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dily Passions, Good Manners, and Cartesian Mechanism
Peter Dear, “Bodily Passions, Good Manners and Cartesian Mechanism,” in Christopher Lawrence and Steven Shapin eds., Science Incarnate: Historical Embodiment of Natural Knowled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pp. 51-82.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과 그의 사회적 삶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신과 감정(passion) 그리고 신체행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일까? 피터 디어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사회적 삶을 추적한다. 예수회 학교를 졸업한 데카르트는 부모의 뜻과 달리 철학자의 삶을 찾아 프랑스를 떠나 살았다. 그러나 그의 출가는 고독한 사색 여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데카르트는 각 지역의 궁중의 삶을 경험했고, 그곳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특히 보헤미아의 공주 엘리자베스와는 철학적 토론자이자 ‘의학적 조언자’로서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그의 Treatise on the Passions of the Soul (1649)은 엘리자베스를 위한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기계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은 그의 군인 시절 베크만(Isaac Beekman)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17세기 궁중 놀이로 유행했던 자동인형(automta)도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당시 다양한 자동인형의 작동은 모두 시계의 원리를 따랐고, 데카르트는 유기체의 작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기계장치를 즐겨 혹은 항상 끌어들였다. 데카르트에게 시계와 같은 기계장치는 그 자체로 이해가능한 것이었고, 자연과 유기체는 기계로서 설명될 때 비로소 이해가능한 것이 되었다. 한편, 인간의 행동에 대한 기계적 묘사는 당시 데카르트만의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궁중의 반복된 의례적 행동이나 군대조직의 규율(자제)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계적 행동으로 일컬어졌다. 즉, 데카르트는 궁중에서 가지고 놀던 진짜 자동인형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군대의 훈육된 인간 자동인형도 접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데카르트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적절한 행동(proper behavior)에 있었다는 점이 이해될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 좋은 철학은 좋은 행동을 만들고, 좋은 행동이란 (사회적으로) 문명화된(civilized) 행동을 뜻했다. 어떻게 기계적 철학과 기계적 방법이 문명화를 이끌 수 있을까? 당시 문명화된 행동은 욕망의 절제, 자제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다. 적절한 행동이란 사회적 계층과 장소와 상황에 걸맞는 행동, 그에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뜻했다. 즉, ‘그 장소와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routine) 행동과 예절형식(manner)이 곧 적절한 행동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은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사회를 반영한 동시에 이해가능하게 해주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부르주아 사회를 위한 자연철학이었으며, 그렇기에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개인들은 사회의 부속물이 될 때 진정한 하나의 사람이 되며, 장소와 상황에 맞게 부속물은 자동적으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데카르트의 저작의 두가지 버전(프랑스어/라틴어)도 이해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양쪽 문화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계(자동인형)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데카르트에게 인간의 특별한 (유일한) 점은 이성적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 유무는 언어나 행동을 통해 판별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에 맞게 적응된 행동을 할 것이지만 자동인형은 그렇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데카르트에게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정신은 감정 및 신체행동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에 의하면, 감정은 정신에, 정신은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정신은 감정을 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훈련을 통하면 적극적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감정은 정신-신체의 통합체였는데, 신체는 감정을 통해 정신에 영향을 주고, 정신은 신체의 조절을 통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후자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한데, 예컨대 감정이 드러나게 되는 울음, 웃음, 한숨 등의 신체행동은 정신을 통해 조절가능하며, 이를 통해 감정을 감출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표현의 신체행동은 당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는 훈련을 통해 통제가능했다. 데카르트가 엘리자베스의 문제에 대해 해준 조언이란 바로 그 문제가 (정신을 통해) 다룰 수 있는 것이며, 그녀에게 주어진 행동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기계적으로 행동하기에 이해가능한 것이었으며, 인간의 행동 또한 기계적 행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해가능한 것이었다. 이성적 행위자의 행동과 기계의 행동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사회적 조건에 맞게 통제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이성은 사회화의 형식을 의미했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데카르트의 사회적 행동도 재평가해볼 수 있는데, 데카르트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는 사회적 관습에 맞추는 것을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는 철학자로서 튀기보다는 사회적 관습에 맞게 옷을 입고 행동했다.
한편, 데카르트는 정신의 두 주요속성으로 판단과 의지를 들었는데, 그중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다. 의지는 인간의 영혼을 진정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예정된 목적과 경로를 좇는 자동인형에서 탈피한 능동적 영혼의 자리를 남겨두고 싶었다. 데카르트는 세계의 작동을 기계적으로 묘사했는데, 기계적 패러다임 그 자체가 목적을 없애주진 않는다. 시계에도 기능이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기능을 기계의 본질이 아니라 주장했다. 즉, 시계의 작동은 그 기능(목적)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작인(efficient cause) 때문에 작동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신이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왜 만들었는가는 이해할 수 없다. 자연은 기계이기에 그 작동방식을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데카르트에게 이해가능성은 규칙(소위 자연법칙)으로 드러난다. 펜싱과 같은 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행동의 목적은 사라지고 규칙(방법)만 남는다. 예절에 의해 형식화된 당시 사회적 삶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성에 의해 조종받는) 자동인형이 되었다. 목적과 기능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방법의 이해로 만족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그 근원을 볼 때,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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