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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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보울러 지음, 정세권 옮김, 「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203-242쪽. 원문 : Peter J. Bowler, “The Social Implications of Evolutionism”, Evolution: The History of an Idea, 2nd e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9), pp. 282-306.

피터 보울러(Peter J. Bowler)의 「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은 19세기 진화론이 사회에 적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의 영향으로 탄생한 사회다윈주의, 우생학, 인종주의는 당시 사회 체제를 정당화함으로써 기존 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보울러의 연구는 진화론의 사례를 통해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가를 흥미롭게 드러내 준다.

본문

진화론의 사회적 함의들


피터 보울러 (Peter J. Bowler)

정세권 옮김



“사회다윈주의”라는 문구는 생존을 위한 잔인한 투쟁에 빠져있는 인류의 이미지, 진보를 향한 필연적인 단계로서 부적격자(the unfit) 제거를 찬양하는 사회다윈주의자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리차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걸작 『미국 사상 속의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 in American Thought) 덕분에, 이러한 이미지는 종종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경쟁과 연결된다. 대중을 착취하여 최대한의 이윤을 얻고자 경쟁하였던 19세기 후반 “강도귀족”(robber baron)이 이러한 이미지의 가장 좋은 예이다. 투쟁의 복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생산업자들이 다윈주의의 은유를 사용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개체 각각의 경쟁을 통하여 자연이 진보한다면, 적자생존은 인류의 경제적․사회적 진보를 위한 열쇠가 됨에 틀림없다. 그러나 호프스태터의 책은 다윈주의적 유비가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상황들을 보여준다. 투쟁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 개인들 사이가 아니라 국가나 인종들 사이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투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노예제도에 정당성을 제공한다. 논의를 조금만 비틀면 심지어 단일한 사회 내에서도 생존경쟁은 우생학과 같은 인위적인 선택의 문제로 바뀔 수 있다. 국가는 부적격자가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류의 번식을 통제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적용영역을 고려해 볼 때, “사회다윈주의”라는 용어가 엄밀하게 정의되기 힘들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1] 영국 사회진화론에 대한 최근 연구는 심지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역시 자신들의 고유한 목적에 맞게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각색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2] 다윈주의 이론을 단순명료하게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사회다윈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물학과 사회사상 사이의 관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립될 수 있었고 각각의 경우 과학적 이론의 한 측면이 선택, 강조되었다. 전쟁이 진화의 촉매 역할을 한다고 찬양했던 사람들은, 개인간의 경쟁이 외부의 적과 싸울 수 있는 국가의 역량을 갉아 먹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생물학적 사상들은 새로운 사회적 태도를 고무하기는커녕, 이미 존재하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는 또한 쌍방향의 과정이다. 즉 과학적 이론은 어느 정도 그들이 태어난 사회적 환경을 본떠 만들어진다. 치열한 자본주의라는 것이 자연선택을 경제문제에 직접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면, 다윈의 이론 그 자체는 맬서스(Malthus)의 영향을 받은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가지는 것으로 종종 간주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3]

역사가들은 생물학적 토대 위에서 사회적 유비가 만들어지는 다양한 방식들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사회다윈주의”라는 단어가 너무 많은 사상들을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어서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면 얻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다윈이라는 이름은 사회 진보에 기댄 아무 체제에나 붙여졌고, 그 결과 그의 이론은 다른 사상들과 나누었어야 할 모든 불손한 명성을 얻었다. 반니스터는 19세기 후반 미국 사상계에서 사회다윈주의의 자본주의적 형태가 두드러졌다는 호프스태터의 주장을 반박했다.[4] 그 반박은, 다윈주의적 유비의 내부 논리 및 그 당시의 인기, 이 두 가지를 겨냥한 것이었다. 반니스터에 의하면,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투쟁이라는 은유에 대한 이전 세대들의 믿음을 일부러 과장했는데, 이는 자신들의 관점이 이전 세대의 고의적인 무자비함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사회다윈주의”는 자유방임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이 항상 사용하던 욕설이었다. 자연선택의 논리를 반영한 듯한 많은 표현들이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착상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생산업자들이 다윈주의적 언어를 사용한 횟수는 과도하게 계산되기 쉽다. 이것은 개인주의라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철학의 정확한 의도에 대한 논쟁을 낳는다. 호프스태터에게 스펜서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사회다윈주의를 전해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스펜서는 라마르크주의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생물학에서의 자연선택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자유방임주의를 부적격자 제거를 위한 수단보다는 활황을 위한 촉매제로 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정치적 입장의 또 다른 극단에서는 다윈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5] 마르크스는 그 속에 본래부터 포함된 유물론 때문에 진화론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르크스는 다윈의 메커니즘이 빅토리아 시대 자본주의의 경쟁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자본론』 한 권을 헌정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일화는 관련된 서신들을 오해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6] 투쟁에 대한 다윈의 개념과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마르크스의 믿음 사이에는 아주 느슨한 유비만을 이끌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믿음은 변증법이라는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러시아는 리센코 사건에서처럼 다윈주의에 대체로 냉담했다.

선택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거부는 이해할 만 하지만 이 때문에 자본주의와 다윈주의 사이의 관계가 명백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스펜서가 라마르크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자유 기업가사회가 제안했던 모델이 생물학적 유사물(analog) 이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스펜서의 입장은 또한 진화에 대한 비다윈주의적 모델이 사회적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다수의 라마르크주의자들은 만인을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드는 방법으로 국가의 개입에 기반한 사회정책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로 생긴 개선의 효력들이 유전되면 인종 그 자체의 진정한 생물학적 진보를 이끌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였다. 우생학 운동 역시 국가의 통제를 요구했지만, 부적격자의 번식능력 억제라는 아주 다른 목적에서였다. 우생학 운동의 기원에 대해 쓴 광범위한 문학작품들은 다윈주의와는 관계없는 과학적 영감의 또 다른 근원을 보여준다. 우생학은 다윈 이론의 영향을 받아 영국에서 만들어졌지만, 멘델주의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미국에서 더욱 활발히 번성하였다. 그래도 초기 유전학자들은 자연선택을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종의 나쁜 유전자는 인위적인 선택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자연의 진화가 더 적합한 유전자의 급속한 복제를 통하여 진행된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이론은 종종 근본적인 의견 차이에서 발생한 기존 논쟁 속에 흡수되기 때문에, 생물학적 사상과 사회사상 사이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생긴다. 이미 언급한 많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개인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에 ‘본성과 양육’(nature vs. nurture)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반영한다.[7] 본성 즉 유전이 가장 근본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개선된 환경과 교육이 특성에 유익한 영향을 준다는 주장을 거부할 것이다. 개인이 나쁜 특성을 물려받는다면, 아무 것도 그를 도와줄 수 없고 도와주려는 시도조차 돈 낭비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나쁜 특성의 주된 원천이라고 인식된 하층 계급의 수와 세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나아간다. 부적격자의 제거는 자연선택이나 인위적 선택, 즉 사회다윈주의나 우생학에 의해 일어날 수 있었다. 다윈주의와 멘델주의 모두 우생학을 위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결정하는 데 유전의 힘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유전의 힘을 덜 강조한 라마르크주의자들의 입장은, 양육이 본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형태의 믿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은 인류가 더 나은 환경 속에서 개선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개선이 세대를 거쳐 유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양육”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조건이 더 나은 인류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어떠한 유전적 효과를 추정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 사상은 생물학적 라마르크주의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계속 번성하였다.

특정한 생물학적 이론보다 더 깊게 들어간 또 다른 태도는, 위계서열적인 용어로 인간의 차이를 생각한 경향이었다. 우생학과 사회다윈주의는 단일한 사회 속 개인의 서열에 근거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선천적으로 더 능력있다고 간주되었는데 이는 상하층계급으로 분화된 사회를 반영한 것이었다. 상이한 인종들을 순위 매기려는 경향은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다. 유럽인들은 항상 다른 인종들이 자신들보다 열등하며 그 열등함의 정도는 기술적․사회적 발전 수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등한 인종이란, 원숭이로부터 고등한 존재인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 중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고 생각되기 쉬웠다. 다윈주의는 진화의 분기적 성격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진보의 직선적인 위계라는 개념을 잠식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든 진화론자들은 인류 기원의 직선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종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를 이용했다. 라마르크주의는 위계적 접근법에 더욱 쉽게 적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진화란 배아(embryo)가 자신의 최종 목적을 향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것을 본떠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라마르크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정의된 인종적 위계서열을 확립하려고 분투했던 생물학자들은 항상 라마르크주의의 본질적인 요소와 자신들의 생물학적 사상을 결합시켰다. 사회적 편견을 “과학적 이론”으로 고쳐 표현하는 것은 비다윈주의적 노선에 있던 사람들이 더 심했다. 비록 이 경우 근본적인 사회적 편견이 너무 만연해서 어떠한 이론도 그것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회다윈주의

가장 익숙한 모습의 사회다윈주의는, 생존경쟁이라는 용어로 빅토리아 시대 자본주의의 경쟁적인 풍조를 정당화하려 했던 시도이다. 그러나 최근 몇몇 역사들은 이런 식의 논지가 얼마나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이견은 다윈 그 자신의 신념들을 둘러싼 비슷한 의견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다윈이 호전적인 개인주의를 조장했다는 공공연한 비난에서부터[8] 다윈이 그러한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의견까지[9]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그린은 설명하였다.[10] 다윈의 글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문구들이 있다. 그린은 다윈이 경제적 경쟁을 찬성하는 당대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윈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개인간, 그리고 종족간 투쟁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문명화된 공동체 내에서 선택이 완화되면 그 인종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동시에 다윈은 자유방임적 정책의 극단적인 결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나폴레옹이나 부정한 무역업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비록 인종 내에서 열등한 형질의 확산을 막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을지라도, 다윈은 분명 폭력과 교활함에 기댄 경쟁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정치적 영역 속에 다윈의 이론을 적용하려 했던 가장 중요한 시도라고 존스가 이해했던 움직임과[11] 다윈을 연결시켜 보면, 다윈의 독특한 생각에서 볼 수 있는 외관상의 역설은 해결될 수 있다. 그 움직임이란 호전적인 모습의 사회다윈주의가 아니라 한층 전통적인 자유주의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주요한 목적은 지주귀족사회의 힘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지배계급의 존재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기존 지배계급의 타락한 자질을 반대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새롭고 자연스러운 귀족사회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사회는 전문적 직업을 가진 계급의 형태로 등장했으며, 이 계급들이 지배적인 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사회였다. 다윈주의와 종교 사이의 논쟁은 부분적으로 이 새로운 계급이 과거 전통적인 권위의 상징이었던 교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진화이론을 이용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12] 다윈 그 자신도 다운(Down)에서 마을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지방 유지라는 위치에 있었다. 헉슬리와 같은 사람은 국가적 차원의 공무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무어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다윈을 매장한 것이야말로 다윈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계급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고 이러한 “새로운 지배 아래에서” 과거의 사회 위계서열 대부분을 방어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13] 새로운 지배계급의 우월성은 이미 증명되었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의 논리적 후속편이 호전적인 사회다윈주의는 아니었다. 만약 사회 위계서열 밑바닥의 부적격자 수가 공동체에 짐이 될 정도로 많아지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굶주림이 아니라 그들의 번식을 막기 위한 정부의 통제였다. 비록 다윈 그 자신은 인간에 대한 인위적인 선택을 의심스러워하였지만,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계급은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점점 우생학으로 경도되었다.

더욱 극단적인 형태의 사회다윈주의는 경제적 경쟁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완전한 자유방임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성공하거나 망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며 개인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모든 시도를 철회해야 한다. 진보는, 최적자가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 방식대로 싸울 수 있어야 하고 부적격자는 그 결과를 감수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호프스태터가 설명한 사회다윈주의의 이미지였다. 자유로운 기업시스템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생산업자들은 다윈주의적 수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생존경쟁”이라는 은유의 인기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반니스터의 반박도 음미해 보아야 한다.[14] 논쟁은 어쩔 수 없이 허버트 스펜서 및 그 추종자들이 조장한 자유방임적 개인주의의 극단적인 형태가 진정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스펜서의 옹호는 그의 초기작 『사회정역학』(Social Statics, 1851)에서부터 노년작 『인간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 1969년에 재판)에 이르기까지 분명했다. 그는 원시적이면서 권위적인 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인간 진화에 있어 핵심적인 단계로 바라보았다. 수많은 개인의 축적된 노력으로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 자유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자유는 모든 개인이 사회발전과 조화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스펜서는 국가가 대외적인 문제에만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내부적으로 사람들의 삶과 활동을 규제하려는 시도는 국가의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건복지, 교육, 빈민구제에 대한 국가통제는 필요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의사나 교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자유롭게 그러한 목적을 추구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에 사람들이 지갑을 열 수 있도록 설득하는 한 성공할 것이다. 자신의 일에서 유능하지 않다면, 일부 고객들의 철저한 시험을 거친 이후 그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대중을 보호하는 것은 더 이상 국가의 책임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불행으로부터 실패자를 감싸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 아니듯 말이다.

스펜서의 추종자, 특히 예일 대학 경제학자였던 윌리엄 그레엄 섬너(William Graham Sumner) 역시 비슷한 견해를 옹호했다. 섬너의 철학은 “철저하게 탐색하고 게걸스럽게 취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root, hog, or die)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우월한 수업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빼앗아 가라고 아무에게나 공공연히 도전하였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동정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섬너에 의하면 게으름과 무능함은 날 때부터 벌받은 것이었고 고통을 완화하려는 시도는 허약함을 확산시킬 것이었다. 생산업자들 역시 스펜서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아니면 최소한 그의 철학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철도왕 제임스 힐(James J. Hill)이나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적자생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유로운 경쟁을 정당화하였고,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스펜서의 열광적인 제자가 되었다.

선택이라는 유비가 누렸던 폭넓은 인기에 대한 호프스태터의 주장은 지금까지 논쟁이 되어 왔다. 심지어 섬너도 진정한 진보는 자유로운 기업가정신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라는 스펜서의 낙관주의적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열거된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기업가 공동체 내에서도 삶의 양식으로서의 적자생존을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15] 경쟁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무자비함을 정당화하고 싶어 했을지 모르지만, 보통 기업가들 대다수는 스스로 비난받기 쉽다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이 생각할 수 없었다. 기업가 공동체 외부에서는 사회진화론의 비다윈주의적 형태도 또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스펜서 철학이 다소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자유방임주의를 자연선택의 짝으로 어느 정도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해 보아야 한다. 사실 양자의 관계는 기껏해야 허술한 유비일 뿐이다. 경제적 경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점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 시점이 되면 자연선택의 모든 이익은 멈출 것이었다. 성공적인 사람은 동료를 제치고 사회를 지도하지만, 자신의 형질을 물려줄 후손이 없다면 더 이상 그에 상응하는 생물학적 효력은 없다. 많은 경우 부의 대물림이 능력의 유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부는 계속해서 정치적 권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이 점은 월러스(A. R. Wallace)가 사회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사용했다.[16] 월러스는, 부의 차별이 모두 없어진다면 남편과 아내는 자연이 의도한 것처럼 자신들의 생물학적 특성을 위해 배우자를 고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펜서의 사회철학은 자연선택이라는 형태보다는 “자립”(self-reliance)의 덕목들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대중적 믿음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사무엘 스마일즈(Samuel Smiles, 1859)의 『자조론(Self-Help, 1859)』 [국역: 공병호 옮김,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비즈니스북스, 2006)]에 잘 예시되어 있었다. 또한 스펜서의 사회철학은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의 자연화(naturalization)이기도 했다. 무어는 많은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이 스펜서의 철학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도덕의 연장으로 보았다고 설명한 바 있다.[17] 자유방임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적격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어리석음보다 게으름이 진보를 막는 더 큰 장애물로 간주되었고, 이를 위한 해답은 게으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이는 실패의 벌로 가해지는 고통을 덜어주지 않음으로써 가장 훌륭히 성취될 것이었다. 강자에 의해 약자가 밀리는 것이 자유방임주의의 결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스펜서는 인정했다. 그리고 1884년 『인간 대 국가』를 집필할 즈음 당시 등장하고 있었던 사회주의가 사회의 악성 요소를 증식시키고 있다고 스펜서가 확신했던 것도 분명하다. 국가의 지원이 없다면, 이러한 부적격자들이 사회의 짐이 될 정도로 증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스펜서의 철학에서 진보의 진정한 원천은 실패와 가난의 위협으로 촉발된 개인의 노력이었다. 사회주의는 부적격자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자립의 자질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불행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경제적 상황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며, 다음 세대는 부모로부터 직접 그 교훈을 배우게 된다. 그러한 정책은 사회다윈주의보다는 사회라마르크주의의 모습에 가까운 듯하며, 생물학에서 스펜서가 라마르크주의를 더욱 선호했음을 말해준다. 사회다윈주의를 관통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자연선택이라는 유비와는 거의 상관없이 앞서 설명한 스펜서주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스펜서의 인기는 이미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는 많은 나라를 휩쓴 민족주의의 물결을 두고 비효율적인 군국주의 사회로의 회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기존 자유방임적 개인주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었다. 정복과 식민지 팽창을 기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느낀 짜릿한 자만심은 똑같이 사회다윈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두 번째 단계의 경쟁을 설명해준다. 스스로 최적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던 국가들 사이에서 “적자생존”이라는 구호는 국가간 투쟁이라는 관점에 불가피하게 적용되었다. 미래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전에 자유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던 것과는 앞뒤가 맞지 않게 국가적 단결을 호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다윈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국가간 투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 선택 메커니즘의 주요 특징인 개인간 경쟁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국가적 단결의 중요성은 월터 배짓(Walter Bagehot)의 『물리학과 정치학』(1872)에서 강조되었다. 배짓은 자연선택의 주요 원리를 사회에 적용하면서, 역사 전체에 걸쳐 가장 강력한 국가는 주변 약소국을 지배하였으며 문명의 발달에 공헌한 점으로 보아 항상 최적자였다고 주장하였다. 열등한 국가는 제거되지 않으면 정복당해왔고, 정복국가로부터 그 장점을 배웠다. 그러나 배짓의 이론은 선택이론의 참뜻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진보의 주요한 요소가 정부의 증진된 힘이었다는 그의 주장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개인간 경쟁을 환호하기보다 배짓은, 종교를 포함한 사회의 의지에 개인을 굴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찬양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국가의 힘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며 사상의 자유는 억제되어야 한다. 역사 전체에 걸쳐 고도의 조직화를 달성한 국가들이 정복자였다. 이는 똑같은 요인이 여전히 국가간 경쟁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간, 인종간 경쟁이 인간의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믿음은 20세기 초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다른 인종보다 계속해서 우월하고 싶다면 백인종은 생물학적 퇴화를 예방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우생학 운동은 상당 부분 호소력을 얻었다. 고고인류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 진화의 화석자료를 보면 열등한 유형의 인간들이 우등한 이들에 의해 항상 전멸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고 애써 주장했다.[18] 유럽에서 네안데르탈 인종이 사라진 것은, 현재 백인종이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착인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과정의 초기 사례로 이해되었다. 1949년에 와서 아서 키스(Arthur Keith)는 부족간, 인종간 투쟁을 주요한 추진력으로 상정한 인간 진화이론을 만들었다. 의미심장하게도 키스를 비롯하여 인종간 투쟁을 옹호한 많은 학자들은, 고등한 인종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서 자연선택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선택은 단지 진보의 행진에서 지체된 인종들을 제거하는 소극적인(negative) 과정일 뿐이었다. 투쟁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에서의 다윈주의 이론과는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니는 것이었다.

다윈주의는 또한 영어권 국가 외부의 세계에서도 중요한, 하지만 때로는 모순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경우 생물학적 다윈주의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사회다윈주의는 개인간 투쟁이라는 개념을 거의 강조하지 않았다.[19] 독일에서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지닌 사상가들이 진화론을 수용하였고 기꺼이 스스로를 다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20] 역사가들은, 최강국의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전쟁을 찬양했던 군국주의적 형태의 사회다윈주의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21] 그러나 최적자의 지배라는 이러한 생각이 군사 엘리트에 의해 빚어진 다윈주의의 단순한 악용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독일의 탁월한 다윈주의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조장한 것이었다.[22] 헤켈은 진화라는 것을, 자신의 준중교적(quasi-religious) 철학인 “일원론”(monism), 즉 영혼과 물질의 통합을 원리로 한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23] 일원론자 동맹(Monist League)이라고 불리는 조직은 일원론을 독일 전체로 확산시켰다. 국가가 중간계급보다는 군부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도, 헤켈 및 그의 추종자들은 이내 강력한 중앙정부 배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진화로부터 그들은, 전체 역사에서 이웃을 지배하는 우월한 인종에 의해 진보가 달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이상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며, 다음 단계는 세계의 권력자로서 독일의 등장일 것이었다. 헤켈은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열렬한 국가주의자였으며, 독일이 결국 패배하자 몹시도 낙담하였다. 일원론자 동맹의 회원들은 이후 독일인의 타고난 우월함과 그들의 궁극적 승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나치 이데올로기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헤켈은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통합되어야 하며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 소규모 상업주의의 반영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는 기각된 스펜서의 개인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력한 국가는 내부적 분쟁에 의해 갈갈이 찢겨져서는 안 되며, 그 운명의 방향을 지시하는 지도자 아래에서 통합되어 있어야 했다. 신기하게도 종(species)과 사회의 내부적 발달에 대해서는 헤켈 역시 스펜서처럼 라마르크주의자였다. 그러나 스펜서는 군국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찬양한 반면, 헤켈은 국가간 경쟁이 더욱 중요한 동력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구성원인 시민들을 더욱 굳건한 의지의 집단으로 향상시켜야 했다. 스펜서는 인간이 진보의 방향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본성이 그 고유한 과정을 따르게끔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헤켈은 인간이 진취적 기상을 가질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스스로의 전망에 따라 강력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투쟁을 통한 진보라는 말 그대로의 개념과는 별개로, 독일 이데올로기 속에는 선택 메커니즘과의 실질적인 유비에 의존한 것이 거의 없었다. 분명 다윈은 인간의 진보에 있어 국가간 정복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러나 나치즘 및 스펜서주의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의 서로 다른 두 결합에 그 생물학적 기원을 두고 있었다. 나치는, 주변 국가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다는 보크(Volk)誌의 인종주의적 감수성, 왜곡된 니체의 초인 개념, 국가에 대한 헤겔의 관념철학을 포함한 독일 사상의 여러 측면들을 끌어들였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종속, 국가의 목적은 위대한 지도자의 열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것들은 분명 다윈주의보다는 이상주의의 성격을 가지는 덕목이었다.

우생학

국가가 가장 부적합한 시민의 증가를 제한할 의무를 지닌다는 주장은 우생학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다윈 자신도 부적격자를 더 이상 엄격히 제거하지 않는 문명사회에서 자연선택의 완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자유방임적 사회다윈주의의 약점은, 사회의 가장 부적합한 구성원들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방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거대 도시의 빈민가는 최악의 인간형질이 번식하는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빈곤은 열등한 능력의 직접적인 결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의 극빈층은 열등형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었다.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란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이런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으며 국가가 적격자와 부적격자의 상대적 비율을 통제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하였다. 빈민가에서 열등한 사람들의 증식은 인종 퇴화라는 위협이 되며 공동체의 자원을 소모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전문직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자녀를 가지려고 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이러한 자연적 경향을 뒤집을 목적으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었다. 골턴이 보았을 때, 사실상 인위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는 방법들을 통해 인종의 형질을 개선하려는 운동은 거의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의 연구는 전체 우생학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24]

골턴은 1883년에야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고안했다. 그러나 1883년 훨씬 이전부터 골턴은 재능이란 유전되는 것이지 교육으로 향상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유전론적 입장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869년에 쓴 『유전적 천재』(Hereditary Genius)는, 저명한 가족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통해 부모의 능력이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자녀를 가진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줘서 인종의 생물학적 기준을 계속 상승시킬 필요성을 이 연구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골턴은 주장하였다. 이것이 이후에 “개량적 우생학”(positive eugenics)이라고 불렸던 것이었는데, 이는 자녀들을 위해 전문적 계층의 소득세를 면제해 주는 것과 같은 조치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골턴은 우생학 운동의 가장 강력한 측면이 되어버린 것의 개략적 윤곽을 그렸다. “제거적 우생학”(negative eugenics)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평균 이하의 능력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우생학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골격은 이미 골턴의 마음 속에서 그 모양을 갖추었다.[25]

골턴의 계획에 대한 초기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위적 교배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골턴의 유전론적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들이 상당히 있었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저명한 부모의 자녀들이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는데, 그렇다면 그 아이들의 능력이 정말로 고유한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생물학 속에 통계적 기법들을 진전시킨 골턴의 이후 노력들은 이런 초기 회의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다.[26] 그는 유전이 집단의 성격을 지배한다는 것을 훨씬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하였다. 변이 연구에 통계학을 적용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그의 제자 칼 피어슨(Karl Pearson)이 다윈주의를 옹호하면서 사용한 생물통계학적 접근의 토대를 만들었다. 피어슨이 사용한 통계학적 기법의 실질적 체계는, 우생학 정책을 뒷받침할 분명한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싶었던 그의 바램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27] 이와 비슷한 주장은 피어슨의 제자인 피셔(R. A. Fisher)의 경우에도 제기될 수 있다.[28]

20세기로 접어들어 마침내 골턴과 피어슨은 자신들의 운동이 영국에서 대단한 힘을 얻기 시작하는 것을 목도했다.[29] 피어슨은 보어전쟁 시기 영국 군대 내 노동계급 출신 훈련병의 빈약한 능력이 인종적 퇴화의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골턴은 1904년 국가우생학연구소(National Eugenics Laboratory)를, 이어 우생학 교육협회(Eugenics Education Society)와 Eugenics Review誌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우생학은 압도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정치적 청원운동을 펼쳤다.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전개되었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부적격자의 번식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유행했다.[30] 미국에서도 20세기 초 내내 우생학이 번성하였다. 멘델주의자 모임이었던 미국 육종가 협회(American Breeders' Association)는 1906년 우생학 위원회를 설립하였고, 1910년에는 우생학 기록사무국(Eugenics Record Office)이 만들어졌다.[31] 최초의 국제 우생학 회의가 1912년 개최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국가들의 우생학 운동을 하나로 묶어준 요소는, 유전에 대한 통제가 과학적 관리를 인간종에 적용시킬 방법을 제공한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생학은--보통은 정치적 우파와 결합되었지만--좌파 사상가들에 의해 지지받기도 하였다.[32]

이러한 활동의 목적은, 인종의 생물학적 기준을 향상시키거나 최소한 보호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전문적 계층이 더 많은 자녀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는 몇 가지 제안들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우생학 운동은 사회 하층계급의 출산율을 제한하려는 시도에 집중되었다. 인종 개량을 강조한 골턴의 주장은, 더 이상의 퇴화를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만 의존한 한층 비관적인 태도로 대체되었다. 정신이상자나 정신박약자는 가장 일반적인 공격대상이 되었고, 범죄 성향은 종종 정신적 결함의 부산물로 간주되었다. “빈틈없는” 구별에 필요한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정신적 능력을 검사하는 과학이 장려되었고, 그 첫 번째 시도가 지능측정을 위한 척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지능지수 즉 I.Q.에 도달할 수 있는 개인의 정신적․신체적 연령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초기 테스트에서는 교육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하층 계급의 외관상의 박약한 지능이 강조되었지만, 선천적인 지능은 쉽게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33] 우생학 운동은, 지능 등급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공공시설에 수용하고 성별을 나누어 격리시켜야 하며 심지어 번식을 막기 위해 불임케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미국의 어떤 주(state)에서는 실제로 특정 기준 이하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의 불임을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동부유럽에서 이민오는 “열등한” 인종들이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 두려움들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불임 프로그램은 “아리안” 종족을 순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 진행되었다.[34]

20세기 초 우생학의 갑작스런 인기상승은 사회적․과학적 요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사회사업가들(social workers)은 불성실함과 게으름이 세대를 거쳐 유전된다는 유전론적 믿음으로 점점 전향하였다. 제반의 현상들을 제대로 바라보면 단순히 사회적 인과관계보다는 생물학적 인과관계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정신이상자나 정신박약자를 위한 공공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특성들이 유전적 요인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다고 확신하였다. 동시에 전문직을 가진 중간계급은, 정상 이하의 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듯한 현상에 경악했다. 이들은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자신들의 선천적인 능력을 통해 나름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고 확신했다. 또한 이들은 계속 증가하는 무능하고 비정상적인 대중들을 지원하는 세금으로 자신들의 재정 수익이 낭비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 대가족의 부담을 떠안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량적 우생학의 인기가 쇠퇴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과학적 측면에서 우생학은 1900년 이후 멘델주의 유전학의 급속한 발전으로부터 도움을 얻었다. 골턴은 인간 집단 속에 자연선택의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독창적인 계획을 제안하였고, 피어슨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도 비슷한 접근법을 취했다. 생물통계학의 통계적 기법들은 자연선택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우생학 정책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인간 집단 속 형질유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도 통계학적 기법은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윈주의가 유전론적 관점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었다. 사실 골턴 자신은 개인간 차이의 선택이 자연에서 진화가 일어나는 원인이라고 믿지 않았다. 멘델 법칙의 재발견은 유전론적 입장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멘델의 법칙은, 생물학적 형질이 수세대를 걸쳐 완전한 단위로써 유전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턴의 생물통계학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았던 미국에서 멘델주의는 새로이 부상한 우생학 그룹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정신박약과 같은 열등한 형질은 집단 속에서 단일한 유전자가 퍼진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멘델의 법칙은 또한, 나쁜 형질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번식을 막는다면 그 형질을 급속히 제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듯했다. 비록 대부분의 초기 유전학자들은 선택이 생물학적 진보의 원인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이론은 해로운 형질의 확산을 뒤엎을 수는 있다는 보다 덜 야심찬 희망에 이상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우생학이 번성했던 상황을 보면, 우생학이 다윈주의적 접근의 간접적인 확장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골턴은 자연선택의 완화가 인종적 퇴화를 이끈다는 생각 때문에 당시의 문제에 경각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피어슨과 같은 영국의 우생학자들은 자연선택과 자신들이 제안한 인간의 인위적 선택 사이의 유비에 계속 주목하였다. 그러나 골턴 그 자신은 진정한 다윈주의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스러운 진화란 개인 변이의 선택보다는 급격한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엄밀한 말하면 이것이 초기 유전학자들의 입장이었다. 멘델주의가 미국 우생학자들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선택을 통한 진화보다는 인간의 특성에 대한 유전론적 관점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성과 양육에 대한 논쟁에서 우생학자들은 분명히 본성, 즉 유전의 편을 들었다.[35] 빈곤층을 위해 추가적인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았던 탓에 그들은, 열등함은 유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환경 개선으로는 빈곤층이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불임은 특히 집단 내 해로운 형질의 정도를 급격히 감소시킬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더 저렴한 방법이었다.

우생학 운동은 예전같은 인기는 아니었지만 계속 유지는 되다가 1930년대 들어 쇠락했다. 언뜻 볼 때 그 쇠락의 이유는 제거적 우생학을 옹호했던 주장들의 과학적 결점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형질을 야기하는 몇몇 “나쁜” 유전자들에 대한 단순한 이미지가 진실된 상황을 졸렬히 위조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1920년대에 드러났다. 다수의 형질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유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 유전적 가능성이 어떠하던지 간에 유기체의 성장에는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 또한 집단유전학을 통해, 어떤 인종 전체의 특성에서 중요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밝혀졌다. 이 시기에 진행된 다윈주의와 유전학의 종합은 우생학의 대의를 옹호하기보다는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발달이 우생학 운동의 특권이 상실되는 주된 요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대중적 인기가 사그라지기 오래전부터 사태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하였다. 생물학자 중 상당수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비판을 자제하기는 하였지만 우생학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우생학 선동가들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만병통치약을 계속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인간유전학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쇠락해갔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적인 논쟁에 대한 혐오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운동과 충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36] 1930년대 우생학 대부분은 사이비과학의 속임수로 전락하였고, 이 시기 직후에 홀데인과 같은 과학자들은 우생학의 부적절함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37]

우생학이 소멸한 진정한 원인은 과학적 발전이 아니라, 독일 나치의 잔학한 행위를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난 그 잠재적 위험성을 대중들이 깨닫기 시작한 탓이었다.[38] 나치는 전체주의적 국가의 엄청난 역량을 설명하면서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대중을 통제하였다. 이는 엄밀하지 못한 형태의 우생학에 담긴 도덕적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명백한 결함에 한정될 경우 국가가 부적격자의 번식을 제한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명료해 보였다. 그러나 나치는 “부적격자”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전체 집단을 포함할 정도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도처에서 온건파들은 이제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결국 과학자들이 유전학적 토대에서 그 결점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우생학은 인기를 잃었다.

우생학과 사회다윈주의 모두, 인간집단의 특정한 일부 즉 인종이나 계급으로 정의되는 일부가 선천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에 근거했다. 그들의 낮은 지위는 현대 세계에서 적절한 역할을 할 능력이 없는 탓이었다. 따라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으로는 그들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분명한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즉 특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 자신들의 이익이 전체 집단 속에서 낭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변명꺼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각을 옹호하였다. 반대로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사회적 배경과 교육이 개인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이끌렸다. 이들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유전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조건이 개선된다면 훨씬 바람직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본성과 양육의 효과를 구분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수십년 간의 개혁은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같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의 천박함 때문인가 아니면 도움을 요청한 이들이 그러한 도움으로부터 이익을 얻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기 때문인가?[39] 그렇지만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론적 정책과 환경론적 정책 모두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단지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다. 부적격자가 제거되건 사회 속으로 흡수되건, 그 목적은 여전히 전문적 계급이 지배 권력을 형성하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40]

신라마르크주의와 사회

20세기 초 붕괴 전까지 신라마르크주의는 생물학에서 유전론적 관점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안을 제공하였다. 확실한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역사가들은 신라마크주의의 역할을 사회사상 속에서만 가볍게 다루었다. 호프스태터는 레스터 워드(Lester Ward) 사건 속에서 라마르크주의적 대안을 다루었던 반면,[41] 스토킹은 미국에서 라마르크주의의 폭넓은 수용을 다루었다.[42] 그러나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에 기울여진 연구에 필적할 만큼 사회라마르크주의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부족했다. 이제 1900년을 전후하여 과학적 생물학 내에서 라마르크주의의 영향을 인식하고 그 사회적 함의를 보다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펜서가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라마르크주의를 사용한 것과는 별개로, 획득형질의 유전을 통해 인간이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진화 문제를 책임질 수 있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라마르크주의는 미래를 위한 희망의 철학이 되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유색인종에까지 자신들의 낙관론을 확장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의 이론은 인종이 진화적 서열 속에서 순위매겨질 수 있다는 믿음의 주요한 근거였다.

비록 사회다윈주의라는 이름표를 달기는 하였지만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한 허버트 스펜서의 철학은 최소한 라마르크주의적 용어 속에도 설명될 수 있다. 스펜서는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며 본성은 진보를 향한 유일한 지침이라는 생각 속에서 개인주의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이 생각하기에, 사회개혁과 공공교육은 인간이 선택한 목적으로 인종을 이끌 것이었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은 근본적인 혼란의 씨앗을 안고 있다. 사람들이 더욱 효과적인 품행을 배운다면(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라도) 이것은 미래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그러한 문화적 유전이 생물학적 유전과정과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교육 때문에 혹은, 새로운 행동양식이 신체적 체질 속에 각인되어 새로운 품행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계속해서 더 나은 행동양식을 유지할 것인가? 전자의 경우, 사회라마르크주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개선될 수 있다는 뻔한 반유전론적 입장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만약 개선된 것이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면, 그 효과가 수세대에 걸쳐 누적될 수 있다는 희망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정책을 만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교육을 통해 인간의 품행을 형성함으로써 실제로 종의 진화를 관리하고 있다. 본성과 양육 논쟁에서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양육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가 개선될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그러한 개선이 유전을 통해 축적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 결과 이런 주장은 본성과 양육의 구별을 흐리게 하였다. 나아가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이한 과정을 혼동하였다.

진보를 향한 유일한 지침으로서 본성을 믿은 스펜서의 주장에 대해 도덕적인 반대들도 있었다. 개혁을 옹호한 이들은 자유방임주의를 단지 사회 내 지배계급의 지위를 지키려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스펜서는 최종적으로 완전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사이에 모든 세대의 실패자들은 고통을 통해 그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도 말했다. 스펜서에 의하면 진화는 인간의 통제력을 초월한 점진적이고 복합한 과정이기 때문에 신속한 진보는 불가능하였다. 그의 반대자들은 진보의 속도를 올리고자 하였고, 따라서 인간이 공식적인 교육체계를 통제할 수 있을 때라야만 이것이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진화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을 통해 그 과정을 고안할 수 있다. 획득형질의 유전은 인간 본성의 광범위한 변화를 이끌며 각 세대에서 누적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라마르크주의의 이러한 낙관론은 특히 미국에서 성행하였고, 섬너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반대하였던 사회주의자 레스터 워드에 의해 처음으로 상세히 설명되었다.[43] 미국의 독특한 신라마르크주의 학파는 조셉 르콩트(Joseph LeConte, 1899)의 작품과 스탠리 홀(G. Stanely Hall, 1904)의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생물학에서 라마르크주의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와 일치하는 20세기 초에 명성을 얻었다. 이들의 생각은 당시 고생물학자 에드워드 드링커 코프(Edward Drinker Cope)와 같은 탁월한 생물학자들의 관점을 확장한 것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코프는 의식이 동물계의 본질적인 특징이고 하등동물의 진화까지도 주관한다고 주장하였다. 용불용설(use-inheritance)은 의식의 힘을 인류 수준까지 점진적으로 발달시켰고, 인류는 이제 의식과정의 성격을 지각하고 조절할 수 있다. 아이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교육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한 홀의 생각은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이었으며, 또한 인간 본성의 적극적인 개선이 몇 세대에 걸쳐 축적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호소력이 있어서,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용불용설을 부정한 지 한참 후인 20세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맹목적인 기계적 힘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급격한 진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간주될 수 있었다. 폴 카머러(Paul Kammerer)는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러한 생각을 이용하였고, 슈퍼맨과 같은 새로운 종의 교배에 대한 신문 표제들이 여전히 등장할 수 있었다.

라마르크주의가 진화의 유일한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향후 발달이 자연적 과정의 필연적인 연장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택이 최소한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욱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선택과 용불용설 모두가 자연적인 과정이라면 사회다윈주의는 사회라마르크주의만큼이나 쉽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었다. 워드와 르콩트 모두 이 점을 알고 있었고, 인간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교육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과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선택에 의해 상당부분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개혁을 주장한 것은 자연의 가혹하고 비효율적인 방법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목적지향적인 인간 계발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라마르크주의적 요소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교육을 통하여 개인이 획득한 기술이나 태도는 유전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은 아마도 획득형질 유전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인종 전체에 이익이 될 것이었다.

사회다윈주의자들 이상으로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진보를 향한 그들의 열망이 자연에 대한 개념을 좌우하도록 방치한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았다. 생물학자들은 분명 이러한 덫에 빠져 있었다. 알페우스 패커드(Alpheus Packard)는 라마르크주의를 아주 전문적으로 방어하는 글에서, 라마르크의 이론은 작동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문명의 누적적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패커드는 새로운 사상이 생물학적 유전이 아닌 교육에 의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심지어 레스터 워드조차, 라마르크주의와 진보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라마르크주의가 정당하지 못하다면 진보를 위한 노력은 쓸데없는 낭비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희망에 의거한 생각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바로 버나드 쇼가 『므두셀라로의 회귀』(Back to Methuselah) 서문에 쓴 언급이다. 쇼는 서문에서, 만약 자연선택 이론이 사실이라면 “오직 바보들과 하층민들만이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세계가 라마크르주의에 대한 버나드 쇼 류의 편애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오만한 억측은, 결국 라마르크주의에 나쁜 평판을 안겨 버린 엉성한 사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쇼는 오늘날까지 많은 신봉자를 거느리고 있는 유물론적 철학에 대항할 중요한 보루로서 라마르크주의를 옹호했다.[44] 1920년대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지지를 다시 모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매우 보수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라마르크주의가 생물학 영역에서 신뢰할만한 지위로부터 몰락한 것을 개의치 않고(어쩌면 무시한 채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회개혁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인종의 유전적인 개선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캠페인을 지속하였다. 사실 20세기 중반에는, 교육과 주변의 환경에 의해 사람들이 개선될 수 있다는 단순한 추측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태도들이 횡행하였다. 인종이 결국에는 유전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라마르크주의적 희망은, 미래의 이익이 무엇이든지 간에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올바른 일이라는 주장의 논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장애물이었다. 사실 양육의 효과가 본성(유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라마르크주의자들은, 개혁의 도덕적 토대를 강조할 때 최대한 분명하게 유지되었을 차이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사회과학자들은 생물학에서 최종적으로 제거되기 이전부터 라마르크주의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즈음 학계의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모든 진화론적 접근의 미몽에서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논문에서 크로버(A. L. Kroeber)는, 본성이 인간의 예상과 일치해야 한다고 맹목적으로 주장했다면서 워드와 다른 이들을 비판하였다. 크로버는, 인간의 문화란 자신이 “초유기체(superorganic)”라고 부른 독특한 활동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독특한 정신적 특성을 보면, 지성의 과정이 다윈주의나 라마르크주의와 같이 인류를 최초로 창조한 생물학적 진화 과정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상과 행동유형은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발달은 인종의 지력 증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것의 의미는 인간 개인의 형질이 유전자만큼이나 그 환경에 의해서 통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개혁을 추구한 정책에 본질적인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이에 버금갈만하게 중요한 새로운 사회과학의 특성은 19세기의 주장, 즉 문화와 인종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 상응하여 서열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 것이었다.

진화와 인종

최상위에 백인이 존재하는 인종의 위계서열 개념은 다윈이 진화론을 대중화하기 오래전부터 등장했다. 유럽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군사기술로 정복하고 있는 인종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주의는 인종들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함의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선입견에 따라 각색될 수 있었다.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은, 피정복민들에 대한 더욱 무자비한 태도 즉 멸종은 열등함의 상징이자 결과라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었다. 존재의 직선적인 사슬이라는 근거를 잠식하기 위해 다윈주의적 경향을 탐구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또한 종종 진화론자들은, 열등한 인종이란 원숭이와 가장 고등한 형태의 인간 사이의 중간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그냥 받아들였다. 열등한 인종들은, 원숭이에서 시작하여 점점 위로 향하는 진보의 초기단계를 보여주는 냉동유물로 결론지어졌다. 진화와 발생학의 관계는, 비록 발생에 대한 다윈주의적 도식보다는 라마르크주의적 도식에 더 자연스럽게 어울렸지만, 직선적인 발달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쪽으로 강요되었다.[45]

전지구적으로 유럽이 팽창하면서, 유럽인들은 자신들보다 수준낮은 기술을 가진 사회와 접촉하게 되었다. 19세기 초기에 가서는 옹호될 수 없었지만, 가장 원시적인 야만인들 일부는 처음에 동물 정도로 인식되었다. 인간이 단일한 종이라면, 그 인종들은 단지 적합하지 못한 환경에 계속 있어서 퇴화해 버렸을, 지역적 변종이었다. 이것이 “인류일원설” 즉 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단일한 기원을 가진 하나의 종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일부 자연학자들은 인종적인 차이를 너무 의식하여, 인종은 상이한 기원을 가진다는 “다원발생설”을 채택하였다.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는, 흑백인종은 별개의 인간으로 개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노예상태가 열등한 인종에게는 당연한 지위라고 주장하던 미국인들이 아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화 이론으로 인하여, 인종은 공통 조상의 자손이지만 이후 분기의 과정에서 아주 상이한 형질들을 얻은 현저히 다른 변종으로 간주되었다. 인종들은 여전히 잡종번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종으로 인종들을 묶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교배로부터 나온 잡종은 연약한 체질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인종들이 얼마나 갈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독일에서 에른스트 헤켈은, 각 인종들은 잡종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서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개별적인 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핵심적인 의문은 얼마나 먼 과거에서 인간 진화의 다양한 가지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는가였다. 모든 인종의 공통조상이 아주 먼 과거에 있었다면, 분기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서 여러 변종들은 하나의 순수한 종들로 간주될 수 있을 만큼 별개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다윈주의는, 인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당시의 견해 속에 투쟁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끼워 넣었다. 흑인이 지닌 가상의 열등함은 그들의 노예상태를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 인디언의 경우 백인들은 다른 인종들을 단순히 착취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종의 기원』 부제인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의 보존”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윈주의는 다른 인종의 제거가 생존경쟁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사적으로 우월한 인종은 자신들이 함께 살게 된 어떤 지역의 열등한 인종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지녀왔다. 전 지구에 걸친 유럽 팽창으로 인해 이러한 경향은 전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열대지방의 경우 주변 환경 때문에 토착민에 대한 백인의 우월한 지위가 제한되었을지 몰라도, 백인이 점유하기에 적당한 토지를 열등한 인종이 점유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이러한 관계는 역전되었다. 한동안 흑인은 노예상태로 보호받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고 자유로운 경쟁 아래에서는 유색인종과 함께 멸종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흑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적자생존”은 이 모든 과정을 진보를 위해 지불되어야 할 필연적인 대가라고 정당화하였다. 20세기 나치는 다윈주의의 이러한 인종적 모습을 극단적인 결론에 맞추었다. 아리안 종은 가장 고등한 인간으로 세계를 지배할 운명의 인간으로 간주된 반면, 다른 인종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 그래서 노예상태에 머물거나 멸종할 수밖에 없는 인종으로 치부되었다.[46]

비록 다윈과 스펜서는 인종적 투쟁이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지만, 제국주의적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현대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경쟁에 눈살을 찌푸렸다. 칼 피어슨은 열등한 인종은 멸종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예언했지만, 그 역시 자신은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였다. 피어슨이 말한 사회주의란, 패권을 다투는 전세계적인 투쟁에서 국가가 번창하려면 중앙집권화된 정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47] 이는 곧 국가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우생학을 통해 국민의 생물학적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였다. 피어슨은 문명화된 국가 속으로 열등한 외국인들이 이민을 와서 생길 수 있는 인종적 혼합의 결과를 두려워하였다. 정복해야 할 인종과 섞이게 되면 앵글로 색슨종의 힘은 잠식당할 것이었다. 피어슨은 런던 빈민가의 아이들을 조사하여, 이민자들이 토착 영국민들보다 지적으로 부족하고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하였다. 전체 인구의 상당부분을 이민자가 차지했던 미국에서도 비슷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 두려움은 우생학 운동의 가장 대중적인 목표를 낳았다. 백인 주류파들은 열등한 동양과 동부 유럽 이민자들의 폭발적인 증가를 견딜 수 없는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시아인 입국거부 동맹(Asian Exclusion League)이 만들어졌고, 수많은 문필가들이 똑같은 주제를 되뇌었다. 많은 이들이 백인집단 내 열등한 형질을 제거하는 것보다 이들 열등한 혈통이 못 들어오게 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중요하게 사고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1924년 이민제한법의 통과로 마무리되었다.

이민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백인의 지위에 대한 아주 비관적인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유럽인을 세계의 정복자로 보는 관점과는 달리, 이 새로운 인종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생물학적으로 더욱 능동적인 인종의 발아래에서 곧 짓밟혀버릴 가냘픈 꽃으로 생각하였다. 황화(黃禍, yellow-peril)의 공포, 즉 급속한 속도로 번식하는 중국인에 대한 공포는, 백인들이 그토록 뽐내던 문명이 생존을 위한 인종적 투쟁 속에서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백인 문명의 목적은 더 이상 확장이 아니라 이를 공고히 하는 것이며, 유럽인들이 발판을 만든 곳에서 자신의 인종적 특성이 침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침내 왜곡된 방식으로 다윈주의의 진정한 함의를 깨달았다. 생존경쟁에서는 모든 환경에서 다른 종을 필연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최상의 종으로 어떤 종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록 백인의 지적, 도덕적 우월성을 확신할지라도 인종적 우생학의 옹호자들은 더욱 모진 투쟁의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비슷한 불안감이 나치에게서도 드러났는데, 그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모욕적으로 치부된 인종들이 “등 뒤에서 칼로 찌를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두려움은, 몰살이라는 과정을 믿을 수 없는 자연의 손에서 뺏어와 국가 특유의 더욱 효율적인 살인기계에 맡기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한층 비관적인 이런 태도가, 도덕적으로 중요한 모든 측면에서 백인종이 인간 진화의 최고 산물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잠식하지는 않았다. 비록 진화가 직선적인 과정보다는 분기의 과정이라고 다윈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인간의 진화가 원숭이에서부터 점차 상승하는 단일한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계속 믿었다. “열등한” 인종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연결되는 사슬의 중간적인 단계라는 생각은 18세기에 발달하였고 19세기 초에도 여전히 유행하였다.[48] 새로운 과학인 인류학은, 가장 원시적인 상태에서 가장 문명화된 상태로 나아가는 자연의 위계서열 속에 사회들을 등급매겼다. 뷔로우는, 생물학적 진화라는 생각 이전에도 이러한 위계서열을 따라 사회가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진화론적 관점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49] 그런데 사회진화 이론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하나 남겼다. 어떤 인종은 왜 오늘날까지 과거의 사회형태를 유지해 왔을까? 월러스와 아르길이 설명한 바와 같이, 사회 진보를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개선과 연결짓는 것이 반드시 필연적이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어떤 종은 인간으로서 자신들의 완전한 잠재력을 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종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믿음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훨씬 그럴싸한 방법을 제공하였다.

19세기 후반 보편적인 진화의 체계는 생물학적, 사회적 진보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비유럽 사회의 기술적 퇴보는 그들이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다시 다른 인종들의 생물학적 열등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와 인종 모두 완벽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직선적인 등급에서 순위매겨질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 발달은 생물학적 진보의 표현이라고 추정하여 두 등급을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즉 비유럽 인종들은 스스로를 더욱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능을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한층 원시적인 수준의 사회에 얽매인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열등한 인종들은 백인종이 만들어지는 진화 과정의 초기 단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백인의 경우 북유럽의 도전적인 환경이 진화적 발달을 자극했기 때문에 더욱 향상된 것이었다. 반대로 열대지방의 활력없는 환경 때문에 그 속의 인종들은 발달이 지체되었다. 이들 불행한 사람들은, 원숭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신적, 신체적 모습을 지닌 살아있는 화석, 즉 진화단계에서 백인의 과거 모습과 연결되었다.

인종에 대한 다윈주의적인 관점과 라마르크주의적 관점. 그림은 서로 다른 인종의 두 가지 가능한 친족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왼쪽은 다윈주의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이고, 오른쪽은 라마르크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다윈주의적 개념은 분기이다. 인종은 단순히 다를 뿐이며, 다른 인종보다 원숭이에 훨씬 가까운 인종을 포함한 분류체계로 정렬될 수 없다. 그 옆을 보면 고등한 인간종의 진화는 직선적인 과정으로 다루어지고 획득형질의 유전 때문에 새로운 배아의 성장 속에서 반복발생한다. 배아의 성장과 같이 그 과정은 목적지향적이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다양한 인간이 진화의 최전선을 따라갈 수 있는 성장의 다음 단계를 포괄하지 못했다면, 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이들은 오늘날까지 유지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분기 즉, 오늘날까지 조상의 형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일련의 단순한 평행선은 없다. 현대의 인종은 원숭이로부터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 중 형태의 위계에 상응한다.

진화의 직선적인 등급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하는 다양한 인종의 이미지는, 발생반복 이론(recapitulation theory)으로 촉진된 진화론의 형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진화가 배아의 목적지향적 발달 속에 반영되는 직선적인 과정이라는 관점에 매료되었다.[50] 다윈주의는 계속 분기하는 진화의 개념을 진척시킨 반면, 많은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은 각각의 집단이 이미 정해진 목적을 향해 직선적인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배아의 성장과정이 계속 확장되면서 잇따른 단계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다양한 형태들은 동일한 척도 상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인간의 기원에 적용시켜 보면 이러한 믿음은 원숭이에서 고등한 인종의 인간까지 나아가는 위계서열의 형태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었다. 열등한 인종은 진화의 낮은 단계에 묶여 있는 것이었다. 고등한 형태에 다다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발전시키는 대신, 열등한 인종은 오늘날까지 유아적인(즉 원숭이와 같은) 특성을 유지한 채 성장의 최종 단계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었다. 스탠리 홀은 열등한 인종이 영원히 유아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고,[51] 많은 라마르크주의자들은 이들의 정신적, 신체적 모습에서 원숭이와 같은 특성을 찾았다.

이러한 접근의 함의는 인종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사람 롬브로소(C. Lombroso)는 범죄를 범하는 유형은 성장의 실패 때문에 진화의 초기 단계로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범죄인류학”을 창안하였다.[52] 심지어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낮은 성장 단계에 해당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직선적인 진화라는 라마르크주의적 개념이 가장 광범위하게 적용된 것은 인종 분야였다. 코프(E. D. Cope)와 같은 미국의 신라마르크주의자들은 성장에 있어 흑인종의 “지체”를 보여준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특징들을 나열하였다.[53] 독일에서는 헤켈이 동일한 접근법을 사용했다.[54] 헤켈은 발생반복 이론과 훨씬 직선적인 진화개념을 옹호한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비록 인종간 투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윈주의를 이용하였지만, 헤켈은 새로운 인종적 특성의 기원을 라마르크주의에서 찾았다. 그의 저서를 통해, 인간 기원에 대한 위계적 해석은 19세기 후반 진화론의 일반적인 관점 속으로 스며들었다. 만약 다른 인종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폄하한 나치의 주장이 생물학적 이론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면, 그 토대는 헤켈의 다윈주의뿐만 아니라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 관점 속에도 있었다.

라마르크주의는 인종 이론의 최악의 측면을 다소 누그러뜨릴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마르크주의는, 유럽인들의 우월감을 저해하지는 않았지만 교육과 더 나은 환경의 누적적 효과를 통해 다른 인종들도 최종적으로는 똑같은 수준으로 향상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잠재력은 터너(F. J. Turner)가 미국의 발달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미개척 영역 가설”에서도 볼 수 있다.[55] 터너에 의하면 미개척 지역의 자극적인 환경은 인종적 기원에 상관없이 개척자의 신체적 기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더욱 강한 인간종을 낳았다. 동일한 이론을 전세계 모든 인종들에게 적용한다면, 개선된 환경은 비슷한 생물학적 진보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될 수 있었다. 산파개구리 사건(midwife toad affair)에 연루되어 라마르크주의에 불명예를 남긴 폴 카머러는 실제 모든 인종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라마르크주의자 대부분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열등한 인종이 너무 오랫동안 열악한 환경을 접했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의미심장하게 개선될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영국의 발생학자 맥브라이드(E. W. MacBride)는 카머러의 라마르크주의를 변호하면서도, “열등한” 아일랜드 인종을 불임시키기 위한 극단적 형태의 우생학을 옹호했다.[56] 백인종의 진화에 대한 그들의 낙관적인 예측이 어떠했던지 간에 라마르크주의자들은 당대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인종의 진화를 부정하기 위해 자신들 이론의 또 다른 해석을 강조하였다.

진화적 인종이론은 과학적으로 논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 사회과학이 진화론적 관점 전반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붕괴되었다.[57] 유럽의 막스 베버(Max Weber)와 에밀리 뒤르켐(Emile Durkeim)과 같은 학자들은, 다른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는 기능적 통일체로서 각각의 사회와 문화를 설명하는 방법을 제창하였다. 모든 행동은 이성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 혹은 적어도 한층 근본적인 사회수준에서는 그러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이제 포기되었다. 또한 최상층에 유럽과 미국을 두는 위계 속에 모든 사회를 정렬시킬 필요도 없어졌다. 프란츠 보아즈(Franz Boas)와 그 제자들은 미국 인류학에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비슷한 방법을 도입하였다. 사회가 완벽함의 등급에 따라 배치될 수 없다면, 유럽식으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고 판단할 이유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문화적 힘 하나만으로도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크로버가 “초유기체”에 대한 논문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이러한 힘들은 생물학적 차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현대의 사회과학은 인종과 문화의 서열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개념이 문화적 발달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까지 거부했다.[58] 진화의 개념이 여전히 사용된다면 이는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조종될 필요가 없는 문화적 발달 과정을 의미한다.[59] 사실 생물학에 대한 사회과학의 거부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그 결과 현대의 생물학자들이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논쟁에서처럼 인간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 역할을 되찾으려고 시도할 때면 어마어마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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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2013).

제1부 과학혁명의 또 다른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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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생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

제4부 20세기 과학

제5부 동아시아 사회 속의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