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수송기술과 공학

읽을거리

발표문

1. 수송기술의 발달 양상

1) 전체적인 개괄

배경 : 경제적인 측면

영국의 산업혁명 태동기(1760년 경)에 주요 제조업 지역과 광산 및 원산지 사이의 교통량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도로의 수송용량 한계(좁은 도로폭)와 유지보수의 어려움(비에 의한 흙의 유실, 노면상태의 악화) 등에 대한 개선 요구가 등장했다. 그러면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도로가 체계적으로 개선, 신설, 유지, 관리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도로 분포 및 거두어들인 통행료의 규모는 당시 지역별 경제성장, 특히 직물 제조업의 발전 양상을 잘 반영했다. 미국의 경우, 초기 이주지역의 인구 증가와 경제 활성화에 따라, 가파르게 증가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해 수로 건설 등의 대안적인 기획이 등장하면서 수송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의 배경이 있겠지만,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적인 관점 하에서 전 영토를 체계적으로 잇고 관리하고자 하는 목적이 중요한 배경으로 제기된다.

발전과정

거의 모든 국가에서, 도로, 수로, 철도의 순서로 발전했다. 도로는 산업혁명 초창기, 기존의 도로를 확장, 신설, 개선, 체계적인 관리 등의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도로망 위에 역마차 서비스 ― 현재의 고속버스 시스템과 유사 ― 와 같은 공공 수송방식이 도입되어 지역간의 안정적인 수송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수로(1770~)의 경우, 기존의 강을 수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거나 아니면 여러 강들을 인공수로로 잇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수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기술적 어려움을 겪었고 완공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이는 수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이 오히려 수로 건설 시작 이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며, 반대로 보자면 수로를 건설하려는 피나는 노력 속에서 그러한 기술이 등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전 국토를 가르는 인공수로의 기획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거대 수로에 대한 경제성, 기술적 가능성, 수로의 목적을 둘러싼 큰 정치적 논쟁이 있었다.

철도(1810~)의 경우, 많은 수로들이 거의 완공될 무렵부터 등장했고, 그 이후 철도망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든 기술들은 모두 영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프랑스, 미국 등에 전파되는 순서를 따랐다.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각기 자국의 문화에 맡게 기술을 변형하여 발전시켰다.

결과 : 경제적인 측면

특히 수로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수송용량이 극대화되고 수송비용이 극히 저렴해졌다. 한편, 철도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는 수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으며 수송의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송기술의 발달은 떨어져있던 [원료지역 - 생산지역 - 시장]을 (경제적) 상호이익을 안정적으로 주는 삼각 시스템으로 엮어주었으며, 각 지역은 각각의 기능을 전담하는 지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지역간의 관계는 더 이상 고립된 지역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게 된다. 즉, 한 지역은 다른 지역 없이는 유지․발전할 수 없는 복잡한 지역간 그물망에 편입된 것이다.

한편, 지역간 소통관계가 속도와 규모 면에서 급격히 증가하면서, 국가 경제의 양상은 정적인 경제 시스템에서 동적인 경제 시스템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는 자본의 빠른 회전, 지속적인 이윤회수, 자본의 빠른 축적과 자본투자의 증가로 나타났다.

2) 국가별 추진 양상 : 영국, 프랑스, 미국

영국

개별 행위자들의 즉자적인(특히 경제적) 필요에 의해 발전한 측면이 크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에서는, 주요 제조업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의 수송기술로는 감당이 안될 만큼 수송량이 증가했다. 이렇게 발생한 ① 병목현상에 대한 감지와 ② 이에 대한 개선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기대가 바로 수송기술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수많은 수로와 철도가 각기 개별 업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수로 건설에 있어서, 많은 모험적 투자가 이루어졌는데, 큰 성공을 거둔 수로도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지를 맞추지 못하여 중도에 포기된 수로도 있었다. 이는 철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도 국가의 주도적인 개입은 없었다. 물론, 개별 기업가가 투자할 수 있는 액수에는 한계가 있고, 그러한 한계 때문에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도를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의 산업시스템은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활기 넘치는 동적인 경제시스템으로 변화했으며, 엄청난 규모의 자본축적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자면, 한 국가의 산업시스템이 중앙의 계획 없이도 합리적으로 진화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영국과 같은 상업적, 산업적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워털루 전쟁의 패배를 거치면서 국가재건 및 영토 방위의 관점에서 전 국토를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수송기술 발달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효율적인 국경 방어를 위해 요새마다 지하갱도를 통해 연결하고자 했고, 물자보급로, 부대별 행진 속도에 따른 가장 합리적인 행진경로를 찾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영토에 대한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 수송기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을 사고하더라도 직접적이고 사적인 이윤회수보다는 간접적이고 공적인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를 우선에 두었다.

프랑스는 ① 보편적 이익(general interest)를 위한 ② 국가적 규모(national scale)의 공공사업을 선호했다. 프랑스는 이를 위해 공병대를 체계적으로 재조직하고, 교육시켰다. 그것이 바로 Corps of Civil Engineers Pouts et Chaussees & Mines 와 Ecole Polytechnique academy. 그리고 이들은 전 국토를 잇는 도로, 수로 건설을 기획했다. 그러나 경제학자, 자유주의자들은 영국과 미국의 성공/실패 사례를 근거로 국가주도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반대하였고, 개별 기업들도 보조금 또는 이익보장 없이는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그럼에도, 군대는 자신들의 대규모 토목공사가 국가 전체의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고, 개별 기업가들의 개별적인 이윤 추구 행위에 대해서 감독, 통제하려 했다. 이러한 대립 구도 속에서 몇 번의 부침이 있긴 했지만, 공병대는 꾸준히 개별 기업에 대한 유인책 없이 국가적인 규모의 도로, 수로 공사를 추진했다.

공병대는 항상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방식의 설계를 선호했다. 수로에 대해서도 국소적인 독립된 수로들의 건설보다는 국토 전체의 물길을 연결하는 ― 바다 또는 큰 강과 연결되는 ― 위계적인 수로 건설을 추진했으며, 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수로(무거운 화물 운송)와 철도(가벼운 화물 운송)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공사에서는 항상 불확실성이 내재해 있었는데, Navier로 대표되는 공병대 내 과학기술자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과학이론’의 적용을 통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에 대한 기대는 공병대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공병대는 사적 기업들의 국소적․임시방편적인 방법론을 지양하고, 전체적이고 영구적으로 최적의 효율성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과학이론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을 통해 공병대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체계적인 공학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미국 1

기술 후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일단 영국 또는 프랑스로부터의 기술을 전수받아야 했다. 미국에서는 1790년대에 들어서 수로건설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한 예가 1793년 시작된 Charels와 Merrimack 강유역 수로개발 사업이다. 그러나 수로 공사는 작업을 착수한 첫해부터 각종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공사의 책임자였던 Laommi Baldwin은 두 명의 외국인(영국) 기술자로부터 도움을 청하였고, 그 중 William Weston으로부터 6주간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Weston은 정밀한 수준기를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등 각종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수로건설은 그 후 몇 해 동안이나 난항을 겪었다. 여전히 ①신속히 도랑을 파는 것(특히 나무뿌리, 바위를 만났을 때)은 힘든 일이었고, ②조언대로 만든 canal prism 구조물은 계속해서 떨어져나가거나 물에 씻겨나갔으며, ③ Weston의 수준기를 이용했음에도 측량 및 수준 맞추기는 여전히 문제였다. ④그리고, 여전히 도랑의 벽과 바닥에선 물이 샜다. 도구 또는 재료의 문제 등도 원인이었고, 미국의 인부들이 Weston의 처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도 상당히 큰 원인이었다.

계속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어려움에는 이들이 이겨내야 할 ‘물의 흐름’이라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야릇한 힘(strange force)’이 있었다. 이 야릇한 힘을 견뎌낼 수 있는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떠한 재료로 어느 정도의 정확성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으며, 가르쳐 주어도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즉, 이들은 수로 건설에 필요한 체계적인 지식도 없이, 그동안 손수 집을 짓던 본능에만 의존하여 수로 건설을 시작했다. 공사를 착수하고 오랜 기간의 고생을 겪고 나서야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지식은 과거의 본능을 확장 또는 대체하였다.

수로 건설 초창기에 기술은 몇몇 기술자의 머리에만 의존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전달은 개인적, 우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매우 불완전했다. 즉, 축적되어 전수되기가 힘들었다. 예를 들어 물에서도 풀어지지 않는 세멘트는 근대 이전에도 몇 번씩 이용되었지만, 그 재료와 비율에 대한 지식은 전수되지 않았었다. 19C에 들어서도 반복된 재발명, 반복된 실수, 정보의 유실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극복은 Erie Canal 사업과 같은 대규모의 인원이 참가한 대규모의 장기간에 걸친 건설 사업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미국 2 - 공병대의 역할

미국의 초창기 수로건설의 과정을 보면, 개별 기업들의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①영국의 장인 전통이 초창기 미국 건설업을 통합하였고, ②건설업자는 정치적 관심과 동떨어졌기 때문에(영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과 무관하게 기술은 종속), ③기술에 대한 지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으며, 프랑스의 지식은 전달되는 데에 큰 장벽이 있었다고 얘기한다. 이는 일정정도 사실이지만, 이들은 건설업에서의 공병대의 역할을 간과했다.

1802년 재조직된 공병대는 프랑스적인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프랑스 공학의 가치체계 ―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이익 추구, 공공재원을 통한 국가적인 규모의 사업 추구, 과학이론을 통한 체계적인 공학이론 추구 ― 를 그대로 전수받았다. 공병대는 프랑스 교과서의 수입, 프랑스로의 유학을 통해 이러한 가치체계를 공고히 했다.

물론 현장에서의 기술관리직은 영국의 장인 전통이 강했지만, 공병대는 수적으로 많은 토목기술자를 양성했고, 민간 기술학교에서조차 채택하게 되는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824년 미시시피, 오하이오 강 유역 수로 개발 사업은 영국 장인 전통의 민간 기술자와 프랑스 과학 기반의 공병대 기술자 사이의 경쟁과 그들의 차이를 가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 수로 사업을 둘러싸고 세 가지 논쟁이 발생했다. ①군동원과 민주주의의 문제 ②과학에 대한 신뢰성 문제 ③사업의 목적에 대한 문제가 그것이며, 세가지 지점에서 양진영은 정치파벌(National Republic & Whig vs Jacksonist)과 연계하여 팽팽히 맡섰다.

결국, 너무나 많은 예산($22 million)을 추정했던 공병대는 민간기술자들($4 million)에게 사업을 넘기게 되었는데, 몇 년 후 민간기술자들은 끔찍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사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는 공병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고 공병대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공병대가 과학을 앞세워 정밀한 예측을 하려고 했지만, 대규모 공사의 불확실성을 모두 없애진 못했다. 그들 또한 길어지는 공사기간으로 인해 재정을 소모했고, 완공 이후에도 유지 보수를 위해 계속적인 비용을 소모했으며, 재정 낭비(혹은 부정)에 대한 지적도 많이 받았다.

기술의 전달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민간기술자와 공병기술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민간 기술자들도 유럽으로부터 기술을 빌렸다. 그러나, 공병대처럼 유럽 이론에 대한 매혹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자는 추상화, 일반화는 거부하고 결과적인 방법(tip)만 배우려 했지만, 후자는 과학적 방법으로부터 보편적 정리나 광범위한 해법을 이끌어내려 했다.

한편, 공병 기술자들은 정확한 글쓰기(다이어그램, 설계도, 수학적 표기 등)와 그것의 유통을 통한 기술전달이 가능했다. 앞서 기술의 전달이 사적인 방식, 즉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전달이 불완전하다고 했지만, 공병 기술자들은 ‘쓰여진 것’을 통한 전달을 몸에 익혔다. 쓰여진 것은 말에서는 간과되었던 정보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전달 형식을 통해 공병대는 과거의 지식에 대한 손실 없이 지식의 축적. 표준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요컨대, 미국의 공병 기술자들은 민간 장인전통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가치체계와 스타일을 가지고 민간 기술자들과 경쟁하면서 미국 기술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의 가치 지향은 아직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3) 기술별

수로

수로 이용의 장점은 ①비용의 절감 ②수송용량의 극대화에 있다. 그러나 모든 수로가 그러한 효과를 살려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사례를 볼 때, 적은 비용을 들여 기존의 강을 개선하거나 강과 강을 짧은 인공수로로 연결하여 활용한 것은 큰 효과를 보았다. 특히 수로의 말단이 광산 등의 원산지와 연결된 경우에 성공적이었다. 반면, 대규모로 기획된 무모한 수로의 경우엔 대부분 수지를 맞추지 못했다. 한편, 프랑스의 국토 횡단 수로의 기획은 중간에 좌초되기도 했다.

한편, 수로는 저지대에서는 유용했지만 험준한 지역에서는 그렇지 못했으며, 광산의 모든 갱도까지 연결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지선도로, 마차, 광업용 레일(tramway) 등의 보조 수단이 필요했다. 이중 광업용 레일(tramway)은 철도의 원조가 된다.

철도

철도는 그 열차의 속도가 시속 5km/h만 넘어도 수로보다 경제적인 수단이 된다. 한편, 계절의 영향도 받지 않는 장점 때문에, 높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2. 수송기술이 잉태한 것들

1) 네트워크라는 개념 : A. Gullerme의 논의를 중심으로 =

네트워크라는 용어는 Michel Chevallier에 의해 명확한 개념 하에서 쓰여지게 되었다.(1832, 1838) 그는 네트워크를 ‘분기 가능한 항해의 경로’로 규정지었으며, 그 구성요소로서 ‘상호연결’, ‘일정한 흐름’을 제시했다. 이러한 네트워크 하에서는 ‘모든 부분이 지속적으로 항해가능’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지역간의 관계를 위계적인 구조로 엮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점차 그물망 구조로 전환된다. 지역간의 관계는 더 이상 고립된 지역들의 단순한 집합 또는 위계적인 서열 관계만으로 파악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각 지역은 다른 지역 없이는 유지․발전할 수 없는 복잡한 지역간 그물망에 편입되었고, 결국 프랑스는 강 어귀와 파리를 중심으로한 가깝게 그룹화된 도시(Hub)의 그물망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한편, 네트워크에는 ‘한계를 규정짓는 특성’이 존재한다. 소통 네트워크가 경제적 지역을 한정한다면, 지하갱도의 네트워크는 돌아다닐 수 있는 요새의 가능한 길을 한정해주며, 수도 파이프의 네트워크는 위생적인 지역은 한정해주게 된다. 한편, 요새의 네트워크는 국경을 벗어나게 그것을 확장시키면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네트워크는 “공간의 물리학”, 즉 “영토”를 구성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이론’, “영토의 한정”으로서의 ‘네트워크’ 개념은 프랑스에서만 독특하게 발전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수송기술 발전이 군사적인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 국경 방어를 위한 최적화된 지하갱도, 군부대의 최적화된 행진경로 등의 목적 속에서 추진된 영토 전체의 연결 기획이 곧 이론적인 ‘네트워크’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2) 공학과 엔지니어 : 과학적인 기술(자)의 등장

영국, 프랑스, 미국의 수송기술 발전양상에서 보여졌듯이,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체계적인 지식을 필요로 했다. 손대중, 눈대중으로 자신의 집을 짓는 수준을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전문가가 필요했으며, 수로의 건설에서와 같이 새롭게 직면한 ‘물’ 속에서의 공사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이 필요했다. 공학과 공학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했다.

본능적인 손재주를 넘어서는 전문적인 기술은 두 가지 흐름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장인 전통의 민간 기술자들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공병 기술자들의 흐름이다. 전자는 직관과 경험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 공사 현장에서 입에서 입으로 기술을 전달한다. 후자는 과학이론에 의존하여 최적의 설계를 만들어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며, 정교한 글쓰기(다이어그램, 설계도, 수학적 표기)를 통해 기술을 전달하려고 한다. 또한 전자는 좋은 해법을 찾아내고 전달하는 데에 만족한다면, 후자는 그것을 일반화, 추상화하여 보편적인 해법을 찾고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자가 실천적이라면 후자는 학구적이었다.

당시 어느쪽이 더 유능했냐고 한다면 경우에 따라 달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년간의 경험이 축적된 지식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과학이론을 실제상황에 적용하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후자의 흐름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정교한 글쓰기 문화는 지식의 축적 및 체계화를 이루게 해주었고,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은 현장에서의 학습기간을 단축시켜주었으며, 보편적인 이론 추구의 경향은 새로운 문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3) 거대 기술 시스템과 지역성의 파괴, 그리고 새로운 권력관계

수송기술이 잉태한 것 중 하나는 거대 기술 시스템이다. 이러한 거대 기술 시스템의 핵심은 ‘순환’과 ‘확산’이며, 이는 계몽주의 철학자들(튀르고, 콩도르세 등)이 바랬던 ‘진보’의 모습이었다. 튀르고는 ‘순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는 문자, 인쇄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편, 콩도르세는 역사의 발전을 ‘과학적 지식의 전지구적 확장’과 동일시했으며, ‘확산’을 중요시했다. 그는 지적 혁명의 불안정성을 얘기하면서, 그 혁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국지적, 일국적 혁명을 넘어 그것을 더욱 더 확장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즉, ‘혁명의 확산을 통한 혁명의 유지’라 할 수 있다.

계몽주의자들의 이러한 진보의 기획은 거대 기술 시스템(특히 생산 시스템보다는 연결 시스템)에 의해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 기술 시스템은 예기치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거대 기술 시스템은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며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냈다.

이의 원류를 따지자면, 계몽주의자들의 기획 내에 이미 보편성과 지역성 사이의 차별 이데올로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 기술 시스템은 그 이데올로기에 실체와 힘을 준 것이다.

더 읽을거리

1990년대 이후 사람들의 입에 가장 자주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network일 것이다. Williams의 논문과 Guillerme의 논문에서 볼 수 있지만 network은 원래 인체 생리학에 사용되던 말이었는데 18세기 계몽사조기 프랑스에서 기술로 이전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network을 얘기할 때는 동시에 circulation이 강조되었는데, 4주 reading중 하나인 Mattelart는 이를 "fetish of circulation"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기술 사상에 대한 짧지만 아주 통찰력있는 논의가 Antoine Picon, "Towards a History of Technological Thought," in Robert Fox ed., Technological Change에 있다.

18세기 프랑스 엔지니어링, 특히 Corps des Ponts et Chaussées에 대한 좋은 참고자료는 Charles C. Gillispie, Science and Polity in France at the End of the Old Regime (Princeton, 1980), ch. 7이다. Navier와 Corps des Ponts et Chaussées에 대해서는 Eda Kranakis, Constructing A Bridge: An Exploration of Engineering Culture, Design, and Research in Nineteenth-Century France and America (MIT, 1997), ch. 4-6이 좋다. civil engineering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지만 Ken Alder, Engineering the Revolution도 18세기 프랑스 엔지니어링에 대한 필독서이다. 이 책에 대한 Gillispie의 조금 비판적인 서평도 참조 할 것(T&C 39 (1998): 733-54).

프랑스 엔지니어링에 대한 논의는 Ecole Polytechnique에 대한 논의를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Margaret Bradley, "A Scientific Education for A New Society: The Ecole Polytechnique, 1794-1830," History of Education 5 (1976), 11-24가 도움이 된다. Ecole d'Arts et Métiers에 대해서는 Rod Day, Education for the Industrial World (MIT, 1987)가 있으며, Ecole Centrale의 기술교육, 특히 엔지니어에게 “기술”만을 교육시킨 프랑스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John Weiss, The Making of Technological Man (MIT, 1982)를 참조.

산업혁명 당시의 운송 시스템에 대한 그림을 곁들인 간단한 논의가 John Langton and R.J. Morris eds., Altas of Industrializing Britain (London: Methuen, 1986), pp. 80-93에 있다. 운하와 산업혁명에 대한 간단하지만 유용한 논의로는 T.C. Barker, "The Beginning of the Canal Age in the British Isles," in L.S. Pressnell ed., Studies in the Industrial Revolution (London, 1960); G.W. Crompton, "Canals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Journal of Transport History 14 (1993): 93-110이 있다. 도로 수송에 대해서는 E. Pawson, Transport and Economy: The Turnpike Roads of Eighteenth Century Britain (London, 1977)을, 철도에 대해서는 Rick Szostak, The Role of Transportation in the Industrial Revolution: A Comparison of England and France (Montreal: McGill-Queen's Univ. Press, 1991)을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