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과학자가 되는 길 :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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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욱 (2010), 『패러데이 & 맥스웰 : 공간에 펼쳐진 힘의 무대』. 김영사, 만남 1.

그림 1-1. 윌리엄 휴얼.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오늘날 과학자는 대부분 정해진 길을 밟는다.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수학과 과학 과목들을 열심히 공부해서 자연계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은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 및 훈련 과정을 갖추고 있어서, 예비 과학자들은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실제 연구에 필요한 이론적 지식과 실험적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졸업을 하고 나면 그들은 대학이나 정부 또는 산업체에 소속되어 연구를 수행한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상황은 지금과 무척 달랐다. 당시 과학은 전문가들의 활동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전문적인 과학자를 양성하는 교육과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자연철학’이나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가르쳤지만, 이는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본 소양을 갖춘 사회적 엘리트를 배출하기 위한 교양 교육의 일환이었다.

과학은 교양이자 문화로 향유되었지만, 직업으로서는 여겨지지 않았다.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사람과 그들의 토론 모임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자기 개발이나 취미 활동을 목적으로 과학을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과학을 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과학 서적을 읽고 그런 모임에 참가하여 자비로 실험을 하면 되었다. 이들은 ‘과학인(man of science)’으로서 명예를 얻었지만, ‘과학자(scientist)’로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과학이 문화로서 소비됨에 따라 그 문화적 컨텐츠를 생산하는 전문적인 사람도 필요해졌다. 대학의 자연철학 및 수학 교수, 각종 과학 강연 기관의 교수와 떠돌이 과학 강사들이 이에 속했다. 이들 각각이 과학을 팔았던 대상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은 과학이 문화로서 소비되던 19세기의 직업적인 과학자였다. 그중 몇몇 대학과 강연 기관은 소속 교수에게 실험실을 마련해주고 연구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이 1840년에야 처음 만들어져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한편 19세기 중반 영국 대학의 과학 교육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학화되어 있었다. 수학적 추론 능력은 사회적 엘리트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 소양으로 강조되었고, 케임브리지 대학 같은 곳에서는 우등 졸업을 원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고난도의 수학 시험을 보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학 교육 방식은 당시 대학 출신의 과학자들의 독특한 연구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과학자로서 성장하며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은 이러한 19세기 영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둘은 19세기 영국 과학의 상반된 모습 또한 보여준다. 패러데이는 19세기 초중반의 영국을 보여주지만, 맥스웰은 19세기 중후반의 영국을 보여준다. 패러데이는 영국 사회의 노동계층을 대표하는 반면, 맥스웰은 영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대표한다. 한편 패러데이는 대중 과학 강연들을 통해 과학을 습득했으며, 결국 강연 기관의 교수가 되어 연구자 겸 대중 강연가로서 활동했다. 맥스웰은 영국 최고의 대학에서 과학적 훈련을 쌓았으며, 역시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며 고도로 수학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패러데이와 맥스웰 두 사람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과학자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사람의 독특한 연구 스타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영국의 과학 교육과 과학 연구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패러데이, 제본공 도제가 되다

그림 1-2. 조지 리보의 서점. 패러데이는 이곳에서 제본공 도제로 7년간 일을 배웠으며, 이곳의 책들을 통해 처음으로 과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는 1791년 9월 22일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아주 초보적인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나중에 그가 직접 한 말에 따르면, 패러데이는 “일반 주간 학교에서 읽기, 쓰기, 산수로 이루어진 가장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 학교 밖에서는 집과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개 이런 조건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러데이 역시 일찍부터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13살이 되던 해, 패러데이는 조지 리보(George Riebau)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일은 신문을 배달하고 다 읽은 신문을 수거하는 보잘 것 없는 일이었지만, 사장님은 그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서점 심부름 일을 시작한지 1년이 되었을 무렵, 리보는 패러데이에게 제본공이 되는 도제 과정을 허락했다. 게다가 그는 패러데이에게 수업료도 면제해 주었다. 이런 좋은 직업의 도제 과정을 수업료도 내지 않고서 이수할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 1805년 10월 7일, 드디어 패러데이는 7년짜리 도제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패러데이는 서점의 작업장 위에 있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일을 성실하게 배웠다. 낱장 상태로 되어 있는 페이지들을 꿰매고 다듬어서 제본한 후 표지에 제목을 예쁘게 적어 넣어 책을 완성하는 일이 바로 패러데이가 배운 일이었다. 오래되어 제본이 풀린 책도 패러데이의 손을 거쳐 말끔한 책이 되어 주인에게 되돌아가곤 했다.

서점에 들어왔다 나가는 수많은 책들은 패러데이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그 책들을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는 사장님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잡히는 책이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1809년에 읽은 『정신의 개선(Improvement of the Mind)』이란 책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가 쓴 이 책은 자기 발전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권고했다. 근면한 독서, 메모 작성, 강의 참석, 편지 교환. 패러데이는 이 권고사항을 거의 그대로 실천했다. 패러데이는 무엇보다도 책을 열심히 읽었고, 『철학 문집』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메모장도 만들어 책에서 얻은 생각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1년 후에는 작은 과학 모임의 강연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그 모임에서 만난 한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패러데이가 과학을 처음 접한 것도 바로 서점의 책들을 통해서였다. 패러데이가 직접 제본을 맡았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패러데이를 놀라운 자연 현상들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 책에 수록되어 있던 전기 항목에 재미를 느낀 패러데이는 실험 기구를 제작해서 그 책에 소개된 정전기 실험들을 직접 해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패러데이를 흥분시켰던 것은 화학이었다. 대개의 책들은 패러데이에게 너무 어려웠지만, 일반 대중용으로 대화체로 쓰여진 제인 마셋(Jame Marcet)의 『화학에 관한 대화(Conversations on Chemistry)』(1805)는 패러데이에게 화학을 기초부터 최신 발견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줄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왕립연구소 최고의 스타 강사 험프리 데이비(Humphrey Davy, 1778-1829)의 강연을 그녀가 직접 듣고 요약 해설한 책으로, 이 책을 통해 패러데이는 미래의 스승 데이비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과학을 배우다

그림 1-3. 웃음 가스를 주제로 한 왕립연구소의 강연 장면. 데이비는 풀무를 들고 있고, 후원자 럼퍼드는 오른쪽 끝에서 강연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 제임스 길레이(James Gillray), 《기체학에서의 새로운 발견New Discoveries in Pneumatics》, 1802)

수학적인 역학 분야를 제외하면 당시의 과학 분야들은 전문화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배우고 즐기기에도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오늘날보다도 대중적인 활동이었는지 모른다. 18세기 이래 과학은 상류층에게는 유흥 거리로, 중산층에게는 자기 개발용으로, 하층민에게는 어쩌다 볼 수 있는 서커스로 향유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과학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여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에는 여러 수준의 과학 모임과 강연 기관들이 존재했다. 왕립학회와 왕립연구소를 비롯해 런던에는 ‘런던 화학회’, ‘런던 철학회’ 등의 다양한 과학 모임이 존재했고, 산업혁명을 통해 부상하고 있던 맨체스터, 버밍엄과 같은 지역에도 런던에 버금갈만한 다양한 과학 모임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London)와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는 높은 명성을 자랑했다. 왕립학회는 영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전국 단위의 과학 모임으로,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어 자기 이름 뒤에 FRS(Fellow of Royal Society)를 붙이는 것은 무척이나 명예로운 일이었다. 한편 왕립연구소는 모든 계층에게 과학을 전파하겠다는 목표로 1799년 미국 출신의 럼퍼드 경(Count Rumford, Benjamin Thompson, 1753-1814)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과학 연구 및 대중 강연을 주로 했던 이 연구소의 지하에는 과학연구를 위한 실험실이 있었고 1층에는 거대한 강연장이 있었다. 왕립연구소는 과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자 대중 강연에 현란한 솜씨를 자랑했던 데이비를 교수로 영입하여 대중 강연 기관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그 회원권이 너무 비싸서 과학을 모든 계층에게 전파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림 1-4. 영국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의 천문학 강연.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했던 그의 강연 입장료는 회당 1기니(21실링)였는데, 이는 나중에 패러데이가 왕립연구소에 화학 조수로 들어갔을 때 처음 받은 주급과 같았다. 즉 이러한 강연의 입장료조차도 패러데이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음을 말해준다.

왕립연구소의 강연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과학 대중 강연도 여럿 존재했다. 이러한 강연을 제공했던 대중 과학 강사들은 여러 기관들을 돌면서 강연을 했는데, 런던에서 성공하면 지방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고, 지방에서 명성을 쌓아 런던으로 상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왕립연구소의 화학 교수가 되어 데이비를 이어 패러데이를 지도했던 윌리엄 토마스 브란드(William Thomas Brand)도 이러한 떠돌이 강사 중 하나였다. 이러한 대중 강연은 주로 의학과 화학을 주제로 이루어졌는데, 이에는 대중들이 원하는 유용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표면상의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강연이 유용성만을 앞에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대중들은 강연에서 훌륭한 볼거리와 재미를 기대하기도 했기 때문에, 천문학이나 전기처럼 볼거리 많은 주제들도 인기있는 강연 주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강연들의 입장료도 패러데이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패러데이는 이런 강연 중 적어도 하나는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에 목말라 있던 패러데이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1810년부터 패러데이는 리보 사장님의 친분 덕에 서점의 단골 고객이었던 존 테이텀(John Tatum)의 강연 코스와 함께 그가 주선하는 ‘시티 철학회(City Philosophical Society)’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과학 강사이자 은세공업자였던 테이텀의 강연 코스는 패러데이와 같이 배움에 목말라 있는 가난한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의 강연료는 회당 1실링밖에 하지 않았다. 󰡔정신의 개선󰡕의 권고대로, 패러데이는 테이텀의 강연을 열심히 들으며 꼼꼼하게 필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연을 듣고 돌아온 즉시 처음의 필기를 고쳐 깔끔한 노트를 만든 후 그에 설명을 덧붙여 완성본의 노트를 만들었다. 노트에 대한 이러한 패러데이의 집착은 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유난스러운 습관은 몇 년 뒤 과학자의 문턱에서 좌절할 뻔 했던 패러데이를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812년 도제살이가 끝날 무렵이 되자, 패러데이는 초조해졌다. 21살의 그는 제본공으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제본이라는 손으로 하는 일을 배웠지만, 이미 그의 가슴엔 과학이라는 고상한 활동에 대한 동경이 꽉 차 있었다. 그는 “타락하고 이기적으로 생각되던 상업으로부터 탈출하여, 상냥하고 관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던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누가 보면 그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실제로 행동했다. 일례로, 그는 당시 왕립학회의 회장이었던 조지프 뱅크스(Joseph Banks)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왕립학회에서 일을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할 말 없음(no answer)”이라고 휘갈겨 쓴 답장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러던 와중에 귀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꼼꼼한 노트가 기회를 이끌고 왔다. 왕립연구소의 회원이었던 서점의 단골 고객 윌리엄 댄스(William Dance)가 패러데이의 꼼꼼한 강연 노트를 보고서 패러데이가 선망하던 험프리 데이비의 값비싼 강연 입장권 4장을 구해준 것이다. 4번밖에 되지 않는 기회였지만,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강연을 열심히 들으며 그의 습관대로 꼼꼼하게 노트를 작성했다.

오랫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답인지, 패러데이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강연 직후 데이비는 실험 중 눈을 다쳐 실험을 기록해줄 사람을 임시로 구하게 되었고, 댄스의 추천 덕분인지 패러데이는 운 좋게 그 대필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단 며칠에 불과했고, 패러데이는 다시 원래의 자리, 제본공으로 돌아와 숙련 제본공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그는 왕립연구소의 정식 화학 조수가 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해냈을까?

패러데이는 자신의 유난스러운 노트 습관과 제본공으로서의 손재주를 결합시켰다. 데이비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쓰면서, 지난번에 데이비의 강연을 들으면서 손수 필기한 노트를 정성껏 제본하여 함께 보냈던 것이다. 패러데이의 열정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에 완전히 만족한 데이비는 그를 왕립연구소의 실험실 조수로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패러데이는] 이 일에 매우 적합합니다. 그는 좋은 습관을 가졌고, 능동적이고 원기왕성한 성품을 가졌으며, 총명해 보입니다.”

화학자의 도제로 훈련받다

그림 1-5. 1804년 경의 왕립연구소 전경

1813년 3월, 마침내 패러데이는 그렇게 원했던 왕립연구소의 화학 조수가 되었다. 그는 왕립연구소에서 주당 1기니(21실링)를 받으며 일을 했으며, 그곳에서 먹고 자기까지 했다. 지하 실험실에서는 데이비의 실험을 도우며 화학 지식과 실험 기술을 배웠고, 1층 강연홀에서는 데이비의 강연을 보조했으며, 그 위층에서는 잠을 잤다. 즉 왕립연구소는 패러데이에게 직장이자 학교이자 집이 되었으며, 패러데이는 이때부터 데이비 밑에서 전문적인 화학자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화학은 새로운 발견과 논쟁적인 이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1800년 볼타에 의해 전지가 발명되고 곧이어 물의 전기분해가 발견되면서, 화학과 전기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를 연구하는 전기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했다. 패러데이의 스승 데이비는 바로 이 전기화학 분야의 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학자였다.

그림 1-6. 패러데이의 스승인 험프리 데이비.

데이비는 전지에 의해 전류가 흐를 때마다 전지의 전극에서 화학분해가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전지에서 흘러나오는 전류가 물질의 화학분해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1807년에는 물 이외의 물질을 전기분해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로부터 데이비는 화학분해와 전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모든 화학결합의 본질이 전기력에 있다는 대담한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데이비의 전기화학적 세계관은 후에 패러데이가 전기분해 법칙을 발견하고 전기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데이비는 기체 화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810년 그는 당시 소독이나 표백에 사용되며 ‘산소-염산 기체(oxy-muriatic acid gas)’라 불리던 물질이 화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당시까지 산소 화합물로 여겨지던 이 물질이 실제로는 단일 원소라고 주장하며 이 원소에 ‘염소(chlorine)’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그는 같은 방식의 연구를 통해 ‘요오드’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데이비의 연구 성과는 그의 숙련된 화학 분석 능력에 기초해 있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데이비의 조수가 된 것은 패러데이에게는 매우 큰 행운이었다. 데이비는 화학자로서 기본기가 튼튼한 사람이었고, 당시 화학의 최신 분야인 전기화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었다. 데이비의 조수로 일하면서, 패러데이는 데이비로부터 매우 체계적인 화학 분석 훈련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 데이비의 전기화학적인 연구를 거들면서 그의 전기화학적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데이비를 통해 과학 연구의 첫 시작으로 화학 분야를 선택하게 된 것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화학이란 분야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패러데이의 능력에 비추어 무척이나 잘 맞는 학문이었다. 화학에서는 고난이도의 수학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대신 손으로 하는 실험과 주의 깊은 관찰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패러데이의 스승 데이비는 이론이 실험보다 우선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프랑스 화학자들은 라플라스의 이론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모든 물질 사이에는 수학적인 법칙에 의해 표현되는 몇 가지 종류의 힘이 작용한다고 ‘이론적으로’ 가정한 후, 그 이론에 맞춰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데이비는 이런 프랑스식 화학 연구 방식에 반대하며, 현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실험이 미리 정해진 이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험에 대한 자부심은 패러데이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화학 조수로 발탁된 직후 데이비의 필기생으로 따라가게 되었던 1813-5년의 대륙 여행에서 만난 프랑스 화학자들에 대해 패러데이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들은 실험적으로 증명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만 추론한다. 그래서 잘못이 나타나게 된다.”

1815년, 대륙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패러데이는 직함이 바뀌어 ‘조수 겸 실험 장치와 광물 표본 관리인’이 되었고, 보수는 주당 30실링으로 늘었다. 왕립연구소의 화학 교수였던 데이비는 이제 명예 교수가 되었고, 대신 윌리엄 토머스 브란드가 새로운 화학 교수로 영입되었지만, 이후에도 데이비는 패러데이의 지도교수 역할을 꾸준히 해주었다. 패러데이는 교수들의 강연을 보조했으며, 일상적으로는 연구소의 실험 재료들을 준비하고 실험 장비들을 관리했다. 가끔은 외부에서 위탁받은 실용적인 연구를 데이비와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다양한 물질을 분석하는 일 또한 패러데이의 일상적인 연구 중 하나였다. 1816년에는 토스카나 지방의 생석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패러데이는 왕립연구소와 데이비의 도움으로 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그림 1-7. 왕립연구소의 지하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패러데이. 실험실은 주로 화학 약품들로 가득 차 있지만, 오른쪽 구석 테이블 주변에는 정전기 발생 장치(책상 아래 손잡이가 있는 장치)와 라이덴 병(책상 위 금속구가 달린 병)을 비롯한 전기 실험 장치들도 보인다. (출처: 해리엇 무어(Harriet Moore)의 1850년경의 그림)

1820년대가 되면 패러데이는 거의 완연한 독립 화학자로 성장하게 되어, 중요한 화학적 발견 두 가지를 하게 된다. 그의 연구는 언제나 화학 분석에서 시작했다. 1823년 패러데이는 데이비가 지시한 염소 수화물(chlorine hydrate)을 분석하기 위해 물질을 튜브에 넣어 가열하던 중 수화물이 분해되어 압력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면서 염소가 액화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압력에 의한 기체의 액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한편 설탕 공장에서 쓰이던 오일가스의 성분을 조사하던 패러데이는 그 분해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그 물질의 화학적 조성을 밝혀낸 후 ‘수소의 이가탄화물(becarburet of hydrogen)’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오늘날 ‘벤젠’이라 불리는 물질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에는 수학적인 이론이 개입되지 않았다. 다만 정교한 실험 능력과 화학에 대한 이러저러한 암묵적 지식들, 그리고 실험을 통해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놓치지 않는 명민한 관찰력만이 필요했다. 당시 패러데이는 자유자재로 실험을 구사하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달인이 되어 있었다.

1825년 ‘실험실 책임자’가 됨으로써 도제 화학자로서의 과정을 공식적으로 마친 패러데이는 2년 뒤 󰡔화학적 조작(Chemical Manipulation)󰡕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화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쓰여진 화학 교과서로서, 패러데이가 과학을 하는 방식을 잘 드러내주었다. 화학 원소 및 화합물의 성질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교과서와 달리, 이 책은 그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실험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물질에 대한 가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어떠한 실험적 조작으로부터 어떠한 결과를 관찰할 수 있는지만이 차례차례 제시되었다. 모든 화학적 지식은 그가 제시한 실험적 절차를 따라감으로써만 얻어졌다. 이는 바로 패러데이가 왕립연구소에서 훈련받는 동안 습득한 과학의 방법과 지식의 총체였다.

그는 데이비 밑에서 화학자로서 훈련받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화학에 대한 다양한 명시적, 암묵적 지식들을 쌓았고, 실험 능력을 배웠다. 또한 그는 데이비의 전기화학적 세계관을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실험을 통해 세계를 배우는 법에 대해 배웠다. 이는 이후 패러데이가 수행하게 될 전자기 연구의 방법과 내용을 결정지었다.

과학의 문화적 상징이 되다

그림 1-8. 1856년 1월 크리스마스 강연. 패러데이가 일반 금속의 성질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알버트공⑴, 후에 에드워드 7세가 되는 왕세자⑵,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⑶, 물리학자 존 틴들⑷ 등이 패러데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앉아 있다. (출처: 알렉산더 블레이클리(Alexander Blaikley)의 1856년 그림)

전기와 자기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전자기 분야의 탄생은 패러데이의 경력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21년 전자기 회전을 발견하면서 과학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데이비와의 관계가 급속하게 나빠지긴 했지만, 패러데이는 학계의 인정을 받아 1824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1831년부터 패러데이는 전기와 자기 연구에 매진하여 전자기 유도, 전기 유도 용량, 반자성체 등의 수많은 발견을 남겼으며,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2장과 3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의 실험적 발견과 새로운 세계관은 전문 학술지뿐만 아니라 왕립연구소 대중 강연을 통해서도 전파되었다. 만약 1836년 1월에 그의 강연을 보러 갔다면, 우리는 커다란 금속 케이지에 들어가서 이러저러한 실험을 하고 있던 패러데이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며칠 전 지하 실험실에서 발견한 정전기 차폐 현상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만약 1856년에서 5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크리스마스 강연(Christmas Lecture)’을 보러 갔다면, 우리는 공간에 펼쳐진 ‘힘의 선’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패러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모든 작용은 ‘힘의 선’을 통해 전파되며, 물질이란 ‘힘의 선들’이 모인 수렴점에 불과할 것이라는 그의 얘기는 수많은 청중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

사실 그의 강연은 문화로서 소비되던 과학의 최정점에 있었다. 그림을 한번 보자. 56년 1월, 64살이 된 백발의 패러데이는 영국 최고의 과학 강연가가 되어 열정적인 강연을 하고 있다. 패러데이가 가리키는 판 양쪽에는 ‘PLATINUM’과 ‘GOLD’가 적혀있고, 패러데이 앞의 테이블에는 금속의 성질을 보여줄 실험기구가 놓여있다. 올해 크리스마스 강연의 주제는 ‘일반 금속의 성질’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청중들이 패러데이의 강연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꽤 보인다. 대머리가 벗겨진 찰스 라이엘 경(Sir Charles Lyell)도 보이고 바로 옆에는 존 틴달(John Tyndall)도 앉아 있다. 실험 테이블 바로 앞의 귀빈석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 공(Albert, Prince Consort)과 후에 에드워드 7세(Edward VII)가 되는 그의 아들까지도 함께 앉아 있다. 즉 패러데이의 강연은 그 시대에 향유되던 최고급의 문화 공연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과학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맥스웰, 엘리트 코스를 밟다

그림 1-9. 압력을 받고 있는 삼각형 유리의 변형 패턴. A에 압력이 가해질때 나타나는 유리의 3차원 변형 패턴이 등고선 및 그에 수직인선들에 의해 2차원 상에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나중에 ‘힘의 선’과 ‘등전위면’을 표현할 때에도 그대로 사용된다. (출처:맥스웰, “탄성 고체의 평형에 관하여”,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보》 1850, 68쪽)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1831년 6월 13일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이자 부유한 지주였던 존 클러크 맥스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10살이 되던 1841년, 그는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문이었던 에딘버러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맥스웰은 이후 평생 동안 학문과 우정을 나누게 될 두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한 명은 그의 전기를 쓴 루이스 캠벨(Lewis Campbell)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그와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이자 경쟁자가 되어 주었던 피터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였다.

그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화려한 예술가의 것보다는 건축가나 엔지니어의 설계도에 가까운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수학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역시 숫자나 기호만을 가지고 하는 대수보다는 그림이나 기계적인 도구를 사용한 기하학을 더 좋아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맥스웰이 처음 발표했던 핀과 끈을 이용하여 계란형 타원(다초점 타원)을 작도하는 법에 관한 논문은 그의 재능과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맥스웰의 주변에는 유난히 ‘과학인(men of science)’들이 많았다. 한때 발명가의 뜻을 품은 적이 있었던 맥스웰의 아버지는 실험광학자 윌리엄 니콜의 실험실에 맥스웰과 캠벨을 데려가기도 했으며, 에딘버러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 제임스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와는 친구 사이였다. 14살의 맥스웰이 쓴 논문을 에딘버러 왕립학회에서 대신 읽어준 사람도 바로 포브스였다. 한편 영국 조폐국장을 역임했던 삼촌 조지 클러크 경(Sir George Clerk)은 아마추어 동물학자로 나중에 동물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글래스고에 살고 있던 사촌 누나의 남편 휴 블랙번(Hugh Blackburn)은 글래스고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고, 언젠가 사촌 누나를 만나러 갔던 맥스웰은 블랙번과 친하게 지내던 젊은 자연철학 교수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과도 평생 지속될 친분을 쌓게 된다.

1847년, 16살이 된 맥스웰은 포브스가 재직하고 있던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학파로 유명한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788-1856)으로부터는 철학적 사고를 배웠으며, 자연철학을 가르쳤던 포브스는 맥스웰에게 자신의 실험실에 있는 실험 장치를 자유롭게 만지고 조작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에딘버러에서의 대학 생활을 마칠 무렵 그는 기존의 실험 장치를 다루거나 새로운 실험 장치를 만들어내는 데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강의와 실험 이외에도 맥스웰은 대학 도서관에 있는 책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가 빌린 책의 목록에는 뉴턴의 『광학(Optics)』, 푸리에의 『열 분석 이론(The Analytical Theory of Heat)』, 몽주의 『화법기하학(Descriptive Geometry)』 등이 있었는데, 그는 특히 푸리에의 이론에 매혹되어 직접 책을 구입해 보기도 했다. 푸리에의 『열 분석 이론』은 열전도를 미분방정식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었으며, 몽주의 『화법기하학』은 3차원 공간의 입체를 2차원 평면으로 표현하는 정사영 및 등고선 방법에 관한 책이었다. 맥스웰은 이 책으로부터 물리적 대상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두 가지 중요한 방법, 즉 미분방정식과 기하학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에딘버러 대학을 다니는 동안 맥스웰은 두 편의 수학 논문을 썼는데, 그 중 하나는 『탄성 고체의 평형』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는 탄성이 있는 고체, 예를 들어 유리가 압력(stress)을 받을 때 나타나는 변형 패턴을 수학적으로 공식화하고자 했다. 그는 유리에 응력이 가해질 때 나타나는 변형 패턴을 빛을 이용해 가시화한 후, 그것을 다시 정교한 2차원 그림으로 남겼다(그림 1-9). 그리고 그는 이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압력과 변형 사이의 미분방정식을 만들어냈다. 즉 이 논문에는 그가 에딘버러를 다니면서 습득한 실험적 방법과 수학적 기법이 총집약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 수학적 기법들은 이후 그의 전자기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케임브리지의 우등생이 되다

그림 1-10. 1842년의 수석 랭글러 시상식. 수학 트라이포스 우등 합격생, 즉 랭글러가 되는 것은 크나큰 명예로, 그 시상식은 화려하게 치러졌다. 1842년의 수석 랭글러는 아서 케일리(Arthur Cayley)로,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웠던 ‘케일리-해밀턴 정리’의 케일리이다. (출처: H. P. 스토크스(H. P. Stokes), 《케임브리지대학의 의식들Ceremonies of the University of Cambridge》, 1927)

1850년, 19살의 맥스웰은 에딘버러를 떠나 보다 나은 수학 교육을 받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등록했다. 스코틀랜드 법조계에 진출했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얌전히 법전이나 읽을 생각까지 했지만, 친구 테이트가 먼저 가 있었던 케임브리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맥스웰의 재능과 포부를 눈여겨봤던 포브스 교수와 사촌매형 블랙번이 아버지를 설득해주었고, 결국 맥스웰은 케임브리지로 학교를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피터하우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고리타분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한 학기를 마치고는 윌리엄 휴얼(William Whewal, 1794-1866)이 학장으로 있던 트리니티 칼리지로 적을 옮겼다.

19세기 중반 케임브리지 대학은 고전 교육보다 수학 교육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학 교육을 통해 전문적인 수학자나 과학자를 길러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육의 주된 목적은 여전히 미래의 판사나 주교가 될 사회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것이었다. 다만 수학은 그 엘리트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정신적 소양으로 여겨져 매우 강도 높은 수학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림 1-11. 1909년 『타임즈』에 실린 수학 트라이포스 우등 합격생들의 석차. 수석은 Percy John Daniell이, 차석은 E. H. Neville이 했다. 이 해를 마지막으로 유난스러웠던 수학 트라이포스 시험 전통은 막을 내린다.

이러한 수학 교육의 성과는 “수학 트라이포스(Mathematical Tripos)”라고 불린 우등 졸업 시험(Senate House Examination)에 의해 평가받았다. 이 시험의 우등 합격생들은 ‘랭글러(wrangler)’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이 시험이 끝난 직후 우등 합격생들은 스미스 상 수상자를 가리는 또 한 차례의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 대한 시상식은 성대하게 치러졌고(그림 1-10), 우등 합격생의 순위는 매년 영국의 유력 신문 『타임즈(The Times)』에까지 실렸다(그림 1-11). 사회에서 중요한 경력으로 인정받는 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영광과 보상을 얻 기위한 학생들 사이의 경쟁은 치열했다.

이 시험의 난이도는 1820년대부터 급격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를 주도한 인물 중에는 후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이 되는 휴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휴얼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학자들은 영국의 과학 수준이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에 비해 뒤쳐져가고 있다는 인식을 함께 했는데,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륙의 고도로 발달한 대수적 미적분학기법과 해석 역학을 영국에 수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휴얼은 대륙의 수학 기법이 다양한 물리적 문제를 푸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륙의 새로운 수학 기법을 통해서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케임브리지 대학 우등 졸업 시험에 반영하기시작했고, 휴얼은 그러한 수학 기법을 역학적인 예제들을 통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학부생용 교과서 『동역학 논고(Treatise on Dynamics)』(1823)를 출판하여 학생들의 시험 준비를 도왔다. 일단 변화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대륙의 수학 기법들을 조금씩 익히기 시작하자, 졸업 시험 출제위원들은 우등생을 선별하기 위해 더욱 까다로운 문제를 출제하기 시작했고, 더 어려워진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이를 과외 지도해주는 ‘코치’제도가 준공식적인 교육처럼 등장하여, 능력 있는 학생들은 대학의 강의를 듣기보다 코치와 함께 졸업 시험의 기출 문제들과 예상 문제들을 푸는 데 매달렸다. 특히 수많은 랭글러를 길러냈던 코치 윌리엄 홉킨스(William Hopkins, 1793-1866)는 ‘랭글러 제조기’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출제된 시험 문제의 변화를 통해 확연하게 관찰된다. 1819년 트라이포스 마지막 날 오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총 24문제로, 대체로 로그의 미분이나 굴절률의 측정법과 같은 기초적인 내용만 알면 풀 수 있었던 반면, 1845년 마지막 날 오후 시험에는 대수, 역학, 미분 방정식, 빛의 파동 이론, 포텐셜 이론, 변분법, 미분 기하학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고는 풀 수 없는 8개의 문제가 달랑 출제되었다. 우등생을 가리는데 시험 문제 수가 너무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지, 1848년에는 졸업시험 기간을 6일에서 8일로 연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1854년 1월 맥스웰을 비롯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은 총 8일(1월 3일~5일, 1월 16일~20일) 동안 오전 시험과 오후 시험을 합쳐 총 220개에 달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했다. 이 때문에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며칠 동안 계속되는 시험을 치르는 와중에 탈진하는 학생들도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이 시험은 대학 역사상 최고로 끔찍했던 시험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맥스웰 역시 이 시험을 준비하며서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밤마다 기숙사 복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물리적 직관이 뛰어났던 맥스웰은 주어진 물리적 문제로부터 결론을 내는 데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빨랐지만, 그에 대한 수학적인 증명을 깔끔하게 이어가는 능력은 서툴렀으며 계산 실수도 잦았다. 에든버러 대학 시절 맥스웰을 지켜본 포브스 교수는 그의 “지나친 투박함”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휴얼에게 맥스웰에 대한 얘기를 전하기도 했는데, 맥스웰의 버릇을 고치는 방법은 케임브리지의 “엄격한 훈련(Drill)”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 맥스웰을 코치했던 ‘랭글러 제조기’ 홉킨스도 맥스웰에 대해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맥스웰이 물리적 주제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반면, 그에 비해 그의 수학적 분석은 부족한 면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맥스웰은 홉킨스의 지도 아래 자신의 버릇을 어느 정도 교정하는 데 성공했고, 1854년 그는 차석 랭글러 및 스미스상 공동 수상자로서 케임브리지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케임브리지의 수학 교육과 끔찍했던 트라이포스 시험은 케임브리지 출신 과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정교한 수학적 기법을 다양한 분야의 문제에 적용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케임브리지 출신의 과학자들은 그동안 수학화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열, 전기, 자기와 같은 현상들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게다가 당시 “수학”이라고 하는 것에는 순수 수학뿐 아니라 천문학, 광학, 수력학과 같이 오늘날 “수리 물리학”에서나 취급할 만한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역학’은 마치 순수 수학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다루어졌다. 이는 이 분야의 문제들, 그중에서도 특히 역학의 문제들이 수학 훈련을 위한 예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들은 다양한 물리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역학적인 유비를 자주 사용했다.

19세기 중반 복잡한 역학적인 상황을 다루는 수학적인 기법을 발전시키고 그러한 역학을 열과 전자기 분야와 통합시켜 오늘날과 같은 ‘물리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던 조지 스토크스(1841, 수석 랭글러, 스미스 상), 윌리엄 톰슨(1845, 차석 랭글러, 스미스 상), 피터 테이트(1852, 수석 랭글러, 스미스 상), 그리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54, 차석 랭글러, 스미스 상)까지, 이들 모두는 이 끔찍한 시험 전통의 산물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랭글러 제조기’ 홉킨스가 만들어낸 랭글러들이었다.

물리학자가 되다

1854년 수학 트라이포스 시험을 마친 맥스웰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여러 주제의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다. 그가 발표한 논문을 보면 여러 주제의 논문들이 발표된 시점이 겹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빛의 혼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삼원색을 밝혀내고 컬러 사진법을 개발하는가 하면(1855, 1860, 1861), 토성 고리 운동의 안정성 조건을 밝혀냈다가(1859), 열 현상을 기체 분자들의 통계적인 운동으로 다루는 방법을 제시했으며(1860, 1867), 패러데이의 전자기 연구를 발전시켜 전자기장 이론을 내놓았다(1855-56, 1861-62, 1865).

맥스웰이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동시에 다룰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케임브리지에서 받은 훈련에 있다. 맥스웰의 모든 연구는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표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색의 혼합에 대한 연구를 제외한 나머지 연구들은 모두 대상에 대한 역학적인 모형을 만들어 그것의 수학적인 귀결을 찾아내는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즉 맥스웰이 다룬 이 모든 주제는 수학과 역학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열, 빛, 전자기가 ‘물리학’이라는 분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스웰의 연구 방식 덕분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러한 수학과 역학이라는 방법은 단지 문제 풀이의 도구를 넘어서, 그가 그리는 세계의 개념적인 부분을 구성하기도 했다. 맥스웰은 세계를 분자들 사이의 충돌에 의해서든, 아니면 모종의 ‘연결된 메커니즘’에 의해서든 각 구성성분들이 운동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역학적인 시스템으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세계관은 그의 열-통계역학 이론과 전자기장 이론에서 극명하게 표현된다. 역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연결된 시스템에 대한 관심은 기계 자동 제어 시스템을 다룬 그의 공학 논문 「속도조절기에 대해」(1868)에서도 나타나 있다. 실제로 이 논문에는 1865년에 발표한 「전자기장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에서 전기와 자기의 연결 방식을 동역학적인 방식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수식과 똑같은 형태의 수식이 담겨있기까지 했다.

케임브리지 졸업 이후 맥스웰은 중간에 6년간 고향에서 저서 집필에 매진했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대학에 있었다. 1854년 케임브리지 졸업 직후 그는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어 학부생들을 개인 지도하며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했다. 1856년에는 에버린의 매리셜 칼리지의 자연철학 교수로 부임하여 강의와 연구를 수행했다. 1860년에는 매리셜 칼리지가 에딘버러 대학과 합병되면서 교수 자리를 잃게 되지만, 대신 그는 런던 킹스 칼리지의 자연철학 교수로 부임할 수 있었다. 1865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그때까지의 전자기 연구를 집대성하여 『전기와 자기에 관한 논고(A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1873)을 집필하는 데 매진했다.

1871년 케임브리지 대학은 ‘캐번디시 실험물리학 교수’라는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맥스웰을 불러들였다. 대학 측은 맥스웰에게 실험물리 연구를 위한 ‘캐번디시 연구소’도 지어주었다. 그의 마지막 일터가 된 캐번디시 연구소는 지금까지의 일터와는 사뭇 다른 역할을 맥스웰에게 부여했다. 그동안 맥스웰의 주된 업적은 다양한 물리적 현상을 수학적인 역학 체계로 통합시키는 이론적인 작업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곳에서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초대 실험물리학 교수이자 캐번디시 연구소장으로서 대학 교육과 연구에서 새로운 실험 전통을 정립시켜야 했다. 그는 이 역할을 담담하게 잘 수행하여, 정밀 측정이라는 전통을 캐번디시 연구소에 새겨 넣었다.

패러데이 & 맥스웰의 목차

정동욱, 『패러데이 & 맥스웰 : 공간에 펼쳐진 힘의 무대』 (김영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