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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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서문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이야기는 전에도 여러 번 다루어졌지만, 내가 아는 한 이 책에서 의도하는 범위와 목적으로 다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 혁명의 이름은 단칭이지만, 그 사건이 담고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 핵심에는 수리 천문학의 변화가 놓여 있었지만, 거기에는 우주론, 물리학, 철학, 종교의 개념적 변화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혁명의 각 측면들은 여러 차례 검토되었고, 그 연구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혁명의 다원성은 원전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 개개인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들과 그들을 따라 만든 입문서 모두는 이 혁명의 가장 본질적이면서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를 놓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혁명의 다원성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특징이다.

그 다원성 덕분에,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다양한 분야의 개념들이 어떻게 하나의 사고 체계로 엮이게 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일종의 전문가로, 행성의 위치에 관한 표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던 난해한 기법들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가진 수리 천문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 방향은 천문학과 사뭇 동떨어진 발전들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이들 중에는 낙하하는 돌에 대한 중세의 재분석, 태양을 신의 표상으로 보았던 고대 신비주의 철학의 르네상스 부흥, 르네상스인들의 지평을 넓혀 주었던 대서양 항해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가 출판된 뒤에는 별개의 분야들 사이에 더욱 강력한 얽힘이 나타나게 된다. 그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aelestium)』는 주로 수학 공식과 표, 다이어그램으로 이루어졌지만, 새로운 물리학, 새로운 공간 관념,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창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소화될 수 있었다. 여러 학문 분야들 사이의 이러한 창조적인 연계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전문적인 연구들은 그 목적과 방법 때문에 이러한 연계의 성격과 그것이 인류 지식의 성장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지 못한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이 연구는 혁명이 가진 다원성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이 목적이 이 책의 색다른 점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혁신도 필요했다. 이 책은 ‘과학’ 독자와 ‘역사’ 또는 ‘철학’ 독자를 나누는 제도화된 경계를 끊임없이 침범한다. 간혹 이 책은−하나는 과학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사상사를 다루는−두 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과 사상사의 결합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다원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혁명은 천문학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그 혁명의 본성, 시기, 원인 그 어느 하나도 행성 천문학자들의 도구였던 자료와 개념들에 대한 확실한 파악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천문학적 관찰들과 이론들은 필수적인 ‘과학적’ 요소로서, 이 책의 첫 두 장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 아니라 책의 나머지 부분에도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책 전체가 그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행성 천문학은 정확성, 타당성, 증명에 대한 자기만의 변치 않는 기준을 가진 완전히 독립적인 활동이 전혀 아니었다. 천문학자들은 다른 과학도 함께 훈련을 받았으며, 다양한 철학적·종교적 체계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천문학 외적인 믿음의 상당 부분은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지체시키는 데, 나중에는 혁명을 형성해 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천문학 외적인 믿음들은 이 책의 ‘사상사적’ 요소를 구성하며, 2장 다음부터는 과학적 요소에 맞먹는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의 목적을 고려해 볼 때, 그 두 가지는 똑같이 근본적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두 요소가 정말 뚜렷이 구별된다는 확신이 없다. 몇몇 논문을 제외하면, 과학과 사상사의 결합은 흔치 않은 일이다.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내재적인 부조화도 없다. 과학적 개념들도 일종의 관념이기에, 그들 역시도 사상사의 주제가 된다. 과학적 개념들이 그런 식으로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지만, 그것은 단지 과학의 원전을 다루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역사학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사상사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과학에 대해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종류의 이해를 산출할 수 있다는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어떤 입문서도 이 가설을 완전히 입증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은 적어도 예비적인 증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한 약간의 증거는 이미 존재한다. 이 책은 1949년부터 하버드대학의 교양 과학 과목의 하나로 매년 진행된 일련의 강의에서 발전했는데, 그 강의에서 과학의 전문적인 문헌과 사상사적인 문헌의 결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이 교양 수업의 학생들은 과학 연구를 이어 갈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우는 전문적인 사실과 이론들은 실질적으로 유용한 정보들이라기보다 주로 패러다임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더욱이, 전문적인 과학 문헌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속에서 과학의 발전 방식과 과학이 가진 권위의 본성, 과학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밝혀 주게 될 역사적·철학적 틀 안에 놓이기 전까지 그 문헌들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 틀 안에 놓이게 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비롯한 여타의 과학 이론들은 과학자나 학부생의 테두리를 넘어 훨씬 폭넓은 독자들에게도 유관한 것이 되어 관심을 끌 수 있다. 이 책을 집필한 첫 번째 목적은 하버드의 수업이나 그와 비슷한 다른 수업들의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이 책은 교재가 아니며,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다.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조언과 비판을 통해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그중 가장 크고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제임스 코넌트(James B. Conant) 대사였다. 그와의 작업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역사 연구가 과학 연구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이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겪게 된 나 자신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책뿐 아니라 과학사에 관한 다른 에세이들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코넌트는 이 책의 원고를 읽어 주었으며, 책의 앞쪽 장들은 그가 남긴 생산적인 비판의 흔적을 많이 보여 주고 있다. 그 외에도 마리 보아스(Marie Boas), 버나드 코언(I. Bernard Cohen), 마이런 길모어(Myron P. Gilmore), 로저 한(Roger Hahn), 제럴드 홀턴(Gerald J. Holton), 에드윈 켐블(Edwin C. Kemble), 필리프 르코르베예(Philippe E. LeCorbeiller), 레너드 내시(Leonard K. Nash), 플레처 왓슨(Fletcher G. Watson) 등은 자신의 유용한 의견이 반영된 결과를 여기저기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는 적어도 한 장 이상에 비판적 능력을 발휘했고, 몇몇은 초기 버전의 전체 원고를 읽어 주었다. 메이슨 해먼드(Mason Hammond)와 모르티머 챔버스(Mortimer Chambers)의 조언은 몇 군데 라틴어 번역에 확신을 주었는데,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런 확신은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놀포 페루올로(Arnolfo Ferruolo)는 나에게 피치노(Ficino)의 『태양에 관하여(De Sole)』를 처음 알려 주었고 태양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도가 르네상스 전통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예술과 문학에서는 과학에 비해 더욱 두드러졌던 것임을 알려 주었다.

책의 그림들은 나의 모호한 요구사항을 이해하기 쉬운 기호들로 거듭 번역해 준 폴리 호란(Polly Horan)의 (인내심이라기보다는) 능숙한 솜씨를 보여 준다. 조지프 엘더(Joseph D. Elder)와 하버드대학 출판사의 직원들은, 과학 출판용 원칙도 역사 출판용 원칙도 따르지 않는 형태의 원고로의 고된 변환 작업에 지속적으로 호의적인 길잡이를 제공해 주었다. 색인은 찰스(W. J. Charles)의 근면성과 지성을 증명해 준다.

원고의 대부분은 하버드대학과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재단(John Simon Guggenheim Memorial Foundation) 공동의 아량으로 제공한 안식년 동안 처음 작성됐다. 소정의 연구비를 준 캘리포니아대학에도 감사를 표하며, 그 연구비는 원고를 최종적으로 완성하고 출판 과정에서 교정을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 아내는 이 책을 발전시켜가는 내내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그러한 참여는 그녀의 기여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머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특히 다른 사람한테서 나온 것이라면, 어느 집에서나 가장 시끄러운 법이다. 그녀의 지속적인 관용과 인내가 없었더라면 이 책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T. S. K
캘리포니아 버클리
1956년 11월


7쇄에 덧붙여. 이 인쇄본은 이전 하버드 판본들에서 실수로 빠져 있던 많은 정정 사항들과 본문상의 변화들을 담고 있다. 이 인쇄본과 이후의 인쇄본에서는, 랜덤하우스(Random House)와 빈티지(Vintage) 페이퍼백 판에 먼저 채택된 모든 변화들도 하버드 페이퍼백에 반영되기로 했으며, 이전 페이퍼백 판들이 만들어진 후에 이루어진 몇몇 사소한 정정 사항들도 포함되었다.

목차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