용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휴대용 레코드 플레이어와 콘솔(console)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인간(human organism)은 어떤 종류의 측정 장치이다. 그래서 어떠한 선천적인(inherent) 한계를 지닌다(그 한계는 최종적인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세부사항이 밝혀질 것이다). 바로 이런 제한들이 ‘관찰가능’에서 ‘가능(able)’이 지시하는 바이다. 즉, 인간(human being)으로서 우리의 한계 말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것처럼 맥스웰의 논문에는 다른 종류의 논증도 있다. 실행가능한 관찰가능/관찰불가능의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구분은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실재론자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과학에서 가정된 존재자의 실재성이다. 그런 존재자들이 관찰가능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면, 그것들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논리적으로 보면 [전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관찰가능’이라는 용어는 추정되는(putative) 존재자를 분류할 뿐 실제 존재와는 논리적으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스웰은 그 이상의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드러난다. “나는 특정한 지점에 그어진 관찰적-이론적의 구분선은 우연적인 것이며 우리가 가진 생리적 구조(physiological make-up)의 함수이고,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도 없다고 결론내린다.”(#6) 만일 ‘관찰가능’과 ‘존재’가 서로 함축하는지 여부가 유일한 문제라면 존재론적 의미는 없다. 둘은 서로를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분이] 과학적 실재론의 물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내가 과학의 목적과 인식적 태도를 통해 과학적 실재론을 정의했음을 상기해보자. 문제는 과학활동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또 우리가 과학이론을 받아들일 때 얼마만큼 믿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무엇이 적절한 형태의 수용인가? 전체로서의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우리에게 관찰가능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관련성이 많아 보인다. 사실 이쯤에서 한 가지 답변을 시도해볼 수 있다. 한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믿는 것이다. 즉, 그 이론이 관찰가능한 것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대번에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반실재론자가 세계에 대해 믿기로 결정한 바는 그 자신, 아니 인식 공동체가 접근할 수 있는 증거의 범위라고 믿는 것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인류(human race)를 우리가 속한 인식 공동체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변이를 일으킬 수도 있고, 혹은 유관한 이념적 도덕적 결정(‘동물들을 인간(person)으로 간주하기’)을 통해 다른 동물들(지구 생명이거나 지구밖 생명이거나)을 포함시킴으로써 공동체를 확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따르는 반실재론자라면 다음 형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인식 공동체가 Y와 같은 방법(fashion)으로 변화한다면, 세계에 대한 내 믿음은 Z와 같은 방식(manner)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을 반실재론에 대한 반론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증거의 범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는 무관하게 우리의 인식적 방책(policy)은 [늘] 동일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그 조건은 합리적인 강제성이 없어 보인다.(in no way rationally compelling) 내 생각에, 그것은 철저한 회의론을 통해서나 전면적인 맹신에 헌신함(commitment to wholesale leaps of faith)으로써만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철학에서 인식론의 주된 문제들을 지나가는 말로(en passant) 처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 즉 그 이론의 모형이 관찰가능한 현상에 맞는(fit) 이론을 찾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외견상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관찰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인식 공동체의 함수임을 (즉, 관찰가능은 우리에게 관찰가능임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이 대답에서 사용된 경험적 적합성이라는 개념이 낡아빠진 반론들에게 쓰러지지 않으려면 매우 조심스럽게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다음 장에서 그렇게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관찰가능성이 존재와는 무관하더라도(사실, 관찰가능성이 너무 인간중심적이지만), 과학에 대한 적절한 인식적 태도와는 여전히 많은 관련을 가질 수 있다.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

셀라스, 스마트(J. J. C. Smart) 그리고 하만(Gilbert Harman)이 다양한 방식으로 개진해온 견해는 합리적인 추론의 규준(canon)이 과학적 실재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면서 과학 자체를 수행할 때와 동일한 추론의 패턴을 따라야 한다면, 그러면서도 우리가 받아들인 과학이론의 참됨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셀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생각에, 한 이론을 받아들일 좋은 이유를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이론에서 가정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좋은 이유를 갖는다는 것이다.”(#7)

이런 종류의 논증에서 호소하는 주된 추론 규칙은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이라는 규칙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아마 퍼스(C. S. Peirce)의 공적일 테지만,(#8) 근래에 이 규칙을 설명하려 시도하고 그것을 사용한 이는 하만이다.(#9) 나는 단순화된 버전을 제시하겠다. 우리에게 증거 E가 주어져있고, 대안적 가설들 H와 H'을 고려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규칙에 따르면, 만일 H가 H'보다 E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인 바로 그 경우에(exactly if) 우리는 H'이 아닌 H를 추론해야 한다. (비일관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들(qualification)이 필요하다. 언제나 우리는 이용가능한 모든 증거들에 대한 최선의 종합적인 설명으로 나아가도록 애써야 한다.)

우리가 모든 ‘일상적인’ 경우에 이 규칙을 따른다고 주장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규칙을 모든 곳에서 일관되게 따른다면 셀라스의 견해가 제안하는 방식을 따라 과학적 실재론으로 인도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두드러진 ‘일상적’ 경우들도 확실히 많다. [예컨대] 나는 한 밤중에 벽 할퀴는 소리와 작은 발로 타닥타닥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 치즈가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쥐 한 마리가 내 집에 살고 있다고 추론한다. 단지 쥐가 존재한다는 외견상 징조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마치 쥐가 있는 것 같은 상태인 것만도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쥐는 실제로 있다.

이런 추론 패턴이 우리가 관찰불가능한 존재자를 믿는 것으로도 이끌어갈까? 과학적 실재론자는 보다 실제적인(mundane) 맥락에서 우리 모두가 따르는 추론 규칙을 그저 일관되게 따르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는 생각에 대해 나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먼저, 우리 모두가 어떠한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첫 번째 가능한 의미는 학생이 논리학 연습문제를 풀듯이 우리는 그 규칙을 신중하고 의식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또 제한적이다. 분명히 인류 전체는 많은 시간동안 논리 규칙을 따르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formulate)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의미는 의식적 숙고를 요구하지 않는 정도로 우리가 그 규칙들에 따라(in accordance with) 행위한다는 것이다. 이는 각 논리 규칙이 허용 규칙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 (전건 긍정법은 A와 (A이면 B)로부터 B를 추론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그 대신 (B 또는 A)를 추론하는 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가 이끌어낸 모든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그 규칙들을 적용해 도출될 수 있다면, 그런 점에서 그는 일련의 규칙에 따라 행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느슨하다. 이런 뜻에서라면 우리는 언제나 임의의 전제로부터 임의의 결론을 추론할 수 있는 규칙에 따라 행위한다. 그래서 어떤 규칙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규칙이 허용하는 모든 결론을 기꺼이 믿어야 하고, 허용하는 것과 상충하는 결론을 명확히 꺼리면서 믿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의 전제들을 기꺼이 믿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특정한 경우에 특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진술은 우리가 기꺼이 하는 것과 꺼리는 것에 대한 심리학적 가설이다. 그것은 경험적 가설로서, 자료와 맞추어 봐야 하고 경쟁가설들과도 대결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경쟁가설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즉,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이 이론이 말하는 것과 같다고) 기꺼이 믿는다.

이리하여, 과학자가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많은 사례들을 나는 그 이론의 설명적 성공에 기초하여 확실히 설명할 수가 있다. (태거드(Thagard)는 그러한 많은 사례들을 이야기했다.(8)) 내가 과학이론의 수용을 그것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믿음과 동일시했음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추론의 사례들에 대해 두 가지 경쟁 가설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실재론적 입장(account)에 적절하고, 다른 하나는 반실재론적 입장에 적절하다.

벽판 안의 쥐 사례는 경쟁 가설들을 판가름하는 효과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쥐는 관찰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벽판 안에 쥐가 있다”와 “모든 관찰가능한 현상은 마치 벽판 안에 쥐가 있는 것과 같다”는 완전히 동등하다. 각각은 서로를 함축한다(우리가 쥐에 대해서 안다면).

사람들이 추론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단지 [실제로] 따르는지 여부를 아는 것은 흥미가 덜하다고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맞다(granted). 그러나 쥐 문제에서나 다른 실제적인 문제들에서 우리 모두가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 규칙을 따른다는 전제, 그 전제만으로는 불충분해 보인다.(is shown wanting) 그것은 증거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데, 그 증거는 그 전제가 이 맥락과 관련해서 내가 제안한 대안 가설에 반대됨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 두 번째 반론은 만일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 규칙이 옳다고(혹은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재론 옹호 논변에는 추가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규칙은 경쟁 가설들의 집합이 주어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규칙을 적용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일련의 가설들 중 하나를 믿어야(commit to belief) 한다. 그런 후에야 그 규칙은 호의적인 환경 하에서 어떤 가설을 골라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실재론자는 특정한 방식들로 규칙성을 설명하는 상이한 가설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언제나 “이론 Ti는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형태의 가설들 중에서 선택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 규칙이 우리 모두를 실재론자로 만들려면, 실재론자는 자연의 모든 보편적 규칙성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특별한 추가 전제를 가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재론자를 반대자들과 구별해줄 수 있는 바로 그 전제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전제를 아래의 4절과 5절에서 보다 상세히 검토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사람(the logically mind)이라면 그런 추가 전제는 논리적 요술(leger de main)을 부려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관찰된 모든 사실들, 즉 자료가 이론 T와 일치한다(accord)고 가정하자. 그러면 T는 그 자료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이다. 경쟁이론은 T-아님(not-T), 즉 T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 경쟁자는 그 자료에 대한 매우 빈약한 설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군의 경쟁가설들을 갖지만, 최선 설명으로의 추론 규칙은 T가 참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확실히 이끈다. [그러나] 정말 나는 T가 참이라거나 T가 거짓이라는 견해에 동의(commit)하는가?

당연히 이런 종류의 인식론적 줄-마술(rope-trick)은 성공하지 못한다. 우선, 나는 T가 참이라거나 T가 거짓이라는 견해에 동의(commit)하지만, 그 때문에 둘 중 하나로의 추론(inferential move)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 규칙은, 내가 두 가능성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경우에만 작동한다.

둘째, 그 규칙은 논리적으로 꾸며낸 경쟁이론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을 것 같다. 하만은 설명으로서의 가설을 평가하는 데 적용되는 다양한 기준들의 목록을 제시한다.(#10) 어떤 것은 단순성과 같이 다소 모호하다. (하지만 단순성은 당신이 믿는지 믿지 않든지 간에 한 이론을 사용하는 이유 아닌가?) 정확한 기준은 근래에 인식론에서 멋지게 사용되고 있는 통계 이론에서 나온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H는 E에 대해서 H'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좋은 설명이다.
(a) P(H) > P(H') : H는 H'보다 높은 확률을 갖는다.
(b) P(E/H) > P(E/H') : H가 E에 부여하는 확률은 H'가 E에 부여하는 것보다 높다.

(a)에서 ‘초기’ 확률 혹은 사전 확률(가설 자체가 지닌 초기의 그럴듯함)은 소위 베이즈주의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된다. 보다 전통적인 통계학적 실천은 (b)의 사용만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H와 H'이 E에 대해 일정한(definite) 확률을 부여한다고 가정한다. [단] 만일 H'이 H의 단순한 부정이라면, 일반적으로 그런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H가 E의 확률이 3/4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H-아님이 함축하는 거의 모든 것은 E의 확률이 3/4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H가 다른 함축도 가질 것이기 때문에 대개는 더 많은 것을 함축하지도 않을 것이다.)

베이즈주의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명제에 대해 특정한 주관적 확률(믿음의 정도, 신념도)을 가진다고 가정함으로써 ‘확률의 불가용성(unavailability)’ 문제를 돌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경우에, E, H, H'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확률이 (원리적으로) 이용가능하다(available). 그러나 그들은 확률을 철저히 주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확률의 가용성을 얻는다. 내 생각에 과학적 실재론자는 자신의 결론이 주관적으로 확립된, 관찰불가능한 존재자의 실재성에 대한 사전확률에 달려있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베이즈주의가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 (이 점은 퍼트넘의 논변과 관련해서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상당히 추상적 수준에서 논의해왔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셀라스, 스마트, 퍼트넘의 보다 구체적인 논변들을 검토할 것이다. 적어도 공통의 감각에서부터 관찰불가능한 것까지 [직접 연결하는] 단순명쾌한 논증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과학의 통상적 추론 패턴을 따른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명백하고도 자동적으로 실재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의 요구의 제한

이 절과 다음 두 절에서 나는 설명력이 이론 선택의 기준이라고 지적하는 실재론 옹호 논변을 검토할 것이다. 이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는 것을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실재론 옹호 논변은 설명의 요구가 궁극적인(supreme) 것일 때에만(즉, 널리 퍼진 규칙성 중에 어떤 것이라도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면 사실상 과학의 임무는 미완성일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무제한적인 설명의 요구가 숨은 변수를 요청하게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마트, 라이헨바흐, 새먼, 셀라스의 저술에서 등장하는 그런 방향의 논변들을 반박할 것이다. 숨은 변수 이론은 21세기 물리학에서 최소한 하나의 주류 학파의 견해와 상충한다. 나는 그런 철학자들도 실재론에 그런 귀결과의 논리적 연결을 부과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재론자의 열망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잘못된 이상에서 태어난 것이다.

스마트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Between Science and Philosophy)』라는 책에서 실재론을 위한 두 가지 논변을 제시한다. 하나는 실재론만이 옳은 이론과 단지 유용한 이론 사이의 구분을 중요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의 사용에 중요성을 두는 견해, 즉 경험적 적합성만 요구하고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견해를 ‘도구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구주의자는 이론의 유용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코페르니쿠스 가설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면서 프톨레마이오스 가설에 대해서는 도구론자인 어떤 (16세기) 사람을 고려해보자. 그가 프톨레마이오스적인 주전원(epicycle) 체계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가설이 행성의 겉보기 운동에 대해 예측하는 것과 거의 같은 예측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산출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이 실재론적 참이라는 가정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도구적 유용성을 설명해준다. 만일 모든 이론이 단지 도구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만 한다면, 어떠한 이론의 도구적 유용성에 대한 그러한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11)

마지막 문장에서 ‘그러한 설명’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일 어떤 이론도 참인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면, 어떤 이론의 유용성도 다른 이론의 참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 옳다(granted). 그러나 만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참이라는 전제] 대신에 지구에서 관찰된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전적으로(implicitly) 매우 정확한 기술을 제공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유용성에 대한 설명으로 부족한가?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구중심 가설이 참이라고 가정하지 않지만, 보다 단순한 프톨레마이오스의 기술도 행성의 운동에 대한 가까운 근사(close approximation)였음을 여전히 함축하다.

그렇지만 스마트는 틀림없이(no doubt) 그런 대응이 문제를 단지 한 걸음 뒤로 물린 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기초한 예측의 정확성은 무엇이 설명해주는가? 만일 내가 그 이론의 경험적 적합성이라고 말하면, 나는 단지 말뿐인(verbal) 설명만 제시한 것이다. 물론 스마트가 던진 물음은 실제적 예측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모든 실제적인 예측과 가능한 예측, 그리고 과거추리(retrodiction)와도 관련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관찰가능한 행성 현상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맞는다는 사실(만일 그렇다면)을 설명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중세의 논쟁들에서, 우리는 기본적 규칙성은 단지 맹목적(brute) 규칙성일 뿐이고 어떤 설명도 갖지 않는다는 유명론적 대응을 떠올린다(recall). 그래서 반실재론자는 이에 관해 유사하게 말해야 한다. 관찰가능한 현상이 그러한 규칙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because of which they fit the theory, 단지 맹목적 사실이고, '현상 이면의' 관찰불가능한 사실들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상 그런 설명은 이론의 좋음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도 중요하지 않다.

스마트 논증의 주된 방향은 정확히 이런 점에 대한 것이다. 그는 같은 장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직접적으로 미시구조를 가정하고 거시구조는 간접적으로만 가정하는 이론 T가 있다고 가정하자. 거시적 현상에 대한 통계적이고 근사적인 법칙들은 아마도 단지 부분적으로만 상세히 설명될 것이고, 어떤 경우라도 기본 존재자에 대한 정밀한 (결정론적 혹은 통계적) 법칙에서 도출된다. 이제 우리는 T의 일부이고 T가 거시적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만을 말하는 이론 T'을 고려하자. (T'을 어떻게 특징지을 것인가는 열린 문제로 남겨둘 것인데, 여기서 전개되는 논증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한다.

나는 실재론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T'의 성공은 원래(original) 이론인 T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things that it is ostensibly about)에 대해 참이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다시 말해, 전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나 혹은 이론 T가 가정하고 있는 것(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말이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고 T가 실재론적 참이 아니라면, T'의 성공이 완전히 불가해한(inexplicable) 것이 되어버리지 않은가? [그런 경우라면] 관찰적 어휘로 이야기되는 작용(behaviour)에는 무수한 우연적 행운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그런 행운들은] 마치 이론적 어휘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비존재들(non-existent things)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기적적으로 작용한다(behave)고 가정해야만 할 것이다.(#12)

스마트는 다른 구절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우주적 우연의 일치(cosmic coincidence)’를 말한다. 관찰가능한 현상의 규칙성은 보다 심층의 구조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적 차원에서 우연적 행운들과 우연의 일치를 믿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구절에 함축된 설명의 요구를 정확하게 정식화한다면, 터무니없다는 것이 대번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규칙성을 가정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T'을 빈약한 이론으로 만든다면, T도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만일 어떤 종류의 규칙성이 기초적인 것으로서 가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명확한 제한이 있다면, 그 논증의 상황은 T'이 자동적으로 T보다 형편없는(fare worse)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볼 때 설명이 없다는 것과 행운의 사건이나 우연의 일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내가 시장에서 내 친구를 만났던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내가 그곳에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그도 왜 그가 거기 왔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의 일치로 부르지만, 그 사건이 해명될 수 없기(inexplicable)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서 만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13) 우연의 일치이나 일반적인 우연적 상호연관을 이론적으로 제거해야한다고 과학에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은 이치에 닿지도 않기 때문이다. 설명의 요구를 웅변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뿐, 여기에는 그것에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 전혀 없다.

공통원인의 원리 (생략)

설명의 제한: 한 가지 사고실험

셀라스는 과학철학에서 실재론으로의 전회를 이끈 인물 중 하나로, 지난 30년간의 저술을 통해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과학적 실재론을 발전시켜 왔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그의 견해와 논증들을 여러번 논의했지만, 여기서는 방금 검토한 바 있는 스마트, 라이헨바흐, 새먼의 논증과 긴밀히 연관된 몇 가지 측면에 집중할 것이다.(#19) 셀라스의 방식대로 사전 준비(setting the stage)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실증주의적 저술에서 널리 퍼져있는, 과학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어떤 그림이 있는데, 이는 셀라스가 성공적으로 허물어뜨린 ‘수준 그림(levels picture)’이다.(#20) 이 그림에 의하면, 관찰가능한 단칭 사실(‘이 까마귀는 검다’)은 관찰가능한 일반적 규칙성(‘모든 까마귀는 검다’)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는 다시 관찰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만 제한되지 않는 상위의 이론적 가설에 의해 설명된다. 이러한 세 수준은 흔히 사실, 경험법칙, 이론의 수준으로 각각 불린다. 그러나 셀라스가 지적하듯, 이론은 경험법칙을 설명하지도 함축하지도 않는다. 이론은 왜 관찰가능한 사물들이 일정한 정도로(to the extent they do) 이른바 법칙에 따르는지를 보여줄 뿐이다.(#21) 물론, 어쩌면 그런 경험법칙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모든 까마귀는 검다(알비노는 빼고). 물은 100℃에 끓는다(대기압이 정상상태라면). 떨어지는 물체는 가속된다(그 물체가 방해받지도 않고, 비행기와 자동열림줄(static line)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기타 등등. 관찰가능한 것의 수준에서, 우리는 글자로 쓰여 있지 않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의 조건이 크게 붙어있는, 단지 잠정적인 법칙만을 발견하기가 쉽다.

지금까지는 단지 방법론적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가 흔히 하는 일상적인 일반화를 ‘구제’해 줄 이론을 진정으로 바라지는 않는데, 우리 자신이 그 일반화들이 엄격한 보편성을 지닌다고 확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미시구조가 어떤 정확하고 보편적인 규칙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론은 그 사물 자체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즉, 보편적 규칙성의 지배]을 함축해야 한다. 이것이 적어도 지금까지 논의해온 요점에 대한 나의 대응이다. 그러나 셀라스는 단지 관찰가능한 것을 기술만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고 보았고, 그런 불완전성은 (과학의 목적이라는 명목 하에sub specie) 현상 이면에 놓인 관찰불가능한 실재를 도입하도록 요청한다. 이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고실험’에 의해 드러난다.

화학의 어떤 초기 단계에서, 시료와 환경은 관찰에 의해(observationally) 결정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황금 시료들은 왕수(aqua regia)에서 상이한 비율로 용해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고 상상해보자.(#22) 더 나아가 화학자들은 상이한 황금 시료들에 대해 서로 다른 미시구조를 가정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응했다고 하자. 관찰 상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용해 비율의 차이는, 그 시료가 각각 고정된 용해 비율을 갖는 두 (관찰상 동일한) 물질의 혼합물(화합물 아님)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된다.

이 사례에서는 동일한 역할을 하는 관찰의 상대역(observational counterpart)이 없는 법칙을 통해 설명이 이루어졌다. 사실, 우리가 가진 물리적 변수들이 관찰가능한 것 밖에 놓여있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은 설명을 목표로 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해야 하며, 그래서 관찰불가능한 미시구조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셀라스의 주장이다.

우리 앞에는 적어도 세 가지 물음이 놓여있다. [첫째] 미시구조를 가정하고도 관찰가능한 현상에 어떤 새로운 귀결이 없었는가? [둘째] 과학은 설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진정으로 존재하는가(설명 수단이 경험적 예측에 어떤 이득도 주지 않더라도)? 그리고 셋째, 이와 같은 사례에서 과학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미시구조 그림을 사용해야할 어떤 다른 근거가 있는가?

먼저, 내 생각에 그런 가상의 화학자들은 관찰가능한 새로운 규칙성 역시도 가정한 것 같다. 두 물질은 각각 용해 비율이 x와 x+y인 A와 B이고, 모든 황금 시료는 이 물질들의 혼합물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황금 시료의 용해 비율이 x보다 낮지 않고 x+y보다 높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두 값 사이에서 어떤 값이 발견될 것이라는 것(금을 혼합하는 정확성에 한계 내에서는)이 따라나온다. 이 중 어떤 것도 상이한 황금 시료는 x와 x+y 사이의 다양한 용해 비율을 갖는다는 자료에 의해서 함축되지 않는다. 그래서 셀라스의 첫 번째 주장은 틀렸다.

셀라스의 사례를 위해, 우리는 용해 비율을 예측할 수 있는 추가적인 방법이 여전히 없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관찰가능한 요인에 의존하지도 않는 [용해] 비율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과학에 대한 정언적(categorical) 요구인가? 우리는 그런 요구의 한 가지 정확한 형태(라이헨바흐의 공통 원원의 원리)가 자동적으로 숨은 변수를 요구하게 됨을 보았다. [그러나] 숨은 변수는 비결정론적 이론에 ‘고전적인’ 토대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셀라스는 숨은 변수의 요구가 양자물리에서 통용되는 주류 견해에 반할 수 있음을 매우 잘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양자역학 이론의 환원불가능하고 법칙적인(irreducibly and lawfully) 통계적 앙상블은 숨은 변수 가정과 수학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친숙한 사실”을 언급했다.(#23) 그래서 그는 사실상 이론에 숨은 변수를 부가하는 것이 일관적인 경우로만 설명의 요구를 제한했다. 그리고 일관성은 확실히 논리적인 저지선(stopping-point)이다.

불행히도 이런 제한이 실패를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숨은 변수가 양자역학을 고전적인 부류의 결정론적 이론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보인 수많은 증명들이 있지만, 그런 증명들은 일관성보다 훨씬 강한 조건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가정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개의 물리적 변수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 대한 측정에서 동일한 통계적 분포를 가질 수 없다.(#24) 그래서 만일 경험적 예측에서 어떤 가능한 차이를 지적할 수 없다면 실제 차이는 전혀 없다고 가정된다. 만일 그런 조건들이 제거되고 일관성만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숨은 변수도 사실상 도입될 수 있다. 내 생각에 과학적 실재론[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는 과학이 어떤 경험적 결과도 확장하지 않는 설명[의 추구]에 최우선의(overriding) 가치를 두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면 세 번째로 어떻게 반실재론자가 가상 화학자의 절차를 말이 되게 만들 수 있는지 고려해보자. 세 단락 앞에서 나는 새로운 경험적 함축에 대해 지적했는데, 셀라스는 방법론적 이유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금과 다른 금속들에 대해서 어떤 한 종류의 미시구조를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관찰상 구별되는 많은 물질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이론은 그런 물질들이 상호작용할 때 [성립하는] 새롭고 확장된 경험적 규칙성에 대한 함축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희망일 뿐이고, 어떤 가설도 수익성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다. 과학에 대한 진정한 요구는 설명 자체(as such)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이전 것을 수정하고 관찰가능한 규칙성에 대한 새로운 진술을 제안할 수 있는(have a hope of) 가상적 그림(imaginative picture)에 대한 요구이다. 이러한 점은 공통 원인의 원리에 대한 요점과 정확히 같다.

악마와 궁극 논변

퍼트넘은 논리와 수학의 실재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여러 가지 논변들도 개진했다. 『논리철학(Philosophy of Logic)』에서 그는 필요불가결성 논증에 주로 집중했다. 수학적 존재자의 개념은 비기초(non-elementary) 수학에 필수불가결하고, 이론적 개념은 물리학에 필수불가결하다.(#25) 그런 다음 그는 파이잉거(Vaihinger)와 뒤앙(Duhem)의 저술에서 발견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라는 철학적 입장과 대결한다.

사실상 허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옳다. 어떤 개념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그런 개념에 대응하는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경향은 없다. 다만 그런 ‘존재자’가 유용한 허구임을 보여줄 뿐이다.”(#26)

이론이라는 말을 써서 주석을 달아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종류의 이론이 과학의 진전(advance)에 필수불가결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그 이론이 경험적으로 옳을 뿐 아니라 전적으로(in toto)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퍼트넘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 입장을 공격하는데, 우선 좋지 않은 허구주의 반대 논변을 비판하고, 그 다음 그 논의로부터 허구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자신의 근거를 얻어낸다. 그가 보기에 나쁜 이유 중 주된 것은 검증주의(Verificationism)의 논거이다. 논리실증주의는 검증주의 의미 이론을 고수했는데, 이는 거칠게 말해 한 주장의 전체 인지적 내용, 즉 그 주장에서 유의미한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경험적 결과에 의해 검증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의 함수라는 관점이다. 그래서 검증주의는 동일한 경험적 내용을 갖는 두 가설 사이에는 어떤 실제적 차이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세계가 무엇 같은지에 대해 [서로 다르게 말하는] 두 이론인, 러더포드의 원자 이론과 파이잉어의 가설을 고려하자. 후자에는 아마 전자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 이론이 그려내는] 관찰가능한 세계는 마치 러더포드의 이론이 참인 것 같은 세계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검증주의자는 다음처럼 말할 것이다. 파이잉어의 이론은 러더포드 이론의 부정과 일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두 이론은 정확히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글쎄(well), 두 이론은 동일하지 않다. 한 이론은 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관찰가능한 현상이 러더포드가 말한 것과 같을지라도, 관찰불가능한 것에서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는, 만일 당신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회의론의 제물(prey)이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실험에 의해 증명되거나 논박될 수 없는 [여러] 가능성들을 허용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worse), 당신이 수많은 기이한 가능성들을 거부할 이유를 갖지도 못할 것이다. 즉, 악마, 마술, 비밀의 힘(hidden power) 등이 기상천외한 결말로 이끌 것이다.

퍼트넘은 이러한 검증주의 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검증주의에 대한] 그의 대응은 (정말 이상하게도) 검증주의자에 의해 반박된 허구주의에 대해 답변도 산출할 것이다. 회의론의 도깨비를 쫓아내기 위해, 퍼트넘은 현대 (베이즈주의) 인식론을 간략히 도입한다. [이에 따르면] 합리성은 두 가설의 모든 시험가능한 귀결(모을 수 있는 증거를 위한 귀결)이 같다면,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한 것(a priori the less plausible)을 수용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험적 그럴듯함의 순서(ordering)를 어디서 얻는가? 우리는 개별적으로나 혹은 공동체로서 그것들을 얻는데, 그럴듯함에 대한 한 가지 순서를 수용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경험적 사실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연역 논리의 정리를 진술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론적 입장(stand)을 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을 취할 때에만 악마 가설이 ‘미친’ 것인지 아닌지 말할 수 있고, 나는 내가 택한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그리고 나는 그런 입장을 택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또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택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27)

이런 관점 하에서, 러더퍼드와 파이잉어의 차이, 혹은 퍼트넘과 뒤앙의 차이는 (그들이 악마가 있을법하지 않다는 데(implausibility) 아마 동의하겠지만) 그들이 전자의 선험적 그럴듯함에 대해 불일치한다는 데 있다. 각각은 단지 자신이 채택한 입장, 더 나아가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취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인가? 이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사실상, 상황은 거의 그런 상태이다(not quite go that way). 퍼트넘은 전자에 대한 논의를 악마 논의로 교묘하게 바꾸어 놓고는, 우리가 어떻게 악마의 존재를 배제할 수 있는지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제시된 것처럼, 파이잉어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더 약하다는 점에서 러더퍼드의 견해와 다르다. 즉, 그것은 존재 주장에 대한 동의(assent)를 보류했을 뿐이다. 여기서 파이잉어의 견해가 러더퍼드의 것보다 선험적으로 덜 그럴듯할 수 없다는 것이 자동으로 따라나온다. 퍼트넘의 이념적 노력은 기껏해야 비합리성(물론, 퍼트넘 자신의 입장에서 비합리성)에 대한 ‘무신론적’ 반실재론을 고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뿐이고, 다양한 불가지론에 대해서는 사용될 수 없다.

퍼트넘은 한 이론의 참에 대한 증거로서 실재론자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무엇이 요구되는지 물음으로써, 이러한 노선의 추론을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러면 ... 한 이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려면 어떤 추가적 이유들이 요구되는가?”(#28) 그는 [필요한 추가적 이유는] 없다고 답한다. 적어도 여기서 그가 이유(reason)라는 것을 경험적 증거나 강력한 논증 어느 한쪽과 동일시한다면 말이다. (쏠리게 하는inclining 이유는 아마도 또 다른 문제일 것인데, 특별히 퍼트넘은 ‘믿지 않으면 비합리적인(irrational not to believe)’이라는 구절보다는 ‘믿는 것이 합리적인(rational to believe)’이라는 구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퍼트넘은 방금 검증주의를 반박하는 봉사를 해주었기 때문에, ‘없다’는 그의 답변으로는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판결할 수 없다. 조금 전에 그 자신이 이론들이 경험적 내용에서 일치하면서 진리값에서 다를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론자는 신념의 도약(leap of faith)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도약하려는 결정은 합리적인 조사를 받겠지만, 그것은 이유나 증거에 의해 결정(dictated)되는 것이 아니다.

이후의 논문인 “무엇이 수학적 참인가(What is Mathematical Truth)”에서 퍼트넘은 계속해서 과학적 실재론을 논의하고, 내가 궁극 논변(Ultimate Argument)로 부르는 논변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더밋에게서 배웠다고 말하는, 실재론의 한 정식화에서 시작한다.

(주어진 이론이나 담론에 대하여) 실재론자는 (1) 그 이론의 문장들은 참이거나 거짓이고 (2) 그것을 참/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어떤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외적인 것이란 (일반적으로는)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우리의 감각자료도 아니고, 우리 마음의 구조나 우리의 언어 등도 아니다.(#29)

이 정식화는 그 이론이나 담론이 과학[이론]이거나 과학적 담론인 경우에 한해서 다룬다고 할지라도, 내가 제안한 것과 매우 다르다. 더밋의 관점에 대한 폭넓은 논의는 이런 용어들에 대한 그의 용법을 유통시켜 왔고, 퍼트넘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식화를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더밋의 용법은 매우 별나다(idiosyncratic). 퍼트넘의 진술은 매우 짧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확하다. 더밋은 자신의 논문 ‘실재론(Realism)’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실재론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즉 특정한 유형의 존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서 기술한다. 그러나 과거의 실재성이나 수학의 직관주의 같은 것을 논의하고자 했던 몇몇 경우에, 그는 핵심 쟁점이 다른 물음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까닭에 그는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는데, 그는 그런 논쟁을 다음과 같이 다룬다.

[실재론 논쟁은] 한 부류의 존재자나 용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 부류의 진술에 관련된 것이다. ... 나는 논란이 되는 부류의 진술이, 그것을 알기 위한 우리의 수단과는 독립적으로, 객관적인 진리값을 지닌다는 믿음으로서 실재론을 특징짓는다. 즉, 그것들은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에 의해(in virtue of) 참이거나 거짓이다. 반실재론자는 이런 견해, 즉 논란이 되는 진술은 그런 진술의 증거라고 우리가 간주하는 것을 참조해야만(only by reference to)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30)

더밋 자신도 당장 유명론자도 이런 의미에서는 실재론자라는 것에 주목했다.(#31)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추상적 존재자는 존재하지 않고 집합은 추상적 존재자이며 그래서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집합론의 모든 진술에 한 가지 진리값을 부여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면 당신은 이런 진술들의 진리값을 결정할 절차(존재 양화된 진술에는 거짓을, 보편 양화된 진술에는 참을, 나머지 진술에는 진리표를 적용하는 절차)를 가진 것이라는 반론에 직면할 수 있다. 당신이 보기에, 이는 그 진리값이 우리의 지식과 독립적이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만일 우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더군다나(a fortiori) 아무런 지식을 갖지 않더라도, 추상적 존재자에 대한 사태(state of affair)는 동일할 것이라고 분명히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더밋은 실재론을 정의하면서 일반성을 위해 필요조건만을 규정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양자역학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미시물리학의 입자들이 실재하고 그 입자들은 그 이론의 원리들을 따르지만, “입자 x가 정확한 운동량 p를 갖는다”는 진술이 참인 임의의 시각 t에 “입자 x는 위치 q를 갖는다”는 진술은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견해를 다룬 바 있다. 어떤 전통적인 의미에서든 이것은 양자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이다.

또한 적어도 이 문단만 보면, 더밋이 이론이 진리값을 지니는 경우 그 이론에 대한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을 부주의하게 배제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 둘[문자적 해석과 진리값의 소유]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스트로슨이 “1905년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를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해석했을 때, 그는 우리 언어에 대한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사람들은 ‘적절히 해석되면 그 이론은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전형적으로 문자적이지 않은 해석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32)

아마도, 실재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정말 문제시되는 것은 언어에 대한 물음이라는 더밋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근방에서 심각한 철학적 문제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개진한 논변은 심오하고, 심각하며,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의 용어사용법은 전통적인 용어사용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론적 언어의 모든 진술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함축할 필요가 없도록 (단지 그 진술들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으면 된다. 즉 각 진술은 그것이 진리값을 지니게 되는 어떤 조건이 존재하면 된다) 과학적 실재론을 정의하고 싶다. 그럼에도 [과학의] 목적은 그 이론은 참이어야 한다는 것임을 함축했으면 한다. 그리고 구성적 경험론이라는 반대 입장은 더밋이 규정한 의미에서는 반실재론이 아닌데, 그것 역시도 과학적 진술이 인간의 활동이나 지식에 완전히 독립적으로 진리조건을 갖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논쟁이 언어에 대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하튼 퍼트넘 자신은 이러한 더밋의 약한 정식화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 논문의 조금 뒤에서 그는 과학적 실재론 자체(per se)를 다루면서 자신이 보이드에게서 빌려왔다고 말하는 용어들로 그것[과학적 실재론]을 정식화한다. 그러한 새로운 정식화는 내가 궁극 논변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실재론을 위한 새로운 옹호 논변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실재론을 위한 적극적인 논변은 그것이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성숙한 과학이론의 용어는 전형적으로 지시한다는 것(이 정식화는 보이드에서 유래했다), 성숙한 과학에서 수용된 이론은 전형적으로 근사적 참이라는 것, 동일한 용어는 이론이 바뀐 경우에도 동일한 것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 과학적 실재론자에 따르면, 이런 진술들은 필연적 참이 아니라 과학의 성공에 대한 유일한 과학적 설명의 일부이고, 그래서 과학에 대한 그리고 과학이 대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적합한 과학적 기술이라면 포함해야할 부분들이다.(#33)

분명히 과학은 자신의 성공을 설명해야 한다. 세계 내에는 이러한 규칙성이 존재하고, 과학적 예측은 규칙적으로 들어맞는데, 이러한 규칙성 역시도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일단 그런 설명이 충족되면, 우리는 어쩌면 (terminus de jure) (합법적 한계? 최종심급?)에 이를 수 있을까?

[실재론자가] 제공한 설명은 매우 전통적인 것으로 (사물과의 일치(adequatio ad rem), 대상에 대한 이론의 ‘적절성(adequacy)’, 관념의 구조에 의해 사물의 구조를 반영하기) 아퀴나스도 매우 친숙하게 여길만한 것이다.

자, 이제 우리가 과학의 성공에 대한 과학적 설명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하자. 또한 그것을 단지 스마트의 ‘우주적 우연의 일치’ 논변을 재진술한 것으로 해석하지 말고, 그 대신 왜 우리가 성공적인 과학이론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는지 하는 물음으로 간주하자. 스콜라 철학자들을 따르는 실재론적 설명이 과학적으로 수용할만한 답변으로 보이겠는가? 나는 과학이란 생물학적 현상이며, 한 부류의 유기체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수행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과학적 설명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쥐가 자신의 적인 고양이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설명하는 두 관점을 대조함으로써, 요점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이런 현상을 언급하면서 지향적(intentional) 설명을 제시했다. 즉, 뒤는 그 고양이가 자신의 적임을 인식하고, 그래서 쥐는 달아났던 것이다. 여기서 가정된 것은 쥐의 생각이 자연 질서에 ‘적절(adequacy, 부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주의자는 왜 그 쥐가 자신의 적으로부터 달아났는지는 묻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의 자연적 적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종은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한다. 이것이 달아난 쥐만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꼭 같은 방식으로 나는 현존하는 과학이론의 성공은 기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학적인 (다윈주의적) 지성에게 그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과학이론이든 간에 무시무시한 경쟁의 삶 속으로, 즉 냉엄한 정글(jungle red in tooth and claw, 이빨과 발톱으로 피로 물든 정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성공적인 이론만이, 사실상(in fact) 자연의 실제적 규칙성을 파악한 이론만이 살아남는다.(#34)

주석

  1. Brian Ellis, Rational Belief Systems (Oxford: Blackwell, 1979), p. 28.
  2. Hartry Field는 ...
  3. 내가 보기에, 보다 전형적인 실재론은 클라크 글리모어(Clark Clymour)의 신간 『이론과 증거(Theory and Evid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인식론이다.
  4. G. Maxwell, "The Ontological Status of Theoretical Entities", Minnesota Studies in Philosophy of Science, III (1962),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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