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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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정세권


역사적으로 새로운 과학적 주장이나 발견들은, 항상 과학 전문가들 내부의 대화와 논쟁을 넘어 사회 전반의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그 중에서도 1859년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담긴 진화론만큼이나 그 사회적 파급력이 크고 오늘날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사례도 드물다.

18세기 사람들은 자연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 명확히 구별되는 ‘종’(species)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종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손이 부모를 닮는다’는 자연 세계의 보편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리고 각각의 종들이 명확히 구별되며 절대 변하지 않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면서 이런 믿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생물의 형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인간 역시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진화론은 지구상 다양한 생물의 유래와 역사뿐 아니라 인간 역시 그런 생물들과 같은 존재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생물학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낳았으며, 이런 논쟁은 현재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

진화론의 배경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이미 지구상의 생물 종들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존재했는데, 그 배경으로 몇 가지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18세기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분류학(taxonomy)의 배경을 들 수 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여행과 탐험을 통해 새로운 대륙들로 진출하면서부터, 그동안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동식물 종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동식물 분류체계 속에 이 새로운 종들을 포함하려는 분류학적 시도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는 1735년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를 집필하여 새로운 분류체계를 세웠는데, 여기서 그는 기존 종들이 퇴화하거나 상호 교잡을 통해서 잡종과 변종을 낳고, 이것이 새로운 종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한 종과 다른 종의 중간에 해당되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잡종’(hybrid)이라는 존재는, 종과 종 사이의 구분이 엄격하다는 믿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생물 종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고 심지어 변할 수도 있다면, 그 과정은 어떠할까? 프랑스 생물학자 라마르크(Jean Baptiste de Lamarck, 1744-1809)는 1809년 출간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 지구상 생물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과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기린의 목이 길어지는 것처럼 외부의 물리적 환경에 적응(adaptation)을 하면서 생물체의 구조와 특성이 변하며, 이런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면서 생물체가 점차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의 설명은, 종 사이의 중간 단계를 보여주는 화석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반대를 받았지만, 종의 진화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는 데 기여했다.

종의 진화라는 생각이 퍼지는 데에는, 라마르크의 주장 외에도 당시 지질학의 연구도 중요했다. 19세기 지질학자들은 지표면의 변화가 급격한 대변동들로 이루어졌다는 ‘격변설’과,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 변화가 동일한 과정으로 천천히 일어났다는 ‘동일과정설’을 두고 논쟁하고 있었다. 지표면이 짧은 시간에 급격히 변했다면 그 위에 생물종이 환경에 적응하며 천천히 진화한다는 믿음은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에, 지질학의 논쟁은 종의 진화라는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었다. 이 논쟁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동일과정설’은, 지표면이 천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하듯이, 그 위의 생물종도 몇 만 년, 몇 십만 년 동안 천천히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이와 같이 분류학, 라마르크 연구, 지질학적 연구 외에도 당시 영국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도 종의 진화 문제에 관심이 퍼지게 된 배경이었다. 자연신학이란, 자연 세계 동식물의 형태와 구조 속에서 신의 지혜와 ‘설계’(design)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신학적 전통이었다. 특히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95)는 1802년에『자연신학』(Natural Theology)라는 책에서, 길가의 시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시계제작자를 알 수 있듯이 자연세계의 동식물을 관찰하면 그 설계자인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 널리 퍼져있던 자연신학적 관심은 다양한 생물종과 이들의 진화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과 “자연선택”

찰스 다윈
1809년 여덟 형제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이런 상황에서 과학 활동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다윈은, 의사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 강의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동료들과 자연을 탐구하는 연구 그룹에 합류했고 동물 박제법을 배우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 의학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에 화가 난 아버지는 다윈을 목사로 만들기 위해 182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보내지만, 여기서도 다윈은 공부보다는 사냥과 승마를 즐기며 딱정벌레 관찰에 열중했다. 이 무렵 다윈은 당시 유명했던 과학저술들을 독파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페일리의 『자연신학』, 『알랙산더 폰 훔볼트의 과학 여행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윈이 자연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집안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할아버지이지 당대 유명한 자연학자였던 에라스무스 다윈은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에 깊이 동조했는데, 찰스 다윈은 할아버지를 통해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접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질학 동료의 제안을 받아, 1831년 12월 남미 해안을 측정하고 관찰하는 비글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약 5년에 걸친 비글호에서의 여행은 이후 다윈이 진화론의 기반이 되는 수많은 관찰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비글호 항해를 통해 다윈은 다음 몇 가지의 사실을 관찰했다. 먼저 다윈은 그동안 화석으로만 보아왔던 동물들을 실제로 목격할 수 있었고, 지역에 따라서 같은 종이라도 형태와 행동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곧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같은 종이라도 차이가 있으며 곧 종이 변한다는 점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지역에 따른 종의 차이는, 서로 다른 외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같은 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두 번째로 다윈이 관찰한 것은 갈라파고스(Galapagos) 군도의 동식물이었는데, 겨우 수 십 마일 떨어져 있어 기후나 풍토가 비슷한 섬들에서 같은 종이라도 다른 형태와 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종의 진화가 기후나 풍토 같은 물리적 환경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일어난다는 점을 의미했다.

1836년 다윈은 770쪽의 일기, 1383쪽의 지질학 노트, 1529종에 대한 카탈로그, 3907종의 뼈, 가죽, 표본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즈음 다윈은 종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지만, 진화를 일으키는 ‘적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즉 진화의 메커니즘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다윈은 우선 원예가, 동물 사육가들의 품종개량에 주목했다. 동물 사육가들이 품종을 “인위적으로 선택”(artificial selection)하고 교배시켜 원하는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다윈은 자연에서 이러한 ‘선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고심했다. 이 무렵 다윈은 경제학자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읽고 실마리를 얻었다. 맬서스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세계에서 식량과 물자는 완만히 증가하는 데 비해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기 때문에, 결국 이를 둘러싼 경쟁적 환경에 잘 적응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고 설명했다. 다윈은 맬서스의 책을 통해 ‘경쟁’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변이를 일으켜 종이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이를 동물 사육가의 ‘인위적인 선택’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개념화했다. 이제 다윈은 종이 진화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한 것이다.

1837년 말 즈음에 다윈은 진화에 대한 생각을 짧은 원고에 정리했지만 20년이 지나도록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다가, 1859년 11월 24일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인쇄 첫날 모두 팔려 이듬해 1월에 재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생존경쟁을 통한 자연선택에 의해 하나의 조상에서 나온 종이 다양하게 진화한다는 다윈의 주장은, 당시 영국의 생물학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만큼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다윈 진화론에 대한 논쟁과 여파

『종의 기원』은 출판되자마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 종이 진화한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다윈이 어마어마한 관찰 증거를 이용하여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진화를 과학적 주장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한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진화의 산물이라면,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한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라면 다른 동식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 진화론의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놓고 신학자들과 진화론자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주란 가장 저급한 물질부터 가장 고귀한 신(God)까지 위계질서를 가지고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팽배했고, 이런 믿음 아래에서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고귀하며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비록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역시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존재일 뿐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다윈은 대중적인 논쟁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다윈의 친구이자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Thomas Huxley, 1825-1898)와 다윈 지지자들은 신학자들과 격렬히 논쟁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인간이 원숭이 단계에서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에 대해, 신이 모든 생물을 창조하고 인간에 우월한 지위를 주었다는 믿음을 배신한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많은 신문들에서도 진화론을 두고 ‘인간이 원숭이 혹은 열등한 생명체의 후손인가?’라는 조롱 섞인 비판을 했다. 1870년대 이후 ‘종의 진화’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대다수 지식인들이 받아들였지만, 그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둘러싼 논쟁은 쉽게 가라앉기 않았다.

게다가 진화론은 자연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에도 잘못 이용되면서 숱한 논쟁과 부작용을 낳았다. 흔히 ‘사회다윈주의’이라고 불리는 이런 설명들에 따르면, 자연세계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수한 종이 후손을 남기듯이, 인간 사회 역시 이런 경쟁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면, 상류층 백인남성들은 경쟁을 통해 더욱 진화한 존재이며 그 결과 문명화된 서구사회를 이룩했다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사회 하층민, 장애인이나 범죄자 혹은 서구만큼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한 비서구 지역의 유색인종은 경쟁에서 뒤처졌거나 덜 진화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19세기 초부터 인종 사이의, 남녀 사이의 재능 차이를 두개골의 모양으로 설명했던 골상학이나, 다윈의 사촌인 골턴(Francis Galton, 1822-1911)이 1883년 만든 ‘우생학’(eugenics)이라는 단어는 이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인간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증식을 막거나, 더 진화한 상류층 백인남성에 의해 지배와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런 사회다윈주의에 대해 비판자들은, 인간의 복잡한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생물학적인 측면으로만 설명할 뿐 각 개인의 사회적 배경과 교육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가령, 인종적 기원만으로 유색인종과 백인종 개개인의 능력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론

결국 자연세계 다양한 생물의 진화를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신과 인간의 위치, 인간 개개인의 차이와 사회의 진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다양한 과학적 연구 전통뿐 아니라 맬서스의 『인구론』과 같은 사회경제 이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또한 자연세계에 대한 그의 생물학적 이론은 이후 20세기 유전학뿐 아니라 당시 인간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한 과정과 그 사회적 의미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의 과학 역시 과학 전문가들만의 지적 활동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사상 및 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부록 : 다윈과 월러스의 “동시발견”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게 된 데에는, 영국의 젊은 생물학자 월러스(Alfred Wallace, 1823-1913)의 논문과 편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1859년 월러스가 다윈과 똑같은 결론을 담은 논문과 편지를 보냈다. 월러스의 편지에 놀란 다윈은 자신의 논문 초록을 정리했고, 1858년 7월 런던의 린네학회에서 두 명의 논문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윈은 이 논문 초록을 정리하여 같은 해 11월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다윈과 월러스의 사례는 과학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시발견’의 사례이다. 과학적 발견은 과학자 개인의 천재적인 능력이나 행운에 의해 우연히 일어나기보다는, 그 시기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수많은 과학적 개념과 방법들, 그리고 당시 사회문화와 사상 등 과학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 이런 요소들이 갖추어질 경우 어떤 과학적 발견은 한 과학자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도 ‘동시에’ 가능한 것이다. 다윈과 월러스의 ‘동시발견’ 역시, 당시 분류학, 지질학 등의 과학적 연구와 사회문화적 조건들로 인해 가능했으며, 또 다른 사례인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 발견’도 그러하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과학교양』 (과학중점고등학교 교과서). 한국과학창의재단, 2010.

  1.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2.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3.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4.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5.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6.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7.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8.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9.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10. 과학과 여성 (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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