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응 규칙
- 루돌프 카르납, "대응 규칙", 과학철학입문, 24장, 300-308쪽.
- 원문 : media:대응 규칙.pdf
요약
대응 규칙의 필요성
이론적 법칙으로부터 경험적 법칙을 직접 연역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 법칙은 이론 용어들을 포함하고 있고, 반면에 경험적 법칙은 관찰 용어들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체에 관한 이론적 법칙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자들의 운동만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기체의 온도, 압력과 같은 속성들뿐이다. 따라서 전자에 관한 법칙(이론적 법칙)으로부터 후자에 관한 법칙(경험적 법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즉 “이론 용어를 관찰 용어와 관련시키는 일련의 규칙들”이 더 첨가되어야 한다. 예컨대 특정 진동수의 전자기파를 특정 색과 연결시키거나,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를 온도와 연결시키는 규칙 등이 이에 해당된다.
학자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저마다 다르게 부르지만, 카르납은 이를 “대응 규칙(correspondence rules)”이라 부른다. 브리지만(Bridgman)은 조작 규칙(operational rules)이라 부르고, 캠벨(Cambell)은 “사전(Dictionary)”이라고 말한다.
이론적 용어에 대한 완벽한 정의 불가능성
이 규칙들이 이론 용어를 정의하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도 가끔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정반대가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이론 용어로 정의되는 경우는 있어도, 이론 용어가 관찰 용어들로 정의될 수는 결코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전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회하지 않고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전기는 우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심원한 신비들 가운데 하나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납은 여기에 아무런 신비도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론적 개념은 (관찰 용어에 의해) 정의될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귀가 크고 코가 긴 거대한 동물이라는 식으로 관찰 용어로 코끼리를 정의하는 일을 전자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
브리지만 등은 위에서 말한 규칙을 “조작적 정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어떤 물리량의 개념은 그것을 측정하는 조작적 절차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1] 그러나 그러나 브리지만은 하나의 물리량을 측정하는 절차는 여러 가지일 수 있고, 그 각각의 절차마다 그 물리량에 대한 하나씩의 조작적 정의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즉 하나의 물리량은 여러 개념 또는 여러 정의를 가지게 된다.[2] 결국 하나의 이론적 개념에 대해 조작 규칙을 이용해 여러 가지 “부분적” 정의는 할 수 있더라도, 그 이론적 개념에 대한 “하나의” 조작적 정의는 불가능하다.
이는 수학의 개념들을 자연에 적용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연에서의 무엇인가를 지칭하면서 “선”이라는 기하학적 개념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3] 따라서 이론적 기하학에서의 개념들을 (경험적 관찰에 의해)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론적 용어에 대한 부분적 해석의 필요성
가끔 캠벨 등은 이론적 존재자들을 수학적 대상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말은 그 대상들이 수학적 함수로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들이 정말로 순수 수학의 수학적 대상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수”, “로그 함수” 등의 수학의 용어들은 수학 내에서 서로 정의될 수 있지만, “전자”, “온도”와 같은 과학의 용어들은 순수 수학에서 정의될 수 없다.
수학적 이론들은 세계와 무관한 체계이다. 즉 수학의 공리 체계는 해석되지 않은 체계이다. 반면 물리학에서의 공준 체계는 세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전자”, “장” 등과 같은 물리학의 공리적 용어들은 그것들을 관찰할 수 있는 현상들과 관련시키는 대응 규칙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앞서 지적했듯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물리학의 공준 체계는 새로운 대응 규칙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한) 더 첨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사실 물리학의 역사는 그러한 과정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아무리 많아진다고 해도 최종적인 해석은 있을 수 없다.[4]
대응 규칙이 완벽한 정의를 제공해준다면?
한 이론 용어에 대해 새로운 대응 규칙에 의해 더 이상 해석이 보강될 필요가 없는 시점에 이른다면, 그 규칙들은 그 용어에 대한 최종적이고 명백한 정의를 제공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 말이 맞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용어는 더 이상 이론 용어가 아니라 관찰 용어가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불필요해 보인다. 너무 강한 대응규칙은 물리학의 발전에 역효과가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관찰할 수 없는 “전자”를 명백히 정의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대응 규칙을 찾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전자”라는 개념은 간단하고 직접적인 관찰과는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론 용어로 그대로 두고 새로운 관찰들에 의해 수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상책이다.[5]
평가
카르납은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를 구분하고 있는데, 그의 구분법에 따르면 관찰 용어는 감각 경험에 의해 직접 해석이 가능한 용어, 이론 용어는 대응 규칙을 통해 관찰 용어와 연결되어 그로써 간접적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용어이다. 그런데 카르납은 이 글에서는 앞 장에서 쓰인 구분법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전류와 온도는 앞 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관찰 용어처럼 그린 데 반해 이 장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이론적 용어로 그리고 있다. 카르납 본인이 관찰 가능/불가능의 경계가 원래 모호하다는 지적을 하긴 했지만, 하나의 책에서 이렇게 혼용해서 쓰는 것은 책의 약점으로 보이며, 그 구분이 정말로 가치 있는 구분인지도 의문을 품게 만든다.
카르납의 관찰 가능/불가능의 구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직관에서 시작된 듯하다. 코끼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직접 코끼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코끼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 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직접 물을 가리키며 이것이 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분자란 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직접 가리킬 수 없다. 따라서 코끼리, 물은 관찰 가능하지만, 분자는 관찰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는 나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코끼리”, “물”은 관찰 용어, “분자”는 관찰 불가능 용어, 즉 이론 용어가 된다는 카르납의 얘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모든 용어는 이론적 용어로 분류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자세한 논의는 Putnam을 참고할 것.
또 코끼리, 물은 직접 지시할 수 있다는 카르납의 이야기에는 찬성할 수 있지만, “코끼리”, “물”에 대한 정의가 직접 관찰에 의해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카르납의 이야기에는 찬성할 수 없다. “코끼리”, “물”을 정의하는 일은 직접 관찰에 의해 만들어질 수도 없으며, 결코 간단하지도 않다. 그 용어들을 브리지만 식으로 조작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것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실천적 조작에 의해서이다. 또한 그 조작적 정의는 다른 이론적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예컨대 “물”을 확인하는 절차는 여러 가지(e.g., 마셔보기, 투명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pH 시험지로 확인하기 등등)일 수 있기 때문에, “물”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과학의 용어에는 논리학과 수학과 달리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해석 절차’가 관찰 용어냐 이론 용어냐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관찰 용어라고 해서 그 용어의 의미가 직접 지시를 통해 그 용어의 의미가 완전히 정의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이론 용어라고 해서 그 용어의 의미가 언제나 이론 용어와 관찰 용어를 연결하는 ‘대응규칙’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쿤(Kuhn)이나 카트라이트(Cartwrite) 등이 생각하는 ‘대응규칙’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이론적 용어가 의미를 획득하는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쿤의 “패러다임에 대한 재고”, 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과 카트라이트의 Fitting Facts to Equations, How the Laws of Physics Lie를 참고할 것.
주석
- ↑ 질량은 양팔저울로 재는 것, 무게는 용수철저울로 재는 것, 전류는 전류계로 재는 것 등등.
- ↑ 예컨대 전류의 세기를 측정하는 절차는 (어떤 방식의 전류계로 재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이며, 그렇다면 전류의 세기 개념은 여러 가지가 된다.
- ↑ 광선, 팽팽한 줄 등은 단지 대략적으로 곧을 뿐이며, 그것들은 선이 아니라 선분일 뿐이다. 그러나 기하학에서의 선은 무한히 길고 절대적으로 곧다.
- ↑ 수학적 체계에서 어떤 공리적 용어에 대한 논리적 해석은 완벽하다. 만일 물리학의 이론 용어들이 대응 규칙에 의해서 (완벽하게) “정의”되는 것이라면, 순수 수학의 공리 체계와 물리학의 공리 체계의 본성 사이의 중요한 구분이 흐려질 것이다.
- ↑ 카르납이 보기에 관찰할 수 있는 ‘길이’와 같은 개념은 경험적 절차에 의해서 명백히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매우 짧은 길이뿐만 아니라 매우 긴 길이를 재는 절차 또한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매우 짧은 길이뿐만 아니라 매우 긴 길이도 자로 잴 수 없다. 따라서 길이의 개념은 조작적으로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여러 가지 절차의 합으로는 완벽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길이에 대한 정의도 약간은 열어 두어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더 읽을거리
- 루돌프 카르납, "이론과 관찰할 수 없는 것", 과학철학입문, 24장, 291-299쪽.
- 루돌프 카르납, "어떻게 새로운 경험적 법칙이 이론적 법칙으로부터 유도되는가", 과학철학입문, 25장, 309-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