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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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의 물리학, 더 정확히 말해 자연철학은 특화된 제도(institutions)에 묶여 있지도, 자각한 전문가에 의해 지배받지도 않았다. 런던의 왕립학회나 파리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과학 단체는 있었지만, 과학에 대한 논의는 살롱이나 커피하우스에서도 이루어졌다. 더구나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흐릿했으며 사람들은 그 경계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자연철학의 세계는 Newtonian effects, electrical wonders, optical illusions, mechanics 등에 대한 공개 시연(public demonstration)과 같은 것들로 구성되었다. rational mechanics는 수학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천문학은 별도의 목표와 방법, 사회적 체계 내에서 이루어졌다. 정량적 정신(quantitative spirit)은 천문학(고대부터)에 이어 역학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자연철학에는 아직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또한 자연 철학은 지역마다 현저한 차이를 보였는데, 이론과 실험적 양식은 종종 매우 국소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통일성은 희박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물리학은 (천문학이나 화학과 다른) 독자적인 방법과 수학을 갖춘 전문화되고 통일되고 정량적이며 정밀한 분과가 되었다. 약간의 기간 구분을 하자면, 물리학이 독자적인 방법(정밀, 정량, 실험)을 갖춘 때는 19세기의 1/3선의 말로 볼 수 있다. 2/3을 거치면서, 에너지의 원리나 동역학적 개념과 같은 unifying theme은 그동안 느슨하게만 묶여있던 분야들을 통합시켰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물리학은 대학이란 자리에 공고하게 제도화되었으며, 대학의 물리학자들은 전신기사, 광학 기구 제작가, 토목공학자를 비롯한 산업계와의 교류를 통해 물리학의 유용성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3/2 - 3/3 시기에는, (특히 전자기학 영역에서) 에너지 원리와 동역학 개념에 근거한 연속체 물리학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물리학 실험실과 연구소가 보편화된 것은 이때를 거치면서였다.

물리학 성립의 출발점: 통일성의 획득

물리학 내의 이러저러한 통일성에 대한 강조가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있어왔음

  • P. M. 하만: 에너지 개념 + 역학적 설명
  • 크로스비 스미스: “힘”과 “운동”. 즉 동역학(dynamical) 강조(emphasis) [스코틀랜드의 로비슨에서부터]
  • 수잔 캐넌: 프랑스 1810-30. 특히 1816년 비오의 Traite → 스코틀랜드의 Forbes(→Maxwell), Thomson.
  • 부크와일드: 보고, 계산, 실험의 표준 확립 [프랑스]

하만(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에 따르면, 현재 “물리학(physics)”이라는 말 아래 모이게 될 분야들은 (i) 에너지 개념과 (ii) 역학적 설명(mechanical explanation)을 통해 처음 묶이게 되었다. 크로스비 스미스(Crosbie Smith, “Mechanical Philosophy”)은, 이러한 특정한 형태의 실천양식을 만들어낸 이 통합적인 개념은 특히 스코틀랜드의 자연철학자 존 로비슨(Jonn Robison)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로비슨은 physics를 natural history와 natural philosophy, as well as chemistry와 mechanical philosophy로 나누었으며, 다시 mechanical philosophy는 네 개의 하위분과로 구성된 “mechanical history”에 이른다. 그 4개의 분과는 천문학, 응집력 연구(machines, hydrostatics, hydraulics, pneumatics 이론에 관한 연구), 전기와 자기, 광학이다. 로비슨은 네 하위분과 사이에 두 가지 연결점을 파악했다. 첫째, 이들 모두 자연에 있는 “힘(force)”에 주목했다. 둘째, 이들 모두는 물체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스미스는 로비슨이 이러한 동역학적(dynamical) 관심에 기반한 통일성을 강조한 점이 John Playfair, David Forbes, William Thomson에게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통일성에 대한 관심은 “scientist”라는 말을 만들어 낸 휴얼(William Whewell)의 관심과 대조된다. 휴얼은 physical sciences를 mixed mathematics or mixed sciences (mechanics, hydrostatics, pneumatics, optics, astronomy)와 수학화되지 않은 “experimental philosophy” or “applied sciences” (자기, 전기, 열, 빛, 화학, 소리, 기상학)로 나눈 바 있는데, 이는 그가 통일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음을 반영한다.

수잔 캐넌(Susan Canon)은 Science in Culture에서 물리학은 19세기에 발명된 산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스미스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캐넌은 물리학이 앙페르, 사디 카르노, 푸리에, 프레스넬의 리더십 아래 프랑스에서 1810-30년 사이에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비오의 책 Traite de physiquie experimentale et mathematique이 출간된 해인 1816년을 지목한다. 그녀는 비오의 책이 비오가 “물리학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그 물리학이 영국의 첫 번째 세대 물리학자들, 특히 스코틀랜드의 Forbes와 Thomson에게 전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Maxwell이 “fully-formed” 물리학자인 이유는 그가 캠브리지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전에 Forbes 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 된다.

전문분야화의 문제: 민주적 자연철학에서 위계적 현대 과학으로 [Canon의 확립의 효과]

일단 자연철학으로부터 나와 출현하자마자, 물리학은 빠른 속도로 전문 분과가 되었다. 사이먼 섀퍼(Simon Schaffer)은 당시를 민주적 자연철학의 종언과 위계적 현대 과학의 시작으로 파악하는데, 그는 이를 특정한 방식의 발견에 대한 화법의 출현과 연결시켰다. 천왕성, 산소, 전기력 법칙, 광합성의 발견을 예로 들면서, 발견에 대한 새로운 화법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발견을 유일한 영웅적 천재와 연결시키는 “영웅적 공인(heoric authorization)”. 둘째, 그 영웅적 인물의 특정한 기법이 해당 과학 분야의 규범(canon)이 되었다는 점. 섀퍼는 이 표준화된 기법이 영웅적 발견자와 그것을 답습하는 평범한 practitioner의 이분법으로 특징지워지는 사회적 위계와 직결된다고 보았다. 섀퍼는 또한 여기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이 분화되는 첫 신호를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어떤 Canon?

부크와일드는 실험의 표준과 뚜렷한 정량화가 프랑스에서 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18세기 프랑스에서 physique는 physique generale과 physique particuliere의 두 분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전자는 뉴턴 역학과 연결되었고, 후자는 실험 과학 일반 또는 열, 빛, 소리, 전기, 자기에 대한 특수한 연구들을 의미했다. 19세기 1/4 시기, 쿨롱, 라플라스, Malus, 비오, 포아송, 푸리에, 프레스넬의 작업으로 인해 이 분야들은 함께 묶이기 시작했다. (수학화, 정량화, 정밀 실험. 다음 절에서 상세하게 소개)

케네스 카네바(Kenneth Caneva)는 독일에서 19세기 전반세기에 전기와 자기의 연구가 급속도로 변화했음을 보인 바 있다. 1820년대 이전에는 전기와 자기 현상에 대한 이론과 실험은 “concretizing science”에 해당했으나, 1840년대 말경에는 완전히 다른 접근, 즉 “abstracting science”가 출현했다. 이 새로운 접근은 실험의 정밀성에 대한 집착과 physicomathematical 가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용과 연결된다. 1820년대의 Ohm, 1830년대의 Jacobi, Gauss, 1840년대의 Weber, Fechner, Neumann. 이러한 변화는 실험 물리학에서 “이론 물리학”이 하위 분과로 떨어져나옴으로써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이때의 이론/실험의 분화는 18세기의 분화된 상태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Jungnickel과 McCormmach는 다음을 지적한다. (i) 재원이 적었던 독일 대학들이 실험 물리학의 교육과 연구를 “보완”하기 위해 이론 물리학의 자리를 만들었으며, (ii) 19세기 이론 물리학은 18세기 rational mechanics가 아니었다. 독일의 이론 물리학은 전기동역학, 물리 광학, 열역학, 통계 물리학과 같은 새로운 분야에서 태어났다. 이 분야들은 18세기에 수학화된 적이 없었거나 분야 자체가 없었던 분야였다.

수학화와 라플라스주의 물리학

로버트 팍스는 라플라스의 Traite de mecanique celeste (1805)의 제4권이 “진정한 라플라스주의 스타일의 과학”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 책에서 라플라스는 근거리력을 가정하여 모세관 현상과 공기중에서의 빛의 굴절을 고도로 수학적인 방식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그 이론적 결과를 실험 데이터와 비교했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비오, Malus, 포아송과 같은 physiciens에게 표준을 제공했다. 비오의 볼타 전기, 소리의 전파, 색 분광에 대한 연구, 맬러스의 이중 굴절과 분광에 대한 연구, 포아송의 전기와 자기 연구는 모두 라플라스주의 물리학의 정신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

제도적 기반: Ecole Polytechnique, Societe, and prize competition (모두 라플라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

18세기 말, 특히 Ecole Polytechnique이 설립되면서, 프랑스 physiciens는 정확성, 새로운 (정밀)기구의 발명, 있던 기구의 새로운 사용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그 전까지 일반화돼 있지 않았던 numerical table의 형태로 그들의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프랑켈은 이러한 점들을 모아 라플라스주의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물리적 존재자(e.g., 열)를 측정하기 위한 새로운 기구와 기법의 사용, 둘째, 정확성과 정밀성에 대한 새로이 증폭된 관심, 셋째, 실험 결과를 최대한 숫자의 형태로 표현하기, 넷째, 정량적 데이터 또는 대수적 관계의 입자간의 원거리력 패러다임에 동화시키기. 최근 부크와일드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표상방식의 변화, 즉 기하학적 표상에서 대수적 표상으로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특징들이 모두 라플라스에게서 기인한 것은 아니며, 그 대부분은 18세기 말에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1805년 이전에 그것들은 함께 묶이지 못했으며, 라플라스주의 프로그램은 1815년에서야 정점에 이르렀다.

위의 변화는 프랑스에서 특별히 나타난 점들로, 특히 프랑스 혁명기에 나타난 새로운 교육 기관의 설립에 기인한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군사, 민간(토목) 공학뿐 아니라, 수학과 물리 과학을 가르쳤다. 라플라스가 여기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렇다고 그 학생들이 모두 동일한 길을 가진 않았다.(e.g., 비오 vs. 아라고) 1807년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Societe는 라플라스, 베르톨레, 비오, 맬러스, 아라고, 포아송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구성원들은 정밀한 데이터를 만들어내고자 했으며 가능하다면 그 데이터를 물리과학과 화학에서의 근거리력과 수학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다.

한편 경연대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재밌게도 라플라스의 근거리력에 기반한 미시적 설명은 지배적이지 못했다. 몇몇 수상자들은 라플라스의 가정을 위반했음에도 멋진 수학적 전개와 데이터와의 정확한 일치를 기반으로 상을 받았다.(e.g., 1812년 푸리에의 수상, 1818년 프레넬의 수상) 라플라스의 가정들(근거리력, 칼로릭 등)은 공격받았고, 점차 라플라스의 입지는 좁아졌다. 1830년 이후 물리학의 새바람은 영국과 독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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