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PhiLoSci Wiki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작성자 : 정성욱


어떤 사람들은 20세기를 유전학의 세기라고 부른다. 유전학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탄생했고, 2001년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면서 절정에 올랐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전학 하면 바로 떠올리는 것이 유전자이다. 실제로 유전학은 20세기 초 유전자 개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유전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그에 따라 유전자에 대한 이해도 점차 높아졌다. 그리고 1953년 마침내 유전자는 DNA라는 물질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이후 사람들은 유전자가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유전자 지도를 만들어서 생명의 비밀을 완전히 밝혀내겠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그렇다면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된 오늘날 우리는 생명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이제 사람들은 유전자 지도만으로는 생명의 비밀을 알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사람들이 유전자에 그렇게 큰 기대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고, 그 기대가 실패로 끝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21세기 유전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이제부터 유전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볼 것이다.

멘델은 유전학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레고르 멘델

멘델은 ‘유전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멘델은 유전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멘델의 관심은 오직 ‘잡종을 만드는 것’에 있었다. 그는 1865년에 『식물의 잡종화에 관한 실험들』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밝혀내려고 한 것은 ‘유전 법칙’이 아니라 ‘잡종이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는가’였다. 이 문제는 유전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하는 진화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멘델은 ‘잡종으로는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는 당시에 유행했던 다윈의 진화론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쉬웠다. 게다가 그 논문이 유전에 관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는 사람은 멘델을 포함해서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멘델의 논문이 당시에 주목을 받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멘델의 논문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00년이었다. 휘호 더프리스와 칼 코렌스라는 식물학자가 거의 동시에 멘델의 논문에 유전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멘델조차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멘델의 재발견’이라고 부른다. 멘델의 재발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유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부모의 몸에서 나온 액체들이 서로 화학적으로 혼합되어 자손을 만들어 낸다는 <혼합 유전설>을 믿고 있었다. 그 액체는 화학반응을 하는 혼합물이지 안정된 개개 유전물질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프리스와 코렌스는 형질이 독립된 단위로 존재하며 그 단위 형질들이 안정적으로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유전을 부모에서 자식으로 단위 형질들이 전달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을 <단위 형질의 유전>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생각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른바 유전자 개념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단위 형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멘델의 논문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더프리스와 코렌스는 멘델의 논문에서 ‘잡종 실험’이 아닌 ‘유전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전 유전학의 탄생

유전자라는 용어는 1909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덴마크의 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이다. 그는 유전자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형질과 유전형질을 구분함으로써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멘델의 법칙’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1905년 유전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영국의 유전학자 베이트슨은 멘델의 유전법칙이 새로운 유전학의 기초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도 많은 생물학자들은 멘델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위 형질의 유전>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헌트 모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유전자가 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임을 증명함으로써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분과를 정립한 이들은 미국의 초파리 유전학자들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인물은 초파리 유전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토마스 모건이다. 본래 멘델의 유전이론에 반대했던 그는, 1913년 초파리의 눈에 우연히 나타난 돌연변이가 멘델의 법칙에 따라 유전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 열렬한 멘델주의자가 되었다. 게다가 모건은 이런 돌연변이가 염색체와 연관 있음을 확인했으며, 나아가 염색체 위에 유전자 지도를 그리는데도 성공함으로써 염색체설을 확립했다. 모건은 그 업적으로 1933년에 유전학자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

모건이 염색체설을 확립하여 멘델주의자가 된 그 해에, 미국의 옥수수 유전학자인 이스트와 에머슨은 멘델 법칙이 양적형질의 유전을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양적형질이란 크기에 관련된 형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독립된 단위로 유전된다고 보기 어려웠다. 예컨대 아버지의 키가 160cm라고 자녀의 키도 160cm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멘델 법칙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스트와 에머슨은 양적형질에 여러 종류의 유전자가 관계된다고 가정할 경우, 그것의 유전이 멘델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했고, 이는 멘델 법칙이 널리 수용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이로써 멘델의 논문이 재발견된 지 10여년 만에 유전자는 염색체 위에 놓인 물리적 실체이자 멘델 법칙을 따르는 기본 유전 단위라고 인식되었다.

새롭게 정립된 유전자 개념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유전학이 독립된 분과로 확립되었다. 이 유전학을 생물학사에서는 1950년대에 생겨난 분자유전학과 구분하여 고전 유전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전 유전학은 곧 발생학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고전 유전학자들은 주로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어떻게 안정하게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달의 문제에만 집중했던 나머지 전달된 유전자가 어떻게 개체로 발생하는가의 문제를 전혀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리학적 유전학: 프랑스와 독일의 또 다른 유전학

미국에서 초파리와 옥수수 유전학자들에 의해 고전 유전학이 확립되던 20세기 초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다른 성격의 유전학이 형성되고 있었다. 발생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프랑스와 독일의 생물학자들은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독립된 기본 단위로 존재하며 그것이 모두 염색체 위에 놓여 있다는 모건의 염색체설을 선뜻 수용할 수가 없었다. 개체 내에서 유전물질이 복잡한 발생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입장에서는 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하는 염색체설이 매력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의 프랑스와 독일의 유전학을 고전 유전학과 구분하여 <생리학적 유전학>이라고 부른다.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 활동한 유대계 독일인 유전학자 골드슈미트의 사례는 고전 유전학과 생리 유전학에서 유전자 개념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잘 보여준다.

리처드 골드슈미트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이었던 골드슈미트는 1930년대 이후,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미국으로 망명한 유전학자였다. 독일의 유전학자답게, 그의 주된 관심은 발생과정에서 유전자의 역할이었다. 골드슈미트는 1938년에 그의 유전학 이론을 담은 『생리학적 유전학』을 출판했다. 책의 서두에서 그는 유전학을 유전이 일어나는 기작을 밝히는 ‘정상 유전학’과 발생의 문제를 다루는 ‘동적 유전학’으로 구분했다. 물론 골드슈미트의 주된 관심은 후자에 있었다.

이 책에서 골드슈미트는 유전자를 일종의 화학적 촉매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유전자는 매우 활동적인 물질이며 적은 양으로도 효력을 발휘한다. 또한 유전자는 많은 경우에 회복 가능한 변화를 겪을 수 있고 변이가 일어난 유전자도 정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으로 유전된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골드슈미트는 염색체를 독립된 개개 유전자의 집합으로 본 모건학파의 염색체설을 부정하고 염색체의 <연속체 모델>을 제안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염색체는 구조적·기능적으로 통합된 단위이며, 유전자의 모든 변이는 유전자 구조가 재배열되어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특정 형질이 특정 유전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단위 유전’ 개념은 무의미하게 되며, 염색체는 생리활성을 조절하는 물질로 이해된다. 골드슈미트가 제안한 생리학적 유전학은, 고전 유전학과 달리, 유전학을 생리학 및 발생학과 통합시키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생리학적 유전학은 미국에서 잘 수용되지 않았다. 미국의 유전학자들 중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유전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DNA 이중나선구조의 발견과 분자유전학의 탄생

1930년대 이후, 고전 유전학은 생리학적 유전학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당시 물리학계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었다. 1930년대에 양자역학이 정립된 이후, 유럽의 많은 물리학도들은 관심의 방향을 생물학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끈 것은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닐스 보어와 슈뢰딩거였다. 그들은 물리학자들이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어야 할 분야는 바로 생물학이라고 역설했다. 당시 물리학계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이들의 언급은 이제 막 물리학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 물리학도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많은 이들을 생물학으로 이끌었다. 생물학 분야에 뛰어든 젊은 물리학도들은 생명 현상을 탐구하는 데 물리화학적 관점과 연구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고자 했다. 그들의 주요 연구목표는 생체고분자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들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생체고분자는 ‘생물학의 원자’라고 알려진 유전자였다. 이들은 X선 결정법, 초원심분리기 등의 기구를 이용해서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생물학계 내에서도 유전자가 무엇이냐 하는 논쟁이 진행되며 변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당시의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가 염색체의 일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염색체를 구성하는 핵산(DNA)과 단백질 중 어느 것이 유전자인지를 알지 못했다. 유전자가 핵산이냐 단백질이냐 하는 논쟁은 1940년대 내내 유전학자들을 괴롭혔다. 1950년대에 유전자가 핵산임이 분명히 밝혀지기 전까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단백질일 것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다. 유전자가 생명체의 복잡한 형질을 모두 표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핵산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단백질이 유전자의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전자가 단백질이 아닌 핵산임이 밝힌 것은 1951년 허시와 체이스의 방사성 동위원소 실험이지만, 그 전에 유전자가 핵산임을 보여주는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록펠러 연구소의 세균학자였던 에이버리는 1944년에 맥레드, 맥카티와 함께 형질전환의 원인이 되는 물질이 단백질이 아니라 핵산임을 밝힌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에이버리의 주장은 록펠러 연구소 내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록펠러 연구소의 생화학자들은 효소가 곧 단백질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단백질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었기 때문에 유전자가 단백질이 아니라 핵산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

비록 에이버리의 연구가 받아들여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의 연구는 핵산의 구조를 밝히는 데 간접적으로나마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연구에 감명을 받은 오스트리아의 생화학자 샤가프가 핵산연구에 뛰어들어 핵산 구조를 밝히는 데 기초가 된 중요한 발견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미세물질 분류․정제 기술을 핵산 연구에 적용하여, 핵산의 염기인 퓨린(티아민과 사이토신)과 피리미딘(아데닌과 구아닌)의 비가 1:1임을 밝혀내었고, 아데닌과 티아민 그리고 사이토신과 구아닌의 비가 1:1임도 밝혀내었다. 샤가프의 비라고 알려진 이 비는 핵산의 구조가 이중나선임을 암시하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샤가프 자신은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의 발견이 빛을 발한 것은 그것이 왓슨과 크릭에게 알려진 이후였다.

DNA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한 왓슨과 크릭은 슈뢰딩거의『생명이란 무엇인가?』에 큰 감명을 받고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인 방법과 개념을 이용해서 탐구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다. 왓슨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인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유전자가 구조와 작동방식을 연구하던 생물학자였고 크릭은 생물학이 아닌 물리학을 전공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허시와 체이스에 의해서 유전자가 핵산임이 밝혀진 1951년, 캐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우연히 만났다. 당시까지 밝혀진 여러 연구들을 종합하여 핵산의 입체구조를 규명해보자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핵산의 X선 구조결정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정보와 샤가프의 비를 이용하여, 1953년에 결국 핵산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해 내었다. 이들의 연구는 그 해 『네이처』에 발표되어 생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제 바야흐로 분자유전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 업적으로 그들은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상을 받았다.

왓슨과 크릭이 DNA의 물리 구조를 밝힌 이후, 분자유전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DNA가 복제되는 기작과 DNA에서 단백질이 합성되는 기작이 발견되면서, 이제 유전자는 곧 DNA를 의미하게 되었다. 나아가 유전학자들은 유전자가 DNA 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DNA 염기 배열은 일종의 유전정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생명체의 발생은 유전자에 담긴 유전암호가 해독되어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유전자 개념은 생명체에 대한 모든 정보가 유전자 안에 암호화되어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런 생각은 생물학계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유전자의 암호만 푼다면 생명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실패와 유전학의 미래

인간게놈프로젝트 포스터

이런 믿음이 극대화되어 표출된 것이 바로 ‘인간게놈프로젝트’이다. 1980년대 중반에 왓슨을 비롯한 몇몇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23개 염색체의 DNA 염기 서열을 결정하는 방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완성될 경우 인체의 모든 생물학적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제안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결국 미국 정부는 이 제안을 적극 수용했다. 1980년대 말 미국 정부의 주도하에 미 국립보건원(NIH)과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이 참여한 인간게놈 사업기구(HUGO)가 출범했고, 1990년부터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90년대의 기술 발전에 의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2000년에 인간 유전체 전체 서열 초안이 발표되었고, 이듬해 2월에 분석이 완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비밀이 담긴 암호를 모두 해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성공은 이 프로젝트가 유전학의 완성이 아니라 앞으로 유전학이 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 또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인간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모두 밝혀졌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전학자들을 가장 당황시켰던 것은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의해 밝혀진 유전자의 개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 프로젝트에 의해 밝혀진 인간 유전자의 개수는 약 3만개 인데, 이 정도로는 인체의 모든 생물학적 형질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제 유전학자들은 유전체가 구성되어 있는 방법과 그것이 발생 과정에서 드러내는 행동 패턴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아닌 유전체의 구조와 기능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전체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켰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제 더 이상 특정 형질을 지시하는 고정된 단위체로서의 유전자 개념은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밝혀진 유전자의 수가 매우 적어서 유전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발생과정에 따라서 형질의 발현양상이 매우 복잡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 유전암호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오늘날의 유전자 개념은 앞에서 언급했던 골드슈미트의 생리학적 유전학이 제안한 유전자 개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좀더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제 유전학은, 골드슈미트가 바랐던 것처럼, 그동안 분리되어 있던 발생학, 생리학 등과 통합되는 과정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

이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20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전자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은 그것에 암호화되어 있는 정보를 알아내면 생명체의 모든 비밀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실패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것이 생명체의 모든 정보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알파벳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생명체는 그 알파벳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다양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막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와 같다.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무수히 다양한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에는 20세기와는 완전히 새로운 유전학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읽을거리

과학의 역사와 문화」, 『과학교양』 (과학중점고등학교 교과서). 한국과학창의재단, 2010.

  1. 17세기 과학혁명의 지적, 사회적 의미 (김봉국)
  2. 18세기 라부아지에와 화학연구의 새로운 방법 (오승현)
  3. 19세기 물리학의 탄생 (정동욱)
  4. 19세기 다윈주의 진화론의 등장과 그 사회적 함의 (정세권)
  5. 20세기 유전학: 멘델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 (정성욱)
  6. 과학의 제도적 기반 (정동욱)
  7. 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 (조수남)
  8. 산업혁명을 통해 본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서민우)
  9. 과학과 제국주의 (정세권)
  10. 과학과 여성 (박민아)