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aning and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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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의미의 이론은 다음의 두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1. 용어의 의미(내포)를 아는 일은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이다.
  2. 용어의 의미(내포)는 그것의 외연을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지만 다른 외연을 가지는 사고실험으로 구성할 수 있다. 즉 용어의 의미(외연)은 머릿속에 있지 않으며, 용어의 내포는 그것의 외연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용어의 외연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1. 언어공동체의 전문가의 결정에 의존한다. (일반인은 한 용어의 외연을 결정짓는 특성이나 방법을 모르더라도 그 용어의 외연을 지시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2. 자연종 용어의 경우, 예컨대 용어 W의 외연은, "this is W"와 같은 직시적 표현을 통해 지시한 대상과 본질적 속성에서 동일한 대상들로 이루어진다. (즉, 우리는 그 용어로 지시하는 대상의 속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다르게 알고 있더라도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수용할 때, 우리는 앞의 두 가정 중 적어도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요컨대, 한 용어의 외연은 개인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다. 그 외연은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세계에 의해 결정된다. 의미 이론은 사회와 실제 세계의 역할을 탐구해야 한다.

요약

“의미”라는 관념(notion)에는 외연과 내포가 섞여있다는 생각은 언어철학의 오래된 전통이다. 용어의 의미가 개념이라는 생각은 의미가 심적 존재(entities)라는 함축을 가진다. 물론 프레게는 이러한 “심리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는 의미가 공적 속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개념을 심적 존재라기보다는 추상적 존재로 규정(identify)했다. 그러나 추상적 존재를 “획득(grasping)”하는 일은 여전히 개인의 심리적 행위이다. 이 철학자들 중 누구도 말을 이해하는 일(그 내포를 아는 일)이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동일한 외연을 가지지만 내포는 다른 용어에 대한 지적은 많았었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즉 두 용어가 외연은 다르면서 내포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미의 검증주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카르납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용어에 대한 개념이 그 외연에 속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개념(내포)이 같으면 외연이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의미의 이론은 도전받지 않아온 두 가지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1) 용어의 의미(내포)를 아는 일은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이다. (2) 용어의 의미(내포)는 그것의 외연을 결정한다.

이 두 가정은 의미 관념을 포함해서 어떤 관념에 의해서도 함께 만족될 수 없다. 전통적인 의미 개념은 잘못된 이론에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다.

의미는 머릿속에 있는가?

(사례 1) 지구 vs. 쌍둥이 지구: “물” vs. “물”. H2O vs. XYZ. 평상 상태에서는 구분 안 된다는 가정 하에서, 처음 상대 지구에 방문한 사람은 상대 지구의 “물”을 보거나 듣거나 말할 때 지구에서의 “물”을 떠올릴 때와 같은 심리적 상태에 있을 것이며, 두 지구에서 “물”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의 구성원소를 알게 된다면 두 지구의 사람들은 서로의 “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할 것이다.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XYZ를 의미한다.”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H2O를 의미한다.”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라 불리는 것은 명백히 물이 아니다.

(사례 2) 1750년경 가정. 각 지구의 오스카1과 오스카2는 자기네 ‘물’의 구성원소를 모른다. 그 둘은 “물”에 대해 같은 감정, 느낌,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1750년 지구에서 “물”이란 용어의 외연은 1950년에서와 같이 H2O였다. 1750년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란 용어의 외연은 1950년에서와 같이 XYZ였다. 오스카1과 오스카2는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은 ‘물’이란 용어를 다르게 이해했다.(물론 그들이 다른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50년은 더 기다려야 했겠지만) 즉 ‘물’이란 용어의 외연(의미)은 화자의 심리적 상태 자체의 함수가 아니다.

지구에서 1750년과 1950년의 “물”의 외연이 어떻게 같은가? 내가 한잔의 물을 가리키며, “이 액체는 물이라 불린다”라고 말할 때, 물에 대한 이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는 다음의 경험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즉, 내가 지금 가리키는 액체는 나와 언어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이 “물”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어떤 것과 특정한 동일성(sameless) 관계(x is the same liquid as y; or x is the sameL as y)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말이다. 이 sameL 관계는 이론적 관계이다. 즉 그 관계의 성립 여부는 과학적 탐구에 의해 탐구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따르면, 1750년의 사람이 XYZ를 “물”이라 부르고, 50년이나 100년이 지나 그것을 “물”로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 사이 ‘물’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1750년의 사람이 XYZ와 지금의 물에 sameL 관계를 잘못 부여했을 뿐이다. 1750년이나, 1850년이나, 1950년이나, 우리는 미시간 강의 물을 가리키며 “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sameL 관계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사례 3) 지구와 쌍둥이 지구에서, 알루미늄과 몰리브덴을 서로 바꿔 부른다고 가정. 전문가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만, 일반인은 구분 못함. 그렇다면 지구의 금속학자는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을 몰리브덴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쌍둥이 지구에 방문한 일반 지구인은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 냄비가 알루미늄 냄비가 아니라고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인 오스카1과 쌍둥이 지구인 오스카2는 각 지구에서 “알루미늄”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스카1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알루미늄이지만, 오스카2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몰리브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화자의 심리적 상태는 그 말의 외연(의미)을 결정하지 않는다.

(사례 4) 일상에서, 나는 느릅나무(elm)와 너도밤나무(beech)를 구분할 능력이 없음에도, 나의 “느릅나무”의 외연은 다른 사람들의 “느릅나무”의 외연(즉 느릅나무 집합)과 같고, 나의 “너도밤나무”의 외연은 다른 사람들의 “너도밤나무”의 외연(즉 너도밤나무 집합)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나의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외연이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연의 차이는 우리 개념의 어떤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느릅나무 개념은 너도밤나무 개념과 정확히 같다면(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 어떤 이는 그 외연의 차이가 분명히 나의 심리적 상태에서의 차이에 의해 설명된다고 시도하려 할 것이다(아마도 단어의 스펠링이 서로 다르므로 같은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지구/쌍둥이 지구의 느릅나무/너도밤나무 스위치 가상 사례를 구성하여 재반박될 수 있다. 지구의 나와 쌍둥이 지구의 내 도플갱어가 똑같이 “느릅나무”를 말할 때 그의 심리적 상태는 나와 완전히 똑같겠지만, 전자의 외연(의미)은 느릅나무인 반면 후자의 외연(의미)은 너도밤나무이다.

즉 “의미”는 단지 머릿속에 있지 않다.

사회언어 가설

‘금’이란 단어를 획득한 사람(평소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것이 금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식별하는 방법을 획득할 필요는 없다. 그는 특별한 사람들(전문가)에 의지하면 된다. 즉 언어적 노동 분업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인들은 물을 식별하는 데 “물은 H2O이다”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실제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전문가들에 의지하면 된다. 즉 이러한 “전문가” 화자가 가진 식별 방법은 또한 집합적 언어체(collective linguistic body)에 의해 소유된다. 이런 방식으로 물에 대한 최고로 공들여진(recherche) 사실은 언어의 사회적 의미의 일부로 편입되게 된다. 물론 그 단어를 획득하고 있는 대부분의 화자들은 그것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언어적 노동 분업을 전제했을 때, 한 사람의 개인적인 심리적 상태는 한 단어의 외연을 확정짓지 않는다. 그 외연을 확정짓는 것은 그 화자가 속한 집합적 언어체의 사회언어적 상태뿐이다.

지시성(indexicality)와 고정성(rigidity)

1750년 지구/쌍둥이지구의 사례는 위의 언어적 노동 분업과 관련이 없다. 1750년에는 지구에도 쌍둥이지구에도 물에 관한 “전문가”가 없다. 이 사례는 지시 이론과 필연적 참의 이론에 매우 중요한 어떤 것과 관련이 있다.

모든 가능 세계 W, 실제 세계 W1. “이것은 물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의미에 대한 두 가지 이론 (1‘) (For every world W) (for every x in W) (x is water ≡ x bears sameL to the entity referred to as "this" in W) (2') (For every world W) (for every x in W) (x is water ≡ x bears sameL to the entity referred to as "this" in the actual world W1)

크립키의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은 (2')의 의미. 위의 (사례 2)에서 “이것은 물이다”라는 “직시적 정의”를 얘기하면서 “물”이란 용어의 고정성을 논증했을 때, 퍼트남은 (2‘)를 의도했음. 통세계적 sameL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W1의 액체가 W2의 액체와 중요한 물리적 속성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일단 우리가 물의 본성(nature)을 발견하면, 그 본성을 지니지 않은 “물”에 대해 우리는 그것은 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의 본성을 아는 한, 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물이 있는 가능 세계는 불가능하다. 그런 가능세계는 인정될 수 없다. (아마도 자연종에 한해서)

크립키의 인식론적 필연성과 형이상학적 필연성 구분.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문장은 (형이상학적) 필연성. 그렇다면 한 문장은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이면서 인식론적으로 우연적일 수 있다. 예: “이것은 물이다.”

“나”, “이것”, “여기”와 같은 지시적(indexical) 또는 토큰-재귀적(token-reflexive)인 단어만 같은 개념에 다른 외연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지시성(indexicality)은 “나”, “이것”과 같이 명백히 지시적인(indexical) 단어뿐 아니라 “물”과 같은 (자연종) 단어로도 확장된다. “물”과 같은 단어도 안 보이는 지시적(indexical) 성분이 있다. “물”은 이 곳(혹은 세계) 주변의 물과 특정한 유사성 관계를 가진 어떤 것이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 혹은 다른 가능 세계의 물은 물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물”과 sameL 관계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1) 단어는 화자의 단어와 연합된 개념과 같은 어떤 것인 “내포”를 가지고 있으며, (2) 내포가 외연을 결정한다는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던 의미 이론은 ‘나’와 같은 명백히 지시적(indexical) 단어에서 참이 아닌 것과 같은 이유로 ‘물’과 같은 자연종 단어에서도 참이 아니다.

지구/쌍둥이지구에서 ‘물’이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외연을 가지는 것인지는 열린 질문이다. 우리는 의미가 외연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반면에 의미가 개념과 같은 심적 존재라는 것을 포기하여 지구/쌍둥이지구에서의 ‘물’이 같은 의미조차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 용어의 외연은 개인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의해 확정되지 않는다. 그 외연은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세계에 의해 결정된다. 의미 이론은 사회와 실제 세계의 역할을 탐구해야 한다.

평가

퍼트넘의 동일성 판단은 “this is water”로 지칭되는 대상들 사이의 비교이며, 대상들 사이의 동일성은 대상의 본질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1750년이나 1850년이나 1950년이나 “물”로 지칭되는 대상은 각 시기마다 그에 대한 이해가 다르더라도 그 말로 지칭되는 대상은 (실제 대상의 본질만 같다면) 서로 같다는 것이 보장된다는 함축을 갖는다. 그러나 첫째, 1750년의 물과 1950년의 물을 직접 옆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가? 퍼트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상이 동일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 정도의 전제는 대부분이 하고 있는 거라 아주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둘째, 물의 본질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현재의 과학은 물의 본질을 H2O라는 물질 구성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과학 발전이 그것의 본질을 다르게 규정할 가능성은 없는가? 아마도 퍼트넘은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답변할 수 있다. 미래에 물을 규정하는 본질이 달라지더라도 어쨌든 예전에 ‘물’로 가리켰던 대상과 오늘날 ‘물’로 가리키는 대상과 미래에 ‘물’로 가리킬 대상이 미래의 과학이 규정할 물의 본질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들 사이의 동일성은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퍼트넘이 의도한 자기 이론의 장점이다. 반실재론자들처럼 언어 또는 이론이 변한다고 세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이론으로 지칭했던 대상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미래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론이 바뀌어도 세계를 보존할 수 있다. 셋째, “this”로 명확히 지시를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예컨대 현대의 원자나 전자와 같은 존재자들은 “this”와 같은 손가락질로 가리킬 수 없다. 과거의 “this is 원자”로 가리켰던 대상과 현재 “this is 원자”로 가리킨 대상을 우리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가리킬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물을 “this is water” 식으로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this is water”라는 말로 극히 일부의 물만을 가리킬 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의 물은? 퍼트넘에 따르면 나머지 물은 그 당시 “this”로 가리켰던 대상과 sameL 관계를 가진 (아직은 확인 안 된) 물일 것이다. 그런데 sameL 관계는 “오늘날 최신 과학에 의해 알려진” 본질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많이 쓰는 “물”이라고 부르는 대상의 외연을 모른다고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물”이라 부르는 것의 외연을 규정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생각한” 물에는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H2O뿐 아니라 XYZ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물에는 H2O만 포함될 것이다. 퍼트넘에 따르면 과거 사람들은 mistake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이 mistake를 저질렀다고 얘기해야 하는가? 역사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의 외연이 바뀌었다고 하면 안 되는가? 그것이 더 직관에 부합하지 않은가? 퍼트넘에게 용어의 외연은 최신 또는 미래의 과학이 얘기하는 용어의 외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당하게 용어의 외연을 말할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퍼트넘이 세계를 보존하기 위해 택한 전략은 첫째, 과거의 기술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고, 둘째, 현대 과학의 기술과 대상 사이의 관계만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에서 현대 과학의 기술의 부정확성을 의심하는 한, 모든 기술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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