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들어가는 글
데이비드 에저턴 지음, 정동욱, 박민아 옮김,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석탄, 자전거, 콘돔으로 보는 20세기 기술사』 (휴먼사이언스, 2015), 들어가는 글
기술의 역사는 대부분 전연령대의 남자애들용으로 씌어졌다. 이 책은 모든 성별의 어른을 위한 역사책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술과 함께 살아 왔으며, 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경제학자에서 생태학자에 이르기까지, 골동품 애호가에서 역사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우리를 둘러싼 물질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여러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의제는 대부분 새로운 기술의 옹호자들에 의해 정해진다.
첨단 기술에 대해 들으면 새로움과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수십 년 동안 ‘기술’이라는 용어는 발명(새로운 생각의 창조) 또는 혁신(새로운 생각의 최초 사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기술에 대한 얘기는 연구 및 개발, 특허, 확산이라 불리는 초기 사용 단계에 집중되어 있다. 넘쳐나는 기술사 연표들은 발명과 혁신의 날짜들로 채워져 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들은 흔히 비행(1903), 원자력(1945), 피임(1955), 인터넷(1965)으로 축약되곤 한다. 변화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으며, 새로운 것들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고들 말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세계는 기술로 인해 새로운 역사적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새로운 경제, 새로운 시대, 탈공업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현재와 과거의 지식은 앞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발명가들은 ‘시대를 앞서 가는’ 반면, 사회는 과거에 사로잡혀 새로운 기술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세계는 정말 급격하게 변하고 있지만, 앞에서 제시된 사고방식만은 그 예외로 남아있다. 미래에 대한 강조 그 자체는 새로움을 내세우지만, 이러한 종류의 미래학(futurology)은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발명가들이 시대를 앞서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 인간 사회의 대처 능력보다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19세기에도 진부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이러한 생각은 ‘문화 지체’라는 이름표를 달면서 학술적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도,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미래를 타고났다’는 주장을 태연하게 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 미래주의는 이미 오랫동안 닳고 닳은 낡은 주장이 되었다. 기술적 미래는 오랫동안 변화가 없었다. 지식인들은 ‘포스트모던’ 건축이 형상화했던 것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미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종류의 미래란 모든 것을 바꾸어 줄 것이라던 구식의 기술 혁명 혹은 산업 혁명에 의해 등장한다고 했던 것이었다.
기술의 경우, 재가열된 미래주의는 진부한 것으로 드러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흥미를 끌었다. 기술적 미래는 전과 다름없이 진군만을 계속했다. 2004년 3월 27일 미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비행기 X-43A의 성공적인 처녀비행을 생각해보자. 겨우 10초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전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한 신문은 ‘키티 호크에서 X-43A로의 발전은 한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진보’이며 ‘시속 7마일에서 마하 7에 이르는 발전은 동력 비행이 지난 백 년 동안 얼마나 멀리 날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라고 적었다. 다시 말해, 머지않아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런던까지 거의 순간 여행을 즐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사실 이면에는 이 낡아빠진 이야기에 커다란 구멍을 낼 수 있는 다른 역사가 숨어 있다. 1959년에서 1968년까지 몇 주에 한 번씩 B-52 전투기가 그 날개 아래에 3대의 X-15 가운데 하나를 달고서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 기지를 이륙했다. 일단 높은 상공에 오르면, X-15가 은색 가압 우주복을 입은 ‘연구 조종사’ 12명의 조종 하에 자신의 로켓 엔진을 점화하고 스스로 날아올라서는 마하 6.7의 속도로 우주 가까이에 도달했다. 톰 울프가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 에서 묘사했듯이, (달에 첫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을 비롯해) 대부분 전투 베테랑으로 과음을 즐겼던 이 엔지니어-조종사들은 단지 ‘통조림 속의 스팸’에 불과한 우주비행사들을 경멸했다. 우주비행사들이 유명해지는 사이, 그 엘리트 X-15 조종사들은 뒤편에 남아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1990년대 초 ‘[나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 조종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 맞지 않게 너무 늙어버렸다. 보다 젊은 누군가가 그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X-43A와 그 부스터 로켓을 싣고 올라간 B-52는 X-15 프로그램에서 사용되었던 B-52 가운데 하나로, 현재 비행 가능한 B-52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이 B-52는 195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X-43A의 핵심 기술인 스크램제트도 램제트의 초음속 버전일 뿐이었다. 수십 년 된 기술인 스크램제트는 1950년대에 설계된 영국의 대공 미사일 블러드하운드에 사용되었고, 이 미사일은 1990년대까지 실제로 운용되었다. 다시 말해, X-43A의 처녀 비행 성공담은 ‘1950년대의 비행기를 가지고 1960년대 “필사의 도전”에 참여했던 조종사들보다 조금 빨리 나는 무인 램제트 비행기를 발사’한 이야기로도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 기술(technology-in-use)의 역사를 고려하면 기술에 대한, 실제로는 발명과 혁신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그림이 가능해진다. 감추어져 있던 기술의 온전한 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이는 혁신 기반 연대기 위에 묶여 있던 우리의 기술적 시대 관념을 재고하게 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는지에 관한 우리의 그림까지도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혁신 중심의 기술사는 (스스로 보편성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협소한 지역에 기초해 있지만, 사용 기술의 역사는 전지구적 세계사를 낳는다. 이는 통상적인 근대성의 도식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혁신 중심적인 견해에 깔려있는 몇몇 중요한 가정의 잘못을 드러내줄 것이다.
이 새로운 역사는 엄청나게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산업 혁명의 대표적 특징으로 간주되는 증기 기관은 1800년대보다 1900년대에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더 중요했다. 산업 혁명을 선도한 영국에서조차 증기 기관은 지속적인 성장을 거쳐 산업 혁명 이후에나 절대적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1950년대의 영국은 1850년대보다 더 많은 양의 석탄을 소비했다. 2000년의 세계는 1950년이나 1900년보다 더 많은 양의 석탄을 소비했다. 세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동차, 비행기, 목재 가구, 면직물이 있다. 전세계 선적 톤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버스, 기차,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며, 종이, 시멘트, 강철의 소비량은 꾸준히 늘어만 간다. 책의 생산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핵심 신기술인 전자 컴퓨터조차도 수십 년이 넘었다. 우리의 포스트모던 세계에는 40년 묵은 원자력 발전소와 50년 묵은 원자 폭탄도 함께 존재한다. 복고 기술의 유행도 적잖이 일어나서, 이 세계에는 새로 건조한 대양 여객선도 있고 유기농 음식도 있으며 ‘골동품’ 악기로 연주되는 고전 음악도 있다. 나이 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한 1960년대 록스타가 여전히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아이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보던 디즈니 영화를 보며 자란다.
사용 중심의 역사는 단순히 기술적 시간대를 뒤로 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근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전근대와 탈근대와 근대의 시간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우리는 옛 것과 새 것, 즉 망치와 전기 드릴 모두를 가지고 일을 했다. 사용 중심의 역사에서 기술은 나타나기만 할 뿐 아니라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도 하며, 수세기에 걸쳐 서로 뒤섞여 결합한다. 1960년대 말부터 매년 전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자전거의 수는 자동차보다 훨씬 많아졌다. 1940년대에는 단두대가 부활하는 섬뜩한 일이 벌어졌다. 1950년대 쇠퇴했던 케이블 TV는 1980년대에 다시 나타났다. 폐물로 취급되던 전함은 1차 세계대전 때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더 많은 교전을 벌였다. 심지어 20세기에는 기술적 역행의 사례들도 나타났다.
사용 중심의 역사는 정연한 진보의 연대기를 어지럽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줄 것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술인지에 대한 생각도 바뀔 것이다.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그동안 과도하게 혁신 중심적이었으며, 이는 특정한 몇 가지 신기술을 현대성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특정한 이해 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용 중심의 새로운 그림에서 20세기 기술은 전기, 대량 생산, 항공우주, 원자력 발전, 인터넷, 피임약의 얘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인력거, 콘돔, 말, 재봉틀, 물레, 하버-보쉬법 , 석탄의 수소 첨가법, 초경합금 공구, 자전거, 골함석 , 시멘트, 석면, DDT, 전기톱, 냉장고도 포함될 것이다. 나치 정복에서 말은 V2 로켓보다도 더 큰 공헌을 했다.
사용 기반의 역사 및 새로운 발명사의 핵심적인 특징은 거의 모든 기술에 대해 대안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전기를 생산하거나, 자동차에 동력을 공급하거나,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거나, 금속을 절단하거나, 건물에 지붕을 덮거나 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며, 군사 기술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는 대안이 불가능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기술에 기반한 기술사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진정으로 전 지구적인 역사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발명과 혁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소수의 지역뿐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이 이 역사에 포함될 것이다. 혁신 중심의 서술에서 대부분의 지역은 기술의 역사를 갖지 못한다. 사용 중심의 서술에서는 거의 모든 지역이 역사를 갖게 된다.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유색인종이며 그 절반은 여성이다. 사용 중심의 서술은 그들 모두를 포함하는 기술의 역사를 제공한다. 20세기에 출현했지만 지금까지 기술의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새로운 형태의 기술적 세계들에 대해, 사용 중심의 관점은 그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그중에는 가난한 지역의 새로운 기술들도 있다. 그 기술들이 간과되는 이유는, 가난한 세계가 전통적인 토착 기술만을 가진 채 부유한 세계의 기술을 결핍하고 있거나 제국의 기술적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도시를 생각할 때 우리는 고급 상업거주지역(Alphaville)뿐만 아니라 판자촌들(bidonvilles)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뿐 아니라 무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판자촌도 생각해야 하며, 거대 건설사가 아닌 수백만에 달하는 자가 건축가에 의해 수년에 걸쳐 지어진 도시도 생각해야 한다. 이곳들은 내가 ‘크리올(creole)’ 기술이라 부르는 것들, 즉 원래의 발생지에서 이식되었지만 보다 광범위한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은 기술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새로운 것에서 오래된 것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극적인 것에서 평범한 것으로, 남성적인 것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호화로운 것에서 초라한 것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그 진정한 핵심은 모든 기술의 역사를 재고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부유한 백인 세계의 크고, 극적이고, 남성적인 고급 기술도 포함된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20세기의 기술과 역사에 대한 일관된 생산주의적, 남성중심적, 유물론적 이해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겐 커다란 질문들과 해결해야 할 커다란 문제들이 있으며, 그 답은 의외로 열려있다.
사용 중심의 설명은 혁신 중심적인 역사의 몇몇 확고한 결론을 뒤집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는 국가적 혁신이 국가적 성공을 결정한다는 가정을 무너뜨린다. 즉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국가들이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사용 관점에 의해 제기되는 가장 획기적인 비판은 아마도 혁신 중심의 역사가 발명과 혁신에 대해 부적절한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일 것이다. 혁신 중심의 역사는 나중에 중요해진 몇몇 기술의 초기 역사에 집중한다. 발명과 혁신에 대한 역사는 나중의 성공 실패 여부에 상관없이 특정 시기에 있었던 모든 발명과 혁신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또한 유명해진 덕분에 인기를 얻은 기술이나 가장 중요하다고 미리 가정된 기술만이 아니라 모든 기술에서 그 발명과 혁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혁신 중심의 역사에는 빌 게이츠(Bill Gates)의 자리만 있었지만, 발명과 혁신에 대한 역사에는 목가구를 대량 생산하고 판매하여 돈을 번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케아(IKEA)를 설립했는데, 어떤 이들은 그가 빌 게이츠 이상의 부자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실패로 끝난 대다수의 발명과 혁신에도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발명들은 사용되지 못하며, 수많은 혁신들은 실패한다.
혁신 중심의 관점은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본성에 대해서도 오해를 불러온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가 내세우는 그대로 창조자, 설계자, 연구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는 언제나 물건과 공정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 즉 발명이나 개발이 아닌 물건의 사용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에 대한 논의에서 혁신 중심적인 미래주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역사는 기술을 재검토하는 데 있어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역사는 기술적 미래주의가 오랜 시간 동안 크게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각되지 못한 채로 있었지만, 현재의 미래상에는 놀라울 정도로 새로움이 결여되어 있다. 세계 평화를 약속했던 기술들에 대한 아주 지겨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철도와 증기선에서부터 라디오와 비행기를 거쳐 이제는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세계를 작게 만들고 사람들을 묶어줌으로써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해줄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철갑 전투선, 노벨의 폭약, 폭격기, 원자 폭탄과 같은 파괴 기술들은 너무 강력해서, 그들 역시 세계 평화를 강제할 것이라 했다. 수많은 종류의 신기술들은 약자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 했다. 낡은 계급 시스템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요청되는 능력 위주 사회가 되면 사라질 것이라 했다. 소수 인종들은 -- 자동차 시대의 운전사, 비행기 시대의 조종사, 정보화 시대의 컴퓨터 전문가처럼 --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했다. 여성들은 진공청소기에서부터 세탁기에 이르는 새로운 가사 기술들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 했다. 기술이 국경을 넘어섬에 따라 국가들 사이의 차이는 사라질 것이라 했다. 모든 곳의 기술은 필연적으로 똑같아질 것이고, 그에 따라 정치 시스템 역시 수렴할 것이라 했다.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는 하나가 될 것이라 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조금이라도 말이 되려면 자신의 역사를 부정해야 했고, 실제로 놀라울 정도로 그러했다. 아주 가까운 역사에 대해서조차 망각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예를 들어, 1945년 중반에 폭격기는 평화를 창조하는 기술로서의 임무를 그만두었으며, 원자 폭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정보 기술을 생각할 때면 우편 시스템, 전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의 존재를 잊는다. 우리가 온라인 쇼핑에 대해 경탄하는 동안 통신 판매 카탈로그는 실종된다. 유전공학과 그것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에 대한 얘기는 마치 이전까지는 동물이나 식물을 변화시키는 다른 어떤 수단도 없었던 것처럼 논의된다. 식량 공급을 증대하는 다른 수단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과거에 일들이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대한 역사와 과거의 미래학이 얘기하던 방식에 대한 역사는 새로움에 대한 당시의 주장 대부분을 무너뜨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미래학이 우리의 역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미래학의 영향으로 우리는 발명과 혁신에 주목하고,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기술들에 주목해 왔다. 이러한 미래학 문헌들, 즉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의 책에서부터 미항공우주국(NASA) 홍보 담당자의 보도자료에 이르는 중하급 지식인과 선전가의 작품으로부터 우리는 기술과 역사에 대한 판에 박은 일련의 얘기들을 들어 왔다. 그것들은 이해에 도움이 되는 근거 있는 견해로 간주되기보다 -- 그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 질문의 기초로만 이용되어야 한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들은 무엇이었는가? 세계는 지구촌이 되었는가? 문화는 기술보다 뒤쳐졌는가? 기술이 사회와 정치에 미친 영향은 혁명적이었는가, 보수적이었는가? 지난 100년 동안의 극적인 경제 성장은 새로운 기술 덕분인가? 기술은 전쟁을 변화시켰는가? 기술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왔는가? 이들은 이 책이 답하려고 하는 질문의 일부이지만, 보통 그 질문들이 제기되던 혁신 중심적인 틀 안에서는 대답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 질문들은 만약 우리가 ‘기술’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물건들’을 생각하게 되면 훨씬 쉬워진다. 기술의 사용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물건의 사용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기술’이 사는 낯선 세계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와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우리의’ 기술에 대해 얘기할 때, 그 기술은 한 시대 또는 전체 사회의 기술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물건들’은 그러한 전체성에 들어맞지 않으면서, 흔히 독립적인 역사적 원동력으로 얘기되는 것도 연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물건들의 세계를 어른들처럼 논의하는 반면, 기술은 아이들처럼 논의한다. 예를 들어, 물건의 사용이 여러 사회에 걸쳐 널리 퍼져 있는 반면, 물건의 궁극적인 통제와 그 통제권의 사용은 사회 내적으로도, 사회들 사이에서도 고도로 편중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소유권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권한들과 사용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왔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소유가 아닌 집에 살고 있고, 다른 사람 소유의 작업장에서 다른 사람 소유의 도구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으며, 외관상으로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물건들은 사실 대개 임대 계약에 묶여 있다. 사회 집단 중에는 과도한 통제권을 점유한 국가나 소그룹이 있다. 어떤 사회 집단은 다른 사회에 비해 훨씬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지역에서는 그 대부분의 물건을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물건들은 기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특정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
목차
데이비드 에저턴 지음, 정동욱, 박민아 옮김,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석탄, 자전거, 콘돔으로 보는 20세기 기술사』 (휴먼사이언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