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제도적 기반

ZoLAist's WikiNote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작성자 : 정동욱


오늘날 과학자가 되려는 이들은 대부분 정해진 길을 밟는다. 학교의 교과 과정을 따라 수학과 과학을 중심으로 공부하여 자연계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대학은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 및 훈련 과정을 갖추고 있어서, 예비 과학자들은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실제 연구에 필요한 이론적 지식과 실험적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졸업을 하고 나면 그들은 대학이나 정부 또는 산업체에 소속되어 일정한 보수를 받으며 연구를 수행한다.

과학자들은 자신과 동일한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전문 학회의 회원이 되며, 그들의 연구 성과는 대부분 각 분야의 전문 학술지에 논문의 형태로 수록된다. 특히 <네이처>나 <사이언스>와 같은 유명 학술지에 자신의 논문이 실리는 것은 그 과학자에게 큰 명예가 되기도 한다. 실용적인 연구의 경우에는 논문을 통해 공개하기보다 특허를 받아 독점적인 권리를 얻는 방식이 선호되기도 하며, 그 연구 결과물은 기술적 산물에 반영되어 사람들의 편의를 증진시켜주거나 기업의 이윤을 더해준다.

이렇듯 오늘날 과학 연구는 대학, 학회, 정부, 기업 등을 포함한 여러 제도적 기반 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 활동이 이러한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자연을 탐구하는 이들이 학회와 같은 형태의 공식적인 단체를 꾸린 것은 17세기에 처음 나타난 일이었으며, 자연을 탐구하는 일이 그 자체로 돈을 벌 수 있는 전문 직업이 된 것은 19세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과학이 대학의 교과목에 편입되고 대학과 산업체에 연구소가 갖추어진 것 또한 19세기에 본격화된 일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은 일찍부터 정부가 과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영국과 미국은 19세기 말이 다 되어가도록 과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매우 꺼림칙해했다. 이 글에서는 과학과 관련된 여러 기관과 제도들이 언제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과학혁명기의 변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과학혁명기의 대학과 후원

과학을 수행하는 데에는 비용이 들며 과학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생활비가 필요하다. 과학혁명이 꽃을 피우던 17세기, 로버트 보일처럼 과학을 수행하는 데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부유한 귀족도 있었지만, 갈릴레오처럼 재정적 후원 없이는 과학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과학자에 대한 재정적 후원이 가능한 곳으로는 일차적으로 대학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실제로 해부학으로 유명한 베살리우스나 만유인력으로 유명한 뉴턴은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에 대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대학의 의학부는 학자들에게 해부 극장, 식물원, 화학실험실 등의 연구 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학과 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야에서 당시 대학은 새로운 방식의 과학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학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중심의 교과과정을 고수했고, 그러한 대학 교육과 충돌이 있었던 과학혁명의 여러 인물들은 후원을 받기 위해 대학 밖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던 갈릴레오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줄 강력한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 사실 그는 대학의 보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개인적인 교습을 하기도 하고 기구를 제작해 팔기도 했으며 집에 하숙생을 들이기도 했다. 1609년 갈릴레오는 자신이 직접 개량한 망원경을 통해 목성을 관찰하던 중 목성의 위성 4개를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후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사용했다. 즉 그는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 메디치 가문에 헌정함으로써, 파도바 대학을 떠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강력한 메디치 가문의 후광을 얻게 된 갈릴레오는 대학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궁정의 힘과 네트워크는 갈릴레오가 내세운 새로운 과학의 파급력을 배가시켜주었다.

갈릴레오는 당시 궁정에서 고용한 유일한 학자가 아니었다.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2세의 후원으로 벤 섬에 천문대를 만들었으며, 프레데리크 2세의 죽음으로 후원이 중단되고 나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천문학자가 되었다. 티코의 도제로 출발했던 요하네스 케플러 역시 황제 루돌프 2세의 후원을 받아 황제의 천문학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궁정의 후원은 후원자 개인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에, 후원자의 죽음과 같은 작은 사건에 의해 쉽게 불안정해지곤 했다. 후원자의 죽음 이후 티코 브라헤는 더 강력한 후원자를 찾는 데 성공한 반면, 갈릴레오는 그에 실패했다. 1621년 갈릴레오는 자신을 후원해주던 코시모 2세가 죽은 이후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청의 변덕스런 정치에 휘말리게 되었고 특히 교황청의 허가로 집필한 책 <두 가지 우주구조에 대한 대화>에서 교황을 조롱했다는 결정적인 빌미를 잡히면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과학 학회의 탄생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이론은 사람들을 통해 교류되고 한참을 토론되고 나서야 수용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과학을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많던 17세기 새로운 과학의 지지자들은 상호부조를 위해서라도 뭉칠 필요가 있었다. 즉 자신들의 새로운 발견이 작은 모임에서라도 교류되고 수용될 수 있다면, 그 모임의 단결된 힘은 모임 밖의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갈릴레오는 로마의 린체이 아카데미(1601년 창립)에 참가했으며,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은 피렌체의 치멘토 아카데미 창립(1657년)을 주도했다. 프랑스에서는 메르센느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서신 교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들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귀족의 개인적인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메르센느 네트워크는 메르센느가 죽자 와해되었고, 치멘토 아카데미도 그 후원자였던 레오폴드 경이 추기경이 되어 떠나자 곧 문을 닫았다.

토머스 스프랫이 쓴 《왕립학회의 역사》의 표지 그림. 가운데에 찰스 2세의 흉상이 놓여 있고, 그 오른편에는 과학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한 프랜시스 베이컨이 있다. 그림의 배경에는 공기펌프를 비롯한 다양한 과학도구들이 놓여 있다.
오랫동안 지속된 최초의 과학 단체는 현재까지도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런던 왕립학회이다. 왕립학회는 비공식적으로 그레샴 칼리지에 모이던 모임이 1660년 국왕 찰스 2세의 헌장을 받으면서 공식화된 단체로서, 비록 왕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왕의 인가를 받았다는 이유로 높은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학회의 재정은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했으며, 실험을 위한 경비와 설비는 개인적으로 마련해야 했다. 일관된 연구 방향이나 이론 체계는 없었지만, 회원들 모두는 실험과 귀납을 통해 협동적으로 과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베이컨의 이상을 추종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학회의 주된 기능은 새로운 발견을 수집하고 전달하는 데 있었다. 학회의 간사였던 헨리 올덴버그는 대규모의 서신 교환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가 개인적으로 출판하던 《철학회보》는 곧 학회의 공식 학술지가 되었다. 이 학술지를 통해 개인들의 발견은 서로 교류되고 나아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발견의 우선권도 보다 쉽게 따질 수 있게 되었다.

왕립학회의 구성원들은 베이컨의 이상처럼 자신들의 새로운 과학이 유용하고 실제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천문학 분야에서만 그 가능성을 인정했는데, 천문학이 항해술을 개선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670년대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가 지어지고 존 플램스티드가 초대 왕립 천문학자로 고용되었지만, 플램스티드는 천문대의 장비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액수의 자비를 들여야만 했다. 이처럼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던 영국의 왕립학회는 과학을 흥미로운 취미 거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상류층 신사들로 회원을 채우곤 했다.

왕립 과학아카데미를 방문 중인 루이 14세. 클로드 페로의 《동물의 자연사에 관한 정리》의 표지 그림.
비슷한 시기 설립된 프랑스의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메르센느 네트워크가 와해된 후 그중 일부 과학자들은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에게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면서 1666년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 왕실은 과학아카데미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아카데미에 소속된 일부 과학자들은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으며 왕립도서관, 왕립천문대, 왕립식물원 등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 세계 각지에서 온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키우고 있던 거대한 왕실정원(현재의 파리식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생물학 연구 환경을 제공했다.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 지원 하에서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는 일과 같이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 막대한 양의 국가의 돈으로 연구를 하는 만큼 과학자들에 대한 규제도 엄격한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는 일종의 정부 관료로서 출판 검열이나 특허 심사와 같은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18세기 동안 프랑스의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꾸준히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지방의 수십여 곳에서도 아카데미가 생겨나면서, 이들 지방 아카데미들은 중앙의 파리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지방분회 형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를 모범 삼아, 프로이센에서는 베를린 아카데미가 만들어졌고, 러시아에는 상크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는데, 파리의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이 아카데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8세기 후반부에는 버밍엄, 멘체스터 등 영국의 신흥 산업도시에 새로운 성격의 학회들이 설립되기도 했는데, 이들 학회는 과학을 산업기술에 적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부유한 산업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버밍엄 루나 협회에는 증기기관을 개량하는 일에 힘을 쏟은 제임스 와트, 도기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조사이어 웨지우드, 기계 개량을 비롯해 생물학의 문제에 관심을 보였던 이래즈머즈 다윈(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그리고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놓고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이 모임은 과학을 실제로 이용할 수 있다는 베이컨의 이상을 진정으로 추구했던 모임으로서, 과학을 취미로 삼던 상류층들의 왕립학회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전문 과학자의 양성

17-18세기까지 전문적인 과학자를 양성하는 교육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대학에서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중심의 고전 교육을 통해 기본 소양을 갖춘 사회적 엘리트를 배출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과학에 해당하는 강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과학 강의는 어디까지나 교양학부의 교양과목이거나 의학부의 의사 양성용 예비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18세기까지, 19세기에도 과학자 중에는 직업 의사가 많았다. 일례로 생물 분류 체계를 정비하여 오늘날 자연사학자 또는 생물학자로 알려져 있는 린네 역시 당시에는 웁살라 대학의 의학부에 속해 있었다.

과학 교육과 관련하여 18세기의 의미 있는 변화로는 기술과 관련한 교육 기관이 여럿 신설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광업을 통해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던 독일에서는 지질학과 공학을 가르치는 광산학교를 설립했으며, 프랑스에서도 공병을 양성하기 위한 토목학교와 포병학교 등을 설립하여 유능한 장교를 교육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이 학교들에서는 유난히 수학적 이론과 과학을 강조했는데,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 중에는 이러한 기술학교의 교수이거나 학생 출신이 꽤 있었다. 예컨대 전기와 자기 연구로 알려진 쿨롱은 토목학교 출신이었으며, 천체역학으로 유명한 라플라스는 포병학교의 교수였다. 또한 라플라스로부터 교육 받은 포병 장교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으로 권력을 쥔 후 과학적 훈련을 통해 공학자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사회 제도뿐 아니라 교육과 과학 제도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혁명 정부는 1794년 에콜 폴리테크닉이라는 최초의 전문 공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과학적 훈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에서는 라플라스, 라그랑주, 몽주 등 당대 일류 과학자들을 교수로 고용했으며, 포아송, 프레넬, 카르노, 게이-뤼삭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를 배출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수학과 물리학, 화학 교과서에 이름을 남겼다.

프랑스 정부가 이러한 과감한 혁신을 단행한 것은 과학이 국가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혁명 정부는 도량형 개혁, 선거제도 개혁, 공중보건체제 개혁 등의 일에 과학자들을 적극 활용하는가 하면,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의 고급 인력을 공병대의 정부 공학자로 고용하여 운하, 다리, 철도 건설 등의 정부 사업을 계획하고 감독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는 정부가 설립한 학교를 통해 전문 과학자를 양성하고 그들을 다시 정부의 관료나 학교의 교수로 고용하는 시스템을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자들은 혁명 정부와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유무형의 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정부나 학교에 고용된 것은 교육이나 행정 및 기술 감독 등을 위한 것이었고, 여전히 과학 연구는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고 난 짜투리 시간에 하는 개인적인 일로 남아 있었다. 과학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직책이 생기고 과학 연구를 자신의 중요한 기능으로 하는 기관이 나타난 것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 독일에서는 훔볼트를 비롯한 신인문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교육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들의 개혁을 통해 19세기 독일 대학에서는 자유로운 연구, 상호 비판, 진리탐구에 대한 헌신을 특징으로 하는 이상주의적인 학풍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통해 대학 교수는 교육자인 동시에 연구자라는 독특한 사고방식이 나타났다. 또한 여러 영방국가로 나뉘어져 있던 당시 독일의 각 영방국가들 사이에는 학문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교수로 채용하기 위한 경쟁이 심했는데, 이는 학문적 성과를 둘러싼 학자들 사이의 경쟁에도 불을 붙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의 대학은 점차 교육에서 연구로 초점이 옮겨가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교수들은 강의를 진행할 뿐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대학원생들을 연구자로 양성하는 역할도 추가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인증하는 박사학위 제도는 바로 19세기 독일에서 탄생한 연구 대학의 산물이다.

19세기를 통해 급성장한 독일 정부는 과학 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교수의 사비를 통해서나 유지되던 물리학 실험실은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학의 하부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대학의 물리학과에는 실험실, 강의실, 학생들의 실습실, 한 명의 정교수와 한두 명의 부교수, 사강사, 조교, 정기적인 세미나 등이 완전히 갖추어질 수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 연구에 대한 이러한 지원은 장기적인 국익을 위한 투자이자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행위였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독일 정부는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기보다 진리 탐구를 돕는다는 이상적인 명분에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독일 산업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1887년에는 독일 최대의 전기산업가 지멘스와 독일제국 정부의 협력으로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는데, 이에는 순수 물리학에 강한 애착을 가진 지멘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이 대학에 임용된 뒤 강의를 비롯한 일상적인 교육 업무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연구 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다며, 강의로부터 해방되어 전적으로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이다. 1913년에는 그중 하나인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연구소가 설립되었는데, 그 초대 소장에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아인슈타인이 임명되었다. 사실 정부는 아인슈타인이 이끄는 연구소에서 행하는 순수물리학 연구가 어떻게 산업적, 군사적으로 국가를 도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부와 과학자 사이의 상호 신뢰 관계와 이상주의적인 독일 문화 덕분에 정부는 연구소에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하면서도 자율적 연구를 보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기반 하에서 베를린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세계의 과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과학자를 양성하는 교육 과정이 매우 늦게 나타난 편이었다. 다만 19세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수학 트라이포스’라 불린 극도로 어려운 우등 졸업 시험이 치러졌는데, 이 우등 졸업 시험에는 순수 수학을 비롯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등장하는 천체 역학, 수력학, 빛의 파동 이론 등 물리학에 해당하는 문제들이 수학의 고급 응용 문제로 다루어졌다. 이 시험을 우수하게 치룬 우등 졸업생들의 다수는 법조계나 교회의 주교로 진출했지만, 그중 일부는 대학의 수학이나 자연철학 교수로 임용되어 물리학의 여러 분야를 수학적으로 통합하는 데 큰 공헌을 세우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정부가 일찍부터 과학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영국과 미국은 과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매우 꺼림칙해했다. 자유방임적인 국가 체제 하에서, 영국 정부는 다른 활동에 비해 과학을 특별히 지원해야 할 근거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재미와 지적 만족을 위한 순수 연구라면 개인이 스스로 비용을 대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용적인 연구라면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기업이 자금을 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과학 연구로부터 얻을 이익이 당장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한 그에 선뜻 대규모의 자금을 댈 수 없었다. 심지어는 과학자들조차도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과학의 객관성이나 자율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영제국 지질조사국 설립과정은 이러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830년대 지질조사국 설립이 광업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일부의 제안이 나오자, 영국 정부는 광산회사가 이에 대한 자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산회사들은 그 기관이 광산 발견에 바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속적인 로비 덕분에 정부의 일시적인 자금 지원을 얻어내어 지질조사국이 설립될 수 있었지만, 정부의 상설 기관으로 정착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결론

사람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은 사회적 필요를 먹고 산다. 사회적으로 그 쓸모를 인정받는 활동은 발전하고 그렇지 못하는 활동은 쇠퇴하기 마련이다. 과학의 경우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나 그에 들어가는 비용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과학자들은 사회에 과학이 지닌 가치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가만히 앉아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 17세기 이래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의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17세기의 과학자들이 왕이나 귀족에게 자신의 필요성을 설파하여 개인적인 후원을 받았다면, 현대의 과학자들은 정부나 산업체, 또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과학을 파는 데 성공함으로써 과거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제도화된 일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현재의 수많은 과학 관련 기관들과 공적 지원 시스템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 필요가 상당히 안정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판단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원자의 구조나 시공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처럼 전혀 실용적으로 보이지 않는 연구조차도 핵폭탄이라는 엄청난 무기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지극히 순수한 연구도 언젠가는 매우 실용적인 성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미국 정부는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물리학을 비롯한 순수 과학 연구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기대는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최근 미국 정부는 입자 물리학 연구에 대한 지원을 축소했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그 연구의 잠재적 이익만 믿고서 국민의 세금을 그들에게 계속 지원하는 일이 언제나 쉽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즉 과학의 제도적 안정성과 재정적 지원은 과학에 대한 사회적 필요 위에 서있다. 따라서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사회에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만약 그 설득에 실패한다면 과학의 제도적 기반 역시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의 과학진흥협회 또는 한국의 과학재단 같은 단체들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과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설득하는 데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1.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2.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3.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4.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5.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6.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7.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8.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9.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10. 과학과 여성 (박민아)

blog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