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ginnings of Western Science

4장. 헬레니즘 자연철학

학교와 교육 : 아테네의 4학당(플라톤의 Academy, 아리스토텔레스의 Lyceum, 스토아, 에피쿠로스의 garden) 협동연구가 시작(Lyceum)됐으며, 아테네의 교육제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Lyceum→Museum, 최초의 왕실의 후원)와 로마제국에 영향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Lyceum :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대한 주석달기. 이는 명료화 또는 의문 제시용. ① 테오파라스투스 - 경험적 방법론 강조하여 생물과 광물의 자연사 연구에 집중했다. 한편, 과거의 흩어진 자료들을 모아 하나의 저서(eg. 누구 전집 류)를 만드는 작업(doxographic 전통)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대한 여러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eg. 목적론에 대한 의문. 불의 성격에 대한 의문) ② 스트라토 - 가볍고 무거움은 질적 차이가 양적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벼운 물체(eg. 공기, 불)가 올라가는 이유는 더 무거운 물체들에 의해 대체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물의 낙하를 관찰하여 가속도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③ 기타 주석가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은 6세기까지도 지속 및 확산됐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 ① 에피쿠로스 학파 - 고대 원자론에서 많은 아이디어(eg. 무한한 진공 속에서의 원자들의 운동. 개별 원자들에는 크기, 모양, 무게 등의 성질만 존재)를 차용했다. 이들은 원자론에 윤리적인 성격을 첨가하는 등 고대 원자론이 갖는 결정론적 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② 스토아 학파 - 유기적인 우주 모델을 제시하면서, 불활성의 물질을 유기적인 총체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능동적인 원리를 주장했다. ③ 둘의 차이 - 기계적 vs 유기적. 목적론 공격 vs 목적론 방어. 비결정론 수용 vs 결정론에 만족. (당시에는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 우세) ④ 이후 - 근대 초기, 두 철학 사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부활하여 근대 자연철학 형성에 기여했다.

5장. 고대의 수리과학

자연에 수학 적용하기 : ① 플라톤 - 세계를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기하학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세계의 질서를 물리적, 기계적 힘보다는 ‘기하학적 비율’에서 찾았다. ② 아리스토텔레스 - 자연철학과 수학에 대해, 각각의 유용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별개의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둘의 협동(mix)은 가능하지만, 전자의 후자로의 환원에는 반대했다. 즉, 수학을 자연에 어떻게 얼마나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경우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수학 : 대수보다는 기하학을 선호했는데, 고대에 확립된 공리체계로서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설명(증명)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스 초기 천문학 : ① 역법 계산. 윤년법. ② 항성에서 행성으로 - 에우독소스의 공헌이 큼. 불규칙한 행성운동(내행성의 최대이각, 화성의 역행운동)을 조화로운 원운동(천구모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그러나 에우독소스가 이러한 수학적 모형을 진정한 물리적 실체로 생각했는지는 의문의 소지가 있으며, 예측을 목적으로 한 도구적 모형만도 아닌 듯하다. ③ 수학적 모형에서 물리적 실체로 -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구모형을 물리적 실체로 파악하여, 천구 사이의 힘 전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즉, 천문학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준 것임.

우주론의 발전 : ① 태양중심설 - 헤라클리데스(BC 4세기)는 수성과 금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주장했으며, 아리스타르코스는 피타고라스의 우주론을 발전시켜 태양중심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주류는 아니었다. ② 지구둘레의 측정 - 에라토스테네스에 의해 수행됨.

헬레니즘 행성 천문학 : ① 대량의 관측자료 입수 - 히파르코스가 바빌론 관측자료를 입수해옴. ② 고대 천문학의 종합 정리 및 수학적용의 극대화 -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행됨. 겉보기에 복잡한 운동을 원운동의 합성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수학적 도구를 최대한 적용했다. 주전원 도입.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러한 수학적 모형을 물리적 실체로 생각했을까?)

광학 : ① 원자론자 ② 플라톤 ③ 아리스토텔레스 ④ 유클리드 기하광학 - ‘멀리 있을수록 높게 보인다’는 원리를 기하학적으로 해명했지만, 물리적 관계는 배제. ⑤ 프톨레마이오스의 굴절광학 - 유클리드와 헤론의 광학 계승 발전시킴. 다양한 매질 속에서 굴절의 수학적 패턴을 조사함.

역학 : 완벽한 수학화(기하학적 물음으로 대체), 추상화(천칭, 지레 등을 무게 없는 것으로 고려, 마찰 배제) 시도. 아르키메데스의 기여. 자연에 대한 수학화. (정역학에만 해당? 동역학은 아직...)

6장.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

초기 그리스 의학 : 주술적 치료법

히포크라테스 의학 :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경험적․귀납적 연구 전통이 발달하여, 히포크라테스 전집(한 사람의 저작 아님)을 만들어냈다. 병을 유형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병의 진행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주술적인 설명 방식과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비판했지만,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며, 양자간의 관계는 모호했다. 4체액설 이론을 통한 질병 설명.

헬레니즘 해부학과 생리학 : ① 히포크라테스 시기 - 인체 해부에 대한 증거 없음. ② 헬레니즘 - 죄수들의 생체해부 시작. 인체 내에 있는 뇌와 신경, 동맥, 정맥, 심장 등을 확인하고 묘사하기 시작. 이를 기초로 생리학의 여러 기능 설명. (헤로필루스, 에라시스트라투스)

헬레니즘 시대의 의학 분야 : 하나의 권위로 정립되지 못(안)했으며, 여러 학파(합리론, 경험론, 방법론, 생기론(?))가 경쟁하며 난립했다.

갈레노스와 헬레니즘 의학의 전성기 : ① 의학의 집대성 - 병의 분류, 질병의 원인 탐구. 해부학의 성과 정리하여, 장기의 기능도 질병의 원인으로 포함됨. (eg. 부패열→열증→독한 체액→장기 침투→고통)맥박, 소변 등도 조사. ② 플라톤과 에라시스트라투스의 조합 - 3영혼(natural spirit, vital spirit, animal spirit) + 3기관(간, 심장, 뇌? rete mirabile?). 즉, natural spirit - 간(기계적 소화). vital spirit - 심장.(피, 열) animal spirit - 뇌? rete mirabile? (신경, 감각) ③ 목적론적 인체론 - 기계적이지 않은 인간 설명. spirit?

7장. 로마와 중세 초기의 과학

그리스와 로마 : 그리스 학문과 예술의 로마 정복? 번역 작업. (언어 차이가 심하지는 않았음) 라틴어(대중적)보다 그리스어(학문적)가 고급적인 것으로 평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보존, 주석, 교육, 대중화하는 차원에서 학문활동 이루어짐.

지식의 대중화와 개요서 집필 : 대중을 위한 개요서(바로) 또는 백과사전(루크레티우스, 플리니우스) 등이 많이 편찬되었으며, 이러한 2차 저작물들은 중세까지 교양용, 교육용으로 상당한 역할을 했다. 로마 후기로 이어지면서, 경제적 쇠퇴, 언어 장벽 등으로 인해 그리스 과학(또는 자연철학) 전통과 단절이 생겼다.

기독교의 역할 : 기독교는 교리의 정당화를 위해 그리스 자연철학을 수용/교육했다. 특히 플라톤주의적 세계관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도 논증을 위해 사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를 체계화하기 위해 그리스 자연철학(특히 플라톤)을 이용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볼 수 있는가? 저자의 주장으로는 “볼 수 있다”)

로마와 중세 초기의 교육 : ① 로마 : 상당히 체계적인 교육 제도. ② 중세 초기 - 교회를 위한 독자적인 교육 양식을 만들었다기보다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교육 제도를 상당히 수용했음. ③ 4세기 수도원 문화 - 수도사들의 교육수준 상당했음. 이교도(그리스적) 지식 상당부분 차용. 수도원은 고전 문헌의 보존, 전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 담당. (예외도 있음. 5-6세기 수도사 카시오도루스의 교양교육. 수도원은 영적인 것 추구. 자연철학 주변화, 정치적․종교적 불안정기였음)

중세 초기의 자연철학자들 : 이시도르, 비드.

8장. 이슬람의 과학

비잔틴의 학문과 과학 : 서로마제국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 고대 그리스와의 언어적 장벽도 없었기에, 활발한 주석과 비평이 이루어짐.

동방으로의 전파 : 교리에 대한 경쟁 속에서, 인성을 강조하던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어 페르시아 국경지대로 도피하게 되었고, 이들은 페르시아 왕조의 후원으로 고대 그리스 문헌을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문화, 학문의 융합 과정으로 보아야 함.

탄생, 팽창, 이슬람의 헬레니즘화 : 특히 압바스 왕조가 성립하면서 헬레니즘화가 가속화되었다. 당시 이슬람 왕조는 바그다드로 천도하면서, 세속적인 풍조가 정립되었으며, 고등교육을 받은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의 관료로 등용되었다.

그리스 과학의 번역 : 9세기 초 칼리프 알마문이 설립한 ‘지혜의 집’에서 굉장한 규모로 번역작업이 수행되었음. 실용적인 의학서적을 비롯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이 번역되었다.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의 반응 : (marhinality thesis vs appropriation thesis) 수동적인 수용이라기보다는 능동적이었다. 실용적인 가치를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권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었다. 그럼에도, 그리스 과학과 철학은 이슬람 교육체계 내에서 안정적인 커리큘럼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으며, 그 성격에 대해 이슬람 종교로부터 끊임없는 의심을 받았다. 즉, 다양성의 존중 하에서 자유롭게 연구될 수는 있었지만, 핵심제도권에 들어갔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이슬람 과학의 성취 : 뒤헴은 이슬람 과학의 독창성을 폄하하면서, 단지 그리스 학문을 보존했을 뿐이라고 주장. 그러나, 이슬람의 지식인들은 개별 과학 분과마다 상당한 연구를 진척시켰다. 즉, 그리스 과학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수정, 확산시켰다. (eg. 알바타니의 천문학. 광학)

이슬람 과학의 쇠퇴 : ① 종교의 보수화(10세기 후반의 분서 사건)와 함께 과학활동이 실용화, 이슬람화되었다. 즉, 과학의 영역이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② 국제적 긴장 및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제국의 붕괴로 과학은 그동안의 후원자를 잃게 되었다.

중세 과학

  • 주된 태도: 고대과학은, 이슬람 과학은, 중세 과학을 그 자체로 바라보고 평가하자. 즉 "중세 과학에서 근대 과학의 맹아를 찾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근대과학을 기준으로 중세과학을 바라보는 것으로 오늘날의 과학만을 올바른 과학으로 여기는 휘그주의적 역사서술 태도. 중세의 과학은 근대과학 출현의 배경으로서가 아닌, 중세과학 그 자체로 바라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중세라는 사회적, 종교적, 제도적 맥락에서 살펴야 함. 그렇게 볼 때 중세과학이 근대과학의 출현에 도움을 주었던 측면이 비로소 드러날 것임.

중세과학의 유산

  1. 번역을 통한 지적 자산의 축적과 이를 통한 지적 전통의 확립
  2. 지적 자산을 소화, 흡수하기 위한 제도로서 대학의 출현
  3.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 추구, (그리고 그 안에서 진행된)
  4.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번역과 중세 대학

  • 번역의 시기가 유럽에 끼친 가장 큰 특징은 대학의 설립과 그 기관을 통한 학문의 전수.
  • 대학은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학생들에게 성직자 신분 부여)
  • 모든 유럽의 교과과정 통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수학이라는 공통의 지적 기반 마련.
  • 번역 활동을 통해 지적 암흑기에 처해 있었던 유럽에 지식의 자양분이 공급되었다면, 유럽 전역에 설립된 대학을 통해 이들 사이에 공통의 지적 자산이 마련되었음.

중세의 새로운 자연철학

  • 고대 자연철학 + 기독교 -> 중세의 새로운 자연철학. 그럼에도 중세 대학 교수는 신학의 느슨한 제약 안에서 충분히 자유롭게 학문을 추구했음.
  •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신학 아래로 받아들이려는 시도 다방면에서 계속 이루어짐.
    •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시녀'
    • 토마스 아퀴나스, 로저 베이컨 등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 계속.
    •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기독교화' 이루어짐. but 그 못지 않게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화'도 진행.
  • 성서의 교리 위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위험성 감지했지만 그에 대한 13세기 초 금지령들은 별 효과 발휘하지 못함.
  • 중세 교화외 힘센 시녀 아리스토텔레스의 충돌과 그 예기치 못한 결과
    • 탕삐에 주교의 1270, 1277년 금지령.
    • 지배적인 흐름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사유의 기회 얻음.
    • 오컴, 뷰리당, 오렘 등등.. 갈릴레오 낙하법칙의 오랜 기원

소결

중세의 자연철학은 독단적인 풍토 속에서 퇴행만을 거듭하던, 그리하여 15세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극복되어야 했던 그런 대상만은 아니었음. 그렇다면 중세는 근대 과학에 어떤 유의미한 유산을 남겨주었을까? 린드버그는 번역, 대학, 그리고 기독교 그 자체가 이후 세대 과학에 풍부한 자산이 되었다고 주장. 17세기 과학의 적이라고만 여겨졌던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중세 시기 내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정교한 논쟁 지형을 만들었다. 린드버그는 이러한 것들이 중세가 남긴 유의미한 유산이라고 주장. 과학을 단순히 그 방법론이나 형이상학만이 아닌 보다 폭넓은 제도, 종교,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할 때 풍부한 역사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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