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의 가치: 설명과 예측
- Rudolf Carnap (1966), "The Value of Laws: Explanation and Prediction", in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cience (New York: Basic Books, Inc.), Chap. 1; 윤용택 옮김, 과학 철학 입문 (서광사, 1993), 제1장, 17-38쪽.
- 원문 : media:The Values of Laws.pdf
사실 vs. 법칙
"(보편적) 법칙" = "보편적 조건 진술"
우리는 "여름이 가면 (언제나) 가을이 온다"와 같은 규칙을 관찰하게 된다. 과학의 법칙은 이러한 세계의 규칙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표현하는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규칙이 언제 어디서나 예외 없이 관찰된다면 그 규칙은 "보편적 법칙"의 형식으로 표현될 것이며, 만약 특정한 비율로만 성립하는 규칙이라면 "통계적 법칙"으로 표현될 것이다. 일단 전형적인 법칙으로 간주되는 전자로 논의를 한정지어 볼 때, 보편적 법칙은 "보편적 조건 진술"이라 불리는 논리적 형식으로 표현된다. 다음과 같이 "모든 x에 대하여, 만일 x가 P의 속성을 가지면, x는 또한 Q의 속성을 갖는다"라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법칙을 기호로 써 보면 다음과 같다.
- (x)(Px ⊃ Qx)
단일 사건으로서의 "사실" = "단칭 진술"
과학자들의 모든 진술이 법칙처럼 보편적 조건 진술의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어제 우리 연구실의 1번 세포가 2개의 세포로 분열했다"와 같은 진술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어떤 일이 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진술은 단일 사건에 대한 것이고, 따라서 "단칭" 진술이 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단칭 진술(특정한 개인의 특정한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실"은 보편적 진술과 구분되는 단칭 진술로 표현된다.
엄밀한 논리학 vs. 애매한 일상 언어
어떤 동물학자가 교과서에 "코끼리는 수영을 잘한다"라고 썼다면, 그것은 그가 1년 전에 본 특정한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모든"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음이 분명하다. 즉 우리의 언어는 이처럼 애매하고, 따라서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예컨대 "까마귀는 검다"는 진술에 대해 과학자는 사실을 얘기하는 진술이라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법칙"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경험적 법칙(일반화) vs. 이론적 법칙
예컨대 열팽창 법칙은 열을 가했을 때 팽창하는 물체들을 여러 번 직접 관찰한 데서 일반화된 것으로, 이러한 간단한 종류의 법칙은 "경험적 법칙" 또는 "경험적 일반화"라 불린다. 반면 소립자나 전자기장과 같은 '관찰할 수 없는' "이론적 개념"들은 이론적 법칙들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소결
과학은 개별적인 사실들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 개별적인 사실들 이외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확실히 말하건대 규칙은 직접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많은 관찰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러한 규칙들이 진술들로 표현될 때 "법칙"이라 불린다.
법칙의 역할: 설명과 예측
법칙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해 주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은 예측하게 해준다.
설명에서 법칙의 필요성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소한 하나 이상의 법칙을 언급해야 한다. 이 점은 매우 강조될 필요가 있는데, 일상 생활에서 친숙한 설명 형태에서는 꼭 법칙이 없어도 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내 시계가 사라졌어. 어떻게 된 거지?"라는 질문에 "A가 방에 들어와서 그걸 가지고 나갔어"라고 대답하고, "왜 가져간 거지?"에 대해 "잠시 빌려간대"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우리는 하나의 사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는데, 두 번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번째 사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세 번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엔 법칙이 없지 않은가? 왜 법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사실에 의거한 설명은 알고 보면 어떤 법칙들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생략된 진술"이다. "시계를 가져가면 시계가 없어진다"거나 "누가 시계를 빌려간다면 그는 그 시계를 가져간다"와 같은 법칙이 생략되어 있는 것인데, 보통 그런 법칙들은 너무 친숙해서 굳이 말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과학에서도 그러하다. 예컨대 "왜 쇠막대가 커졌죠?"라는 질문에 "막대를 가열했거든요"라는 대답이 설명이 되는 이유는 "쇠막대를 가열하면 막대가 커진다"라는 법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법칙이 성립하지 않거나 전제되지 않는다면 "막대를 가열했다"는 사실은 쇠막대가 커진 일에 대한 설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 법칙이 그 설명의 핵심이다. 즉, 사실들은 최소한 하나 이상의 법칙에 의하여 다른 사실들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설명을 도식적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x)(Px ⊃ Qx)
- Pa
- Qa
통계적 법칙이 사용되는 경우
통계적 법칙이 보편 법칙에 비해 근거가 상대적으로 적은 설명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그 설명 또한 여전히 하나의 설명이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보다 상세한 설명항을 통해 보다 근거 있는 설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예컨대 "특정한 음식물을 먹은 사람들 가운데 5%가 특정한 증세를 보인다"고 할 때, 그 증세의 환자에게 의사가 그렇게만 설명한다면 환자는 "왜 하필 내가 그 5% 가운데 끼어야 하느냐?"고 불만스러워할 수 있다. 이 때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통해 환자가 특정 알레르기 체질이라는 것을 알아낸 후, "특정 알레르기 체질의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었을 때 97%가 당신과 같은 식중독 증세를 보이는데, 당신이 그에 속하는 군요"라고 말한다면 보다 강력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통계적 법칙은 흔히 우리의 불충분한 지식 때문에 쓰인다. 생물학, 의학, 경제학, 사회과학 등에서 통계적 법칙을 사용하는 이유는 보통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 이론에서도 우리는 통계적 법칙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기본 구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모든 법칙이 궁극적으로 통계적인 근본 법칙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통계적 법칙에 근거한 설명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논리학/수학 vs. 과학
논리학의 법칙
논리학의 법칙들은 과학의 경험적 법칙들과 달리 우리에게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음의 논리 법칙을 살펴보자.
- (1) 만일 p 그리고 q이면, p이다.
- (2) 만일 p이면, p 또는 q이다.
위의 진술은 논쟁의 여지 없이 참이다. 그러나 위의 진술에서 "그리고", "또는", "이면"의 의미는 애매할 수 있기 때문에 엄밀성을 위해 기호로 재기술될 수 있다.
- (1) (p∧q)⊃p
- (2) p⊃(p∨q)
여기서 "∧"라는 기호는 "그리고"로, "∨"의 의미는 "또는"으로, "⊃"의 의미는 "만일 ..이면 ..이다"로 이해하면 된다. 그 의미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는 진리표를 그릴 수 있다.
p |
q |
p∨q | p∧q | p⊃q | ||
(1) | 참 | 참 | 참 | 참 | 참 | |
(2) | 참 | 거짓 | 참 | 거짓 | 거짓 | |
(3) | 거짓 | 참 | 참 | 거짓 | 참 | |
(4) | 거짓 | 거짓 | 거짓 | 거짓 | 참 |
진리표에 따르면, "∨"라는 기호는 ""p∨q"는 (1),(2),(3)의 경우에 참이고, (4)의 경우에 거짓이다"라는 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이라는 기호는 말로 표현하면 대략 "만일 ...이면 ...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엄밀하게는 "(1),(3),(4)의 경우에 참이고, (2)의 경우에 거짓이다"라고 정의된다.
"(p∧q)⊃p"와 "p⊃(p∨q)"와 같은 진술은 "∨", "∧", "⊃"와 같은 기호의 정의에 의해 곧바로 진리치가 결정되는데, 이 경우 (1),(2),(3),(4) 모든 경우에 참이 되며 이러한 진술이 바로 논리학의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세계의 본성과는 전적으로 독립해서 참이 된다. 즉 논리학의 법칙은 필연적인 진리(참)이고, 철학자들이 가끔 주장하듯이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진리(참)이다.[1][2]
수학의 법칙
수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군론의 법칙과 유클리드의 3차원 공간에 대한 이론 기하학의 법칙은 외부 세계의 본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러한 수학적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가능세계란 없다.[3]
소결
논리학과 수학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또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란 논리학과 수학에서의 진술들은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법칙들은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타당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떻다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4]
논리학과 수학의 법칙들은 그 본성상 과학적 설명의 토대로 사용될 수 없다. 하나의 사실 내지는 현실 세계에서의 어떤 구체적인 관찰을 우리에게 설명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경험적 법칙으로 설명해야 한다. 경험적 법칙은 논리학과 수학의 법칙처럼 확실성을 띠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세계의 구조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형이상학의 배제
"왜" vs. "어떻게"
19세기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이 "왜?" 대신에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 데 형이상학적인 힘(agent)을 찾을 게 아니라 법칙을 가지고 그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왜?"라는 질문은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물음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질문을 거부했던 것이다. 지금은 "왜?"라는 질문으로 그런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요구하진 않기 때문에, "왜?"는 적법한 질문으로 쓰일 수 있다.
법칙의 사용
우리가 특정한 사실을 설명하는 데 반드시 과학적 법칙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한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기 전에 형이상학적인 어떤 힘이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특히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이 발전하기 전의 사람들은 흔히 어떤 설명을 할 때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때 사람들은 우리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는 없지만, 비를 내리게 하고, 강을 흐르게 하며, 번개를 치게 하는 정령이나 신령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이러한 의인화 또는 책임소재 부여 등은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태도이지만, 지금은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사이비 설명: 엔텔레키의 예
우리의 사회는 신화를 버렸지만, 아직도 과학자들은 신령의 자리에 그와 별 차이가 없는 어떤 힘을 대치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독일의 생물학자 겸 철학자 드리쉬(H. Driesch)는 생물학과 철학에서 탁월한 연구를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재생과 번식과 같은 생물학적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드리쉬는 살아있는 것들은 다른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유기체의 독특한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른바 "엔텔레키(entelechy)"라는 것을 가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엔텔레키는 살아있는 것들이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게 하는 어떤 특정한 힘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이 중력이라든가 자기력과 같은 물리적인 힘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유기체들의 엔텔레키가 유기체의 진화 단계에 따라 다양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인간의 엔텔레키의 일부분이며, 재생작용, 면역작용 등도 엔텔레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르납이 보기에 이러한 드뤼시의 엔텔레키 이론은 몇 가지가 부족한데, 특히 드뤼시에게는 "어떤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통찰이 부족하다.
카르납 등이 "엔텔레키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라고 질문한다면, 드리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물리학자들은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무도 볼 수 없는 자기나 전기 같은 힘들을 도입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오. 물리적 힘들로는 특정한 유기체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물리적 힘은 아니지만 힘과 같은 그 무엇을 도입하는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힘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물리적 힘은 아닌 것이지요. ... 물리학자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자기력을 도입하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서도 그것[엔텔레키]이 물리적 힘은 아니지만 그걸 도입하는 게 정당한 것이 됩니다."
이에 대한 카르납의 대답은, 물리학자들은 단지 "자기"라는 단어 자체로 쇠막대를 향한 못의 움직임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물리학자에게 왜 못이 움직이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먼저 자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지만, 좀더 완전한 설명을 요구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정량적이든 정성적이든) 법칙을 제시할 것이다. 즉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힘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또한 법칙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드리쉬는 법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도토리 나무의 엔텔레키가 소나 말의 엔텔레키와 어떻게 다른지, 또 엔텔레키가 어떤 조건에서 더 강하게 되고 어떤 조건에서 더 약하게 되는지에 관한 법칙을 명세(specify)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몇몇 경험 법칙들을 제시했는데, 예컨대 성게를 이렇게 자르면, 저렇게 자르면 어떻게 되는지는 훌륭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엔텔레키 개념은 위의 경험 법칙이 해주는 것 이상의 설명을 해주지 못하며, 새로운 예측을 하는 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엔텔레키 개념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증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드뤼시의 설명은 사이비 설명(pseudoexplanation)인 것이다.
만약 엔텔레키 개념이 생물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고 새로운 법칙을 세우는 데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해 준다면,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에는 일부 동의할 수 있다. 정말 엔텔레키 개념에 의해 과거의 법칙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쓸모 있는 개념일 것이다. 예컨대 에너지 개념은 에너지 보존 법칙과 같은 좀더 일반적인 법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쓸모 있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드뤼쉬의 엔텔레키는 그러지 못했다.[5]
예측
설명과 예측의 공통점과 차이점
법칙은 우리가 관찰한 사실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아직 관찰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는 수단이 된다. 예측의 바탕을 이루는 논리적 도식은 설명과 정확하게 똑같다.
- (x)(Px ⊃ Qx)
- Pa
- Qa
단, 설명에서 Qa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예측에서 Qa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설명과 예측의 차이는 단지 이것뿐이다.
예측의 의미
대부분의 경우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미래의 사건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과거에 속한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어떤 천문학자는 과거의 어느 특정하나 날짜에 월식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들 모두에 "예측"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통계적 법칙을 사용하는 경우
많은 경우,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은 보편적이기보다는 통계적이다. 그럴 경우 예측은 개연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모르는 사실을 추론하는 데 연역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법칙이 통계적인 것이라면, 그와는 다른 논리인 확률의 논리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지역 사람들의 90%가 검은 머리라고 해보자. 이 때 나는 그 지역의 어떤 사람에 대해, 그의 머리가 검을 확률이 9/10라고 추론, 즉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의 중요성
예측은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필수적이다. 우리의 어떤 사소한 행동들도 예측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문의 손잡이를 돌리는 이유는, 손잡이를 돌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너무 당연해서 거기에 포함된 논리적 도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숙고된 모든 행동은 (법칙을 포함한) 그러한 논리적 도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일 예측이 없다면, 과학도 일상 생활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각주
- ↑ 가능세계란 논리적으로 모순을 범하지 않고 기술될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 ↑ 논리학의 법칙이 참이 되는 것은 논리학 기호의 정의를 인정했을 때에만 해당되는 얘기이다. 만약 논리학의 기호를 다른 식으로 정의한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콰인의 주장에 따르면, 분석적 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의미에 의해서 그 참이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정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 정의는 (사회적) 규약에 의해 결정되는 것에 불과하다. 즉 다른 규약을 채택한다면 얼마든지 그 진리치는 변할 수 있을 것이다.
- ↑ 카르납의 이런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논리학의 법칙과 수학의 법칙은 분명 외부 세계의 본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수학의 법칙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유클리드의 수학 체계의 공리와 정의들과 다른 공리와 정의를 가진 체계를 가정하는 세계를 가정한다면, 그 세계에서 유클리드 수학 체계의 정리(법칙)들은 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수학의 정리(법칙)들은 그 수학체계의 정의와 공리가 작동하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 ↑ 나는 이에 반대한다. 논리학과 수학의 법칙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이유는, 모든 가능세계에 대해 참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상의 가능세계에서만 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 이에 대한 판단은 언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더 읽을거리
- Hempel, "Two Basic Types of Scientific Explanation"
- Hempel, "The Thesis of Structural Identity"
- 과학철학 학부세미나 2007-2: 설명과 인과
- 과학철학 학부세미나 20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