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새로운 우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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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3일 (목) 14:29 판
새로운 과학적 관점
케플러와 갈릴레오는 움직이는 행성으로서 지구의 지위를 뒷받침하는 인상적인 증거를 수집했다. 그러나 타원 궤도의 개념과 망원경으로 수집한 새로운 자료는 행성 지구를 뒷받침하는 천문학적 증거일 뿐이었다. 이들은 행성 지구에 반하는 천문학 외부의 증거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답이 제시될 때까지, 그러한 각각의 비천문학적 논변들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우주론적이든, 종교적이든, 전문적인 천문학의 개념들과 다른 분야의 과학과 철학에 사용된 개념들 사이에 나타난 엄청난 불균형을 보여 주었다. 천문학적 혁신을 의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수록, 다른 분야의 조정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시급해졌다. 그러한 수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과학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대규모 격변은 비슷한 개념적 불균형을 낳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오늘날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에 의해 시작된 과학혁명의 후반부를 지나고 있다. 그들의 새로운 개념들을 비롯해 혁명이 의존하고 있는 그 밖의 개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행성 지구 개념과 상당한 역사적 유사성을 보여 준다. 보어의 원자와 아인슈타인의 유한하지만 무한한 공간과 같은 관념들은 과학의 한 전문 분야에서 제기된 긴급한 문제를 풀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러한 개념들을 수용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기인한 분야의 엄청나게 절실한 요구 때문에 상식, 물리적 직관, 다른 과학의 기초 개념들과의 명백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수용했다. 얼마간 그 개념들은 전반적인 과학적 사고방식 속에서 믿기 어려워 보였는데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사용은 아무리 이상한 관념도 그럴듯해 보이게 해 주며, 일단 그럴듯해지고 나면 그 새로운 관념은 더 큰 과학적 기능을 얻게 된다. 1장의 용어를 사용하면, 알려진 사실을 경제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기이한 임시방편적 장치에 불과했던 그 관념은 이제 자연을 설명하고 탐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도구가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새 관념은 과학의 한 전문 분야에 제한될 수 없다. 자연은 서로 다른 분야에 양립 불가능한 속성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물리학자의 전자가 그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지 않은 채 여기서 저기로 뛰어넘을 수 있다면, 화학자의 전자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물질과 공간에 대한 철학자의 개념도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과학의 한 전문 분야에서 일어난 모든 근본적 혁신은 필연적으로 인접 과학 분야들도 변화시키게 되며, 더 느리게는 철학자와 교양 있는 일반인의 세계도 변화시키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혁신도 예외가 아니다. 17세기 초반 그것은 기껏해야 천문학의 혁신일 뿐이었다. 천문학 외부에서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으며, 그 문제들은 그것이 해결한 수치적 세부 사항의 문제들보다 훨씬 명백하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왜 항상 무거운 물체는 지구가 태양 주위의 궤도를 도는 동안 자전 중인 지구 표면을 향해 떨어지는가? 별들은 얼마나 멀리 있으며, 우주의 구조에서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성을 움직이며, 천구 없이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궤도를 유지하는가?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은 이 질문들에 대한 전통적인 답을 파괴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천문학이 다시 통일된 사고 체계에 그럴싸하게 동참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물리학과 우주론이 필요했다.
새로운 과학과 우주론이 만들어지는 17세기 말이 되기 전까지, 그 역할을 자임한 사람들은 모두 소수파였던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일원이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그들이 수행하는 연구의 많은 부분에 새로운 형태와 방향을 부여했다. 그것은 새로운 부류의 문제를 제공했다. 그중 하나−무엇이 지구를 움직이는가?−는 케플러의 아니마 모트릭스를 살펴볼 때 이미 짤막하게 등장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이 새로운 문제들의 해법이 요구하는 개념과 방법에 대해 여러 힌트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지상계 법칙과 천상계 법칙의 통합을 제안함으로써, 그것은 투사체를 행성 운동에 대한 적법한 정보의 원천으로 둔갑시켰다. 마지막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과거 (고대와 중세 시대에 소수 견해로 유지되긴 했더라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무시해 온 수많은 우주론적 학설들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17세기 동안 이렇게 새로 유행하게 된 견해들 중 일부−특히 원자론−는 과학에 중요한 제안들을 제공한 지속적인 원천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 새로운 방법, 새로운 가치 평가는 17세기 과학이 코페르니쿠스주의로부터 얻은 새로운 관점을 구성했다. 바로 앞의 장은 이 새로운 관점이 천문학에 미친 결과를 보여 주었다. 이 장은 그것이 다른 과학들과 우주론의 발전에서 수행한 역할을 보여 줄 것이다. 뉴턴주의 우주는 바로 코페르니쿠스주의가 비옥하게 일군 지적 분위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천문학적 정점이었던 케플러의 법칙들과 달리, 뉴턴주의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넘어서는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것의 진화에 대해 살펴보고 행성 지구 개념이 어떻게 끝내 일관성을 얻게 되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전까지는 천문학이나 우주론의 발전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아 지금까지 무시하고 지나쳤던 개념들과 기법들도 가끔 소개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제 코페르니쿠스 혁명 그 자체보다 커지게 된다.
무한 우주를 향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는 대부분의 버전에서 유한한 우주−물질과 공간은 항성 천구에서 함께 끝이 난다−였으며, 대부분의 초창기 코페르니쿠스주의 우주는 이러한 전통적인 특징을 보존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의 우주론에서 태양의 중심은 유한한 항성 천구의 중심과 일치하며, 태양은 단순히 지구와 자리를 바꿈으로써, 중심에 있는 특별한 존재, 즉 신의 신플라톤주의적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2구체 우주는 전통적인 우주론의 자연스러운 개정판이었다. 구체적으로 반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생각은 19세기에 향상된 망원경에 의해 서로 다른 별들이 태양으로부터 매우 다른 거리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유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구체 구조의 역할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과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유한성은 전자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가졌지만, 그 기능은 후자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에서 항성 천구는 일주권을 따라 별들을 돌리고 행성과 지상의 물체들을 계속 움직이도록 유지해 주는 추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했다. 게다가 바깥 천구는 우주의 절대적 중심을 정의해 주었으며, 모든 무거운 물체는 그 중심을 향해 저절로 움직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는 그 천구로부터 이러한 모든 기능과 함께 다른 기능들도 빼앗아 버렸다. 지상의 운동은 우주의 절대적 중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돌은 움직이는 지구를 향해 떨어졌다. 바깥 천구는 천체의 운동을 만들어 내는 데도 필요하지 않았다. 천구에 자리를 잡고 있든 아니든, 별들은 정지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여전히 항성 천구를 유지할 자유가 있었지만, 오직 전통만이 그에 대한 동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항성 천구는 코페르니쿠스적 물리학이나 우주론을 하나도 방해하지 않은 채 폐기될 수 있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우주론적 사고에서 새로운 자유를 부여받았고, 그 결과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둘 다 경악할 만한 새로운 사변적 우주관이 등장했다. 코페르니쿠스 사후 1세기만에 그의 2구체 구조는 별들이 무한한 공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우주로 교체되었다. 이 별들은 각각 하나의 ‘태양’이었고, 그들 중 다수는 자기 자신의 행성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여섯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쪼그라들었던 특별한 지구는 1700년경에는 한 점의 우주적 먼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적 관념이 어떻게 정립되었는지에 대해 역사가들은 아직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기원은 매우 분명하다. 바깥 천구의 우주론적 기능을 없앰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에 대한 과거의 사변적 관념 세 가지를 부활시켰다. 이 세 관념은 각각 스콜라주의, 신플라톤주의, 원자론과 관련되어 있었다. 『회전에 관하여』 이전에 이 세 우주론은 그 구조와 동기가 매우 달랐으며, 모두 천문학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과학적 우주론으로 탈바꿈했으며, 일단 변화를 겪고 나자 그들은 놀랄 만한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내 보였다.
우선 가장 널리 퍼져 있던 관념인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무한 우주 관념부터 살펴보자. 원래 이 관념은 진공의 논리적 불가능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수용할 수 없었던 이슬람 철학자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 우주는 중심의 지구부터 뱅글뱅글 도는 항성 천구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와 사실상 똑같았지만, 항성 천구 너머에서는 공간이 더 이상 물질과 공존하지 않게 된다.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 전체는 신과 천사들의 자리인 물질이 없는 무한한 우주의 중심에 알맹이처럼 박혀 있었다. 이 우주는 신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고 무한 우주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이 관념은 13세기 이후 유럽에서 비교적 대중적인 관념이 되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살아 있을 때 유통되던 몇몇 유명한 입문서에 묘사되어 있었으며, 그 관념에 대한 지식은 그가 관측 시차의 부재 때문에 꼭 필요했던 항성 천구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이러한 버전의 무한 우주는 천문학을 비롯해 다른 어떤 과학을 수행하는 데에도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천체들이 끊임없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그들은 바깥 천구 너머의 무한한 공간에 쉽게 놓일 수 없었다. 그 공간의 기능은 신학적인 것이었을 뿐, 물리학적이거나 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별들을 멈춤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무한한 공간에 천문학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 새로운 자유는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후 한 세대에 걸쳐 파헤쳐졌다. 1576년 영국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 토머스 딕스(Thomas Digges)는 코페르니쿠스의 제1권의 단순한 주해서가 될 뻔했던 책에 무한 우주의 아이디어를 도입했고, 그 결과는 딕스의 원 삽화를 그대로 가져온 그림 45에 그려져 있다. 우주의 중심부는 『회전에 관하여』의 우주와 동일하지만, 별들은 항성 천구의 표면에서 밖으로 빠져나와 과거 비주류 우주론 전통에 의해 상정된 무한한 공간에 흩어져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직속 계승자들 중 딕스처럼 멀리 나간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 상당수는 별들이 더 이상 천구 위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각각의 별들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달라져도 그 겉보기에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이 그전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별들을 보여 주었을 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 별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은 덜 전통적인 천문학자들에게 거의 경험의 문제처럼 보였다.
딕스는 무한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묘사한 최초의 인물이었지만, 그가 무한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와 중세 시대에 무한한 공간을 거부한 주된 이유를 제공했던 역설적 상황을 자기도 모르게 도입한 덕분이었다. 딕스의 하나밖에 없는 중심의 태양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태양은 더 이상 어떠한 별이나 행성보다 더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은 변방의 모든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으로, 그 조건은 무한 우주 내의 모든 점이 만족하거나 아니면 어떤 점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러한 역설은 코페르니쿠스보다 한 세기 전에 중요한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쿠사의 니콜라스가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는 우주가 무한한 구라고 믿었으며−그보다 작은 어떠한 구도 신의 창조적 전능성과 일관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그 구의 중심이 어디나 구의 변방과 일치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에 따른 역설을 표현한 바 있다. 그의 우주에서, 모든 물체는 고정된 물체든 움직이는 물체든 우주의 중심에 있는 동시에 우주의 표면에도 있으면서 또 우주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공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과 구별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간의 거주민들−지구와 행성과 별들−은 다 같이 움직여야 하며 모두 같은 본성을 가져야 했다.
쿠사의 비전은 코페르니쿠스주의의 등장에 의해 변형될 수 있었던 우주론의 두 번째 사례를 제공한다. 쿠사가 그 우주론을 개발했을 당시, 즉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기 100년 전, 그 우주론은 과학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우주론자의 역할에서 볼 때, 쿠사는 어떠한 역설도 화해시킬 수 있는 무한한 신이라는 초월적 견해를 위해 현상을 기꺼이 거부한 신비주의자였다. 그러나 무한성과 그것의 역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주장은 현상이나 과학과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사후 똑같은 주장은 이탈리아의 신비주의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우주론적 저술들에 동기와 반복되는 주제를 제공했으며 우주에 대한 브루노의 비전에서 무한성과 현상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화해되었다. 우주론에 대한 그의 접근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쿠사의 접근만큼이나 과학이나 현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브루노는 옳았다. 태양은 중심에 있을 필요가 없으며, 사실 어떠한 중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적 태양계는 무한 우주의 어디에든 놓일 수 있었다. 태양과 주변 별들 사이의 거리가 시차의 부재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멀기만 하면, 현상은 유지될 수 있었다.
브루노가 무한하고 중심이 없는 우주를 현상과 화해시킨 일은 그의 우주론적 구조에서 한 부분에 불과했다. 1584년 초엽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태양계와 그의 무한한 공간 내 다른 천체들 사이의 명시적인 물리적 관계도 설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태양은 무한히 광활한 공간에 걸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무한한 하늘의 다른 별들 중 일부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구뿐 아니라 태양과 전체 태양계도 무한한 신의 창조물 속에서 길을 잃은 사소한 작은 점으로 둔갑했고, 스콜라 학자들의 치밀하고 질서정연한 우주는 광대한 혼돈 상태가 되었으며, 전통으로부터의 코페르니쿠스적 이탈은 그 최대치에 도달했다.
그러나 급진적이긴 했어도,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이 마지막 확장에는 새로운 것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브루노가 태어나기 2000년 전, 고대의 원자론자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움직이는 많은 지구와 많은 태양을 가진 무한 우주를 상상했다. 고대에 그들의 학설은 과학적 사고의 토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쟁 상대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그들의 글은 중세 시대 동안 거의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을 계승한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저작들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복원된 주요한 문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 저작에서, 특히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서, 브루노는 그의 가장 생산적인 관념들을 다수 끌어냈다. 브루노의 우주론에서 고대의 제3의 사변적 우주 관념은 코페르니쿠스주의와의 친밀성 덕분에 되살아나 새로운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그 친밀성은 다소 놀라운 일로, 역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원자론과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완전히 다른 학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우주론의 주된 교리들을 주로 관찰이 아닌 논리적 역설로 보이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개발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유한한 물체들의 존재와 운동은 오직 실제 세계가 광대한 빈 공간 혹은 진공 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쳐 다니는 작은 분할 불가능한 입자들로 이루어졌을 경우에만 설명될 수 있었다. 진공은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했다. 만약 빈 공간이 없다면, 물질이 이동해 들어갈 장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궁극적 입자의 분할 불가능성은 그들이 보기에 유한한 물체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것 같았다. 만약 물질이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면, 그 궁극적 부분들은 공간을 전혀 차지하지 않는 기하학적 점이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아무런 부피를 차지하지 않는 부분들로부터는 어떻게 해도 유한한 물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0 더하기 0은 덧셈을 아무리 반복해도 0일 뿐이다. 따라서 원자론자들은 실재가 분할 불가능한 원자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코페르니쿠스주의와 별 관련이 없었던 이러한 전제는 그들의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전제는 그리 무관하지 않은 몇몇 놀라운 귀결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원자론자들의 진공은 그 크기가 무한해야 한다. 진공은 오직 물질에 의해서만 경계가 정해질 수 있었으며, 반대로 물질은 더 큰 진공에 의해 경계가 정해질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서처럼 물질과 공간이 운명을 함께하지 않을 경우, 우주의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는 끝이 있을 수 없었다. 또다시, 원자론자들의 우주에는 특별한 위치나 특별한 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진공 자체는 중립적이었다. 각 위치는 다른 모든 위치와 마찬가지였다. 지구나 태양이 다른 곳이 아닌 어떤 한 위치에 존재한 것은 단지 원자들이 우연한 운동과 충돌을 통해 바로 그 위치에서 우연히 합쳐졌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일단 원자들이 우연히 만나고 나면 서로 얽혀 꼼짝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일은 다른 어딘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사실 우주는 무한하고 무수히 많은 원자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틀림없이 그 일은 어떤 시점엔가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원자론적 우주의 무한한 진공에는 원자도 많이 있을 뿐 아니라 지구와 태양도 많이 존재했다. 거기서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은 불가능했다. 원자론자들에 따르면, 똑같은 종류의 물질은 무한한 중립적 진공 속 어디에서나 똑같은 법칙을 따랐다.
코페르니쿠스주의 역시 지구의 유일성을 파괴하고, 지상계ᐨ천상계의 구분을 폐기하고,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원자론자들의 무한한 진공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혹은 더 나아가 수많은 태양계들의 자연스런 보금자리를 제공했다. 브루노의 주된 기여는 고대의 학설과 근대의 학설 사이에 드러나 있지 않던 이러한 친밀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상세하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일단 그 친밀성이 인식되자, 원자론은 17세기 동안 유한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cosmos)를 무한한 다세계 우주(universe)로 변화시킨 몇몇 지적 경향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면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주론적 규모의 이러한 확장은 새로운 우주의 건설 과정에서 원자론자들이 수행한 중요한 역할들 중 첫 번째일 뿐이었다.
입자론적 우주
17세기 초 원자론은 다시 엄청나게 유행했다. 한편으로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중대한 일치를 보였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점점 신뢰를 잃어 가던 스콜라적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유일한 우주론이었기 때문에, 원자론은 과학적 상상을 인도한 ‘새로운 철학’의 근본 원리로서 코페르니쿠스주의와 단단하게 결합했다. ‘새로운 철학’ 때문에 우주가 ‘다시 원자들로 산산조각’ 났다는 던의 한탄은 이렇듯 전에는 별개였던 지적 경향들의 융합에 의해 나타난 초기 증상이다. 1630년 무렵 물리과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합병 효과가 나타났다. 그들은 지구가 움직이는 행성이라고 믿었고,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관념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을 고대 원자론으로부터 나온 일련의 ‘입자론적’ 전제를 가지고 공략했다.
17세기 과학을 변화시킨 ‘입자론(corpuscularism)’은 고대 원자론의 전제들을 종종 위반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원자론적이었다. ‘새로운 철학자들’의 일부는 궁극적인 입자들이 원리적으로는 분할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그들 모두는 사실상 그런 분할이 거의 혹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진공을 의심했지만, 그들이 모든 공간에 채워 넣은 에테르적 유체는 대부분의 목적에서는 진공과 같이 중립적이고 비활동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입자들의 운동, 상호작용, 조합이 창조의 시점에 신이 입자들에 부여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데 그들 모두가 동의했다는 점이다. 입자론자에게 이러한 법칙들의 발견은 새로운 과학의 프로그램이 풀어야 할 첫 번째 문제였다. 두 번째 문제는 이 법칙들을 적용해 풍부하고 다양한 감각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이 프로그램을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문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의 입자가 진공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물음으로써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 자유로운 운동이 다른 입자와의 충돌에 의해 어떻게 변경될지를 물었다. 그는 입자론적 우주에서의 모든 변화가 입자 간 충돌이 간간이 끼어드는 자유로운 입자 운동의 연쇄를 통해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전체 구조를 이와 같은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의 모든 추론은 직관적이었고 대부분은 틀렸지만, 그의 상상으로부터 추론된 우주론은 대단히 그럴듯한 것으로 드러났다. 데카르트의 비전은 그 상세한 내용이 1644년 그의 『철학의 원리(Principles of Philosophy)』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과학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다.
그의 첫 질문에 대한 답은 극히 성공적이었다. 중세 임페투스 이론의 당대 버전을 원자론적 우주의 무한한 중립적 공간에 있는 입자에 적용함으로써, 그는 관성 운동 법칙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진술에 도달했다. 그는 진공 속에서 정지 중인 입자는 계속 정지해 있을 것이며, 운동 중인 입자는 다른 입자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한 직선으로 똑같은 속도로 계속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입자 속도의 불변성은 (4장의 끝에서 두 번째 절에서 논의된) 임페투스 이론으로부터, 특히 갈릴레오에 의해 발전된 임페투스 이론으로부터 바로 나오는 귀결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직진성은 새로운 얘기로, 엄청나게 중대한 발견이었다. 이는 원자론이 17세기 과학에 제공한 생산적 제안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원자론자들의 무한한 진공은 중심도 없고 (17세기에 일찍이 폐기된 몇몇 질 낮은 버전을 제외하면) ‘위’와 ‘아래’ 같은 어떠한 본질적인 방향성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공간에서 외부의 영향이 없는 물체는 오직 멈춰 있거나 똑바로 움직일 수만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비롯한 초창기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스콜라적 임페투스 이론에서 빌려 왔던 스스로 유지되는 원운동은 불가능했다. 데카르트의 작업 이후 그러한 원운동은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알기로는, 자연에서 모든 입자 또는 입자들의 덩어리는 끊임없이 속도와 방향을 바꾼다. 그가 말하길, 이러한 변화는 다른 물체들에 의한 외부적인 밀고 당김에 의해 야기되어야 한다(그림 46). 따라서 입자들의 충돌은 두 번째 탐구 주제였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데카르트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의 일곱 가지 충돌 법칙 중 단 한 개만이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비록 데카르트의 충돌 법칙들은 폐기되었지만, 충돌 과정에 대한 그의 관념은 폐기되지 않았다. 입자론은 다시 새로운 문제를 낳았고, 이 문제는 데카르트 사후 30년 사이에 해결되었다. 그 해법으로부터 운동량 보존 법칙과 함께 (그보다는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힘과 그에 의한 운동량의 변화를 연결짓는 개념적 관계가 나왔다. 그 둘 모두는 뉴턴의 우주로 넘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였다.
운동 법칙과 충돌 법칙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구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한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개념 때문에 그의 과학과 우주론에 깔려 있던 입자론적 토대는 17세기 이래 대단히 모호해졌다. 그는 우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데카르트 공간을 채운 물질은 그 구조상 어디에서나 입자적이었고, 이 입자적 플레넘의 행동을 밝혀내는 데 데카르트는 상상 속의 진공을 계속 사용했다. 그는 진공을 개별 입자들에 대한 운동 법칙과 충돌 법칙을 알아내는 데 처음 사용했다. 그다음 이 법칙들이 플레넘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는 우선 진공 속에서 헤엄치는 입자들을 상상했던 것 같다. 상상 속 입자들의 관성 운동은 충돌에 의해 간간히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다음에 그는 그 체계에서 차츰 진공을 빼내어 입자들을 점점 서로 밀착시키더니, 결국 그들의 충돌과 관성 운동은 플레넘 속에서 단일한 과정으로 합쳐졌다. 불행히도, 플레넘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입자들의 운동은 동시에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로 간주되어야 하며,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꼭 필요한 중간 단계들을 하나도 밟지 않고서 입자론적 법칙들로부터 최종적인 해법까지 단숨에 상상의 도약을 펼쳐 보였다.
플레넘 속에서의 유일한 영구적 운동이 순환적인 흐름이라는 것은 데카르트에게 자명해 보였다. 그러한 흐름에 속한 각 입자는 가장 가까운 이웃을 밀고 밀어, 결국 진공을 피하기 위해 그 밀침은 거의 원형의 경로를 따라 최종적으로 최초의 입자로 돌아오게 된다. 잠재적인 진공이 채워졌으니, 이제 이 과정은 다시 시작된다. 데카르트에게 이 순환적인 흐름은 유일하게 가능한 영구적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는 신이 창조 시에 입자들을 어떻게 밀었든 상관없이 그 입자들이 결국에는 공간 전체에 산재한 여러 소용돌이를 따라 순환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소용돌이의 일부는 데카르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던 삽화에서 가져온 그림 47에 그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각각은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입자의 관성과 충돌 법칙에 의해 만들어져 그 지배를 받는 태양계였다. 예를 들어, 입자들 사이의 충돌은 관성이 소용돌이 속 각 입자에 부여하는 원심적 경향과 정확히 균형을 이룬다. 만약 다른 모든 것이 제거될 경우, 각각의 단일한 입자는 정상적인 원형 경로에 접하는 선을 따라 똑바로 진행해 소용돌이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소용돌이에서 그 입자의 바깥쪽에 있는 입자들과의 지속적인 충돌이 그 입자를 중심 쪽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비슷한 충돌들은 행성을 이루는 안정적인 입자들의 덩어리가 소용돌이의 중심에 대해 거의 원형의 경로를 따라 계속 움직이게 해 준다.
각 소용돌이 중심의 끊임없는 빠른 회전 운동은 중심에서 전체 공간으로 파동으로 전달되는 지속적인 진동을 만들어 낸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 진동은 소용돌이의 중심인 태양이나 별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빛이다. 분명 별 중심의 행성 체계가 무수히 많다는 생각은 입자론적 전제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도출은 천체 현상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달과 조수, 투사체의 운동을 각 행성 주변에 생긴 작은 부수적인 소용돌이들을 상정해 설명한다. 이러한 비교적 작은 소용돌이 내에서의 입자 간 충돌들은 달을 계속 순환시키고, 돌을 지구로 끌어내린다. 데카르트의 우주에서 무게 자체는 운동, 빛 등의 다른 모든 겉보기 현상들처럼 궁극적으로 원자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 간 충돌에 기인한다.
오늘날 소용돌이 우주론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와 그로부터 끌어낸 천문학, 광학, 화학, 생리학, 지질학, 역학에서 오류와 부적절한 점을 찾는 것은 유치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그의 비전은 탁월했고, 그 범위는 엄청났지만, 각 부분에 쏟은 비판적 사고의 양은 턱없이 작았다. 그의 입자 간 충돌 법칙은 수많은 사례 중 고작 한 사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17세기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데카르트 체계의 각 부분들은 전체에 비해 훨씬 덜 중요했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n Huyghens)를 필두로 데카르트의 뛰어난 계승자들은 그의 세부적인 전개보다는 근본적인 관념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들은 그의 충돌 법칙과 소용돌이 묘사와 빛의 전파에 관한 법칙을 변화시킬 수 있었고 실제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적은 수의 특정한 입자론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입자론적 기계로서의 그의 우주 관념을 양보하지 않았다. 반세기 동안 그 관념은 내적 일관성을 갖춘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탐색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에 어울리는 구조에 관한 이러한 기본 관념이 코페르니쿠스주의 자체에 의해 대중화된 고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점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는다.
기계적 태양계
코페르니쿠스의 유한한 태양 중심의 우주로부터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그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한 뉴턴주의 우주로 이어지는 길은 매우 동떨어진 두 역사적 경로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중 하나는 위에서 보여 준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입자론적 철학의 긴밀한 연계였다. 다른 하나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중 가장 긴급했던 한 물리적 문제, 즉 행성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문제를 공략하는 데 고도로 집중되어 있었다. 두 경로는 모두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하고 반세기 후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통된 근원에는 케플러, 브루노 등이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요소들을 유사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로부터 분리했을 때 나타난 새로운 과학적 관점이 있었다. 두 경로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 구조에 대한 뉴턴의 최종적인 정식화 속에서 다시 한 번 결합하며, 둘은 그 정식화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출발점과 종착점을 제외하면, 두 경로는 대체로 따로 떨어져 있었다. 물론 둘 사이의 놀라운 유사점들은 둘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이따금씩 제공하긴 했지만 말이다.
행성 운동에 대한 물리적 설명은 16, 17세기에 그렇게 새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프톨레마이오스도, 중세 천문학자들도 행성 운동의 각각의 작은 불규칙성의 물리적 원인을 완전하게 명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과학은 적어도 모든 행성이 황도 근처에서 평균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설명했다. 즉 행성과 그들이 박힌 천구는 우주의 중심에 대해 영원히 회전하는 것이 본성인 완벽한 천상계의 원소로 만들어졌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 운동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설명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천체 운동의 관념은 지구 중심 우주에 비해 태양 중심 우주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원 제안에 숨겨진 이러한 부조화는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되었다. 행성들의 동쪽 방향 이동만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지구의 각 입자들이 자연스럽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중심−우주의 고정된 중심과 움직이는 지구의 중심−에 대해 회전해야 했다. 달과 같은 위성의 각 입자들은 적어도 동시에 세 개의 중심−우주의 중심, 주인 행성의 중심, 위성 자신의 중심−의 통제를 받았다. 따라서 스스로 유지되는 원형 운동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더욱 복잡해지고 또한 동시에 많은 고정된 중심과 움직이는 중심과 연결됨으로써 그 타당성이 위협받았다. 더구나 중심들이 다양해지고 움직이기까지 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운동은 공간의 고유한 기하학적 형태와 어떠한 고정된 관계도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서 모든 자연스러운 운동은 우주의 중심을 향하거나, 그로부터 멀어지거나, 그 주위를 회전하는 운동뿐이었다. 그 중심은 기하학적 점에 불과하더라도, 공간의 경계와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확정된 유일한 점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인과적 역할을 가지는 것은 그럴듯해 보일 수 있었다. 반면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서는 일부 자연스러운 운동이 움직이는 중심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움직이는 중심은 기하학적 위치 하나만으로는 인과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다른 새로운 천문학적 학설들은 모두 오히려 더 심각한 물리적 문제를 야기했다. 항성 천구를 제외한 모든 천구는 혜성에 대한 새로운 관찰과 티코 체계의 대중화에 따라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그 천구들과 함께 과거 행성들의 평균적인 원형 운동을 설명해 주었던 물리적 메커니즘도 전부 사라졌다. 이러한 천구의 소멸도 전통적인 접근의 영향을 끝장내진 못했다. 1632년 말 갈릴레오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물리적 학설을 정교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고, 『두 가지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Systems of the World)』에서는 모든 물질이 천구 없이도 합성된 원을 따라 자연스럽게, 규칙적으로, 영원히 회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변증법이 아무리 탁월하고 절묘했다 하더라도−그 후 주요한 과학적 연구에서 이에 필적하는 연구는 거의 없다−그것은 이러한 접근의 근본적인 불합리성을 오래 감추지 못했다. 『대화』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엄청나게 대중화시킨 작품으로 중요했지만, 물리과학에 대한 그의 기념비적인 공헌은 다른 저작에 있다. 그가 죽은 뒤 행성의 물리적 문제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사실 갈릴레오의 『대화』가 등장하기 전에도 케플러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주의의 물리적 문제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고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부류의 기법을 제안했다.
수많은 주전원과 이심을 없앰으로써, 케플러는 최초로 천문 현상의 완전한 복잡성을 물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처럼 행성들의 평균적인 동향 운동만을 다루는 설명은 그럴듯해진다 하더라도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평균적인 운동이라기보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고 정밀한 타원 운동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밀성과 단순성을 달성하는 데는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전 천문학의 평균적인 원형 운동과 달리, 제2법칙에 따른 타원 운동은 자연스러운 운동일 수 없었다. 그 운동은 어떠한 중심에 비추어도 대칭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원 위를, 혹은 심지어 단순한 주전원ᐨ주원 체계를 균일하게 도는 행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궤도의 매 지점에서 ‘같은 일을 한다’거나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그에 대해 ‘자연스럽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케플러의 법칙을 따르는 행성의 운동은 속도, 방향, 곡률이 궤도의 매 지점에서 변한다. 이러한 변화가 있으려면 하늘에 힘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힘은 궤도의 매 지점에서 행성의 운동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작용해야 했다. 지구에서처럼 하늘에서도 비대칭적인 운동은 끊임없는 밀고 당김의 결과로서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되었다.
달리 말해,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은 우선 행성 운동의 전통적인 설명을 파괴했고, 이제 케플러에 의해 수정되면서 천체 물리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제안했다. 그 새로운 접근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케플러의 글에 처음 등장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지상계의 법칙과 천상계의 법칙을 통합하기 위해 이미 사용했던, 그리고 갈릴레오가 부활시키고자 했던 기법을 뒤집은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자연스러운 원형의 천체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지구에 적용함으로써 통일성을 달성했다. 케플러는 강제적인 힘에 따른 지상계의 운동에 대한 고대의 관념을 하늘에 적용함으로써 더욱 생산적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달성했다. 태양에 대한 초지일관된 신플라톤주의적 인식의 인도를 받아,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인과적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태양과 행성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을 도입했다. 그의 글에서 태양계는 처음으로 지상계의 기계를 본뜨게 됐다. 그 초창기 관념의 조잡성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케플러의 접근에 달려 있었다.
케플러가 제안한 태양의 첫 번째 힘은 아니마 모트릭스로, 우리는 이를 6장에서 짧게 살펴보았다. 케플러는 그것을 타원의 평면 속에서 태양으로부터 투사되어 태양의 지속적인 회전에 의해 운반되는 광선들의 체계로 묘사했다. 움직이는 팔[광선]들이 행성을 지날 때, 그들은 태양 중심의 계속된 원을 따라 행성을 밀어 주었다. 기본적인 원형 궤도를 타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두 번째 힘이 필요했는데, 이 힘은 궤도상의 위치에 따라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 두 번째 힘을 케플러는 자기력으로 규정했는데, 그 자기력의 특성들은 당시 영국의 내과의사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가 1600년에 출판한 매우 영향력 있는 책 『자석에 관하여(On the Magnet)』에서 철저하게 조사하고 기록했다. 길버트는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임을 깨달았고, 케플러는 이러한 일반화를 태양계의 다른 천체들에까지 확장했다. 케플러는 지구뿐 아니라 행성들과 태양도 자석이며, 이들의 다양한 극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이 행성들의 운동 경로를 결정해 준다고 말했다.
케플러의 계승자들 중 그의 물리적 이론을 행성 궤도에 대한 그의 수학적 묘사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이론의 세부적인 내용은 그림 48에 제시되어 있다. 그의 역학적 개념들 중 일부는 그가 글을 쓸 때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이었고, 태양은 행성들의 관찰된 주기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느리게 회전했으며, 자침으로 관찰했을 때 지구의 자축 방향은 천문학적 관찰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방향과 달랐다. 따라서 케플러가 죽은 뒤에는 아니마 모트릭스도, 자기적 태양도 17세기 과학 저술에 별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족적·자율적 기계라는 케플러의 태양계 관념은 끊임없이 되풀이해 나타났다. 17세기 동안 코페르니쿠스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그 관념은 이중의 중요성을 지녔음이 드러났다.
우선, 케플러의 물리적 체계는 입자론적 철학과 완전히 독립적이었음에도 입자론의 가장 중요한 결론 중 일부를 강화했다. 특히 그것은 무한하고 중립적인 공간이라는 관념에 이르는 또 다른 자연스러운 경로를 제공했다. 그의 행성 메커니즘에서 행성의 운동은 오직 다른 물리적 물체인 태양과 자신의 관계에만 의존했다. 자기력과 아니마 모트릭스는 태양이 어디에 있든 동등하게 잘 작동했다. 케플러는 태양을 무한한 항성 천구의 중심에 계속 놓아두었지만, 그러한 중심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입자론은 상당히 다른 동기로부터, 그리고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보면, 코페르니쿠스주의의 가장 놀라운 귀결들 중 어떤 것들은 정합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에 이르는 어떠한 접근으로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케플러가 전통적인 천체 물리학의 자연스럽고, 강제적이지 않으면서, 공간에 의해 결정되는 운동을 강제적이면서 힘에 의해 결정되는 행성 운동으로 대체한 일은 17세기 과학의 발전에서 제2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케플러의 기계적 태양계는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의 체계에서 최고조에 달하는 일련의 체계들 중 최초로 제안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그 사이의 발전 과정은 엄청나게 복잡하다. 그 과정은 새로운 종류의 역학적 개념과 수학적 기법들의 지난한 진화와 험난한 수용 과정에 의존하며, 이는 그 하나만으로 또 다른 책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볼 때 케플러에서 뉴턴에 이르는 경로는 비교적 단순하다. 몇몇 중요한 수정만으로도 케플러의 체계를 뉴턴의 체계와 질적으로 매우 비슷한 체계로 바꿀 수 있으며, 이러한 수정들은 데카르트의 관성 운동 관념이 천체 물리학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깨달으면 곧바로 따라 나오는 직접적인 귀결이다. 그 관념의 부재는 케플러의 기계적 태양계와 뉴턴의 직속 선배들이 설계한 비슷한 체계들을 구분해 주는 주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나중의 체계들 중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렐리(G. A. Borelli, 1608∼1679)와 영국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이 설계한 두 체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뉴턴의 체계가 지닌 질적인 특징에 매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보렐리의 관성 운동 관념은 훅보다 훨씬 덜 완전했으며, 따라서 그의 행성 이론은 케플러의 이론과 매우 비슷했다. 케플러와 달리 보렐리는 행성을 멈추지 않게 하는 데 어떠한 밀침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태양과의 거리에 따른 행성의 속도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아니마 모트릭스와 같은 것을 고수했으며, 이따금은 그 역시도 아니마 모트릭스를 끊임없는 추진 동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곳에서는 케플러(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의 단절이 더 완전했다. 특히 보렐리는 아니마 모트릭스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어떠한 밀침도 행성을 닫힌 궤도로 계속 움직이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그림 49에 묘사된 가상의 모델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행성을 태양 쪽으로 똑바로 잡아당기는 어떤 다른 힘이 없다면, 행성들은 자신의 궤도에 접한 직선을 따라 벗어나 결국엔 태양계를 완전히 떠나게 될 것이라고 보렐리는 생각했다. 따라서 안정된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벗어나려는 행성을 태양을 향해 안쪽으로 지속적으로 방향을 돌려 주는 제2의 힘을 도입했다. 보렐리는 그 모델에서 이 힘을 모사하기 위해 자석을 사용했지만, 하늘에서는 그 힘을 모든 행성들이 중심의 태양을 향해 떨어지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교체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의 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보렐리의 태양계 관념은 1666년에 출판된 책에서 자세히 서술되었는데, 같은 해 로버트 훅은 마침내 천상계의 운동과 지상계의 기계의 운동 사이에 성립하는 완전한 유사성을 증명해 보였다. 데카르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훅은 완전한 관성 운동 관념과 지상계의 법칙과 천상계의 법칙의 동일성에서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아니마 모트릭스와 자연스러운 운동 경향의 잔재를 둘 다 버릴 수 있었다. 그가 말하길, 움직이는 행성은 공간 속에서 직선으로 균일하게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을 밀거나 잡아당기는 어떤 것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성은 직선이 아니라 태양을 둘러싼 연속적인 폐곡선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감각에 의한 직접적인 증거는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태양과 각 행성 사이에는 잡아당기는 원리나 힘이 추가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길, 그러한 힘은 행성의 직선 관성 운동을 태양 쪽으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어 줄 것이고, 행성들의 코페르니쿠스식 궤도에 필요한 것은 그게 전부다.
코페르니쿠스식 행성 운동에 대한 훅의 직관적인 통찰은 그림 50a에 나타나 있다. 다만 그 그림은 훅이 제시한 어떤 것보다도 명시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실선의 원(또는 타원이어도 된다)은 행성의 코페르니쿠스적 궤도이며, 이 궤도의 P에 있는 행성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만약 태양 S와 행성 사이에 아무런 힘도 없다면, 행성은 궤도에 접한 점선을 따라 항상 똑같은 속도로 똑바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만약 행성이 P에 있을 때, 행성이 태양 쪽으로 갑자기 순간적인 밀침을 받는다면(그림 46을 기억하라), 그 행성은 다이어그램에서 중심 방향의 짧은 점선으로 표시된 태양 방향의 운동도 동시에 얻게 될 것이다. 이 두 운동의 결과는 다이어그램에서 실선의 화살표를 따라 움직이는 새로운 관성 운동이 될 것이고, 이는 실제 궤도와 P'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만약 P'의 행성이 다시 태양 쪽으로 순간적인 밀침을 받는다면, 그 행성은 P''을 향한 두 번째 실선 화살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이 과정은 행성이 최종적으로 P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될 수 있다.
위에서 묘사한 연이은 밀침들은 행성의 궤도를 나타내는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행성을 돌려 주지 않는다. 대신 행성은 다각형을 따라 돈다. 그러나 다각형 모양의 실선 화살표들은 행성의 궤도에 근접해 있으며, 그 근접성은 무한히 향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P, P', P, …에서 가해진 충격의 크기가 줄어들어서 행성이 각 점에서 덜 휘어짐으로써 더 금방 곡선 궤도와 다시 만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제는 강도가 줄어든) 원래의 연쇄적인 충격들 사이사이에, 즉 행성이 곡선과 다시 만나는 P와 P' 사이, P'과 P 사이, …의 점들마다 새로운 충격들이 추가된다고 해 보자. 그 결과 나타나는 운동은 타원이나 원보다는 여전히 다각형을 그리겠지만, 그 다각형은 이제 원에 더 근접하게 된다. 각 충격의 강도는 더 줄고 횟수는 늘어 감에 따라, 그 근접성은 더욱더 증가한다. 궁극적으로, 각 충격이 무한히 작아지는 동시에 무한히 많아진다면, 행성은 자신의 궤적에 있는 각 점마다 태양 쪽으로 휘어지게 되고, 만약 그 힘이 끊임없이 적절한 강도로 가해진다면, 그 결과 나타나는 곡선은 정확히 고대하던 타원이나 원이 될 것이다.
이는 훅의 가설이었으며, 상당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의 크기를 그로 인한 방향 전환의 크기와 연결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며, 연속적인 방향 전환으로부터 타원을 만들어 내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가설이 잘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았으며 그럴 수도 없었다. 그 일은 뉴턴에게 남겨졌다. 그러나 훅은 단일한 중심 방향의 힘의 영향 속에서 행성의 운동과 같은 운동을 산출하는 모형을 설치함으로써 자신의 아이디어에 구체적이면서도 그럴듯한 형태를 부여할 수 있었다. 1666년 그는 우리가 방금 묘사한 내용의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왕립학회 동료들에게 소위 원뿔형 진자(그림 50b)를 보여 주었는데, 그 진자는 어느 방향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줄에 무거운 추를 매달아 만든 것이었다. 이 추를 최저점에서 한쪽으로 약간 잡아당겼을 때, 추에 가해지는 유일한 실질적인 힘은 진자의 최저점−줄을 매단 곳에서 줄의 길이만큼 아래에 있는 점−부근을 향해 잡아당겨지는 힘뿐이었다. 이 최저점 외의 지점에서 추를 놓으면, 이 추는 단순히 가운데로 잡아당겨져 평범한 진자처럼 평면에서 앞뒤로 끊임없이 진동했다. 그러나 한쪽으로 잡아당긴 추를 추와 최저점을 잇는 선과 수직인 수평 방향으로 순간적으로 밀 경우, 추는 자신의 최저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다. 대신 추는 수평면에서 최저점 주위를 끊임없이 돌면서 행성의 궤도와 비슷한 연속적인 궤도를 만들 수 있었다. 적절한 방향에서 적절한 속도로 시작한다면, 추는 수평의 원을 돌았다. 살짝 다른 초기 속도로는 타원과 상당히 비슷한 길쭉한 궤도로 돌았다. 중심 방향의 힘은 움직이는 추를 중심까지 잡아끌 수 없었다. 그 힘은 단지 추의 운동을 중심 방향으로 휘게 함으로써 연속적인 곡선을 만들 뿐이었다. 단일한 중심 방향의 힘이 실험실에서 적절한 모양의 닫힌 궤도를 만든 것이다. 훅이 말하길, 하늘의 비슷한 힘도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훅의 모형은 모호하게 표현된 이론을 분명하면서도 그럴듯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는 그보다도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 우리에게 그 모형은 행성의 물리적 문제가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영향을 받다가 그다음에는 입자론과 코페르니쿠스주의의 결합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거대하고 생산적인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훅의 연구에서는 케플러와 보렐리의 연구에서보다 훨씬 더, 행성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진자와 투사체에 관한 지상계의 문제와 원리적으로 똑같은 응용 역학의 문제가 되었다. 지상계의 실험은 하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산출하며, 천상계의 관찰은 지구에 직접적으로 적용 가능한 정보를 준다. 『회전에 관하여』에 의해 요청되었고 입자론적 철학에 의해 가능해졌던 지상계ᐨ천상계 이분법의 붕괴는 마침내 완료된다. 수정 천구를 비롯해 다른 모든 특수한 천상의 장치들은 사라지고 지상계와 같은 유형의 메커니즘으로 대체되었으며, 그 메커니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구만큼 적절하게 작동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중력과 입자론적 우주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의해 제기된 또 다른 긴급한 문제는 새로운 우주의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문제는 왜 무거운 물체들이 지구의 공간상의 위치가 어디든 상관없이 움직이는 지구 표면으로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질문−‘왜’로 시작하는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17세기에 그들은 분명 그러한 질문을 했으며 이는 생산적이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바로 이 질문에 한 가지 답−매여 있지 않은 물체들은 지구 중심의 소용돌이에 있는 공중의 입자들과의 충격에 의해 지구 쪽으로 밀려간다−을 제공했으며, 그 답은 뉴턴이 죽을 때까지도 널리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대립하는 해법도 초기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즉 무거운 물체들은 온갖 물질 사이에 작용하는 고유한 인력의 원리에 의해 지구로 끌려온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입자론의 최소한 몇몇 주된 전제들에는 어울리도록 수정되자, 고유한 인력의 원리에 기초한 이 답은 데카르트와 그 추종자들의 순수 입자론적 설명을 이겨 냈다. 세기말이 되자, 오늘날 중력으로 알려진 이 인력의 원리는 지구상의 대부분의 운동과 하늘의 모든 운동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17세기 과학에서 통용된 대부분의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중력에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조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몇몇 선배들은 비슷한 물질들끼리 서로 잡아당기거나 혹은 밀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기와 전기에 관한 연구를 제외하고, 이러한 자연적인 인력과 척력의 원리는 행성 지구의 개념이 이들을 불러내기 전까지 구체적인 적용 대상이 거의 없었다.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두 개념, 즉 중력과 행성 지구 사이의 숨겨진 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에 관하여』에 대한 오렘의 논평에서 우리가 이미 지적했던 구절에 일찍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렘이 말하길, 우주에는 많은 땅들이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돌은 땅으로 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물질은 우주의 기하학적 중심으로 모이기보다 물질을 향해 자연스레 모이기 때문이다.
『회전에 관하여』 제1권에서 비슷한 필요는 오렘의 것과 매우 유사한 관념을 불러냈다. 코페르니쿠스가 말하길, “이제 나 자신은, 무거움이라는 것이 창조자에 의해 각 부분들이 구의 형태로 결합하도록 부분들에 부여된 자연스러운 경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5장을 보라). 케플러 역시 지구와 지구의 부분들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원리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심지어 그는 똑같은 원리가 지구와 달 사이에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지구ᐨ달 체계 바깥의 천체들을 고려할 때에만, 케플러는 아니마 모트릭스와 같은 특별한 천상의 힘을 필요로 했다. 1644년 무게에 관한 데카르트의 입자론적 설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케플러의 것과 같은 모종의 장치를 통해 돌의 낙하를 설명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지구가 돌을 끌어당기고 돌이 지구를 잡아당기는 고유한 인력의 원리가 있거나, 아니면 (현재의 목적에서는 동등하겠지만) 돌이 지구의 물리적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고유한 경향을 가졌을 것이다.
세기 중반 이후 돌의 낙하에 대한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설명들은 관성 운동 개념의 수용으로 제기된 새로운 코페르니쿠스적 문제에 빠르게 적용되었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보렐리, 훅, 하위헌스, 뉴턴은 모두 태양 주위의 닫힌 궤도가 만들어지기 위해 행성이 태양을 향해 계속 ‘떨어져서’ 행성의 직선 관성 운동이 곡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낙하’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을 깨닫게 됨에 따라, 각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지상계의 낙하에 대한 설명을 조금 변형해 천상계의 운동에 적용했다. 데카르트의 행성들은 입자적 충돌에 의해 태양 쪽으로 밀침을 받았고, 보렐리의 행성들은 태양을 향해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졌으며, 훅의 행성들은 고유한 상호 인력에 의해 태양으로 이끌렸다. 이 대부분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들이다.
그러나 훅과 뉴턴은 거의 동시에 또 하나의 엄청나게 중요한 걸음을 내디뎠다. 똑같은 메커니즘이 지상계의 낙하와 천상계의 낙하를 지배한다는 데카르트의 생각 덕분에, 그들은 행성을 태양 쪽으로 잡아당기고 달을 지구 쪽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돌과 사과의 낙하를 일으키는 똑같은 중력이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아마도 둘 중 누가 그 관념에 처음 도달했는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훅은 적어도 그것을 공적으로 발표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뉴턴에 의해 입자론에 통합되고 정량화되어 18, 19세기 과학적 상상의 지침이 된 그 비전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구절로서 그의 1674년 글은 여전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훅은 다음과 같이 썼다.
[향후에] 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세계 체계와도 많은 점에서 다른 세계 체계를 설명할 것이며, 모든 것을 기계적 운동의 공통된 규칙을 통해 답할 것이다. 이는 세 가지 가정에 의존한다. 첫째, 모든 천체는 어떤 것이든 중심을 향한 인력 또는 중력을 가지며, 이를 통해 그 천체들은 우리가 지구에서 관찰한 것과 같이 자기 자신의 부분들을 끌어당겨 날아가 버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의 범위 내에 있는 다른 모든 천체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태양과 달이 지구의 운동에 영향을 주고 지구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도 자신의 인력을 통해 지구의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지구의 인력도 그들의 운동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둘째 가정은 다음과 같다. 단순한 직선운동 중에 있는 모든 물체는 어떤 것이든 어떤 다른 유효한 힘이 물체의 운동을 변형시켜 원이나 타원이나 다른 어떤 더 복잡한 곡선의 운동으로 구부러뜨리기 전까지 계속 직선으로 나아갈 것이다. 셋째 가정은 이렇다. 이 인력은 그 힘을 받는 물체가 그들의 중심에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더욱더 강하게 작용한다. 현재 그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실험적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개념을 충분히 제대로 밀고 나간다면 천문학자는 그것의 엄청난 도움으로 모든 천체의 운동을 모종의 규칙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이며, 아마도 그 규칙은 그 개념 없이는 절대로 참으로 인정받지 못할 규칙일 것이다.[1]
훅의 첫 두 ‘가정’은 새로운 우주의 근본적인 전제들이다. 관성 더하기 단일한 인력, 즉 중력은 천체의 운동과 지상의 투사체의 운동을 모두 지배한다. 이것이 적어도 암묵적으로 함축하는 바에 따르면, 행성과 위성은 그저 지상의 투사체와 같은 것으로서, 절대 지표면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계속 지구를 돌 만큼 엄청난 포구 속도로 발사된 대포알과 같다. 뉴턴은 이러한 상상을 『세계 체계(System of the World)』에서 명시적이고 친숙한 형태로 바꾸어 주었다(그림 51). 그러나 훅의 언급은 개념적 기초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인용된 구절은 새로운 우주가 완성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남겨진 다음의 두 가지 주된 문제도 명시적으로 보여 준다. 중력은 잡아당기는 물체들 사이의 거리에 따라 어떻게 변하며, 이러한 인력의 법칙에 대한 지식은 지상의 운동과 천상의 운동을 예측하는 데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에 대해 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행성 궤도에 대한 케플러의 묘사로부터 인력의 법칙을 도출할 만큼 충분히 능숙한 수학자가 아니었으며, 그가 성 바울 성당 꼭대기와 광산 바닥에 가져갔던 기구는 지표면 근처의 작은 중력 차이를 감지하기에는 너무나 둔감했다. 그러나 훅은 그 분야에서 연구하는 유일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독자적으로 이미 훅의 정성적 관념 중 중요한 부분에 도달해 있었다. 더구나 발견에 대해 그 자신이 나중에 매긴 날짜를 믿을 수 있다면, 뉴턴은 위의 구절이 쓰이기 8년 전에 훅의 중력의 ‘정도’를 계산하는 데 그 관념들을 사용했다.
1666년경 이 문제에 대해 고민했을 때, 뉴턴은 안정된 원형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 행성이 태양을 향해 ‘떨어지’거나 달이 지구를 향해 떨어져야 하는 속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이러한 수학적 낙하 속도가 행성의 속도에 따라, 또 그 원형 궤도의 반지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발견함으로써, 뉴턴은 두 가지 엄청나게 중요한 물리적 귀결을 도출할 수 있었다. 뉴턴의 발견에 따르면, 만약 행성들의 속도와 그 궤도 반지름이 케플러의 제3법칙에 따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행성을 태양 쪽으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태양과 행성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감소해야 했다. 행성이 태양과 두 배로 멀어지면 관측된 속도로 자신의 원형 궤도를 유지하는 데 4분의 1의 인력만 필요할 것이다. 뉴턴의 두 번째 발견도 그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태양과 행성 사이의 인력을 지배하는 똑같은 역제곱 법칙은 멀리 있는 달이 지구로 떨어지는 속도와 가까이 있는 돌이 지구로 떨어지는 속도의 차이를 상당히 잘 설명할 수 있었다. 13년 후, 훅과의 논쟁에 의해 이 문제가 다시 생각나자, 그는 그 결과를 훨씬 더 일반화해 역제곱 법칙이 케플러의 제1법칙에 의해 묘사된 타원 궤도와 제2법칙에서 묘사된 속도 변화 모두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이러한 수학적 도출들은 과학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나온 다른 모든 성취를 뛰어넘는다. 이를 초보적인 책 내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으로 인해 이 부분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이 압축된 에필로그 안에서도 가장 왜곡된 부분이 되었다. 뉴턴의 역제곱 법칙과 그 법칙을 운동과 연결시킨 수학적 기법들을 통해, 천상의 궤적과 지상의 궤적의 형태와 속도는 모두 사상 처음으로 매우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었다. 대포알, 지구, 달, 행성 사이의 유사성은 이제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수치와 측정 속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성취를 통해 17세기 과학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척 이상하게도 그 절정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완전한 끝이 아니었다. 그 범위와 위력에도 불구하고, 뉴턴을 비롯해 많은 동시대인들은 중력 개념과 그 개념의 사용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1670년 무렵 입자론적 철학은 거의 모든 진보적 연구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제공했으나, 중력 개념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입자론의 전제를 위반했다. 화해를 위해서는 반세기 더 연구와 논쟁을 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우주에서 입자론과 뉴턴의 중력 개념 모두는 한 번 더 변화를 겪었다.
입자론에 대한 뉴턴의 계속된 충성은 그의 편지와 대학 시절 공책들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되었으며, 뉴턴 스스로는 자신이 작업 중인 중력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어쩌면 천체 물리학에 대한 초기 연구 결과를 늦게 발표한 점을 적어도 조금은 설명해 줄 것이다. 사실, 『프린키피아』는 뉴턴이 1685년에 중력과 입자론적 철학 사이의 명백한 충돌 중 하나를 해결하는 데 성공하고 또 다른 하나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거의 무위로 돌아간 후에야 나타났다.
입자론의 전제와 뉴턴의 초기 중력 이론의 첫 충돌은 멀리 있는 달과 가까이 있는 돌에 대한 지구의 인력을 비교했던 1666년의 계산에서 나타난다. 돌의 낙하 속도를 달의 낙하 속도와 비교함으로써, 뉴턴은 지표면 바깥의 단위 질량에 대한 지구의 인력이 외부 물체와 지구의 중심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변화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관념은 단순했으며 실험과 충분히 일치했다. 게다가 이 관념은 전체 태양계로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입자론적이지 않았다. 입자론자에 따르면 외부의 입자에 대한 지구의 인력은 지구 내부의 각 개별 입자들이 하나의 외부 입자에 발휘하는 인력을 모두 더함으로써만 알아낼 수 있었다(그림 52). 만약 외부의 입자가 지구로부터 매우 멀다면, 그 덧셈은 쉽다. 그 경우 그 외부 입자는 지구의 각 입자들과 근사적으로 동일한 거리에 있고, 각 지구 입자들은 어디에 위치하든 외부의 입자에 근사적으로 동일한 힘을 발휘하며, 그 합력은 모든 지구 입자들이 그들의 평균 위치로 살짝 움직여 지구의 중심에 함께 모여 있을 때 발휘될 힘과 분명 거의 똑같을 것이다. 따라서 개별 입자들 사이의 인력이 역제곱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커다란 물체들 사이의 인력도 분명 똑같은 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입자가 지표면 근처에 있다면, 그 미시적인 힘들의 덧셈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경우 거시적인 역제곱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외부의 입자가 지구 가까이에 있을 때(그림 52), 그것과 근처의 지구 입자들 사이의 거리는 그것과 지구 반대쪽 입자들 사이의 거리보다 수백만 배나 가깝다. 따라서 근처의 입자들은 더 멀리 있는 입자들보다 엄청나게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보기에 그들은 거의 모든 힘을 발휘할 것이고, 총 인력은 외부 입자가 지표면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엄청나게 빨리 증가할 것이다. 지구의 중심과의 거리는 이른바 사과에 가해지는 합력을 계산하는 데 거의 무관해 보인다. 뉴턴은 그것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일 수 있었다. 1685년 그는 외부의 입자가 어떤 거리에 있든 지구의 모든 입자들은 그들이 지구의 중심에 위치한 것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침내 중력의 근원을 개별 입자들에 돌린 이 놀라운 발견은 『프린키피아』 발표를 위한 전주곡이자 어쩌면 그것을 위해 꼭 필요했던 전제 조건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케플러의 법칙과 투사체의 운동 모두가 세계ᐨ기계를 이루고 있는 근본 입자들 사이의 고유한 인력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입자론적 중력 개념도 뉴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실 18세기가 오기 전까지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과학자들만을 만족시켰을 뿐이다. 대부분의 17세기 입자론자들에게 중력은 고유한 인력의 원리로서, 그들 모두가 거부하기로 뜻을 함께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운동 경향’과 너무나 흡사해 보였다. 데카르트 체계의 위대한 장점은 그러한 모든 ‘신비한 성질들(occult qualities)’을 완전히 없앴다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의 입자들은 완전히 중립적이었으며, 무게 자체는 충격의 결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먼 거리에서 작동하는 타고난 인력의 원리라는 개념은 중세 과학이 그토록 비웃음을 받은 원인이었던 신비스런 ‘공감’과 ‘정력’으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뉴턴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력에 대한 기계적 설명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엔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성공할 것이라고, 즉 중력의 원인은 “발견과 입증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2] 여러 번 거듭해서 그는 중력이 물질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광학(Opticks)』 말미에 있는 과학적 유언에서, 그는 “모든 종류의 것들이 [중력과 같은] 신비스런 특별한 성질을 타고나서 그것을 통해 활동하고 겉으로 보이는 효과들을 산출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했다.[3]
이 언급에서 뉴턴은 데카르트처럼 『철학의 원리』를 쓰고 싶었다고 말하는 과학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오해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중력을 설명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그는 주제를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제목의 유사성과 차이 모두는 의미심장하다. 뉴턴은 대표작 『프린키피아』를 불완전한 작품으로 간주한 것 같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와 달리, 그 책은 왜 우주가 그렇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책은 중력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뉴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 과학이 뉴턴의 의구심을 정당화해 주긴 했지만−중력은 먼 거리에서 작용하는 고유한 인력의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설명될 수 있다−뉴턴의 동시대인들과 계승자들 대부분은 그의 미묘한 구분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력이란 개념 전체를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고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 개념을 수용하고서 중력이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을 뉴턴이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한 전투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뉴턴 물리학이 데카르트 물리학을 확고하게 대체하는 데에는 영국 대학에서조차 40년이 걸렸다. 18세기의 몇몇 유능한 물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중력에 대한 기계론적ᐨ입자론적 설명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하나도 찾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프린키피아』의 위력은 중력을 과학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중력은 점차 수용되었고, 뉴턴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물질 입자들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그 결과 입자론적 철학은 재창조되었고, 여러 힘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프린키피아』의 시작 부근에서 뉴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많은 이유로 인해, … [자연 현상들이] 모두 …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모종의 원인에 의해 물체의 입자들이 서로 끌려 균형 잡힌 형태로 뭉쳐지거나 서로 밀어내어 멀어지게 하는 어떠한 힘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고 있다.[4]
그리고 『광학』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입자 간 작용의 결과에 대한 일련의 “질문들(Queries)”을 길게 추가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신은 태초에 물질을 꿰뚫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있는 단단한 고체 덩어리의 입자들로 만들면서, 그가 그들을 만든 목적에 가장 이바지할 수 있도록 그러한 크기와 모양 및 기타 속성들을 부여하고 그들을 우주에 대해 그러한 비율로 만들었다. … 따라서 자연이 지속되는 한, 물질적인 것들의 변화는 영속적인 입자들의 다양한 분리와 새로운 결합과 운동으로만 일어날 것이다. … 이 입자들은 비스 이너시아(Vis inertiae)[관성력] 및 그 힘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그러한 수동적인 운동 법칙들을 가질 뿐 아니라, 중력의 원리를 비롯해 [화학적] 발효와 물체들의 결합을 초래하는 원리와 같은 모종의 능동적 원리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5]
이 진술을 비롯해 이와 같은 진술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사상에 지대한 역할을 한 뉴턴주의를 묘사하고 있다. 1727년 뉴턴이 죽고 난 후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양 있는 일반인들은 우주를 무수한 입자들이 관성 같은 몇몇 수동적 법칙들과 중력 같은 몇몇 능동적 원리의 지배를 받아 움직이는 무한한 중립적 공간으로 상상했다. 이러한 전제들로부터 뉴턴은 전례 없는 정확성으로 대부분의 알려진 광학 현상을 도출했고, 조수와 세차 운동을 비롯해 천상계와 지상계의 모든 알려진 역학 현상을 도출했다. 그가 멈춘 곳에서 시작한 그의 계승자들은 남겨진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추가적인 힘의 법칙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남겨진 자연 현상에는 열, 전기, 자기, 응집,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학 결합이 포함되었다. 마침내 붕괴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는 포괄적이고 정합적인 세계관으로 대체되었고, 인간의 발전하는 자연관은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사고 체계
코페르니쿠스가 한 세기 반 전에 착수한 개념적 혁명은 뉴턴의 입자론적 세계ᐨ기계가 건설되면서 완성된다. 이 새로운 우주 속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혁신에 의해 제기된 질문들은 마침내 해결되었으며,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드디어 물리적으로, 우주론적으로 그럴듯한 이론이 되었다. 지구와 우주 속 다른 물체들 사이의 관계는 다시 정의되었다. 인간은 우주를 향해 발사된 포탄이 왜 발사된 지점으로 돌아오는지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포탄을 정확히 수직으로 쏘면 안 된다는 것까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행성 지구 관념에 대한 마지막 중요한 반대가 사라진 것은 바로 이 새로운 개념적 틀의 확산과 수용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주의가 신뢰를 받게 되면서였다. 그러나 뉴턴의 우주는 단지 코페르니쿠스의 행성 지구만을 위한 틀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하게, 그것은 자연과 인간과 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18, 19세기 동안 여러 차례 과학을 풍요롭게 만들고, 종교 철학과 정치 철학 모두를 탈바꿈시킨 새로운 과학적·우주론적 관점이었다.
뉴턴의 원리들은 케플러의 법칙에 대한 경제적인 도출과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천문학 혁명을 종결시켰을 뿐 아니라, 천문학 그 자체에도 많은 강력한 새로운 연구 기법을 제공했다. 예를 들어, 향상된 정량적 망원경 관측 기법으로 행성들이 실제로는 케플러의 법칙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뉴턴주의 물리학은 기본적인 타원 궤도에서 벗어난 행성들의 미세한 편차를 우선은 설명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다음에는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뉴턴의 도출이 보여 주었듯이, 케플러의 법칙은 각 행성에 태양만이 유일한 인력을 발휘할 경우에만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행성들은 그들끼리도 서로 끌어당기며, 이는 특히 그들이 가까이 지나칠 때 심해진다. 이러한 추가적인 인력은 기본 궤도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고 그들의 속도를 변화시킨다. 18세기 동안 뉴턴의 연구에 대한 수학적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편차를 아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세기 이러한 예측 기법을 역으로 사용한 방법은 천문학의 위대한 승리들 중 하나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1846년 프랑스의 르베리에(Leverrier)와 영국의 애덤스(Adams)는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행성의 존재와 궤도를 독립적으로 예측했는데, 그들은 이 행성이 기존 행성인 천왕성의 궤도에서 나타난 설명되지 않는 불규칙성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망원경을 하늘로 돌렸을 때, 새로운 행성 해왕성은 뉴턴주의 이론에 의해 예측된 지점의 범위 내에서 희미하게 보이며 발견되었다.
천문학에서 뉴턴주의의 생산성을 보여 주는 사례들은 거의 끝없이 늘어날 수 있었으며, 그 영향을 받은 과학은 천문학만이 아니었다. 많은 과학들 중 하나에서 가능한 사례 하나만 검토하자면, 18세기 화학 실험에 뉴턴의 연구가 미친 영향을 들 수 있다. 그의 분명한 의사 표현에도 불구하고−그는 중력이 물질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뉴턴으로 인해 그 후계자들은 중력, 즉 무게가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로 인해 과학에서 무게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무게는 처음으로 물질의 양에 대한 명백한 척도가 되었으며, 그 결과 저울은 근본적인 화학 실험 기구가 되었다. 저울 하나만으로도 화학자는 얼마나 많은 물질이 화학 반응에 투입되어 얼마나 많은 물질이 생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대 이래 화학자들은 물질의 양이 화학 반응 동안 보존된다고 믿어 왔지만, ‘물질의 양’은 널리 승인된 척도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의 분위기에서, 또는 데카르트적 사고의 분위기에서도, 무게는 색이나 질감, 단단함처럼 보통 물질의 이차적 성질로 간주되었다. 즉, 그것은 화학 반응 과정을 통해 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학 반응의 ‘전후를 비교해서’ 그 반응 동안 물질이 어딘가로 나갔는지 또는 어딘가에서 들어왔는지를 결정해 주는 보편적으로 승인된 도구로서의 무게 개념은 뉴턴주의의 부산물이었다. 이 새로운 도구는 18세기 마지막 몇십 년 동안 프랑스인 라부아지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화학 혁명의 여러 중요한 원천들 중 하나였다.
이 두 별개의 사례를 새로운 우주가 과학에 미친 효과에 대한 균형 잡힌 논의로 바꾸어 확장하려면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며, 그 논의는 여전히 불완전할 것이다. 새로운 우주에 맞추어 자라난 개념 체계에서는 과학 외의 사고방식도 변화를 겪었다. 17세기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상상한 무한한 다세계 우주에서, 하늘에 천국을 두고 지표면 아래에 지옥을 두는 방식은 단지 은유가 되었으며, 한때 구체적인 지리적 의미를 가졌던 기호의 메아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신이 부여한 몇몇 법칙에 따라 영원히 움직이는 원자들로 구성된 우주라는 관념은 신 자체에 대한 인간의 많은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시계장치처럼 작동하는 우주에서 신은 흔히 시계공으로만 보였다. 즉 그는 원자적 부분들을 빚어내고, 그들의 운동 법칙을 정해 준 후, 그들을 작동시킨 존재일 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의 정교한 버전인 이신론(Deism)은 17세기 말과 18세기의 사고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이러한 사고가 발전함에 따라, 기적에 대한 믿음은 쇠퇴했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역학 법칙이 중단되고 신과 그의 천사들이 지상의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엽에는 신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과학자와 비과학자 모두 점점 늘어났다.
새로운 과학의 또 다른 영향들은 18, 19세기의 정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의 일부 논자들은 17세기의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태양계 관념과 18세기의 부드럽게 작동하는 사회 관념 사이에서 중요한 유사성을 지적했다. 미국의 헌법에 포함된 견제와 균형의 체계는 파괴적 힘이 상존하는 뉴턴주의적 태양계에 관성력과 중력의 정확한 균형이 부여한 것과 똑같은 종류의 안정성을 새로운 미국 사회에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좋은 사회의 특징을 개인의 고유한 특징으로부터 도출하기로 한 18세기의 결단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17세기 입자론에 의해 촉진되었을 것이다. 18, 19세기의 사상에서 개인은 기계, 즉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로 거듭 취급된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첫 구절에서, 제퍼슨(Jefferson)은 혁명의 권리를 사회적 원자, 즉 인간이 가진 천부적 혹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부터 도출했으며, 그의 도출은 한 세기 전 뉴턴이 자연의 메커니즘을 각각의 물리적 원자가 가진 천부적 혹은 고유한 속성들로부터 도출한 것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이렇게 얼마 안 되는 이질적이고 미성숙한 사례들만으로도 뉴턴주의 우주의 창조와 함께 우리의 이야기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가 지구 중심 천문학을 위해 한 일을 뉴턴주의 우주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위해 했다. 그들 각각은 천문학을 다른 과학들과 묶어 줄 뿐 아니라 과학 외의 사상과도 연결해 준 세계관이었으며, 개념적 도구로서 지식을 조직화하고 평가하고 더 많은 지식을 얻는 방법이었다. 또한 한 시대의 과학과 철학을 지배했다. 하나의 세계관에서 또 하나의 세계관으로 이러한 원을 가로지름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혁신에 의존하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행성 지구라는 관념은 최초로 고대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와 성공적인 단절을 이루었다. (원래는) 천문학적 개혁으로만 의도되었지만, 그것은 오직 새로운 사고 체계 내에서만 해결할 수 있었던 파괴적인 귀결을 가지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그 사고 체계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의 우주관은 뉴턴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혁신에 의해 유도된 새로운 문제들과 제안들은 그 혁신이 그 자체로 불러일으킨 새로운 우주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필요의 창출과 그것의 해결 과정 속에서 제공된 도움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구성하는 역사적 기여들이다.
그러나 그것의 역사적 기여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중요성을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지식이 성장하는 끊임없는 순환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 큰 중요성도 가진다. 지난 250년은 혁명을 통해 나타난 우주관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지적 도구였음을 증명했다. 17세기 과학자들이 발전시킨 과학적 우주론과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공간, 힘, 물질 개념들은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 모두를 고대에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정확성으로 설명했다. 게다가 그들은 엄청나게 생산적인 많은 참신한 연구 프로그램들의 길잡이가 되어, 전에는 예기치 못했던 많은 자연 현상들을 발견하고 고대의 세계관에 속한 사람들로서는 다루기 힘들었던 경험적 분야에서 질서를 밝혀 주었다. 뉴턴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이미 설명한 더 제한된 목록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서구 학문의 계속된 전통이 유지되는 한 과학자들은 뉴턴주의 개념에 의해 처음 설명된 현상을 미래에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학이 진보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새로운 개념 체계는 앞선 체계들이 설명한 현상들은 포괄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것을 덧붙인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의 성취가 영구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성취를 가능하게 해 준 개념들은 그렇지 않다. 해명 가능한 현상들은 많아지지만, 설명 자체에는 비슷한 축적 과정이 없다.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과학의 개념들은 연거푸 파괴되고 대체되며, 오늘날에는 뉴턴주의 개념들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처럼, 뉴턴주의가 (이번엔 물리학 내부에서) 발전시킨 문제들과 연구 기법들은 결국 그것들을 만들어 낸 세계관과 화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그에 따른 개념적 혁명을 겪고 있는 중이며, 그 혁명은 공간, 물질, 힘, 우주의 구조에 관한 (일반인은 아닐지라도) 과학자의 관념을 다시 한 번 변화시키고 있다. 뉴턴주의 개념들은 방대한 양의 정보에 대한 경제적인 요약을 제공하기 때문에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점점 오직 경제성 때문에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고대의 2구체 우주가 현대의 항해사와 측량가들에 의해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은 여전히 기억에 유용한 도움이 되고 있지만, 미지의 대상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길잡이가 되진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선 관념들에 비해서는 더 강력하긴 하지만 뉴턴주의 우주는 더 최종적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의 역사는 인간 사상의 발전을 망라한 많은 장들 중 하나로,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이 파괴한 지구 중심적 우주의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구조를 가진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이야기의 긴 한 장이다.
주
- ↑ Robert Hooke, 『An Attempt to Prove the Motion of the Earth from Observations』(London: John Martyn, 1674), reproduced in R. T. Gunther, 『Early Science in Oxford』, VIII(Oxford: privately printed, 1931), pp. 27∼28.
- ↑ Newton, 『Opticks』, 4th ed.(1730, New York: Dover, 1952), p. 401.
- ↑ Ibid.
- ↑ Newton,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ed. Florian Cajori(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46), p. xviii.
- ↑ Newton, 『Opticks』, pp. 400∼401.
목차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 서문
-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의 추천사
- 1장 : 고대의 2구체 우주
- 2장 : 행성들의 문제
- 3장 :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2구체 우주
- 4장 : 전통의 재구성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까지
- 5장 : 코페르니쿠스의 혁신
- 6장 :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수용
- 7장 : 새로운 우주
- 상세 부록
- 참고문헌
- 옮긴이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