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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일 (월) 11:06 판

로버트 영 지음, 권오형, 김영식 옮김, 「맬서스와 진화론자들 : 생물학 이론과 사회 이론의 공통된 맥락」, 김영식 편, 『과학과 근대사회』 (서울: 창비, 1989), 205-245쪽. 원문 : Robert Young, “Malthus and Evolutionists: The Common Context of Biological and Social Theory”, Past and Present 43 (1969), 109-145; reprinted in Robert Young, Darwin's Metaphor: Nature's Place in Victorian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pp.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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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맬서스와 진화론자들

생물학 이론과 사회 이론의 공통된 맥락


로버트 영(Robert Young)

권오형, 김영식 옮김


II. 계몽주의 : 인간의 완성 가능성

다윈 이후의 관점에서 맬서스를 돌아본다면 식량공급은 기껏해야 산술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제한받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은 인간에 관한 자연법칙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신념을 극복하는 일련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단계로서 결과적으로 인간을 동물—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자연의 일부분—로 보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맬서스는 생물학자이자 인간생태학자였다. 사실, 정신과 육체의 분리에 의문을 품게 한 것은 진화 이론이었고, 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목적에 있어서는 인격체로 간주되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유기체였다.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우리는 맬서스를 사회적 다윈주의—사회적인 생존경쟁과 적자생존—로 이끄는 자연관의 근원으로 보게 된다.

콩도르세와 고드윈의 저술들에서 유토피아적 사색은 인간들 사이의 투쟁·질병·성욕·걱정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향한 무한한 진보를 생각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경제학, 사회 이론 그리고 문학사에서 고드윈의 위치는 평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진화 이론에서 그의 역할은 주목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했다. 지구상의 모든 제한요인, 동물적 본성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넘어서서 인간이 무한히 완성 가능하다는 그의 관점은 18세기 낙관론의 극단적 예를 보여준다. 『정치적 정의』의 제1판에서 고드윈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뿐 아니라 유기적·비유기적 본성들도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성은 지고(至高)하며 아마도 출생과 사망은 멈출 수 있을 것이며, 사회는 완전한 조화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진화 이론의 역사에서 이 관점은 맬서스의 현실감각과 너무나 상반되어서 결국은 그의 『인구론』을 낳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후 판들에서 자신의 이론을 완화시키긴 했지만, 맬서스는 자연의 이미지를 온화한 조화의 이미지로부터 자연에 의한 생계수단 공급과 식량과 성(性)에 대한 인간의 수요 사이의 어쩔 수 없는 불균형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진화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촉매로 작용했던 것은 바로 이 이론이었다. 고드윈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아주 멀찍이 격리시켰고 그에 대한 맬서스의 반작용은 인간을 자연 속에 굳건히 위치시키기 위한 관점상의 본질적 변화를 제공했던 것이다. 해즐리트의 표현대로 맬서스의 『인구론』은 “고드윈 씨와 ‘현대철학’의 다른 옹호자들이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맬서스의 반작용을 일으킨 두 번째 계기는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믿음의 또다른 형태, 즉 콩도르세로부터였는데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의 스케치』는 대혁명기의 파리가 공포정치의 극에 달해 있을 때 사형선고를 받고 숨어 있을 당시 씌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낙관적인 글에 묘사되어 있는 인간의 희망과 그가 처해 있던 실제 환경 사이의 부조화를 두드러지게 한다. 콩도르세는 이성과 과학이 무한한 완성 가능성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자유로운 연구, 자유, 정의는 전제정치·미신·편견 등을 점차로 극복할 것이고, 과학은 인간계몽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수명은 무한히 연장될 것이며, 육체적·정신적 요소 양쪽 모두가 무한히 개선될 것이었다. 노예제도와 전쟁은 사라질 것이고, 개인이 획득한 우수한 형질은 유전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가축의 품종개량이 이러한 희망에 확신를 주었다. 인구가 생계수단을 앞지를 가능성은 있었으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인류의 무한한 완성 가능성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맬서스는 1817년판 『인구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활이 한쪽으로 너무 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바로 펴기 위해 아마도 내가 반대방향으로 너무 많이 굽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저술의 어떤 부분이라도, 만약 그것이 활이 종국적으로 바로 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을 가졌거나 진리의 진보에 방해가 된다고 유능한 재판관에 의해 간주된다면, 그 부분을 기꺼이 폐기할 수 있다.

맬서스는 먼저 진보에 대한 ‘장애물들’에 관심을 집중시켰고, [그로 인해]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보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III. 페일리 : 조화로운 자연

맬서스주의는 사회적·생물학적 관념들이 그 공통된 지적 맥락의 일부를 이루는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스미스는 『쿼털리』(Quarterly)와 『에딘버러 리뷰』(Edinburgh Reviews)의 거의 매 호가 맬서스에 대한 논쟁에 관련된 논문이나 언급을 싣고 있다고 지적했다. 맬서스 전기 작가는 맬서스에 대한 논박이 30년 동안이나 빗발치듯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서 논쟁이 벌어졌다. … 월러스, 고드윈, 콩도르세 그리고 심지어 페일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구와 식량공급 사이의 어떤 잠재적 불균형 형태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시각은 그들이 이 불균형의 문제를 인류에 대한 진짜 가능성으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낙관의 분위기 속에 흡수되어버렸고 계속해서 제기되던 의문들은 장애가 생겨나면 그것을 극복하게 될 진보의 약속과 함께 잠재워졌던 것이다.

페일리는 이 문제를 더 직접적으로 고찰하였다. 즉 그는 모순이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으나 아직도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낙관론적인 시각 속에서였다. 그는 어떤 면에서 과학적인 발견들에 대해 사실을 부인하지 않은 채 안정을 되찾아주는 일반화 속에 그것을 흡수시켜버리는 세련된 신학자들의 대응의 특징 같은 식의 반응을 보였다. 신의 방법과 인간이 조정된 셈인데, 그 이전 세대는 그 필요성을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지는 않았다. 페일리는 『자연신학』(1802)에서 맬서스를 다루었다. 마지막 장은 신의 성격, 자연적 속성들, 유일성, 선(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논의의 이 부분을 자연적 수단에 의한 종(種)의 점진적 출현을 거부하면서 시작했다. 그는 신의 선함에 대해서 다루면서 신의 설계를 옹호했다. “또한 설계는 실패작이 아니다. 결국은 행복한 세상이다.” “그러나 분명히 고통과 궁핍은 존재한다.” “악(惡)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바로는—계획된 목적물이 아니다.” 그러나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악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멸성은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쫓는 일은 쫓는 자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실 빨리 죽는 것은 서서히 죽는 것보다 낫다. 자연은 매우 다산적이다. 사실 자연은 ‘초다산성’을 보여준다. 모기나 쥐가 퍼뜨리는 전염병을 생각해보자. 이런 과잉은 조절하기가 쉬우며 그것은 부족함을 메우는 일보다 훨씬 쉽다. 그렇다고 해도 그 자손을 모두 부양할 수는 없다. 과잉은 파괴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동물이든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산적 기능의 효과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다른 통제와 제약들—모두 같은 목적에 부응하는—과 연결되어서, 다른 것들에 대한 행동에 의해서 생겨나는 ‘희박화’가 있는 것이다.” 종들은 서로를 한계 속에 유지시켜준다. “비록 자연의 작업의 세부사항에서 실패가 생겨날 수 있어도, 그 커다란 목적에서는 있을 수 없다.” 페일리는 아주 속편한 결론을 내렸다. “이 고찰들이 적용되는 주제, 즉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은 신의 작품들, 즉 실제 표적이 되는 경제성—효용의 특성이 제기되는—의 작품들에서 유일하거나 적어도 주된 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고찰에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물론 이런 계획들은 우리가 폭넓은 견해를 취할 때만 유익하다. 페일리는 사유재산, 육체적 고통(그것이 끝남으로써 얻어지는 안락에 주목하면서), 질병, 죽음에 이르는 병(“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의 가치를 입증해준다”), 그리고 죽음(“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 등에 호의적인 정당화를 제공해주었다. 페일리가 맬서스의 이론에 대한 뚜렷한 언급을 하게 된 것은 ‘시민생활의 죄악들’ 이라는 제목에서였고 거기서 그것은 같은 정도 또는 그 이상의 안심시키는 용어로 표현되었다. 페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들은 육체적 악덕보다도 훨씬 더 처리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크기가 매우 작을 뿐 아니라 또한 일종의 필요성으로부터—우리 본성의 구성요소로부터뿐만 아니라 아무도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 구성 요소의 한 부분으로부터—결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인류는 모든 나라에서 어느 정도 빈곤의 상태에 이르도록 번식한다. 세대 번식은 기하급수로 진행한다. 자원의 증식은 가장 유리한 상황 아래에서도 산술급수의 형태를 띨 뿐이다. 따라서 인구는 항상 자원을 앞지르고 풍요의 선을 넘고 생계수단의 생산의 어려움에 의해 제한받을 때까지 계속 증가할 것이다(인구에 관한 최근의 논문에서 이 주제에 관한 것을 볼 것). 그러므로 이러한 어려움은 그것에 부수되는 상황들과 함께 모든 오래된 국가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가 ‘빈곤’ 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과 예속 및 속박을 부과한다.

페일리는 이 과정이 일부에게는 피해를 주지만 모두의 평균적인 행복은 중가시킨다고 주장하고, 계속해서 좋은 정부, 종교, 청결한 생활, 그리고 “고통스럽고, 유해하고, 모순되고, 만족되지 않고 만족될 수도 없는 욕망의 지배와 대조되는 잘 방향지어진 취미와 욕망들”을 격찬했다. 이 장은 시민생활의 차별들과 돈·지위·재산의 분배를 점잖게 옹호하며 끝난다. 예를 들면 그는 “시민생활의 차별들은 그것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덕으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그런 생각에는 근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자연의 조화와 안간의 도덕적 작인은 페일리에게 보편적 확신이었던 것이다.

… 페일리를 비롯해 자기 만족적인 자연신학 속에 맬서스를 포함시키려고 노력했던 많은 과학자들에게 맬서스의 원리는 주기적으로 자연의 조화를 재확립시키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변화의 메카니즘이기는커녕 자연과 사회 양쪽 모두의 현상유지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맬서스의 법칙은 고통과 죽음, 그리고 멸종에까지 이끌었지만 자연의 구성요소의 변화를 낳지는 않았다. … 페일리는 불유쾌한 사실 대신에 조화와 자비심을 거의 전적으로 강조했다. 경쟁이 아니라 조화가 기조였던 것이다. 맬서스가 낙관론에 대한 자신의 교정수단의 근거로 삼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화는 페일리에게는 뚜렷하지 않았다. 페일리는 콩도르세와 고드윈처럼 인간이 무한히 완성 가능하며 무한히 오래 살 수 있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고통·죽음·멸종이 조화를 재정립하기 위한 조절기능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

다윈은 맬서스와 페일리 양쪽 모두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므로, 여기서 다윈의 진화 이론의 발전에서 두 사람이 한 역할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 … 페일리는 완전한 적응을 강조하였고, 맬서스는 갈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것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대조적이었는데, 다윈은 이들을 종합했다. 투쟁은 적응을 설명하기도 하고 낳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IV. 찰머스 : 심판자로서의 신

비록 원래의 신정론(神正論, thedcy: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라고 하는 주장-역자)이 계속 작용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긴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론』 제2판에서 자연신학에 관한 장들을 삭제했다. 또한 자기가 저자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분량을 여러 배로 늘렸으며 부제를 바꾸었다. 1판의 부제는 ‘고드윈 씨, 콩도르세 씨,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생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미래 사회의 개선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의’ 인구의 원리였다. 2판(1803)은 “인구가 낳는 해악을 미래에 제거 또는 완화시킬 전망에 대한 탐구와 함께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인구의 과거와 현재의 효과들에 관한 견해”를 언급했다. 맬서스는 인간과 사회의 완성 가능성에 관한 생각에서 인구의 원리의 효과에 관한 자료의 집적과 인구에 대한 새로운 제한—악이나 불행으로 취급되지 않는—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는 결혼의 ‘도덕적 절제’라는 요소를 포함시킴으로써 1판의 가혹한 결론을 완화했다. 자연신학의 제외가 그렇듯이 1판과 2판 사이의 구분은 완전하지 않았다. 아내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결혼을 도덕적으로 또는 신중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원칙은 1판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강조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맬서스가 2판을 “새로운 저작”이라고 구별한 것은 타당했다. 2판과 그 이후의 판에서의 또다른 중요한 변화는 『인구론』의 개인적·논쟁적 소론으로서의 성격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고드원과 콩도르세에 대한 비판들은 남아 있었으나, 1789년의 『인구론』에서 부차적이었던 빈민구제법에 대한 공격이 완성 가능성에 대한 공격을 대체했다. ‘도덕적 절제’의 원칙과 공공자선에 대한 비판은 맬서스에 대한 아주 다른 해석—이신론(deism)에 기초한 페일리의 조화된 자연관 대신 신을 준엄한 구약성서의 심판관으로 보는 칼뱅주의의 해석으로 바꾼—의 원천을 제공했다.

… [맬서스의 법칙에 심취해 있던 에딘버러 대학의 신학부 교수] 찰머스(Chalmers)는 종교적 교리와 자유방임경제 이론의 통합을 그의 필생의 작업으로 보았다. 그의 저술들은 자연신학, 정치경제학 그리고 지질학을 포함했다(당시로선 유별난 결합이 아니었다). 『정치경제학』(1832)에서 그는 “대중의 정당한 경제적 상태는 그들의 정당한 도덕적 상태에 기인하고, 인격은 편안함의 원천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1808년부터 그는 맬서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특히 국가의 자선행위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의 자선행위가 개인의 성실성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선행위가 보다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 그것을 탕진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구체적 예들이 없었어도 맬서스의 이론이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히 역설적인 공론이 가장 성공적인 예증들에 의해서 그렇게 잘 뒷받침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적극적인 구제사업이 가난의 비참함을 제거하리라 믿는 것은 매우 헛된 일이다. 구제를 어느 한도 이상으로 하면 가난을 낳는 병적인 원리를 배양하게 된다. 빈곤의 확대에 대한 구제는 부자들의 너그러움에 있지 않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과 습관에 달려 있다. 그들의 가슴에 독립의 원리를 심어주라. 그들의 성격에 고상함의 높은 품격을 부여하라. 그들이 빈곤상태를 수치로 생각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라.

성경의 영향력을 수단으로 해서 사람들의 습관을 개혁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이었다. 빈곤자의 10% 정도만이 진정한 불행 때문이라 볼 수 있고 나머지는 도덕적으로 나태한 자들이었다. “(빈곤상태로의) 타락에 대한 수치감은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남자답게 대처하게 하는 강력한 자극이며, 정직한 자립에 대한 긍지로써 그것을 견뎌내게 한다.”

…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톰 페인(Tom Paine)을 읽을까봐 교육을 두려워한 반면, 맬서스는 정치경제학을, 그리고 찰머스는 성서를 공부하는 것을 옹호했다.) 스크로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체의 공공의 조치에 대한 널리 알려진 찰머스의 완강한 적대감—맬서스의 인구이론과 인구의 뚜렷한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처방, 즉 ‘신중한 제한’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지적했다.

모든 주제에 관한 모든 논의가 관련되며, 그것에 의해 모든 문제가 결정되는 하나의 주된 원리는 맬서스의 공리이다. … 이 공리로부터 명백히 추론되는 것은 생계수단의 확대는 모두 좋은 점보다 해악이 더 많고 … 농업상의 개량은 모두 저주이며, 우리는 생계수단을 늘려서는 안되고 살아나가야 할 인구의 증가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층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는 경제적 구제책은 “그것이 당장에 유익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번식을 장려하여 오직 비참함만을 더할 뿐이라는 것이다.

… 맬서스 이론의 사용에 관한 연구라는 맥락에서는 찰머스의 관점은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반자연주의적 해석의 극단을 보여준다. 가장 첨예한 대조는 18세기 낙관론자들과의 사이에서이다. 고드윈과 콩도르세는 이성과 사고의 노력이라는 수단을 통한 무한한 진보를 예측한 반면 찰머스는 사람들이 오직 자신들의 양심에 따르고 요구되는 도덕적 투쟁에 종사하기만 했으면 하는 동일한 희망을 견지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준엄한 재판관에 의해 형벌을 받을 것이었다.

V. 다윈 : 도덕적 절제의 제거

페일리는 자연의 조화를 강조했고, 찰머스는 전적으로 도덕의 맥락에서 자연과 사회 간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윈은 페일리의 해답을 가지고 질문들로 전환시켰다. 적응은 설명을 필요로 했다. 그것들은 단편적인 설계들 각각의 증거는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바로 여기서 다윈이 맬서스의 이론으로부터 ‘도덕적 절제’를 제거하였는데, 다윈은 그것을 우선 인간이 아닌 동물에 적용하였고 페일리의 훌륭한 적응들이 어떻게 출현했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그것을 사용했다. 그리고 맬서스 이론은 이차적으로 다시 인간에게 적용되었다. …

『종의 기원』(1859) 초판에서 다윈은 논의의 순서를 되새기면서 그의 주장을 소개했다. 앞부분은 사육상태와 자연상태에서의 변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었다. 그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세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생존경쟁—그것들의 기하급수적 증가의 높은 승수(乘數)들의 필연적 결과—이 다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맬서스의 이론이 동물계와 식물계 전체에 적용된 것이다.” 생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태어나고 이것이 생존경쟁으로 이어지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한 변이는 살아남기 좋은 기회로 이어지고 자연적으로 선택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는 다음 세대들로 이어질 것이다. … 1884년의 『소론』(Essay)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10배의 위력을 가지고 적용된 맬서스의 이론이었다. 모든 풍토에는 많고 적은 수의 동물들 각각에 적절한 계절이 있기에 모두가 매년 증식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류의 증가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도덕적 절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천천히 증식하는 인간도 25년마다 두 배가 되며 식량을 더 쉽게 증산할 수 있다면 더 짧은 시간에 두 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 수단이 없는 동물들에게는 각각의 종을 위한 식량의 양은 평균적으로 일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모든 유기체는 기하급수적으로,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엄청난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 다윈의 해석을 특징짓는 것은 ‘도덕적 절제’라는 맬서스의 관념의 제거와 식물과 동물에 관한 자연법칙을 남긴 ‘인구의 압력’이라는 개념의 강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실상 맬서스의 초판에서 볼 수 있는 불가피한 딜레마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것은 비록 2판에서는 ‘도덕적 절제’라는 부분적 완화책과 나란히 자리했지만, 맬서스가 초판과 2판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강력한 필연적 법칙’이었다. 이 결정론적인 기초에 대한 언급들은 양쪽 판에서 수십 번씩 나타나며 그것들 자체가 다윈이 인간에게 이 법칙들을 적용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비록 인간이 지적 능력으로 인해 다른 동물들 위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물리적 법칙이 생명계의 다른 부분에서 작용한다고 관측되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

VI. 월러스 : 인구 법칙의 차별적 적용

다윈이 진화의 문제를 머릿속에 지닌 채 6년 동안 현장연구로부터 돌아왔던데 반하여 월러스는 진화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갖고 이 분야로 들어갔으며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발견하고자 했다. ...1844~45년의 같은 시기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도 읽었다. 그 시기에 관해서 월러스는 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은 맬서스의 『인구로』일 것이며 나는 사실들의 탁월한 요약과 결론으로의 논리적인 추론 때문에 이 책에 매우 탄복했다. 그것은 그 당시까지 읽은 것 중 철학적인 생물학의 어떤 문제를 취급하 첫 번째 책이었으며, 그 주요 원리들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게 되었고 20년 후 생물 종의 진화의 유효한 작인에 대해 오래도록 찾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월러스는 그때 20대 초반이었다. 몇 장 뒤에서 그는 맬서스를 읽은 것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형성한 두 가지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 “그 저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의 독자적 발견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 월러스가 실제로 최적자 생존이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껏은 말레이 군도에서의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인종학적인 연구의 맥락에서였다. 우리는 월러스의 이에 대한 네 가지 언급을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맬서스 이론을 인간 종에 응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종들로 확대되는 특징을 보인다.

다시 종의 기원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동안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맬서스의 『인구론』(이것은 내가 10년쯤 전에 읽었는데)과 모든 야만인들의 수를 거의 정체 상태로 유지시켜준다고 그가 내세운 '적극적 제한' -- 전쟁・질병・기아・사고 등 -- 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때 이 제한들은 동물에도 틀림없이 작용하여 그 수를 작게 유지토록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보다 매우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에 ... 그것들에게는 이 제한이 훨씬 강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 이것이 어떤 종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어렴풋이 생각하는 동안 최적자 생존이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1903년에 기록된 두 번째 언급도 역시 효과의 정도에 있어 동물과 인간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 이론에 대한 월러스의 입장을 보여주는 고전적 출처는 그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맬서스의 이론을 상기한 것이 자기 자신의 가설의 형성에 결정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3년 후(처음 읽은 지 64년 후)에 월러스는 맬서스의 『인구론』 6판을 다시 읽고 그가 기억하기에 그에게 가장 감명깊었던 장들에 대한 회고를 남겼다. 그것은 2권에서의 자연법칙에 관한 구절이나 개선 가능성에 대한 비난들이나 ‘도덕적 절제’의 작용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1권의 3장에서 12장, 특히 3장에서 8장까지의 누적적 효과였다. ... 그것은 짐승 같은 생활, 병, 허약, 열악한 음식, 어린아이를 돌볼 능력의 결핍, 부족한 자원 기아, 유아살해, 전쟁, 학살, 약탈, 노예제도, 추위, 배고픔, 질병, 전염병, 역병, 그리고 낙태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었다. 월러스는 계속해서 특히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구절을 열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거기서 나는 인간 사이에서의 전쟁・약탈・대학살이 동물들 사이에서는 초식동물에 대한 육식동물의 공격과 약한 동물에 대한 힘센 동물의 공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기아, 가뭄, 홍수, 그리고 겨울폭풍들은 사람에게보다 동물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두 배 내지 천 배의 번식 능력을 갖고 있지만 항상 존재하는 연례적 파괴 또한 몇 배는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내게 번뜩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 월러스의 이후의 견해들은 생물학과 사회 이론에 대한 맬서스의 영향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인간과 종의 기원에 관한 월러스의 관심이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의 공동 발견으로 이끌었지만 인간의 완성 가능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최적자 생존이 전적으로 충분하다는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미적・도덕적 능력들에 관해 예외를 두게 되었고 점점 더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한 인간 욕구의 예견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효용의 원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임을 이미 거부하였으므로 더 나가가서 맬서스에게서 그것이 기원했음을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81년 월러스는 다윈에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그에게 맬서스의 법칙이 인간의 진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주었다고 편지했다. 조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인간이 실패한 것 때문에 자연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월러스의 생각으로는 자발적인 협동과 개혁이 사회변혁의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을 대체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이 “그것에 의존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서 조지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 “아담 스미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과 동등한 진보를 정치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이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만하다”고 이야기 되었다. 1898년 『경이의 세기』를 쓸 때쯤에는 미래사회에 대한 월러스의 사회주의적 희망들이 그로 하여금 사회적 경쟁을 완전히 거부하게 하였고 어떤 메커니즘도 규정되지 않은 채 필연적인 지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말년에 와서 월러스가 “자연은 잔인한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하고 고통의 목적과 한계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물세계에서의 맬서스적 경쟁을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맬서스적 견해와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해결은 그 단순함에 있어 거의 데카르트적이었다.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아주 적게 느끼거나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은 문명화된 종족보다 (고통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VII. 스펜서 : 진보에 대한 믿음과 라마르크주의

맬서스와 진화 및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더 캐고 들어가기 전에 가장 뛰어난 세 명의 진화론자 가운데 나머지 한 사람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월러스가 (사회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형성됨에 따라) 맬서스와 최적자 생존에 의해 시사된 인간의 진화 메커니즘의 만능성에서 물러선 반면, 스펜서는 내가 고찰하려는 경우 중 끝에서 두 번째 것을 제공한다. 스펜서의 주된 관심은 항상 인간과 사회였다. ... 1852년 그는 「발전 가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진화를 옹호했으나 진화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전혀 없었다. 그의 간단한 주장의 주된 주제는 ‘환경의 변화에 따른 계속적인 변형’이 개별 창조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에 그는 「인구에 관한 이론 -- 동물의 다산성에 관한 일반 법칙으로부터의 추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했다. 인구 이론과 결합되고 동물의 다산성에 적용된 진화에 대한 믿음이 다윈과 월러스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과 같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스펜서의 이론에는 그러한 종합은 없었다. 맬서스의 법칙은 끝나기 몇 페이지 전에야 언급되는데, 인구의 압력은 진보의 근접 원인이라 불리었다. 자연선택의 원칙도 언급되기는 하였으나 인간 사회를 넘어서서 발전되거나 확장되지는 않았다.

... 스펜서는 ... 신념에 가득찬 라마르크주의자가 되었다. 스펜서의 해석의 핵심은 인구의 압력이 아니라 진보 자체였다. 스펜서는 자연이 본래 진보적 경향을 가진다는 점에서 라마르크와 의견이 일치했다. 그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임의로 뜯어고쳐서 이러한 진보 메커니즘을 습득된 형질의 유전이라고 생각했다. ...

1886년에 스펜서는, 비록 그 자신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계속하여 믿는다고 크게 비판을 받아왔지만, 월러스도 인간의 진화 메커니즘으로서 최적자 생존을 버렸고 다윈도 후기 저작에서 동물들의 진화에 있어서 자연선택 이외의 메커니즘들에 대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다윈은 정신과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획득형질의 유전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스펜서는 1887년에 따로 출판된 책의 서문에서 그가 생물학 이론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에 그렇게 끈질기게 집착하나 이유는 그것이 심리학, 윤리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써 그는 「유기체의 진화의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는 맬서스적인 요소가 더 단순한 종류의 정신 현상에 작용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하였으나, 그에게는 용불용(use and disuse)이 인간과 사회의 발전에 주된 요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회 전체가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빨리 진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맬서스 모델에서의 진보는 너무 간접적이고 너무 느렸던 것이다. 확고한 진화적 진보에 대한 스펜서 특유의 낙관적인 신념은 맬서스를 응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맬서스로 하여금 『인구론』의 논쟁적인 초판을 쓰도록 유도했던 이론들을 상기시켜준다. 스펜서의 자유방임적 낙관주의는 맬서스보다 루소, 콩도르세, 고드윈과 훨씬 가까웠다. 물론 스펜서도 투쟁의 역할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진보의 빛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자연의 에너지의 진정한 근원임에 틀립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펜서의 진화이론은 부정적인 예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반맬서스적이었던 것이다. ...

VIII. 사회주의 : 다윈과 맬서스의 분리

맬서스의 이용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과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명백한 것은 호프스태터의 『미국 사상 속에서의 사회 다윈주의』의 영국판을 시도해 보는 것이겠다. 맬서스, 다윈, 스펜서는 미국의 ‘도둑귀족들’(19세기 미국의 악덕자본가들을 가리킴 - 역자)뿐 아니라 영국 제국주의에 합리화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정연한 해결은 맬서스와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1860년 마르크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처음 읽었을 때, 그는 엥겔스에게 “비록 조잡한 영국식으로 개진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우리의 견해를 위한 자연사의 기초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편지하였다. 사실 마르크스는 1880년에 다윈에게 편지를 써서 『자본론』의 영어판 헌정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윈은 자신의 견해가 기독교와 유신론에 대한 공격에 연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하였다.

인간에 대한 다윈의 자연주의적 해석에 관한 그들의 열의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맬서스의 인구이론에 빚을 지고 있다는 다윈의 공언에는 난감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맬서스의 인구이론을 인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매도했고 맬서스를 표절자이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증오를 받아 마땅한 지배계급의 대변자, 철면피한 아첨꾼이라고 비난했었기 때문이다. 『자연법증법』에서 엥겔스는 “다윈은, 맬서스가 경제학자들이 최고의 역사적 업적이라고 떠드는 자유경쟁, 생존경쟁이 동물의 왕국에서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인류에 대해, 특히 자신의 동포에 대해 얼마나 신랄한 풍자를 썼는지 알지 못했다”고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와 맬서스를 분리하려고 했다. 이것은 로날드 믹이 편집한 『맬서스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가 보여주듯이 맬서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노선으로 남아 있다. 『모던 쿼털리』의 한 논문이 이 입장을 포여준다. 파이프(Pyfe)는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부르조아 사기꾼임을 폭로했고 맬서스 이론이 “인간의 고통을 자연현상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려 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이 정치체계의 결함 때문임을 위장하는 것을 돕는다”고 주장했다. 자본가와 제국주의자에게 신맬서스주의 이론의 가치는 “사이비과학적 '법칙'을 세움으로써 절망적으로 낮은 생활수준의 진정한 원인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맬서스 이론에 반대했을까? 초기 개량론자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개선을 제한하고, 필연적인 진보적 변화의 메커니즘으로서가 아니라 거의 피할 수 없는 진보의 장애로서 경쟁을 강조했던 것이다. 파이프는 소련에서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의 무한한 가능성들 -- 한때 추론된 믿음이자 예측이었던 -- 이 실현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세기의 논쟁을 특징지었던 사회 이론과 진화 이론의 밀접한 결합에 대한 20세기의 견해들은 『모던 쿼털리』의 지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실제로는 생물학적 유전 법칙에 관한 아주 최근의 논쟁으로 서서히 전환되었다. .. 스펜서는 조건반사에 관한 파블로프의 고전적 연구에 영감을 제공했다. 그리고 소련에서 왓슨과 크릭의 유전자 암호 해독을 포함한 진화의 다윈적 설명이 교육되고 관련된 과학적 주제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었다. 그때까지는 동물(그리고 인간)의 본질이 획득형질의 ‘라마르크주의적’인 유전에 의해서 변화한다는 믿음이 정설이었다. 1948년에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간부회의의 한 성명이 ‘라카르크주의’의 러시아적 해석 -- 리센코와 미쿠린의 유전 이론 -- 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인민을 위해 자연을 개조한다는 혁명적 원리에 기초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소련의 유전학자들이 이 입장으로부터 일관된 후퇴를 시작했을 때, 기울어져가는 정통 이론의 한 평가는 미쿠린주의의 옹호자들이 “그것에 반대되는 유전 이론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의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연결된 사이비과학적, 관념론적 발전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한 리센코-미쿠린주의 신봉자들과 신다윈주의 유전학자들 사이의 불일치는 “단일 체제 안에서의 두 가지 관점 사이의 반목”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체계, 두 이데올로기 사이의 계급투쟁”이었다. “부르주아 과학자들의” 이데올로기는 “그들로 하여금 객관적 자연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을 전혀 불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상응하게 이 법칙들을 왜곡하고 '사이비과학적, 반동적' 유전학 -- 유전에 대한 유전자 이론 -- 을 창조하도록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다.” 이것은 20세기에서도 잘 입증된 과학적 발견들을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심한 예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적인 스캔들이기도 했다. 왓슨과 크릭이 그들의 ‘사이비과학적’이고 ‘반동적’인 발견들로 노벨상 수상이 확실해졌을 때 소련에서는 마침내 현대유전학의 발전을 허용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현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미 확립되었다고 믿는 생명과학과 사회과학의 정연한 구분을 지금보다 덜 절대적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

IX. 결론

... 이 사례연구가 과학사에서 영향을 미치는 관계들이 정치사・사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고 ‘객관적인’ 자연과학과 ‘애매모호한’ 사회과학이 점차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진화이론의 역사에서는 뒷받침될 수 없다는 명제들에 어느 정도 증거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이제 과학사와 역사의 다른 측면들의 통합이 17세기 연구에서는 이루어져 있다. 19세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도 이 접근법을 그들의 시대에 적용해서 비슷한 흥미로운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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