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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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오승현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서양의 과학은 천문학, 물리학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었고, 그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당시의 지식과 문화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과학의 다른 분야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또한 다른 분야에서의 변화는 앞선 과학혁명과 어떤 점에서 연관관계를 찾을 수 있을까? 흔히 화학혁명이라고 불리는 18세기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의 등장은 이 질문들에 대해 의미있는 통찰을 가져다주는 사례이다. 산소를 발견한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의 연소이론에서 시작한 새로운 화학은 이전 시대의 물질연구에 새로운 내용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과 성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의 실험실에서 등장한 새로운 화학은 실험실 밖의 세계로 어떻게 확산되었을까? 이 이야기들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라부아지에 이전의 물질연구 전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연금술과 실용적 기술

연금술의 상징기호들. 연금술에서는 물질을 지칭하는 기호나 비유적 표현들이 자주 쓰였다.
유럽에서 근대 화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물질에 대한 연구는 고대부터 있어왔다. 그러한 전통은 14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세계의 문명과 함께 유입된 연금술이 널리 유행하게 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천문학과 역학의 혁명이 한창이었던 16세기와 17세기에 한층 더 발달한 연금술은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천문학이나 역학보다도 더 첨단 과학으로 인식되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과학을 개척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강했고, 자신들의 귀한 지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려 해독하기 어려운 언어와 기호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연금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꿔 부를 얻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작업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활동 이면에는 자연물들 속에서 감추어진 질서를 찾아내고, 그 질서를 바탕으로 어떤 원소를 다른 원소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추구하는 철학이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연금술은 물질의 근본을 탐구하는 더 궁극적인 과학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을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받는 뉴턴도 연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는 연금술을 통해 예로부터 내려온 완전한 지식을 복원하여 자연에 대해 완벽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의도는 바로 그의 과학이 추구했던 바와 일맥상통하였다.

물질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철학적인 관심에서 비롯한 연금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물에서 유용한 약을 개발하거나 금속을 제련하고 합금하는 실용적인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한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물질과 약의 관계를 진지하게 연구하여 의화학이라는 개념의 의료적 실행을 선도하였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유황․수은․염의 3원리가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상태가 되는데, 이 균형이 깨질 때 생기는 질병이 발생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균형을 다시 회복하는 데 필요한 특정한 물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특정한 질병에 어떤 물질이 사용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은 의화학자들의 임무가 된다. 파라켈수스는 이 물질을 주로 광물에서 찾았는데, 서양의 광물성 약학은 바로 파라켈수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인간의 필요에 의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자연물을 변형하고 가공하는 각종 기술은 이 당시 매우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이러한 기술에는 야금술, 합금술, 화약제조술, 염색기술 등이 있었는데, 이는 물질을 다루어 필요한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공학기술 중 화학에 관련된 분야와 비슷한 활동이었다. 여기에도 파라켈수스의 의화학적 개념이 널리 쓰였다. 그 가운데 독일의 요한 베허는 금속성 광물의 성질을 연구하면서 흙 성분의 물질을 기름성분의 흙, 유리질의 흙, 유동성의 흙으로 나누어 유황․수은․염의 3원리에 대응시켰다. 이 원리는 슈탈(Georg E. Stahl, 1660-1734)에 의해 계승되어 플로기스톤(phlogiston)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플로기스톤 이론과 영국의 기체화학

슈탈은 베허가 주장한 기름성분의 흙에 플로기스톤이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는데, 그는 물질에 플로기스톤이 있어야 연소가 일어나며 연소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이 가진 유황성분이 분리되어 나온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플로기스톤 이론은 연소현상을 분명 잘못 설명하고 있지만, 이 이론은 당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우리가 보통 무엇이 타고 재가 ‘남는다’라는 표현을 쓰듯이, 연소현상을 물질에 속해있던 어떤 성분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직관적으로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플로기스톤 이론이 비록 실용적인 기술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등장한 측면이 있지만, 17세기까지 연소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실험적이기보다는 이론적이었으며, 플로기스톤을 영혼과 같은 정기(精氣)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18세기에 이 이론을 수용한 영국의 화학자들에게도 플로기스톤의 속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들에게 플로기스톤은 여전히 물질이 아닌 원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기체의 성질과 종류를 연구하여 다양한 기체를 발견함으로써, 공기를 단일한 물질이라고 여겼던 전통적인 믿음을 흔들게 되었다. 또한 공기가 다른 물질과 결합할 수 있다는 실험결과를 도출해 내면서 공기가 화학적으로 반응성이 없다는 이전의 관념에 대해서도 도전했다.

프리스틀리의 ‘플로기스톤이 없는 기체’. 프리스틀리는 수은재 연소 시 생기는 기체를 포집하여 밀폐된 공간속의 쥐와 식물에게 공급하였다. 그 결과 생물은 모두 건강히 살아있음을 확인하였고, 프리스틀리는 이 기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활동을 했던 영국의 기체화학자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리스틀리(Joshep Priestley, 1733-1804)였다. 프리스틀리는 플로기스톤 이론에 바탕을 두고 당시 새롭게 발견되었던 기체들이 갖는 성질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조셉 블랙이 발견한 ‘고정된 공기(fixed air)'(오늘날의 이산화탄소)는 플로기스톤이 많이 함유된 기체이고, 자연 상태의 대기는 플로기스톤의 함량이 적은 기체이다. 프리스틀리는 처음에 보통의 대기가 플로지스톤이 가장 적은 기체라고 생각했으나, 이후 수은재 가열하는 실험을 통해 ’플로기스톤이 없는 기체(dephlogisticated air)'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수은이 가열된 후 생겨난 수은재는 수은에서 플로기스톤이 빠져나간 물질이다. 이 수은재를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그것은 공기 중의 플로기스톤과 결합하여 수은이 되며, 남은 공기는 ‘플로기스톤이 없는 기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기체는 우리가 아는 산소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후 플로기스톤 이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산소’를 알아낸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새로운 화학을 정초하게 된다.

라부아지에의 산소와 새로운 화학

다비드가 그린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화> (1788). 혁명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은 옛 것을 타파하는 개혁을 꿈꿨다. 라부아지에 부부는 함께 화학실험을 수행하면서, 옛 플로기스톤 이론 대신 새로운 화학의 체계를 세웠다.
라부아지에는 1760년대부터 화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 1770년 무렵부터 그는 특정 공기가 연소반응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는데, 1772년 연소 시 생성되는 기체물질의 무게까지 정확히 측정하는 실험으로 연소할 때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1773년 수은을 가열하여 수은재를 만드는 실험에서 그는 수은과 특정한 공기가 결합하여 수은재가 생성됨을 확인했다. 이 수은재 생성실험은 프리스틀리의 실험과 완전히 반대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때 작용하는 기체는 무엇이었을까? 라부아지에는 영국의 기체화학자들이 발견한 기체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찾는 기체가 블랙이 발견한 ‘고정된 기체’라고 생각했으나, 이 기체는 연소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찾는 기체가 될 수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1774년 프랑스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로부터 그의 수은재 실험과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라부아지에는 연소 시 작용하는 기체가 바로 이 기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산소’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여 자신의 연소가설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산소라는 명칭은 이 기체가 비금속물질들과 반응하여 산(acid)을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라부아지에가 ‘산을 만드는 물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따온 용어였는데, 이 새로운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라부아지에는 기존의 플로기스톤 이론을 버리고 물질과 산소가 반응하여 산소화합물이 생기는 새로운 형태의 연소이론을 세우게 된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플로기스톤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연소이론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근대화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은 연소현상을 설명하는 근대적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 보다는 화학체계 전반을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와 새로운 방법론에서 더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원론』(1789) 영역본 중 원소표. 라부아지에가 새롭게 정의한 원소들의 이름과 그에 대응하는 옛 명칭을 보여준다.
우선 그는 자신의 이론을 적용해서 완전히 새로운 화학용어체계를 만들어냈다. 이전까지 화학용어는 그 성질, 출처, 쓰임 등을 모호하게 섞어서 임기응변식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영국의 기체화학자들이 발견한 기체들의 명칭을 보면, ‘고정된 공기’, ‘가연성 공기’, ‘나빠진 공기’, ‘플로기스톤이 없는 공기’ 등 기체를 발견한 화학자들이 별 기준 없이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붙인 이름이었다. 라부아지에는 1782년 『화학물질 명명법』이라는 책에서 새로운 명명법의 원리를 설명하였는데, 그 원리는 먼저 탄소․철․황과 같이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원소로 분류하여 그 이름을 정한 후, 화합물은 그 구성원소가 잘 나타나도록 명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비트리올’로 불리던 물질은 황과 산소의 화합물인 ‘황산’으로, ‘훔베르크의 진정시키는 염’은 ‘붕산’이 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 명명법은 화학물질의 성분을 명확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화학반응을 방정식의 형태로 나타낼 수 있도록 하여 당시 가장 정확한 언어로 여겨지던 대수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울러 라부아지에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실험화학의 전통을 발전시켜 실험을 더욱 정량적으로 수행함으로서, 정성적이었던 화학이 정량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연소반응 실험에서 기체의 무게까지 정확히 계측하여, 그의 연소이론의 확실한 근거를 마련했으며, 이 이론을 확장시켜 화학반응에서 반응 전의 물질의 질량의 합과 반응 후의 질량의 합이 같다는 법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라부아지에의 화학의 새로운 모습은 이 이론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다른 과학 및 철학의 경향과 궤를 같이하며 학자들의 공감을 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용어 개혁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와 같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대로 인간 사고방식의 개혁에 정확한 언어의 사용이 필수적이라는 관념과 맞아 떨어졌다. 그러므로 지식․사회․정치의 개혁을 열망하던 당시의 신세대 학자들에게 라부아지에의 화학용어 개혁은 이러한 큰 틀의 개혁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뉴턴과학이 성공적으로 전파되어 그 이론을 토대로 정량적인 자연과학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 라부아지에의 정량적인 방법은 뉴턴과학의 성공을 화학에서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보였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화학의 발전은 어느 한 사람이나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의 연금술에서부터 영국의 기체화학자를 거쳐 라부아지에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거쳐 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모습의 화학은 천문학이나 물리학보다 뒤늦게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18세기에 새로운 연소이론을 통해 새로운 화학의 체계를 구축한 라부아지에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화학을 라부아지에가 홀로 완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화학 이론은 완벽하지 않았고, 영국의 화학자들에게 라부아지에 화학의 문제점들은 이 이론을 완전히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세기 초에 이르러 돌턴과 베르셀리우스가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보완하여 원자론과 화학반응의 법칙을 정립하면서 완전한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과학교양』 (과학중점고등학교 교과서). 한국과학창의재단, 2010.

  1.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2.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3.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4.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5.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6.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7.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8.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9.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10. 과학과 여성 (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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