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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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ary Putnam, “The ‘Corroboration’ of Theories”, in The Philosophy of Karl Popper (Open Court, 1974), pp. 221-240; reprinted in Scientific Revolutions, ed. Ian Hacking (Oxford,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pp. 60-79.


이론의 ‘승인’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전다혜 옮김


칼 포퍼 경(Sir. Karl Popper)의 철학적 연구는 사실상 거의 모든 과학철학자들의 연구에 영향과 자극을 주었다. 이 영향 중 일부는 포퍼의 몇몇 근본적인 태도의 건강성에 기초하여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철학에 고유한 방법은 없다.’ [둘째,] ‘지식의 성장은 과학 지식의 성장을 연구함으로써 가장 잘 연구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경우에, 내가 과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수수께끼나 그 세계에 관한 인간 지식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수수께끼에 관한 관심을 되살리는 것만이 전문가의 전문적 능력과 그의 개인적 지식 및 권위에 대한 무비판적(obscurantist) 믿음으로부터 과학과 철학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조금 편협한 것일 수도 있지만(비과학적 지식에 대해 연구하지 않고도 지식의 성장을 연구할 수 있을까? 포퍼가 언급한 문제들은 단지 이론적 관심거리, 즉 ‘수수께끼’에 불과할까?), 많은 철학자들의 태도에 비하면 훨씬 덜 편협하며, 포퍼가 경고한 ‘무비판적 믿음’이야말로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부분적으로 포퍼의 실재론, 실증주의자들의 독특한 의미 이론에 대한 그의 거부, (실증주의자들의 의미 이론에 본질적이며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논쟁해 온) ‘과학 이론의 해석’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과 과학 방법론의 문제들의 분리로부터 생겨났다.[1]

이 논문에서 나는 과학 방법론에 관한 — 포퍼는 ‘귀납’이란 개념을 부정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귀납’이라고 불리는 것에 관한 — 그의 견해를 검토하고, 포퍼만의 가정보다는 그가 표준적인 과학철학과 공유하고 있는 가정들을 특히 비판하고자 한다. 내 생각에, 그들은 많은 가정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과학을 바라보는 잘못된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 ‘귀납’에 대한 포퍼의 견해

포퍼 자신은 ‘귀납’이라는 용어를 (그가 ‘기초 진술’이라 부른) 관찰 자료나 실험 자료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법칙을 검증하거나 그것이 참임을 (혹은 적어도 개연적임을) 보이기 위한 임의의 방법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그의 견해는 철저하게 흄적이다. 즉, 그에 따르면, 그러한 방법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귀납의 원리는 선험적 종합(포퍼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했다)이거나 아니면 상위 수준의 원리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무한퇴행에 빠진다.

여기서 신선한 점은 포퍼가 경험 과학이 불가능하다거나 경험 과학이 스스로 정당화될 수 없는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입장은 경험 과학이 실제로 귀납의 원리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퍼는 과학자들이 일반적인 법칙을 표명한다는 것도 그들이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을 관찰 자료와 대조하여 시험한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어떤 과학자가 어떤 일반적인 법칙을 ‘승인(corroborate)’할 때 그로 인해 그 과학자가 그 법칙이 참이라거나 심지어 개연적이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법칙을 높은 정도로 승인했다’는 진술은 단지 ‘나는 이 이론을 엄격한 시험에 부쳐 왔고, 그 이론은 그것을 버텨 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과학 법칙은 반증가능한 것일 뿐, 검증가능한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법칙을 검증하려는 시도조차 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반증만 시도할 뿐이므로, 흄의 문제는 경험 과학자들에게 발생하지 않는다.

2. 포퍼의 견해에 대한 간략한 비판

포퍼의 책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와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 책에는 과학 이론과 법칙의 적용에 대해 몇 개 안 되는 짧은 언급만 담겨 있으며, 거기에는 그 적용이 법칙에 대한 또다른 시험일 뿐이라는 얘기밖에 없다. ‘나의 견해는 ... 이론가는 설명 그 자체에, 다시 말해 시험가능한 설명적 이론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에게 적용과 예측은 단지 이론적인 이유 — 그것들이 이론에 대한 시험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 — 에서만 관심을 끌게 된다 ’[2]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수용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법칙에 의지할 것을 — 보통은 실용적인 맥락에서 의지할 것을 —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귀납에 관한 포퍼의 독특한 견해는 과학을 과학의 실제 발생 맥락 — 사람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애쓰는 맥락 — 에서 완전히 떼어냈을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 생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지침이다. ‘지식’, ‘개연성’, ‘확실성’ 등의 개념들은 모두 행동[의 결정]이 당면한 문제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으며, 흔히 그러한 맥락 속에서 사용된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나는 특정한 생각에 자신있게 의지해도 될까? 나는 이러저러한 점들에 주의하며 그 생각에 잠정적으로 의지해야 할까? 그 생각[의 진위]에 대해 점검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이 법칙은 높은 정도로 승인되었다’, ‘이 법칙은 과학적으로 수용되었다’나 이와 유사한 진술이 ‘이 법칙은 엄격한 시험을 버텨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해 온 그 법칙이 적용이나 적용 시도와 관련된 시험과 같은 추가적 시험에도 견뎌낼 것 같은 기미가 전혀 없다면, 포퍼가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되면 과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활동이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법칙이나 이론도 실천적인 목적에서 의지할 수 있을만큼 안전하다고 말해 줄 수 없을 것이므로, 과학은 실용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인데, 포퍼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어떤 법칙이나 이론도 참이거나 적어도 개연성이 있다고 말해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추측’(포퍼에 의하면 모든 과학 법칙은 ‘잠정적인 추측’이다)이 아직 반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이해한 것은 아니다.

과학 법칙의 적용은 미래의 성공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기 때문에, 귀납이 불필요하다는 포퍼의 주장은 옳지 않다. 과학자들이 미래를 귀납적으로 예측하지 않는다 할지라도(물론, 그들은 예측을 하고 있지만), 과학 법칙과 이론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귀납적 예측을 한다. 그러므로 ‘귀납을 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충고가 아니다.

모든 지식을 ‘잠정적인 추측’이라고 생각하라는 충고도 부당하다. 노동 착취 공장에서 파업 중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주인이 나쁜 놈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우리의 파업을 취소하고 그의 양심에 호소해 보자’라고 말해야 하는가? 지식추측의 구분은 우리의 삶에서 실질적인 일을 하고 있다. 포퍼의 극단적인 회의론은 이론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하는 그의 극단적 경향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3. 승인에 관한 포퍼의 견해

포퍼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귀납을 하지 않음에도 과학 이론을 ‘승인’하긴 한다. 포퍼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 높은 정도로 승인되었다는 진술은 그 이론이 참이나 근사적 참으로서,[3] 혹은 심지어 근사적 참일 것 같은 것으로서 수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포퍼의 대다수 독자들이 승인에 관한 그의 얘기를 — 포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이론의 검증과 유사한 어떤 것에 관한 얘기로 읽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포퍼는 본인의 말과는 달리 귀납에 대한 이론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내가 이 논문의 본문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론 또는 이 이론의 특정한 가정이다.

이런 식으로 포퍼를 읽는 것에 대한 포퍼 자신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내 주장의 요점이 충분히 명료하게 설명되지 못하였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모든 귀납주의자들이 표명했던 [경쟁 이론의] 제거의 유일한 목적은 살아남은 이론을 가능한 한 견고하게 정립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살아남은 이론은 참된 이론(혹은, 우리가 참된 이론을 제외한 모든 이론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엔 개연성이 높은 이론)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쟁 이론의 수는 항상 무한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나는 제거를 통해 경쟁 이론의 수를 의미있게 줄일 수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 혹은 해야 하는 — 일은 살아남은 이론들 가운데 개연성이 가장 낮은 이론을 — 좀 더 정확히는 가장 엄격하게 시험할 수 있는 이론을 — 당분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이론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그 이론을 추가적인 비판과 우리가 설계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시험에 부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는 살아남은 이론에 대해 우리가 아는 한 최고의 — 그리고 최고로 시험된 — 이론이라는 것을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4]

마지막 문장을 무시한다면, 우리가 비판해 온 포퍼의 학설은 순수한 형태로 남게 된다. 즉, 과학자는 이론을 ‘수용’하면서 그 이론이 개연적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그 이론을 개연성이 가장 낮은 것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는, 내가 오해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귀납주의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감지한 것인가? ‘최고의 이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포퍼가 ‘가장 그럴듯한’ 이론을 의미할 리는 없지 않은가?

4. 과학적 방법 — 표준적인 도식

과학 이론의 입증(confirmation)[5]에 대한 표준적인 ‘귀납주의적’ 견해는 대략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론은 예측(기초 진술 또는 관찰 진술)을 함축한다. 만약 예측이 거짓이면, 이론은 반증된다. 만약 충분히 많은 예측이 참이면, 이론은 입증된다. 귀납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포퍼의 도식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즉 이론은 예측(기초 진술)을 함축하고, 만약 예측이 거짓이면, 이론은 반증된다. 그리고 만약 충분히 많은 예측이 참이고, 어떤 추가적인 조건이 충족되면, 이론은 높은 정도로 승인된다.

게다가, 포퍼를 이렇게 읽을 만한 근거가 정말로 있다. 분명 포퍼는 ‘살아남은 이론’이 수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얘기는 이론 수용의 논리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과학자가 이론을 ‘수용’했다고 말할 때, 그 과학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혹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포퍼의 견해는 옳은가? 그리고 한 이론에 그러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포퍼의 방법론은 옳은가? 나의 주장은, 비록 그 지위의 해석에 있어서는 매우 다를지라도, 방법론에 관한 그의 설명은 표준적인 도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포퍼가 추가한 몇몇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 배경지식에 기초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예측들은 이론을 시험하지 못한다. 오로지 배경지식에 비추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예측만이 이론을 시험한다. 그리고 포퍼에 의하면, 우리가 이론으로부터 그릇된 예측을 도출하기 위한 진지한 시도를 하지 않는 한 그 이론은 승인되지 않는다. 포퍼는 이러한 추가 조건들을 베이즈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6] 내가 보기에 그는 이에 대해 — 적어도 그 일부는 — 혼동을 한 것 같다. 개연성이 낮은 예측을 함축하는 이론은 개연성이 낮다. 이는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 이론은 그 예측을 함축하는 모든 이론 중에서 개연성이 가장 높은 이론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만약 그 예측이 참으로 밝혀진다면, 베이즈 정리는 그 이론이 왜 높은 확률을 부여받게 되는지 설명해 준다. 포퍼는 우리가 살아남은 이론들 중에서 개연성이 가장 낮은 이론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즉, [포퍼의 말에 따르면,] 수용된 이론은 예측이 참으로 밝혀진 에도 개연성이 가장 낮은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개연성)’이란 말을 다른 어떤 과학철학자도 받아들이지 않을 방식으로 사용한 탓이다. 그리고 베이즈주의자는 참된 예측이 모두 이론을 의미있게 입증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론의 개연성(확률)에 대한 정량적인 측정이 과학철학에서 희망적인 모험이 아니라는 포퍼의 견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베이즈 정리가 적어도 많은 상황에서 질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하튼, 포퍼의 도식의 핵심은 이론과 예측의 연결에 있다. 포퍼에 의하면, 이론과 일반 법칙들이 기본진술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는 이유는 연역논리와 관련된 ‘함축’이라는 뜻에서 이론이 기초진술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즉, 기초진술이 이론에서 연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결은 ‘귀납주의’ 도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양 도식은 모두 이론이 함축하는 예측을 살피고, 그 예측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라고 말한다.

나의 비판은 포퍼와 ‘귀납주의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지점인 이 연결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내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매우 많은 중요한 사례에서, 과학이론은 예측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점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과학철학에 있어 그것의 중요성을 보이고자 한다.

5. 보편중력 이론

나의 지적을 예증하기 위해 사용할 이론은 독자들에게 친숙할 뉴턴의 보편중력이론이다. 이 이론은 뉴턴의 3가지 법칙과 더불어, 모든 물체 a 는 다른 물체 b 에 힘 Fab 를 작용한다는 법칙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Fab 의 방향은 a 를 향하고, 그 크기는 보편중력상수 g 의 MaMb/d2 배이다. 반드시 보편중력이론만이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맥스웰이나 멘델, 다윈의 이론을 검토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친숙하다는 이점이 있다.

이 이론이 하나의 기초문장조차도 함축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사실, 그 이론은 중력이 아닌 다른 힘이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므로, 어떤 운동이든 이 이론과 양립가능하다. 힘 Fab 자체를 직접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단 하나의 예측도 이론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그렇다면, 천문학적 현상에 이 이론을 적용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전형적으로 우리는 상황을 단순하게 만드는 가정을 도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구의 궤도를 연역하려 한다면, 우리는 1차 근사로서 다음과 같이 가정할 것이다.

(Ⅰ) 태양과 지구 외에는 어떤 천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Ⅱ) 태양과 지구는 경진공(hard vacuum) 속에 존재한다.
(Ⅲ) 태양과 지구는 상호 유도된 중력 외에는 어떤 힘도 받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보편중력이론과 이 보조진술들의 연언(conjunction)으로부터 케플러의 법칙과 같은 특정한 예측을 도출할 수 있다. (Ⅰ), (Ⅱ), (Ⅲ)을 보다 ‘현실적’으로 만듦으로써, 예컨대 우리의 태양계 모델에 다른 천체들을 더 포함시켜서, 우리는 더 나은 예측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측들은 오로지 이론에 의해서만 도출된 것이 아니라, 이론과 보조진술의 연언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이론’의 용법에 따르면, 보조진술들은 중력 ‘이론’의 일부가 전혀 아니다.

6. 단지 용어상의 문제인가?

그러나 나는 단지 용어상의 지적만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과학자들이 ‘이론’이라는 용어를 보편중력이론과 보조진술의 연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용법이 중요한 방법론적 쟁점들을 흐리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사용되는 것처럼, 이론은 법칙들의 집합이다. 법칙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의해서 참일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진술이다. (Ⅰ), (Ⅱ), (Ⅲ) 중 어떤 진술도 이런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예컨대, 사실 우리는 태양과 지구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천체들이 작용하는 힘이 무시해도 될 만큼 작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 진술이 자연법칙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특정한 계(system)에서 얻을 수 있는 ‘경계조건’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보조진술과 보편중력이론의 차이를 흐리게 하는 것은 법칙과 우연적 진술의 차이를 흐리게 하는 것이고, 과학자가 참인 것으로서 정립하고자 하는 진술(법칙)과 그가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는 진술((Ⅰ), (Ⅱ), (Ⅲ)과 같은 지나친 단순화)의 차이를 흐리게 하는 것이다.

7. 천왕성, 수성, ‘암흑 동반자별(Dark Companions)’

보조진술들은 거짓이라고 알려진 것이라는 반대를 피하기 위해 그것들을 더 주의 깊게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사실, 그것들은 전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케플러의 법칙에 관한 뉴턴의 계산은 이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부주의한 지적 그 이상의 것 없이 가정 (Ⅰ), (Ⅱ), (Ⅲ)을 도입한다. 이론(보편중력과 같은 것)과 보조진술의 집합의 차이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indications) 중의 하나는, 과학자들이 보조진술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정들을 소개할 때에는 부주의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론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매우 신중하다는 것이다.

보조진술은 이론보다 훨씬 수정되기 쉽다. 200년이 넘도록 보편중력의 법칙은 의문의 여지없이 참이라고 받아들여졌고, 수많은 과학적 논증들의 전제로 사용되었다. 만약 표준적인 종류의 보조진술이 그 시기에 성공적인 예측을 하지 못했더라면, 과학자들은 이론이 아니라 그 보조진술들을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알고 있다. 알려진 모든 행성이 제자리에 존재한다는 가정과 보편중력이론을 기초로 천왕성의 궤도를 예측하였으나 틀린 것으로 드러났을 때, 프랑스의 르베리에(Leverrier)와 영국의 아담스(Adams)는 동시에 분명 다른 행성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행성은 실제로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해왕성이다. 보조진술의 수정이 성공적이지 않았더라면, 다른 수정이 계속 시도되었을 것이다(진공 대신 행성들이 움직이는 다른 매질을 고려하거나, 중력이 아닌 다른 중요한 힘을 고려하는 것 따위).

새로운 행성이 관찰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적이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컨대, 어떤 별(stars)들은 변칙적인(irregular) 행동을 보이는데, 이는 동반자별이 있다는 가정에 의해 설명되어왔다. 이러한 동반자별이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게 되면, 이 현상은 이 별들이 암흑 동반자별(망원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동반자별)을 갖고 있다는 제안에 따라 다루어진다. 과학에서 가정되는 많은 것들을 직접 시험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과학이론에는 많은 ‘암흑 동반자별'이 있다.

끝으로, 수성의 사례도 있다. 수성의 궤도는 뉴턴의 이론에 의해 거의 성공적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뉴턴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일반상대성이론과 같은 대안적 이론에 비추어 보아야만, 뉴턴의 이론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안 이론이 없으면, 수성의 궤도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소한 변칙사례에 불과하다.

나의 주장은, 이 모든 것들이 매우 유익한 과학적 실천(practice)이라는 것이다. 어떤 보조 진술이든 거짓일 수 있다는 사실(사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들은 거짓이고, 심지어 더 주의 깊고 신중한 진술도 거짓일 수 있다)이 중요하다. 우리가 태양계의 모든 천체를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니고, 그 천체들이 통과하는 매질이 (모든 경우에 매우 근사한 정도로) 경진공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게다가 중력이 아닌 힘을 항상 무시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거의 모든 경우에 보편중력의 법칙이 압도적으로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한두 가지의 변칙사례는 그 이론을 거부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대안 이론이 진지하게 제안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론이 틀렸다기 보다는 보조진술이 틀렸다는 것이 더 그럴싸하다.

8. 포퍼 이론에 대한 영향

포퍼의 이론에 관한 이러한 사실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보편중력의 법칙은 강하게 반증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한 과학 이론의 패러다임이다. 과학자들은 200여 년 간 보편중력의 이론을 반증하려고 그 이론으로부터 예측을 도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양한 천문학적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어떤 사실이 이러한 종류의 설명에 반하는 것으로 드러난 경우, 그것은 수성의 경우처럼 변칙사례로 취급되었다. 이 사례에서 포퍼의 이론은 과학 이론의 본성이나 과학 공동체의 실천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옳은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

포퍼는 자신이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대응할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보편중력이론을 제안하지 말았어야 했는가? 뉴턴은 나쁜 과학자였는가? 과학자들은 보편중력이론에 대한 반증을 시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실험실에서의 시험은 중력의 상호작용이 약했고 당시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배제되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천문학적 자료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천문학적 사례에서조차, 중력이 아닌 어떤 힘도 주어진 상황에 무관한 것인지(혹은 모든 중력을 다 고려했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는 문제는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천문학적 자료는 보편중력이론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도저시 반증할 수 없다. 따라서 수성 궤도의 편차 때문에 보편중력의 이론을 거부했다면 옳지 않았을 것이다. 보편중력이론이 다른 궤도를 오차의 범위 내에서 예측했을 때, 이 한 가지 사례에서의 편차가 알려지지 않은 중력적 혹은 비중력적 힘 때문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이 사례를 설명할 수 없고 체계적인 중요성도 갖지 않는 것으로 제쳐둠으로써, 그들이 ‘해야 하는’ 바대로 행동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이론은 예측을 함축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론과 어떤 ‘보조진술’의 연언만이 예측을 함축한다. (2) 보조진술은 대개 경계조건(‘경계조건’의 특수한 사례인 초기조건을 포함해서)에 대한 가정이고, 게다가 위험성(risky)도 높다. (3) 우리가 보조진술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므로, 틀린 예측이 이론을 명확히 반증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즉 이론은 강하게 반증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과학자들이 때때로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 이론과 보조진술로부터 예측을 끌어낸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만약 뉴턴이 케플러의 법칙을 도출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보편중력이론을 제안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뉴턴이 보편중력의 이론으로부터 얻은 예측이 틀렸다(wildly wrong)해도, 보편중력 이론은 여전히 참이고, 보조진술들이 거짓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이 실험적 시험에 의해 ‘쓰러졌을' 지라도 그 이론은 여전히 옳을 수 있고, 보조진술이 실제 상황에 대한 유용한 근사가 아니었음을 발견했을 때, 그 이론은 나중 단계에서 재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과학에서 반증은 검증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과학자가 ‘반증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론을 제안하고, 그로부터 예측을 도출하며, 그리고나서 그 예측을 반증함으로써 이론을 반증하려고 한다는 포퍼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학자가 이론과 보조진술들로부터 예측을 도출하고 그 예측을 검증함으로써 그것들을 입증(confirm)하려고 노력한다는 표준적인 관점(포퍼가 ‘귀납주의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반박하지 않는다. (보편중력이론의 사례에서) 보조진술이 거짓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수 없었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보조진술이 원칙적으로 더 신중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으므로, 충분히 신중했다면(guarded) 거짓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귀납주의자’ 관점에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이 실제 성공에 의해 그 성공의 정도만큼 옳다고 보이는 것처럼, 과학 이론도 그것의 성공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납주의자 도식은, 과학적인 절차의 한 국면에 관한 그림으로서 유용하다는 것을 빼고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다음 절에서 나는, 확증을 위한 것이든 반증을 위한 것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과학적 활동이 이론과 보조진술의 연언으로부터 예측을 도출하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할 것이다.

9. 쿤의 과학관

최근에 상당수 철학자들은 과학 활동에 관한 다소 새로운 관점을 제안해오고 있다. 내가 10년 전에, 어떤 이론들은 실험과 관찰에 의해서만은 전복될 수 없고 오로지 대안이론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새로운 관점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또한 핸슨(Hanson)에 의해서도 예견되었으나, 토마스 쿤(Thomas Kuhn)과 루이 알튀쎄(Louis Althusser)의 저작에서 가장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나는 이 두 철학자가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나타내는 경향(그리고 그 점에서 나 역시 나타내는 경향)이 우리가 검토해 온 연역주의에 대해 필요한 수정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 절에서, 나는 쿤의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그것들을 좀 더 명료하게 공식화하기 위해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쿤의 설명의 핵심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다. 쿤이 이 개념을 비일관적이고 불명료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개념에 관한 그의 설명 중 적어도 하나는 꽤 명료하고 그가 의도한 바에 적절해 보인다. 이 설명에서, 패러다임은 단순히 성공적이고 두드러진 적용 사례(example)를 갖는 과학 이론이다. 그 적용(즉, 어떤 사실에 관한 성공적 설명이나 새롭고 성공적인 예측)이 두드러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그 성공이 과학자들(특히 진로를 선택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충분히 인상적이어서 그들이 같은 모형 위에서 더 나아간 설명, 예측 기타 등등을 추구함으로써 이 성공을 흉내내도록 유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단 보편중력의 법칙이 제안되었고 어떤 사람이 뉴턴의 케플러의 법칙 도출 사례와 한두 개의 행성의 궤도에 관한 유도 사례를 함께 갖고 있다면, 그는 패러다임을 가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은 과학 분야(scientific fields)를 만들어내는 패러다임이다. 첫 사례로 뉴턴주의 패러다임에 의해 생성된 분야(field)는 천체 역학이라는 온전한 분야였다(물론, 이 분야는 더 넓은 뉴턴 역학의 분야 중 일부에 불과하고, 천체 역학이 기반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뉴턴 역학을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수많은 패러다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쿤은 한 분야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 반증에 대해 높은 면역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이는 과장된 것이다. 뉴턴 물리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없었어도 세계가 현저하게 비뉴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더라면 아마 포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조차도, 우리가 뉴턴 물리학이 거짓이라거나, 아니면 단지 우리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뿐이라고 결론내렸을까?) 또 한편으로는 뉴턴의 물리학을 예증한 옛 성공조차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다음과 같은 것은 참이다. 그러한 급격하고 예측되지 않은 세계의 변화가 존재하지 않고, 그 패러다임적 성공에 ‘잘못된(phony)' 것이 없었다고 밝혀지지 않는 한(예컨대 자료가 날조되었거나 연역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 패러다임이 된 이론은 관찰과 실험의 결과만으로는 포기되지 않고, 더 나은 이론이 있을 때에만 포기된다.

일단 한 패러다임이 세워지고 한 과학 분야가 그 패러다임을 둘러싸고 성장하면, 우리는 쿤이 ‘정상과학’이라고 불렀던 시기에 도달한다. 이 기간 동안의 과학자들의 활동을 쿤은 ‘퍼즐 풀이’로 기술한다(이 개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 분야의 모든 퍼즐들이 성공적으로 풀릴 수 없다 해도 (결국 어떤 문제가 풀기 어렵다는 것은 단지 인간의 경험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몇몇 해결책들이 임시변통(ad hoc)적으로 보일지라도 정상과학의 기간은 지속된다. 이 기간은 낡은 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에 의해 마침내 끝나게 된다.

쿤의 논쟁적인 주장들은 대부분 새 패러다임이 옛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매우 주관적인 경향을 보인다(내가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자료는 다른 패러다임에 대한 한 패러다임의 우월성을 입증할 수 없는데, 이는 자료 자체가 각 패러다임의 관점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이다.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게슈탈트 전환’을 요구한다. 과학의 역사와 방법론은 주요 패러다임에 변화가 있을 때 다시 쓰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호소해야 할 ‘중립적인’ 역사적, 방법론적 규범은 없다. 또한 쿤은 의미와 진리에 관해 상대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틀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여기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쿤이 ‘정상과학’이라고 부르는 기간이다. ‘퍼즐 풀이’라는 용어는 불행히도 소홀히 다루어지고[사소해지고] 있다. 현상에 대한 설명과 자연을 이용할 방법을 찾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어서 무시할 수 없다(여기서 쿤은 포퍼가 지식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수수께끼’라고 부르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이 용어도 주목할 만한(striking) 것이다. 분명 쿤은 정상 과학을 패러다임을 반증하기 위한 활동이나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이라고 본다. 나는 정상과학이나 그것의 한 국면에 관한 도식을 제시함으로써 쿤의 견해 위에서 진보를 시도하고자한다. 이 도식은 왜 주요한 과학철학자들이나 과학사학자들이 쿤이 썻던 방식으로 퍼즐 풀이에 관한 비유를 사용해 왔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10. 과학적 문제에 관한 도식들

다음의 두 도식들을 생각해 보라.

도식 Ⅰ
이론
보조 진술
--------------------
예측 - 참인가 거짓인가?


도식 II
이론
???????
--------------------
설명되어야 할 사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적 문제에 관한 도식이다. 첫 번째 문제 유형에서 우리는 이론과 몇몇 보조진술들을 갖고 있으며 이로부터 예측을 도출하였는데, 우리의 문제는 그 예측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는 표준적인 과학철학이 강조하는 상황이다. 두 번째 문제 유형은 꽤 다르다. 이 유형의 문제에서 우리는 이론과 설명되어야 할 사실을 갖고 있지만, 보조진술은 빠져있다. 문제는 이 보조진술을 찾는 것이다. 참이거나 근사적 참이고 (즉 참에 관해 유용한 지나친 단순화oversimplfiications), 문제의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보조진술을 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내친김에, 우리는 표준적인 과학철학에서는 무시되는 세 번째 도식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식 III
이론
보조 진술
--------------------
??????????

이것은 우리가 이론과 보조진술을 갖고 있으면서, 그로부터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 알고자하는 문제유형을 나타낸다. 이러한 문제유형은 그 문제가 ‘순전히 수학적’이기 때문에 무시되었다. 그러나 진술들의 집합이 시험 가능한 귀결을 갖는지 아는 것은 이 유형의 문제에 대한 해에 달려있고, 이 문제는 대개 매우 어렵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까지도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이론’의 물리적 결과가 무엇인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데, 이는 바로 그 결과를 도출하는 수학적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자주 진술들의 집합이 주어졌을 때 그 진술들로부터 어떤 귀결이 도출되고 도출되지 않는지에 대해 마치 그것이 명료한 것인 양 쓴다.

그렇지만 두 번째 도식으로 돌아가 보자. 천왕성의 궤도에 관한 사실들과 (1846년 이전에) 태양계를 구성하는 행성들에 대해 알려져 있던 사실, 그리고 그 천체들이 진공 속을 운동하며 오로지 상호간의 중력의 작용만 받는다는 표준적 보조진술 등이 주어졌을 때,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수성, 금성, 지구, 수성, 목성, 그리고 천왕성이 태양계에 존재하고, 이외에 다른 행성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천왕성의 궤도를 성공적으로 계산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태양계가 적어도 앞서 언급된 행성들로 (그것들로만은 아니지만) 이루어져있다는 진술을 포함하여, 우리가 언급한 다양한 보조진술들의 결합을 S1 이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게 된다.

이론 : 보편중력
보조진술 : S1
추가적 보조진술 : ??????
-----------------------------
피설명항 : 천왕성의 궤도

이 문제가 추가적인 설명적 법칙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님(가끔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겠지만)에 주목하라. 이것은 만유인력의 법칙 및 보편중력 이론을 구성하는 다른 법칙들(즉, 뉴턴역학의 법칙들)과 결합하여 천왕성의 궤도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태양계를 지배하는 초기조건과 경계조건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찾기 위한 것이다. 이 행방불명인 가정이 참이거나 적어도 근사적 참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수학적으로 말해서 해가 무수히 많이 존재하게 된다. S1 에 중력이 아닌 힘은 행성이나 태양에 작용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포함시킨다 할지라도, 해는 여전히 무수히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처음에 다음과 같은 가장 단순한 가정을 시도한다.

(S2) 태양계에는 S1에서 언급한 행성들 외에 하나의 행성만이 더 존재한다.

이제 다음의 문제를 고려해보자.

이론 : 보편중력
보조진술 : S1, S2
--------------------------
결과 ??? - 미지의 행성은 특정한 궤도 O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르베리에와 아담스가 모두 풀었던 수학적인 문제이다(도식3 의 예). 이어서 다음의 경험적인 문제를 고려해 보라.

이론 : 보편중력
보조진술 : S1, S2
-----------------------
예측 : 궤도 O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이 존재한다 - 참인가 거짓인가?

이 문제는 첫 번째 도식에 해당하는 예인데, 보통은 이런 예를 잘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조 진술들 가운데 하나인 S2가 참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S2는 우리가 시험하고자 하는 하위 가설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험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귀납적이지 않으며, 이는 그 예측의 검증은 S2에 대한 검증, 아니 그보다는 S2의 근사적 참에 대한 검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리고 S2의 근사적 참이 이 맥락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전부이다). 해왕성만이 1846년에 알려지지 않았던 행성은 아니었다. 명왕성 역시 나중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1846년의 위 문제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예측이 참으로 밝혀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음 연역을 하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 진술 S3가 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 : 보편중력
보조진술 : S1, S2, S3
--------------------
피설명항 : 천왕성의 궤도

즉, S2에 언급된 행성이 궤도 O를 가질 것이라는 진술 S3는 우리가 출발했던 문제의 해답이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로부터 시작했다. 문제를 더 쉽게 풀 수 있도록 단순화한 가정으로서 S2 를 제시하고 나서, 우리는 운 좋게도 최초의 문제의 해가 되는 S3를 보편중력과 S1, S2로부터 연역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한 행운은 베를린 관측소가 조사했을 때 S3가 참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다. 과학철학자들이 가끔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빠진 보조진술이 법칙일 때이다. 그러나 방금 검토한 것과 같이 밝혀지지 않은 보조진술이 특정한 계에 관한 추가적인 우연적 사실에 불과한 사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나는 두 번째 도식이 쿤이 ‘퍼즐’이라고 부르는 것의 논리적 형식을 나타낸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가 두 번째 도식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퍼즐’이라는 용어가 왜 그렇게 적절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푸는 사람은 ‘구멍’을 메꿀 만한 것을 찾고 있으며(대개는 덜 상세화 된 종류의 것), 그것이 일종의 퍼즐이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과학에서 매우 일반적이다. 누군가 표준상태에서 물이 액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가 물리학 법칙들을 갖고 있으며, 그 문제가 매우 어렵다고 가정해보라. 사실, 양자 역학의 법칙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고전 물리학으로부터 물이 액체가 아니라고 연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전 물리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 이 문제가 ‘너무 어렵다’ 고 포기할 것이다. 즉, 그는 적당한 보조진술을 찾아낼 수 없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두 번째 도식이 정상과학의 ‘퍼즐’에 대한 논리적 형식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설명한다.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보편중력의 법칙 더하기 보조진술로부터 예측을 도출해야 하는 문제는 없다. 보조진술을 찾는 것이 문제의 전부이다. 보편중력이건 다른 무엇이건, 이론은 그 맥락 하에서는 반증불가능하다. 반증과 마찬가지로 이론의 입증도 논의되지 않는다. 그 이론은 가설적 지위에 있는 함수가 아니다. 실패가 이론을 반증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알려져 있고 믿을만한 사실들과 함께 이론으로부터 도출된 잘못된 예측이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조진술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론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반증에 대해 높은 면역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 재임기간은 기초문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이론의 등장(혹은 완전히 새로운 설명 기법)에 의해 종식된다. 그리고 한 이론이 일단 패러다임이 되면 성공에 의해 ‘입증(confirmation)’되지 않는데, 이는 그 이론이 이제 입증을 요하는 ‘가설’이 아니라 모든 설명과 예측 기법의 기초이자 아마 기술(technology)에 있어서도 그 토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해보자. 나는 표준적 과학철학을, 포퍼적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이론으로부터 예측을 도출하고 그 이론을 입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해서 예측을 시험하는 상황에 집착해왔다고 주장했다. 즉, 첫 번째 도식과 같은 상황이다. 대조를 통해, 우리는 ‘정상과학’의 ‘퍼즐’을 두 번째 도식이 표현하는 패턴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이 패턴은 우리가 이론과 설명되어야 할 사실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실(흔히 특정한 체계에 관한 우연적 사실)을 더 찾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이론에 기초하여 특정한 사실에 관한 설명을 채워 넣을 수 있다. 나는 또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면 패러다임의 지위를 획득한 이론의 상대적 반증불가능성[을 잘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리 이론의 ‘예측’이 흔히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배경지식에 비추어 놀라운 것이 아님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도식이 패러다임의 등장에서부터 더 나은 패러다임에 의해 마침내 대체되는 것까지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방향이 매우 빗나간 큰 오류일 것이다. 정상과학이 갈등하지만 상호의존적인 두 경향 사이의 변증법을 나타내고, 이러한 경향의 충돌이 정상과학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천왕성의 궤도를 설명하라는 것과 같은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를 풀고자 하는 욕구는 새로운 가설(비록 매우 낮은 수준의 것이라도), 즉 S2 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으로부터 S3 를 끌어내는 것이 포함된 S2 및 S3 에 관한 시험은 첫 번째 도식 유형의 상황이다. S3 는 이번에는 최초의 문제에 대한 해가 된 다. 이는 두 경향, 그리고 그들이 상호 의존하는 방식, 그들의 상호작용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첫 번째 도식에 나타난 경향은 비판적인 경향이다. 포퍼가 이 경향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옳았고, 이는 분명 그의 공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과학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왔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는지 알고 싶어하고, 그것으로부터 예측을 도출하고 그 예측을 시험함으로써 그들의 생각이 틀렸는지를 밝혀내고자 노력한다. 즉, 이런 것이 가능할 때 그들은 이를 행한다. 두 번째 도식이 나타내는 경향은 설명적 경향이다. 충돌의 요인이 발생하는 이유는, 첫 번째 도식의 상황에서는 이론이 미심쩍은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두 번째 도식의 상황에서 주어진 이론을 알려진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두 번째 도식에서 주요한 전제 역할을 하는 이론 그 자체는 포퍼적 시험의 생존자일지도 모른다(언제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보편중력은 반증 시도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설명에 성공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도식 문제의 해 그 자체는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는 주로 첫 번째 도식 유형의 시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그 해가 단칭진술이 아니라 일반 법칙이라면, 그 법칙 자체가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두 번째 도식 유형의 문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요컨대, 반증 시도는 이론을 ‘용인’ 한다.(이는 단지 동어반복일 뿐인 포퍼적 의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론이 참이거나 부분적으로 참임을 보여준다는, 포퍼가 거부했던 의미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것으로 여겨졌던 법칙에 기초한 설명은 가설의 도입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설명적인 태도와 비판적인 태도 사이의 긴장은 과학을 진보로 이끈다.

11. 쿤 대 포퍼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과학 이론의 반증가능성이라는 논점에 관해 쿤과 포퍼는 실질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다. 포퍼가 과학 이론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반증가능성을 강조한 데 반해, 쿤은 과학이론이 반증을 면할 수 있는 방식을 강조했다. 쿤에 대한 포퍼의 대답은 이제부터 검토되어야 할 보조 가설이라는 개념과 규약주의적 전략이라는 두 가지 개념에 의존한다.

포퍼는 이론으로부터 예측을 도출하는 데 보조 가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비록 ‘가설’이라는 용어가 가정, 즉 경계 조건 보다는 추정적인 법칙 같은 것을 제안한다는 의미에서 그릇된 인상을 줄 지라도). 그러나 그는 이것들을 시험되는 전체 ‘체계’의 일부로 간주한다. ‘규약론적 전략’이란 보조 가설에 임시변통적인 변화를 가하여 상반되는 실험 결과로부터 이론을 구제하는 것이다. 규약론적 전략을 피하기 위해 포퍼는 그것을 경험적 방법의 근본적인 방법론적 규칙으로 채택한다.

이것이 쿤의 반론에 대한 대답이 되는가? 그것이 이 글의 첫 부분에 있었던 우리의 반대와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첫째로 ‘보조가설’ 인 보조진술은, 보편중력이론의 사례에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의존적이었다. 우리는 보편중력이론이 어떤 고정된 ‘체계’의 일부이고, 그 체계의 다른 부분들은 보편중력이론을 ‘매우 시험가능성이 높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보조가설들의 고정된 집합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어떤 이의 믿음을 바꾸는 것은 합리적인 임시변통일 수도 있다. ‘임시변통(ad hoc)’ 은 ‘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을 의미한다. 물론, ’임시변통(ad hoc)’은 ‘비합리적’이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으나, 이는 다른 것이다. 어떤 별들이 암흑동반자별을 갖는다는 가정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임시변통적이다. 이 가설은 동반자별을 관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합리적이다.

보조진술이 맥락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도, 보편중력이론의 사례와 다른 많은 사례들에서 이미 지적되어왔다. 따라서, 보조진술을 바꾸거나 특정한 맥락에서 ‘우리는 무엇이 옳은 보조진술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글자 그대로의 임시변통일 수 있지만, ‘비합리적’이라는 확장된 의미의 ‘임시변통’은 아니다.

12. 패러다임 변화

최초에 패러다임은 어떻게 해서 수용되는가? 포퍼의 견해는 엄격한 테스트를 통해서 이론이 용인된다는 것이다. 예측(진리값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은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하고 그 예측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되어야 한다. 테스트의 엄격한 정도는 그 이론에 의해 제외된 기초 문장에 의존하고, 또한 배경지식에 대한 예측의 대담성(improbability)에도 의존한다. 이상적인 사례는 많은 기본 문장들을 배제하는 이론이 배경지식에 대해서 매우 있을법하지 않은(improbable) 예측을 함축하는 경우이다.

포퍼는 한 이론에 의해 배제되는 기초문장의 수라는 개념이 집합의 원소 수(cardinality)라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차라리 있을법하지 않음(improbability)이나 내용(content)개념에 의해 그것을 측정할 것을 제안한다. 포퍼의 관점에서 있을법하지 않음(improbability)(논리적 [im]probability 의미)이 반증가능성을 평가한다는 것은 내게는 참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보편중력의 이론은 기초 문장을 배제하지 않으나, 어떤 측정법에서도 논리적으로 0인 확률을 갖는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어떤 확률 측정 하에서도 언제나 ‘살아남은 이론 가운데 가장 있을법하지 않은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모든 보편 법칙이 엄밀하게는 0의 확률을 갖는다는 사소한 개념을 제외하고는 분명히 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 관심사는 포퍼 도식의 기술적인(technical) 세부사항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요 개념이다.

이 개념을 평가하기 위하여, 보편중력 이론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살펴보자. 뉴턴은 먼저 보편중력 이론과 우리가 처음에 언급했던 보조진술로부터 케플러의 법칙을 도출했다. 그러나 이것은 포퍼의 관점에서는 ‘시험’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케플러의 법칙은 이미 참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보편중력 이론이 달의 중력적인 당김[인력]에 기초하여 조수현상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 역시 포퍼적 관점의 ‘시험’이 아닌데, 조수도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는 이미 알려진 행성 궤도의 섭동이 보편중력 이론에 의해서 설명가능함을 보이는 데 수년을 보냈다. 이때까지 모든 문명화된 세계는 보편중력 이론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환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포퍼의 의미에서 ‘용인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보편중력 이론에 대한 포퍼적인 ‘시험’(배경지식에 비추어 모험적인 새로운 예측을 도출하는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 이론이 제안되고 나서 약 100년 후인 1787년에 캐븐디쉬 실험이 수행된 이후에야 시험을 얻을 수 있다! 보편중력 이론과 보조진술 S1, S2로부터 얻은 해왕성의 궤도에 관한 예측, 즉 S3 역시 보편중력에 대한 입증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이는 1846년 이었다!). 가정 S2 가 보편중력 이론보다 더 잠정적인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이 보편중력 이론에 관한 엄격한 테스트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기 쉽다. 이론은 그것이 실제로 설명에 성공하지 않으면 수용되지 않는다. 비록 그 이론이 ‘임시변통(ad hoc)' 적인 의미(비합리적이지 않은)에서 보조진술을 수정함으로써 정당하게 보존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의 성공은 임시변통(ad hoc)이어서는 안된다. 임시변통적인 '성공’을 막기 위해, 포퍼는 이론에 의해 예측된 것이 이전에 참으로 알려진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요구하지만, 그 조건은 너무 강하다.

포퍼는 이론이 수립되는 기간 동안에는 위험을 무릅쓴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옳다. 그렇지만 보편중력의 사례에서, 그 위험은 결정적인 반증의 위험이 아니었다. 위험은 뉴턴이 임시변통(ad hoc)적이 아닌 진정한 설명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보편중력 이론에 적당한 보조진술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예컨대, 달이 끌어당기는 인력에 의하여 조수 현상을 설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으로는 보편중력의 이론이 반증되지 않았겠지만, 성공할 경우에는 보편중력 이론을 강하게 지지했을 것이다.

요컨대, 한 이론은 그것이 실질적인, 그리고 임시변통(ad hoc)적이지 않은 설명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에만 수용된다. 이는 포퍼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포퍼가 거부한 ‘귀납주의자’ 설명과 더 잘 일치하는데, 이는 반증보다는 지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13. 실천에 관하여

여기서 포퍼의 실수는 외떨어진[홀로 외롭게 떨어진] 사소한 실패가 아니다. 포퍼는 실천이 일차적임을 보지 못했다. 관념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고(비록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비판’할 관념의 선택도 목적 그 자체가 아니다. 관념의 본질적인 중요성은 그것이 실천에 대한 지침이 된다는 것이고, 전체적인 삶의 양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생각은 과학에서, 기술에서, 그리고 때로는 공적, 사적인 생활에서 실천(practice)을 안내한다. 우리는 과학에서 올바른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였다. 포퍼와는 대조적으로, 이것은 몽매주의(obscurantism)가 아니라 신뢰성(responsibility)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하여 많은 그릇된 아이디어들 중에서 올바른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는다. 포퍼는 지각 경험의 축적이 이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기계적이거나 알고리즘적인 의미에서 이론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만, (1)현상과 그 현상에 관한 사전 지식에 관한 경험의 부족은 올바른 아이디어가 생겨날 가능성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2)풍부한 경험은 옳은(혹은 부분적으로 옳은) 아이디어가 생겨날 가능성을 현저히 증가시킨다는 방법론적 의미에서 규칙적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을 도출한다고 볼 수 있다. ‘발견의 논리는 없다’는 관점에서는 시험의 논리도 없다. 카르납, 포퍼, 촘스키 등이 제안한 모든 형식적인 시험 알고리즘은 무례하게 말하자면 우스꽝스럽다. 만약 믿기지 않으면, 이들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보고, 이것이 이론을 얼마나 잘 시험하는지를 살펴보라! 발견을 위한 금언과 시험을 위한 금언들이 있다.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방법은 매우 엄격하고 예정되어 있는데 반해, 옳은 아이디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생각은 비엔나 학파의 가장 그릇된 유산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한 관념이 세계의 관련된 국면들에 관한 면밀하고 구체적인 연구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관념이 옳다는 것이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퍼는 옳다. 우리는 관념을 적용하고 그것이 성공하는지를 봄으로써 관념이 옳은지를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결국, 올바른 아이디어는 성공에 도달하고, 그릇된 아이디어는 실패에 이른다(ideas lead to failures where and insofar as they are in correct). 실천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성공의 중요성을 보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어진다[점에 이른다].

실천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 것은 과학을 한 편에 놓고, 정치적, 철학적, 윤리적인 관념들을 다른 한편에 두어 그 사이를 명확하게 ‘구획’하는 것에 관한 포퍼의 관념으로도 이어진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구획’은 유해하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이론과 실행에 대한 포퍼의 구분에 부합하고, 이와 관련하여 과학에서의 비판적인 경향과 설명적인 경향을 구분하는 것에도 들어맞는다. 마지막으로, 실천의 중요성을 보지 못한 포퍼는 다소 반동적인(reactionary) 정치적 결론에 도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에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은 알려질 수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법칙에 관한] 지식에 의해 행동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점이 옳은가를 논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에서 선험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모든 견해는 반동적이다. 이것은 지식에 관한 반-선험철학의 미명하에 포퍼가 했던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참인 관념이란 성공한 관념이다. 이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이 진술도 우리가 세계에 관한 경험으로부터 얻게 된, 세계에 관한 진술이다. 우리는 이 관념에 부합하는 실천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우리가 좋은 관념을 믿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그러한 종류의 실천을 알려주는 관념의 존재를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귀납은 순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귀납은 연역적으로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귀납은 연역이 아니다. 순환적 정당화는 철저히 자기 보호적일 필요는 없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어야만 할 필요도 없다. 과거의 ‘연역’의 성공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를 증가시키고, 과거의 실패는 그것을 감소시킨다. 정당화가 순환적이라는 사실은 정당화를 이미 구실로 받은 사람이 그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고 있지 않은 한(unless the person to whom it is given as a reason already has some propensity to accept the conclusion), 그 정당화가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경향(만약 좋아한다면, ‘선험적인’ 경향)을 갖고 있고, ‘연역’의 과거의 성공은 그런 경향을 증가시킨다.

실제로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증명된 것들(왜냐하면 그것이 ‘귀납’이 의미하는 바이므로)에 의지하는 방법은 정당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진술이다. 만일 정당화가 그 방법에 의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영원하고 형식적인 원리들로부터의 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방법은 ‘정당화’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심지어 순수 수학이나 형식논리조차도 그렇지 않다. 실천이 일차적이다[가장 중요하다].

주석

  1. 나는 실증주의적 의미 이론에 대해 “What Theories Are Not” 과 “How Not to Talk about Meaning” 에서 논의했다. 전자는 A. Tarski, E. Nagel, P. Suppes (eds.), Logic, Methodology, and Philosophy of Scienc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2), pp. 240-251. 후자는 R. S. Cohen and M. W. Wartofsky (eds.), 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II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5), pp. 205-222에 실려있다.
  2. Karl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p. 59.
  3. '근사적 참(approximate truth)'에 대해서는, 위의 주석에 언급된 두 번째 페이퍼를 참조하라.
  4. Karl Popper,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Hutchinson, 1959), p.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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