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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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중에서

철의 장막 서편의 유럽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문학 전통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교양 있는 남성 또는 여성이 되려면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유럽의 예술과 문학에 대한 쓸모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쓸모 있는 지식이라는 말이 고대와 현대의 고전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의미하거나 문체나 형식에 대한 세심한 비판적 판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적절한 사교 모임에서 손쉽게 대화에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다. 신중하게 선별된 문학 전통에 기초한 교육에는 몇 가지 분명한 장점이 있다. 전체 인구 중 5~10퍼센트에 해당하는 교양 있는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 사이의 구분은 신사 숙녀의 대화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진정으로 예술과 문학과 음악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는 편안한 연대감이 형성되고, 이러한 주제에 관한 대화에 억지로 껴야 하는 다른 이들의 행동 반경은 손쉽게 제한된다. 학교에서 고통스럽게 배운 약간의 지식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데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한 유럽 국가의 문화적 전통에 진입하는 비용은 어렸을 때 한 번만 지불하면 된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언어와 그리스·로마 문학 위주의 교과 과정을 갖춘 특별한 학교에서 8년 내지 9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 비용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20세기 들어 현대어 공부가 그리스어 공부를 비롯해 라틴어 지식 일부를 잠식해 왔기 때문에, 나의 얘기는 이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도 언어와 유럽 문학 위주의 기나긴 학교 공부로 귀결되는 소수만을 위한 교육 방침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러한 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이 가끔씩 제기되곤 했다. 교과 과정에서 물리과학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그러한 주장은 보통 고전어 대신 현대어를 가르치자는 요구와 결합되었다. 수학의 자리가 문제시 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미적분학을 비롯한 방대한 수학 공부는 학생들의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특별한 학교들의 모든 교과 과정에서 당연히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 오래전부터 수용되어 왔다. 몇 세대 전에는 고전적인 교과 과정에 대한 선명한 대안으로 물리학, 화학, 수학, 현대어에 기초한 교과 과정이 제안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과목의 옹호자들은 여전히 강건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논쟁의 결과로 일련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언어 공부에 부여된 중요성을 고려하면 문학 전통이 여전히 지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과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과학에 할애하는 학교조차도 과학 전통이 문학 전통을 대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독일 학생들은 물리과학에 대한 상당량의 정보를 이러저러한 정도로 습득한 채 대학에 입학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더 이상 과학 교육을 받지 않을 이들의 태도에 이후까지 영향을 주는지는 적어도 열린 문제에 해당한다. 과학에 대한 비과학자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교육 방법 개선책에는 거의, 어쩌면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과학에 대한 이해가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에게도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냐고, 문학 위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질문을 하더라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는 유럽식 문학 전통을 기초로 한 교육이 거의 100년 전에 사라졌다. 더 정확히는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통이 물리과학, 수학, 현대어에 기초한 교육으로 대체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아무런 대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국민의 문화적 삶을 위한 다소 폭넓은 기초를 제공하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 왔다. 이는 앵글로색슨 문학 전통과 다양한 문명에서 온 예술 양식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물리, 생물, 사회과학을 포함할 만큼 폭넓은 것이었다. 국가의 발전하는 문화에 열정적으로 참여할 미래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을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그러한 시도들이 미국에서의 정신적 삶을 위한 충분히 영양가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 냈는지는 질문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러한 시도를 책임진 사람들이 과학 전통에 적절한 자리를 찾아 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학교에서 얻은 경험은 과학 공부를 문학이나 예술, 음악 공부와 같은 기반 위에 올려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었다.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그림이나 책, 연극에 관한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참가자의 대다수가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아닌 상황에서 물리과학에 관한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처음에 나는 대화 능력이 교육의 목표라는 것을 부정해야 했지만, 사교 모임을 엿듣는 것은 허용 가능한 진단 방법일 수 있다).

학교나 대학에서 한 과학 공부와 문학 공부가 학생의 머리에 똑같은 종류의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금속 화학에 관한 지식과 셰익스피어 희곡에 관한 지식은 인류의 필요라는 면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지식이다. 물론, 자연과학에서 사례를 뽑을 필요는 없다. 앞 문장의 ‘금속 화학’을 누군가는 ‘라틴어 문법’이란 말로도 충분히 치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쉬운 말로 얘기하자면, 그 차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예나 지금이나 문체와 등장인물이 모든 가능한 각도에서 비판되는 끝없는 논쟁의 주제로, 강한 어조의 존경과 비난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 금속이나 금속화합물의 행동에 대해 존경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교양 있는 사람들이 (미국의 문화에서조차 여전히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학 전통과 대등한 수준으로 과학 전통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으려면, 체계화된 지식 덩어리로서의 과학 공부를 넘어서는 무언가, 과학 이론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는 서구 문화가 과학을 소화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루이 14세 시대에 과학 아카데미가 세워졌을 당시에는, 교양 있는 사람이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이론에 접근하기가 오늘날보다 훨씬 쉬웠다.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상황은 비슷했다. 험프리 데이비 경(Sir Humphrey Davy)은 극적인 실험이 포함된 화학 강연을 통해 19세기 초 런던 사회를 매료시켰다. 50년 뒤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런던 왕립 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강당에서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온 어린 청중과 나이든 청중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다. 양초의 화학에 대한 그의 강연은 과학 대중화의 고전적인 사례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방식의 시도는 적지 않았지만,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해가 갈수록 커져 갔다. 화려한 탁상 실험은 더 이상 과거처럼 교양 있는 청중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 대규모 공학은 거의 매일 그것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해의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일반인 사이의 대화 주제가 되기엔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너무나 복잡하다. 진보는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일반인은 뉴스에 당황한다. 더구나 과학적 혁신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그 성공적인 공략이 시도되기 이전의, 문제가 되는 그 과학 분야의 상태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 과학의 한 분과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와 멀리 떨어진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는 유전학자가 다른 유전학자들을 위해 쓴 요약 보고서도 잘 읽지 못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과학과 공학을 훈련받은 뒤 과학의 진보에 관한 전반적인 동향을 파악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잡지가 몇몇 나와 있으며, 가끔 유용한 책이 출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 대중화 노력이 물리·생명과학이나 그 응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어떤 대중화 시도는 너무 피상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 비과학자들의 과학 이해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려는 목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경우도 있다.

지난 10~15년 동안 미국 대학에서는 교과 과정 내 물리과학과 생명과학의 자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가했다. 많은 사람들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1학년 정규 과목들이 과학이나 공학, 의학을 전공할 계획이 없는 학생들에게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양 과목의 하나로 새로운 유형의 과학 수업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제안과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었다. 특히, 과학사에 더 역점을 두라는 권고가 있었으며, 나는 여기에 열렬히 동참했다. 실제로 하버드대학에서 몇 년간 이루어진 한 가지 유형의 역사적 접근 방식을 경험하면서, 나는 과학사 연구에 내재한 가능성을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과학이 발전해 온 다양한 방법에 대한 분석과 결합될 경우, 그 가능성은 더욱 커 보였다. 지난 300년 동안의 전반적인 과학사가 지닌 교육적 가치를 깨닫는 한편, 나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발전 과정에서 있었던 특정한 에피소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서도 더 많은 유익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하버드 실험과학 사례사(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라는 제목의 소책자 시리즈로 나타났다.

하버드 시리즈에서 다룬 사례들은 연대기나 주제의 측면에서 비교적 좁게 제한되어 있다. 그 목적은 학생들이 이론과 실험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고 가설의 시험과 실제 실험 결과를 연결하는 복잡한 추론에 대한 훈련을 더 잘 소화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원래의 과학 논문은 재수록되어 사례의 토대를 형성하고, 편집자의 해설은 독자가 가급적 실제 연구자의 추론 과정을 따라가도록 안내한다. 해당 사례를 폭넓은 전선에 있는 과학의 진보라는 더 큰 틀에 맞추는 일은 이 소책자를 사용하는 교수의 몫으로 남는다.

하버드 사례사는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고 실험의 세부 사항과 방법에 대한 분석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더구나 선택된 에피소드들이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역사에서 모두 중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이 문외한에게까지 바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그런 약점이 없다는 것을 독자들이 금방 알 수 있을 것다.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로의 변화가 서구 문화에 미친 영향은 누구나 알고 있다. 쿤 교수는 과학사의 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천문학 분야 자체와는 동떨어진 학자들의 태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가 다시 그것에 영향을 준 일련의 연결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혁명 기간 동안의 천문학 발전사를 다시 서술하기만 하는 비교적 쉬운 일을 과제로 삼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론과 관찰과 믿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으며, 훌륭하고 헌신적이며 완전히 진실된 연구자들이 태양 중심의 행성 배치를 수용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와 같은 난처한 질문에 과감하게 맞섰다. 이 책은 과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연구의 한 국면에 대한 철저한 설명으로서,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로부터 가설과 실험(또는 천문 관측) 사이의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대 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추천사의 목적은 쿤 교수가 쓴 본문을 읽으면 얻게 될 과학의 이해에 대한 가르침을 간추린 형태로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나는 이 책이 제시한 과학에 대한 접근이, 미국 문화에서 과학 전통이 문학 전통과 나란히 설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접근이라는 확신을 표명하고자 한다. 과학은 눈부신 성공뿐 아니라 실수와 오류로 가득 찬 활동이며, 실수를 범하기 쉽고 곧잘 매우 감정적이 되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에게 예술, 문학, 음악을 제공한 서구 세계의 창조적 활동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앞으로 그려질 우주 구조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우리 시대의 모든 교양 있는 사람의 관점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으며, 이 주제는 그 자체로도 큰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 특정한 천문학 혁명의 중요성에 덧붙여, 이 주제에 대한 쿤 교수의 접근 방법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내가 크게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는 과학이 우리 시대의 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

목차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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