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데이와 앙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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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러데이와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전자기학의 형성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기여를 한 과학자들이지만, 두 과학자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이 글에서는 L. Pearce Williams, "Faraday and Ampère: A Critical Dialogue", in David Gooding & Frank A. J. L. James (eds.), Faraday Rediscovered: Essays on the Life and Work of Michael Faraday, 1791-1867 (London: Macmillan, 1985), pp. 83-104와 Oliver Darrigol, Electrodynamics from Ampère to Einstei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Ch. 1을 통해, 패러데이와 앙페르의 상호 영향과 스타일 차이를 요약해 보았다.

Williams의 분석

L. Pearce Williams, "Faraday and Ampère: A Critical Dialogue", in David Gooding & Frank A. J. L. James (eds.), Faraday Rediscovered: Essays on the Life and Work of Michael Faraday, 1791-1867 (London: Macmillan, 1985), pp. 83-104.

1820년 전류가 자침에 영향을 준다는 외르스테드 효과가 알려진 후, 파리 무척 열광. 몇 주 후 앙드레-마리 앙페르(Andre-Marie Ampere)는 전기동역학(electrodynamics)이라는 새로운 과학 창조. 1820년 말, 앙페르는 모든 자기 현상을 운동 중인 전기에서 나오는 힘으로 설명하는 논문 발표. 그가 발견한 '운동 중인 전기에 의한 힘'은 정전기의 평범한 잘-연구된 힘과 완전히 다른 힘이었다. 앙페르의 놀라운 발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이론의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앙페르의 아이디어는 동료 학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패러데이는 1821년, 1822년 발표한 논문에서 앙페르의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앙페르로 하여금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도록 함. 이 글에서는 패러데이의 비판과 그것이 앙페르에게 미친 영향을 상세히 알아보려 함.

앙페르와 패러데이 비교

1820년 앙페르는 이미 45살. 그의 삶은 슬픔. 프랑스 혁명 중 아버지 사형. 아내는 일찍 죽음. 앙페르의 두 번째 결혼은 bitterness와 recrimination(맞비난)으로 파멸. 지적으로는 디디로의 백과전서의 영향을 받았지만, mystical devotion과 sceptical despair 사이에서 왔다갔다. 감정적 긴장은 전기동역학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1820년 가을과 겨울은 앙페르에게 번쩍이는 직관이 날뛰던 환희의 기간이었음. 그의 발견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연역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번쩍이는 직관에서 옴. 그들은 때로 비정합적이거나 모순적이거나 모호.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이론을 수용하는 데 방해. 많은 이들이 그의 이론에 적대적이었고 매우 비판적이었음.

비판에 대한 앙페르의 반응에는 절망의 기록 있음. 그는 1820년까지 그는 수리 물리학과 수학에서 uninspired paper들 출판. 그는 철학과 심리학에도 관심. 앙페르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었지만, 젊어서 '수학적 천재'로 불렸을 때보다 명성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 -_-;; 당시 그의 집에서 살았던 프레넬은 이 점 부각시킴. 그는 앙페르보다 13살 어림. 그렇게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았음. 그렇네 1819년, 그는 빛의 진동 이론으로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음. 질투의 증거는 없지만, 그의 전기동역학에 그의 originality와 essestial truth 강하게 주장한 점은 그가 과학적 명성에 얼마나 강하게 목매고 있었는지 시사함.

패러데이와의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이론에서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버려도 되는 것인지 명확지 않았음. 앙페르의 새 이론에서 근본적인 부분은, 자기와 동전기의 동일성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이 동일성을 증명하려 애썼음. 자기나 전기동역학의 새로운 현상을 알게 될 때마다, 앙페르는 이를 전류의 운동으로 해명하려 시도. 이 commitment는 두 가지 이론적 목적을 더 이끌었음. (1) 전류힘(current force)를 수학적 공식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2) 영구 자석 내부의 전류가 입자 주위를 회전해야 한다는 그의 관점을 지지할 실험적 증거를 찾았다. 둘 모두 그의 자기에 대한 동전기 이론의 핵심. 그는 둘 중 어떤 것도 버릴 수 없었음. 나머지는 모호했음. 패러데이의 비판은 앙페르로 하여금 그의 '중핵(hard core)'로 후퇴하여 나머지 모든 것을 버리도록 강제했음.

1820년 패러데이는 29살. 그의 '명성'이라 할 것은 런던, 특히 왕립 연구소에 한정. 그는 분석 화학자로서 능력을 보이고 있었고, 모세관에서의 기체 통과에 대해 연구하고 발표했었으며, 제임스 스토다트(James Stodart)와 함께 강철(steel)에 관한 연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물질의 일반힘(general powers of matter)'으로서 전기와 자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짐나 이 주제에 중요한 연구 수행한 적은 없었다. 즉, 그는 앙페르와 같은 인사와 대적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그의 자신 없음은 1820년(21년?) 4월 G. De la Rive와의 편지에서도 잘 드러남. 이는 그의 전자기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를 익명으로 출판하도록 이끔. 이는 패러데이가 익명으로 출판한 유일한 논문.

패러데이의 비판은 그의 위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반영. 그의 비판은 모두 개인적인 단어로 이루어짐. 겸손. 그는 반복해서 자신이 앙페르를 이해하는 데 수학과 물리학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고백. (저자가 보기에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확신은 그의 이론과 실험에 대한 그의 기본 태도 결정. 즉 실험을 더 중시하게 됨)

1820년 10월 1일 전까지 외르스테드의 소식은 왕립연구소에 도달하지 못함. 10월 1일 데이비는 외르스테드의 실험 반복하러 실험실에 달려감. 1821년 3월 말이 되어서야, 월러스턴이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제자리에서 돌 수 있는지 실험. 패러데이는 그 때 거기에 없었음. 5월 말, 왕립연구소에서, 패러데이는 강력한 영구 자석이 전기 arc에 미치는 효과 관찰하여 일기에 기록. 아직 다른 기록은 없음. 1821년 늦봄 또는 초여름에, Annals of Philosophy의 편집인 중 한 명이자 오랜 친구인 리차드 필립스(Richard Phillips)가 패러데이에게 지금까지 전자기라는 새로운 과학에서 이루어진 것을 설명하는 원고를 청탁. 이는 패러데이에게 전자기 연구에서 첫 경력을 만들어준 제안이었음.

앙페르에 대한 패러데이의 첫 비판

'전자기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는 3부로 구성. 1821년 9,10월과 1922년 2월 세 번에 걸쳐 출판. 실험적 부분은 7,8,9월에 쓰여진 듯. 전자기 이론을 다루는 부분은 나중에 쓴 듯. 우선 패러데이 본인이 실험적 관찰과 가설과 이론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아봐야. 그러나 이를 가르쳐주는 증거 별로 없음. 다만 패러데이가 아이작 와트(Isaac Watt)가 쓴 <정신의 개선(The Improvement of the Mind)>을 열심히 읽었고 높이 평가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음. 그 책에는 언어 사용에 조심할 것, '몇몇 특정한 관찰이나 외양 또는 실험'으로부터 일반 이론을 끌어내는 데 주의할 것을 조언하고 있음. 사실 이러한 경험적 조심성 또는 '베이컨주의'는 당시 영국에서 널리 수용된 태도. 전자기 연구를 시작할 때, '경험적 조심성'의 필요라는 조언은 패러데이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주의 실험 철학

Annals of Philosophy 3월호를 보면, 프랭클린적인 1 전기유체 이론을 옹호하는 가설의 사용을 공격하는 익명의 논문 있음. 그는 논문 도입부에 베이컨적 방법 예찬. 아마 패러데이는 이를 주의 깊게 읽었을 것.

4월호에는 Herapath의 기체와 열에 대한 수학적인 논문이 실렸는데, 패러데이의 '역사적 스케치' 논문 1부가 실린 같은 호에는 그에 대한 짧은 비판 논문이 실렸다. 그 논문의 익명 저자는 먼저 이론, 가설, 실험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서술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는데, 바로 실험이 이론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 가설은 자유럽게 사용될 수 없으며, 실험적 탐구에 의해 한정된 영역 내에 존재해야 한다. 또 그 논문에서는 기체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하지 않음.

패러데이는 그와 똑같은 태도로 앙페르의 주장 원형 전류로서의 자석 주장을 비판했음. 나중에 패러데이는 같은 방식으로 절대적인 전기 중성 표준을 가정하는 유체 이론을 비판.

요컨대, 패러데이와 공통적으로 나타난 그 논문의 태도는

  1. 실험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과학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2. 가설은 자유롭게 만들어질 수 없으며, 실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측면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3. 가설은 명료해야 하며 모호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가설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현상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패러데이의 '역사적 스케치'

'스케치' 논문은 외르스테드, 베르젤리우스, 앙페르와 같은 저명한 과학자의 연구 상대로 겸손. 그러나 그는 "젊고 이름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과학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함. 그는 자신의 실험적 능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고, 외르스테드 이후 지금까지 수행된 주요 실험들을 조심스럽게 공들여 반복했다. 대체로, '스케치'의 1,2부는 단지 무슨 실험들이 있는지 요약. 그럼에도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 "전기의 물질성을 선호하는 논변은 많고, 그에 반대하는 논변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가정에 불과하다. 전자기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동안, 우리가 전기의 물질성이나 도선을 통과하는 어떠한 흐름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앙페르 염두한 것일수도.

이론을 다루는 3부에서, 패러데이는 외르스테드의 이론 검토. “나는 외르스테드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할 말이 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의 이론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었다 . 그러나 패러데이는 외르스테드의 이론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르스테드 씨의 이론은 두 가지 전기 유체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결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지만, 결합시키려고 할 때에는 전기적 충돌을 산출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선 안팎으로 서로 분리된 채 반대의 나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확연히 다른 자기력을 가지고 있다. 한 전기(-)는 자석의 N극을 움직이지만 S극에는 아무런 작용을 하기 않는다. 반면 다른 전기(+)는 S극을 움직이지만, N극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1) 패러데이는 외르스테드가 의도했던 전자기 현상의 복잡한 기계적 구조를 시각화해내려고 애썼음. (2)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외르스테드의 이론은 현상을 정말로 기계적으로 설명해낸다.

몇몇 이론 재빨리 리뷰. 베르젤리우스의 이론에 대해서는 성급하다고 비판.

'스케치'의 상당부분은 앙페르의 관점에 할애. 그는 "이론이란 이름"이 붙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인정. 그러나 비판 매서움. " 앙페르는 내가 믿기로는 현재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이론을 따라 두 전기 유체의 존재를 가정하면서 시작한다." ... 전기 유체(electric fluids)라는 용어 사용하고, 전류를 실제로 물질의 흐름으로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앙페르가 전기를 두 가지 구별되는 유체로 구성된 것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유체 중 하나는 +전기로, 다른 하나는 -전기로 불리지만, 그것은 그 존재에서는 동등하게 분명하며 동등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패러데이는 회로에서의 전류를 다루는 앙페르의 방식을 따라가지 못했음을 고백. "앙페르는, 전지와 도선을 말하면서, 전지는 두 가지 전기를 두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수송하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 '그래서 이중의 흐름이 나타난다. 하나는 +전기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전기의 흐름으로, 이들은 전기-기동(기전) 작용이 존재하는 지점으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분리되어 나와서 그 지점으로부터 상반되는 회로의 지점에서 다시 결합한다."

회로의 중간 지점에서 두 개의 분리된 흐름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관찰되는 효과를 만들어낼지가 패러데이의 관심거리. "이 재결합은 물론 도선 내에서 일어날 것이며, 누군가는, 외르스테드의 생각처럼, 자기 효과가 그에 의존하는지( 외르스테드는 그것을 전기적 충돌이라 불렀다), 또 도선에 축적되는 전기는 어떻게 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앙페르는 전기의 가설적인 '흐름'을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지 않음. (외르스테드에서 전기의 '흐름'은 전자기 효과를 설명하는 데 실제로 사용되었음) 게다가 매우 다른 모형도 사용. "그러나, 앙페르의 논문 다른 부분에서, 전류에 대한 매우 다른 생각이 나타난다. 하나의 전기는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 순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전기는 반대 방향의 흐름으로 순환하며 움직여서, 두 전기가 같은 도선과 장치 내에서 반대 방향으로 서로 지나친다."

위의 구절들은 가설적인 존재자와 과정을 제약없이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패러데이가 신뢰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줌. 대조적으로, 패러데이는 대항 가설을 제시하기보다 단지 현상만을 묘사하는 데 치중함. 그는 그것만이 이론의 토대로 요청된다고 믿음. 지금 중요한 것은 가설이 아니라 현상 자체에 대한 정확한 묘사! "앙페르는 항상 도선 내의 흐름을 언급했으며, 실제로 자신의 이론을 그것의 존재 위에서 세우고 있기 때문에, '흐름'이 묘사되어야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앙페르는 전기의 흐름을 관찰할 수 없었고, 따라서 묘사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패러데이는 앙페르의 이론이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 '흐름'의 정확한 정의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앙페르는 그것을 확장하여 사용. 영구자석에 전기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앙페르의 핵심 아이디어. 게다가 자석의 입자들 주위를 그것이 돈다고까지 주장. 패러데이는 이러한 가정들에 회의적. 사실 이 가정들은 발견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었음. 실제로 그 가정들은 앙페르로 하여금 발견의 발견을 거듭하도록 이끌어준 것들임. 패러데이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할 수 없었음. 놀랍게도, '스케치' 논문에서 그는 외르스테드의 이론이 앙페르의 이론보다 살짝 더 낫다고 결론지음. 왜냐하면 외르스테드의 이론은 전자기 현상을 정말로 설명하기 때문.

앙페르는 '스케치'를 읽지 않은 듯. 그러나 이 논문은 패러데이에게 매우 중요. 왜냐하면 이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자기 회전 발견했기 때문. 그리고 이 발견은 패러데이에게 명성 안겨줌. 앙페르는 그 논문에는 대답함.

대화의 시작

1822년 중반(앙페르가 패러데이의 회전 논문에 대답한 이후), 앙페르는 5개의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

  1. 자기는 전기 흐름의 결과이다.
  2. 영구 자석은 같은 축을 가진 전류 또는 자석 입자 주위를 도는 전류를 가지고 있다.
  3. 전류는 도선을 통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가지 전기 유체의 통과이다.
  4. 전류가 흐르는 도선의 끌림과 밀어냄은 도선 내 작은 전류 요소들(current elements) 사이에 작용하는 중심력의 결과이다.
  5. 이 중심력들은 빛 에테르의 진동에 의해 전파된다.

패러데이는 위의 각 항목 모두 의심. 1821년 9월 12일, 패러데이는 G. De la Rive에게 편지 보냄. "코일과 일반 막대 자석 사이의 유비가 전보다 무척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일반 자석 안에 전기의 흐름이 있다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 원형으로 감은 전기가 자석과 비슷한 점 인정하지만, 자석 내에 전기 흐름의 존재가 증명되기 전까지는 앙페르의 이론 의심할 것.

9월 5일부터 패러데이는 나선형 회로와 자침을 가지고 실험하면서, 앙페르의 일반-자기와 전-자기 사이의 동일성 가정 검토. 특히 패러데이는 앙페르의 중심력 가정 비판에 집중. 앙페르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주장. "두 전기 흐름은 서로 평행하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 에는 서로를 끌어다기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에는 밀어낸다." 그는 이를 회전력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인 후, 그의 회전 장치를 통해 회전력이 가능하며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줌. 모든 겉보기 인력과 반발, 회전은 전류 주위의 회전력을 가정함으로써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앙페르의 중심력 이론과 직접적인 반박이었음.

또 패러데이는 자석과 원형 전류 사이의 동일성 주장 반박. 패러데이는 일반 자석과 원형 회로 사이의 차이점 3가지 지적. 첫째, 자석의 한 극은 다른 극을 모든 방향에서 당김. 그러나 헬릭스의 인력은 방향에 의존. 둘째, 극의 위치가 다름. 헬릭스의 극은 축 양끝에 있었지만, 영구자석의 극은 양끝에서 약간 안쪽에 있음. 셋째, 자석의 비슷한 극들은 보통 반발하지만, 매우 가까이에서는 강하진 않지만 서로 끌어당기는 반면, 헬릭스에서는 이러한 인력 발생 안함.

마지막으로 패러데이는 헬릭스처럼 생긴 자석을 만들어서 헬릭스와 자석 사이의 동일성을 의문시하는 데몬스트레이션 선보임. 그는 철판을 구부려 속이 빈 실린더를 만든 후 자화시켜 자석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실린더형 자석의 극 배치는 헬릭스와 달랐다. 이는 앙페르가 영구 자석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한 전류가 있더라도 concentric하지 않음을 보임.

논문 전체에 걸쳐, 패러데이는 자신의 이론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길 꺼림. '스케치'에서, 그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이 모종의 독특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 1822년 1월에 낸 '새로운 전자기 운동에 대한 노트'에서, 그는 이 '상태'에 대한 첫 실험적 증거를 제시.

그래서, 결국 "자기 효과 외에 자석 내의 전기 흐름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 나는 앙페르의 이론을 계속 의심할 것이다."

앙페르의 반응

앙페르는 회전의 발견에 상당히 영향 받음. 그는 패러데이 논문의 중요성 깨닫고 몇번이고 반복해 읽음. 이유는 생각하기 쉬움. 만약 앙페르가 그러한 회전을 예측했더라면, 이는 그의 이론을 보다 수용가능하게 만들었을 것. 그는 이 기회를 패러데이에게 빼앗김. 패러데이의 발표 직후, 앙페르는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회전하는 자석 독자적으로 제작 성공.

그러나 패러데이의 새로운 관점은 앙페르의 것과 완전히 화해불가능. 앙페르는 패러데이의 논문에 수많은 코멘트 달며 숙독. 암묵적으로 패러데이의 비판에 대응. 이 대응은 비판에 직면한 앙페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론적 선택지에 집중. 즉 패러데이의 비판은 앙페르의 후속 연구 경로를 결정지음.

1820년 가을부터의 앙페르 연구 요약해보면, 두 경로. (1) 자기적 현상의 원인으로 가정한 전기적 힘의 본성과 전파에 관한 가설 세우기. 우선 그는 자석 내에 동축 전류 가정. 1821년 1월, 그는 이를 조금 변경하여, 자석 입자들 주위를 도는 전류 가정. 그리고 1821년에 그는 전류 흐르는 도선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빛 에테르 내의 파동 또는 분극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거라 생각. 그러나 이 물리적, ad hoc 가설은 실험적 증거 없었음. (2) 전류의 작용을 수학적 공식으로 환원 시도. 1820년 가을에 공식을 하나 만들었었음. 그러나 그는 실험과 일치하는 계산을 만들 수 없었다. 이는 공식 내에 존재하는 k라는 상수를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 Hofmann을 따라, 앙페르는 1822년 3월, 이 일반화된 형태의 법칙을 자신과 패러데이의 회전 발견에 적용하는 것이 k값의 변화를 함축한다는 것을 깨달음. 이 시기 그의 실험은 k값 결정하는 데 치중.

패러데이의 공격(1. ad hoc 가설 사용, 2. 예측력 없음)은 앙페르의 약점 찌름. 프레넬과 Biot 사이의 논쟁 연상. 빛의 입자설-파동설 논쟁에서, 수세에 몰린 Biot는 ad hoc 가설을 증가시켜야 했음. 프레넬의 승리는 4가지 때문. (1) 광학 현상을 설명하는 데 파동 이론의 보다 우아한 사용 (2) 입자 이론이 가진 가설 수의 부담 (3) 프레넬 이론과 실험 사이의 관계의 결정적 성격 (4) 인물의 제도적 충성 변화. 아마도 Biot의 패배를 염두에 둔, 앙페르는 비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수학적 경로는 훨씬 안전해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곳은 앙페르의 본 나와바리. 즉 패러데이의 발견과 비판은 앙페르로 하여금 전자기의 물리학을 피해 그 작용의 수학적 법칙에 집중하도록 함.

패러데이 전자기 회전 논문에 적힌 앙페르의 노트는 두 가지 범주로 나뉨. (1) 철학적. (2) 직접적.

(1) 패러데이의 주장 : "이 사실들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즉 도선과 자석의 양 극 사이에는 아무런 끌림이 없다. 도선은 자극 주위를 회전하며 자극은 도선 주위를 회전한다.' 더 단순한 작용은 회전 작용이다. -> 이에 대한 앙페르의 대답 (1821년 10월 논문) : "하나가 다른 하나 주위를 도는 도선과 자석의 회전은, 패러데이는 이 논문에서 기본 사실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 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지 힘들게 한다. 이를[수학적 분석을] 하기 위해서는, 도선의 각 요소와 자석의 각 입자 사이의 작용을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패러데이에게 앙페르의 프로그램을 따르라는 것. 그러나 패러데이는 그러지 않을 것. 앙페르는 다음과 같이 말함.

"앙페르에 의해 발견된 두 일정한 도선의 인력과 척력도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 이름은 상호작용의 법칙에만 부여될 수 있는 것 같다." 도선 사이의 인력과 척력은 무한히 작은 두 점 사이의 단순한 상호작용의 총합에 의한 결과이다. "이는 단순한 사실이 즉각 관찰될 수 없으며, 오직 관찰로부터 수학적 계산의 도움을 통해 도출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앙페르는 사실 완전히 정직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k를 결정할 수 있는 실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 즉 그는 아직 그의 '기본 사실'을 결정할 수 있는 "계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 앙페르는 패러데이의 주장 '앙페르의 도선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단순하지 않으며, 복합된 결과라는 것은 명백하다'에 대응. 만약 패러데이가 도선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무한한 작용의 총합이라는 주장(패러데이는 이런 주장 아니었음)이라면 이는 자신과 대립 안됨. 아니면 패러데이의 말이 인력과 척력이 회전 작용의 결과라는 의미라면 이는 관점이 차이일 뿐. 그가 끌림과 반발을 회전작용으로 매끄럽게 환원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거꾸로 전류 요소 사이의 인력과 척력을 기본 사실로 두고서도 도선과 자석 사이의 회전 운동을 도출할 수 있음.

그러나 여기서도 앙페르는 완전히 정직하진 못함. 왜냐하면 그는 그의 기본 사실로부터 "아직" 회전운동을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 아마도 그는 인력과 척력에 빠져 있느라, 회전을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 높다. 오히려 회전이 그가 설정한 법칙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은 패러데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

그리고 전류 요소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단순한가, 아니면 전류와 자기 사이의 회전 작용이 단순한가 하는 대결에서, 앙페르는 수학적 분석을 위해 전자 선택. 그러나 앙페르는 단지 둘이 동등함만을 주장. "이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그러한 사실들이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동등하게 잘 설명될 수 있다는 것뿐이며, 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는 전류의 아주 작은 요소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으로부터 "패러데이가 이 과학을 풍부하게 한 발견을 포함하여 모든 전자기 사실들을 쉽게 도출할 수 있다'. 앙페르 이론의 우월성은 "이 사실들이 이제 물리학의 일반 법칙의 일부가 되었으며, 회전 작용을 단순 기본 사실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패러데이는 앙페르의 비판에 영향받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자기 식대로 현상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기본 사실'은 결국 그의 힘의 선으로 성장하여 그의 성숙한 연구의 토대가 됨.

앙페르의 고리 실험

사실 앙페르는 패러데이의 3가지 비판 중 한가지에만 답한 셈. 오랫동안 앙페르는 헬릭스와 자석 사이의 자극 위치의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음. 실린더 자석도 문제였다. 이에는 한가지 답이 있었음. 실린더 자석의 내부 구멍은 헬릭스의 외부이지, 헬릭스의 내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됨! 자석 내 전류의 분자성 가설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 있음. 1821년 7월, 고리 실험.

이는 또 영구자석의 극 위치 문제도 해결해 줌. 1822년 6월 12일, De la Riv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제 품. electrodynamic molecules의 정렬이 축에 평행하지 않다고 가정하면 문제 해결.

1822년 초여름, k값 찾음. 이제 계산 마무리 할 수 있게 됨.

그럼에도 그의 ad hoc 가설들에 대한 불신 가시지 않음.

1822년 8월, 앙페르는 유도 전류 발견. 그러나 그는 이를 전자기 작용의 일반 이론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 논문 출판 안함. "영향에 의해 전류가 생성되는 이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긴 하지만 전자기 작용의 일반 이론과는 무관하다." 나중에 앙페르는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발견을 공표할 때 후회. (유도 전류가 생기면 자석 내 전류는 co-axial, 유도 전류가 생기지 않으면 molecular하다는 가설을 앙페르는 가지고 있었음)

결론

사실 copper ring 실험은 패러데이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실험이었음. 그는 처음 실험에서 전류가 유도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석내 전류가 molecular임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 실험에서 전류가 유도되자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됨. 자석내 전류는 co-axial인가? molecular인가? 그는 첫 실험 결과에 따라 이론을 공표하고, 영구자석의 극 위치가 co-axial current로는 설명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즉 그는 바라지 않던 전류를 발견했고, 이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더이상 새로운 ad hoc 가설을 달기 싫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깔개 아래 묻었다.

이후 앙페르는 과학적 방향을 변경. 어설픈 추측과 가설들을 모두 버리고, 핵심만 남김. 그리고 수학화에 몰두. 1826년 전기동역학의 수학적 대작 완성. Memoire sur la theorie mathematicque des phenomenes electrodynamiques uniquement deduite de l'experience. 이 저작은 후에 맥스웰이 앙페르를 '전기의 뉴턴'이라 부르게 만든 대작. "전체는, 이론과 실험은, '전기의 뉴턴;의 머리으로부터 완전히 성장하여 완전히 무장한 것처럼 보인다. 형식에서 완벽하며, 정확성에서 흠잡을 데 없으며,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공식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이는 전기-동역학의 기본 공식으로 죽 남을 것이다."

앙페르의 이런 경로 전환에 패러데이의 공 일부 있음.

Darrigol의 분석

Oliver Darrigol, Electrodynamics from Ampère to Einstei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Ch. 1, 1-41.

앙페르의 인력

자석 없애기

외르스테드 발견 이후, 자침을 전류 검출 장치로 만듬. 그는 이를 'galvanometer(검류계)'로 이름 붙임.

앙페르의 상상 : "... 자침이 남-북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알기 전에, 이미 우리가 전류에 수직이 되는 자침의 속성을 알고 있어다고 가정할 수 있다. ... 그러면, [자침이 가리키는] 남-북 방향을 설명하려는 사람이라면, 지구에 전류를 가정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생각 아니라까?"

지구와 자석 유비 하여, 모든 자석에 closed current 존재 가정. 실제로 원형이나 헬릭스로 움직이는 전류는 자석의 N극과 S극을 가지는 것처럼 보임. 앙페르는 9월 18일에 아카데미에서 이를 보고.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앙페르의 시도는 자기를 전기로 환원하는 시도. 이로써 존재론적으로 자기 유체를 없애고, 전기 유체만 남김. 이는 라플라스주의 orthordoxy와 모순. 그러나 앙페르는 프랑스 수리 물리학의 다른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애씀. 즉 그는 자신의 이론을 단단한 실험적 토대 위에 설립하고 이를 정교한 수학적 형태로 만들고자 노력.

9월 25일, 앙페르는 회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 앞에서, 헬릭스 전류가 마치 막대자석처럼 다른 막대자석을 잡아 당기거나 밀어내는 것 보여주는 데 성공. (앙페르는 헬릭스에 전류를 공급하는 동시에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은을 사용) 이를 통해 앙페르는 자석과 전류 사이의 동등성을 증명했다고 생각. 나중에 그는 자석을 전류 헬릭스로 더 잘 흉내.

물리적 전류 요소

분석적 탐구. 전류 사이의 상호작용을 전류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분석. 실험적으로 두 직선 도선은 평행하게 같은 방향으로 전류가 흐를 때 인력, 반대 방향으로 전류가 흐를 때 척력 작용. 1820년 10월 앙페르는 이를 실험으로 보이는 데 성공.

수학적으로 그는 임의의 두 전류 요소 사이에는 둘이 이루는 각에 따라 다음의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

(+값일 때 인력)

처음에 앙페르는 를 0으로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

아직 이 식은 완전치 않은 상태. 체계적으로 이 법칙의 귀결을 도출하진 못함.

구체화된 정리

대체로, 앙페르의 실험은 사전의 이론적 아이디어에 따라 계획됨. 처음 헬릭스와 자석 사이의 동등성을 보이기 위한 실험만 설명적 가치를 가지고, 나머지는 이론적 아이디어에 따른 측정용 실험이었음. 그의 실험들은 유일한 기능만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질문으로 변형되기 힘들었음. 이 rigidity는 앙페르가 manual skill을 가지지 못해서 항상 장치를 주문해야 했던 사실에 의해 더 증가됨. 일반적으로, 그는 실험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다. 가끔 물질적 제약은 예상치 못한 실험 결과를 통해 깜짝 교훈을 주기도 했음.

그의 실험은 두 종류. 하나는 헬릭스와 자석의 질적 유사성 보이기 위한 실험. 다른 하나는 직선 전류 사이의 상호 작용 측정용 실험. 그러나 그는 원하는 양적 결과 얻지 못함. 전류 사이에 작용하는 힘 너무 작았고, 전지는 너무 불안정했다. 그래서 그는 null method로 전환. 이를 통해 정확성과 일반성 획득할 수 있다고 믿음.

실험이 원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한, 앙페르의 실험은 그의 이론 발전에 별 역할 안 함. 오히려 그의 이론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imponderable fluid의 multiplication에 대한 반감. 그리고 라플라스 서클에서 배운 뉴턴적 유비와 수학적 기법으로부터 많은 도움 받음. 그러나 일부 실패한 실험은 이론 발전에 공헌.

한편 그는 전류의 본성에 무관심. 그의 이론에서 전류의 본성은 하는 역할이 없음. 그는 그의 유도가 전류의 어느 특정한 그림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 또한 그는 자석에 대한 그의 새로운 개념이 사변적이라고 생각지 않음.

반감

앙페르의 이론 반감 삼. 아라고, 프레넬, de la Rive가 거의 유일한 지지자. 그의 성급한 출판은 '사실'과 '이론' 구별 혼동 초래. 논문 속의 실험은 인상적이었지만, 실제 데몬스트레이션에는 미숙. 라플라스가 말하길, "그의 장치가 움직이지 않을 때, 그는 소문에 의하면 그것을 밀어서 움직였다."

외르스테드의 반응도 썰렁. "나는 약속을 하고 앙페르의 실험을 보러 그의 집에 갔다. 그는 세 가지 전류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실험을 보이기 위한 그의 장치는 매우 복잡했는데,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의 실험 거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 그는 끔찍하게 허둥댔고 실험가로서도 논쟁가로서도 서툴렀다."

특히, 외르스테드의 장치와 달리, 앙페르의 장치는 너무 복잡해서 되풀이하기 어려웠다. de la Rive가 말하길, 그의 '뛰어난 장치는 숙련된 일꾼과 상당히 비싼 비용을 필요로 했다." 그는 간단한 실험 기구를 제시하면서, 진입 장벽을 없애야 한다고 조언.

그래도 물리학자들은 앙페르의 주요 '사실들' 곧 수용. 즉 (1) 평행한 전류 사이의 끌어당김 (2) 헬릭스와 막대 자석의 유사성.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앙페르의 이론에 적대적. 데이비나 월러스턴과 같은 영국의 물리학자들은 앙페르의 수학적 추론을 따라가기 힘들어 했고, 도선 사이의 작용을 일시적인 자화의 결과로 보는 것을 선호했다. 한편 프랑스 학자들은 앙페르의 미분에는 익숙했지만, 앙페르가 라플라스 정통성을 깼다고 비난했다. 쿨롱을 따라, 그들은 앙페르의 자석 개념이 모호하다고 생각했고, 근본 힘 법칙에 삼각함수가 들어가는 것을 의문시했다. 또 그들은 전류 사이의 인력을 발견했다는 앙페르의 originality도 부정. 외르스테드 효과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Biot 등은 매우 강한 비판 제기했었음. 그러나 바로 반박 안 함. 그는 영국의 패러데이가 발견한 사실로부터 더 강력한 근거 찾게 되었기 때문.

패러데이의 전자기 회전

패러데이의 회전과 동력(power)

패러데이는 전자기 회전 발견 -> 전류와 자기 사이의 원형 작용을 기본 사실로 설정 -> 전류와 자기 사이의 겉보기 인력/척력 설명.

패러데이는 전류와 전류, 전류와 자기, 자기와 자기 통합적으로 이해 시도. '극' 개념과 '동력(power)' 개념 중요.

  • 첫째, 자기와 자기 : 같은 극끼리는 반발, 다른 극끼리는 끌어당김.
  • 둘째, 자기와 전류 : 전류 측면에 회전(?)하는 극. 따라서 전류는 자극을 회전시킴. 또는 자극은 전류를 회전시킴.
  • 셋째, 전류와 전류 : 전류 측면에 회전하는 극. 대충 생각해보면 같은 상태의 전류끼리는 측면에 서로 다른 극이 위치하므로 서로 당김. 반대 상태의 전류는 서로 반발.

(내가 보기에 패러데이의 통합은 불완전해보임. 전류와 전류 사이의 상호작용 설명은 월러스턴의 설명에서 별로 진일보하지 못함. 전류와 자기 사이의 원형(혹은 수직) 작용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설명 가능할텐데, 이를 위해서는 아마 자기력선 개념도 나와야 했을 것. 도선1을 중심으로 하는 회전하는 자기력선을 그리면 도선2에 수직으로 자기가 작용하게 되고, 이 자기 작용은 도선2를 회전(혹은 수직으로)시킴으로써 도선1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 것)

패러데이는 전류 사이의 작용을 설명하는 개념이 필요했고, 자기와 전자기의 통일성을 표현할 개념이 필요했다. '자참의 극은 우리에게 도선의 한쪽면의 속성을 보여준다.'

패러데이는 도선과 자석을 둘러싼 공간을 power, 가상 회전, 종국에는 철가루로 채웠다. 반면, 그는 도선과 자석의 내부 상태는 미결정된 상태로 남겨두었다.

"나는 자기의 원인에 관한 어떤 이론도 채택하거나 반대하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일반 막대 자석, 강철 또는 철 속에 구리 도선 헬리스 자석과 동일한 상태에 있는 것이 매우 가능성 있어 보인다. 어쩌면, 앙페르가 그의 이론에서 제안한 것처럼, 같은 방식, 즉 전기의 흐름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효과 자체 이외에 전기와 같은 힘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하다."

앙페리안 전류는 패러데이의 관점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패러데이가 거부한 것은 두 전류의 인력과 척력이 기본 사실이라는 생각. 그 인력/척력은 전자기 회전에서 보여진 회전력의 결과이다.

패러데이와 앙페르의 정반대의 스타일

앙페르는 가상 역사와 유비와 관련된 사변적인 추론을 통해 그의 전기동역학의 기본 사실들에 도달한 반면, 패러데이는 전자기 회전을 자석과 도선 사이의 상호작용을 세밀하게 조심스럽게 탐색함으로써 발견함.

둘 모두 이론이라는 것을 사용. 그러나 둘의 이론 무척 다름. 앙페르는 중력 이론과의 유비를 사용했고, 수학적인 용어로 추론. 반면 패러데이는 수학을 모르며, 모호하게 정의된 동력(power)이란 말과 구체적으로 상상가능한 작용을 통해 사고했다. 앙페르에게, 이론적 통일성은 적은 수의 가설로부터의 수학적 도출에 의존하는 반면, 패러데이에게 이론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통일성은 다양한 알려진 실험 사실들의 연결로부터 도출되었다.

패러데이가 앙페르에게 설명했듯이, "저는 불행하게도 수학적 지식과 추상적 추론에 쉽게 들어가는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저는 함께 가깝게 놓여진 사실들에 의해 저의 길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스타일의 이론 -> 다른 스타일의 실험 : 앙페르는 경직된, 전문적으로 설계된 기구는 패러데의 즉흥적이고, 재빨리 만들 수 잇는 장치와 완전히 달랐다. 앙페르는 그의 기구 제작자에게 며칠을 주어야 했던 반면, 패러데이는 몇 분 안에 도선과 바늘 배치하여 뚝딱 만들 수 있었다. 패러데이는 가능하면 쉽고 빠르게 기하학적 설정을 변경하고 결합할 수 있기를 바랬는데, 아마도 일부는 예측하지 못했던 효과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일 것이고, 또 하나는 알려진 사실들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수학적 이론을 통해서 연결을 제공하지 않고, 실험 자체에서 그 연결을 제공했음)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앙페르가 왜 그의 이론이 전자기 회전을 함축했음에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앙페르의 장치는 그가 예측할 수 있는 특정한 이론적 귀결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예측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은 그의 장치에서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는 멈추지 않는 회전은 예측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인력 이론들과의 유비가 이를 가렸을 것이다. 중력, 정전기력, 자기력에 의한 시스템에서, 중심력은 마찰에 의한 생동력(living force, 즉 kinetic energy) 손실을 만회할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이들 시스템에서는 영원한 회전은 나타나지 않음) 앙페르는 자신의 힘이 각에 의존하는 그 성격 때문에 다른 중력이나 정전기력과 무척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다. 게다가 자석을 전류로 환원함으로써, 자석을 가지고는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멈추지 않는 회전 운동이 전류를 가지고 만들어지리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전기-동역학

깨움

패러데이의 전자기 회전 소식을 들은 앙페르는 연구 재개. 그는 자기 식으로 회전 장치 제작. 그의 장치는 패러데이의 것보다 측정과 계산에 용이. 앙페르의 장치가 패러데이의 것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었다면, 자석과 도선이 자기 축을 중심으로 도는 회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음.

패러데이의 이론적 작업은 앙페르를 방해하지 못함. 앙페르는 패러데이의 회전 장치에 대해 패러데이는 제공하지 못한 수학적 설명 제공. 질적인 방식이지만, 그는 자신의 회전 장치에서의 운동이 전류들에 의한 힘의 결과임을 보임. "이 사실들은 물리학의 일반 법칙을 따르며, 우리는 회전 작용을 단순한 기본 사실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 앙페르는 패러데이의 원초적인 회전을 싫어하는 또다른 이유 있었는데, 그것은 측정과 계산에 어울리지 않음.

패러데이도 앙페르 잘 이해 못함. "저는 수학적 이론에 약해서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우둔하다는 점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이론의 문제에 회의적이며 따라서 당신은 제가 당신이 최근 고안한 이론을 수용하지 않는 점에 대해 화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패러데이를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의 전자기 회전 발견은 중요하게 여김. 그는 회전을 하게 해주는 지속적인 living force 공급이 전류에서 온다고 생각. 전류의 dynamical nature 강조하면서, 그는 이 새로운 과학은 '전기-동역학'이라 이름 붙임.

그는 도선의 일시적인 자화 이론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영구 자석으로는 어떻게 배치해도 영구적인 회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 즉 영구적인 회전은 전류가 만들어내는 living force 덕분이라고 생각.

게다가 회전 실험은 매우 중요한 역할 수행했는데, 이는 그의 전류 요소 사이의 힘 법칙에 있는 상수 k의 값을 결정하도록 해주었다. 즉 k=-1/2였다. (1822년 6월) (이에 따르면, 일렬로 나란히 놓여 있는 전류는 서로 반발) 그는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

그는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그의 삼각함수 형태의 힘 법칙을 미분 형태로 고칠 수 있었음. 또 이 공식을 가지고, 그는 하나의 폐회로가 한 전류 요소에 가하는 힘이 그 요소에 수직임을 보였다. 한편, 그의 예전 학생이었던 Felix Savary가 solenoid에 의한 힘 공식을 적분하는 데 성공했는데, 솔레노이드의 원이 솔레노이드의 길이보다 무척 작아질 때, 솔레노이드가 양 쪽에 두 개의 자극이 있는 것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보임. 한쪽 극과 전류 사이의 힘은 비오-사바르 법칙을 따랐고, 두 극 사이의 힘은 쿨롱의 법칙을 따랐다. 즉 세 가지 전자기 작용(자기와 자기, 자기와 전류, 전류와 전류 사이의 작용)을 하나의 동일한 법칙(전류 요소와 전류 요소 사이의 작용)으로 환원하는 데 성공한 것.

전기의 뉴턴

1823년 초, 앙페르의 전기동역학 성숙. 완전해진 앙페르의 법칙과 앙페리안 전류 가설과 수학적 분석 도구를 가지고, 우리는 알려진 모든 전자기 현상을 계산할 수 있게 됨. 체계화에는 시간이 걸렸는데, 1826년에 앙페르는 대작 'Memoire sur la thorie mathematique des phenomenes electro-dynamiques, uniquement deduite de l'experience' 완성.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푸리에의 레토릭 따라하여, 앙페르는 자신의 결과를 실험적 진리의 명백한 표현으로 제시. "나는 이 현상들의 법칙을 세우기 위해 오직 실험에만 의존했으며, 나는 그 현상들이 따르는 힘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식만을 유도했다." 사실 그의 이론에서 요소 힘의 본성, 요소 토크의 부재, 앙페리안 전류 등의 가설은 실험적인 증거가 없는 것들이긴 했음. 그렇다고 앙페르의 진실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음.

그의 이론은 세 가지의 작용을 하나의 원리, 즉 전류 요소와 전류 요소 사이의 인력/척력으로 환원하는 것. 그럼에도 그의 공식은 전류의 특정 본성이나 메커니즘에 의존하지 않음. 이는 앙페르에게 좋은 전략. 전류 및 전자기 현상의 본성과 원인에 대한 생각은 바뀌어도, 그의 공식은 생존할 수 있기 때문. 그는 여러 메커니즘 고민했지만, 법칙과 원인 확실하게 구분했음.

그는 가설들 점점 완화함. 전류의 본성에 대해서 열어둠. 힘의 전파에 관해 에테르 매질에 의한 파동 짧게 언급하지만, 쿨롱의 정전기 법칙이 기본이 되는 보다 보수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이 책은 가공의 세 단계로 구성. (1) 근본적인 실험이 전기동역학적 힘의 일반적 속성 확립 (2) 일반 힘 공식이 이 속성들로부터 유도 (3) 알려진 모든 전기동역학과 자기 현상을 이 힘 법칙과 앙페리안 전류 가정을 통해 도출. => 이러한 구조는 주제를 명료히 하고 독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데 도움. 그러나 이는 전기동역학의 실제 탄생 과정에서 실험, 수학적 기법, 이론적 아이디어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못보게 함.

외르스테드의 새로운 효과, 뉴턴주의 유비, 통일의 원리는 앙페르의 초기 이론적 확신의 원천. 무한소 분석 기법은 이론의 구조를 제한. 상호적으로, 이 구조는 물리적 전류 요소를 분리가능한 존재자인 것처럼 취급하도록 만들었음. 대체로, 실험은 앙페르의 직관과 예측을 입증. 그러나 아주 일부의 실패한 실험들이 중요한 역할 수행했는데, 이 실패는 이론의 몇몇 미결정 부분을 제거했고, 앙페르로 하여금 null method로 전환하도록 이끌었고, 새로운 수학적 기법을 개발하도록 부추겼다. 그 다음에는, 이 기법은 앙페르의 이론의 보다 질적 구성요소를 입증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전기동역학적 힘의 보다 근본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앙페르의 전기동역학의 복잡한 역사 & 단순한 재구성에 공통점 있음 : 수학은 엄격하고 적응가능한 반면, 실험은 정밀성과 유연성을 결여했다. 이 때문에, 실험은 가장 간단한 분석 수준에서 이론을 발견하기 위해 의도되었음. 이 실험들에서 효과는 작았고, 기하학적 설정은 고도로 제약되었음. 이 어려움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 있음. 실험에 대한 수학적 이론의 통제를 포기하거나(패러데이), 더욱 복잡한 수준에서지만 여전히 계산가능한 시스템 내에서 통제를 재배치하는 것(베버).

앙페르의 전자기 유도 실험

전류 요소들 사이의 힘을 수학화하는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었던 앙페르의 실험이 있음. 자석 내 분자 전류 가설은 그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는 이 전류가 비자화된 철에 미리 존재하는지 자화 과정 중에 생기는 것인지 알고자 했음. 이 목적에서 1821년 7월, 그는 구리 고리를 고정된 코일 내부에 걸고서 실험. 자석을 막대 nq와 pk 위에 올려놓고, 코일에 전지 연결. 구리 고리는 움직이지 않음. 따라서 유도 전류 없음. 앙페르는 무작위적인 방향의 분자 전류가 비자화된 철 내부에 존재한다고 추론하였고, 이 전류들의 방향성으로 자화 설명.

1822년 9월, 그는 제네바에서 강력한 자석을 가지고 실험 반복. 이번엔 '고리의 끌림과 반발'이 나타났다. 이 결과로 인해, 이 실험은 더 이상 철 내의 분자 전류의 존재를 입증하는 기능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이는 전기동역학의 근본 법칙과도 무관해 보였다. 따라서 앙페르는 이 주제를 추구할 이론적 동기가 없었다. 그는 이 효과가 지속적인지 일시적인지도 알아보지 않았고, 방향도 알아보지 않았고, 논문 출판도 안했다.

패러데이의 cut magnetic curves

자기력선은 패러데이의 circle(데이비, 스터전, 몰 등)에서 자석, 전류, 전자석의 자기력을 표상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음. 자기력(magnetic power)의 기하학적 표상을 가지고, 패러데이는 자신의 두 가지 핵심 발견, 전자기 회전과 전자기 유도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는 두 현상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축-고리 이중성을 인식했다. "전류를 유도하는 힘은 자기적 결과 또는 힘의 축에서 원주방향으로 나온다. 마치 원주 방향의 자기가 전류에 의존하여 나타나듯이 말이다."

성공의 모호성

패러데이의 성공 요인 : 그의 방법적 탐색 능력. 그는 그의 장치에 최적의 유연성 부여. 그의 실험에서 제공된 기회에 따라 각 부분은 쉽게 변경 가능. 그는 실험의 체인 또는 나무를 구성. '가까이 함께 놓여진 사실들'에 의해 그의 길을 느끼면서. 그는 기억 속에 다량의 과거 실험들 보존. 새로운 사실에 의해 설명될 실험(아라고 효과)이나 새로운 사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실험(전자기 회전). 그는 실제 실험과 가상 실험의 단순하고 정합적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그의 관점과 그의 실험 활동을 정착시켰다.

그는 실험의 설명적 기능을 방해하는 두 가지 길 피함. (1) 실용적 응용 탐구에 에너지 쏟지 않음. 그는 새로운 사실이 명백해지고 쉽게 (교실 수준에서) 재생산될 수 있으면 만족했으며, 효과적인 전동기나 발전기 개념은 다른 사람에게 넘김.(2) 이론이 연구를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 이론적 편견(유도 전류의 존재, 전기적-긴장 상태 등)들이 그의 연구 방향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들은 쉽게 교정 가능했음. 패러데이는 이러한 유연성을 자랑스러워했음. 그러면서 수학에 대해서는 가치 절하.

"나는 수학이 많은 것을 예측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도 앙페르의 이론에서는 하나 또는 많아야 두 개 정도의 독립된 사실일 것입니다. 나는 둘에 대해서도 의심합니다. 사실이 수학에 앞서 왔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전자기 회전과 자기-전기에서처럼 계산이 준비되어 있었음에도 그 사실들은 예기치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로 아라고의 현상에서처럼 사실이 알려져 있을 때에도 계산은 그것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는 데 불충분했습니다. 다른 사실이 도움을 주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전자기 회전과 전자기 유도의 일련의 실험이 끝날 때에만, 패러데이는 그 탐색 분야에 대한 종합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것을 이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그것의 능력 때문에. 그러나 그의 이론은 앙페르가 이론이라 부르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수학적이지도 않고 정량적이지도 않다. 패러데이의 이론은 열린 스킴이고, 전류의 본성은 미결정된 채 남아있다. 자기력(power)과 그것의 작용선이라는 핵심 개념도 모호한 지위를 가진다. 그것은 간편한 표현에 불과한가, 아니면 물리적 존재인가? 패러데이의 자기력선에 대한 조작적 정의만 보면 전자같지만, 두 전류 사이의 인력을 전류 측면의 자기 power를 가지고 설명하는 걸 보면 후자처럼도 보인다. 사실 이 애매성은 패러데이 연구의 본질적 특징.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를 실험적인 것으로 보존하고 자기력선에 대해 전자기의 규칙을 효과적으로 공식화한다는 점에서의 순수 도구적 의미를 보존하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기력선과 긴장 상태가 자석과 전류에 의해 만들어지는 실제 '인과의 연쇄 고리'로 강하게 의심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작용과 전기 작용이 소리나 빛의 전파에서처럼 '점전적이며 시간이 걸린다'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1832년 3월 동봉된 채 왕립학회에 전달되었다.

패러데이와 앙페르 소결

앙페르와 패러데이는 전기동력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은 공동으로 설립했다. 실험적 사실을 모으는 데 둘의 공헌은 상보적. 앙페르는 전류와 전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보였고, 자석과 전류 사이의 동일성을 보였다. 패러데이는 멈추지 않는 전자기 회전과 전자기 유도를 발견했다. 그러나 둘의 실험적 이론적 방법은 판이하게 달랐다.

앙페르는 이론 중심적. 귀납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 유비, 가상 역사, 신뉴턴주의적 수학적 통합 등의 이론적 자원을 끌어들였다. 대부분 실험은 이론적 예측을 입증하는 실험 또는 아주 제약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실험. 그 실험들은 고도로 경직되어 있었으며, 이론의 수학적 구조를 반영.

반면, 패러데이는 수학을 몰랐고, 이론적 편견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전기 및 자기 유체에 대한 뉴턴주의적 관념을 증명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고, 실험 장치를 체계적으로 변경하면서 실험의 탐색 기능을 최대화했다. 그는 닫힌 수학적 이론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신 실험적 작용과 결과들의 상호 연결을 최대화했다. 그의 전기와 자기의 내적 본성에 대한 의심은 그로 하여금 다양한 대전된 혹은 자화된 물질의 내부 구조보다 그것의 외적인 '작용'에 집중하게 했다. 실제 혹은 가상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기본적인 철학적 관념은 'power' 관념이었다. 그의 말로, 다른 힘은 다른 물질 상태(운동 상태 혹은 내부 상태)를 유도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힘의 배치였다. 소스(대전된 물체, 자석, 전류)는 그들이 만들어낸 힘(power)보다 부차적이었다.

패러데이의 실험수행의 탐색적 스타일과 그의 힘 개념에는 본질적 조화가 있었다. 힘의 배치는 일련의 가상 실험에 의해 보여질 수 있었다. 예컨대, 자기력선은 어떤 지점에 놓인 하나의 자극이 받게 될 운동을 묘사한다. 실험 설정을 반복하고 변경해가며, 패러데이는 '사실들을 함께 가까이 놓았다.' 즉 다시 말해, 실제 효과들을 힘의 배치를 결정하는 가상 실험과 연결시켰다. 예컨대, 그가 전자기 회전을 인식하게 된 것은, 도선과 자침 측면의 가상의 작용을 종이에 함께 놓으면서였다. 또 그는 도선 사이의 인력을, 전류 주위의 힘의 배치를 드러내 주는 가상 회전을 가지고 설명했다. 따라서, 탐색은 힘을 드러내거나 매핑했다. 또는 그것은 주어진 힘에 의해 유도된 새로운 종류의 상태를 찾았다. 전자기 유도를 찾을 때 패러데이가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음. 결과적으로 힘에 의한-상태-유도 구도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자, 그는 전기적-긴장 상태를 상상했다.

앙페르와 패러데이는 모두 이론적 통일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이었다. 프랑스 철학자는 작용의 다양한 원천의 내부 구조가 하나의 종류로 환원될 것이라 상상했다. 자석을 전류로 환원함으로써, 그는 전기동역학과 자기를 통합했고, 전류를 전기의 흐름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는 정전기와 전기동역학을 통합하길 희망했다(이는 이론적으로 이루어진 바가 없음). 에테르를 두 전기의 중성화된 합성물로 규정함으로써, 그는 광학과 전기동역학을 통합하길 희망했다.

반면, 패러데이는 다양한 소스에서 나오는 힘들을 동일시함으로써 통일을 달성했다. 그가 보기에, 자기 효과, 전자기 효과, 전기동역학적 효과는 모두 자기력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도출된다. 놀랍게도, 그는 전류의 측면이 자석의 극과 비슷하다는 앙페르의 주장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 주장을 통해 앙페르는 자석이 전류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함의한 반면, 패러데이는 단지 두 경우 모두에 같은 힘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했다.

이후 성숙해진 앙페르의 이론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의 이론은 명료한 수학적 언어로 쓰여 있었으며, 익숙한 뉴턴주의적 관념과 기술에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건전한 실험적 토대 위에 있었다. 요컨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논쟁적인 앙페리안 전류를 제외하곤). 반면, 패러데이의 이론은 수년간 완전히 무시되었다. 역선 자르기 규칙도 당대의 물리학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패러데이를 처음 접한 독자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에 어려워 했고, 그의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실천 방식의 본질적 정합성을 간과했다. 전자기 유도의 첫 수학적 이론은 패러데이의 관점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그 이론은 앙페르의 수학적 이론에서 출발하여 패러데이의 사실만을 함께 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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