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시계들: 시간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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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ter Galison, "Einstein’s Clocks: The Place of Time," Critical Inquiry 26 (Winter 2000), 355-389; 번역: 정동욱, "아인슈타인의 시계들: 시간의 장소,"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247-295쪽.

1933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말하길, “현대 사회에서조차, 고독하게 살면서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별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직업이 있지요. 등대지기와 같은 직업이 떠오르네요.”[1] 아인슈타인은 고독이 철학적이거나 수학적인 문제와 씨름하는 젊은 과학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 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 자신의 젊은 시절도 그러했을 것이라 추측하기 쉽다. 그의 일터였던 베른 특허국이 바로 먼 대양의 등대선과 같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딴 세상 같은 그림을 일관되게 끌고 갔을 때,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잡다한 일상 업무에는 무심한 채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재고하여 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무너뜨린 철학자-과학자로 마음속에 품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이루어 낸 철학적 절대성의 제거는 상대론에 대한 공헌 이상이었다. 이는 하나의 철학적 시대의 전복과 새로운 시대의 태동을 상징하게 되었다. 앙리 푸앵카레(Henry Poincaré, 1854-1912), 헨드릭 로렌츠(Hendrik Lorentz, 1853-1928), 막스 아브라함(Max Abraham, 1875-1922)과 같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은 거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이는 그 이론이 시계, 자, 자유운동체(bodies in force-free motion)의 작동 방식에 대한 기본 가정들에서 시작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그는 위의 선배 물리학자들이 전자의 구조, 힘의 본성, 에테르의 동역학에 대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증명하고자 했던 것들을 도리어 가정으로 삼아 버렸던 것이다. 곧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와 닐스 보어(Niels Bohr)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물리학자들은, 공간과 시간을 자와 조율된 시계들을 이용해 준-조작적으로(quasi-operational) 정의했던 아인슈타인의 방식을 본떠 양자 인식론을 만들었다.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를 중심으로 한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의 철학자들에게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논문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즉 그들에게 이 논문은 과학적 철학(scientific philosophy)을 대표하여 언제 어디서나 휘날릴 깃발이었던 것이다.

그림 1. 코일과 자석.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1905년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해(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는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물리학 논문이 되었다. 통상 이해되듯이,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과거 고전역학이 작동하던 “실제(practical)” 세계로부터 너무나 극단적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그의 논문은 혁명적 단절의 한 모범이 되었다. 철학인 동시에 물리학이었던 원거리 동시성(distant simultaneity)에 대한 그의 재고는 19세기 물리학과 20세기 물리학의 화해할 수 없는 단절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 논증을 순서대로 따라가 보자.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의 해석 안에 모종의 비대칭성이 있는데 자연에서는 그 비대칭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논증을 시작했다([그림 1]). 코일에 자석을 접근시키면 전류가 흐르게 되는데, 이 전류는 자석에 코일이 접근할 때 발생하는 전류와 구별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이 둘은 (코일과 자석이 서로 접근하여 코일에 전류를 발생시키는) 하나의 동일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맥스웰 방정식은 편재해 있는(all-pervasive) 에테르를 기준으로 코일과 자석 둘 중 누가 움직이느냐에 따라 두 가지 다른 설명을 제공했다. 코일이 움직이는 경우, 그 안의 전하들은 고정된 자기장에 의해 힘을 받는다. 반면 자석이 움직이면, 자기장이 변화하여 전기장을 만들어 내고 이는 고정된 코일의 전하를 움직이게 했다. 아인슈타인의 목표는 코일 기준 좌표계가 주어지든 자석 기준 좌표계가 주어지든 그 설명방식이 달라지지 않는 대칭적인 설명을 산출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전기동역학은 운동학(kinematics) ― 힘이 가해지지 않는 조건에서 시계와 자가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따위의 문제 ― 에 대한 특정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진단했듯이 문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충분한 고찰”에 있었다.[2]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좌표계란 유클리드 기하학을 표현할 수 있는 단단한 측정용 막대로 이루어진 시스템으로, 평범한 직교좌표로 그려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놀라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와 같은 동시대인들이 아인슈타인의 주장에서 핵심으로 본 ‘시간에 대한 재해석’이 바로 그것이다.[3] 아인슈타인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시간이 개입된 모든 판단들이 항상 동시적 사건(simultaneous events)에 대한 판단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내가 ‘저 기차는 7시에 여기에 도착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내 시계의 작은 바늘이 7을 가리키는 사건과 기차가 도착하는 사건은 동시적 사건이다’” (“ZE,” p. 893; “OE,” p. 393).[4] 한 지점에서의 동시성에 한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만약 시계의 작은 바늘이 7에 도달했을 때 시계 바로 옆에서 사건이 발생한다면 (기차 기관실이 내 옆에 도착했다고 치자), 그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주장하기를, 문제는 공간상 떨어져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연결해야 할 때 발생한다. 공간상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철학적인 듯한 면모를 발휘하여 기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사고실험을 수행했다. 더군다나 이는 특허사무소에서의 일상적 고민거리와도 동떨어져 보였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우리는 시계들을 어떻게 조율해야(coordinate) 하는가? “우리는 원리적으로는 좌표계의 원점에 시계를 가지고 서 있는 관찰자의 도움으로 각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관찰자는 각 사건이 보내주는 빛 신호가 도착하는 것에 맞추어 시계 바늘을 확인하면 된다.” (“ZE,” p. 893; “OE,” p. 393; trans. mod.). 아차, 아인슈타인이 지적하기를, 빛의 속도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 시스템은 중앙 시계를 가진 관찰자에 따라 유동적이다. 어떤 원점에서는 동시에 일어나 보이는 두 사건이 원점을 옮기면 동시적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인식적 허수아비는 만족스러운 시간을 말해주지 못할 것이다([그림 2]와 [그림 3]).

젊은 아인슈타인은 더 나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A에 있는 한 사람이 그로부터 거리 d만큼 떨어진 B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정오에 빛 신호를 보낸다고 하자. B는 정오 더하기 빛이 B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 즉 정오 + d/c(c는 빛의 속도)로 시계를 맞춘다. 이렇게 계속하면, 다른 모든 사람과 그들의 시계가 동기화(synchrony)된다. 이 좌표계에는 특별한 원점이 없다. 즉, 마스터 시계(master clock)가 없다. 자, 지금까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건드릴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화석화된 절대성을 뒤엎는 신마흐주의(neo-Machian) 인식론의 철학적 승리이다. 철학자-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이 했던 사고실험은 의문시되지 않던 학계의 도그마 또는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기엔 너무 정교하게 얽혀 있던 과학-기술의 중핵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잠깐만.

아인슈타인의 기차로 돌아가보자. 기억하겠지만, 그는 기차가 7시에 역에 도착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오랫동안 아인슈타인 본인을 따라 기차와 동시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읽어 왔다. 보통은 “어린 시절에나” 던질 만한 질문을 가지고, 독특하게도 아인슈타인은 “다 커서까지도” 계속 고민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이다.[5] 이렇게 읽게 되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수수께끼는 너무 초보적(elementary)이고 또한 너무 기초적(basic)이어서, 당시 물리학 공동체의 의식 영역 아래 가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정말 의식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까? 7시 정각에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것을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관찰자가 안다는 것에 대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은 사람이 1904-1905년 사이에 정말 아무도 없었을까? 원거리 동시성을 정의한 그의 아이디어는 꼭 그런 철학적 귀결이어야 했을까?

올여름 나는 북유럽의 한 기차역에 서서 플랫폼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세기 전환기(turn-of-the-century)의 시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계들은 모두 똑같은 ‘분(minute)’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기하군. 좋은 시계들이야.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내 시력이 닿는 한에서지만, 이 시계들이 초침의 짹각거림마저 일치하고 있음을 알아채게 되었다. 이 시계들은 단지 잘 가는 시계가 아니었다. 내 생각에, 이 시계들은 하나로 조율되어 있었다. 자신의 1905년 논문과 씨름하며 원거리 동시성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당시, 아인슈타인은 분명 그 조율된 시계들을 보고 다녔을 것이다([그림 4]).

이미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영국의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과 알렉산더 베인(Alexander Bain), 곧이어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마티아스 힙(Mathias Hipp, 1813-1893) 등 많은 발명가들이 떨어져 있는 시계들을 하나의 중앙시계에 묶는 전기식 분배 시스템(electrical distribution system)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시스템은 ‘호를로게-메레(horloge-mère)’, ‘프리마레 노르말루어(Primäre Normaluhr)’, ‘마스터 시계’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그림 5]와 [그림 6]).[6] 독일의 라이프찌히는 전기식 시간 분배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 중 하나이며, 프랑크푸르트가 1859년에 그 뒤를 이었다. 힙(당시 전신 작업장의 책임자)은 베른(Bern)의 연방 공관(Federal Palace)에 스위스로서는 최초의 시계 조율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1890년에 이르러 이곳에는 100개의 시계가 함께 줄지어 동작하기 시작했다([그림 7]). 곧이어 제네바, 바젤(Basel), 뇌샤텔(Neuchâtel), 쮜리히가 각기 독자적인 시계 조율 시스템을 갖추며 그 뒤를 이었고, 시계 조율이 생명과 같았던 스위스 철도 노선들은 곧 조율된 시간을 갖추게 되었다.[7]

그림 8. 1880년 제네바의 아이슬 탑(Isle Tower). 세 개의 시계. Centre d'iconographie genevoise. RVG N13x18 14934.
그림 9. 1880년 제네바의 아이슬 탑(Isle Tower). 한 개의 시계. Centre d'iconographie genenoise. VG N13x18 1769.
조율된 시간이 없었던 시절, 각 도시와 마을은 저마다의 시간 위에서 굴러갔으며, 이러한 제각각의 개성은 철도가 생기기 전까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830년대 영국을 보면, 런던 시계는 레딩(Reading)보다 4분 빨랐고, 시렌체스터(Cirencester)보다는 7분 30초 앞서 갔으며, 브리지워터(Bridgewater)보다는 14분 먼저 종을 쳤다. 주요 건물 앞에 시계를 걸어야 할 때는 하나 이상의 시계가 필요했다. 제네바의 아이슬 탑(Isle Tower)은 세 개를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중앙의 큰 시계는 제네바 시간(대략 10:13)을 가리켰고, 왼편의 시계는 파리-리옹-지중해(Paris-Lyon-Méditerranée) 철도 회사의 선로를 따라 단일하게 적용되는 파리 기반 시간(9:58)을 보여주었으며, 오른편의 시계는 딱 5분 빠른 베른 시간(10:18)을 자랑했다([그림 8]). 몇 해 후부터 표준화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그림 9]), 표준화는 철도 노선을 따라 진행되었다. 모든 철도 회사는 독자적인 표준시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의식을 거행하듯 매우 유난스러운 일이었다. 런던에서는
매일 아침 해군 전령이 정확하게 시간을 맞춘 시계를 가지고 와서, 유스턴(Euston)을 떠나 홀리헤드(Holyhead)를 향하는 아일랜드 우편열차 하행선의 차장에게 건네주었다. 홀리헤드에 도착하면 다음 더블린(Dublin)까지 가는 킹스타운호의 사무관에게 시계의 시간을 전해 주었다. 그 시계는 돌아가는 우편열차 편으로 유스턴의 해군 전령에게 다시 건네졌다.[8]

시계 조율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는 평을 들었던 독일은, 1891년 여전히 기계식, 전기식 시스템의 잡동사니들과 씨름하고 있었다.[9] 그해 3월 16일 나이든 헬무트 폰 몰트케 백작(Count Helmuth von Moltke, 1800-1891)은 독일 제국 의회에서 그의 마지막 연설을 하게 되었다(그는 바로 한 달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프러시아(이후 독일)의 참모총장으로서, 폰 몰트케는 군대의 전개 및 배치 방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했었다. 도로라는 신뢰하기 어려운 수단을 이용해 군대를 이동시켰던 과거와 달리, 폰 몰트케는 철도를 활용하여 군대를 광활한 전선으로 공급하고 소집하고 이동시켰다. 이러한 전략은 (보불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 덕에 철도, 제국, 군대에 대한 폰 몰트케의 발언은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쇳소리나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신사 여러분, ... 저는 여러분을 오래 붙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쉰 목소리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통합[Einheitszeit]이 철도를 제대로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사 여러분, 우리 독일엔 5개의 다른 시간 단위가 있습니다. 작센을 포함한 북독일에서는 베를린 시간을, 바바리아(Bavaria)에서는 뮌헨 시간을, 뷔르템베르크에서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시간을, 바덴(Baden)에서는 칼스루헤(Carlsruhe) 시간을, 그리고 라인 팔라티나테(Rhine Palatinate)에서는 루드비히샤펜(Ludwigshafen) 시간을 씁니다. 즉, 독일엔 다섯 구역이 있는 셈이며, 이는 모든 장애와 불편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러시아 경계지역을 제외했으니 이 정도지, 그 경계지역까지 포함한다면 더 심각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는 조각나 있었던 과거 독일의 대표적인 잔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제국이 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잘못은 청산되어야 마땅합니다.

청중들은 “옳소” 하며 갈채를 보냈다. 폰 몰트케는 이러한 조각조각난 시간의 문제가 단지 여행객에게만 해당되는 불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철도 산업에 “실질적이고도 치명적인 어려움”이자, 군대에는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을 이었다. 군대를 동원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고 말이다. 기준점이 될 수 있는 15번째 자오선(브란덴부르크 관문[Brandenburg Gate]에서 동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지점)에 맞춘 표준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독일 내의 각 지방 시간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는 제국의 양극단이라도 약 30분 정도밖에 안 될 것이었다. “신사 여러분, 단지 철도용 시간 통합만으로는 제가 방금 간단히 언급했던 모든 장애들을 없애지 못합니다. 이는 전체 독일이 시간 통합에 도달했을 때, 다시 말해, 모든 지방 시간들이 일소됐을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10]

폰 몰트케는 국민들이 ― 몰지각하게도 ― 반대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신중한 고려”를 하고 나면, 천문대의 과학적인 사람들은 사태를 바르게 볼 것이며, “반발심을 무마할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해줄 것이었다. “신사 여러분, 과학은 우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과학은 독일에서의 시간 통합, 또는 중부유럽에서의 시간 통합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은 그리니치의 자오선에 기반한 세계시간을 손에 넣고 싶어합니다. 물론 과학의 입장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을 뿐더러 그 목표에도 걸맞는 시간을 말이죠.”[11] 농장과 공장의 노동자들은 본인이 원한다면 시계를 조정할 수 있다. 만약 공장주가 그의 노동자들에게 새벽부터 일을 시키고자 한다면, 3월에는 6시 29분에 문을 열게 해도 좋다. 농부들은 태양을 따르게 해도 좋다. 학교와 법원은 그들의 느슨한 일정표로 대충 때우게 해도 좋다. 그래도 독일은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이를 따랐다.

스위스에서는 (무정부주의자와의 교류 때문에 체포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힙(Mathias Hipp)이 있었는데, 그는 전기로 작동하는 진자를 개발한 것에서 시작하여, 저전압 회로를 기반으로 한 시간 분배 시스템을 실용화하기까지 꾸준한 연구를 진행했다. 뇌샤텔의 전신 및 전기 기구를 다루는 작은 공장으로 시작한 힙의 회사는 1861년 제네바에 공공 전기 시계 네트워크를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더욱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889년에 힙의 회사는 드 페이에르, 파바르게르 회사(A. de Peyer, A. Favarger & Cie.)로 이름을 바꾸었다. 1889년에서 1908년 사이, 이 회사는 중앙시계(mother clock)의 관할 영역을 철도뿐만 아니라 시계탑, 심지어는 호텔의 알람시계에까지 확장시켰다.[12] 모든 거리거리로 시간이 행진해 들어감에 따라 함께 엮일 수 있는 시계의 수를 무한히 늘리는 방법이 필요해졌고, 곧 계전기(relays)와 신호 증폭기를 개량하는 특허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1890년 베른에서 도시 시간 네트워크의 막이 열리자, 스위스 전역에 걸쳐 개량과 확장이 시도됐으며 새로운 네트워크가 싹트기 시작했다. 정밀하게 통합된 시간은 유럽의 여객열차와 프러시아의 군대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재해 있던 스위스의 시계 제조 산업에도 똑같이 중요했는데, 그들은 일관된 시간 보정(calibration) 방법을 찾는 데 필사적이었다.[13] 그러나 그것은 항상 실용적인 문제인 동시에 그 이상의 문제이기도 했다. 즉, 물질적-경제적 필요인 동시에 문화적 이상(imaginary)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늘에 맞춘 베를린 마스터 시계가 있던 베를린 천문대(Berlin Observatory)의 빌헬름 푀르스터(Wilhelm Förster) 교수는 ‘분(minute)’도 맞지 않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해도 싼” 기계라며 콧방귀를 뀌었었다.[14]

기술이 급성장함에 따라 관련된 각 분야의 특허들도 함께 출원되었다. 저전압 발전기에 대한 특허, 탈진기(escapements)와 전기자(armatures)를 이용한 전자기 수신기에 대한 특허, 전류 단속기(contact interrupters)에 대한 특허가 이에 해당된다. 1900년 이후 활짝 핀 전기정밀시계(electrochronometer)와 관련된 상당히 전형적인 작품으로는 데이빗 페렛(David Perret)의 신형 수신기를 들 수 있는데, 이 수신기는 정밀시계의 직류 신호를 검출하고 그 신호를 이용해 진동 전기자(oscillating armature)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1904년 3월 12일 오후 5시에 스위스 특허 30351호로 출원됐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작동한 파바르게르(Favarger)의 수신기도 들 수 있다. 이 수신기는 중앙시계로부터 취한 교류 전류를 변환하여 톱니바퀴를 한 방향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었다. 이 수신기는 널리 이용되었으며, 이 특허는 1902년 11월 25일 신청되어 1905년 5월 2일에 출원됐다. 원격 알람, 원격 진자 조절에 대한 특허, 전화 방식의 (무선 포함) 시간 전송에 대한 특허도 있었으며, 이 외에 열차의 출발과 도착을 맞춰주기 위한 시계, 다른 시간대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와 같은 특허도 속속 들어왔다([그림 10]).

이러한 모든 정밀시계 특허들(그와 관련된 대다수의 특허도 포함)은 베른의 스위스 특허국을 통과해야 했으며, 틀림없이 그중 상당수는 아인슈타인의 책상 위를 거쳐갔을 것이다.[15] 아인슈타인은 1902년 6월 16일부터 베른 특허국의 3등 기술 심사관(technical expert)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전자기 관련 특허를 심사했다.[16] 그는 나무탁자 앞에 서서, 사무소에 근무하던 열두어 명의 동료 심사관들과 마찬가지로, 각 특허신청서를 찬찬히 훑으며 그 핵심에 있는 원리를 찾아냈다([그림 11]).[17] 전자기 장치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전문적 기질 중 일부는 그의 가업에서 유래했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 헤르만(Hermann Einstein)과 삼촌 야곱(Jakob Einstein)은 삼촌의 고감도 전기 사용량 측정장치(시계처럼 생겼음) 특허를 기반으로 회사를 차려 운영해 왔었다. 이렇게 설립한 J. 아인슈타인 회사(J. Einstein & Cie.)에서, 야곱과 세바스찬 코른프로브스트(Sebastian Kornprobst)가 발명한 전기 계량기 중 하나는 1891년 프랑크푸르트 전기기술 박람회(Frankfurt Electrotechnical Exhibit) 보고서에서 탁월한 출품작으로 평가받았다. 그 바로 몇 페이지 앞에는 전기 시계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예비 중앙시계를 장착하는 (당시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이 실려 있었다. 전기 계량 시스템과 시계 장치 기술은 무척 밀접했기 때문에, 야곱 아인슈타인-세바스찬 코른프로브스키의 특허 중 적어도 하나는 시계 장치에도 확대 적용 가능하다는 점을 명기했던 것이다([그림 12]).[18]

이후 아인슈타인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던, 머신쉔(Machinchen, 매우 적은 양의 전하를 증폭시키거나 측정하는 장치)이라 이름 붙인 장치에 대한 기술적 작업(그는 매우 많은 특허를 소유했음) 및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Einstein-de Haas effect, 강자성 원자에 대한 그의 이론을 이끌어 낸 효과)에 대한 연구는 고감도 전기역학 장치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두 가지일 뿐이다. 전자기 시계 조율에 대한 특허들은 그의 기호에 잘 맞았을 것이며, 그 특허들은 적은 전류를 고도로 정밀한 원운동으로 변환하는 방법과 관련된 작업들에 집중되어 있었다.[19]

아인슈타인이 일하는 동안 특허국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할러(Friedrich Haller) 국장은 부하직원들에게 엄격한 감독관이었다. 일찍이 그는 아인슈타인을 꾸짖은 적이 있었다. “물리학자여서 그런지, 자네는 도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자네는 기술 도면과 명세(specifications)를 파악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그래야 내가 자네를 종신직으로 임명할 수 있을 것 같네.”[20] 1903년 9월,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임시직에서 종신직으로 임명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할러는 아직 그를 승진시킨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기계 기술에 충분히 정통할 때까지는 기다려야겠어. 물리학은 공부했으니 됐지만”이라는 소견을 피력했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앞에 쌓인 수많은 특허들을 심사하는 데 푹 빠져 살게 됨에 따라 기계 기술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1906년 4월 정도가 되어서야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물리학이 아닌 기술에도 완전히 정통하게 되었음을 당국에 납득시킨 듯하다. 그는 2등 기술 심사관으로 승진했다. 할러는 이제 아인슈타인이 “특허국 최고의 심사관 중 한 명이 됐다”고 평가했다.[21]

그림 13. 만국 박람회. Encyclopédie du siècle: L'Exposition de Paris de 1900 (Paris, 1900)에서.
아인슈타인의 전기정밀시계 창구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르렀다. 단일한 세계시간에 대한 몰트케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자들의 식을 줄 모르는 열광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 파바르게르(Albert Favarger)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힙의 수석 엔지니어 중 한 명으로 회사 경영진에서 사실상 힙의 후임자가 된 사람이었다. 1900년 만국 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에서 정밀시계 국제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n Chronometry)가 열렸는데, 이 자리는 무엇보다도 시계 조율의 현 성과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그림 13]).[22] 학회 연설 첫머리에서, 파바르게르는 전기식 시간 분배 분야가 그와 관련된 전신 및 전화 기술 분야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뒤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첫째, 기술적 어려움이 있었다. 증기기관, 발전기, 전신은 모두 사람들의 지속적인 보살핌 속에서 돌아가는 듯 보이는 반면, 원격 조율 시계들은 최소한의 어려움을 살피고 고쳐주면서 “돌봐줄 친구(ami complaisant)”에 기댈 수가 없었다 (“SD,” p. 198). 둘째로, 기술자가 부족했다. 최고의 기술자들은 전력이나 통신 장치 분야에서 일했지, 시계 장치 분야에서는 일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한탄하기를, 국가가 시간 분배 분야에 필요한 만큼의 재정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뒤쳐진 열광은 파바르게르를 좌절시켰다. “정확, 균일, 규칙적으로 분배되는 시간에 대한 긴급하고도 절대적인 그리고 집단적인 필요를 우리가 못 느껴왔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 19세기 말의 대중들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입니다. 많은 일로 항상 분주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시간은 돈’이라는 그 유명한 격언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SD,” p. 199).

파바르게르가 볼 때, 시간 분배 시스템의 열악한 상태는 현대 생활의 시대적 요청과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초’까지는 맞는 정확하고 보편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어떤 기계식, 수력식, 기체식 시스템도 이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전기가 미래의 열쇠였으며, 그 미래란 인류가 무정부성, 비일관성, 관례 따위에 의존했던 과거의 기계식 시계와 단절해야만 제대로 성립될 수 있었다. 전기식 조율 시계가 자리를 잡게 되면, 그 세계는 틀림없이 합리적이고 질서 정연한 접근법에 근거하여 성립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덧붙이기를,

당신은 수많은, 공중 시계이든 개인 시계이든, 서로 맞지 않는 시계들을 보고 어느 시계가 제일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파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단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들 모두의 정직성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대중들은 모든 시계가 같은 순간에 완전히 일치한 시간을 보여주어야만 안심을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을 때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시골 단선 위의 기차들은 종종 마주보고 돌진했으며, 선로분기 오작동으로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고 또한 실제로 벌어졌다. 이러한 연기나는 잔해더미를 순탄한 여행길로 탈바꿈시켜준 것은 바로 천문대, 철도, 전신의 통합적인 원격 시간 통제였다. 시간은 팔려나가기 시작했으며, 통합된 시간이 선로를 따라 전송됨에 따라 천문학자, 전신기사, 시계제조공 모두가 이익을 얻었다. 최초의 표준 시간대들은 철로를 따라 새겨진 이 길고 가는 영역들이었다.[23]

파바르게르는 박람회에 모인 참석자들에게 유럽 전역을 포효하며 달리는 기차의 속도가 시속 100, 150, 심지어 200킬로미터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한 기차의 운전과 진로 선택은 (달리는 열차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있는 승객들을 꼭 말하지 않더라도) 제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똑딱하는 1초마다 55미터씩 달리게 됐을 때, 당시 널리 쓰였던 기계식 조율 시스템은 구식이 되어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오직 전기식 자동 시스템만이 쓸 만했다. “가장 초보적이지만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비자동 시스템은 시간 무정부성의 직접적 원인이며, 우리는 그러한 무정부성에서 헤어나야 합니다” (“SD,” p. 201).

시간 무정부성. 파바르게르의 언급은 분명히 쥐라 산맥의 시계제조공 사이에 끈끈한 연대를 이어주고 있던 무정부주의를 향한 것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무정부주의적 성향은 표트르 크로폿킨(Pyotr Kropotkin)의 『한 혁명주의자의 회고록(Memoirs of a Revolutionist)』에도 기록돼 있다. 크로폿킨이 적기를, 경제적 독재에 대항해 바쿠닌(Mikhail Bakunin)을 비롯한 몇 명이 제기했던 이론적 문제는 분명 중요했다.

그러나 내가 쥐라 산맥에서 본 평등주의적 관계,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라나던 생각과 표현의 자주성, 그리고 원인에 대한 끝없는 헌신은 나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시켰다. 그곳의 시계제조공들과 일주일을 함께 보낸 후 산을 떠났을 때,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관점은 확정됐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였다.[24]

힙은 이 때문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파바르게르는 분명 더 많은 걱정을 했다. 개인적, 사회적 규율의 광범위한 붕괴에 대해서 말이다. 오직 동시성의 전기식 분배만이 “통합된 시간대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다 (“SD,” p. 202). 파바르게르의 원거리 동시성에 대한 공헌은 경제적이자 실용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

우리가 이 염려스러운 “무정부적-시계주의(anarcho-clockism)”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커다란 빈틈을 메우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파바르게르가 주장하기를, 국제 도량형국(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이 우선 두 개의 근본적인 양 ― 공간과 질량 ― 을 정복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은 마지막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다(“SD,” p. 203을 보라). 그리고 시간을 정복하는 방법은 천문대의 중앙시계를 따라 작동하는 전기 네트워크를 꾸준히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 네트워크는 계전기를 작동시켜 신호를 증폭시키고 대륙 전역의 호텔, 거리 구석구석, 시계탑에 있는 자동 시계들에 조절 신호를 보낼 것이다. 파바르게르가 몸담고 있던 곳은 바로 베른 네트워크의 동기화를 담당했던 회사였다. 1890년 8월 1일, 베른의 시계 바늘들이 똑같이 움직이게 됐을 때, 언론에서는 이를 “시계의 혁명”이라 환호했다.[25] 하나 잊어선 안될 것이 있는데, 베른에서는 어딜 가나 대형 공중 시계 몇 개는 분명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8월, 그 시계들이 전부 발맞추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시간의 질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계 조율을 광범위하고도 중대한 문화적 사건으로 본 것은 스위스 신문들만이 아니었다. 1890년대 북아메리카의 시간통합 지지자였던 샌드포드 플레밍(Sandford Fleming)과 그의 동조자들에게, “보편적” 또는 “우주적” 시간의 확립은 실용적 문제이자 그 이상의 문제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소통과 운송에 혜택을 줄 뿐 아니라 문화적, 개인적 생활 곳곳에까지 진보를 가져다 줄 “소리없는 혁명”이었던 것이다.[26]

1890년대의 아인슈타인은 아직 시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95년, 16세의 젊은이였던 그는 이미 전자기 복사의 본성에 매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던 그의 상상에서조차, ‘정적(static) 실체인(substantial) 에테르에서의 파동’이라고 하는 종래의 복사 개념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 빛의 파동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전역학은 이를 허용하는 듯이 보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마치 동일한 간격으로 계속되는 파도를 탈 때처럼, 그는 시간적으로는 완전히 정지한 채 공간적으로만 펼쳐져 출렁이는 전자기장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금까지 관찰된 어떤 것과도 부합하지 않았다.[27] 4년 후,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움직이는 물체 및 전기동역학의 본성과 필사적으로 씨름하고 있었다. 그는 애인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ć)에게 어설픈 에테르 이론은 꼭 없어져야 할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되풀이해서 얘기했다.

자기야(D[ear] D[ollie]),
난 지금 헬름홀츠(Helmholtz)의 책을 덮고 이제 헤르츠(Hertz)의 전기력 전파 부분을 다시 세심히 보고 있는 중이야. 전기동역학에서의 최소작용 원리를 다룬 헬름홀츠의 논문이 잘 이해가 안됐거든. 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이 오늘날 얘기되는 방식으로는 실재에 부합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점점 들어. 또 그것이 보다 간단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에테르”라는 용어가 전기 이론에 도입되면서, 그 운동이 기술될 수 있는 매질 개념도 따라오게 됐잖아. 그런데 내 생각엔, 그 매질에 물리적 의미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아.[28]

아인슈타인이 결론짓기를, 전기와 자기는 물리적 실재성을 띤 “진짜” 전기 덩어리들이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정의 가능한 것이었다. 19세기 물리 이론의 핵심에 있던 에테르는 사라졌다. 이렇게 볼 때, 상대론의 결정적인 몇몇 퍼즐 조각은 아인슈타인이 특허국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제자리에 맞춰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맥스웰 방정식을 알고 있었고, 움직이는 전하에 대한 실재론적 그림을 추구했으며, 에테르를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중 어떤 것도 시간을 다루는 문제를 직접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19세기의 몇몇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기준 좌표계에 따른 시간 변수 t의 수학적 변환 방식들을 두고 필사적인 실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푸앵카레, 로렌츠,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들 모두는 진정한 에테르 정지 좌표계에 대한 관념을 확고히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에테르 정지 좌표계에서의 진정한 (절대적) 물리적 시간을 여타의 국소적 시간들과 동등한 무게로 다루지 않았다. 푸앵카레, 로렌츠, 아브라함은 자연의 기본 힘들에 대한 특수한 가정에서 시작하고자 했는데, 예컨대 그들은 간섭계의 바늘을 구성하는 원자 수준의 물질들을 붙잡아주는 힘, 전자가 정전기적 자체반발력에 의해 폭발하는 것을 막아주는 힘 따위를 상정했다. 그들은 그러한 물질에 대한 구성적(constructive), 건축적(built-up) 이론으로부터 운동학―힘이 가해지지 않은 물질의 동작―을 연역해 내고자 했다. 아인슈타인이 원한 것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그는 간단명료한 물리적 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이론을 목표로 삼았다. 열역학이 에너지 보존과 엔트로피 증가라는 단순한 원리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푸앵카레, 로렌츠, 아브라함은 계산상으로나 유용한 인위적인 시간 관념을 상정하고서, 그것이 좌표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까에 관한 특수한 가정들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공간 측정과 시간 조율의 원리에 기초한 물리적 가정을 가지고 물리학을 시작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건은 1902년 아인슈타인이 특허국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의 몇 년 사이에 벌어졌다.[29]

특허 일을 하는 동안 그가 할러로부터 받은 지시 사항 중에는 매사에 비판적이 되라는 지침도 있었다. “신청서를 집어 들었으면 일단 그 발명가가 말한 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라.” 맹목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발명가의 사고 방식을 쫓다가 결국 자네를 해치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자네는 비판적인 자세를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네.”[30] 이는 특허 업무를 위한 조언이었지만, 물리학의 에테르에도 잘 적용되었다.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의 경우에, 아인슈타인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문제는 대략 7년 동안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히던 문제인 동시에, 당시의 일류 물리학자들도 갈수록 골치 아파하던 고민거리였다. 한편, 당시 그는, 문자 그대로, 전기적으로 조율된 시간에 대한 들끓는 흥분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매일 아인슈타인은 집에서부터 특허국까지의 짧은 거리를 크람 거리(Kramgasse)를 따라 천천히 걸어다녔다. 즉 날마다 그는, 베른 전역을 자신의 조율 시계로 통솔하던 대형 시계탑들과 중앙 전신국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무수한 거리 시계들을 분명 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가장 유명한 시계탑인 ‘자이트글라켄투름(Zeitglockenturm)’ 아래를 꼭 지나야 했으며, 다른 여러 시계들도 지나쳐야 했다([그림 14], [그림 15], [그림 16]). 1905년 5월 중순의 어느날 ― 더 정확히 말해 5월 15일 베른 통합 시간대의 경계로 가고 있을 때 ― 그와 그의 절친한 친구 미셀 베소(Michel Besso)는 전자기학의 문제를 모든 방면에서 막바지까지 몰아붙인 상태였다. 아인슈타인이 회상하길, “그 때 갑자기 문제 해결의 열쇠가 떠올랐습니다.” 다음날 베소를 만났을 때, 그는 인사도 빼먹었다. “‘고마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어.’ 시간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내 해결책이었습니다. 시간은 절대적인 방식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시간과 신호의 속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31] 베른 시계탑(베른의 유명한 동기화된 시계들 중 하나)을 올려다본 후 근처 뮤리(Muri)의 시계탑(베른의 중앙시계와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음)을 바라보던 중에, 아인슈타인은 그의 시계 동기화를 기획하게 된 것이다([그림 17], [그림 18]).[32]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친구 콘라드 하비히트(Conrad Habicht)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논문 사본을 부탁하면서 답례로 네 편의 신간 논문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네 번째 논문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한 논문인데, 지금 시점에서는 거친 밑그림에 불과하지만, 공간과 시간의 이론에 변형을 가하고 있어. 이 논문의 순수 운동학 부분은 [시간 동기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시작하고 있는데] 분명 너한테도 흥미로울 거야.”[33] 10년간의 고민은 이 문제 속으로 녹아들었고, 결국 시간 동기화는 특수상대론의 발전에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제 1905년 6월 말에 완성된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단지 생계 유지를 위해서만 특허국을 다닌 “철학자-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 대신에, 우리는 그를 “특허심사관-과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고도로 상징화된 현대적 기계장치를 통해 상대성 이론에 깔려있는 형이상학을 굴절시킨 사람으로 말이다. 기차는 예전처럼 7시에 역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원거리 동시성이란 말에 입각해서 고민한 사람은 이제 아인슈타인 혼자가 아니다. 전자기적으로 조율된 시계를 통해 기차의 도착 시간을 결정하는 일은 바로 유럽 전역을 괴롭히던 기술적 문제였다. 이제 문제의 시스템 전 분야에서 특허 경쟁이 벌어졌다. 전기 진자를 개량하고 수신기를 개조하고 새로운 계전기를 도입했으며 시스템 용량을 키웠다. 1902-1905년의 중부 유럽에서 시간 조율은 전혀 비밀스럽거나 불가해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호 연결되어 보다 빨라진 현대적 세계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계 산업, 군대, 철도의 최전선이자 핵심이었다.

원거리 동시성의 문제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아인슈타인은 강력하고도 매우 가시적인 신기술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 신기술은 동시성을 규약적으로 다루는 기술로, 기차 노선들을 동기화하거나 경도를 정하는 데 처음 도입되어 시간대를 결정하는 데에도 쓰였다. 아인슈타인이 ‘원리에 기초한 물리학’을 향한 자신의 기획 속에 규약적 원리를 끌어들인 일은 바로 이러한 실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존재했던 시간 조율 시스템의 흔적은 그의 1905년 논문에서도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명시적으로 거부했던 조율 기획안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한 관찰자가 좌표계의 중심에서 시계를 들고 있다. 공간좌표 (0,0,0)에 고정되어 있는 마스터 시계는, 떨어진 각 지점에서 출발한 전자기 신호들이 [원점 기준으로] 똑같은 국소적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에 이를 동시라 정한다. 그러나 이제 이 표준적인 중앙집중식 시스템은 더 이상 추상적 허수아비로 보이지 않는다. 이 철저한 분기식 시계 조율 구조는 전선, 발전기, 시계들로 가시화되어 시간 맞추기에 관한 책이란 책마다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앙시계에 제2, 제3의 시계들이 딸려 있는 유럽 시스템의 것이었다([그림 19], [그림 20], [그림 21]을 보라). 중앙에서 보낸 신호가 도착하면, 바로 옆이든 100km 떨어진 지점이든 상관없이 이들은 동시로 정의됐다. 그러한 원리를 기반으로 기차를 운전했고, 군대를 징집했으며, 전신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 조율 신호를 전파로 보낼 준비가 갖춰지던 시점도 바로 이 시기였다. 1904년 스위스와 프랑스 양국에서는 새로운 전파식 시간 조율 시스템을 시험·개량하거나 실제로도 배치시켜 보는 등 그에 대한 활동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뚜르(La Nature)』의 편집인은 무선 방식의 시간 분배 신기술을 소개하기 위해 손수 펜을 잡기도 했다. 파리 천문대(Paris Observatory)에서 수행된 실험을 소개하면서, 정밀시계의 도움으로 이제는 100분의 2 내지 3초도 벗어나지 않는 원거리 동기화가 가능해진 것 같다고 적었다. 또한 그 무선 기술은 파리를 비롯한 주변 지역 구석구석까지 시간을 분배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적었다. 이는 경도 결정과 같은 과학적 목적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선의 물리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을 바다의 배와 일반 가정에까지 전송할 수 있게 해주었다.[34] 1905년 무렵 미 해군은 전파로 통제되는 시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1910년 무렵 에펠탑 기지국은 유럽 전역의 시계 바늘을 결정해주고 있었다([그림 22]). 1911년의 한 뛰어난 전파 시간 기술자에 따르면, 전파 동시성에 대한 계획은 전파 자체와 함께 시작했는데 아마도 1901년 즈음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35] 그러나 전신선을 통해서든 무선을 통해서든 간에, 중앙집중식 시간 분배는 통일 독일 제국의 눈부신 시대적-물질적(temporal-physical) 성과였다. 그것은 폰 몰트케가 추구했던 것으로, 베를린의 실레시스헤르 반호프(Silesischer Bahnhof)에 있는 웅장한 ‘프리마레 노르말루어’ 또는 뇌샤텔의 우아한 바로크식 ‘호를로게-메레’를 통해 형체를 얻었다.

전신기사, 측지학자, 천문학자에게,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시간 조율 기획안은 이미 사용되던 시계 조율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얘기였다. 1921년 11월 19일 프랑스 우편전신 고등전문학교(École Professionelle Supérieure des Postes et Télégraphes)의 레옹 블로흐(Léon Bloch)는 시간의 의미를 설명하다가, 청중들이 이미 훤히 알고 있을 만한 실제 기술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지구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시간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천문상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를, 그러니까 파리 천문대의 중앙진자(mother pendulum)와 같은 시계를 하나 가지고서 떨어진 지역까지 무선으로 시간을 전송하면 되죠. 이러한 전송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그것은 시간을 맞추고자 하는 두 기지국에서 평범한 빛 신호 또는 전파 신호가 지나는 것을 감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36]

적어도 우편전신 고등전문학교에서는, 상대론이 실제 조율된 시계들의 기반 시설을 통해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는 단순히 시계 동기화를 연상시키는 것 이상이 관련되어 있다. 1924년 무렵 또는 그보다 약간 이전 시점부터, 시계 조율 기술자들은 (아인슈타인을 따라) 전파의 유한한 속도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즉, 아인슈타인의 ‘보편 시간 기계장치(universal time machine)’는 기술적 세계로부터 파생되어 물리학적-형이상학적 세계를 변모시키더니, 이제는 다시 기계장치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37]

사실, 시계 조율의 물리적 ― 그리고 문화적 ― 충격과 더불어 그 작동 방식의 갖가지 변형들까지 목격한 상황에서,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할 듯하다. 1905년 이전에 빛의 유한한 속도를 고려한 엄격한 동기화를 가지고 시간을 정의하려고 애쓴 사람이 아인슈타인 말고는 없었을까 하고 말이다. 무척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 아마도 큰 무리없이 ― 1893년 1월 4일부터 프랑스 경도국(French Bureau of Longitude)의 일원이 되어, 1899년에 (그리고 1909년에도) 경도국장이 되었는데, 사실 경도 측정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시계 조율과는 뗄 수 없는 분야였다. 게다가, 그는 1902년 7월 4일부터 우편전신 고등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는데, 전기 조율 시계가 등장했을 때 그것을 관장하던 곳 또한 우편전신 고등전문학교였다. 당연히 그 사람은 푸앵카레였다.[38]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빛 신호의 교환을 통해 조율되는 시계를 창안했다.

동시성에 대한 푸앵카레의 연구는 1898년에 처음 시작됐다. 당시 그는 동시성이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에겐 그러한 종류의 관념을 가지게끔 하는 어떠한 직접적인 직관도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특정한 규칙뿐이며, 그 규칙이란 매우 구체적인 기술적 작업을 할 때, 예를 들어 경도 측정과 같은 작업을 할 때 사용되어야 한다. “항해사나 지질학자가 경도를 측정하고자 할 때,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 다뤄왔던 바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들은 파리에 없더라도 파리의 시간을 정해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이에 수반되는 많은 문제를 감수해야겠지만) 시계를 직접 가지고 다니거나, 천체상의 사건을 참고할 수 있으며, “전신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매우 당연한 얘기지만, 예를 들어, 베를린에서는 파리에서 신호를 보낸 조금 뒤에야 그 신호를 받을 것이다.”[39] 이는 순전히 가상적이기만 한 사례가 아니다. 논평자들은 전신에 대한 푸앵카레의 이러한 언급을 두고, 상상 속에서 고민한 문제, 즉 추상적인 철학적 숙고의 사례로 여기곤 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898년 무렵, 실제 시계 조율 시스템은 경도 측정에 사용되고 있었다. 사실, 측지학과 기상학에서는 (경도 측정을 위해) 조율된 시간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필요는 철도의 경제성과 안전성에 대한 요구와 맞물리면서 표준 시간대 프로젝트를 착수시키는 데 한몫을 담당했었다.[40]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898년 당시 푸앵카레는 경도국의 중진이었으며, 그의 위 언급에서 전신은 유한한 신호 전달의 추상적 사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고 명백히, 시계 조율에 기반한 경도 측정 방법을 뜻했다.

일반적으로, [파리에서 베를린 사이의] 전송 시간은 무시되며, 두 사건은 동시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하자면, 복잡한 계산을 통한 약간의 보정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그 값이 측정 오차보다도 작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보정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성의] 엄밀한 정의를 제공하고자 하는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의 이론적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M,” p. 12; “MT,” p. 35; trans. mod.]

“이론적으로 필요한 것”은 동시성이 항상 규약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예에서 볼 때, 푸앵카레의 규약주의는 바로 그 당시에 시간대 동시성· 철도 동시성·국가적 시간통합을 위해 이용되고 있던 지저분한 실제 규약들의 집합과 동음이의어 이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1902년 봄 이후 언젠가, 아인슈타인이 푸앵카레의 “시간의 측정”이란 논문을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친구 모리스 솔로빈(Maurice Solovine)에 의하면, 그들이 속한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거창한 이름의) 작은 토론 모임에서 그 1898년 논문이 인용된 푸앵카레의 후속작 『과학과 가설(Science and Hypothesis)』을 분명히 읽었다고 한다.[41] 푸앵카레는 시간-조율용 규약을 직관상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는 시도들에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위에서 자신이 언급했던 현실적인 이유에서 뉴턴 운동학을 폐기하려 하지는 않았다. 동시성에 대한 평범한 규칙들은 “무의식적 편의주의의 산물”로 “우리가 지킬 필요는 없는 것들이며, 우리는 즐거이 다른 걸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들을 버린다면, 물리학·역학·천문학 법칙들의 명확했던 체계는 완전히 헝클어질 수밖에 없다” (“M,” p. 13; “MT,” p. 36). 푸앵카레 생각에, 뉴턴적 세계에 가해질 수정은 사소하지만 복잡해 보였고, 따라서 “이론적 필요성”은 단순성의 요건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은 푸앵카레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원거리 동시성을 탐구했다. 그러나 푸앵카레에게 불가피한 복잡성의 징조로 보였던 ‘새로운 빛-신호 동기화’에서,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훨씬 더 간결한 물리학의 전조를 보았다.[42]

세기 전환기의 유럽-아메리카는 겹겹의 조율 네트워크들의 복잡한 그물망 ― 정밀하고 점점 보편적이 된 시계 시스템하에서의 경도 측량, 기차 선로, 전신선, 기상학 네트워크 따위 ― 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견 가상의 시계 네트워크로만 보였던 아인슈타인의 시계 조율 시스템은 사실 거대한 세계-기계장치(world-machine)였던 것이다. 자기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하나의 기계장치로서, 분명 가상적인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전자기 신호의 교환을 통해 시계들을 동기화했던 진짜 전선들을 엮어 만든 기계였다고 볼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매우 이론적인 논문을 위와 같이 기술적으로(technological) 독해함으로써, 우리는 다음의 최종적인 관찰에 이르게 된다.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해”의 스타일이 보통의 물리학 논문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눈길을 끌어왔다. 이 논문엔 각주도 없고 방정식도 별로 없으며, 새로운 실험 결과도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과학의 첨단 영역과 매우 동떨어져 보이는 간단한 물리적 과정에 대한 조롱만이 가득할 뿐이다.[43]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서 아무 논문이나 골라 보라. 거의 매 논문마다 그와 매우 다른 형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논문들은 일반적으로 실험상의 문제나 계산상의 문제를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논문들은 다른 논문에 대한 참조로 가득하다. 그런데 한번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특허 세계의 눈으로 읽어 보라. 그러면 그토록 이상해 보였던 논문이 ― 적어도 스타일의 경우에 ― 갑자기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게 된다. 최근의 한 저자가 얘기했듯이, 특허라고 하는 것은 그 본래적 특성상, 주석에 달린 다른 특허들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만약 거기에 안주한다면 저자가 원하는 기업가 이익(entrepreneurial advantage)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극단적인 조롱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특허 용어가 그렇듯이) 특허는 사실 “기술에 능한 사람”을 위해 쓰여지지, 전문 독자를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44]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는 어떤 절차(procedure)를 묘사하고자 할 뿐, 긴 작업 사슬의 방향(way)을 가리키려 하진 않는다.

광활한 시간 조율의 세계에 이러한 과학-기술간 상호개입을 끼워 넣게 되면, 새로운 수수께끼가 발생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16세에 독일 시민권을 포기한 이후 평생 “군대식”의 “군중 생활”을 비난해왔던 바로 그 아인슈타인이, 역설적이게도 26세가 되어 폰 몰트케의 프로젝트를 완성했기 때문이다.[45] 시간은 ‘시간 맞추기’와 동일시되었고, 시간통합(Einheitszeit)은 계속 확장되는 영역에서 원거리 동시성을 ‘절차적인 방식으로’ 확립하는 작업의 기술정치적(technopolitical) 종착점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시계 동기화 시스템은 이전의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전자기 신호를 통해 시계들을 함께 연결시켰고, 이를 통해 시간이란 것을 절차적 동기화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기획하에서, 시계 통합은 도시, 지방, 제국은 물론 대륙과 지구 너머로 확장되었고, 이제는 유사-데카르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무한한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됐다.

그러나 그 역설은 다시 뒤집어진다. 아인슈타인의 시계 조율 절차는 ‘전자기적 시간 통합’을 향한 최소 15년의 집중된 노력 위에 세워졌지만, 역설적으로 폰 몰트케의 기획 속에 있었던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아인슈타인의 무한한 시계 장치에는 ‘프리마레 노르말루어’도, ‘호를로게-메레’도, ‘마스터 시계’도 없었다. 그의 장치는 무한한 시공간적 확장이 가능한 조율 시스템이었지만, 그 무한에는 중심이 없었다. 위로는 베를린 천문대를 통해 하늘과 연결되고 아래로는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어떤 실레시스헤르 반호프도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시간통합 프로젝트는 독일 통합을 위한 시대적 요청에서 시작됐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프로젝트를 무한히 확장시킴으로써 그것을 완성시킴과 동시에 전복시켰다. 그는 통합대의 울타리를 없앴지만, 그 과정에서 중앙시계(Zeitzentrum)로서의 베를린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중심’이라는 그 범주 자체를 뒤집는 장치를 고안했다. 전자기 신호의 교환을 이용해 새롭게 정의된 시간 조율을 가지고, 아인슈타인은 특정 에테르 정지 좌표계에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전혀 기대지 않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이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좌표계에 따른 비대칭성을 없앤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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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아인슈타인은 1909년에 베른 특허국을 그만둔 이후 쮜리히대학과 프라하를 거쳐 결국 1914년에는 베를린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 정밀시계 통합의 상징(avatar)이었던 파바르게르는 전기식 시간 맞추기에 관한 550쪽의 전문기술서를 광범위한 문화적 용어로 재구성한 3판을 출판했다. 그가 주장하기를, 1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기술 발전을 추동했지만, 그것은 또한 평화 시기에 창조했던 인류의 수많은 유산을 파괴했다. 평화 시기와 대조적으로 전후의 세계는 “폐허와 비탄과 고통 속에 빠져있었다.”[46] 이러한 재앙에서 물질적으로나마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 일은 인류를 구해줄 것이다. 그런데, 역학에 의하면 일은 시간과 힘의 곱이다. 그가 이어 말하기를, 시간은 “실체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해 그것은 물질이나 공간만큼 불가사의하다.”(시간 덕분에 둔감한 스위스의 시계제조공들조차 형이상학을 하는 처지가 됐다.)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명상을 하거나 놀거나, 사람의 모든 활동은 의식하든 못하든 시간 속에서 행해진다. 질서 없이는, 또 상세한 계획 없이는 무정부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이는 물리적·지적·도덕적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천문대에서 시간을 엄밀하고도 정확하게 측정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측정된 시간을 천문대의 작은 성에 가두어 두어선 안 된다. 정밀한 시간은 그것을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라도 전기적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요컨대 [사람들의 생활과 번영을 위해] 우리는 시간을 보급해야 하며, 또한 시간을 민주화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시간의 주인(maître du temps), 즉 ‘시’뿐만 아니라 ‘분’, ‘초’, 그리고 특별한 경우엔 1초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백만분의 일까지 지배하는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47] 파바르게르에게, 분배되고 조율된 시간은 돈 이상이었다. 그것은 각 사람에게 내적인 동시에 외적인 질서를 제공해 주는 방법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율 시계는 결코 단순한 톱니바퀴와 자석이 아니었다.

내가 시계 조율의 물질문화를 검토함으로써 기대하는 바는, 아인슈타인의 자리를 기계장치와 형이상학을 가로지르는 의미의 세계 안에 마련해주는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내가 이 글(과 다른 글[48])에서 과학의 물질문화를 연구함으로써 기대하는 바는 사물과 생각의 관계에 대해 똑같이 문제가 있는 양극단의 관점을 피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맹목적인 유물론 또는 경험주의의 오랜 전통으로, 사물의 성질 및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의 인과적 작용으로 단일한 관념이 생겨난다는 관점이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특히 논리실증주의류의) 경험주의는 직접적이면서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과학의 발전에 대한 귀납적인, 즉 관찰 중심적인 설명을 고안했다. 이는 『하바드 실험 과학 사례집(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에서 체계화되어,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존재했다. 이 틀에서 이론 및 그와 연관된 철학은 항상 잠정적인 덧칠일 뿐 과학의 견고한 뼈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귀납적 과정의 부정할 수 없는 다음 단계를 밟음으로써 에테르를 점차 몰아낸 듯 보이기도 한다. 빛의 속력(c)과 빛의 상대속도(v) 사이의 비(v/c)를 측정했을 때, 에테르는 그 소수점 첫째자리에서도, 둘째자리에서도 검출되지 않았다. 따라서(이 논증이 그대로 진행되어), 아인슈타인은 에테르가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49] 확실히, 이런 식으로, 실험에 토대를 둔 과학자로 아인슈타인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꽤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제국 물리-기술 연구소(the 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에서 고속 전자 또는 자이로컴퍼스에 대한 세심한 실험과 연구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가 실험실 절차와 기계 조작에 매우 능숙한 이론가였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사물은 생각을 구성했다.

반면에, 위와 정반대인 프로젝트의 전형으로는 1960, 70년대의 반실증주의 운동을 들 수 있는데, 이 운동은 이전 세대의 인식 순서를 역전시키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프로그램(programme), 패러다임(paradigm), 개념 도식(conceptual scheme)이 먼저였고, 실험과 기구는 무조건 그 아래 있는 것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제는 생각이 사물을 완전히 구성했다. 반실증주의의 창에 비친 아인슈타인은 대칭성, 원리, 조작적 정의 따위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물질 세계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던 철학적 혁신가인 듯 보인다. 물론 여기에도 상당한 진실이 있다. 이러한 반실증주의적 반작용으로부터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실험 결과들을 신중하게 가리던, 예를 들어, 특수상대론에 대해 알려진 실험실 반증을 의심스러워하거나 일반상대성 이론과 천문학 사이의 미묘한 모순을 믿지 않았던 일들을 주의깊게 보는 법을 배웠다.

양쪽 각각의 역사 서술 전통이 지닌 역할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그 사이의 절충안을 제안하려는 것은 아니며 기술 환원주의를 옹호하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대신, 우리에겐 맹목적인 관념론의 역사 서술과 맹목적인 유물론의 역사 서술 양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상황을 헤어 나오는 길이 있어 보인다. 이는 철학적으로 충만하며 역사적으로 맥락지어진 물질 문화의 형태를 띨 것이다. 전신, 증기기관, 과학 도구, 천문 관측에 관한 최근 몇 년 간의 연구들은 사물과 생각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식의 이치에 닿지 않는 이분법을 거부하는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50] 각각의 사례에서, 우리는 역사 속의 특정한 가치 및 상징과 맞물려 있었던 철학적 쟁점들을 탐구할 수 있다.

1902년 아인슈타인이 베른 특허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전기적 세계가 기계적 세계를 정복하고서 상징적으로는 현대성의 꿈에까지 이미 다다른 양 도취감에 취해 있던 세계에 들어온 셈이다. 그는 시계 조율의 문제가 현실적인 문제였던 세계(기차, 군대, 전신)를 목도했다. 그 세계에서는 작동가능한, 특허가능한 해결책을 요구했는데, 이는 정확히 그의 관심 영역이자 그의 직업상 전문 분야―정밀 전기 기계장치 분야―였다. 특허국은 절대로 먼 바다의 등대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특허국은 현대 기술의 거대한 행렬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특별 관람석이었다. 조율 시계들의 행렬이 지나갈 때, 그들은 단독으로 다니지 않았다. 전기식 시계 조율 네트워크는 정치적, 문화적, 기술적 통일,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의미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새로운 ‘규약적 동시성 장치’를 가지고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를 다루는 도입부에 달아 버렸다. 어떤 면에서, 그는 19세기 거대한 시계 조율 프로젝트를 완성했지만, 마스터 시계를 제거하고 ‘규약적인 시간 맞추기’를 물리적 원리로 승격시킴으로써, 그야말로 현대적인, 20세기 상대론적 물리학을 내놓았다.

다중상징적(여러 경쟁하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으로, 시간통합(Einheitszeit)의 통제된 조율은 장엄한 제국, 민주주의, 세계시민권, 반(反)무정부주의를 번갈아가며 의미했다. 이들이 공통으로 지닌 것은, 각 시계가 개인을 나타내고 시계 조율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논리를 표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처럼, 국가적·세계적 통제 프로젝트는 가능한 기술-문화적 변화의 특정한 조건을 이끌어 냈다. 그 변화는 과학-기술적인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것이었다.

지난 30년 사이에, 상향식 설명과 하향식 설명 사이의 대결은 진부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상대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연금술과 천문학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했던 중세의 유명한 얘기를 빌려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기적으로 통제된 시계 네트워크를] 내려다봄으로써, [제국, 형이상학, 문명사회의 상을] 올려다본다. [아인슈타인의 규약화된 원거리 동시성의 형이상학과 공간, 시간, 운동의 문화적 전환을] 올려다봄으로써, [베른 특허국을 거쳐간 전선, 톱니바퀴, 전파신호를] 내려다본다. 우리는 기계에서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에서 기계를 본다.

각주

  1. Albert Einstein, 1933년 10월 3일, 런던 왕립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의 강연. Einstein on Peace, eds. Otto Nathan and Heinz Norden (New York, 1960), p. 238.
  2. Einstein,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 Annalen der Physik 17 (1905): 892, 이하 “ZE”; trans. Arthur I. Miller, “On the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appendix in Albert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Emergence (1905) and Early Interpretation (1905-1911) (Reading, Mass., 1981), p. 393, 이하 “OE.”
  3. Peter L. Galison, “Minkowski's Space-Time: From Visual Thinking to the Absolute World,”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10 (1979): 85-121 을 보라.
  4. 우리는 Gerald Holton의 폭넓은 연구가 실린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Kepler to Einstein (Cambridge, Mass., 1973)을 통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읽는 방법을 적지 않게 배웠다. 나는 또한 다음의 최신 저작들로부터 매우 많은 도움을 받았다.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Oxford, 1982), Andrew Warwick, “On the Role of the FitzGerald-Lorentz Contraction Hypothesis in the Development of Joseph Larmor's Electronic Theory of Matter,” Archive for History of Exact Sciences 43, no. 1 (1991): 29-91, “Cambridge Mathematics and Cavendish Physics: Cunningham, Campbell, and Einstein's Relativity, 1905-1911, Part I: The Uses of Theory,” Studies in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3 (Dec. 1992): 625-56, and “Cambridge Mathematics and Cavendish Physics: Cunningham, Campbell, and Einstein's Relativity, 1905-1911, Part II: Comparing Traditions in Cambridge Physics,” Studies in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4 (Mar. 1993): 1-25; Richard Staley, “On the Histories of Relativity: The Propagation and Elaboration of Relativity Theory in Participant Histories in Germany, 1905-11,” Isis 89 (June 1998): 263-99; and Albert Fölsing, Albert Einstein: A Biography, trans. Ewald Osers (New York, 1997), p. 155.
  5. Helle-Zeit-hunnkle Zeit: In Memoriam Albert Einstein, ed. Carl Seelig (Zurich, 1956), p. 71; trans. in The Quotable Einstein, ed. Alice Calaprice (Princeton, N.J., 1996), p. 182에서 인용.
  6. 원격으로 조율되는 시계에 대해 논의했던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찰스 휘트스톤, 윌리엄 쿡(William Cooke), 스코틀랜드의 시계제조공 알렉산더 베인, 미국의 발명가 사무엘 F.B. 모스(Samuel F.B. Morse) 등을 들 수 있다. 휘트스톤, 쿡, 모스의 경우, 시계 조율은 전신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따라나왔다. Kenneth F. Welch, Time Measurement: An Introductory History (Newton Abbot, 1972), pp. 71-72를 보라.
  7. 1900년 이전 시계 조율을 둘러싼 광법위한 작업들을 살펴보려면, A. Favarger, “L'Électricité et ses applications à la chronométrie,” Journal suisse d'horlogerie 9 (Sept. 1884-June 1885), esp. pp. 153-58; Favarger, “Les Horloges électriques,” in Histoire de la pendulerie neuchâteloise, ed. Alfred Chapuis (Paris, 1917), pp. 399-420; Friedrich Anton Leopold Ambronn, Handbuch der astronomischen Instrumentenkunde, 2 vols. (Berlin, 1899), Vol. 1, pp. 183-187에 있는 일련의 글을 보라. 베른 네트워크의 확장에 대해서는, Gesellschaft für elektrische Uhren in Bern, Jahresberichte (1890-1910), Stadtarchiv Bern을 보라.
  8. Philip S. Bagwell, The Transport Revolution from 1770 (London, 1974), p. 125; Wolfgang Schivelbusch, The railway Journey: Trains and Travel in the Nineteenth Century, trans. Anselm Hollo (New York, 1980), pp. 48-50에서 재인용.
  9. 균일한 시간의 확립에 대해서는 Stephen Kern, The Cultural of Time and Space, 1880-1918 (Cambridge, Mass., 1983), pp. 11-14와 Derek Howse, Greenwich Time and the Discovery of Longitude (Oxford, 1980), pp. 119-20에서 논의된 바 있다. 사이먼 섀퍼(Simon Shaffer)는 “Time Machines”, in The Whipple Museum of the History of Science : instruments and interpretations, eds. Liba Taub and Frances Willmot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345-66에서 H. G. 웰스(H. G. Wells)의 『타임머신』을 기계식 작업장, 문학, 과학적 연구가 시간을 둘러싸고 맞물려 교차하던 세기전환기의 안내서로 사용했다.
  10. Helmuth von Moltke, “Dritte Berathung des Reichshaushaltsetats: Reichseisenbahnamt Einheitszeit,” Gesammelte Schriften und Denkwürdigkeiten des General-Feldmarschalls Grafen Helmuth von Moltke, 8 vols. (Berlin, 1891-93), 7: 38-39, 39, 40; trans. Sandford Fleming, “General von Moltke on Time Reform,” in Documents Relating to the Fixing of a Standard of Time and the Legalization Thereof, Canada Parliament Session 1891, no. 8, pp. 25, 25, 26; trans. mod.
  11. Von Moltke, “Dritte Berathung des Reichshaushaltsetats: Reichseisenbahnamt Einheitszeit,” p. 40; trans. Fleming, “General von Moltke on Time Reform,” p. 26; trans. mod.
  12. 힙에 관한 자세한 전기를 알고 싶다면, Aymon de Mestral, Mathias Hipp, 1813-1893; Jean-Jacques Kohler, 1860-1930; Eugène Faillettaz, 1873-1943; Jean Landry, 1875-1940 (Zurich, 1960), pp. 9-34를 보라. David S. Landes, Revolution in Time: Clocks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Cambridge, Mass., 1983), pp. 237-337은 이글의 초점인 네트워크보다는 시계 생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스위스 시계 산업에 관한 훌륭한 글이다.
  13. Favarger, L'Électricité et ses applications à la chronométrie, 3d ed. (Neuchâtel, 1924), pp. 408-409를 보라.
  14. Gerald Hohrn-van Rossum, History of the Hour: Clocks and Modern Temporal Orders, trans. Thomas Dunlap (Chicago, 1996), p. 350. 그리고 Ulla Merle, “Tempo! Tempo! Die Industrialisierung der Zeit im 19. Jahrhundert,” in Uhrzeiten: Die Geschichte der Uhr und ihres Gebrauches, ed. Igor A. Jenzen (Frankfrurt am Main, 1989), pp. 166-178도 보라.
  15. 수백 개의 관련 특허들은 당시(1902-1905)의 Journal suisse d'horlogerie에 열거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스위스 특허국은 아인슈타인을 거쳐간 모든 특허들을 그 취득 기간 18년이 지나서 의무대로 폐기하였다. 이는 특허에 대한 표준 절차였으며, 아인슈타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예외는 없었다. Fölsing, Albert Einstein, p. 104를 보라.
  16. 아인슈타인의 특허 업무와 과학적 작업 사이의 연결은 자이로마그네틱 컴퍼스(gyromagnetic compass)와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Einstein-de Haas effect)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Galison, How Experiments End (Chicago, 1987), chap. 2를 보라. 추가로, Thomas Hughes, “Einstein, Inventors, and Inventions,” Science in Context 6 (Spring 1993): 25-42와 Lewis Pyenson, The Young Einstein: The Advent of Relativity (Bristol, 1985)를 보라. 아인슈타인이 수행한 전기 특허 심사 업무에 관해서는, Max Flückiger, Albert Einstein in Bern: Das Ringen um ein netues Weltbild: Eine dokumentarische Darstellung über den Aufstieg eines Genies (Bern, 1974), p. 62를 보라.
  17. Flückiger, Albert Einstein in Bern, p. 66을 보라.
  18. J. Einstein & Cie. and Sebastian Kornprobst, “Vorrichtung zur Umwandlung der ungleichmässigen Zeigerausschläge von Elektrizitäts-Messern in eine gleichmässige, gradlinige Bewegung,” Kaiserliches Patentamt no. 53546, 26 Feb. 1890; “Neuerung as Elektrischen Mess- und Anzeigervorrichtungen,” Kaiserliches Patentamt no. 53846, 21 Nov. 1889; “Federndes Reibrad,” Kaiserliches Patentamt no. 60361, 23 Feb. 1890; and “Elektrizitätszähler der Firma J. Einstein & Cie., München (System Kornprobst),” Offizielle Zeitung der Internationalen Elektrotechnischen Ausstellung, no. 28 (Oct. 1891): 949를 보라. 또한 Viktor Yakovlevitch Frenkel and Boris Efimovitch Yavelov, Einstein: Izobretenii i eksperiment (아인슈타인: 발명과 실험) (Moscow, 1990), pp. 75-79, and Pyenson, The Young Einstein, pp. 39-53을 보라.
  19. “작은 기계(little machine, Machinchen)”에 관해서는, John Stachel et al., “Einstein’s ‘Machinchen’ for the Measurement of Small Quantities of Electricity,” editorial note in The Swiss Years: Correspondence, 1902-1914, Vol. 5 of The Collected Papers of Albert Einstein, trans. Anna Beck, ed. Stachel et al. (Princeton, N.J., 1995), pp. 51-55를 보라.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에 관해서는, Galison, How Experiments End, chap. 2와 Frenkel and Yavelov, Einstein, chap. 4를 보라.
  20. Flückiger, Albert Einstein in Bern, p. 58에서 인용.
  21. Pais, Subtle Is the Lord, pp. 47-48에서 인용.
  22. Favarger, “Sur la distribution de l'heure civile,” in Congrès International de Chronométrie, Comptes rendues des travaux, procès-verbaux, rapports, et mémoires, ed. E. Fichot and P. de Vanssay (Paris, 1902), pp. 198-203를 보라; 이하 “SD.”
  23. Carlene Stephens, “‘The Most Reliable Time’: William Bond, the New England Railroads, and Time Awareness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Technology and Culture 30 (Jan. 1989): 1-24 and “Before Standard Time: Distributing Time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Vistas in Astronomy 28, pts. 1-2 (1985): 114-15를 보라.
  24. Peter Kropotkin, Memoirs of a Revolutionist, trans. pub. (Montreal, 1989), p. 267.
  25. Jakob Messerli, Gleichmässig pünktlich schnell: Zeiteinteilung und Zeitgebrauch in der Schweiz im 19. Jahrhundert (Zurich, 1995), p. 126에서 인용.
  26. Fleming, Time-Reckoning for the Twentieth Century (Washington, D.C., 1889), p. 357. 플레밍이 클리블랜드 아베(Cleveland Abbe)를 비롯한 기상학자들과 맺은 관계를 보려면, Ian R. Bartky, “The Adoption of Standard Time,” Technology and Culture 30 (Jan. 1989), p. 41을 보라.
  27. Einstein, “Autobiographical Notes,”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Paul Arthur Schilpp, 3d ed. (La Salle, Ill., 1970), p. 53을 보라.
  28. Einstein to Mileva Marić, 10? Aug. 1899, in Einstein and Marić, The Love Letters, trans. Shawn Smith, ed. Jürgen Renn and Robert Schulmann (Princeton, N.J., 1992), p. 10. 전기동역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구체적인 지적 태도에 관해서는, Holton, “Influences on Einsteins's Early Work,”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를 보라.
  29. 여기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국면을 재구성하여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독자들은 Stachel et al., “Einstein on the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editorial note in The Swiss Years: Writings, 1900-1909, vol. 2 of The Collected Papers of Albert Einstein, ed. Stachel et al. (Princeton, N.J., 1989), pp. 253-74, 그중 특히 pp. 264-65에서 훌륭하게 압축된 정리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글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대략적인 작업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무게가 있는(ponderable) 물체의 상대적 운동만이 의미 있다는 확신, (2) 절대 운동에 대한 로렌츠의 물리적 의미 부여에 대한 폐기, (3) 광원에 상대적인 빛 방사 가설을 정당화하는 대안적 전기동역학 탐색, (4) 광원 속도에 무관한 광속 가정에 따른 기존의 대안 폐기, (5)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대한 일반적 관념, 특히 원거리 동시성에 대한 비판, (6) 동시성에 대한 물리적 정의 및 새로운 운동학 이론의 구성. 여기서 나의 초점은 (5) 즉, 원거리 동시성에 대한 규약적 관념의 도입에 있다.
  30. Flückiger, Albert Einstein in Bern, p. 58에서 인용.
  31. Einstein, “How I Created the Theory of Relativity,” lecture, Kyoto, 14 Dec. 1922, trans. Yoshimasa A. Ono, Physics Today 35 (Aug. 1982): 46.
  32. Josef Sauter, “Comment j'ai appris à connaître Einstein,” Flückiger, Albert Einstein in Bern, p. 156, 그리고 Fölsing, Albert Einstein, p. 155를 보라.
  33. Einstein to Conrad Habicht, Bern, [18 or 25 May 1905], The Swiss Years: Correspondence, 1902-1914, p. 20.
  34. Henri de Parville, “Distribution de l'heure par télégraphie sans fil,” La Nature, 30 July 1904, pp. 129-30을 보라. 실험은 파리 천문대의 천문학자 비구르당(G. Bigourdan)에 의해 이뤄졌으며, 1904년 6월 27일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에 보고됐다. 이 결과는 Comptes rendues de l'Académie에 수록되었으며, 전문이 “La Télégraphie sans fil et la distribution de l'heure,” Journal suisse d'horlogerie, 29 Sept. 1904, 81-83에 (뇌샤텔 천문대장 및 다른 사람들의 결과와 함께) 인용되기도 했다.
  35. 무선 시간 맞추기에 관해서는, 예를 들어, Joseph Roussel, Le Premier Livre de l'amateur de T.S.F. (Paris, 1922), 특히 pp. 150-52를 보라. Julen Auguste Boulanger and Gustave Auguste Ferrié, La Télégraphie sans fil et les ondes électriques, 7th ed. (Paris, 1909)는 에펠탑 기지국의 설립연도를 1903년으로 매기고 있다. Ferrié, “Sur quelques nouvelles applications de la télégraphie sans fil,” Journal de Physique, 5th ser., 1 (1911), 178-89, 특히 p. 178에서는 무선 시간 조율 계획이 무선 연구의 시작과 함께 제기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Edmond Rothé, Les Applications de la télégraphie sans fil: Traité pratique pour la réception des signaux horaires (Paris, 1913)은 무선-통신을 이용한 시간 조율 절차를 상세히 보여준다.
  36. Léon Bloch, Le Principe de la relativité et la théorie d'Einstein (Paris, 1922), pp. 15-16. 도미니크 페스터(Dominique Pestre)는 블로흐(와 그의 형제)를, 20세기 초의 새 물리학을 긍정적으로 본 교과서를 썼다는 점에서 당시 프랑스에서 보기 드물 뿐더러, 구체에서 추상으로 가는 일련의 상향적 일반화를 사용하여 독특하게 글을 썼던 물리학자로 묘사하고 있다.(분명 [이론]보다 실험에 치우친 학자들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Dominique Pestre, Physique et physiciens en France, 1918-1940 (Paris, 1984), pp. 18, 56, 117을 보라.
  37. Bureau des Longitudes, Réception des signaux horaires: Renseignements méteorologiques, sismologiques, etc., transmis par les postes de télégraphie snas fil de la tour Eiffel, Lyon, Bordeaux, etc. (Paris, 1924), pp. 83-84를 보라.
  38. Ernst Lebon, Henri Poincaré: Biographie, bibliographie analytique des écrits (Paris, 1909), pp. 16-17을 보라.
  39. Henri Poincaré, “La Mesure du temps,”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6 (1898), 11-12, 이하 “M”; rpt. in Poincaré, La Valeur de la science (1905; Paris, 1970), p. 53; trans. George Bruce Halsted, “The Measure of Time,” The Value of Science (New York, 1907), p. 35. 이하 “MT”; trans. mod.
  40. Bartky, “The Adoption of Standard Time,” pp. 25-56을 보라.
  41. “우리는 … 푸앵카레의 『과학과 가설』에 흠뻑 빠져 몇 주 동안이나 홀려 있었다” (Maurice Solovine, introduction to Einstein, Letters to Solovine, trans. Wade Baskin [New York, 1987], p. 9). 예를 들어, Poincaré, La Science et l'hypothèse (Paris, 1902)의 6장 “La Mécanique classique,”, 그중에서도 111쪽을 보면, “우리에겐 두 기간의 동등성에 대해 직접적인 직관이 없을 뿐더러, 다른 두 곳에서 일어난 두 개의 다른 사건의 동시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시간의 측정(The Measure of Time)’이란 논문에서 설명했던 바이다.”
  42. 1900년과 1904년 사이, 푸앵카레는 동시성에 관한 프로그램 방식의(programmatic) 입장을 전기동역학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로부터 분리해 왔다. 그러나 동시성 판단의 규약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전기동역학에 국소적 시간의 관념을 도입할 때조차, 그는 아인슈타인이 역학과 전기동역학을 재편하기 위해 사용했던 빛-신호 조율 방식을 도입하지 않았으며, 전자변형이나 분자력을 고려하기 앞서 힘이 가해지지 않은(force-free) 공간과 시간에 대한 분석부터 분명히 하고 들어가는 방식도 채택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엔, 운동학, 즉 시간과 공간의 측정 방식을 동역학 전에 다루는 것이 바로 요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두 물리학자의 상대적 기여를 일일이 가려내진 않을 것이다. Henri Poincaré, “Relations entre la physique expérimentale et la physique mathématique,” in Rapports présentés au Congrès International de Physique, ed. Ch.-Éd. Cuillaume and L. Poincaré, 4 vols. (Paris, 1900), Vol. I, pp. 1-29와 Henri Poincaré, “L'État actuel et l'avenir de la physique mathématique,” Bulletin des sciences mathématiques 28 (1904), 302-24를 비교해 보라. 아인슈타인과 푸앵카레의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한 이해 방식을 비교하고 싶다면,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와 Pais, Subtle Is the Lord를 보라.
  43. 이는 이미 여러 번 지적되어 왔다. 예를 들어, Leopold Infeld, Albert Einstein: His Work and Its Influence on Our Times (New York, 1950), p. 23; Holton, “Influences on Einstein's Early Work,”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The Special Relativity Theory: Einstein's Response to the Physics of 1905,” Albert Einstein: Historical and Cultural Perspectives, ed. Holton and Yehuda Eljana (Princeton, N.J., 1982), pp. 3-26 등에서 지적되어 있다.
  44. Greg Myers, “From Discovery to Invention: The Writing and Rewriting of Two Patents,” Social Studies of Science 25 (Feb. 1995), 77.
  45. Einstein, “The World as I See It,” Ideas and Opinions, trans. Sonja Bargmann, ed. Seelig (New York, 1954), p. 10.
  46. Favarger, L'Électricité et ses applications à la chronométrie, p. 10.
  47. Ibid, p. 11.
  48. Galison, Image and Logic: A Material Culture of Microphysics (Chicago, 1977)을 보라.
  49.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에테르가 없음”을 보이는 측정이 점점 정확해진 결과로 묘사하는 것은 널리 유포되어 있는 얘기이다. 아인슈타인의 정식화를 초기 에테르-전자 이론의 단순한 변형에 불과한 것으로 위치 지우는 아마도 최고의 학술적 시도는 Edmund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London, 1953)에서 볼 수 있을텐데, 그 책의 “The Relativity Theory of Poincaré and Lorentz” 장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푸앵카레와 로렌츠의 상대성 이론에 몇 가지 부연을 단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는 … 당시 널리 수용되었지만 후대의 사람들로부터 몹시 비판받아 왔던 광속 불변을 근본 원리로 주장했다.” (p. 40). Holton,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특히 chap. 5와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를 보라.
  50. Schaffer, “Late Victorian Metrology and Its Instrumentation: A Manufactory of Ohms,” in Invisible Connections: Instruments, Institutions, and Science, ed. Robert Bud and Susan E. Cozzens (Bellingham, Wash., 1992), pp. 23-59; M. Norton Wise, “Mediating Machines,” Science in Context 2 (Spring 1988): 77-144; and Galison, Image and Logic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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