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제도

imported>Zolaist님의 2007년 10월 10일 (수) 18: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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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필요성

'제도(institution)'란?

제도는 형식을 갖춘 조직이나 체계만을 의미하지는 않음. '행위 규범의 복합체'도 넓은 의미의 제도라 할 수 있음. 이런 의미에서 한 사회의 제도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행위를 제약하고, 그 행위에 대한 정당성과 의미의 원천이 되기도 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도 함.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과학

  1. 과학자들은 사회(과학자 사회 외부)에 자신들의 가치를 설득할 필요성(내용을 설득하거나, 지원을 얻기 위한 설득이거나)이 있기에 그들의 활동은 사회적 활동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설득의 대상은 변화해 왔는데, 크게 보면 17세기의 왕과 귀족에서 18세기의 공론장, 19세기 이후 정부, 산업자본가, 일반 대중 등으로 확대되었다.
  2. 과학자의 활동은 과학자 '사회'의 운영 원리와 규범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활동이다.

제도의 기능

  1. 과학의 가치를 전체 사회(과학자 사회 외부)에 설득하는 기능 또는 설득에 성공했다는 증거
  2. 관리와 배제: 과학자 사회나 특정 연구 학파로 수용할 만한 사람을 규정하고 적합한 실행 규범을 관리하는 역할. 이는 적합하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가령 보일의 실험실. 사실과 지식의 생산과 관리. (출판 여부의 선택성)
  3. 과학자 사회 내부의 효율적, 안정적 운영 기제: 가령 발견을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나 단체가 필요. 즉 지식의 생산과 전파를 증진하기 위한 실용적 움직임의 일환
  4. 급여 및 연구 기회의 제공. 교육을 통한 재생산: 예컨대 전문직업화가 이런 역할 수행.

제도 발전의 개관

  1. 17세기에 처음으로 조직화
  2. 18세기에는 뚜렷한 형태로 과학자 사회가 출현하고 공고화
  3. 19세기 들어 현재 당연하게 여기는 여러 기관들이 탄생. 전문직업화 이루어짐.
    • 프랑스: 혁명정부와 나폴레옹 정부의 교육 개혁으로 과학의 중요성 커졌음.
    • 독일: 현대적인 연구 대학 출현
  4. 20세기. 과학의 산업 연계성 증대

과학혁명기

대학

후원

모런에 따르면 기존의 과학사가들은 제도를 형식을 갖춘 조직으로만 본 탓에 학회와 같은 공식적인 제도들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이에 따라 후원과 같은 전통적 제도들은 그러한 긍정적 발전을 방해한 장애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궁정의 후원은 르네상스 시기 가장 널리 행해지던 체계였으며, 행위자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그들의 활동에 정당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궁정은 자신들의 명예 또는 실용적인 이득을 고려하여 피후원자들을 후원했는데, 예컨대 메디치가는 갈릴레오를, 루돌프 2세는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를 후원했다. 이들의 후원은 당시 과학활동의 내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후원자의 입맛에 맞는 자연사나 연금술 등이 정당한 활동으로서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즉 피후원자에 대한 후원을 넘어 그들의 활동과 지식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도 함께 이루어지곤 했던 것이다. 갈릴레오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한편, 헤센 카셀의 빌헬름 4세처럼 직접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군주-실행가(prince-practitioner)라는 새로운 정체성도 생겨나기도 했다.

과학단체

과학단체의 필요성과 기능을 중심으로 재정리해보면,

  1. 실험의 등장, 사실의 수집: 믿을 만한 판단을 내리는 명망 있는 개인들의 공동체를 명확히 할 필요. 즉 새로운 과학을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많던 시기에 새로운 과학의 지지자들은 상호부조를 위해서라도 뭉쳐야 했던 것. 처음에는 소규모의 부정기적 모임에서 출발하여 영속적인 과학단체로 자리 잡음. 가령 왕립학회. 관찰과 발견을 보고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 수행.
  2. 중재인의 역할: 왕립학회 간사였던 올덴버그는 과학자들 사이의 국제적인 서신교환을 유지. 철학회보라는 최초의 과학저널 출간. 중재인들은 중재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음. 보고의 신뢰성이 중요하던 시절이었고 오직 신사만이 믿을 수 있다고 여겼음.
  3. 배제: 실험철학의 철학적 기반에 도전하거나 왕립학회의 중추세력이 추구한 방식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엄격히 배제. 중립적이기보다는 뚜렷한 사회적,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 전부 청교도는 아니었지만 자유주의적 국교도라고 공언했으며 부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상업 기반을 지지했음.

18세기

과학교육이 일정정도 발전했으나 지역마다 편차 컸음. 네덜란드와 독일의 대학은 연구와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심지로 부상. 1776년 에딘버러 대학에서는 자연철학 교수직이 생김. 또한 공론장이라 할 수 있는 교역지대가 등장하여 과학에 대한 관심이 상층 대중들에게 확대됨.

그러나 대체로 새로운 과학을 교과과정에 편입하려는 노력은 적었음. 예컨대 옥스브리지는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과학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음. 그럼에도 과학교육에 대한 실용적 접근 방식은 그레샴 칼리지 이후 더욱 확산. 가령 광업에서 많은 수익을 올리던 대다수 독일은 연방국가들은 광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프랑스에서는 대학에서 과학교육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 정부가 공병을 양성하기 위해 기술학교인 다리 및 제방학교를 설립한 정도. 여전히 왕립과학아카데미가 중심이었고, 왕의 수집물을 모아두는 '왕의 정원' 설립. 18세기 말 교육 개혁을 통해 에콜 폴리테크닉을 비롯한 엘리트 양성을 위한 대학에서 과학과 수학을 주요하게 가르치게 되었음.

런던의 왕립학회는 점차 과학에 일시적인 흥미만을 가진 신사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쇠락하는 분위기. 뱅크스의 활동으로 어느 정도 활력을 얻었으나, 오히려 전문적인 개별 학회의 설립을 저지하는 일을 하기도 했음. 한편 자연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지면서 지역 유지들에 의해 유지되는 여러 지방 클럽들이 생겨났는데, 18세기 영국은 이런 학회와 모임의 천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특히 18세기 후반 루나협회는 주목받을 만함. 제임스 와트, 매튜 볼튼, 웨지우드, 에라스무스 다윈, 조셉 프리스틀리와 같은 기업가, 기술자, 과학 교양인의 소통 모임으로서, 이들은 부유하면서도 실용적인 관심 추구했으며, 과학을 유용한 지식의 기반으로 생각하여 큰 관심 가지고 연구했음. 왕립학회의 베이컨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했다고도 볼 수 있음.

19세기

19세기 초 전문직업화에 대한 장애물들

  1. 우선 과학을 사회적 엘리트가 향유하는 문화로 여기는 경향: 전문 직업화에 거부감. 예컨대 과학교양인(man of science), 신사 전문인(gentlemanly specialist), 교양적 탐구자(cultivator) 등에게 전문직업화는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보였을 것. 공적인 자금 지원도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음.
  2. 고전적인 엘리트를 양성해 온 대학은 과학교육과 연구를 대학 교과과정에 편입하려 하지 않음
  3. 영국과 미국의 자유방임 이데올로기: 산업가들 본인조차 과학에 대한 정부 지원에 회의적이었음. 자유방임 사회에서는 연구를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이 연구에 자금을 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 이는 순수 연구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 -> 프랑스와 독일의 중앙집권적 정부는 과학에 공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흐름을 선도한 반면, 영국과 미국은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그 흐름을 뒤따르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