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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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정세권


보통 제국주의라고 하면 ‘한 나라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넓게 정의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처음 도착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럽의 제국주의는, 20세기 후반까지 약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19세기에 유럽의 각 나라들은 전 세계에 걸쳐 어마어마한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일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을 얻은 영국의 경우, 인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6대주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전 세계 육지의 1/5, 전 세계 인구의 1/4이 대영제국의 이름 아래 놓이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아시아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비롯하여 캐나다 일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모로코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운영했다.

이처럼 유럽의 나라들의 해외로 팽창하여 광범위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당시 과학기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흔히 제국의 건설을 이야기할 때면, 영웅적인 인물의 지략이나 전쟁의 참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이 강조된다. 그 과정에서 과학이나 기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거나,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행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이고 무사공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이 없었다면 유럽 제국의 확장은 있을 수 없었으며, 심지어 제국을 확장하는 동기와 과정 속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도 했다. 이제 몇 가지의 사례를 통해서 과학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살펴보자.

탐험과 정복의 수단: 증기선, 키니네, 총, 전신기술

19세기 유럽 각 나라들이 전 세계로 진출하는 데에는 당시 과학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증기선,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 그리고 총기류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먼저 증기선은 바람에 상관없이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범선이 침투할 수 없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강과 여울을 탐험하고 육지의 도시를 정복하는 데 아주 중요했다. 1832년 스코틀랜드 상인 레어드(Macgregor Laird)는 개량된 외륜선 알부르카(Alburkah)를 타고 나일 강 깊숙이 탐험할 수 있었고,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당시 동인도회사에서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Nemesis)호는 중국의 해안방어선을 공략하고 해상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증기선을 이용한 정기적 항해는 보편적인 일이 되었고, 증기선은 곧 ‘유럽 제국의 월등한 힘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유럽의 각 국가들의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곳의 낯선 토착병, 특히 말라리아를 극복해야만 했다. 이 지역에 접근하려 했던 유럽인들 상당수가 말라리아에 걸려 희생되었는데, 1805년 나일 강을 탐험했던 영국 원정대가 모두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할 정도였다. 증기선으로 보다 쉽게 내륙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의 낯선 환경은 쉽게 유럽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은 1820년대 프랑스 화학자들이 기나나무(cinchona)에서 키니네를 분리하여 말라리아 치료약으로 이용하면서부터 손쉽게 해결되었다. 1826년 영국 해군의 의사들은 저렴한 가격의 키니네 알약을 대량 생산했고, 실제 1854년 키니네를 복용하고 나일 강을 탐험했던 영국 원정대 중 말라리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키니네는 곧 유럽이 아프리카로 ‘안전하게’ 진출할 수 있는 묘약이었던 것이다.

증기선과 키니네는 유럽이 낯선 지역의 자연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였던 반면, 무기 특히 총기류의 혁신은 토착민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유럽인들은 토착민과의 전투에서 비교적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신변 보호를 위해 더욱 강력한 무기를 원했고, 19세기 동안 발달한 총기 기술로 원하던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19세기 초까지 유럽에서는 총구를 통해 실탄을 장전하고 부싯돌을 발화장치로 이용하는 구식 소총이 주로 이용되었는데, 이 소총은 비 오는 날 화약이 젖거나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연기가 많이 나는 단점이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탄알을 총신의 뒤쪽에 장전하는 후장총이 개발되고, 금속제 탄약통, 무연폭약이 만들어지면서 총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884년 연속발사총인 맥심건(Maxim gun), 1897년 굉장한 살상력을 지닌 덤덤탄이 만들어지면서 식민지 전쟁에서 유럽은 확실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덤덤탄의 위력은 실제 1899년 아프리카 차드에서 320명의 프랑스 군대가 덤덤탄을 이용하여 12,000명의 차드 군대를 사살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거대한 제국이 만들어지면 제국의 각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고, 이를 위해서는 제국-식민지, 식민지-식민지 사이에 신속한 의사소통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아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본국에서 수천 km 떨어진 곳까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인도를 오가는 데 수개월씩 걸리는 해군의 연락선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183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전신 기술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던 해에 영국에서는 최초로 육상 전신이 가설되었고, 1850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국 해협에 해저전신이 설치되었다. 이런 전신 기술의 발달은 제국이 팽창하고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57년 동인도회사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세포이 항쟁 당시 빠른 통신수단이 없어 어려움을 겪은 영국은, 더 멀리 더 빠르게 소식을 전하기 위한 전신기술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1866년에는 영국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대서양 해저전신이 설치되었고, 이어 인도, 홍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까지 확대되었다. 당대의 하이테크 유망사업이었던 전신 기술력을 확보한 영국은 1892년이 되면서 전 세계 전신 사업의 66%에 관여하면서 이 분야를 거의 독점했다. 이런 전신 기술의 위력은 1898년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려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충돌한 파쇼다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때 영국군은 잘 깔려있던 전신망 덕분에 본국에 신속하게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은 반면, 전신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프랑스는 적군이었던 영국의 전신망으로 통해 이집트의 전쟁 상황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전신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은 상황을 축소하여 프랑스 본국에 알려줌으로써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 수 있었다.

이처럼 19세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기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각 나라들이 전 세계로 진출하여 거대 제국을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했거나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제국의 팽창은 다시 과학의 발전으로

거대한 제국이 만들어지는 데 과학과 기술이 봉사했다면, 거꾸로 제국의 팽창으로 인해 과학이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후반의 전자기학 분야가 정교하게 발달하는 데 대영제국의 전신 사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 1866년 가설된 대서양 해저전신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긴 거리를 통해 전기 신호를 전달해야 했다. 그런데 전달해야 할 거리가 길어지면 질수록 그 과정에서 전기 신호가 약해지는 문제가 있었고, 이는 영국에서 보낸 전기 신호가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 이 사업에 관여했던 영국의 전기기술자들은 고전압으로 전기신호를 보낸다면 중간에 약해진다 하더라도 일부의 전기신호는 미국까지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높은 전압은 전선에 열을 발생시켜 중간에 전선이 끊어질 수 있었다. ‘켈빈경’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당시 물리학자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은 물리 이론과 수식을 통해 고전압이 문제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 고전압으로 전류를 보내는 대신 약해진 신호를 미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정밀한 실험기구를 제작했다. 그는 거울을 이용하여 검류계(전류를 측정하는 기계)의 정밀도를 높이는 거울검류계를 발명했고, 톰슨의 기여에 힘입어 1866년 대서양 해저전신은 성공할 수 있었다.

톰슨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의 각 대학들에서는 물리학, 공학 분야 실험실을 만들고 거울검류계를 이용한 실험실습을 강화하여 전신 전문가들을 배출했다. 이들 전문가들은 전신 사업이 더욱 각광을 받던 19세기 후반 물리학 이론과 실험 경험을 겸비한 인력으로 성장했고, 톰슨의 거울검류계는 점점 개량되어 전신 전문가들 교육뿐만 아니라 전자기학의 중요한 실험도구로 자리 잡으면서 전자기학 실험의 정밀도를 높이는 데에도 기여했다. 게다가 대영제국의 팽창과 전신 사업의 호황은, 물리학의 표준 단위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전류저항에 관한 표준적인 단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신 사업에 뛰어든 각 회사의 생산품마다 저항의 단위가 달랐고 따라서 제품 간 호환도 힘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학진흥협회는 1861년 “전기표준에 관한 BA 위원회”를 구성하여 저항의 표준을 정하는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전가지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 등 당시 영국에서 내노라하는 물리학자들이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정밀한 측정을 통해 마침내 “BA ohm”이라는 전기저항의 표준단위를 제정했는데, 이 표준저항 단위는 전신망을 통해 전 세계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널리 퍼져나가, 당시 다른 나라에서 쓰였던 다 저항단위를 모두 대체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제국의 각 지역과 본국을 전신으로 연결하여 통합하려는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는 전자기 물리학의 발달을 유도했을 뿐 아니라, 그 성과는 또 다시 제국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지질학, 동물학, 식물학과 같은 자연사 분야나 의학 또한 19세기 유럽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크게 성장했다.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통해 종이 진화한다’는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은, 1831년부터 5년 동안 그가 경험한 비글호 항해가 없었더라면 등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국 해군함이었던 비글호의 항해 목적은 과학적 탐구가 아니라,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남미 대륙에 영국이 진출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답사의 성격이 짙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대륙의 해안선과 지형, 동식물의 분포를 면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향후 영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할 때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비글호 항해의 의도였다. 이 과정에서 찰스 다윈은 같은 종의 동식물이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목격했고, 방대한 동식물 표본과 지질학적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여 세계를 뒤흔들 진화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70년대 이후 열대질병을 정복하기 위한 의학적 연구 역시, 유럽의 각 나라들이 이 지역들에 거대한 제국을 만들려고 했던 기획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비록 키니네 때문에 말라리아로 인한 환자는 줄었지만 열대 지역에는 여전히 원인모를 풍토병이 창궐했고 사망자와 환자들이 즐비했다. 따라서 유럽인들이 안전하게 열대 지역에 정착하고 토착민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열대 질병의 원인과 치료책을 연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고 당시 많은 세균학자들은 이 문제에 매달렸다. 그 결과 영국의 군의관이자 세균학자였던 브루스(David Bruce, 1855-1931)는 아프리카 수면병을 매개하는 곤충이 체체파리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로스(Ronald Ross, 1857-1932)는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모기를 연구하여 감염경로를 밝힌 공로로 1902년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과학과 기술은 유럽이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여 거대 제국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거꾸로 거대한 제국을 향한 열망은 자연사 연구와 의학뿐 아니라 물리학처럼 사회적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정밀과학 분야가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상징, 문명의 척도로서 과학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유럽인들이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있는 지브롤터 해협을 벗어나면 새로운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을 만날 수 있고, 그 왕래가 잦을수록 새로운 지식들이 쌓여 사회가 진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후 앞다투어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고 정복하며 거대 제국을 건설한 서구 유럽인들은, 미개한 것처럼 보이는 토착민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스스로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보다 발달된 문명을 이룩한 자신들이 미개한 사회를 문명화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유럽인들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데에는,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성과가 중요한 근거였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물질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신과 편견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만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아프리카와 남미, 인도와 중국은 열등하고 미개한 지역일 뿐이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프리카에는 과학이나 기술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고대 인도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나 과학적 성취는 대부분 틀린 것이었다고 생각했고, 인도의 사회 수준은 중세 유럽에 해당한다고 간주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과거의 기술적, 과학적 성취는 인정했으나 중국인들이 유럽인들과 달리 과학적 근본 원리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점점 유럽에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럽인들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문명을 발전시키기 못한 이들 지역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며 노예근성이 있으며, 생물학적으로도 훨씬 원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목민 코이코이족의 사라 바트만(Sarah Baartman)이라는 여인은 유럽으로 팔려가 ‘인간 전시물’이 되었다. 큰 엉덩이와 가슴 등 그녀의 특이한 신체 특징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인기도 끌었는데, 유럽인들은 그녀를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우수한 유인원’ 혹은 ‘거대한 동물’로 취급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5년 동안 유럽 곳곳에서 전시되다가 1815년 그녀가 사망하자, 프랑스 의사였던 퀴비에는 그녀의 뇌와 생식기를 해부하여 유인원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유럽인들이 보기에 아프리카는 과학기술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토착민들은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까운 미개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신들이 열등한 지역을 개발하고 통치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유럽인들은 생각했다.

흔히 과학기술은 연구자들의 독창적인 사고와 부단한 실험으로 만들어지고, 따라서 사회문화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전 세계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렇지만 19세기 유럽이 비서구 지역으로 팽창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과학과 기술은 유럽인들의 물질적 부와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증명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이자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한 단계 발전하는 상호작용도 존재했는데, 얼핏 사회와 무관한 듯이 보이는 전자기 물리학조차 제국의 팽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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