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지리학에 대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반응: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경우

PhiLoSci 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임종태, 「서구 지리학에 대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반응: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경우」,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379-419쪽. 원문 : 임종태, 「서구 지리학에 대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반응: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경우」, 『한국과학사학회지』 26 (2004), 315-344.

동양과학사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과학의 전파 및 수용에 관한 문제이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 모두 직간접적으로 서구문명과 조우하는 과정에서 근대과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외래문화와 조우하면서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외래문화가 던진 충격에 반응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외래문화를 기존의 전통 속에 위치지우는 과정에서 종종 전통 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반성이 함께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종태의 “서구 지리학에 대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반응: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경우”는 서구에서 들어온 지도에 표현된 낯선 세계관에 대한 중국과 조선 유가들의 반응을 살펴본다. 임종태는 표면적으로 무심하거나 냉담해 보였던 그들의 반응 아래에는 낯선 세계관을 전통의 틀 속으로 녹여내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동양의 세계관 또한 변화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

서구 지리학에 대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반응

17-18세기 중국과 조선의 경우


임 종 태



1. 머리말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련의 세계지도와 지지(地志)를 제작하여 유럽 르네상스 지리학의 성과를 동아시아 지식 사회에 소개했다. 그들의 세계지지에는 ‘지리상의 발견’에서 얻은 지리적 정보가 담겨 있었고, 이는 기하학적 투영법을 이용한 세계지도를 통해 시각적으로 표현되었다. 서구의 세계 표상은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와 방법 모두에서 사실상 그때까지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 새로움을 반영하듯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은 동아시아 지식 사회에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공식적인 출판 간행, 개인적 필사 등의 경로를 거쳐 널리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세계지리 문헌이 그 확산의 광범위함에 비견될 만큼 전통적 세계 표상에 변화를 일으켰을까? 지금까지 이 문제를 다룬 몇몇 진지한 연구의 결론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다. 수학적 도법을 이용한 서구 지도학은 중국의 지도 제작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선교사들의 세계 지지에 대한 중국 독자들의 반응도 대체로 냉담했다는 것이다.[1] 이러한 연구는 중국과 친예수회 계열 연구자들이 중국의 지리 전통에 미친 서구 지리학의 ‘근대적’ 영향을 과도하게 강조한 것에 비해 좀 더 사태에 근접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2] 그럼에도 서구 지리 문헌이 폭넓게 유행하면서도 별다른 지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외견상 납득하기 힘든 현상을 설명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17-18세기 중국 및 조선의 학자들과 지도제작자들은 서구 세계지도와 세계지지를 앞 다투어 읽고 베끼면서도 어떻게 그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서구의 세계 표상은 정말로 동아시아의 지리적 세계 표상에 두드러진 흔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서구 세계지리 문헌에 대한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전반적 지형을 먼저 검토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형이야말로 동아시아인들에게 낯선 외래의 세계 표상에 대한 즉각적 인상의 향방과 체계적 이해의 양상을 좌우할 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이전 연구자들에게 ‘무시’와 ‘냉담’으로 비춰진 중국과 조선 학자들의 태도란 그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공간에 서구의 세계 표상을 적절히 위치 지우는 행위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서구적 이질적 표상을 기존의 공간에 편입시키는 일은 전통 지리학의 지형에 불가피하게 어떤 변화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만약 전반적인 지각 변동은 아니었다면, 외래 지리학의 국소적인 영향은 어떤 양상을 띠고 나타났을까?[3]

2. 중국 고전 세계지리의 두 전통

중국 사회에 르네상스 유럽의 세계지도를 선보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세계지도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보고를 남긴 최초의 서구인이기도 했다. 두 문명의 세계지도에 모두 접한 그는 서구의 지도가 중국에 비해 우월하다고 확신했다. 1584년 광동(廣東)에서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제작할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 리치의 『일지』는 중국인들의 세계지도와 그에 담긴 세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대체로 세계 전반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물론 그들도 이것[서구 세계지도]과 유사하게 세계 전체를 묘사한다고 하는 지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 표현된] 세계란 그들 자신의 15성(省)에 국한되었으며 그 주위의 바다에 작은 섬을 몇 개 그려 넣고는 그들이 들은 적이 있는 몇몇 다른 왕국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와 같은 한정된 지식을 전제하면 그들이 어떤 이유로 자기 왕국을 세계 전체라고 자부하며 하늘 아래의 전부를 뜻하는 천하(天下, Thienhia)라고 부르는지 명백해 진다. … 그들에 따르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모났으며,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땅의 정중앙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 땅의 크기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한 평가로 인해 중국인들은 여러 나라들 중 오직 중국만이 경모할 만한 나라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4]
<그림 1> 유시의 “고금형승지도”. 출처: 曹婉如 外編, 『中國古代地圖集』 明代 (北京:文物出版社, 1994), 도판 139.

리치는 유럽의 세계지도를 중국에 소개하는 일이야말로 잘못된 세계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서구인들이 지닌 진리를 현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유럽적 진리’와 ‘중국적 오류’의 대립 구도를 전제로 리치는 유럽의 지리학과 우주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상의 진리인 기독교로 중국인들의 정신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졌다.

하지만 중국의 세계지도에 대한 리치의 견해는, 그가 비웃은 중국인들의 지리적 세계상만큼이나 빈곤한 견문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물론 리치가 묘사한 ‘우스꽝스러운’ 세계지도가 중국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1555년 유시(喩時)가 제작한 “고금형승지도(古今形勝之圖)”와 같은 부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지리 전통은 한 폭의 세계지도에 관한 견문으로 그 특성을 일반화시킬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았다. 리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누적되어 온 중국의 세계지리 전통은, 지상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과 그 이념적 · 문화적 지향 등의 면에서 이질적인 경향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리치의 단순한 구도를 무색케 하는 중국 세계지리 전통의 복잡한 지형은 유럽의 세계 표상이 동아시아 지식 사회에서 겪게 될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럽의 세계지리가 수용되는 과정은 곧 그것이 전통적 요소와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전통적 세계지리의 내부 지형이 복잡했다는 것은 곧 그 관계 맺음의 방식 또한 그리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중국의 세계지리 분야 내의 가장 두드러진 균열은 유가(儒家) 지식인들이 그 정당성을 인정한 ‘정통적 지리학’과 그들이 불신한 ‘비정통적 지리학’ 사이에서 나타난다.[5] 이러한 분열은 이미 한대(漢代)의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지적되었다. 장건(張騫)의 서역 원정을 기록한 『사기(史記)』 “대완열전(大宛列傳)”에서 그는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문헌에 담긴 기이한 견문이 사실인지 회의했으며,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서는 중국을 지상 세계의 81분의 1이라고 주장한 제나라 추연(騶衍)의 대구주(大九洲) 학설에 대해 “과장되며 정도에서 벗어났다”[閎大不經]고 비판했다.[6] 반면 그는 중국의 구주(九州)를 산천의 형세로 구분하고 각 지역의 중요한 자연적 특징, 토산, 도로 등을 기록한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기술이 사실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추연의 세계상과 『산해경』의 지리학에 대한 사마천의 비판적 태도는 이후 유가 지식인들의 공통된 견해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태도는 한대(漢代)에 제기된 우주론 학설 중 하나였던 『주비산경(周髀算經)』의 개천설이나 훗날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세계상에도 적용되었다. 물론 『산해경』, 추연의 학설, 불교의 세계상이 동일한 지적 전통을 이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각각은 지상 세계의 구체적 모양을 달리 설명했고 그에 담긴 종교적 · 이념적 지향 또한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비정통적 지리학’으로 정당하게 묶일 만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우선 이들 전통은 지상 세계의 외연을 중국과 주변의 친숙한 외이(外夷)들로 구성된 ‘직방세계(職方世界)’를 넘어 무한히 확장시키고는 그 전체를 아우르는 우주지적(宇宙志的, cosmographical) 표상을 추구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추연의 지적 야심은 “바다 너머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구주(九州)가 아홉이 모여 실제의 구주를 이루며 그 주위를 ‘비해(裨海)’가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구주가 또 아홉이 모여 ‘대구주(大九州)’를 이루며 하늘과 맞닿은 ‘대영해(大瀛海)’가 그 바깥을 두르고 있다.[7] 훗날 불가(佛家)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의 주위를 네 개의 커다란 대륙이 두르고 있고 중국은 남쪽 대륙인 섬부주(贍部洲)의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했을 때, 주희(朱熹)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추연과 불교의 세계상이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8]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야심은 종종 세계의 크기를 ‘측정’하려는 시도로 표현되었다. 『산해경』에 따르면 우(禹)임금은 수해(豎亥)에게 지상 세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걷게 했는데, 그 결과는 5억10만9천8백보였다. 비슷한 설화가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地形訓)”, 『하도괄지상(河圖括地象)』, 『주비산경(周髀算經)』 등 한대(漢代)에 등장한 다른 우주론 · 지리 문헌에도 그 구체적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며 반복되었다.

세계의 팽창은 곧 중국의 지리적 비중이 작아짐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들 문헌은 대개 중국을 세계의 주변에 위치시켰다. 추연(騶衍)이 세계의 중심을 어디로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분명 중국은 아니었다.[9] 훗날 『하도괄지상』에서는 『산해경』의 선계(仙界) 곤륜산(崑崙山)이 추연의 81분된 세계의 중심으로 묘사되었으며 중국은 그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다고 서술되었다.[10] 한대(漢代) 개천가(蓋天家)의 대표적 문헌인 『주비산경』도 중국을 세계의 주변으로 본 점에서는 같았다. 하늘과 땅을 평행한 볼록 면으로 본 이 문헌은 북극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천문 좌표계를 설정함으로써 周나라의 천문대를 주변으로 밀어냈다. 후한(後漢)의 주석가 조상(趙爽)은 이를 근거로 동서남북의 구분이 관측자에 대해 상대적임을 주장했다.

북극이 하늘의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동서남북이라는 것에는 고정된 장소가 있지 않다. 각각 해가 뜨는 곳을 동쪽으로 삼고, … 해가 지는 곳을 서쪽으로 삼[을 뿐이다] … 내가 있는 곳은 북극의 남쪽으로서 천지의 중앙은 아니다. 나의 동서(東西)는 천지의 동서(東西)가 아니다.[11]
<그림 2> 조선 후기의 원형천하도 (영남대학교 소장)

물론 해내(海內), 해외(海外), 대황(大荒)으로 이어지는 『산해경』의 지리적 구도는 중국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중국을 주변화 시키는 흐름에서 예외로 보인다. 이는 『산해경』을 토대로 제작된 조선 후기의 이른바 ‘원형천하도(圓形天下圖)’에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산해경』 또는 조선 후기의 ‘천하도’를 중화주의적 세계상의 표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12] 일단 『산해경』이 추연이나 불가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외연을 크게 확대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직방세계의 영역을 왜소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의 형승도와 비교할 때 천하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히 축소되었다. 게다가 『산해경』의 광대한 공간에는 유가의 중화주의적 상식을 위협하는 ‘기이한’ 존재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중국 주변의 비교적 좁은 세계 바깥에는 대인국(大人國), 일목국(一目國), 여인국(女人國) 등 기괴한 모습을 가진 괴물과 색다른 풍속을 지닌 이족(異族)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이렇듯 상식을 넘어서는 존재들은 빈번히 동경의 대상인 불사의 존재들로 그려졌다. 훗날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는 하지만 『산해경』의 ‘서왕모(西王母)’는 범의 이빨과 꼬리를 지닌 괴물의 모습이었다. “동굴에 살며 흙을 먹고 남녀의 구분이 없으며 죽어도 심장이 썩지 않아 120년 뒤에는 다시 살아나는” 무계국(無䏿國) 사람들은 유교적 예악문물을 비웃는 불사의 종족이다.[13] 그 외에도 『산해경』에는 직방세계의 외부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이나 곤륜산(崑崙山), 봉래산(蓬萊山) 등 하늘과 소통하는 선계(仙界)를 배치했는데, 이와 같은 우주적 장소는 세계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묘사되곤 했다. 『회남자』 “지형훈”에 따르면 남방의 ‘도광(都廣)’ 땅에 ‘건목(建木)’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이는 “뭇 신들이 오르내리는 곳이요, 해가 남중할 때 그림자가 없으며, 소리쳐도 메아리가 없는” 천지의 중심이었다.[14]

실제로 광대한 공간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이물(異物)들은 유교 문명을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이용되었다. 예를 들어,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의 저자는 광대한 세계와 왜소한 중국을 비교함으로써, 중국에서만 통용되는 유교적 가치를 상대화시키려 했다. 가을 홍수에 물이 불어난 황하를 보고 “천하의 좋은 것들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자만하는 황하의 신 하백(河伯)은 곧 자신을 천하의 유일한 문명이라고 자부하는 주(周)나라의 유교 문명을 상징한다. “우물 안 개구리”와 “여름 벌레”와 같은 소견을 지닌 하백에게 북해(北海)의 신은 드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황하에 비해 넓은 북해조차도 천지에 비하면 미미할 뿐인데, 하물며 사해(四海) 안의 중국은 “커다란 창고 안의 곡식 알갱이”에 불과하지 않겠는가?[15]

합리성과 상식을 대변하는 유가(儒家) 지식인들이 이렇듯 황당무계하고 불온한 전통에 비판적이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후한의 왕충(王充)은 『산해경』이나 『회남자』에 등장하는 신화의 불합리함을 체계적으로 비판했으며, 합리적 논증을 통해 추연의 대구주(大九州) 구도가 지닌 모순을 부각시켰다.[16] 하지만 이러한 공세적 비판은 흥미롭게도 유가 지식인의 일반적 태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체로 『산해경』의 괴물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마천의 예를 따라 그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회피하려 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태도는 『장자』 “제물(齊物)”편의, “성인(聖人)은 육합(六合)의 바깥에 대해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聖人六合之外, 存而不論)는 경구로 표현되었다.[17] 상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논의의 불가지론적 유보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고” 심신일용(心身日用)에 대한 ‘근사(近思)’를 중시했던 공자의 태도와도 합치한다고 생각되었다.[18]

이와 같이 신중한 태도를 반영하듯, 유가가 승인한 ‘정통적 지리학’은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겠다는 야심을 추구하지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사서(史書)에서 기틀이 세워진 ‘정통적’ 세계지리는 단지 중국이 경험한 세계만을 대상으로 했다. 예를 들어, 사서(史書)의 ‘외이전(外夷傳)’의 서술 범위는 해당 왕조의 치세에 중국과 교류했던 나라들로 한정되었다. 시대가 흘러 중국의 대외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외이전’에 포함된 나라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야심이 없었던 정통 지리 문헌의 저자들은 하늘과 우주에 관련된 지식을 지리적 세계 표상에 도입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은 지명의 연혁, 자연 환경, 문화와 풍속 등 순수한 사실 기술에 치중했다. 물론 유가(儒家) 전통에서 우주지(宇宙志)를 추구하는 경향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 편은 주공(周公)의 도읍지인 낙읍을 해 그림자 측정을 통해 세계의 지리적 중심으로 확정하고는 그곳이야 말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사계절이 교차하며 음과 양이 화합하는” 세계의 우주적 중심이라고 선언했다.[19] 또한 『상서(尙書)』 “우공(禹貢)”의 ‘오복(五服)’과 『주례』 “직방씨(職方氏)”의 ‘구복(九服)’은 천자의 도읍을 중심으로 제후들이 통치하는 영역을 거쳐 야만의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중화주의적 세계 질서를 방형의 구도에 표현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지지(地志)와 지도(地圖) 제작 전통에 긴밀하게 맞물려 들어가지 못했다. “대사도”와 “우공”이 지닌 공식적 권위는 분명했으나 그것은 천문학적으로 불충분했고 또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지도와 지지 제작자들에게 지상 세계의 모양이나 그 속에 존재하는 나라들에 관한 어떠한 구체적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보자면 정통 지리학의 우주론적 소극성은 중화주의적 세계상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했다. 유가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지상의 유일한 문명인 중국과 그에 정치적․문화적으로 복속하는 주위의 ‘이적(夷狄)’들로 구성되었다. 요컨대 중화주의적 세계상에서 유의미한 천하란 중국 및 그와 교류하는 외이(外夷)들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 바깥에

<그림 3> 송대의 석각 “화이도”(위)와 “우적도”(아래) (1136)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포함하여, 중국과 적절한 방식으로 교류하지 않은 나라들은 중화주의적 세계지리의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명말(明末)의 백과사전 『도서편(圖書編)』에 수록된 지지(地志)의 저자는 절역(絶域)을 서술에서 배제하면서 “저 대황(大荒)․절막(絶漠)의 험한 곳은 지기(地氣)가 나쁘고 인성(人性)이 흉포하여 사람이 거할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 땅의 존재 여부란 진실로 중하지 않다”고 언급했다.[20] 서술에 포함된 나라들의 경우에도, 각 나라들이 언제 입공(入貢)했으며 이후 중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등의 내용이 부각되었다. 외이(外夷)들은 중국과의 관계 하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비정통적 지리학 내에 다양한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듯이, 중화주의적 세계상을 공유하는 세계지리의 경우에도 그 안에는 표현 방식이나 지향이 다른 흐름들이 확인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바로 송나라 때에 한 비석의 양면에 새겨진 두 지도, “우적도(禹跡圖)”와 “화이도(華夷圖)”이다. 앞의 것이 한 칸이 100里에 해당하는 방형 격자 위에 세계를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학적’ 지도였다면, 그 지도학적 정밀성의 면에서 한참 떨어지는 뒤의 지도는 중국과 그를 둘러싼 이적들로 구성된 중화주의적 세계를 표현한 ‘문화적’ 지도였다.

중국에서 “우적도”와 같은 정밀한 지도 제작의 전통은 기원후 3세기의 지도제작자 배수(裵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지 않는 “우공지역도(禹貢地域圖)”에 붙인 서문에서 그는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6가지 방법을 제안했으며, 그 중에는 현대 지도학의 축척과 유사한 ‘분율(分率)’과 “우적도”에서도 사용된 방형 격자 좌표계, ‘준망(準望)’이 포함되었다.[21] 배수의 지향을 이은 지도는 이후로도 계속 제작되었다. 특히 당나라와 원나라 때와 같이 중국이 외부 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시기에는 가능한 한 더 넓은 세계를 수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당나라의 가탐(賈耽)이 제작한 가로 30척, 세로 33척의 “해내화이도(海內華夷圖)”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가 1촌(寸) 100리(里)의 방형 격자를 이용했음을 감안하면, 이 지도는 당시까지 알려진 지리적 세계 전체를 포괄했다고 볼 수 있다.[22]

하지만 중화 세계의 지리적 판도를 수학적으로 엄밀한 방법을 통해 표현하려는 시도에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지도가 포괄하는 지리적 외연의 확장은 중국의 ‘성교(聲敎)’가 미치는 장대한 범위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먼 나라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지도의 정밀성을 희생시켜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나라 가탐의 세계지도는 외국에서 온 사절들을 탐문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원대(元代)의 탁월한 지도학자 주사본(朱思本)은 그러한 정보의 신뢰성에 대해 회의했고 그 결과 절역(絶域)에 대한 지도학적 묘사는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입장을 피력했다.

무릇 창해(漲海)의 동남쪽과 [고비] 사막의 서북쪽에 있는 여러 번국(蕃國)과 이역(異域)은, 비록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기는 하지만, 거리가 아득히 멀어 계고(稽考)할 근거가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해 말하는 자는 상세할 수가 없으며, 상세한 것은 신뢰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류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23]

이러한 신중론은 일단 지도가 포괄하는 세계의 범위를 사실적 정보가 충분한 영역으로 한정시키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실제로 주사본의 『여도(輿圖)』는 몽고나 중앙아시아 이상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24] 결국 수학적 지도 제작의 전통에는 그것이 표현하고자 했던 중화주의적 세계상과 엄밀한 지도제작의 이상 사이에 해결하기 어려운 긴장이 존재했다. 조선 태종 연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1402)는 방형 격자로 대표되는 지도학적 엄밀성의 기준을 부분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그 긴장을 해결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4세기 원나라 때에 제작된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등을 저본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 지역의 정보를 보충한 것으로서, 원나라의 거대한 판도와 활발한 대외 교류를 반영하듯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까지 포괄한다.[25]

<그림 4>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1402) 채색필사본, (일본 龍谷大學 소장)

하지만, 중화주의적 세계상의 표현이라는 목적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타협조차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과연 중화주의적 세계질서에서 ‘문화적’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수많은 나라들에 그처럼 많은 공간을 부여할 가치가 있는가? “우적도”의 반대편에 새겨진 “화이도”는 바로 지도학적 엄밀성의 요구를 극단적으로 무시하면서 중화주의적 세계상을 부각시킨 사례였으며, 이는 마테오 리치가 언급했던 형승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이도”와 형승도의 제작자는 지도의 대부분을 중국에 할애한 뒤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빽빽한 주석을 달고, 알려진 세계의 나머지는 그 주위의 좁은 여백에 나라 이름과 간단한 특기사항 만을 기록한 채 밀어 넣어 버렸다. 이는 명백한 지리적 왜곡이었지만 달리보자면 중화와 그 바깥 세계 사이의 문화적 위계를 오히려 더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효율적 방법이었다. 게다가 형승도의 좁은 여백은 역설적이지만 그 가능성의 면에서 어떠한 사실주의적 지도가 표현한 것보다도 더 넓은 공간이었다. 지상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할 의무를 벗어버린 지도제작자들은 그 공간에 포괄될 외이(外夷)의 범위를 자신의 야심에 따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다. 형승도의 동남쪽 바다 여백에 『산해경』의 몇몇 괴물 나라들이 포함된 것이 형승도의 가능성과 제작자의 자유로움을 드러내 주는 좋은 예이다.[26]

정통적 세계표상에 속하는 형승도에 『산해경』의 지명이 편입된 사실은 세계지리의 두 전통을 절충하거나 종합하려는 시도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앞서 보았듯이 유교 지식인들은 『산해경』이나 추연의 전통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존이불론(存而不論)’의 태도는 비록 비정통적인 지리학의 지적 · 윤리적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식의 주변부에 존립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는 관대한 처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교 지식인들은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기이한 견문이나 광대한 세계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컨대 주희는 공자가 논의를 회피했던 귀신을 비롯하여 여러 기이한 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했는데, 이는 그가 음양오행이나 기(氣)와 같이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7] 형승도가 『산해경』의 지명을 채용한 일은 비정통 지리학의 요소를 유가적 세계상에 포괄함으로써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유가적 표상을 추구한 흔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편입된 괴물 나라의 수에서도 드러나듯 『산해경』에 대한 형승도 제작자의 태도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직방세계의 외연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려는 유교 지식인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산해경』은 여전히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세계에 대한 잘못되고 유치한 표현으로 간주했던 형승도의 이면에는 이렇듯 중국 세계지리 전통의 복잡한 역사와 세계 표상의 적절한 방식을 둘러싼 유교 지식인들의 복합적인 고려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는 16세기 말 소개된 서양의 세계 표상에도 적용될 것이었다.

3. 서양 세계지리 문헌과 추연 ‧ 『산해경』의 전통

17세기 이래 선교사들의 세계지리 문헌에 접한 중국과 조선의 유교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그것이 추연(騶衍) 및 『산해경』의 전통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은 지구설과 오대주의 구도를 통해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 표상을 제시했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지구설을 매개로 지리학과 천문학 · 우주론을 체계적으로 결합시킨 우주지적 지도와 지지를 선보였다. 18세기 초 서양식 천문도와 세계지도의 모사를 주도했던 조선의 최석정(崔錫鼎)은 서구 세계지도의 이러한 특징이 “평면으로 모난 땅을 표현하고 중국의 성교(聲敎)가 미치는 곳까지” 만을 묘사한 종래의 지도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서구의 세계지도에 대해 “굉활교탄(宏濶矯誕)하며, 황당무계하고 정도에 벗어났다”는 평가를 내림으로써 추연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를 반복했다.[28]

더욱이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에는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기이한 견문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유럽인들의 항해를 통해 직접 경험한 것은 물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화나 성서의 기사(奇事)들, 심지어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같은 중국 문헌에서 빌려온 내용이 섞여 있었다.[29] 이로 인해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은 중국의 지괴(志怪) 문헌과 곧잘 동일시되었다. 청대(淸代)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자는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神異經)』에 나오는 거인 부부의 설화가 페르비스트의 『곤여도설(坤輿圖說)』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소개된 로도스[樂德] 섬의 청동거인과 흡사하다는 점을 비롯하여 두 문헌 사이에 몇 가지 비슷한 기사가 등장함을 지적했고, 이는 선교사들의 기록이 중국의 문헌을 표절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으로까지 이어졌다.[30]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을 풍문으로만 전해들은 사람이 이를 추연의 학설이나 『산해경』의 전통과 혼동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18세기 중반 조선 학계에서 주변부에 속했던 호남 지방의 학자 위백규(魏伯珪)가 좋은 예이다. 그는 자신의 우주지(宇宙志) 『환영지(寰瀛誌)』 초입에 방형으로 변형된 ‘원형천하도’를 “마테오 리치 천하도”(利瑪竇天下圖)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지도를 ‘마테오 리치 대구주도(利瑪竇 九九州圖)’라고 부르며 “비해(裨海)가 구주(九州) 바깥에 있다”는 추연의 학설과 연관지었다. 훗날 알레니의 세계지리서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실제로 접하고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추연의 세계상과 서양의 지리 지식이 유사하다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다.[31]

서양의 세계지리와 비정통적 지리학 사이에는 그 이념적 지향에서도 유사하게 비칠 만한 점이 많았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자신의 지리 문헌을 통해 중화주의적 세계상을 비판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땅은 둥글기 때문에 그 표면에는 중심을 정의할 수 없으며, 중국은 세계를 이루는 다섯 대륙의 하나인 아시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선교사들의 학설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는 『장자』와 추연이 세계의 광대함을 강조하며 중국의 왜소함을 부각시킨 것과 흡사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직방외기』와 같은 지지를 통해 고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문명의 역사를 부각시킴으로써 기독교 유럽 중심의 세계상을 제시했다.[32]

선교사들이 자신의 세계지지와 비정통적 지리학을 동일시하는 중국 사대부들의 태도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산해경』과 같은 문헌이 사대부들에게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몇몇 표면적인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지리가 『산해경』의 전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자신했다.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세계 표상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지식에 근거했다.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의 서문에서 리치는 자기 지도에 담긴 지리적 정보가 자신을 포함한 유럽 사람들의 실제 항해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중국으로 오는 긴 항해 중에 자신은 “삼수국(三首國), 후안국(後眼國), 불사국(不死國)”과 같은 기괴한 민족을 본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33] 그는 땅이 둥글다는 것도 자신의 천문 관측을 통해 직접 확인한 명제라고 주장했다.

또 내가 태서(太西)로부터 바다를 항해하여 중국에 들어오는 길에 … 남쪽으로 대랑봉(大浪峯,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에 이르러서 남극고도가 36도인 것을 보았는데, 대랑봉(大浪峯)은 중국과 서로 위아래로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때에 나는 하늘을 위로 우러러 보았을 뿐 그것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땅의 형체가 둥글고 주위에 모두 사람이 산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34]

항해 경험과 서양 천문학의 정교함에 호소하여 자신의 지도를 『산해경』과 구분 지으려는 리치의 전략이 나름의 설득력을 지녔음은 분명하다. 서양 천문학의 우수함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사대부들도 대개 인정하는 바였고, 특히 17세기 중반을 거치며 중국과 조선이 서양의 시헌력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서양 천문학의 후광만으로는 『산해경』의 전통에서 발산되는 불온한 친화력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아예 서양 천문학을 불신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세계지리 지식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천문학과는 달리 서양 지리 지식의 진위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자명한 이유 때문이었다. 강희(康熙) 연간의 성리학자 이광지(李光地)는 서양 천문학과 지구설의 정확함에 대해서는 신뢰했지만, 세계 각지에 대한 지리적 기록에는 허황된 내용이 많다고 평가했다.[35] 이러한 태도는 비슷한 시기 조선의 최석정(崔錫鼎)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서양의 천문도를 “천상(天象)의 진면(眞面)을 얻었다”며 극찬한 그가 세계지도에 대해서는 앞서 보았듯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지식에 대해 유교 지식인들이 전통적으로 보여 왔던 신중한 태도와 같았다. 문제는 이들이 서양 세계지리 지식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를 전적으로 폐기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최석정의 말처럼 서양의 학설이 “비록 굉활교탄(宏濶矯誕)하며 황당무계하고 정도에 벗어난 것”은 틀림없으나 “그 학술이 전수된 것에 경솔히 폐기할 수 없는 바가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남겨서 기이한 견문을 넓히는 것”이 유자(儒者)의 적절한 태도일 것이었다.[36]

서양 세계지도의 간행을 주도했던 최석정의 유보적 태도를 통해, 우리는 17-18세기 서양 세계지도의 유행을 당시 지식인들이 그것을 승인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삼재도회(三才圖會)』와 『도서편(圖書編)』 등 명나라 말의 백과사전과 『방여승략(方輿勝略)』 등의 지리서에 리치의 지도가 소개된 것은 당대 지식사회에서 리치의 지도가 누린 인기를 반영하지만, 이들 문헌에서 리치의 지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면 저자들이 그것을 세계에 대한 참된 표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는 없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리치의 지도는 이들 문헌에 포함된 유일한 세계지도가 아니었다. 『도서편』의 경우 세계지도로 볼 수 있는 것이 5종이 실렸는데, “여지산해전도(輿地山海全圖)”(권29) 등 도법을 달리한 리치의 지도가 세 편, 불교적 남섬부주(南贍部洲) 지도인 “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권29), 중국의 역사와 문물을 표현한 형승도 계통의 지도 “고금천하형승지도(古今天下形勝之圖)”(권34)가 그것이다. 편찬자 장황(章潢)은 세계상이나 도법에서 서로 모순되는 이들 지도 중 어떤 것이 세계에 대한 옳은 표상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리치의 지도가 옳고 나머지는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도서편』이 고래(古來)의 학설과 도적(圖籍)을 분류하여 정리해 놓은 공구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황은 자신이 선택한 지도 모두가 학자들의 공부에 나름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해화이총도(四海華夷總圖)”의 도설 끝에 장황은 황당한 내용이 담겨 있는 이 지도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지만 세계가 무궁함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점은 있다고 평가했다.[37] 리치의 세계지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장점이 지적되었다. “여지산해전도”의 서문(敍文)에 따르면 이 지도는 세계가 유한하며 그 전체를 하나의 지도에 포괄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지도들과 함께] 보존하여 고찰해 볼 만 했다.”[38] 리치의 지도는 세계에 대한 한 가지 ‘개연적’ 표상으로서 다른 지도들과 병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석정과 장황의 태도는 그래도 서양 세계지도에 대해 우호적인 편에 속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기독교에 대한 중국과 조선 사대부들의 인식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기독교 선교와 중화주의 비판의 메시지가 담긴 서구 세계지리 문헌의 불온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로마 교황청과 강희제 사이의 전례 논쟁 이후에 편찬된 『명사(明史)』,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 『사고전서』 등의 문헌과 18세기 중반 이래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조선 반서학론자(反西學論者)들의 논의에는 선교사들의 세계지리 문헌과 비정통적 지리학 사이의 유사성이 부정적인 논조로 강조되었다. 『황조문헌통고』의 편찬자는 서양 세계지리의 황당무계함 뿐 아니라 그에 담긴 반(反)중화주의적 요소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천리 가량의 땅[마젤라니카를 말함]을 하나의 대륙으로 이름 짓고, 중국 수만 리의 땅도 하나의 대륙이라 하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다. 그 망령됨과 오류를 굳이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이다. 또한 그가 스스로 서술한 바, 자기 나라의 풍토(風土), 물정(物情), 정교(政敎)에 오히려 중국이 따라잡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말은 비록 황당하고 아득하며 조리가 없지만, [그 곳의] 물과 땅이 기이하고 사람의 품성이 질박하여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오대주의 학설에 있어서는, 그 말이 과장되어 믿기 어렵다.[39]

서양 오대주(五大州) 구도의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은 18세기 초 조선의 서학비판가 신후담(愼後聃)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의 비판은 『산해경』이나 추연의 전통에 대한 유교 지식인들의 불신이 선교사들의 세계지리에 전이된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다.

또 천하의 무수한 구역으로서 직방씨(職方氏)가 기록한 곳 바깥의 먼 바다와 막막한 변두리에 있는 것들은 거리가 아주 멀어 육지나 바다로 통하지 못하므로 비록 기이한 형상의 나라가 그 가운데 흩어져 있다고 해도 실제로 가서 그 실상을 징험(徵驗)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군자에게는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아야 할 일이다. 저 서양의 선비들이 비록 멀리 유람하는 데 뛰어나다고 해도, 반드시 천지 사방의 끝까지는 가지 못했을 것이므로 바다 가운데 있는 여러 나라들에는 널리 이르지 못한 곳이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이목(耳目)이 미치는 것을 근거로 구구히 나누어 기록하여 다섯 대륙을 지정하고는 오만하게도 자신이 천하의 모든 곳을 다 보았다고 하니 그 견식이 어찌 그리도 작은가.[40]

애초에 리치는 서구의 우월한 지리학이 중국의 유치한 지리학을 대체할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사태는 도리어 서구의 세계지리 지식이 중국 지리학 내부의 균열되고 긴장된 공간에 포착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7-18세기 서구의 세계지리 지식은 대체로 추연이나 『산해경』 등의 비정통적 경향과 등치되어 지식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중국의 공식 문헌은 선교사들의 세계 표상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대다수 사대부들은 선교사들의 지리학 속에 담긴 이념적 불온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구의 세계 표상이 지닌 힘이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았다. 외래의 지식은 중국 지리학의 지형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4. 변  화

당시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선교사들의 세계 표상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외래의 지식이 추연 및 『산해경』의 전통과 유사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선교사들을 신뢰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둘 사이의 연관이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거나, 그 연관에 도리어 긍정적인 함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조선에서 서양의 천문지리학을 옹호한 대표적 인물 김만중(金萬重)은 서구식 세계 표상이 추연 및 불가의 세계상과 유사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후자가 “유치한 소견을 계몽하기 위한” 우언(寓言)이었다면, 서양의 지구설은 “그 이치와 술법이 확실”하여 세계의 “참모습”[眞境]을 알려주었다.[41] 흥미로운 점은 김만중이 서양의 지리학설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면서도, 추연과 불가의 세계상이 지닌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학설들이 사람들에게 세계가 광대함을 깨우쳐줌으로써 적어도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좁은 소견을 계몽하는 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선교사들의 지리학설에 대한 신뢰가 그와 연동된 비정통 지리학으로까지 전이되는 사례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리치의 남경판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1604년 무렵 간편한 책자로 제작한 귀주 태수 곽청라(郭靑螺)는 리치와 추연을 아마도 가장 우호적인 방식으로 연결시킨 인물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추연과 『산해경』의 학설은 사마천 등에 의해 터무니없다고 매도당했지만, “그로부터 4천년 뒤 태서국의 리치가 ‘산해여지전도’를 가지고 중국에 들어와 … 사람으로 문헌을 증명”했다. 한마디로 리치는 추연 학설의 부활을 도운 “추연의 충신(忠臣)”이었다.[42] 18세기 후반 조선의 학자 이종휘(李種徽)는 추연과의 유사성에서 우러나오는 리치 지도의 매력에 깊이 끌렸다. 그 두 학설은 지리적 구도에서 뿐 아니라 ‘인의절검(仁義節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녔다. 이를 근거로, 그는 리치의 학설이 중국에서는 2천 년간 전승되지 못한 추연의 학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43] 결국 곽청라와 이종휘는 서양 천문 지리학의 도래를 이제껏 지식의 주변부에서 숨죽이고 있던 비정통적 지리학을 재평가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서양 과학 덕에 그 지위가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문헌은 『주비산경(周髀算經)』이었다. 이지조(李之藻)와 매문정(梅文鼎) 등은 이 문헌에서 서양 지구설을 예견하는 여러 단편들을 확인하고는 중국 고대 우주론의 정전으로 격상시켰다.[44] 『주비산경』의 파격적 신분상승은 그 이전에 비슷한 대접을 받았던 추연의 지위도 어느 정도 제고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청대의 천문학자 강영(江永)은 『주비산경』을 추인한 이후, “전국시대 추연(鄒衍)이 구주의 바깥에 대영해가 있어 그를 두르고 있다고 말한 것도 『주비산경』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추론했다.[45]

그러나 추연과 리치를 구체적인 학설에서까지 동일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천문 지리학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둘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만중에게서 드러나듯 추연은 학설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그 장대한 상상력 그리고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지적 야심으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호소했던 듯하다. 실제로 17-18세기 일군의 학자들은 이제껏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추연의 지적 야심을 성취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웅명우(熊明遇), 방이지(方以智), 유예(游藝), 게훤(揭暄) 등 명말 일군의 자연철학자들, 그리고 김석문(金錫文), 정제두(鄭齊斗), 서명응(徐命膺) 등 18세기 조선의 우주론자들이었다.[46] 그들에게 이렇듯 ‘과장되고 정도에서 벗어난’ 시도를 감행할 용기를 준 것은 바로 서양 과학 지식이었다. 선교사들은 이전 중국의 유교 전통이 넘보지 못하던 지식을 그것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보여주었다. 우주의 구조에 대한 구중천(九重天) 학설, 지상 세계의 모습과 주요 기상 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는 지구설, 세계 만국을 포괄하는 오대주의 구도와 세계지도는 이전 『산해경』, 『회남자』 등 비슷한 스케일을 지닌 문헌들과는 달리 정교한 천문 관측과 항해 경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양의 천문 지리학은 유가(儒家) ‘실학(實學)’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이전까지 ‘허학(虛學)’의 근원으로 간주되던 추연의 상상력이 서양의 과학 지식과 결합되어 이제는 유가의 영역으로 편입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지식 체계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뒷받침할 서양 학설의 전래가 맞물려 17-18세기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종류의 세계지도와 세계지지가 등장했다.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유가적 세계 표상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이러한 시도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게 된 이들의 지리적 표상에는 천문학과 우주론의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전체적으로 우주지적 특징이 강화되었다. 둘째, 이들은 그때까지 중국이 경험한 세계에 국한되었던 중화주의적 세계 표상을 지상 세계 전체로 확대하려 했다.

1) “유교적 우주지(宇宙志)”

선교사들은 서구 과학이 지닌 매력을 무엇보다도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을 하나의 이론 틀에 포괄해 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분야들이 별개의 전통으로 갈라진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과 대비시켰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알레니의 『직방외기』, 페르비스트의 『곤여도설』 등 선교사들의 세계지도와 지지는 예외 없이 그 초두에서 천구와 지구가 이루는 기하학적 동심 구조로부터 지상 세계의 여러 기상학적 현상과 지도 제작의 원리 등이 말끔히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구 과학의 이러한 특징이 유교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동아시아 전통에서 천문학, 지리학, 우주론 등의 분야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은 틀림없으나,[47] 적어도 원칙적인 차원에서 세계를 이루는 세 요소인 하늘,

<그림 5> 『三才一貫圖』 (1722)에 수록된 “天地全圖”

땅, 인간의 문명이 동일한 원리에 포괄된다는 믿음은 유교 지식인들의 사유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17세기 서양 과학의 도래는 일부 지식인들에게 천(天), 지(地), 인(人)의 원리적 통일성이 이제는 전문 과학의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될 조건이 갖추어졌음을 뜻했다. 18세기 초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책 『삼재일관도(三才一貫圖)』에 실린 “천지전도(天地全圖)”는 우주의 통일성에 대한 유교적 믿음이 서구 과학을 재료로 하여 표현된 좋은 사례이다. 엉성한 서구 세계지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구들이 둘러싼 이 우주도는 지구와 천구가 이루는 기하학적 동심구조를 바탕으로 천(天), 지(地), 인(人)의 세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된[三才一貫] 유교 성리학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48] 그러나 서구 과학이 동아시아의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 분야에 가한 ‘구심적’ 충격은 말 그대로 충격에 그쳤을 뿐, 그 반향의 구체적 양상을 규정하는 데까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과연 무엇이 ‘삼재(三才)’를 유기적으로 연관시켜주는 원리일까? 동아시아의 지식인 대다수에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나 기독교 창조주의 섭리가 아니었다. 『삼재일관도』보다 반세기 앞선 시대의 중국학자 유예(游藝)와 게훤(揭暄)은 그것을 우주적 기(氣)의 운행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천문·지리학, 자연철학 지식을 기(氣)와 음양오행 등 성리학의 개념 틀과 종합하는 지적 프로그램을 진행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림 6>의 우주도는 그들의 작업을 대표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하늘과 땅의 전체적 구조를 분명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받아들인 서구 과학—구체적으로는 티코 브라헤의 우주구조—의 영향을 반영한다. 하지만 지구로부터 항성에 이르기까지 천체들의 배열 방식을

<그림 6> 유예와 게훤의 우주. 游藝, 『天經或問』 後集, 四庫全書存目叢書 제55책, 372쪽.

제외한다면 이 그림에서 더 이상 서구 과학의 영향은 찾아볼 수 없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묶어두고 티코의 체계에 따라 배열된 천체들을 운행하게 하는 메커니즘은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초사집주(楚辭集註)』에서 밝힌 대기(大氣)의 소용돌이였다.[49] 유예와 게훤의 우주도는 비록 지리적 세계 표상에 속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서구 과학이 중국의 천문, 지리, 우주론 분야에 미친 구심적 영향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확인할 수는 있다. 그것은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우주지’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겉보기에 서구적 양식을 모방한 세계지도와 우주도를 제작한 경우에도, 그 제작자들은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기(氣)의 우주적 운행을 전제하고 있었다.

서구의 지리학과 천문학 지식이 훨씬 노골적으로 유교적 우주지 속에 포섭된 경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한 가지 두드러진 사례가 정제두(鄭齊斗), 서명응(徐命膺) 등 18세기 조선의 몇몇 주역 상수학자들이 시도한 우주지이다. 그들은 서양 천문 지리학의 전래로 이제껏 분리되어 내려오던 주역 상수학 전통과 천문 지리학을 봉합하여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통합된 지식 체계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서명응(徐命膺)에 따르면 이러한 지식의 통합은 고대 성인(聖人)들이 지닌 완전한 지식 체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복희(伏羲)로부터 삼대(三代)에 이르는 시기에는 천문학과 지리학이 그가 ‘선천역(先天易)’이라고 부른 상수학적 지식의 품에 결합되어 있었다. 그 증거로 그는 우(禹)임금이 홍수를 평정하고 획정(劃定)한 ‘오복(五服)’의 지리적 구획이 중앙으로부터 500리 단위로 이루어졌음을 들었다. 500리란 서양 우주론에서 천문과 지리의 연결을 매개한 이차(里差) 값 “250리를 두 배한 값으로서 음양상득(陰陽 相得)의 체를 그 속에 갖추고 있었다.”[50] 하지만 삼대(三代) 이후 선천역과 지구설이 중국에서 산실되어,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은 각각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폐해는 사실적 정보의 나열로 전락한 지리지 분야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났다.

삼대(三代) 이후 사도(斯道)가 점차 어두워졌다. 한(漢), 당(唐), 송(宋), 명(明)은 왕조마다 지지(地志)가 있었지만, 단지 [지명의] 연혁과 경계만 기록하여 그것이 근거한 바는 없었다. 아아! 이는 어미가 아비에게 다스려지지 않고, 갖옷이 옷깃과 맞지 않고, 그물이 벼리에 거느려지지 않는 것이니, 어찌 능히 도리를 따라 지식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 복잡한 것은 더욱 복잡해지고, 어지러운 것은 더욱 어지러워져서, 그 문헌들을 읽어 요체를 얻을 수 없음은 또한 형세상 필연적인 일이다.[51]

서명응이 그의 손자 서유구(徐有榘)의 도움으로 집필한 방대한 세계지리서 『위사(緯史)』는 중국의 지리서와 선교사들의 문헌에 담긴 지리학적 정보들을 고대의 복희씨에 가탁한 자신의 상수학적 구도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는 극지방, 중위도 지방, 적도 부근으로 구분되는 지구상의 기후대에 각각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를 배당하여 각 기후대가 보이는 독특한 기상학적 특징을 그로부터 연역했다. 그리고 소옹의 “선천방원도”의 내도를 마름모꼴로 변형시켜 지구를 상징하도록 한 뒤, 방도를 이루는 각각의 괘가 그에 상응하는 지구상 각 지역이 지닌 우주론적 특성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그는 세계 각지의 기후는 물론 문명의 정도와 특징까지도 상수학적 원리로 환원시켜 설명하려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북극해가 사계절 얼지 않는 현상에 대해 그 지역이 방도(方圖) 최북방의 건괘(乾卦)에 해당되어 “천일(天一)의 진원(眞元)한 기운이 물을 생성해 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52] 북쪽 나라들이 야만 상태에 있는 것도 상수학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북극에 가까운 지역은 일년의 반은 낮이고 반은 밤이어서 음양의 양의(兩儀)에 해당되어 아직 사상(四象)과 팔괘(八卦)가 충분히 발현되기 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지역의 나라들은 “풍기(風氣)와 인물(人物)면에서 귀역(鬼域)”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53] 그 결과 이 지역의 나라들은 사람 몸에 개의 머리를 한 ‘구국(狗國)’, 사람 몸에 소의 발을 한 ‘우제돌궐국(牛蹄突厥國)’ 등의 괴물족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임의로 지어진 듯 보이는 지명에서도 나름의 상수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의 프랑스[佛郞察]와 북아메리카의 신프랑스[新佛郞察]가 비슷한 위도를 띠며 동서 양 지역에 대칭적으로 배열된 것을 보고는, “제국(諸國)의 이름이란 비록 사람이 우연히 명명하는 것이지만 또한 모두 대칭성[對待]이 있으니, 자연의 수(數)가 그 속에 깃들어 있음이 이와 같다”고 언급하였다.[54] 프랑스인들이 지구상에서 자기 나라와 대칭이 되는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이를 신프랑스라고 명명한 행위도 부지불식간에 복희(伏羲)의 상수학적 법칙이 관철되고 있었던 셈이다.

서명응보다 반세기 앞선 정제두(鄭齊斗)는 서구식 세계지도에서 상수학적 의미를 읽어내려 했다. 그는 서양의 천문학과 지구설을 역학(易學)의 원리에 포괄한 “선원경학통고(琁元經學通攷)” 가운데 마테오 리치의 양반구형 세계지도를 변형시킨 독특한 지도를 선보였다.[55] 이 지도에는 본래 서양 세계지도에 표현된 대륙의 복잡한 윤곽이나 다양한 지명들이 사상되고 대륙의 이름, 중국 주변의 몇몇 친숙한 나라들, 그리고 당시 본초자오선이 통과하던 ‘복도(福島, 오늘날의 카나리아 군도)’, 리치가 남극고도를 관측했다는 ‘대랑산(大浪山)’ 등 몇몇 두드러진 지명만이 표시되었다.

<그림 7> 鄭齊斗의 세계지도. 출처: 『霞谷全集』 卷21 "天地方位里度說" (여강출판사, 1988), 307-8쪽.

사실 정제두가 이 지도에서 표현하려 한 것은 ‘지리적 실재’가 아니라 세계의 상수학적 대칭성이었다. 그는 지구 위 대륙의 분포가 형이상학적 대칭성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북반구의 북방[北之北 즉, 북반구에서 북방에 해당하는 경도대를 뜻함]과 남반구의 남방[南之南]에는 대륙이 없다. 그에 대해 정제두는 “[이 지역은] 당연히 무용(無用)하니 적도 이북[이남]으로는 필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만물이 음양의 교차를 통해 생성된다는 역의 원리로 미루어 보건대, 북지북(北之北)과 남지남(南之南)은 각각 북방, 남방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적 성질이 중복됨으로써 그러한 조화(造化)의 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본 듯하다. 그는 대륙의 대칭적 배열을 위해, 서구식 세계지도의 대륙 분포를 왜곡하기까지 했다. 그는 본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남북 아메리카를 분리시켜 각각 북지남(北之南)과 동지북(東之北)에 배당시켰을 뿐 아니라, 남반구 전체에 걸쳐 있다고 간주되던 마젤라니카[墨瓦蠟泥]를 동지남(東之南)에만 존재하는 대륙으로 그렸다. 그 결과 8등분된 지구상에서 ‘원리상’ 대륙이 존재할 수 없는 남지남(南之南)과 북지북(北之北)을 제외한 여섯 구역에 대륙이 하나씩 배당되었다. 이렇듯 예수회의 세계지도는 정제두에 의해 음양(陰陽)의 형이상학적 구도에 포섭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세부 정보들은 폐기되었고 상수학적 대칭성에 어긋나는 정보들은 그에 부합되도록 왜곡되었다.

정제두의 지도는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음양오행의 상관적 우주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쉽게 읽어낼 수 있는 한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중국이 지상 세계에서 가장 상서로운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지구를 동서 방향으로 사등분하여, 유럽을 서방, 중국을 남방에 대응시킨 데서 잘 드러난다. 남방은 오행 중의 불, 십이지의 오(午), 오장의 심(心)과 연관되어, 지상 세계에서 우주적 기운이 조화로운 지역, 곧 ‘우주적 중심’이 된다. 바로 그러한 우주적 특성 때문에 그곳은 고대에 여러 성인들이 천리(天理)에 입각한 중화(中華) 문명을 창시한 곳이 되었다. 음양오행과 기의 운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유교적 우주지는 이렇듯 중화주의적 세계상을 우주적 규모로 확장하려는 시도와도 연동되었다.

2) 직방세계의 지구적 확장

지상 세계 전체를 표상한 서구 지리학은, 정통적 지지와 지도 제작자들이 이제껏 쉽사리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도, 즉 전 세계를 포괄하는 중화주의적 세계지리의 건설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도 서구 지리학은 이전까지 분리되어 내려오던 동아시아 지리학의 두 전통, 즉 경험적 확실성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과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추연과 『산해경』의 시도가 이제는 성공적으로 접목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명말 청초의 시기 알레니의 세계지리서 『직방외기』(1623)에 자극받아 저술된 웅인림(熊人霖)의 『지위(地緯)』(1624)와 육차운(陸次雲)의 『팔굉역사(八紘譯史)』(1683)는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유교적 지리지를 시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56]

웅인림은 『지위』의 서문에서 자신의 책이 지리적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함을 표방했다. 그는 총84편으로 이루어진 『지위』의 81편을 세계 각국에 대한 기술에 할당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양의 수인 9를 제곱한 것으로서 곧 자신의 지지가 세계 전체를 포괄함을 상징하는 일종의 우주지적 장치였다. 9×9의 구도로 세계 전체를 표현하려 했던 추연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57] 육차운(陸次雲)은 『팔굉역사(八紘譯史)』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책이 『산해경』을 계승했다고 선언했다.

팔굉역사(八紘譯史) 이 책은 대황경(大荒經, 『산해경』을 뜻함)을 계승하여 지은 것이다. 옛날 백익(伯益, 『산해경』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 바다를 묘사하고 산을 그림에 옮긴 것이, 유흠(劉歆)에 의해 천명되었고, 곽박(郭璞)에 의해 주석이 달렸다. 아득하고 그윽한 것을 남김없이 기록했고, 기이한 것들도 모으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소위 관흉(貫胸), 섭이(聶耳), 일목(一目), 삼신(三身)의 나라들은, 이름은 전해들을 수 있으나 그 사람들은 볼 수 없어, 지괴(誌怪)․제해(齊諧)의 문헌들과 같이 징험(徵驗)하여 믿을 방도가 없다. 실질을 구하여 믿을 만한 것이 오직 이십일사(二十一史) 뿐이런가. 옥백(玉帛)을 들고 내왕하는 자들을 기록한 것이 대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여, 명나라의 함빈록(咸賓錄)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지만, 아직도 육합(六合)을 다 포괄하지는 못했다.[58]

고전 지리학의 두 전통 각각이 지닌 장단점을 지적한 육차운의 논의는, 자신의 책이 그 둘의 장점을 종합한 것이 되리라는 예고와 같았다. 지상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지지(地志)를, 경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웅인림과 육차운이 이러한 일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주변을 넘어서는 영역에 관해 믿을 만한 정보를 알려준 서양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중국 주변의 세계에 관한 사실적인 정보를 오랜 기간 쌓아 온 중국의 지지(地志)와 종합한다면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면서도 『산해경』과 같은 황당함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59] 결과적으로 웅인림과 육차운의 지지(地志)는 서양과 중국 지리 문헌의 내용을 혼합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아시아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전 지리 문헌을, 그 바깥 유럽, 아메리카의 나라들과 같이 중국의 문헌에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직방외기』의 기록을, 그리고 서역(西域)이나 남양(南洋)의 나라들처럼 기록이 중복되는 경우에는 두 기록을 병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60]

그렇다고 이들이 『직방외기』의 기록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웅인림과 육차운이 서양의 문헌에서 빌려온 것은 세계 전체를 표현하려는 이상과 사실적 정보였을 뿐 그에 담긴 종교적 · 이념적 함의까지는 아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직방외기』에 담긴 종교적 기사(奇事)나 유럽중심적인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잘 드러난다. 웅인림은 『직방외기』의 “유대아” 항목에서 상세하게 개진된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의 행적 등을 대부분 삭제하고는 간단한 지리적 정보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흥미로운 유적에 관한 정보만을 남겨놓았다.[61] 반면 그는 여러 장치를 통해 세계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중심적 지위를 드러내려 했다. 웅인림은 『지위』의 81편 중 43편을 ‘대첨납(大瞻納)’이라고 명명한 아시아 대륙에 배정하여 압도적으로 아시아 중심적인 체제를 지향했다.[62] 아시아에 대한 실제 기술 방식도 중국에 ‘입공(入貢)’한 내력 등 중국과 외이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주 내용으로 하여, 이전의 중화주의적 외이전(外夷傳)의 전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63] 『지위(地緯)』의 ‘아시아 중심적’ 성격은 실상 ‘중국 중심적’ 세계상의 표현이었고, 이는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의 구절을 암시하는 『지위』 “대첨납총지(大瞻納總志)”의 모두 선언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대첨납(大瞻納)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요, 사계절이 교차하는 곳으로서, 성철(聖哲)이 잇달아 일어나고, 도법(道法)이 크게 융성하여, 동서(東西)로는 무수한 조공국들을 포괄하고, 남북으로는 추위와 더위가 극히 조화로우며, 그 땅이 수려하고 물산이 풍족하니, 실로 만방의 으뜸이다.[64]

반세기 뒤에 간행된 육차운의 『팔굉역사』에서는 중화주의적 구도가 훨씬 강화되었다. 웅인림과는 달리 『직방외기』의 오대주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는 중국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 네 구역에 세계 각국을 배당했다. 이는 사실상 『상서』의 오복(五服), 『주례』의 구복(九服) 등과 같은 구도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중화주의적 관념을 표현하는 데 이용되어 오던 것이었다. 오대주의 구도가 ‘중심―사방’의 구도로 바뀌면서, 선교사의 지리서에 등장했던 나라들은 자신의 소속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중화주의적 공간 구획 속으로 편입되었다.

<그림 8> 曹君義, “天下九邊分野人跡路程全圖” (1644) 조완여 외편, 『중국고대지도집』 명대, 도판 146.

예컨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서역․인도․아프리카 등의 나라들과 함께 ‘서부(西部)’에 속하게 되었으며, 페루[孛露]와 같은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타타르․골리간(骨利幹) 등과 함께 ‘북부(北部)’의 구성원이 되었다.[65] 이와 같이 육차운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마젤라니카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고 중화주의적 구획 속으로 해체시켜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웅인림과 육차운의 세계지지와 유사한 세계상을 담은 세계지도도 제작되었다. 그 지도들은 중화주의적 형승도 계통에서 변형된 것이었는데, 마치 웅인림과 육차운의 지지에 담긴 세계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들 지도의 제작자들은 대개 전통적인 외이(外夷)들이 차지하고 있던 형승도의 좁은 여백에 선교사들의 문헌에 등장하는 지리적 정보를 편입시켰다.

아마도 그 최초의 시도는 1600년 경 양주(梁輈)라는 인물에 의해 판각된 “건곤만국전도고금인물사적(乾坤萬國全圖古今人物事跡)”이라는 지도일 것이다. 이 지도의 오른쪽 여백에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가 각각 상단과 하단에 분리된 채 『산해경』의 괴물 나라들과 더불어 조그만 섬으로 표현되었으며, 종래의 형승도와는 달리 대륙의 북쪽 너머에 바다가 표시되어 지상 세계의 전체적 윤곽이 훨씬 잘 드러나 있다.[66] 반세기 뒤에 제작된 조군의(曹君義)의 “천하구변분야인적노정전도(天下九邊分野人跡路程全圖)”는 서양 세계지도로부터 더 많은 요소를 채택함으로써, 명실 공히 서양 세계지도와 형승도를 종합한 작품이었다. <그림 8>에서 볼 수 있듯, 양주(梁輈)의 지도에서 조그만 섬으로만 표시되었던 대륙들이 이제는 비교적 그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여, 변함없이 지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둘러싸고 있다. 『산해경』의 괴물 나라들도 지도의 동남쪽 여백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지만, 이제 그 비중은 선교사들의 지리 문헌에 등장하는 대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해졌다. 게다가 이 지도는 비록 엉성하기는 하나 경위도의 좌표계를 채택했으며 하늘과 접하는 지상세계의 외연을 분명히 표현함으로써 우주지적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추연의 전통이 서구 세계지도를 매개로 중화주의적 형승도의 전통과 결합했던 것이다.

5. 맺음말

서구식 세계지도로 중국의 세계표상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리치의 희망은, 마치 동아시아 사회를 기독교화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17-18세기에 걸쳐 선교사들의 세계지도와 세계지지가 중국과 조선의 지식 사회에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세계지리의 서구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외래의 지리 지식이 전통적 지식의 공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매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양상을 규정한 것은 이미 한대(漢代)로부터 형성되어 내려오던 정통적 · 비정통적 세계표상 사이의 균열과 긴장이었다. 전반적으로 서구의 세계지리는 유교 지식인들로부터 불신 받아왔던 추연, 『산해경』의 비정통적 조류와 동일시되어 지식의 주변부에 위치 지워졌고, 그 결과 동아시아 세계지리 전통의 지형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양 지리학의 도입은 동아시아 지리학 전통 내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도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식론적 신중함으로 특징 지워지던 유가적 세계지리 전통에 지상 세계 전체를 포괄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웅인림, 육차운, 정제두, 서명응 등은 서구의 천문 지리학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마천(司馬遷) 이래 ‘존이불론’의 경구에 의해 제한되었던 지식의 한계선을 넘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추연과 『산해경』 등 ‘허학(虛學)’의 영지였던 직방세계 너머의 공간이 이제는 유교 ‘실학(實學)’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서로 연관되는 두 가지 지향으로 이루어졌다. 선교사들의 지리 지식을 근거로 직방세계의 판도를 지구적 규모로 확장시키려는 시도와 서구 세계지리 지식을 성리학적 자연철학 및 상수학에 포괄시킴으로써 지리적 세계 전체에서 우주적 기(氣)의 승강과 유행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서구 지식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신뢰감이 전통적 세계상의 지양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외래의 세계표상은, 그것이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에도, 전통적 세계상을 강화시키는 자원 이상으로 활용되지 않았다.

주석

[1] 선교사들의 지도학이 중국 지도 제작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은 J. B. Harley and David Woodward (eds.), Cartography in the Traditional East and Southeast Asian Societies, in History of Cartography Vol. 2 book 2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의 제7장, Cordell D. K. Yee, “Traditional Chinese Cartography and the Myth of Westernization,” 170쪽이 대표적이다. 선교사들의 세계지지에 대한 중국인들의 태도는 Kenneth Chen, “Matteo Ricci's Contribution to, and Influence on, Geographical Knowledge in China,”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59(1939), 325-359; Bernard Hung-Kay Luk, “A Study of Giulio Aleni's Chih-fang wai chi 職方外紀,”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XL(1) (London, 1977), 58-84를 참조할 수 있다.

[2] 예를 들어, Pasquale M. D'Elia SJ, “Recent Discoveries and New Studies (1938-1960) on the World Map in Chinese of Father Matteo Ricci SJ,” Monumenta Serica 20(1961), 82-164와 같은 예수회 관련 저자의 연구나, 王庸, 『中國地理學史』 (上海: 商務印書館, 1938) 이래로 중국에서 나온 여러 지리학, 지도학 연구가 이에 포함된다. 니덤의 연구도, 비록 그가 선교사들의 지도를 그 이전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수학적 지도학의 연장선에서 파악한다는 독특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지만, 크게 보아 같은 입장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9), 497-590쪽 참조.

[3] 이러한 접근은 서구식 세계지도가 중국과 조선 학자들에 의해 변형되는 사례에 주목한 몇몇 연구와 기본적으로는 그 궤를 같이한다. 예를 들어, Richard J. Smith, “Mapping China's World: Cultural Cartography in Late Imperial Times,” in Wen-hsin Yeh (ed.), Landscape, Culture, and Power in Chinese Society (Berkely: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y, 1998); 배우성, “고지도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세계 인식”, 『진단학보』 83(1997), 43-83; 오상학, “조선시대의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1)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서구식 세계지도의 동아시아적 전유가 일어나는 양상과 그 원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는 이들과 입장을 달리한다.

[4] Nicholas Trigault, Louis J. Gallagher (tr.), China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Journal of Matthew Ricci: 1583-1610 (New York: Random House, 1942), 166-7쪽.

[5] 이러한 균열에 대해서는 이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이 언급했다. 그는 중국의 세계지리 전통을 객관적 記述, 수학적 표상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과 신화 및 종교적 상상을 표현한 전통으로 나누어 보았다. [Joseph Needham, 앞의 책, 500-3, 516쪽] 이 글에서 채택한 구분도 그 외연에 있어서는 니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객관적 · 수학적 표상의 전통을 후자의 ‘종교적 우주지’(religious cosmography) 전통에 비해 ‘과학적’이라고 본 니덤의 평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니덤의 평가는 서구 근대 지리학의 이상을 중국 전통 지리학에 적용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 중국 사회의 지도 및 지지 제작자와 향유자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니덤에 대한 비판으로는 Cordell D.K. Yee, “A Cartography of Introspection: Chinese Maps as Other than European,” Asian Art 5(4) (1992), 28-47 등을 참조할 것.

[6] 『史記』 권123 “大宛列傳” (臺北: 啓明書局, 1961), 457쪽; 권74 “孟子荀卿列傳”, 400-1쪽.

[7] 같은 곳.

[8] 불가의 세계상과 추연을 같은 부류로 본 주희의 견해는 『朱子語類』 권86 (正中書局, 1982), 3509-10쪽.

[9] 赤縣神州란 이름 및 오행설에서 붉은 색과 남방을 연결시킨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추연은 중국을 남쪽 지방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회남자』 “지형훈”에서 神州를 동남방에 위치시킨 것과도 상통한다.

[10] 安居香山․中村璋八 編, 『緯書集成』 (河北人民出版社, 1994), 下卷, 1095쪽.

[11] 『周髀算經』 卷上 (上海: 商務印書館, 1955), 41쪽.

[12] 원형천하도의 기원과 그 세계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배우성, “서구식 세계지도의 조선적 해석—<천하도>”, 『한국과학사학회지』 22(1) (2000), 51-79; 오상학, 앞의 글, 163-211쪽을 참고.

[13] 무계국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정재서, 『不死의 신화와 사상: 산해경․포박자․열선전․신선전에 대한 탐구』 (민음사, 1994), 80-81쪽을 참고.

[14] 『淮南子集釋』 卷4 “墜形訓” (北京: 中華書局, 1998), 328-9쪽.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로서의 건목은 『산해경』에도 등장한다. [정재서 역주, 『산해경』 (민음사, 1996), 330쪽] 신선 설화에서 그림자와 메아리가 없다는 표현은 선계나 또는 신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묘사할 때 자주 이용되었다. ‘建木’과 ‘日中無影’에 대한 해석은 鄭在書, 앞의 책(不死의 신화와 사상), 81-82쪽을 참조할 것.

[15] 『莊子校詮』 外篇 “秋水”, 王叔岷 撰 (臺北: 中央硏究員歷史言語硏究所, 1988), 581-4쪽.

[16] 王充, 『論衡校釋: 附劉盼遂集解』 “談天” 第十一 (北京: 中華書局, 1990), 469-484쪽.

[17] 『莊子校詮』 內篇 “齊物”, 72-73쪽.

[18] 『論語集注』 “術而” 『四書章句集註』 (北京: 中華書局, 1983), 98쪽.

[19] 『周禮注疏』 卷10 “大司徒”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9), 251-4쪽.

[20] 『도서편』 卷34 “皇明輿圖四極”, 문연각사고전서 제969책, 672쪽下.

[21] “우공지역도”의 서문은 『晉書』 권35 “裵秀傳”에 실려 있으며, 王庸, 『中國地理學史』 제2판 (上海: 商務印書館, 1957), 56-7쪽에 전재되었다.

[22]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해내화이도”의 규모는 『舊唐書』 “賈耽傳”에 담긴 그의 表에 나타나 있다. 王庸, 『中國地理學史』, 67-8쪽.

[23] “輿圖”에 대한 朱思本의 自敍는 왕용, 『중국지리학사』, 87-88쪽에 실려 있다. 漲海란 海南으로부터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南洋을 뜻한다.

[24] 이러한 추정은 Walter Fuchs, The “Mongol Atlas” of China (Peiping: The Catholic University Press, 1946), 8쪽 참조.

[25] 조선이 이미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중국의 1/3의 크기로까지 확대되어 묘사된 것은, 전상운에 따르면 지도제작을 주도한 권근 등 조선 건국 주도 세력의 진취적 태도를 반영한다. 全相運, “朝鮮前期의 科學과 技術-15세기 科學技術史 硏究 再論”, 『한국과학사학회지』 14(2) (1992), 146-7쪽. 원대의 세계 지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대한 니덤의 논의는 Needham, 앞의 책, 554-6쪽을 참조할 것.

[26] 지도의 동남쪽 바다에 『산해경』의 나라들이 포함된 사례는 이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오상학, 앞의 글, 86쪽.

[27] 기이한 현상들에 대해 氣의 개념을 통해 자연적 설명을 시도한 주희의 시도에 대해서는 Kim Yung Sik, The Natural Philosophy of Chu Hsi (1130-1200)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2000), 98-101쪽.

[28] 崔錫鼎, “西洋乾象坤輿圖二屛總序”, 『明谷先生文集』 제8책 (경인문화사, 1997), 172-3쪽.

[29] Kenneth Chen, “A Possible Source for Ricci's Notices on Regions Near China,” T'oung Pao 34(1938), 179-190쪽.

[30] “『곤여도설』 제요”, 문연각사고전서 제594책, 729쪽下-730쪽上.

[31] 『寰瀛誌』의 두 판본은 魏伯珪, 『存齋全書』 (景仁文化史, 1974), 下卷, 33-348쪽에 연이어 실려 있다. 원형천하도를 “利瑪竇天下圖”라고 소개한 부분은, 下卷, 33-34, 61-62쪽을 참조. 뒤의 판본에는 『직방외기』에 근거한 듯한 “西洋諸國圖”가 편입되었다. 下卷, 207쪽.

[32] 선교사들의 중화주의 비판에 대해서는 林宗台, “17 · 18세기 서양 지리학에 대한 중국 · 조선 학인들의 해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3), 42-49쪽 참조.

[33] 마테오 리치, “兩儀玄覽圖”에 붙인 노트, D'Elia, 앞의 글, 156-8쪽.

[34] 리치, 『乾坤體義』 中國科學技術典籍通彙 제8책 (河南敎育出版社), 288쪽下.

[35] 이광지, 『榕村集』 권5 “周官筆記”, 문연각사고전서 제1324책, 590-92쪽.

[36] 崔錫鼎, “西洋乾象坤輿圖二屛總序”, 172-173쪽.

[37] 『圖書編』 卷29, 문연각사고전서 제969책, 561쪽.

[38] 같은 책, 卷29, “輿地山海全圖敍”, 552-553쪽.

[39] 陳觀勝, “利瑪竇對中國地理學之貢獻及其影響”, 『禹貢』 5(3-4) 재수록: 周康燮 主編, 『利瑪竇硏究論集』 (崇文書店, 1971), 147-8쪽에서 재인용. 마젤라니카는 마젤란이 발견했다고 알려진 ‘미지의 남방대륙’을 말한다. 마젤라니카의 크기를 천리 가량으로 본 것은, 『직방외기』 “마젤라니카”조에서 언급된 마젤란해협의 길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40] 愼後聃, 『西學辨』, 李晩采 編․金時俊 譯, 『闢衛編』 (한국자유교양추진회, 1984), 83-84쪽; (원문) 23쪽上.

[41] 金萬重, 홍인표 역, 『西浦漫筆』 (一志社, 1987), 284-5쪽.

[42] 郭靑螺, “산해여지전도”, 서문, D'Elia, 앞의 글, 104쪽. “사람으로서 책을 증명했다”는 표현은 1000여 년 전 東晋 郭璞의 “注山海經序”에 담긴 논의를 암시한다. 당시 전국시대의 묘에서 『穆天子傳』이 발굴되었는데, 곽박은 이를 근거로 사마천 이후 터무니없는 문헌으로 비하되어왔던 『산해경』의 신빙성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정재서 역주, 『산해경』, 34-5쪽) 곽청라는 『목천자전』이 『산해경』을 증명한 것이 “책으로 책을 증명한 것(以書證書)에 불과하다면, 리치의 도래는 사람으로서 책을 증명한 것으로서” 추연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더 확실한 증거라고 예찬했다.

[43] 李種徽, “利瑪竇南北極圖記”, 『修山集』 卷4, 81쪽.

[44] 매문정은 『주비산경』에 담긴 지식을 서양 천문학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임종태, 앞의 글, 128-133쪽.

[45] 江永, 『數學』 문연각사고전서 제796책, 611쪽下.

[46] 임종태, 앞의 글, 114-148쪽.

[47] 중국의 천문학과 우주론 사이의 분리는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Nathan Sivin, “Cosmos and Computation in Early Chinese Mathematical Astronomy,” T'oung Pao 55(1969). 재수록: Sivin, Science in Ancient China: Researches and Reflections (Aldershot: Variorum, 1995) 제2장, 3-5, 64-67쪽을 참조할 것.

[48] 『삼재일관도』에 관해서는 오상학, 앞의 글, 205-6쪽 참조.

[49] 유예와 게훤의 우주도와 그에 담긴 시도에 대해서는 임종태, 앞의 글, 118-120, 168-178쪽을 참고할 것.

[50] 서명응, 『緯史』 序, 1b. 『위사』는 『保晩齋叢書』(서울대학교 규장각 古 0270-11)에 포함되어 있다.

[51] 같은 곳.

[52] 같은 책, 권1 “北軸兩儀”, 2b.

[53] 같은 책, 권1, 2a.

[54] 같은 책, 권1, 14a-b.

[55] 서양 지구설을 易學의 원리에 포괄한 정제두의 작업에 관해서는 具萬玉, “朝鮮後期 ‘地球’說 受容의 思想史적 의의”, 『河炫綱敎授定年紀念論叢-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혜안, 2000), 731-3쪽 참조.

[56] 웅인림은 선교사들의 저작 『七克』과 『表度說』에 서문을 썼던 웅명우의 아들로서, 이 부자는 명말 청초의 시기에 서양 과학을 성리학과 종합하는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아버지는 주로 천문학을 담당하여 『格致草』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아들 웅인림은 지리학 분야를 담당하여 『지위』를 저술했다. 이 두 저작은 청나라 순치년간에 『函宇通』(1648)이라는 책으로 함께 묶여 간행되었다. 육차운은 1680년대 강희 연간에 활동했던 지방관이자 문필가로서, 『팔굉역사』와 함께 『譯史紀餘』, 『八紘荒史』의 지리지 3부작을 남겼다. 웅인림과 그의 『地緯』에 대해서는, 洪健榮, “明淸之際中國知識份子對西方地理學的反應: 以熊人霖『地緯』爲中心所作的分析” (臺灣國立淸華大學 碩士學位論文, 1998)의 상세한 연구가 있지만, 육차운의 저술에 대해서는 아직껏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57] 웅인림, 『地緯』 (미국국회도서관본), 3a, 6b.

[58] 陸次雲, 『八紘譯史』 序, 叢書集成初編 제3236책 (上海: 商務印書館, 1939), 1쪽.

[59] 같은 책, 1쪽.

[60] 洪健榮은 웅인림이 『地緯』에서 참고․인용한 자료를 각 나라 별로 정리해 놓았다. 洪健榮, 앞의 글, 42-44쪽.

[61] 『직방외기』의 여러 기독교적 내용에 대해 웅인림이 취한 삭제 방침에 대해서는, 같은 글, 90-91쪽을 참조.

[62] 『직방외기』 아시아條의 초두에서, 알레니는 서양 사람들이 중국을 “大知納”이라 부른다고 소개했다. 웅인림을 이를 “大瞻納”이라고 바꿔 불렀는데, 知가 瞻으로 바뀐 이유는 분명치 않다. 웅인림이 ‘亞細亞’대신 ‘大瞻納’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아버지 웅명우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大瞻納’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의는 같은 글, 59-60쪽 참조.

[63] 『지위』의 아시아 나라에 대한 서술 내용, 각 대륙별 서술 분량의 차이 등은 같은 글, 60-63, 89쪽 참조.

[64] 『地緯』 “大瞻納總志”, 1b.

[65] 육차운이 여러 나라들을 동서남북으로 구분한 방식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陳觀勝, “利瑪竇對中國地理學之貢獻及其影響”, 『禹貢』 5(3-4) [재수록: 周康燮 主編, 『利瑪竇硏究論集』 (崇文書店, 1971)], 145쪽. 대표적인 오류는 남아메리카의 페루가 타타르와 함께 북부에 배정된 일이지만, 필리핀[呂宋]이 ‘서부’에 소속된 반면 그에 인접한 베트남, 말라카 등이 ‘남부’에 편입된 사실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선교사들이 소개한 낯선 나라들에 대한 오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전 지리학의 단골이었던 남양의 나라들에 대한 혼란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66] 이 지도의 도판과 그에 대한 해설은 Richard J. Smith, Chinese Maps: Images of All under Heaven (Hong Kong: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73쪽을 참고할 것.

관련 항목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2013).

제1부 과학혁명의 또 다른 면모

제2부 실험의 권위

제3부 생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

제4부 20세기 과학

제5부 동아시아 사회 속의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