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의 이론적재성

PhiLoSci 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문서로, 내용상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것.

관찰의 이론적재성이란 관찰이 관찰자의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기체의 부피가 기체의 절대온도에 비례한다는 샤를의 법칙을 확인하는 실험을 설계한다고 하자. 이 때 기체의 온도를 측정하는데 사용하는 온도계는 기체나 액체의 부피가 온도에 따라 증가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제작 된 온도계이다. 즉,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한 측정 장치로 관측을 하는 과정에서 관측은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잘 알려진 과학 이론에 대한 검증을 위해 실험을 하고 얻은 결과가 그 이론과 어긋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실험 진행자는 그 이론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실험 과정에서 발생한 오차 요인을 생각하는데, 이는 관측에 앞서 이론을 가정하는 관찰의 이론적재성의 예시라 볼 수 있다. 정리하면, 관찰의 이론적재성이란 서로 다른 관측자가 동일한 대상을 관측하더라도 관측자의 이론적 배경이 다르면 관측을 서로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찰의 이론 의존성에 대한 생각은 철학자 N.R.Hanson(1924~1967)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간략하게 설명된다. "보는 것은 시각적인 경험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적인 경험을 가지는 방식이다." 그는 서로 다른 두 관찰자가 시작적인 경험을 가지게 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즉 똑같은 그림을 보면서도 이 그림을 각기 다른 이론적 맥락에서 보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적 경험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해석'이라는 것이 '보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관찰이란

관찰이란 사물의 실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을 의미하며 관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철학적 관점에서의 관찰은 인식의 기초로서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적 관점에서의 관찰은 인식하고 활동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의식적으로 대면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동시에 관찰대상이 의식적으로 선택된다는 점과 관찰이 수행될 때 어떤 목표가 추구된다는 점에서 목적 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의 관찰은 관찰대상 ·관찰시기 ·관찰방법을 사전에 명확히 해두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우연적 관찰과 구별된다. 과학적 관찰은 관찰자의 개인차에 기인하는 자의성(恣意性)이 배제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수량화하는 일, 객관적 사실과 관찰자의 해석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일, 관찰의 결과를 일반화함에 있어서는 충분한 자료를 얻어서 다른 관찰자와의 협의를 거친 다음에 결정하는 일 등을 매우 중요시한다. 교육학적 관점에서 관찰은 관찰학습을 통해 의미를 알 수 있는데, 이는 과학적 관점에서의 관찰학습과는 의미가 다르다. 교육학적 관점에서의 관찰학습(observational learning)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 사람의 행동과 같은 행동을 학습하는 것을 말하며, 모방학습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찰학습은 학습자가 관찰하거나 모방하는 대상인 모델이 있으며, 그 모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경험이 있다. 이러한 모델의 행동과 관찰자가 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결국 학습의 과정이 된다. [1]

이러한 관찰을 기반으로 과학지식을 쌓아나갈 수 있었는데 이는 경험주의 철학에 입각한 것이다. 여기서 귀납적 추론이라는 일반화 과정이 사용되는데, 귀납적 추론이란 직접 경험해서 모은 관찰 사실에서 시작하여 그것들을 일반화하여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갈릴레오,뉴튼,보일,하비 등의 훌륭한 사람들이 17세기에 소위 '과학대혁명(대략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부터 뉴튼의 중력이론이 정립되기까지의 발달과정)'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관찰은 자체가 불완전하고 확실히 믿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여러가지로 관찰의 수단이 되는 감각 자체가 현실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감각기관의 주 목적은 우리의 생존을 돕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효육적으로 그 동물이 사용하기 쉬운 형태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관찰이란 외부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뇌로부터 변형된 감각 이미지이다. 뇌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가공된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Rabbit duck illusion

Rabbit-duck illusion(오리-토끼 착시)

Rabbit duck illusion(오리-토끼 착시 사진)은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설명할 때 흔히 활용하는 그림이다. 토끼로 보이기도 하고 오리로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어떤 것을 보는 것(seeing that/seeing as)의 예시로써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이는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나온 사례이기도 하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전체로서의 형태, 모양이라는 뜻의 독일어 '게슈탈트'를 사용해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인간은 어떤 대상을 개별적 부분의 조합이 아닌 전체로 인식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심리학파이다. 관찰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rabbit-duck illusion을 활용하여 동일한 대상의 관찰에서도 사람에 따라 관찰 결과가 달라지지 않느냐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관찰은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해석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다. 과학철학자 핸슨(Norwood Russell Hanson,1924~1967)은 이에 대해서 처음 관찰을 한 즉시 즉각적으로 오리 또는 토끼로 인식하는 것이지 인식한 후에 해석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사실 그림은 그저 보여지는 그대로의 그림일 뿐이다.

달에 사는 옥토끼

관찰의 이론적재성을 설명할때의 또 다른 잘 알려진 예이다. 동양의 경우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달에 토끼가 산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서양의 경우에는 그 어떤 문헌이나 이야기 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전해내려오지 않는다. 이는 동서양의 믿음의 차이에서 나타난 것이다. 동양의 경우에는 달에 특별한 이론을 적용하지 않았기에 그 얼룩에 토끼라는 의미부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이전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내려온 이론에 따라 달을 비롯한 모든 행성들은 그 형태가 완벽한 구형이며, 따라서 그 표면에 굴곡이나 흠집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7세기에 갈릴레오가 직접 자신이 제작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한 후 달의 표면에 굴곡이 있다고 발표했을 때도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조차 거부했다. 천체는 완벽하다는 관념의 지배를 받던 서양 사람들은 옥토끼는 커녕 달 표면의 흠집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분명 하늘에 떠 있는 같은 달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듯 이론에 따라 관찰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같은 이론의 차이 때문에 동양과 서양에는 태양의 흑점 관찰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현재 존재하는 관찰 기록을 보면, 유럽에서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에는 태양흑점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없지만, 중국 천문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 시기보다 훨씬 앞선 수세기 동안 이 현상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관찰자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관찰 증거를 편향적으로 수집한 경우라 할 수 있다. [2]

관찰의 이론적재성의 원인

과학철학자인 장하석은 그의 저서에서 관찰의 이론적재성의 원인을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선입관이 지각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경우로, 말하자면 인간의 지각 자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통해 생각이 형성되고 수정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이 행하는 관찰 방법은 선입견 없이는 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관찰할 때, 우리들은 현상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들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하기 이전에 이미 현상들을 여러 가지 유형들로 나누어보기 때문이다. 빨간 하트나 검은 스페이드의 이상한 모양의 트럼프 카드를 제시하면, 순간적으로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올바른 카드의 모양으로 인식하여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그 예이다. 또다른 예로 우리들이 이미 어떤 현상들을 천체들의 운동으로 분류하거나, 또 이와 다르게 보이는 현상들은 밀물과 썰물이나 4계절 등으로 분류하여 관찰하기 시작한다는 것도 들 수 있다.

두번째는 똑같이 감지한 것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로, 같은 것을 감지해도 이론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 항목 'Rabbit-duck illusion'에서 동일한 것을 감지해도 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추가설명) 이는 인간의 인지과정에 관여하는 '프레임'이 관여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어떠한 관찰결과가 주어지고 이를 해석할 때 어떤 '이론'을 제시하면 그 이론 상에서 (즉 그 틀 안에 갇혀) True or False를 정하는 것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이론적 배경 및 선입견이 서로 연관된 현상들을 분리시켜 각기 다른 현상들로 처리하게 되어 잘못을 범하게 된 예가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과학에서 일어난 내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은 천상계를 지상계와 분리시켜 특별한 영역으로 생각하였고, 천상계의 운동에 적용하는 역학의 법칙들은 지구의 표면에 있는 대상들의 운동에 적용하는 법칙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물론 이 현상에 대한 해석이 아리슽텔레스의 해석과 많이 다르다. 이 예는 이론적 배경(선입견)이 현상을 잘못 해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실험기구 자체에 내장된 이론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어떤 실험기구의 작동 원리에 이미 이론이 내장되어 있고, 이 실험기구에 의존하여 관측이 이루어지면 발생한다. 어떠한 관찰의 타당성 자체가 특정한 이론에 의존적이라면, 그 관측 장치에 내장된 이론을 살펴봐야하는데, 그러면 그 이론을 위해 관찰을 또 살펴 봐야 하는 순환논리가 발생한다. 특히 전자 현미경, 전파 망원경 등 현대과학에서 사용되는 실험기구는 복잡한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당장 간단한 예시인 온도계만 해도 과학적 이론이 적용되어 있다. 만약 내장된 이론이 틀리다고 할 때, 그 관측결과의 신뢰성도 같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네번째가 이론에 맞지 않는 관측 사실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경우이다. 예를들면, 물 한 컵이 있다는 관측을 했다고 치자. 이것을 밖에 놔두어 밤새 영하 10도 에서도 얼지 않는 것을 관측하면 '그것이 물이 아니었다'고 관측을 수정한다. 즉 '물'이라고 할 때엔 그 속에 여러 가지 이론적 함의(여기서는 물은 0도에서 언다는 사실)가 들어 있다는 것이며, 포퍼는 우리가 관측한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도 이론이 포함된 가설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3] 이에 대한 예시로는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의 발견에 대한 이슈화를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모든 이론은 진공에서의 빛의 속도는 좌표계에 상관없이 불변하며 그것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한 때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고 된적이 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등 그 관측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다. 물론 이 현상은 실험의 오류라고 밝혀지긴 했지만 이론에 맞지 않는 관측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찰의 이론적재성이 가지는 문제

-온도계의 철학

자신의 저서 '온도계의 철학'에서 장하석 교수는 온도계로 물질의 온도를 재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얼핏 보면 온도계는 관측을 도와주는 관측 기구일 뿐이고, 그 기구로 자연현상을 관측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으로 보인다. 하지만 온도계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과학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론의 집약체'이다. 이처럼 과학 이론이 적용된 관측 기구를 통해 관측한 내용을 바탕으로 과학 이론을 증명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가?

과학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론적 지식을 활용하여 관찰을 하고 분석을 한다. 즉, 이는 관찰을 하면서 전제가 되는 이론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관찰을 해석하거나 혹은 관찰 그 자체에 이론의 영향이 미쳐 중립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실험이 가설에 대해 부여하게 되는 확증의 정도라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증거에 의해서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들에 비해 더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이론 검사에 관한 단일한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쿤은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은 개별 과학자들이 새로운 이론들을 어떻게 개발하는가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전체 과학 공동체가 어떤 이론을 정당화된 것으로 간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관찰의 이론적재성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과학자들이 당면한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 점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있다.

-관찰의 이론적재성에 대한 반론

이론에 따라 달라지는 건 해석이지 관찰이 아니다.(하지만 해석과 관찰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정의하기 나름이긴하다.) 그리고 믿고 있는 이론의 영향을 받고 관찰을 하여 어떤 이론을 증명할 때 순환논리에 의해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관찰에 이용되는 이론과 관찰을 이용하여 밝히는 이론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악순한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완벽한 반론이 되지는 못한다. 헨슨이 이를 반박한다. 예를들어 오리토끼 그림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림을 보는 즉시 오리 혹은 토끼로 판단하게 된다. 이것을 거창하게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해석이란 사고의 과정인데, 이 즉각적인 판단속에 사고가 들어가는 것일까? 헨슨이 이것이 즉각적인 관찰일 뿐이지 해석은 아니라고 말한다.

귀납의 문제와 방향

위와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찰 결과들만을 모았을 때 귀납의 문제가 새롭게 생긴다. 귀납적 추론은 개개의 경험을 많이 모하 일반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화는 논리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란이 많다. 예를 들면 백조의 색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백조는 흰 색을 띈다. 이렇게 수천, 수만의 백조가 하얗다는 것을 확인하며 증거를 쌓아가면 다음에 만날 백조도 흰 색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까? 단순히 많은 관측 결과들은 다음 결과에 대한 확률을 높여주기는 하지만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검은 백조가 발견되었고 이런 일반화가 섣불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일화로는 해가 동쪽에서 뜬 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몇 달, 몇 년 전에도 해는 항상 동쪽에서 떠왔다. 하지만 이것은 북극점에만 가도 성립하지 않게 된다. 북극점에 가면 우선 동서의 개념이 무의미해질 뿐만 아니라 해가 지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사람들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경험들에 의해 귀납에 의해 일반화되었던 것들을 무너뜨리곤 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포퍼는 타당한 추론은 연역적 추론뿐이며, 귀납적 추론은 사용하지 말자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즉, 관찰 진술로부터 이론의 '참' 또는 '개연적 참'을 추론할 수 있다는 가정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귀납적 추론에 의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의론적인 의심에 사로잡혀 마비가 되어서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귀납적인 추론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한다. 관측을 기반으로 귀납적으로 얻은 내용을 결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시험해봐야할 가설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고민해야하는 것은 '일반화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회의론의 문제가 아닌 '일반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과학방법론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귀납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3가지 일화가 있다. 첫번째로는 보데의 법칙이다. 보데는 태양에서 행성까지의 거리가 일정한 수열을 보인다는 것을 6가지 행성을 기반으로 일반화하였다. 이 법칙이 천왕성, 소행성 세레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일 때 잠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곧 해왕성과 명왕성이 잘 맞지 않는 것을 보고 이 법칙을 폐기시켰다. 무엇보다 이 법칙이 신뢰성이 없는 이유는 행성의 배열거리가 어떤 법칙을 따라야할 이론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6개의 행성이 규칙에 잘 맞는 것은 우연한 일이라고 해석하고 무시하였다. 표면적으로 어떤 규칙성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고 더 이상 일반화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발머 시리즈와 보어의 원자모델이다. 이 일화에서도 발머가 6개의 스펙트럼 선을 기반으로 파장에 대한 식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보데처럼 발머가 숫자놀음이나 한다고 무시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보어가 발표한 원자 구조에 대한 이론에서 수소원자모형의 전자 궤도가 양자화되어있고 에너지 준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빛을 방출한다고 하고 그 때의 파장이 발머 시리즈의 규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이론으로 발머의 법칙이 맞다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보데와 발머의 차이는 배경이론의 유무라고 볼 수 있고 배경이론이 있을 때 귀납적 추론의 신뢰성이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번째로는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설명한 조수의 원인이다. 케플러는 달의 위치와 조수의 관계를 보고 달이 조수의 원인이라고 설명한 반면 갈릴레오는 그런 케플러가 보데와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시한 갈릴레오의 이론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쏠림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론에 의하면 밀물, 썰물 현상은 하루에 한 번만 관측되어야한다. 하지만 실제로 매우 분명하게 두 번씩 관측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릴레오는 이렇게 희망이 없어보이는 이론에 집착했는데 그 이유는 이 이론을 지동성을 옹호하는데 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배경지식에 의해 추론을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케플러의 이론은 후에 뉴튼의 중력 이론에 의해 검증되면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경험적으로 관측내용을 통해 규칙을 만들어내어도 그것이 일반화할만 한지의 여부는 이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4]

함께 읽기

  • Suppe (1977), "(C) HANSON", i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Theories, 2nd editi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p. 151-166.
  • Thomas S. Kuhn (1962), Revolutions as Changes of World View, i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 10.

주석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4667&cid=40942&categoryId=31723
  2. James Ladyman 저. 박영태 역.『과학철학의 이해』. 이학사. 2004년. p214-215
  3. 장하석,『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2014)
  4. 장하석,『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2014)

위키 참여 프로젝트

위의 항목들은 과학의 철학적 이해 : 2016년 1학기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항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